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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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의 난 李資謙之 亂 | ||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126년 (인종 4년) 2월 25일 ~ 1126년 5월 20일 (음력)[1] ( ~ 1127년 3월 25일)[2] | |
장소 | 고려 개경 만월대 (現 북한 개성시) | |
원인 | 이자겸·척준경에 향한 권력 집중과 그들의 횡포 - 이자겸의 외손자 겸 사위 인종의 권력 강화 시도 - 이자겸의 삼남 이지언의 종과 척준경의 종 사이의 말다툼[3] | |
교전 세력 | <rowcolor=black> 고려 (진압군) 승 | 이자겸파-척준경파[4] (반란군)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인종 (고려 대왕) | 지휘관 이자겸 (조선국공 겸 판이병부사) 척준경 (문하시랑평장사) |
참가자 | 참가자 |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결과 | 진압군의 승리 - 고려 왕실의 이자겸 제거 성공 - 이후 척준경도 탄핵에 따른 유배[53] | |
영향 | 인종의 권력 강화 성공 - 척신 정치의 붕괴 - 서경천도운동의 본격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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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26년(고려 인종 4년) 2월 25일에 인종에 의해 일어난 친위 쿠데타가 발단이 되어 벌어진 내전.2. 배경
<rowcolor=#670000,#fedc89> 군신 관계이자 가족 관계, 인종과 이자겸 (2016년 6월 12일 방송분) | 이자겸, 문무신 인사권을 장악하다 (2016년 6월 12일 방송분) |
인종 초기의 고려 왕조는 목종, 천추태후 - 김치양, 강조 3파전 이후로 가장 혼란스러운 정치 국면을 보였는데 이 국면 속 먼저 손을 쓴 세력은 다름아닌 왕당파였다. 인종의 어머니는 이자겸의 둘째 딸, 인종의 두 왕후는 이자겸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이었다. 외척 중의 외척이 된 이자겸은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봉해졌고 그의 관저는 의친궁(懿親宮) 숭덕부(崇德府)[54]로 봉해졌으며 그의 자택은 중흥택(重興宅)[55]으로 봉해져 그의 지위를 크게 올렸다. 그는 독자적으로 송나라와 교류했으며 자신을 지군국사(知軍國事)[56]라 칭했다.[57]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당대 소문난 무인(武人)이자 무신(武臣)이었던 척준경을 끌어들였다. 이자겸은 아들 이지원을 척준경의 딸에게 장가를 보내고 이공의를 척준경의 절친 왕자지의 딸에게 장가를 보내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동맹을 강화했다. 임금에 대해 충심이 없던 척준경 또한 권신 이자겸의 호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군부와 정권을 모두 잡은 이자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국 국왕 인종을 분노케 하였다.
3. 경과
<rowcolor=#670000,#fedc89> 34회 / 승려 묘청은 어떻게 고려 왕을 홀렸나 (2022년 12월 14일 방송분)[58] |
3.1. 왕당파 선공
<rowcolor=#670000,#fedc89> 이자겸, 외손자 인종에게 기습을 당하다 (2016년 6월 12일 방송분) |
중관(中官)[59]이었던 김찬과 안보린은 대표적인 왕당파였는데 두 사람은 인종의 심기를 읽고[60] 이자겸과 척준경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상장군(上將軍) 오탁과 최탁, 대장군(大將軍) 권수, 장군 고석과 연합해 계획을 짠다. 장군 직위를 가진 자들은 원래 척준경의 상관이었다가 척준경이 권력을 잡음에 따라 부하가 되어 버린 자들로 척준경을 싫어했다. 인종 4년(1126년) 2월 왕당파가 움직였는데 지녹연 등은 저녁 시간에 본궐로 들어가 당시 궐에 있던 척순, 척준신, 전기상, 최영, 김정분을 죽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본궐 궁성 밖으로 던져졌고 본궐은 폐쇄됐다.
이자겸파였던 신하 학문은 몰래 궁성을 넘어 다른 이자겸파 신하 지호에게 알렸고 지호는 곧장 이자겸에게 변란이 생겼음을 알렸는데 이자겸은 왕당파가 먼저 싸움을 걸거라고 생각치도 못한 듯 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은 당황해 장남 이지미, 척준경, 자신의 당파 소속 신하들을 의친궁으로 불러 어떻게 할지를 의논했다. 급박하게 정세가 변하니 아무도 뾰족한 수를 못내고 있던 중 이자겸의 사돈이자 척준경의 인척인 왕의가 몰래 본궐을 빠져 나와 상세한 설명을 한다. 자신의 유일한 아들과 친동생이 살해당했다는 걸 들은 당대 최강의 무력을 지닌 척준경은 대노하였다.
"일이 급하다.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척준경, 급보를 듣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 급보를 듣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은 윤한, 최식, 이후진 등 부하와 장졸 수십 명을 이끌고 가 바로 황성(皇城)의 남문이자 정문인 주작문[61]에 도착했다. 하지만 봉쇄된 주작문을 열지 못하자 윤한을 시켜 성을 타고 넘어가 문을 강제로 열었고 궁성(宮城)의 2번째 문이었던 신봉문[62]에 도착해 땅이 흔들릴 정도로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63] 왕당파는 척준경의 고함소리를 듣자 그가 대군을 끌고 왔다고 착각해 겁이나 신봉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자겸은 따로 움직여 왕당파의 집을 부수고 불태운 뒤에 처자식을 붙잡아 가두었으며 그렇게 하룻밤이 지났다.
3.2. 승평문 대치
다음날 아침 척준경은 아들과 동생의 시체를 회수하는데 분노가 머리 끝까지 뻗친 척준경은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 윤한, 최식, 이후진을 시켜 군대를 소환하고 무기고를 털어 자기 마음대로 장비시킨 뒤 궁성의 정문인 승평문[64]을 포위한다. 또한 이자겸의 아들 이의장이 자신이 주지로 있던 현화사의 승병을 끌고 와 가세하니 궁성 안의 병사들은 소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척준경-이자겸파와 왕당파가 승평문 및 신봉문에서 대치하던 중 인종이 직접 신봉문으로 움직였다. 인종은 금색 일산을 든 호위대와 도착했고 척준경이 소환한 군대는 자신들의 군주를 보자 대열을 갖춰 절(拜)을 하고 만세(萬歲)를 외쳤다.[65] 인종은 신하 이중을 보내 문답한다.인종: "네 무리(輩)는 왜 병(兵)을 끌고 왔는가?"
척준경파: "듣자하니 적이 금중(禁中)[66]에 들어왔다하여 사직을 호위하기 위함입니다."
인종: "없다. 짐 역시 무상하다. 너희 등은 갑옷을 풀고 해산하라."
인종과 척준경, 승평문 대치 중에.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파: "듣자하니 적이 금중(禁中)[66]에 들어왔다하여 사직을 호위하기 위함입니다."
인종: "없다. 짐 역시 무상하다. 너희 등은 갑옷을 풀고 해산하라."
인종과 척준경, 승평문 대치 중에.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은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고 분노에 찬 척준경을 달래기 위해 이중을 시켜 은화를 나눠주며 무장을 해제토록 했다. 그러나 척준경은 멈추지 않고 군주의 명령을 받은 이중을 검으로 위협해 물러나게 하고 군대를 다시 무장시켜 고함을 지르게 했다. 결국 싸움이 시작됐으며 심지어 인종에게까지 화살이 날아오자 호위대는 방패로 인종을 지키면서 후퇴하였고, 이의장의 승병은 신봉문의 기둥을 도끼로 찍어 무너뜨리려고 했다. 인종의 호위대는 신봉루에서 승병의 머리를 활로 쏘아 항전했다.
3.3. 만월대 방화
"부디 금중(禁中)에 있는, 난을 작당한 자들을 나오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금중(禁中)을 놀라게 할까 봐 두렵습니다."
이자겸, 인종을 협박하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자겸, 인종을 협박하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자겸은 자파 소속 신하를 보내 인종에게 전하는데 오만불손했고 인종은 이를 무시해버린다. 고려 본궐인 만월대는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매우 크기로 유명해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하루가 끝나가며 밤이 다가오는데도 궁성 안에 들어가지를 못하자 속이 뒤틀릴대로 뒤틀린 척준경은 자파 소속 신하를 시켜 이자겸에게 이자겸마저도 머뭇거리게 할 말을 전한다.
"오늘이 끝나가고 있소. 적이 밤을 틈타 도망칠까 두려우니 궁문을 불태운 뒤 들어가 탐색하는 것이 어떻소?"
척준경, 분노에 빠진 상태로.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 분노에 빠진 상태로.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자겸은 이 말을 듣고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장남 이지미를 시켜 이공수라는 신하에게 의견을 묻는다.
"궁우(宮宇)가 서로 붙어 있으니 연소되면 멈추질 못합니다. 심히 불가합니다."
이공수, 어처구니 없는 전언을 듣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공수, 어처구니 없는 전언을 듣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 이공수라는 신하는 이자겸이 자문을 구하는걸 봐서는 이자겸파로 보이는데 이 사건 이후 상당히 친왕당파적인 행보를 보인다. 척준경은 이자겸의 대답을 기다릴 생각도 없었으며 이자겸의 답이 오기도 전 근처 정부 청사에서 땔감을 들고 와서 국왕 인종이 안에 있는데도 동화문(東花門)을 태워 없애버린다. 그래도 좀 쫄린건지 주변에서 말린건지 승평문, 신봉문 등 대문은 불태우지 않고 근처의 소문을 태웠다.[67] 미친 짓이기는 하지만 동화문에서 시작된 불은 궁궐 깊숙히 들어가 국왕이 먹고 자는 내전(內殿)까지 태웠다.[68] 시간이 조금 흘러 척준경과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상태로 궁성 안에 들어간다. 그들은 춘덕문[69]을 통과했는데 척준경이 문 안에 들어오자 인종의 호위부대 장교 송행충과 이작이 척준경을 공격했다. 당황한 척준경은 문 밖으로 물러났고 호위대는 문을 잠궈버리는데 척준경은 문 밖으로 나오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뒤 궁성을 수색한다.
"안에서 나오려는 자는 모두 죽여라."
척준경, 궁성 수색 중에 공격을 당한 뒤.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 궁성 수색 중에 공격을 당한 뒤. 고려사 이자겸 열전.
3.4. 왕당파 패배
인종은 불을 피해 궁성 북쪽에 있었다가 호수가 있는 산호정이라는 정자로 간다. 그는 직접 걸어갔으며 시종하는 신하들이 다 도망치는 바람에 호위대 10여 명만이 남아있었다. 하다하다 불까지 질러 궁궐이 타버리자 인종은 자신이 정말 이자겸과 척준경에게 죽을까봐 걱정되었고 결국 이자겸에게 선위하겠다는 문서를 작성해 의친궁에 보낸다. 이자겸은 자파 신하들과 함께 문서를 받으나 이자겸은 문서를 받고도 시원하게 답을 못했는데 그는 정부 관료와 민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이공수가 크게 외친다."상께서 비록 조칙을 내리셨으나 이공(李公)께서 어떻게 감히 받들겠습니까!"
이공수, 먼저 손을 쓰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공수, 먼저 손을 쓰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공수의 말은 이자겸은 충신이기 때문에 왕위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선뜻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매우 불경한 행위로 만든 것이다. 자기 맘대로 답하기 힘들어진 이자겸은 바로 눈물을 흘리며 답했다.
"신은 두 마음을 먹지 않았습니다. 부디 거룩한 분께서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이자겸, 선위의 문서를 받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자겸, 선위의 문서를 받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 또한 진심으로 양위하려 했던 건 아닌 듯하다. <최사전 묘지명>을 보면 최사전은 인종이 양위하려 하자 이렇게 말했다.
'삼한(三韓)이라는 것은 삼한의 삼한(三韓之三韓)이니, 폐하의 삼한(陛下之三韓)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군(先君)이신 태조(太祖)께서 근로하셨기에 (삼한이) 이렇게 완전해진 것인데, 부디 멈춰주십시오.'
상께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시길: '너(汝)는 생사와 육골을 되돌릴 수 있는가?'[70]
최사전이 인종에게 간언하다. 최사전 묘지명 중 발췌.
선군(先君)이신 태조(太祖)께서 근로하셨기에 (삼한이) 이렇게 완전해진 것인데, 부디 멈춰주십시오.'
상께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시길: '너(汝)는 생사와 육골을 되돌릴 수 있는가?'[70]
최사전이 인종에게 간언하다. 최사전 묘지명 중 발췌.
4일째 아침이 되었다. 인종은 계속 세지는 불을 피해 궁성 밖으로 나가려 했고 때마침 이자겸이 척준경의 부하 김향을 시켜 인종을 남궁으로 나가게 하였다. 인종은 나가면서 중간에 태조 신성대왕의 신전인 경령전에 들러 태조의 어진을 우물 안에 숨긴 뒤에 말을 타고 남궁 연덕궁으로 간다. 이 때 상장군 오탁이 인종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척준경은 부하를 시켜 오탁을 끌어내 목을 자르고 그의 부하도 죽였다. 이어 중관 안보린, 상장군 최탁 등 왕당파 주동자들을 모두 찾아내 죽이고 부하들과 군사까지 모두 죽였다. 인종의 호위대가 남궁에 가까이 오자 이자겸은 인종을 협박해 호위대원들을 내놓으라고 한다. 인종은 거부했으나 이자겸이 3번이나 계속 강요하자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며 넘겼으나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가 호위대 장교 모두를 죽였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서로 만나 의논하여 그 날 당시에 궁성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을 귀천을 논하지 않고 죽이려 했으나 이공수가 계속 말리므로 결국 실행하지는 않았다. 지녹원 등 왕당파 중관들은 모두 유배보내거나 중간에 죽였고 그들의 처자식은 노비로 계급을 낮춰 버렸다.
인종 4년(1126년) 3월 이자겸은 남궁 연덕궁에 있던 인종을 사택인 중흥택의 서원(西院)으로 소환했다. 인종은 이제 호위 장교라고는 3명 밖에 없었는데 인종이 북문으로 들어올 때 이자겸과 척준경은 이 3명도 죽이려고 부하를 시켜 인종에게서 끌어냈는데 그 중 1명이 인종의 곤룡포를 붙잡고 부디 살려달라고 빌었다. 인종은 이자겸의 부하를 질타했으나 부하는 아랑곳없이 장교의 가슴을 발로 찼다. 하지만 장교가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아 인종의 곤룡포가 찢어지고 인종의 복두도 문에 걸려 찢어졌다.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와 이지보는 방문에 기대서서 섬돌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인종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로지 한 신하만이 절을 올렸으며 신하는 이자겸의 부하에게 소리를 질렀다.
"성지(聖旨)가 내려졌다. 네가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한 신하, 중흥택 서원에서. 고려사 이자겸 열전.
한 신하, 중흥택 서원에서. 고려사 이자겸 열전.
그제서야 부하는 멈추었고 장교는 겁에 질려 중흥택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결국 인종은 이 신하와 이자겸파 중관에게 부탁해 죽이지 말라고 요청했다.
"이 세 사람은 지성으로 임금을 사랑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대들은 부디 날 위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 말아주게나."
인종, 자신의 호위대를 지키기 위해.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 자신의 호위대를 지키기 위해. 고려사 이자겸 열전.
결국 척준경이 유배로 명령을 바꾸는데 인종이 집 안으로 들어와 이자겸 및 이자겸의 부인과 마주하고 앉았다. 이자겸과 부인은 손으로 바닥을 치고 크게 울며 말했다.
"황후(皇后)[71]께서 입궁하실 때부터 늘 태자를 낳길 원했습니다. 결국 성인(聖人)[72]께서 태어나시니, 영원히 사시라고 하늘에 비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점이 없었습니다. 천지귀신이 제 지성을 알텐데 오늘날 적신을 믿어 골육을 해치려 하시다니요."
이자겸,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하며.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자겸,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하며. 고려사 이자겸 열전.
여기서 황후는 이자겸의 둘째 딸이자 인종의 모후인 자정문경왕태후를 말한다. 이자겸의 말을 들은 인종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고 말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정말 부끄러워서인지 아님 화가 나서인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그렇게 2달 동안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갇혀 모든 것이 제한당하는데 인종은 왕당파가 죽인 척순, 척준식 등에게 관직을 추증해주고 이자겸이 견제하는 기타 왕당파 중관을 내쫓아야 했으며 모든 업무를 이자겸에게 허락받아야 했다. 이렇게 진정한 이자겸의 세상이 왔지만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 인종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왕이 서원에 거처한 이후 좌우가 모두 이자겸 일당들이었으니, 나라 일을 듣고 결단하거나 행동거지와 음식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왕이 일찍이 홀로 북쪽 담에 가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시간을 보낸 일도 있었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고려사>> <이자겸 열전>
3.5. 연경궁 사변
<rowcolor=#670000,#fedc89> 인종, 이자겸과 척준경의 갈등을 이용하다 (2016년 6월 12일 방송분) |
인종은 패배한 이유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은 척준경을 자극한 데에 있다고 봤다. 그래서 몰래 자신의 주치의였던 최사전을 척준경에게 보내 살살 달랬는데 척준경이 조금씩 마음을 바꾸자 인종은 조칙을 내리며 척준경을 포섭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생각건대 짐이 밝지 못하여 흉도가 일을 터뜨리게 하였다. 대신이 걱정하고 힘들게 했으니 모두 과인의 죄다.
이를 이용해 몸을 굽혀 잘못을 후회하고 하늘을 향해 마음을 다잡아 신민과 함께 새로운 덕을 만들고자 한다.
경은 스스로를 다잡는데 노력하고 옛 일을 염두에 두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해 보조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자."
인종, 척준경에게 하사한 조서.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를 이용해 몸을 굽혀 잘못을 후회하고 하늘을 향해 마음을 다잡아 신민과 함께 새로운 덕을 만들고자 한다.
경은 스스로를 다잡는데 노력하고 옛 일을 염두에 두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해 보조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자."
인종, 척준경에게 하사한 조서. 고려사 이자겸 열전
대놓고 모든게 내 탓이니 서로 옛 감정을 버리고 같이 정권을 회복하자고 유도하고 있는데 인종은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이에 금이 가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이는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노비와 척준경의 노비가 서로 싸우다 이지언의 노비가 다음과 같이 한 발언이 불을 붙였다.
"네 주인은 임금이 있는 곳에 활을 쏘고 궁궐을 불태웠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너 또한 관노로 적몰되어야 마땅한데 어찌 날 모욕하는가!"
이 다툼을 전해들은 척준경은 대노하여 바로 이자겸이 머무르는 중흥택으로 뛰어갔으며 옷과 관을 벗어 던진 뒤 외쳤다.
"내 죄가 크다, 마땅히 관청으로 하여금 판결을 내리게 하라!"
고려사 이자겸 열전.
고려사 이자겸 열전.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리니 사람들이 말렸다. 그러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이자겸은 아들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 화해를 구했지만 척준경은 도리어 그들에게 질타한다.
"전일의 난은 모두 너희 등이 한 짓이다. 왜 내 죄만 죽어 마땅하다 하는가?"
그러고는 그들을 만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고향으로 돌아가 늙을 것이다!"
척준경의 성질이 급하다는 것이 보이는데 그야말로 극단적인 말만 골라서 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척준경이 정말 자신의 권력을 버리고 귀향해 버릴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확실한건 이자겸과 척준경이 난 이후에 사이가 매우 틀어졌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난의 잘못을 돌리고 있는걸 보면 그들이 난의 후폭풍을 감당하기 버거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자겸의 권세가 3달밖에 유지되지 못한 듯하다. 인종은 이를 듣고 또 척준경에게 신호를 보내며 자신의 명마 1필을 선물하는데 노비 분쟁 사건 이후 이자겸은 대충 누가 뭘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하다.
인종 4년(1126년) 4월 이자겸은 인종을 데리고 안화사에 간다.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는 원래 태조이 창건한 사찰로 훗날 예종이 크게 증축했다. 예종은 안화사를 문경태후의 원찰로 바꾸었는데 이자겸이 인종을 데리고 천수사, 봉은사[73], 신흥사[74], 현화사도 아닌 안화사에 데리고 간 것은 그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절에 가던 도중 인종은 타버린 옛 본궐을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안화사에 도착한 뒤 안화사의 승려와 일꾼들은 인종에게 절을 올렸는데 이자겸은 말 위에서 이것을 바라보았다.
인종 4년(1126년) 5월 1일 인종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낀 이자겸은 연경궁으로 인종의 처소를 바꾼다. 그는 자신의 관저였던 의친궁 숭덕부를 연경궁 남쪽으로 옮겼고 의친궁 북쪽에 있는 연경궁 남쪽 성벽을 부숴 길을 바로 통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신의 사병을 국가의 무기고에서 꺼낸 무기로 무장시켜 늘 데리고 다니니 인종은 어이가 없어 혼자 북쪽 뒤뜰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오랫동안 운 적도 있었다. 인종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이자겸을 감시하며 척준경을 끌어당겼다. 결국 척준경은 이자겸을 배신하고 인종에게 붙는데 척준경의 충성 문서를 본 인종은 답한다.
"국공(國公)은 비록 참적이나, 반역의 시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짐이 먼저 손을 쓰면 먼저 친족을 해치게 되는 꼴이니 나중의 변란을 기다리는 것도 늦지 않다."
인종, 척준경에게.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 척준경에게.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은 늘 자기 휘하의 중관을 시켜 이자겸을 몰래 관찰하고 있었다. 인종 4년(1126년) 5월 20일 인종은 이자겸의 이상 행동을 포착했고 인종의 중관이 인종이 직접 쓴 쪽지를 장교들과 회의 중이던 척준경에게 전달했는데 이 쪽지에는 척준경도 망설이게 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늘 숭덕부군(崇德府軍)이 병(兵)을 끌고와 전각의 북쪽에서 침전의 문을 부수려 한다. 짐이 만약 피해를 입는다면 내 덕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다.
단지 내가 아파하는 것은 태조가 업을 세우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왔는데, 과인의 때에 이르러 이성(異姓)이 갈아버리려 하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짐의 죄뿐만 아니라 보상대신(輔相大臣)[75]들도 심히 부끄러워 할 일인 것이다. 부디 경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인종,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단지 내가 아파하는 것은 태조가 업을 세우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왔는데, 과인의 때에 이르러 이성(異姓)이 갈아버리려 하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짐의 죄뿐만 아니라 보상대신(輔相大臣)[75]들도 심히 부끄러워 할 일인 것이다. 부디 경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인종,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은 이를 보고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이제 '고려국왕'과 '조선국공' 중 한 쪽을 고르면 절대 되돌릴 수 없다. 척준경은 자신의 부하 김향에게 묻는데 김향은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임금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마음을 잡은 척준경은 즉각 움직였는데 휘하 장교 7명과 20여 명의 장정을 이끌고 바로 자신이 불질렀던 본궐로 향했으며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廣化門)[76]에 도착한 척준경은 왕당파 중관과 이공수가 몰래 쪽문을 열어 주어 잽싸게 들어갔다. 본궐 무기고에 먼저 도착한 척준경의 부하는 100명의 군사를 뽑고 그들을 무장시켰으며 그렇게 무장을 마친 척준경은 곧장 연경궁으로 갔다.
가던 중 이자겸파 신하 1명을 만났는데 그가 척준경의 군세를 보고 불손한 말을 하자 즉시 죽였으며 척준경이 군대를 끌고 연경궁의 천성전문(天成殿門)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있던 인종이 그를 반겼다. 숭덕부군이 인종과 척준경을 향해 화살을 쐈지만 척준경이 으르렁거리며 칼을 휘두르자 기세가 밀렸으며 척준경은 인종을 데리고 본궐 무기고로 향했고 호위를 강화했다. 척준경이 부하를 시켜 이자겸을 부르자 이자겸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는지 소복을 입은 채로 왔다고 한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팔관보(八觀寶)[77]에 가두었고 그의 처자식을 모두 찾아 역시 팔관보에 가두었다. 척준경은 본보기로 이자겸을 호위하던 장교 2~3명을 죽였고 군졸을 체포했는데 드디어 복수에 성공한 인종은 광화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재앙이 궁궐에서 일어나 대역죄인이 부도하니, 충신과 의사들 덕분에 의로움을 들어 해악을 없앴도다!"
“禍起蕭墻 大逆不道, 賴忠臣義士 擧義除害.”
인종, 드디어 정권을 회복하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禍起蕭墻 大逆不道, 賴忠臣義士 擧義除害.”
인종, 드디어 정권을 회복하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그제서야 해동천자가 귀환했다는걸 알게 된 개경의 시민들은 만세를 외치고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 장남 이지미는 뒤늦게 변고가 생겼다는걸 듣고 휘하 장정 100명을 끌고 광화문에 가려 했지만 폐쇄된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병부(兵部) 청사에 주둔했다. 당시 이지미는 이자겸이 잡힌줄 모르고 있었는데 병부의 군대와 척준경의 군대가 와서 그들을 모두 잡아갔다.
4. 결말과 영향
<rowcolor=#670000,#fedc89> 이자겸의 난 이후의 처리 (2016년 6월 12일 방송분) |
"짐이 어리고 충동적이어서 조업(祖業)을 이어 받았으나 외가(外家)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일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위임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난폭하니 민(民)을 다치게 하고 나라(國)를 해쳤다. 짐은 비록 이를 알고 있었으나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월 20일 창졸을 시켜 환란을 일으켰으니 판병부사(判兵部事) 척준경이 의를 들어 난을 평정했다. 공을 잊을 수 없으니 관사에 명령해 상을 주도록 한다. 군기소감(軍器少監) 최사전[78]도 마음을 다해 크게 보조했으니, 같이 상을 준다."
인종의 선지(宣旨), 고려사 인종 세가.
일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위임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난폭하니 민(民)을 다치게 하고 나라(國)를 해쳤다. 짐은 비록 이를 알고 있었으나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월 20일 창졸을 시켜 환란을 일으켰으니 판병부사(判兵部事) 척준경이 의를 들어 난을 평정했다. 공을 잊을 수 없으니 관사에 명령해 상을 주도록 한다. 군기소감(軍器少監) 최사전[78]도 마음을 다해 크게 보조했으니, 같이 상을 준다."
인종의 선지(宣旨), 고려사 인종 세가.
인종은 다시 연경궁에 돌아갔으며 가기 전 중관들이 궁을 청소했는데 내전에서 이자겸의 아들인 현화사의 주지 이의장이 발각되어 이의장 역시 아버지를 따라 팔관보에 갇혔다. 인종은 이후 이자겸파 사람들을 하나하나 없애기 시작하는데 이자겸파 소속 신하는 노비까지 모조리 사형을 받거나, 수장되거나, 섬에 유배되거나, 길거리에 칼을 씌인채 조롱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 이자겸, 이자겸의 아내, 5남 이지윤(李之允)은 전라남도 영광으로
- 장남 이지미(李之美)를 경상남도 합천으로
- 차남 이공의(李公儀)를 전라남도 진도로
- 3남 이지언(李之彦)을 경상남도 거제로
- 4남 이지보(李之甫)를 강원도 삼척으로
- 6남 이지원(李之元)을 평안남도 강서군으로
- 7남 이의장(李義莊)을 경상남도 김해로
유배보냈다. 아들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었으며 이자겸의 딸인 두 왕후는 이자겸 실각 이후 당연히 폐비되었으나 인종을 독살하려는 시도를 막기도 한걸 감안해서인지 이후로도 개경에서 살았으며 인종이 집과 노비들을 하사하는 등 챙겨줬다고 한다. 이자겸은 인종 4년(1126년) 12월 5일 영광서 총 7개월간 유배 생활을 하다 죽었는데 한때 지군국사 겸 조선국공으로 군림한 권신치고는 참으로 허무한 최후를 맞았다. 이자겸의 아내는 3년 뒤인 인종 7년(1129년)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미 위협도 안되니 외척을 우대한다는 이유로 봐준 듯하다.
척준경은 인종에 붙어
-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공신호를,
- 삼중대광(三重大匡) 향직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산계 품계를,
- 검교태사(檢校太師) 검교직을,
- 수태보(守太保) 수직을,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판호부사(判戶部事) 겸(兼) 서경 유수사(西京 留守使) 직위를,
- 상주국(上柱國) 훈위를 받았다.
또한 척준경의 아내를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 작위에 봉했다. 그러나 인종이 자신이 있는 곳에 화살을 쏘고 궁궐을 불태워버린 자를 냅둘 생각은 전무했다. 인종 5년(1127년) 3월 정지상이 척준경을 탄핵하자 이를 계기로 전라남도 신안의 암태도로 유배보냈으나 자신을 도왔다는걸 참작해서인지 척준경의 처우를 고향인 황해북도 곡산면에 옮기는 귀향형으로 고쳐주었다.[79] 인종 5년(1127년) 10월 이자겸이 수탈한 땅과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을 전각에 기록해두니 최후의 승자는 인종이었다. 인종 22년(1144년) 척준경은 곡산서 총 17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는데 자기가 선언했던 대로 고향에 돌아가 늙은 셈이다.
이자겸 일가의 패망은 숙종과 예종 대에 걸쳐 이어진 근신(近臣) 정치가 막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숙종과 예종은 서경에 자주 행차하거나 궁궐을 지어 서경 출신 인물을 지원했고 이로써 서경파와 개경파가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 왕권을 강화했다. 인종은 인척을 자신의 세력으로 삼아 신료들을 견제하기를 포기했고 다른 방법을 시행한다.[80] 인종은 이자겸의 난 이후 본격적으로 서경 세력 육성에 나서니 정계에는 정지상과 백수한, 종교계에는 묘청이었으며 풍수지리 등을 동원하였다.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 출신 귀족과 서경 출신 귀족이 나뉘어졌으며 중앙 집권층 사이의 분열로 그동안 고려를 지배했던 문벌귀족 사회의 붕괴 조짐이 나타났다. 이는 훗날 묘청의 난과 무신정권의 성립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 양력으로는 1126년 3월 20일부터 시작됐고, 1126년 6월 12일에 종료됐다. 사료#1(고려사) #2[2] 척준경이 최종적으로 탄핵되어 유배 보내진 시점. 사료(고려사) 양력으로는 1127년 5월 8일이다.[3] 인종의 이자겸-척준경 첫번째 제거 시도가 실패한 이후 이자겸과 척준경이 갈등 관계에 들어서게 된 계기이다. 이 일로 인해서 척준경은 고려 왕실 편에 서서 이자겸 제거에 나선다.[4] 척준경과 그의 수하들은 처음에는 이자겸 편에 서서 인종에 맞섰으나, 이후 종끼리의 다툼으로 갈등하다가 고려 왕실 편으로 돌아선다.[5] 左正言[6] 金粲[7] 內侍 祗候[8] 安甫鱗[9] 內侍 錄事[10] 同知樞密院事[11] 上將軍[12] 上將軍[13] 權秀[14] 大將軍[15] 高碩[16] 將軍[17] 李壽[18] 平章事[A] 궁궐 전소 후 왕당파로 행동.[20] 軍器少監[21] 洪立功[A] 궁궐 전소 후 왕당파로 행동.[23] 中郞將[24] 中書侍郞平章事[25] 이자겸의 장남.[26] 知樞密院事[27] 李公儀. 이자겸의 차남, 척준경의 친구 왕자지의 사위.[28] 刑部侍郞[29] 李之彦. 이자겸의 3남.[30] 工部侍郞[31] 이자겸의 4남, 김향의 사위.[32] 戶部郞中[33] 李之元. 이자겸의 6남, 척준경의 사위.[34] 閤門祗侯[35] 이자겸의 7남, 출가한 승려, 현화사의 주지. 현화사는 현종이 세운 영향력이 매우 큰 절이다.[36] 首座. 고려시대에 승려 법계(法階) 중 가장 높은 직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수좌)[37] 學文[38] 內直旗頭[39] 池顥[40] 中郞將[41] 拓純. 척준경의 아들.[42] 內侍[43] 척준경의 동생.[44] 兵部尙書[45] 척준경의 친구 왕자지의 아들이며 이자겸의 아들 이공의의 외삼촌.[46] 郞中[47] 田其上[48] 錄事[49] 崔英[50] 錄事[51] 金鼎芬[52] 祗候[53] 정지상의 탄핵[54] 인종은 부를 설치해줄 때 엿을 넣어 선물했는데 부의 이름을 숭덕(崇德)(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궁 이름)에서 따왔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아무도 이걸 몰랐고 나중에야 숭덕부가 누구의 관저였는지 알려진다.[55] 원래 이름은 개명택(開明宅)인데 이자겸의 선대인 이자연 세대가 살던 곳이었다. <고려사>에는 인종이 개수하고 이름을 바꿔 주었다는데 누가 압력을 넣었는지는 자명하다.[56] 군대와 국가를 (국왕 대신) 돌보는 사람.[57] 당시 시대에 군주의 허락없이 독자적으로 타국과 교류한건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후삼국 시대의 왕봉규, 견훤의 외교 활동이 부각되는 것이 그 이유다.[58]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함께 다룬 회차이다.[59] 환관의 다른 말.[60] 내가 외할아버지를 축출할 마음을 먹는다 하더라도 척준경이 저리 지키고 있으니 누가 나를 위해 나서 주겠는가 하고 한탄하는 말을 인종이 흘렸다고도 한다.[61] 궁성을 둘러싼 황성의 남문.[62] 궁성 남문이자 정문인 승평문 뒤에 있다.[63] <고려사> 원문에는 "呼譟聲殷地(호조성은지)", 부르며 떠드는 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고 나와 있다.[64] 이 문은 경복궁의 광화문같이 생각하면 된다.[65] 이 <고려사>의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척준경이 권세가 강했어도 결국 군대는 인종에게 충실했다는 것.[66] 궁궐의 다른 말.[67] 동화문은 궁성의 동문이다. 정남쪽에 위치한 승평문, 신봉문 등 문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진다.[68] 이 때 화마로 무너진 본궐은 인종이 6년을 걸쳐서야 수리를 끝낸다.[69] 태자궁인 좌우춘궁으로 가는 대문. 태자궁은 만월대 내 별궁이다.[70] 최사전은 의사다. 의사의 역할인 사람을 구하는 것을 국가의 운명과 빗댄 셈.[71] 당시 고려는 동방의 천자국을 자처한 외왕내제 국가답게 황후 칭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72] 인종을 의미함.[73] 효사관이라는 태조진전이 있었다.[74] 공신당이 있어 공신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75] 왕을 보좌한 재상과 대신들.[76] 황성(皇城)의 동대문. 경복궁 광화문과는 발음은 같으나 한자 표기와 용도가 다르다.[77] 고려시대 팔관회 개설을 담당한 부서.[78] 척준경에게 계속 인종의 말을 전한 인종의 주치의. 사후 공로를 인정받아 배향공신이 된다.[79] 귀향형도 작은 벌은 아닌 것이 조선 시대의 귀양형은 풀리거나 왕의 부름으로 관직을 다시 제수받을 수 있었지만 귀향형은 1번 고향에 돌아오면 절대 벗어날 수 없었고 관직 복귀도 안되었다.[80] 이자겸이 폭주 기관차가 됐을 때 그를 그나마 막아낸 김부식은 개경 귀족 출신이다. 이자겸 난의 시발점인 중관 김찬은 서경 출신 인물이었으며 척준경 탄핵에 앞장선 정지상도 서경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