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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 충숙왕의 장인 | 명덕태후의 부친 남양부원군(永恩府院君) 광정공(匡定公) 홍규 洪奎 | |
출생 | 1246년 |
사망 | 1316년(충숙왕 3) (향년 71세) |
국적 | 고려 |
봉호 | 남양부원군(永恩府院君) |
시호 | 광정(匡定) |
본관 | 남양 홍씨 |
자 | 미루(彌樓) |
이름 | 홍문계(洪文系) → 홍규(洪奎) |
부모 | 부친 홍진(洪縉) 모친 창원군부인 최씨 - 최황(崔貺)의 딸 |
부인 | 초배 진천 임씨 - 임연의 딸[A] 계배 광산 김씨 - 김연(金練)의 딸 |
자녀 | 1남 5녀 장남 홍융(洪戎) 장녀 아고알(阿高歹)의 부인 차녀 정해(鄭瑎)의 부인 삼녀 순화원비 홍씨[2] 4녀 원충(元忠)의 부인 5녀 공원왕후 홍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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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첨의중찬. 송송례 등과 함께 100년 간 이어진 무신정권을 마무리한 공신.2. 생애
인종 시기 상서좌복야를 역임한 홍관(洪灌)[3]의 5대손. 동지추밀원사 홍진(洪縉)의 아들이다.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권무(權務), 산원(散員), 견룡행수(牽龍行首)를 차례로 거쳤고 원종 때 어사중승이 되었다. 장인어른인 임연 사후 그의 매부인 임유무가 무신정권의 새로운 집권자가 되었을 때 송송례와 함께 자문 역할을 하였다. 1270년 5월 원종의 밀령을 받아 송송례 등과 함께 삼별초를 동원해 권신 임유무의 집에 찾아가 임유무와 그 가족을 주살하였고 이로써 1170년부터 100년 간 이어져 온 무신정권을 마침내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경오정변)[4]
세자 왕심을 호종해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 갔는데, 쿠빌라이의 명으로 고려 1품직에 올랐으며, 원의 좌부승선의 직을 받았다. 귀국해서는 국정의 문란을 한탄하며 사직했다. 1272년 추밀원부사가 되었으나 동년 10월에 다시 사직한다.
이후 17년간 관직에 오르지 않고 집에서 생활하다가 충렬왕과 공주가 양가의 여자를 징발해 원나라에 보낼 때, 자신의 딸이 징발될까 두려워 장녀를 비구니로 만들어 기피하려 한 죄로 바닷가의 섬[5]으로 귀양가게 되었고 결국 홍문계의 장녀는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아고알(阿高歹)의 부인이 되었으며 가문의 재산도 압류됐다. 이 때 중찬 김방경과 사촌형 홍자번 등이 홍문계가 이전에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점을 들어 면죄를 간청하였던 덕분에 재산이 반환되고 풀려났다. 홍문계는 이듬해인 1291년 첨의시랑찬성사 판전리사사의 관직에서 물러났다.
1295년 9월 도첨의중찬의 관직으로 복직했고 이어서 판삼사사 수사도 영경령궁사가 되었다. 12월 김광취(金光就)와 함께 원나라에 하정사로 갔다 왔으며, 이 무렵에 홍규(洪奎)로 개명했다.
1297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수사도(守司徒)·영경령궁사가 더해졌고, 사위인 충선왕이 즉위한 1308년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1310년 9월 수첨의정승·상호군(上護軍)이 더해지고 행한양부윤으로 나갔으며, 12월 지익성군사(知益城郡事)로 옮겼다.
1313년(충숙왕 원년)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으로 고쳐 봉해지고 추성진력안정공신(推誠陳力安定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1316년 향년 71세로 졸했다. 시호는 광정(匡定)이다.
3. 여담
- 홍규의 가계도가 고려의 타 인물들에 비해 비교적으로 자세한 것은 홍규의 묘지명이 1908년 도굴꾼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묘지명은 모두 19행으로, 제1행을 제외한 나머지 행의 윗부분은 모두 결실되어 있는 등 결락된 부분이 많다. 묘지명은 1316년 이제현의 부친인 이진이 작성하였다고 한다.
- 고려 후기의 왕들과 연관(대부분 혈연)이 많은 편인데 우선 사돈은 충렬왕, 충선왕[B]이 있고, 사위는 충선왕[B]과 충숙왕, 외손자는 충혜왕과 공민왕, 외증손자는 충목왕, 충정왕, 우왕이 있으며 외현손자로는 창왕이 있다. 총합 무려 9명의 왕과 관계가 있다.[8]
4. 가족관계
- 현조부: 홍관(洪灌)
- 고조부: 홍지유(洪至柔)
- 증조부: 홍원중(洪源中)
- 조부: 홍사윤(洪斯胤)
- 부친: 홍진(洪縉)
- 외조부: 최황(崔貺)
- 모친: 창원군부인 최씨
- 초배: 진천 임씨[A]
- 계배: 광산 김씨
- 장남: 홍융(洪戎)
- 손자: 홍언박
- 장녀: 아고알(阿高歹)의 부인
- 차녀: 정해(鄭瑎)의 부인
- 삼녀: 순화원비(順和院妃)
- 사위: 충선왕
- 4녀: 원충(元忠)의 부인
- 5녀: 공원왕후 홍씨
- 사위: 충숙왕
[A] 슬하의 자녀가 없었다.[2] 충선왕의 후궁.[3] 숙종 시기부터 일했던 관료로 인종 시기에는 상서좌복야를 역임했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미 노인이 되었는데 인종을 뒤따라서 연덕궁으로 향하다가 척준경의 군대에게 잡혀서 살해당했고(...) 사후 추성보국공신으로 추증되었다.[4] 아마도 경오정변 이후에 광산 김씨와 재혼한 듯하다.[5] 기록에는 해도(海島)로 표기되어있다.[B] 사돈이자 사위이기도 하다.[B] 사돈이자 사위이기도 하다[8] 다시금 나열하자면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대수로 따지자면 25대~33대 국왕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