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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04:08:32

의종 대 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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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목록
3.1. 새로 지은 별궁
3.1.1. 수덕궁3.1.2. 중흥궐3.1.3. 그 외
3.2. 사택에서 승격된 궁궐3.3. 새로 지은 관저
3.3.1. 만춘정3.3.2. 그 외

1. 개요

고려 의종이 재위 하던 동안 창건했던 별궁들을 모아놓은 문서.

2. 설명

제 17대 인종 공효대왕의 장남이자 태자인 18대 의종 장효왕은 상당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24년이나 재위했지만 정치는 거의 안하고 늘 놀러다녔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보면 기록 태반이 계속 어딜 가고 어딜 오고 세금 걷고 잔치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왕도정치를 표방한 조선 왕조가 만든 동국통감은 의종이 어딜 갈 때마다 비판하는 논평을 일일이 달아놨다.

그는 본궐 내에 화려한 많은 전각을 지었으며 새로운 궁궐을 엄청나게 많이 지었다. 또한 신하의 집을 압수해 자신의 궁으로 승격 시켰으며 세금을 징수해 왕실의 사유 재산으로 모으기 위해 세운 궁전도 있다.

별궁이 너무 많다보니 사서엔 아예 궁이라고도 안하고 '~댁(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임금들이 별궁이나 별장을 지어 놀러 다녔지만, 의종은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는게 문제였다. 결국 의종 사후 정권을 잡은 무신들이 별궁을 나누어 가지기도 했다.

3. 목록

3.1. 새로 지은 별궁

3.1.1. 수덕궁

壽德宮

수 자 돌림 궁궐로 본궐 동쪽에 지었다. 의종이 지은 최초의 별궁이다. 이 궁을 만든다고 개경의 시민이 아주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최소 고종 대까지 건재했던 걸로 보인다. 고종 대의 무신인 김희제 열전에 따르면 김희제의 사위가 수덕궁의 문이 늦게 닫혔다며 관리자를 활로 쏘아 죽인 사건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주요 건축으론:
수덕궁의 정전(正殿).
의종의 태자 홍(弘)이 편액을 썼다. 원 수덕궁 자리에 있던 민가 50여 채를 날리고 지었으며 그 주변에 진귀한 꽃, 과일, 신기한 물건을 잔뜩 늘어 놓았다고 한다.
대평정 남쪽에 있는 호수에 건설한 정자.
대평정 북쪽의 정자. 청기와로 지붕을 쌓았다.
대평정 남쪽의 정자. 향이 나는 귀한 나무로 지붕을 쌓았다.
옥석(玉石)으로 만든 누대(樓臺). 이 주위에 산을 만들고 강을 만들어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임금의 화원이란 뜻으로 대평정의 화원을 이르는 듯 하다.

3.1.2. 중흥궐

重興闕

고려 백주[1] 토산 반월강(白州 兎山 半月岡), 현 황해남도 배천군 토산면에 지은 궁궐.

유원도란 신하가 반월강, 반월 언덕이 고려 중흥(重興)의 땅이며 이곳에 궁을 지으면 7년 안에 북로(北虜)[2]를 병탄할 수 있다고 해 조사를 해보고 궁을 세웠다. 궁궐의 이름은 풍수설에서 따온 것일 수도 있고 중흥사라는 고려 태조서경에 세운 9층탑이 있는 사찰에서 따온 것일 수도 있다. 의종이 마침 중흥사를 증축했음으로. 이 궁을 세울 때 백주의 주민들을 하도 독촉해서 주민들이 힘들어 했다고 한다.

풍수지리 술자들이 이 곳의 기운은 도선이 언급한 안 좋은 기운이 서려 있다며 불안해 했다.

고려사 안서대도호부 해주 지리지에 따르면 의종은 중흥궐을 지으면서 백주를 개흥부(開興府)로 승격시켰다가 다시 원상복귀시켰다고 한다.
중흥궐의 정전(正殿).

3.1.3. 그 외

의종이 곽정동에 세운 별궁. 곽정동 택(霍井洞 宅)이라고도 한다. 의종 사후 이고가 차지.
점을 치는 승려 영의가 지어 바친 별궁.
점을 치는 승려 영의가 지어 바친 별궁. 민가를 내쫓고 지었다. 이 곳에서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뒀다. 관북 택(館北 宅), 관북 별궁(館北 別宮)이라고도 한다. 금과 옥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의종 사후 정중부가 차지.
이 곳에서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뒀다. 봉향리 궁이라고도 한다.
이 곳에서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뒀다. 천동 택(泉洞 宅)이라고도 한다. 의종 사후 이의방이 차지.

3.2. 사택에서 승격된 궁궐

원 김거공(金巨公)이란 신하의 사택.
원 김정순(金正純)이란 신하의 사택. 강종의 서녀의 택호가 해당 궁호와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의종 사후 그녀가 가져간 듯 하다.
원 유필[3]이란 신하의 사택.
왕충(王冲)이란 신하의 사택.
원 정함[4]이란 환관의 사택. 풍수지리를 보는 술사가 그 곳은 짐승이 주인을 무는 기운의 땅이라 군주는 그 곳에 있으면 안된다고 했지만 의종은 무시했다. 정함의 사택은 약 200칸에 높은 건축이 있었고 본궐의 채색과 비슷했다고 한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시란 신하의 사택.

3.3. 새로 지은 관저

의종이 만든 궁보단 낮은 격의 관저.

3.3.1. 만춘정

萬春亭

원래 있던 정자를 3년 동안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었다. 만춘정의 남쪽엔 강이 흐르고 대나무, 소나무, 꽃이 화려하게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남경 별궁의 정전이다.

3.3.2. 그 외

임금이(어) 움직일 때(순) 쓰는 장소(소). 궁궐보단 격이 낮다. 원 문공원의 사택. 의종이 비단 400근을 주고 샀다.
의종이 양제동에 세운 관저.
의종이 세운 관저. 나중에 더 크고 화려하게 지으며 인지재(仁智齋)로 이름을 바꾼다. 간관들이 제발 허물라고 부탁하자 의종은 자신이 꿈을 꿨는데 이런 시가 나왔다며 상서로운 조화이니 없앨 수 없다고 하자 결국 간관들도 포기한다.
탕탕(蕩蕩)한 춘광(春光)이 좋다,
흠흠(欣欣)한 물의(物意)가 새롭다.
인지덕(仁知德)을 수련하려 하니,
만년춘(萬年春)을 얻었구나!

꿈 속에서 진길지(眞吉地)가 있다 들으니,
부소산(扶蘇山) 아래 별신선(別神仙)이로구나.
금조(今朝)의 새로움을 맞이하고 경사스러움을 받으니,
만복(萬福)이 오고 서기(瑞氣)가 이어 오는구나!
현화사(玄化寺) 근처에 지었다고 한다.
청녕재와 중미정은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중미정은 정(丁) 자 모양의 정자인데 산 위에 있던 청녕재의 남쪽에 위치했다. 인공적으로 연못을 만들어 갈대를 채워 넣으니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의종은 아동을 시켜 배 위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 역할을 시켜 분위기를 크게 돋구우며 잔치를 즐겼다고 한다.

1148년, 의종 21년에 이 정자를 지었는데 슬픈 일화가 고려사에 기록돼있다. 정자를 짓던 노동자들은 자기 새참을 직접 챙겨 와야 했는데 한 노동자는 너무 가난해 새참을 챙기지도 못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얻어 먹었다. 어느날 그 노동자의 아내가 갑자기 먹을거리를 잔뜩 챙겨 와 남편에게 주고 다른 사람들도 데려와 같이 먹으라 하였다. 자기 집 형편을 아는 노동자는 의아하고 당황해 이 먹을거리는 대체 뭔 돈으로 사온건지, 몸을 판건지 훔쳐온건지 물었다.

아내는 이 말을 듣고 "내 외모가 못생겼으니 누가 나와 잘 것이며 성격도 겁이 많으니 감히 훔쳐 올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머리카락을 팔아 사왔다."라고 하며 두건을 벗고 머리를 보여줬다. 아내의 모습을 본 노동자는 슬픔이 북받쳐 울먹거리며 음식을 삼키지 못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자들도 모두 같이 슬퍼했다고 한다.


[1] 발해 태자 대광현이 하사받은 봉지가 백주다.[2] 북쪽 오랑캐. 아마 여진을 말하는 듯?[3] 庾弼. 유금필의 후손으로 예종의 서녀와 혼인한 배향공신이다.[4] 鄭諴. 고려시대 최악의 환관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