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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충(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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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여담


王冲
(1078 ~ 1159)

1. 개요

고려의 문신. 개주 사람인데, 고려 직계 왕족은 아니고 태조의 사촌동생 영해공 왕만세의 후손이다. 자는 천은(天隱), 시호는 강렬공(剛烈公)이다.

2. 생애

왕충은 어린 시절 개주의 지방관으로 부임한 시중 김공(김부식?)으로부터 학문의 길로 나아갈 것을 권유받는다. 왕충은 과거 시험을 준비해 좌주 유재(劉載)의 문하에서 성균시에 급제하고, 예종 원년(1106) 임의박인량의 문하에서 28세의 나이에 동진사로 급제한다. 관례에 따라 양온승동정에 임명되고 예종 7년(1112) 진양사록 겸 장서기로 발령돼 임기를 마친다.

예종 13년(1118) 제안부녹사에 임명되고 이후 대원부전첨 국자박사를 거쳐 권찰원에 임명되는데, 그 뒤에는 보성군의 지방관으로 발령된다. 당시 보성군에 호랑이 무리가 경내로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해치고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는데 왕충이 함정을 설치해 호랑이를 모두 잡는다. 같은 해에 진양(晉陽, 경상남도 진주시)의 통판(通判)으로 부임한다. 진양 인근 거제군 경계에서 해적 8백여명이 소란을 피웠는데, 인종 6년(1128) 안찰사 이중, 선무사 정응문의 설득에도 무력 시위가 계속된다. 왕충은 해적들의 본거지로 홀로 말을 달려 가서는 수일간 설득한 끝에 해적들을 해산시키는데 성공한다.

거제군에서 공을 세운 왕충은 인종에게 불려가 예부원외랑에 임명된다. 이후 비서승, 공부낭중, 비서소감, 병부시랑, 추밀원좌승선, 이부시랑, 지주사, 추밀원부사(1139), 이부상서(1142) 등을 역임한다. 인종 20년(1142) 추밀원사로서 지공거가 돼 형부시랑 권적과 함께 진사시를 주관해 고주(高儔) 등 37명을 선발한다. 그중 수년 뒤 한림원에 출입하거나 정치를 잘 해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20여명에 이른다.

인종 22년(1144) 추밀원사 판삼사사, 인종 23년(1145) 상서좌복야[1]에 임명된다. 왕충은 인종에게 표장을 올리며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여러 번 청하는데, 인종이 왕충을 설득한 끝에 왕충은 은퇴할 마음을 접는다. 의종이 즉위한 1146년 11월에도 은퇴를 청하는데 궤장을 받고 평장사 관직을 받아 계속 사무를 보게 된다. 그래도 왕충은 계속해서 은퇴를 청했고 표를 올린 것이 다섯 번에 이른 뒤에야 윤허를 받고 물러난다. 수년 뒤 의종으로부터 금자광록대부 검교태사 수태위 문하시중에 임명된다.

왕충은 가벼운 병으로 의종 13년(1159) 3월 초2일 82세의 나이로 정침(正寢)[2]에서 죽는다. 시호를 받고 승천부(承天府) 양성동(羊城洞) 서쪽 기슭에서 장사된다.

3. 가족관계

왕건의 사촌동생 왕만세의 7세손이다. 외조부는 개주병정 김준양(金俊陽).

주리 김대경의 딸인 전처 김씨와 사이에서 1남 1녀를 뒀는데 셋 모두 일찍 죽는다. 태복경 최도(崔渡)의 딸과 재혼해 아들 둘을 둔다.

4. 여담

의종 11년(1157) 왕이 여러 대신들의 집을 궁궐로 만들었는데 왕충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충의 집은 안창궁(安昌宮)이라고 불린다.


[1] 왕충묘지명에 따르면 수사도 참지정사.[2] 壽終正寢; 천수를 다하고 집에서 죽었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