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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3:50:28

만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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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滿月臺
파일:attachment/man13131231.jpg
왼쪽 하단부터 창합문, 회경문, 정전 회경전 상상 복원 모형
파일:/image/001/2011/12/02/PYH2009010205180001300_P2.jpg
2008년 만월대 3차 남북공동발굴조사 사진(2008.11.04~12.23일)
파일:만월대 전경.png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복원한 만월대 황성 및 궁성의 전경[1]
1. 개요2. 상세
2.1. 궁의 명칭
3. 역사
3.1. 태조 즉위 이전3.2. 태조 즉위 이후3.3. 공민왕 이후3.4. 구한말 ~ 대한민국
4. 특징5. 주요 건축
5.1. 나성(羅城)
5.1.1. 외성 - 내성
5.2. 황성(皇城)5.3. 궁성(宮城)
5.3.1. 정전으로 가는 길5.3.2. 정전(正殿)5.3.3. 제2정전으로 가는 길5.3.4. 제2정전(正殿)5.3.5. 금원5.3.6. 기타 전각, 궁문
5.3.6.1. 전(殿)5.3.6.2. 각(閣)5.3.6.3. 궁문
6. 만월대 관련 문학 작품
6.1. 시조6.2. 가요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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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있었던 고려 왕조의 법궁(法宮) 터를 부르는 말이다. 원래 태조 왕건이 태어난 집터 자리로 고려 태조 2년(919)에 창건되었다. 만월대는 원래 궁궐 터를 의미하지만 현대에는 궁궐 자체를 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북한의 국보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상세

2.1. 궁의 명칭

터에 있었던 고려 법궁의 원래 이름은 없었다. 전 왕조 고구려안학궁이나 장안성, 백제위례성이나 웅진성, 사비성, 신라월성, 발해홀한성, 그리고 이후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과 같은 격이지만, 고려 왕조는 삼국이나 발해, 조선처럼 법궁에 이름을 따로 붙이지 않았고 그저 궁궐(宮闕), 본궁(本宮), 대내(大內), 정궁(正宮), 본궐(本闕)이라고 불렀다.

고려시대 초중기까지 단지 본궐로만 불렸지만 이자겸의 난으로 본궐이 불타고 인종은 별궁 연경궁에 거주한다. 그러면서 연경궁은 점차 본궐을 흡수해 본궐이 연경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연경궁 문서 참조.

고려사고려사절요에는 만월대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고려 멸망 이후 조선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인데, 음력 정월 대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재 북한개성 송악동(舊 행정구역상 만월동 71-8번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의 국보 122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도 등재됐다.

일반적으로 만월대라 할 때에는 궁성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 가운데서도 관료들이 조회를 하던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의 주 건축군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여간 고려 왕궁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3. 역사

3.1. 태조 즉위 이전

태조 잠저 역사
위치 연도 주인 비고
부소산(扶蘇山) 좌곡(左谷) 미상 호경&호경의 아내 호경의 자택. 왕건 선조 중 최초 송악 거주.
평나군(平那郡) 평나산(平那山) 미상 여신&호경 산신이 된 호경이 살던 곳.
부소군(扶蘇郡) 오관산(五冠山) 마하갑(摩訶岬) 미상 강충&구치의

보육&덕주
호경의 아들 강충이 아내 구치의와 살던 곳. 보육이 다시 이곳에 돌아옴.
송악군(松嶽郡) 미상 강충&구치의

작제건&저민의
부소산 남쪽으로 이주. 마하갑은 강충의 영지로 전환. 편년통록은 강충이 '송악군'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함. 후 작제건 부부가 경영함.
평나산(平那山) 북갑(北岬) 미상 보육 강충의 둘째 아들 국조 보육이 살던 곳. 이후 다시 마하갑으로 돌아감.
영안성(永安城)[2] 미상 작제건&저민의 작제건이 저민의와 결혼하고 돌아오고 거주한 곳. 영안성에 살면서 선조 강충의 송악군을 경영.
속리산(俗離山) 장갑사(長岬寺) 미상 작제건 용녀 저민의가 사라진 뒤, 작제건이 죽을 때까지 거주한 절.
송악군(松嶽郡) 옛 저택 미상 용건&몽부인 세조 왕륭이 살던 곳. 정황상 강충의 집으로 보인다.
송악군(松嶽郡) 새 저택 미상 용건&몽부인

왕건
세조 왕륭이 도선의 말을 듣고 새로 지은 저택. 이 곳에서 태조 왕건이 태어났다. 이 곳이 봉원전 자리였다고 한다.
금성(金城) / 송악(松嶽) 발어참성(勃禦塹城) 896년 왕건 발어참성(勃禦塹城) 건축. 세조 왕륭이 태봉 금성 태수가 된 뒤 왕건이 지음.

이상 기록은 고려사 고려세계가 인용한 편년통록, 편년강목의 기록이다. 위에 있는 기록은 건국 이전 왕건 일가를 신화적으로 각색한 신성화가 지나치게 추가돼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몇몇 부분은 확실히 실제 역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만월대 자리는 왕건의 선조가 살던 자리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엔 송악에 자리 잡은 호경부터 아들 강충, 손자 이제건, 보육, 증손녀 진의, 외고손자 작제건, 외6대손 용건과 외7대손 왕건까지 모두가 송악에서 살았다고 한다.

호경 이후 강충 대부터 지방호족으로서 송악 일대를 지배한 것으로 보이며 의조 작제건이 영안성을 세우고 송악군을 경영했다. 마지막으로 세조 용건이 현 만월대 터에 저택을 세웠다. 태조 왕건이 저택과 세력을 이어받고 발어참성을 세웠다. 초창기에는 송악이 잠깐 태봉의 수도가 됐지만 곧 철원으로 천도한다.

3.2. 태조 즉위 이후

만월대 역사
재위년도 연도 사건 비고
태조 1년 919년 1월 창건 궁성 건축. 정전 천덕전, 나성 발어참성. 현판은 모두 최언위가 씀.
광종 12년 961년 수리 광종이 도감(都監)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있어 큰 공사였을 것으로 추정.
목종 12년 1009년 1월 화재 궐내 기름창고에 불이나 천추전(千秋殿)까지 불 탐.
현종 2년 1011년 1월 완파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
현종 2년 1011년 8월 축성 발어참성 증축, 황성으로 전환.
현종 5년 1014년 1월 재건 및 증축 정전이 회경전으로 변경.
현종 20년 1029년 8월 축성 나성 건설 완료. 21년이 걸린 대공사. 개경의 도성제 완성.
정종 6년 1030년 2월 화재 궁성 정문 승평문의 행랑이 불타 남쪽에 있던 어사대(御史臺)까지 불 탐.
문종 24년 1070년 11월 증축 전쟁에 대비할 군수물자 창고 증축.
인종 4년 1126년 2월 전소 이자겸의 난 당시 척준경이 파괴.
인종 10년 1132년 1월 재건 시작 재건 이전엔 별궁 연덕궁·연경궁·수창궁에 거주.
인종 16년 1138년 5월 재건 완료 본궐 내 전각, 대문 등 이름 대대적 개변.
의종 10년 1156년 10월 증축 본궐 후원 증축.
명종 원년 1171년 10월 전소 멈출 수 있는 화재였으나 정중부, 이의방이 방치. 후원만 건재.
명종 9년 1179년 3월 재건 4월엔 천령전까지 복구.
명종 9년 1179년 5월 재건 중단 각지 반란, 군부 혼란 등으로 인해 공사 중단.
명종 10년 1180년 5월 재건 재시작 9월 대관전 복구, 11월 강안전 복구.
명종 12년 1182년 9월 재건 완료 내전, 목친전 등 다수 전각 복구, 여정궁 복구.
고종 12년 1225년 10월 화재 편전 4채 및 전체 본궐 중 137칸 소실.
고종 19년 1232년 7월 폐쇄 강화도 고려궁지로 천도, 본궐 폐쇄.
고종 23년(?) 1236년(?) 완파(?)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훼손.[3]
원종 11년 1270년 7월 재건 개성 본궐로 환도, 재건 시작.
충선왕 3년 1312년 1월 증축 시작 대대적인 증축.
충선왕 4년 1313년 3월 증축 완료 동사강목 기록. 총 410여 칸. 상왕궁으로 일시 전환.
공민왕 11년 1362년 3월 소실 홍건적의 침공으로 인해 완파, 폐궁.

태조가 궁예를 몰아내고 태봉국 철원성에서 즉위하여 고려를 건국한 후 송악으로 천도해 옛 저택 자리에 궁궐을 지으니 바로 지금의 만월대다. 광종이 '수영궁궐도감(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해 크게 증축했고 현종 때 재건하며 모양을 크게 바꿨다. 인종 때 재건하며 궁궐 건축의 이름들을 싹 바꿨다.

태조 때 지어진 이래로 공민왕 전까지 현종 때 한번, 인종 때 한번, 명종 때 한번, 고종 때 한번, 총 4번 완전히 날아가버린 적 있다. 대개는 자기 대에 제깍제깍 다시 세웠지만, 고종 때만은 강화도로 가느라 방치해 놓고 이후 원종이 다시 세웠다.

원종 대 재건 이후 수리가 잘 안된 듯 하다. 충선왕은 재위 3년 차에 편전 강안전(康安殿)이 낡았다며 투덜거린 기록이 있다. 1년 간 재수리를 거쳐 410여 칸을 가진 궁궐로 만들었고 이 때 신하들이 원의 예절을 따라 축하했다고 한다.

충선왕이 상왕으로 있을 때 잠시 상왕궁(上王宮)으로 바뀌었다. 이때 정궁은 충숙왕이 있던 현덕궁(玄德宮). 실권을 충선왕이 장악했기에 연경궁(본궐)을 충선왕이 차지한 것이다. 충숙왕은 국왕인데도 밀려난 것. 그래서 사실상 계속 법궁의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크게 무너지는 일 없이 유지됐지만 공민왕 때 홍건적이 들어와 다시 파괴되었고 이번에는 두 번 다시 재건되지 않았다.이후에는 고려가 멸망했기에

3.3. 공민왕 이후

조선의 건국 이후에는 고려의 종묘를 철거한다. 종묘를 파괴한 대신 태조 6년(1397년)에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지역에 묘를 세우고, 정종 1년(1399년)에는 고려 태조와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7왕을 제사 지내게 했다. '숭의전'이라는 이름인데 고려 왕조의 충신과 공신 열다섯 명을 제사 지내게 하고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선조 이후로는 고려 왕족의 후예가 참봉을 맡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은 또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탄압하는 등 고려 왕실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던 전적이 많기야 하지만 딱히 만월대까지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은 아니다.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별궁인 연경궁과 함게 또 다시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한 채 나라가 망하면서 폐허가 된 상태 그대로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이미 부서진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이 부술지 말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설령 남아있더라 하더라도 조선 초기 개경이 2년넘게 수도였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경복궁 중건 이전까지는 조선왕실의 임시궁전으로 쓰였을 수도 있다. 이후엔 방치되거나 개성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의 감영이 됐을수도 있지만.

공민왕 11년(1362년), 만월대가 전소된 후 공민왕은 임시로 흥왕사를 임시궁(시어궁 時御宮)으로 사용했고, 만월대는 광장 구정(毬庭)과 편전 강안전(康安殿)만 복구하였다. 폐허가 된 개경을 떠나 수원(水原)(고려사 공민왕 세가 재위 11년(1362년) 6월), 평양(平壤)(고려사 공민왕 세가 재위 16년(1367년) 4월)에 새로운 궁 터를 알아보게 했지만, 결국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법궁이었던 수창궁이 사용되었다.수창궁은 우왕, 창왕, 공양왕 그리고 조선 태조, 정종, 태종이 즉위한 궁궐이기도 하다.

조선 중종이 방문하여 무과시험을 치기도 했다. 중종,중종2 또한 조선 숙종이나 영조가 개경을 방문할때 경덕궁과 만월대를 들러서 둘러보고 과거시험을 쳤으며 전 왕조의 흥망성쇠를 느끼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숙종,숙종2 영조,영조2

3.4. 구한말 ~ 대한민국

1872년에 고종이 방문하여 과거시험을 치렀다. # 넓은 장소니 만큼 옛부터 과거 시험장으로 많이 쓰인 모양이다.

파일:순종 만월대 순행.jpg
경술국치가 있기 1년 전인 1909년, 당시 대한제국의 내정은 통감부가 좌지우지하고 있었는데 대한제국순종 황제가 일제가 기획한 서북 지역 순행에 나서면서 일제의 의도로 만월대에 들렸다고 한다. 물론 순종이 허허벌판이 된 망국 고려의 궁궐 만월대를 방문하게 한 것 자체가 무언의 협박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순종 본인이 당시에 몰랐을 수는 있으나 일제가 그런 의도로 기획한 이상 그게 여러 루트로 순종의 귀에 들어가서 결국 알게 됐을 것이다.

38선에서 1~2km 아래에있어 대한민국 통치시절에 미군정이 군사시설 건립을 위해 만월대를 훼손하였으나 당시 개성시민들의 항의(반발)에 이를 멈추었다. # 정전회담으로 북한에 넘어간 이후 이 사건을 두고 반미/반한 사상교육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

2008년 이후로 남북이 공동으로 만월대 터 발굴을 추진해오고 있다. 꽤나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발굴 도중 수많은 유물과 궁 터를 발견하였고, 2013년에는 만월대를 포함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직까지도 몇 차례 연달아 발굴을 추진 중이나, 북한 측의 소극적인 협조로 발굴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고 한다. 개성공단이나 개성 시내 관광 등이 활발하게 추진되던 시절엔 발굴 조사 역시 활발히 진행되기도 했으나, 천안함 피격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전 등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관계가 냉각된 이후에는 접근이 어려워졌다.

이후 수해로 인해 만월대가 피해를 입어 복구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남측의 복구 인원도 개성공단에 체재하면서 복구 공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 2018 평창 동계올림픽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기간에 평창 주경기장 인근의 상지대관령고등학교에서 남북한 사학자 공동 학술/발굴 관련 모임인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주최로 만월대 공동발굴 특별 전시전이 열렸다. #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간 대화가 재개되면서 2018년 9월 27일부터 만월대 공동발굴 재개의 움직임이 잠시 보였으나, #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을 전후해 김여정이 "모든 관계의 단절"을 선언하며 남북관계 경색이 다시 시작되고, 코로나-19 감염증까지 유행하며 공동발굴 작업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4. 특징

고려 본궐과 조선 본궐 경복궁의 다른 점은 고려 본궐이 바깥의 황성(皇城)과 내부의 궁성(宮城)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개경은 개경 전체를 둘러싼 거대한 나성(외성 and 내성) > 군주의 필수 행동 범위만 둘러싼 황성 > 황제가 거주하는 궁궐에 해당하는 궁성 순서로 성곽이 구분됐다.

본궐을 둘러싼 궁성 성벽 자리는 현재 동·서·북쪽 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은 석비례와 진흙을 엇바꾸어 여러 겹으로 다져 쌓았다. 만월대 유적은 고려 시기의 우수한 건축 예술이 남김없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궁전 건물의 설계에서 일정한 비례관계가 적용된 것, 건물 배치에서 지형 조건을 잘 고려한 것 등은 고려 시기의 건축술이 높은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고려에 사신으로 온 북송의 신하 서긍이 고려도경에 남긴 말을 보자. 이 책엔 고려 궁궐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는데 재밌는 구절이 있다.
무릇 바라보이는 궁전 이름과, 치미(鴟尾, 용마루의 막새기와) 장식을 거리낌없이 했으니, 여기서 (송나라) 성상의 계책이 크고 원대하여 작은 일로 오랑캐를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하고 순종하는 큰 의리만 아름답게 여김을 알았다.

쉽게 말해 오랑캐 따위가 건방지게 궁궐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만들었는데도 우리 황제가 워낙 덕이 커서 충성만 보고 넘어가 준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내부 묘사를 좀 더 보면 대부분 전각이 크고 웅장하다, 섬돌은 붉게 칠하고 난간은 동화(구리로 만든 꽃)로 장식하여 화려하다 등등 대체로 건물이 웅장하며 화려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만월대를 비롯한 고려의 궁궐들은 평지에 조성한 조선의 왕궁과 달리 높이 쌓은 축대가 인상적이다. 산을 훼손하지 않고 궁궐을 지으라는 풍수지리적 조언에 따라 지형을 그대로 두고 언덕 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궁궐을 지었기 때문이며, 언덕의 높이가 더해지는 덕분에 실제보다 더 웅장하게 보이고, 계단식으로 건물을 배치해 위엄 있게 보이려 하는 특색을 지닌다. 이는 강화도 고려궁지, 삼별초의 항쟁 거점인 진도군 용장산성의 임시 궁궐 터에서도 드러나는 방식이다.

5. 주요 건축


본궐의 규모는 동서 445m, 남북 150m 정도의 대지에 위치한 규모로 중앙의 회경전에서 동벽까지 135m, 서벽까지 230m, 승평문까지 250m 정도이며, 궁궐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넓지 않은 공간에 많은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고,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만월대에선 동물 머리 모양의 돌 조각과 많은 기와 조각, 도기, 철제 장식, 철창, 철침 등이 수습되었다. 구릉지에 위치한 지형적 특성상 높은 축대를 쌓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건물들의 배치 또한 자유롭게 구성했다.

5.1. 나성(羅城)

고려 현종 원문대왕이 쌓은 개경 전체를 둘러싼 방어 성. 당시 개경의 범위를 구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옛 고구려의 동비홀(冬比忽), 부소갑(扶蘇岬) 두 지역을 합쳤으며 나성 안에 시장을 설치, 방위에 따라 5부를 두어 주소를 구분했다. 이 나성이 백제 왕조의 부여 나성, 조선 왕조의 한양도성 격이다.

고려사 왕경 개성부 지리지에 따르면 현종이 총 30만 4천 4백 명을 동원해 쌓았다고 한다. 고려사 왕가도 열전에 따르면 강감찬이 나성을 지을 것을 주청했고 왕가도는 사람들에게 양산을 들고 줄을 맞춰 서게해 대략적 모습을 잡았다고 한다.

총 1만 3천 칸이며 둘레는 2만 9천 7백 걸음이다. 4개 대문과 8개 중문, 13개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나성의 서대문. 뜻은 '크며 의롭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성문 앞에 또 성문이 있는 옹성이며 앞뒤 성문 다 이중루로 누각이 있어 아주 크고 화려했다고 한다. 옹성의 양 옆에도 작은 문이 있어 임금은 성문 중앙의 큰 문으로 다니고 신하들은 성문 옆의 작은 문으로 다녔다고 한다. 무신정변의 주동자이자 집권자였던 이의방이 이 문 밖에서 암살당했다. 오정문(午正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이 한양도성돈의문 격이다.
나성의 남대문. 회빈문 안에 국자감(國學監)이 있었다. 회빈문은 금속 장식이 많았던 듯 한데 이 문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많다.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실각한 우왕이 개경을 떠날 때 이 문으로 나갔다.
나성 동남쪽에 있던 소문. 이름을 보면 물 흐름 제어용 문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목왕 때 이 문 밖에 있던 우물에 큰 뱀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 뱀을 때려서 내쫓자 뱀이 불을 뿜었으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5.1.1. 외성 - 내성

나성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구분 되며 외성 부분엔 고관대작, 백성이 살았다. 여러 사찰이 있었으며 방위에 따라 오부 구역이 정해졌다. 내성 부분엔 6부 정부기관이 설치 되어있었으며 근처엔 환구단사직이 설치 되어있었다. 여러 사찰이 있었다.

나성 중 내성은 고려왕조 극후기 우왕 대에 나성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추가로 지었으며 공양왕 대에 완공했다. 즉 내성은 고려 역사상 거의 쓰이지 않은 셈.

5.2. 황성(皇城)

고려 태조가 태봉 국왕 궁예의 신하였을 시절에 쌓은 발어참성(勃禦塹城)(간혹 송악성이라고도 함)이 원조이다. 후손인 현종이 나성을 축조하며 동시에 발어참성을 황성으로 재축조하였다. 황성은 당나라식 도성제상 천자(天子)만이 설치할 수 있는 성곽으로 조선 왕조의 경복궁엔 없는 만월대의 특징이다. 개경뿐만 아니라 제 2수도인 서경에도 황성을 축조했다. 고구려 옛 수도를 존중한 셈.

황성은 나성 안의 궁성을 둘러싸는 방어 성이며 내부에 중서문하성, 상서성인 2성 정부 기관이 있고 고려도경에 따르면 부여궁(扶餘宮), 계림궁(鷄林宮),[4] 적경궁(積慶宮) 등 만월대 내 별궁이 있었다.

고려사 왕경 개성부 지리지에 따르면 황성은 2천 6백 칸이었고 총 20개의 대, 중,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황성의 동대문이자 정문(正門). 정전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대문. 문의 이름은 '널리 교화하는 문.' 이중루이며 윗층엔 누각이 있다. 특이하게 남대문이 아닌 동대문이 황성의 정문이다.[5] 이는 고려가 최대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성과 궁을 쌓았기 때문이다. 인종 대 본궐을 묘사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나성 서문 선의문과 비슷했으나 옹성이 없고 더 화려했다고 한다. 황성 동쪽 안에 큰 연못 동지(東池)가 있었다. 조선조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과는 한자가 다르며 문의 용도, 위치도 다르다. 경복궁 광화문은 궁성의 남문(정문)이지만 만월대 광화문은 황성의 동문(정문)이다.
황성의 남대문. 이름은 도교의 영향을 받은 남쪽의 신령 주작의 이름을 따 왔다. 동아시아 도성제 통념 상 남문이 정문으로 취급되니 주작문이 황성의 정문이란 주장이 많다. 하지만 정작 고려가 황성 대문 중 가장 중요시한 문은 동문 광화문이라 반박 주장도 많다. 덕종 재위 3년째인 1034년에 주작문의 벽에 벼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황성 및 궁성의 북대문이다. 황성과 궁성의 북쪽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다. 주작문과 대칭되는 도교 속 신령 현무의 이름을 썼다.

5.3. 궁성(宮城)

황성 안의 고려 본궐을 둘러싸는 방어 성이며 이 궁성 내부가 국왕이 거주하는 궁궐이다. 보통 이 궁성 부분을 만월대라고 한다. 내부에 본궐의 여러 전각, 태자의 관저인 좌우춘궁이 있다.
궁성의 동대문이다. 이자겸의 난척준경이 불태운 문이다. 인종 16년(1138년) 5월 여경문(麗景門)으로 개칭했다. 이 문이 조선경복궁건춘문 격이다.
궁성의 서대문이다. 숙종의 붕어가 이 문에서 선포됐다. 인종 16년(1138년) 5월 향성문(向成門)으로 개칭했다. 명종이 최충헌 형제에게 폐위당한 뒤, 혼자서 이 문을 통해 궁성을 나갔다. 이 문이 조선조 경복궁의 영추문 격이다.
궁성 및 황성의 북대문이다. 황성과 궁성의 북쪽 성벽이 연결되어 있다. 주작문과 대칭되는 도교 속 신령의 이름을 썼다. 이 문이 조선조 경복궁의 신무문 격이다.

5.3.1. 정전으로 가는 길

파일:신봉문터.jpg
▲ 오늘날의 신봉문 터. 바로 앞에 보이는 다리가 만월교.
궁성의 남대문이자 정문(正門). 정전으로 가기 위한 두 번째 대문. 이중루, 즉 층이 두개로 되어 있는 문이다. 문의 뜻은 "바름으로 올라가는 문." 이 승평문이 바로 경복궁광화문 격이다. 인종 대 본궐을 묘사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문의 제도가 매우 크고 웅장했다고 한다. 문의 모서리에 동(銅)으로 된 장식을 매달았다고 한다. 승평문의 안쪽 양 옆에는 동락정(同樂亭) 이라 이름 붙힌 정자 2개가 있었다. 3칸짜리 정자였는데 후 최이가 6칸으로 증축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승평, 신봉, 창합, 회경전문은 3문 형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월대 터에 남아있는 유적을 살펴 보면 위 네 대문은 모두 천자국 제도인 5칸으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는 문은 일단 황제국처럼 5칸으로 세운 뒤, 사신 방문시에는 3문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5칸 3문의 절충안은 조선 왕조의 창덕궁 돈화문에서도 보이며 경복궁 광화문의 경우도 광화문 자체는 3문이나 양 옆에 전각이 딸린 수문을 2개 두어 절충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승평문을 지나면 나오는 큰 광장. 고려 ~ 조선조까지 유행했던 스포츠 격구(擊毬)를 하기 위한 광장이다.
구정 북쪽에 있는 다리로 배산임수에 따른 궁 앞에 흐르는 강 광명천(光明川)을 지나기 위한 금교(禁橋)다.
광명천을 지나면 나오는 대문. 정전으로 가기 위한 세 번째 대문. 역시 이중루이며 윗층은 신봉루(神鳳樓)라고 하여 모든 대문 중 가장 화려했다고 추정하는데, 신봉문은 위치한 쪽에서 남향으로 넓은 구정을 바라 볼 수 있으니 매우 웅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역대 왕들이 등극시 관례로 신봉루에서 사면령을 선포하거나 군대를 사열했다. 고려사 예지엔 신봉문에서 사면령을 내릴 때의 순서와 예법을 항목을 따로 내서 기록했다. 또한 팔관회 때의 의례도 기록했는데 고려 왕은 자황포(금색 단령)를 입고 신봉루에 앉아 송나라 사신, 여진 사신, 탐라 사신의 조하(朝賀)를 받고 그들이 외치는 '성궁만복(聖躬萬福)'(거룩한 몸에 만복이 오길 바란다는 뜻)을 듣는다고 되어있다.

신봉문의 뜻은 '거룩한 봉황.' 나중에 의봉문(儀鳳門)으로 바뀐다. 의봉문의 뜻은 '규범의 봉황.' 위봉문, 영봉문과 봉 자 돌림 문이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신봉문의 간판은 붉은 색 바탕에 금색 글자를 넣었다고 한다. 이자겸의 난현화사 주지 의장과 승병들이 신봉문을 쓰러뜨리려 했다.
신봉문을 오르면 나오는 대문. 정전으로 가기 위한 네 번째 대문. 궁궐이 산 위에 있기 때문에 이 문부터 본격적으로 계단이 늘어난다.창합(閶闔)은 고대 중국 별자리 전설 속에 등장하는 하늘의 남문 이름이다. 창합문 양 옆으로 작은 문 두 개가 있는데 이름은 모두 승천문(承天門)이다.
정전의 대문. 정전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대문. 딱히 다른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문의 뜻은 그냥 전각의 문. 앞에 네 개의 돌계단이 있었으며 5칸으로 지어졌고 3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종 대 본궐을 묘사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긴 창 24자루를 늘여놨으며 근위병이 매우 많이 서 있어 중압감을 느꼈다 한다.

5.3.2. 정전(正殿)

"“과인(寡人)에게 과오(過)가 있다면 부디 즉시 벌(罰)을 내려주시오! 만민(萬民)에게 과오(過)가 있다면 과인(寡人)이 마땅히 모두 대신하여 받을 것이오!

그러하오니 부디 두터운 은택을 내리어 근원(元元)을 구해주시오!"
- 고려사 현종 세가, 재위 15년인 1024년 5월 중. 회경전에서 비를 내려달라 하늘에 외치며.

당시 봄부터 가뭄이 계속되자 백성들은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현종은 아침에 일어나 그 제삿소리를 듣자 아침 식사를 물리고 깨끗히 씻은 뒤, 회경전 앞에서 하늘을 향해 크게 외쳤다고 한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결국 큰비가 내렸다 한다.

회경전(會慶殿)

본궐의 가운데엔 정사를 처리하는 정전(正殿)인 회경전이 세워져 있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그 위치는 궁성의 정남문인 승평문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 신봉문과 창합문을 지나면 회경전에 도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별도의 전문이 있으며 규모가 매우 장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상례는 감히 거행할 수 없으며, 오직 사신이 이르렀을 때 마당 아래에서 조서를 받들거나 표문을 봉한다는 말이 있고 나머지 예는 별전에서 별도로 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커다란 도끼(부월) 12자루를 늘어 놓았다. 동서로 단칠한 섬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전면에 4개의 계단을 만들었고 좌우에는 동행각과 서행각이 있었다.

현종 대에 추가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예종이 재위 1년(1106년) 7월 이 곳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와 태조(太祖)를 같이 제사 지내며 비를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인종 4년(1126년) 이자겸척준경의 난 때 소실되었다가 얼마 후에 다시 복구되었고, 인종 16년(1138년) 5월 전각 및 궁문의 명칭을 개정할 때 선경전(宣慶殿)으로 개칭되었다.

회경(會慶)의 뜻은 만남, 조회가 경사스러운 전각, 선경(宣慶)은 넓고, 크고 경사스러운 전각이란 뜻이다.

동문선 108권에 '선경전 상량문'이 남아있다. 명종 대에 궁궐을 다시 지을 때 쓴 듯하다. 상량문에서 태조를 '성조(聖祖)', 명종의 위엄을 '황제의 위엄'이라 하고, '성주(聖主)'로 칭했다. 개경을 '상도(上都)'라 하고 고려를 '삼토일가(三土一家)'( 고구려, 신라, 백제가 고려로 모였다는 뜻)라 칭했다. 상량문을 보면 명종 대 선경전은 한나라 장안궁의 제도를 본떠 만든 듯하다.

회경전이 중층건물이었는지 단층건물이었는지는 현재 시점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편이다. 다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한 국가의 법궁의 정전이었던 만큼 중층건물이었다는 설이 조금 더 지배적이긴 하다.

5.3.3. 제2정전으로 가는 길

궁성의 문은 매우 많았는데 그 중 제2정전으로 가는 특별한 문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황성 정문 광화문, 궁성 정문 승평문을 지나 회경전의 동북쪽으로 가면 천덕전의 유적이 보인다.
의봉문 앞에 설치된 또 하나의 광장. 고려 ~ 조선조까지 유행했던 스포츠 격구(擊毬)를 하기 위한 광장이다. 후백제가 건재하던 시절, 태조는 백제에 투항한 여섯 장군의 처가족을 이 곳에서 조롱했다.
궁성 내의 문. 제2정전으로 가기 위한 세번째 문. 신봉문처럼 문 앞에 거대한 광장이 있다. 역시 신봉문처럼 이중루이며 윗층을 위봉루라 했다. 누각이 매우 화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조가 이 곳에서 고려사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었고 광종이 한국사 처음으로 과거를 열었다. 성종, 목종, 숙종이 이 곳에서 대사면령을 내렸다. 신봉문, 영봉문과 봉 자 돌림 문이다.
궁성 내의 문. 제2정전으로 가기 위한 네번째 문. 이름 뜻은 '덕이 창성하는 문.' 나중에 인종이 흥례문(興禮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복궁 흥례문과는 이름만 같고 문의 용도는 조금 다르다. 경복궁 흥례문은 정전 근정전의 중문이지만 만월대 흥례문은 제 2정전의 넷째 문으로 중요도가 조금 떨어지는 문이다. 문종 인효왕 재위 28년째인 1022년에 이 문을 지키던 호위대가 재수 없게 벼락을 맞은 일이 있다고 한다.
궁성 내의 문. 제2정전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문. 제2정전의 대문이며 다른 이름은 없었다. 고려도경에서 천덕전에 따로 전문이 있다며 언급된다.

5.3.4. 제2정전(正殿)

"짐(朕)신라(新羅)는 피를 나눈 동맹(同盟)이다. 그리하여 양국(兩國)이 영원히 서로 잘 지내며 각자 사직(社稷)을 지키고자 했다.

이제 나왕(羅王)이 굳이 칭신(稱臣)을 원하고, 경등(卿等)도 그것이 옳다고 한다. (朕)은 마음이 아프지만 중의(衆意)가 원하니 받아들이겠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8년인 935년 12월 중. 천덕전에서 고려 - 신라 합방이 선포되다.

이미 신라는 크게 무너져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예법상 신라의 제후인 왕건이 신라를 나왕이라 부르며 자신의 아래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경순왕은 천덕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올린다.

천덕전(天德殿)

회경전 서북쪽에는 천덕전(天德殿)이 있다. 천덕전은 태조 왕건 대부터 있었으며 천자를 자칭하며 지은 전각이다. 상국으로 대하던 국가의 조서를 받고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며 매우 커 제 2의 정전 기능을 하였다. 고려 초기엔 제 1정전이었던 듯 하며 시간이 지나 회경전에 밀린듯 하다.

천덕전의 정문이자 남문은 당연히 천덕문(天德門)이다. 동문은 인덕문(仁德門), 서문은 의창문(義昌門)이다.

태조는 천덕전에서 신라국왕 김부의 입조(入朝)를 공식으로 수락해 신라를 합병했다. 또한 이 곳에서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김부와 결혼시켰다. 이민 온 발해 대신 은계종이 태조에게 세 번 절한 곳도 이 곳이다.

정종은 이 전각에서 동여진에게 조공을 받았다. 고려사에 한번은 정종이 천덕전에 가자 비가 내리고 사람이 벼락에 맞아 정종이 불길해 했다는 기사가 있다. 숙종이 여기서 업무를 보고 과거를 열고 초제를 지냈으며 명종, 신종이 이 곳에서 즉위했다.

김양경이란 신하가 희종의 명을 받고 대관전 옥좌 뒤 병풍에 글을 썼다고 하는데 동문선 19권에 그 시가 남아있다. 이 때 대관전 옥좌 병풍엔 유교 경전 무일편의 무일도(無逸圖)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조선 왕조는 일월오봉도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썼다.

반역자 강조가 천덕전 어탑(御榻)(옥좌, 왕좌의 다른 말) 밑에 걸터 앉은 적 있다.

태조 이후 성종이 뜻이 통하는 건덕전(乾德殿)으로 바뀌었다. 비록 건덕전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뜻이 통하기 때문에 천덕전과 혼용되었다. 인종 16년, 1138년 5월에 대관전(大觀殿)으로 바꾸었다.

태조가 지은 천덕(天德)이 단순히 '해동천자의 덕'을 찬양하는 의미라면 인종이 개칭한 대관(大觀)은 '넓은 관점, 포용'을 의미하는 선정의 의지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태조의 천덕전을 전례로 삼은 건지 고려의 기타 별궁의 정전은 대부분 천 자 돌림이다. 본궐 흡수 전 연경궁도 정전이 천복전(天福殿)(나중에 인종이 천성전(天成殿)으로 개칭)이었고 예종이 지은 서경 용덕궁의 정전은 건원전(乾元殿), 인종이 지은 서경 대화궁은 건룡전(乾龍殿), 의종 대 별궁수덕궁도 정전이 천령전(天寧殿), 구제궁의 정전으로 추측되는 전각의 이름도 천흥전(天興殿)이었다. 남경 별궁엔 정전은 아니지만 천수전(天授殿)이란 天 자 돌림 전각이 있었다.

조선조에 제작된 동국여지승람은 건덕전을 정전이라고 했지만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회경전을 정전이라 하였고, 고려사 역시 희종 2년 4월조의 기사 중에서도 회경전을 정전이라고 하였으므로 회경전을 정전으로 보는 것이 대세. 하지만 그 기능에서는 회경전과 건덕전이 서로 비슷하였던 듯하다.

고려 본궐의 궁문 배치도를 보면 헷갈릴만하다.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 혹 주작문을 지나고 궁성의 정문인 승평문을 제외하면 천덕전도 도달하기까지 금천(禁川)의 광명천과 만월교를 지나 구정(毬庭)을 거쳐 세 개의 궁문을 지나야하는 전형적인 천자식 궁궐의 정전 구조를 하고 있다.

천덕전이 회경전에게 정전의 자리를 내줬지만 여전히 권위 높은 전각이었음을 드러내는 면은 고려사 예지에 직간접적으로 나온다.

예지 환구단 조엔 환구단에서 제사 지내는 순서가 기록돼있는데 국왕은 자황포, 즉 금색 곤룡포를 입고 대관전[6] 대관문[7] 흥례문[8] 의봉문[9] 승평문[10] 순으로 궁궐을 나온다고 돼있다. 국왕이 직접 안가고 왕족[11]을 시켜 대신 환구단에 보낼 때도 '대관전'에서 왕족에게 축판을 내준다고 돼있다.

이 순서는 고려 임금이 태묘에 갈 때도 똑같이 한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엔 대관전에서 연회를 열 때의 순서도 따로 항목을 내서 기록했다. 신봉문(의봉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대사면령을 선포한 뒤, 역시 임금은 천덕전(대관전)으로 온다. 팔관회를 열 땐 고려 임금은 자황포를 입고 선인전(만월대의 편전 중 하나) → 신봉문 → 신봉루 → 천덕문 → 천덕전 순으로 도착한다고 돼있다.

5.3.5. 금원

한국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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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지 않는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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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동북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창덕궁 후원과 같은 궁궐에 포함된 정원이다. 딱히 정해진 명칭이 없었던 듯 하며 보통 후원(後園), 금원(禁園, 禁苑), 어원(御園) 등으로 불렸다. 호수가 있었으며 덕분에 화재가 나도 후원까지 닥치는 경우가 적었다. 서경 장락궁에도 금원이 있다는 기록이 있고 의종 대 별궁인 수덕궁의 금원은 의종이 매우 사치스럽게 만들어 조선시대에 엄청나게 욕 먹었다. 금원엔 진귀한 꽃, 동물, 광석을 진열해 두었다고 한다.
산호(山呼)는 군주에게 환호하는 행위를 말하는 단어다. 예를 들어 '산호하여 만세라 외쳤다.' 산호정은 고려 금원의 대표적 정자다. 고려사에 정말 자주 나온다. 이자겸의 난 당시 본궐이 완전히 불탈 때 산호정만이 호수 근처에 있어 화마를 피해가 인종이 살아남았다. 게다가 당시 궁궐 내 책을 관리하던 김수자란 신하가 국사, 우리 역사를 기록한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산호정으로 와 땅 속에 모두 묻어 우리 역사 기록이 살아남았다. 명종 대 또 화재가 났을 때 명종도 산호정으로 피신해 펑펑 울었다.
고려 금원의 정자 중 하나. 산호정과 같이 오랜 시간동안 만월대에 서 있었다. 문종은 태자와 신하들에게 상춘정의 꽃에 관한 시, 상화시(賞花詩)를 짓게 시켰다.
의종이 금원을 증축하며 지은 각으로 금색과 벽(碧)색으로 휘황찬란하게 꾸몄다고 한다.
약을 보관한 전각. 의종이 지었다.
괴석, 명화(名花)를 주변에 꾸민 정자다. 의종이 지었다.
의종이 연못을 파고 지은 정자. 고려사엔 청기와를 올렸다고 기록돼있다.
후원에 있던 작은 누각. 언젠가 현종이 직접 사루 주변에 모란을 심은 적이 있다. 그리하여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까지 모두가 영화시(詠花詩)를 지어 이를 찬양했고, 예종은 모란시(牧丹詩)를 지어 찬양했다고 한다.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7년 4월조.)

5.3.6. 기타 전각, 궁문

고려는 상시 설치된 전각 뿐만 아니라 태후, 왕후, 공주 등 왕족들에게 관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궁궐 내 전각과 관부을 새로 설치해주는 경우도 많았다.

유명한 예로 헌애왕후'천추전(千秋殿)'. 천추전은 만월대 내 별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 사숙태후의 '중화전(中和殿) 영녕부(永寧府)', 명의태후의 '천화전(天和殿) 숭명부(崇明府)', 노국대장공주의 '숙옹부(肅雍府)' 등등.
5.3.6.1. 전(殿)
고려도경의 묘사에 따르면 장화전, 원덕전, 장경전이 나란히 서 있었고 회랑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마당엔 벽돌이 깔려 있었다.
장화전의 북쪽에 있으며 궁궐이 산 위에 있는 만큼 높은 곳에 위치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비상시에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전각.
신의 덕성이라는 의미를 담은 신덕전은 고려사에 중요한 곳으로 등장한다. 이 곳에서 고려 태조가 붕어했기 때문이다. 또한 태조의 아들 혜종이 거처하기도 했다.
사랑스러움, 애틋함을 늘어놓는 전각이란 이름을 가진 연총전은 고려사에 단 한 번 등장한다. 이 곳에서 현종이 즉위했기 때문이다.
거듭 빛나는 전각이란 불교적 이름을 가진 중광전은 너무 거대한 회경전, 천덕전을 피해 좀 작은, 일을 설렁설렁 할 수 있는 편전으로 가고 싶어 하는 임금들이 자주 행차한 전각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려사에 자주 등장한다. 최소 혜종 대부터 있던 전각으로 헌종, 정종, 숙종이 여기서 즉위했고 혜종, 현종, 문종이 여기서 붕어했다.

고려사 윤관 열전에 중광전 내부 묘사가 나온다. 중광전 내에는 불상이 있었다. 조선의 경복궁불교와 관련된 유적이 극히 적은데 이는 조선왕조가 불교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반면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는 궁궐 내에 사찰을 짓고 편전에도 불상을 넣을 정도로 불교와 가까웠다.

고려 숙종은 중광전 불상 안에 자신의 글을 넣어 두었다고 한다. 고려사에선 이 글을 성고유지(聖考遺旨), 성고밀지(聖考密旨)라 불렀다. 이후 인종이 건강하고 편안한 전각이란 뜻인 강안전(康安殿)으로 이름을 바꾼다. 고려사 예지에 기록된 연등회에 관한 순서와 의례엔 고려국왕은 치황의, 금색 옷을 입은채로 중광전 → 향복문 → 태정문 → 승평문 순으로 나간다고 돼있다. 홍건적의 난으로 인해 본궐이 완전히 부숴진 뒤, 유일하게 복구된 전각이 바로 이 중광전으로, 만월대 최후의 승자인 셈이다.
크게, 베푸는 정치를 하는 전각이란 이름을 가진 선정전은 중광전과 비슷하게 편전으로써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고려사에 자주 등장. 이 곳에서 현종이 군대를 사열했으며 예종의 시신을 임시로 안치했다. 이후 인종이 훈인전(薰仁殿)으로 이름을 고친다. 뜻은 '향기롭고 인자한 전각.' 선정문(宣政門)이란 정문이 있던 걸로 보이는데, 이자의가 이 문 앞에서 처형되었다.
고려 중기에 빈전(殯殿)으로 크게 활용된 전각이다. 빈전은 임금의 재궁(梓宮)(임금의 관)을 왕릉에 안치하기 전 임시로 보관하는 전각을 의미한다.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숙종의 재궁을 이 곳에 안치했다.
천덕전 뒤에 위치한 인종 대 왕후, 비들이 거처하던 전각. 크기는 작았지만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뜻은 만년을 살 전각.
태조가 창건한 전각 중 하나로 천덕전과 회경전 사이에 위치했으며 천덕전 쪽 가까이 위치했다.타국의 조공품, 사신 등이 바친 물품을 받아들이던 전각. 고려도경의 설명에 따르면 만령전보다는 덜 화려하지만 크기는 훨씬 컸다고 한다. 이 곳에서 신종이 희종에게 양위하였다. 뜻은 길게 살 전각. 후 천령전(千齡殿)으로 바꾸었다. 뜻은 천년을 살 전각. 만령전과 음운을 맞추려고 한 걸지도? 후 봉원전(奉元殿)으로 바꾸었다. 뜻은 거대함, 근원을 받드는 전각.
고려 전기 임금의 자문 기관으로 본래 이름은 자신전이었다. 자신(紫宸)은 북두칠성 중 천자, 군주를 상징하는 별이다. 다른 말론 자미(紫微), 자금(紫禁) 등이 있다. 그러다가 현종 12년 1월에 '큰 덕의 전각'이라는 경덕전(景德殿)으로 바뀌고, 7월에는 '빼어남을 늘어놓은 전각'이라는 뜻의 연영전(延英殿)으로 개칭되었다.

많은 서적을 비치, 정사를 논하였는데 문관 가운데 학문이 뛰어난 자들이 연영전 소속 직위를 맡았으며 임금이 이곳에서 과거에 붙은 진사들을 시험 보기도 했던 기관이다. 당연히 고려사에 자주 등장한다. 고려도경에도 등장하는데 도경에 따르면 장령전 북쪽에 있으며 전각의 제도가 천덕전과 비슷하다고 하니 고려가 얼마나 이 전각과 그 기능에 관심을 두었는지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큰 기관인데 이 전각은 나중에 인종 공효대왕이 재위 14년(1136년)에 이름을 '현자들이 모이는 전각, 집현전'으로 고쳤다. 집현전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다.
하늘이 시작되는 전각이란 뜻을 가진 건시전은 고려사에선 붕어한 고려 군주의 시신을 임시 안치한 전각으로 가끔 등장한다. 인종의 빈전이었으며 그의 아들인 신종은 유언으로 이 곳에서 자신의 빈전을 차리는 것을 거부했다. 후 응건전(膺乾殿)으로 개칭한다. 뜻은 하늘의 가슴(에 위치한) 전각.
예종 대 등장하는 전각으로 여진정벌과 관련된 회의를 할 때 자주 쓰였다. 인종이 저상전(儲祥殿)으로 바꾸었다. 저상문(儲祥門)이 있었다.
목종 대에 등장하는 전각. 모든 궁전이 폐쇄된 상태에서 목종이 불교식 기도제를 올린 곳이다.
목종 대 등장하는 전각으로 이 전각의 치미에 벼락이 떨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인종이 바꾼 연경궁 정전의 명칭도 천성전이다.
명종 대 등장하는 전각으로 조위총의 난이 벌어지자 이 곳에서 3일 동안 불교 기도식을 올렸다. 또한 명종은 이 곳에서 연회를 열기도 했다.
현종의 딸이 이 전각에 봉해져 천수전주(天壽殿主)가 된 적이 있다.
자신전 북쪽에 있던 연회를 위한 전각. 이후 인종이 집희전(集禧殿)(복이 모이는 전각)으로 바꾼다.
회경전의 북쪽에 위치한 고려 왕실의 보물을 보관한 전각. 고려도경엔 크기는 회경전보다 작았다 하며 근위대가 많았다고 한다.
정종 대 등장하는 전각으로 정종이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 후원의 산호정과 명칭이 같다.
경령전은 전(殿)으로 구분됐지만 업무를 보거나 잠을 자는 평범한 전각이 아니라 고려왕조만의 사당이었다. 경령전은 중국 송나라의 '경령궁(景靈宮)'과 명칭이 비슷해 영향을 받은 걸로 보이나 고려왕조의 독창성이 강하다.총 다섯 실(室)로 구성되어 있고 태조실(太祖室)을 기준으로 이실, 삼실, 사실, 오실(五室)이 있다. 태조실엔 태조와 신혜왕후의 초상화를, 이실부턴 오실까진 현 재위 중인 국왕의 사대조 내외의 초상화를 안치한다. 경령전 제사 의례는 고려사 예지 경령전조에 기록되어 있다. 태묘가 모든 국왕을 제사 지냈다면 경령전은 재위 중인 국왕의 직계만 모셨다는 차이점이 있다.
5.3.6.2. 각(閣)
예성강 근처에 있어 임천이란 이름이 붙었다. 수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였던 전각으로 이자겸의 난 때 불탄 이후 수창궁 옆에 있는 시중 소태보의 집을 서적소로 삼아 유신들에게 문서를 다시 수집하게 했다. 이후 보문각 문첩소로 기능을 옮겼다는 설이 있다.
청연각 옆에 있던 전각. 청연각은 국왕이 함께 공부하는 곳이며 신하들이 부담스러워하자 보문각을 따로 만들어 신하들만 모여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중국 왕조의 국서를 모아둔 전각이다.
청연각은 국왕이 신하들과 공부하기 위해 만든 전각이다.
5.3.6.3. 궁문
고려 임금들이 좋아한 편전 중광전의 대문이다. 향복문은 영희문, 중희문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이유는 명종(고려) 항목 참조.
고려 임금이 먹고 자는 내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후 인종이 운룡문(雲龍門)으로 바꾼다. 명종이 천우문(天祐門)으로 바꾼다.
고려 만월대 궁문 중 하나. 인종이 자신문(紫宸門)으로 바꾼다.
본궐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태자 관저인 수춘궁으로 가는 문이다. 어떻게 보면 태자궁의 정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종이 수춘궁을 여정궁으로 바꾸며 문도 체통문으로 바꾼다.
궁성 3문인 창합문 왼쪽 오른쪽에 위치한 두 소문이다. 좌우승천문(左右承天門)이라고도 한다. 인종 16년(1138년) 5월 통가문(通嘉門)으로 개칭했다.
좌우조천문(左右朝天門)이라고도 한다. 제후, 신하가 천자를 보러 갈 때 조천(朝天), 하늘을 받들러 간다고 한다. 즉 고려 군주를 조천하는 문. 현종이 조종문(朝宗門)으로 바꾼다. 뜻은 '종실(宗室)을 받들다.'
현화사비에 등장하는 문. 성종이 자신의 후계자 개령군 왕송에게 이 문 앞에서 헌정왕후의 장례식을 치르게 했다고 한다.
천덕전의 문.
천덕전의 문. 신봉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사면령을 내린 뒤, 고려의 각 지방, 각 국에서 축하의 의미로 사신이 와 조공을 바친다. 이 때 사신과 조공품은 인덕문을 통과하여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6. 만월대 관련 문학 작품

6.1. 시조

[ruby(古寺蕭然傍御溝, ruby=고 사 소 연 방 어 구)]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ruby(夕陽喬木使人愁, ruby=석 양 교 목 사 인 수)] 저녁 해가 교목에 비치어 서럽구나.
[ruby(煙霞冷落殘僧夢, ruby=연 하 냉 락 잔 승 몽)] 연기 같은 놀(태평세월)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ruby(歲月觴嶸破塔頭, ruby=세 월 쟁 영 파 탑 두)]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ruby(黃鳳羽歸飛鳥雀, ruby=황 봉 우 귀 비 조 작)] 황봉은 어디가고 참새만 날아들고
[ruby(杜鵑花發牧羊牛, ruby=두 견 화 발 목 양 우)]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ruby(神松憶得繁華日, ruby=신 송 억 득 번 화 일)] 송악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ruby(豈意如今春似秋, ruby=기 의 여 금 춘 사 추)]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황진이, 만월대 회고(滿月臺懷古)

오백 년 都邑地를 匹馬로 돌아드니,
/ 오백년 도읍지를 말 한 필 타며 돌아보니
山川은 依舊하되 人傑은 간 데 없다.
/ 옛 산천은 그대로 이지만 영웅호걸은 간 곳이 없구나.
어즈버, 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아아! 태평성대를 누리던 지난날의 하룻밤은 꿈과 같구나.
길재, 조선 중기 시조집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

興亡이 有數하니 滿月臺도 秋草ㅣ로다.
/ 흥망이 하늘의 뜻에 달렸으니 만월대도 가을 잡초만 무성하다.
五百年 王業이 牧笛에 부쳐시니
/ 오백년 왕조가 목동의 피리소리에 깃들었으니
夕陽에 지나는 客이 눈물계워 하노라.
/ 해질녘에 지나는 나그네가 눈물겨워 하노라.
원천석, 조선 중기 시조집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

6.2. 가요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아 가엾다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이애리수, 황성옛터

7. 기타



[1] 3성 6부 관사가 있는 쪽 문이 황성 정문 광화문이다. 길을 따라 궁성 정문 승평문이 있고 그뒤로 넓은 구정, 만월교(금천교), 신봉문, 창합문, 회경문을 지나 회경정전이 나온다.[2] 호경과 결혼한 구치의가 영안촌(永安村) 출신이다. 또한 충숙왕연덕궁을 영안궁(永安宮)으로 바꾸었다.[3] 사서엔 언제 본궐이 무너졌는지 나와있지 않다. 허나 1235년까지 수창궁의 기록이 나오는 점, 1236년에 몽골이 경기도, 경상도까지 들어간걸 보면 이 해에 개성도 무너졌을 가능성이 크다.[4] 본 문서 상단의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부여, 계림(신라) 등의 옛 왕조명을 별궁의 호칭으로 삼은 것은 고려인의 역사 계승 인식을 보여 준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 해당 포스팅 말미에선 장안궁(長安宮)(또는 상안궁(常安宮))의 존재를 들어 은근히 유사역사학스러운 떡밥이 언급되지만, 고구려의 장안성, 즉 평양을 이르는 말로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5] 광화문이 황성 성문 중 특별 취급되긴 했으나 동문이라서 명목상 황성의 정문은 남문인 주작문이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6] 천덕전의 바뀐 이름.[7] 천덕문의 바뀐 이름.[8] 천덕전의 네번째 문인 창덕문의 바뀐 이름.[9] 회경전의 세번째 문인 신봉문의 바뀐 이름.[10] 궁성의 정문.[11] 명예직인 삼사태위급 왕족을 시킨다.[12] 그러나 고려거란전쟁때 부터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본격적으로 KBS에서 용인세트장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였다[13]왕성의 정서문(正西門)인데 서쪽은 금방(金方)이며 오상(五常)에서 의(義)에 해당하기 때문에 선의문이라고 이름 지었다. 정문은 옹성(瓮城)을 두어 이중으로 구성했고 위에는 누각을 꾸몄다. 선의문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따로 편문을 두어 군사가 이를 지켰다. 중앙의 문은 항상 열어 놓지 않고 오직 왕과 사신만이 출입할 수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편문을 통해 출입한다. 벽란정(碧瀾亭)에서부터 서교(西郊)에 이르러 바로 이 문을 지나야 관(館)에 들어갈 수 있다. 왕성의 문들 중에서 이 문이 가장 크고 화려하다. 이 문은 송나라 사신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