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하시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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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 문하시중 김부식 金富軾 | |
<nopad> 권오창, 정부표준영정 53호, 1993년 | |
출생 | 1075년 |
사망 | 1151년 |
작위 | 낙랑군 개국후(樂浪郡開國侯) |
시호 | 문열(文烈) |
본관 | 경주 김씨[1] |
자 | 입지(立之) |
호 | 뇌천(雷川) |
가족 | 아버지 김근 형제 김부필, 김부일, 김부의 아들 김돈중, 김돈시[2] |
《고려사》 권98, 열전11 김부식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김부식(金富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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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관료. 개경파 문벌귀족. 삼국사기의 저자로 유명하며 1135년(고려 인종 13년) 묘청의 난을 진압한 이후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한 한국사의 대표적 권신[3]이다.자녀로는 무신정변의 발단이 된 김돈중이 있다.
2. 경력
김부식은 인종 대의 유명한 유학자이자 중신이었기에 여러 관작을 거쳤다.<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묘청의 난 진압 이후 | ||
공신호 |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받은 공신호. |
문산계 품계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종1품 최고위 품계. |
삼사삼공 | 검교태보(檢校太保) | 검교직은 직위에 이름만 걸치는 것으로 명예직이다. 삼사의 하나이다. |
수태위(守太尉) | 수직은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인다. 김부식 본인은 종1품, 태위는 정1품이므로 수직을 붙였다. 태위는 삼공 중 하나다. | |
태자태보(太子太保) | 명예직으로 태자부의 직위.[4] 당시 태자는 의종. | |
직위 | 문하시중(門下侍中) -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 중서문하성의 장관이며 상서이부의 판사이다. |
학사 | 감수국사(監修國史) | 사관의 장관이다. |
훈위 | 상주국(上柱國) | 정2품 호칭. 작위와 같이 신하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것. |
삼국사기 편찬 전후 | ||
공신호 |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 고려사엔 '동덕찬화'를 덧붙였다는데 삼국사기는 '찬화동덕'으로 돼있다. |
문산계 품계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고려사와 동일. |
삼사삼공 | 검교태사(檢校太師) | 고려사와 동일. |
수태보(守太保) | 고려사와 동일. | |
태자태사(太子太師) | 태자태보에서 승진. | |
직위 | 문하시중(門下侍中) - 판상서이예부사(判尙書吏禮部事) - | 판예부사가 더해졌다. |
학사 |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 - 감수국사(監修國史) | 집현전 태학사까지 겸함. 고려사는 집현전 대(大)학사로 기록. |
훈위 | 상주국(上柱國) | 고려사와 동일. |
작위 | 낙랑군 개국후(樂浪郡開國侯) | |
사후 추증 | ||
삼사삼공 | 수태부(守太傅) | 삼사 직으로 수태보에서 추증. |
직위 | 중서령(中書令) | 중서문하성의 명목상 최고위 직위. 명예직이다. |
시호 | 문열공(文烈公) | 사후 의종이 추증함. |
3. 생애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 태후 가문 | ||||
경주 김씨 순경태후家 | 정안 임씨 공예태후家 | 경원 이씨 인예태후家 | 안산 김씨 원성태후家 | 당성 홍씨 명덕태후家 | |
재상 가문 | |||||
언양 김씨 김취려家 | 철원 최씨 최유청家 | 해주 최씨 최충家 | 공암 허씨 허재家 | 평강 채씨 채송년家 | |
청주 이씨 이자림家 | 황려 민씨 민영모家 | 횡천 조씨 조영인家 | 파평 윤씨 윤관家 | 평양 조씨 조인규家 |
김부식의 집안은 아버지 대까지만 하더라도 중앙 귀족에 못 미치는 수준의 집안이었다. 그러다가 김부식 대에 입신양명에 성공하여 가문이 크게 흥해 고려에서도 손꼽히는 문벌귀족으로 되었던 것. 김부식의 조부와 부친은 높은 직위에 있지는 않았는데 김부식의 5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면서 가문의 위세가 급상승하게 된다. 김부식의 형제 중 큰형은 과거에 급제한 후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공을 세웠고 뒤이어 다섯 형제들도 과거에 급제하면서 입시계에 전설로 통하는 집안이 된 것. 덕분에 5형제의 어머니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큰 포상을 받기도 했다. 김부식 5형제는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순식간에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안으로 부상하였는데 당대의 권신 이자겸[5] 다음 가는 정도의 위세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자겸 집권 시기에는 라이벌이라기보다는 협조하는 편이었다. 이자겸이 금나라에 대한 사대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하던 서경파와 대립하였기 때문에 송나라와 신라에 우호적인 김부식이 속한 동경[6]파와는 어느 정도 협력한 것.
고려 시대 기준으로 전제 군주나 마찬가지였던 예종은 생전에 측근 세력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예종 대에 측근 세력으로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 한안인이었다. 이후 인종도 측근 세력을 양성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인물인 김찬과 안보린 등은 이자겸과 척준경에게 제거된다.[7] 김부식은 이 시기 꿈틀한 적을 제외하면 조용히 이자겸 치하에서 승진을 거듭하는 등 이자겸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김부식의 형 김부일이 인종과 척준경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참가하여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에 급성장하게 되는데[8] 척준경을 제거하면서 정권을 장악한 정지상 등의 서경파에 대항하여 기존의 문벌귀족을 대표하는 개경파 귀족으로서 김부식 일족이 급부상하게 된다.
서경파를 중심으로 하는 서경 천도 운동이 결국 개경파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자 서경파 중에서 강경파였던 묘청이 조광, 유참 등과 함께 서경을 기반으로 대위국을 선포하고 묘청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사실 서경 천도 운동은 국왕인 인종의 의도가 다분했는데 천도는 기존의 수도였던 지역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그 과정에서 왕권이 강화되는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 인종의 경우는 문벌 귀족들을 엎어버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서경의 서기가 돌고 하는 등의 장면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쇼에 불과하다. 인종은 서경 천도와 왕권 강화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외부적 칭제건원과 금국 정벌 등으로 확대되는 것은 꺼리고 있었다. 당시 금나라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이자겸이 사대까지 받아들인 상황이었고 서경파가 너무 강성해지자 견제에 들어가게 된다.
인종의 제어 실패로 급진파들이 반발하자 김부식은 직접 출정한다. 이때 김부식은 60대의 나이로 조정에서 관직이 오를만큼 올랐던 위치에 있었기에 개경파의 대표로서 묘청의 난을 제압하는 총대장에 임명된다. 김부식은 일단 개경에 있던 온건 서경파인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을 처단한 후 1년 2개월에 걸친 내란 끝에 반란을 제압했다.[9] 이때 김부식은 서경 하나로 반란군의 거점을 제한하는 계획을 세웠다. 김부식은 군을 셋으로 나누어 좌군은 황주와 자비령에서 서경을 견제하고 우군은 동계로 진입하는 통로를 차단하며 중군이 뒤에서 조율하는 방식으로 서경군의 세력 확대를 차단했다. 단지 이 기동만으로 개천, 성주에서 서경군 2천명이 친왕파의 역봉기로 괴멸되고 서경군의 세력 확대 시도는 완전히 차단되었다.[10] 직후 김부식은 장락궁에 들어가 서경을 정비하고 묘청의 목을 배달했는데 여기까지는 관군의 무혈 승리였다. 이후 난이 길어진 것은 정부 사절인 김부가 서경을 거칠게 다룬 탓이 컸다.
서경 공방전에서도 김부식은 서경군의 야습을 예측하고 대동강 남쪽의 후군에 예비대 1천 명을 급파했고 덕분에 관군은 서경군의 야습을 차단하여 서경군을 성 안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간 것도 김부식의 전략이었다.[11] 김부식이 서경을 포위만 한 채 전쟁이 길어지자 김부식을 탄핵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김부식은 "전쟁이란 본래 빠른 승리를 기약하지 않는 것도 있다"면서 공격론에 반대한다. 김부식은 서경의 기능 자체는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최소한의 피해로 서경을 진압하려 했기 때문이다. 묘청의 난 진압 과정에서 김부식이 치졸하게 정지상, 윤언이를 견제한 것은 사실이나 그와 별개로 총사령관에게 요구되는 전략적 식견은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공로로 의종 즉위 후 김부식은 낙랑군 개국후(樂浪郡 開國侯)로 봉해졌다.
서경파를 제거한 이후 개경파 문벌귀족들이 득세하게 되는데 김부식은 고려 최고의 관직인 문하시중[12]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필연적인 내부 분열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부식과 함께 서경파를 공격했던 윤언이와의 대립이다.[13] 윤관의 4남이기도 한 윤언이는 파평 윤씨 가문으로 역시 고려에서 손꼽히는 문벌귀족 중에 하나였는데 김부식은 묘청과 마찬가지로 칭제건원을 언급하였다는 이유로 윤언이를 탄핵한다. 이후 윤언이마저 좌천시킨 김부식은 고려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가 말년이 되자 그의 형제들도 모두 죽고 지지자들도 하나둘 사라진다.[14] 마침내 김부식이 좌천시킨 윤언이에게 사면령이 내려져서 중앙 정계로 복귀하게 되면서 김부식은 수 차례 은퇴를 청원한다.
이렇게 은퇴할 때가 된 김부식이 인종의 권유로 없어진 역사를 복원하라는 명을 받고 만든 것이 《삼국사기》다. 김부식은 총제작자 겸 감독일 뿐 김부식이 독단으로 삼국사기를 쓴 것은 아니다. 다만 김부식의 입지를 고려하면 내용에 김부식과 그 세력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이는 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황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은, 김충효, 정습명으로 김부식까지 모두 11명인데 김부식과 가까운 이들이었으며 주로 자료 수집과 정리를 담당했다. 편찬의 기준은 모두 김부식에 의해서 결정되었으며 김부식이 더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론만 보아도 김부식의 의도는 국왕의 집필 방침과 함께 양대 축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4. 평가
4.1. 무신정변의 씨앗?
김부식은 고려의 문관을 대표하는 인물인 동시에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 문신 권력자였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한뢰, 김돈중, 의종과 함께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김돈중은 행실이 경망스럽고 무례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아들 역시 아버지랑 짝짝꿍으로 무신정권 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고려사에는 섣달 그믐[15]에는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했는데, 각 신하들이 각자 일종의 장기자랑[16]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로 날뛰고 즐기는 중에 내시[17]였던 김부식의 젊은아들 김돈중이 무신들을 만만히 보고는, 당시 견룡대정[18]이었던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먹는 사건이 발생한다.[19]
당연히 화가 난 정중부는 김돈중을 때리고 욕했는데 문제는 김부식이 그런 막돼먹은 아들에게 면박을 주지는 못할망정 아들이 두들겨 맞자 자기 가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노발대발하며 인종에게 정중부를 벌하여 똑같이 고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20] 아무래도 당대의 대학자이자 권신인 김부식의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는지 인종이 들어주고 말았다.
아무리 문신이 무신보다 위인 사회였고[21] 김돈중이 정중부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모욕을 당했지만 김부식과 김돈중이 해도 너무했다. 다만 인종은 정중부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은밀하게 도망다니게 해줘서 실제로 벌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정중부는 수십 년 동안 깊은 앙심을 품게 되고, 결국 이 앙심은 무신들의 반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김부식은 1151년에 죽었고, 그 뒤 약 19년 뒤인 1170년에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때에는 김돈중은 동생 김돈시와 함께 무신들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22]
4.2. 사대주의자?
김부식은 유명한 공자 빠돌이이기도 했다. 왕이 국학에 방문해서 공자에 제사지낸 것을 칭송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하행국학표'를 저술했으며 공자에 대한 찬사인 '중니봉부'[23]를 지어서 자신의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런 공자를 극도로 좋아했던 점도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는 평가에 불을 지폈던 부분이다.그러나 이런 모습은 유학자로써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으며, 공자를 추종하고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대주의자라면 중세의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도 사대주의자가 된다. 애당초 고려의 정치제도 자체가 유교를 기반으로 했던 것을 생각하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24] 당장에 전 세대의 서희나 강감찬, 윤관부터가 유교 경전을 공부하여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른 유학자들이었고, 특히 윤관은 여진과 싸우는 진중에서도 경전을 휴대하고 탐독했을 정도로 유학을 좋아하고 꾸준히 연마하던 인물이다. 때문에 김부식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게 공자를 모화했다고 볼 수는 없는 편. 실제로 공자를 좋아했다지만 정작 고려왕조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정관정요가 문화로 자리잡아 순자의 이론에 따라 행한 사람이 많고 더욱이 이 시대의 유교는 굉장히 호국적인 성향을 띄어 대체로 유학자들이 고려 초,중기에 전란과 반란에 개입하는 일이 꽤 많았다.
이름부터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소식(소동파)에게서 이름을 따온 탓인지 그러한 선입견을 강화시키기도 한다.[25][26] 대표적으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한 사람이라면 단재 신채호가 있다. 하지만 조선상고사에 김부식이 국사를 사대주의적인 《삼국사기》에 집약하고 당시 전해지던 다른 사서들을 말살했다고 적고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며 수십년 후 이제현, 일연의 시기 혹은 백여년이 지난 조선 초기까지도 《삼국사기》 이전 시기의 사서들이 여럿 전해지고 있었고 인용되었다. 애초에 사대라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다른 나라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개념이 아니다. 상대가 우리 국력보다 훨씬 강한 대국인 만큼 맞서기보다는 차라리 비위나 맞춰주면서 얻을 것만 얻어내자는 논리다. 현실적이고 보수적이기는 해도 매국이나 나라의 정체성을 파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셈.[27] 또한 김부식은 중화 추종이 아닌 철저히 실리를 챙기는 행보를 보였는데, 송이 아닌 북방 오랑캐로 보던 금에 사대를 하자는 이자겸의 주장에도 크게 반대를 하지 않았고,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남송에 대해서는 대놓고 거절하는 모습도 보였다.
일각에서는 칭제건원과 서경 천도 운동의 묘청 일파들을 몰살시켰고, 신라 외의 고구려와 백제 등의 기록이 적다는 이유로 중국의 사서인 수서 등을 복붙했다고 심히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건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되어 평가한 것이다. 일단 고려는 외왕내제 국가로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했으니 비록 연호는 공개적으로 쓰지 않았지만, 소극적으로나마 칭제를 했던 국가였다. 서경 천도 운동의 경우, 정지상과 묘청등은 서경으로 천도한 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탈환하자는 주장을 펼쳤는데 당시 금나라는 백여년 간 고려의 상국이었던 요나라와 몇 배는 더 높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던 북송을 연달아 관광태우며 중원의 북부와 만주를 완전히 정복한 강대국이었다. 이런 나라를 상대로 북벌을 주장한 것은 당시로썬 허무맹랑한 소리였던 셈.[28] 멀리까지 안가도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 30여년 전인 1108년에 금나라의 조상들을 상대로 17만의 고려 원정군이 고전한 사례도 있었다. 또한 서경 천도 운동의 경우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 출신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주도한 운동으로 표면적으론 황제국이 되어 옛 고구려 땅을 되찾자였으나 들여다 보면 김부식을 비롯한 기존 개경 출신의 정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정치 주도권 싸움에 더 가까웠다.
또한 중국측 기록을 많이 참조했다고 비난한 것은, 삼국사기를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은 이들의 비판이다. 후술하겠지만 삼국사기 내내 "기록이 없어서 아쉽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통탄하다." 같이 김부식이 살던 시절엔 이미 고구려와 백제측의 기록이 증발해버린 상태였고, 이에 따라 김부식도 어쩔 수 없이 중국측 기록을 인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29]
그리고 《삼국사기》를 보면 김부식을 단순 사대주의자로 보기엔 어려운 면이 꽤 많다. 물론 《삼국사기》가 좀 보수적인 내용인 것은 맞지만 "고려시대의 역사서들이나 《삼국사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구삼국사》 등의 내용을 현재 추정하는 것과 비교해서, 《삼국사기》는 보수적인 사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성급한 주장이다. 구삼국사의 경우에는 허무맹랑한 기록조차 모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사기》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에 의거해 "사실로 확인 될만한 기록"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인정해버리면 좋아할 세력[30]이 좀 많아서 대놓고 언급을 하지 않을 뿐이다. 마땅히 다른 사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의 성향을 대놓고 보여주는 것은 본론 자체가 아닌 사론이다. 《사기》에서 사마천의 말이 태사공왈 로 나타나는 것처럼,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의 의도 역시 사론으로 나타난다.
신라 중심 사관이 나타난다는 지적도 무리한 주장이다. 삼국사기에서 신라 역사의 비중이 과다하게 큰 것도 아니며, 비교적 균형있게 다루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31] 또한 김유신의 기록과 같은 일부 내용들은 김부식이 사료를 찾다 찾다 끝내 포기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김유신 행장 등을 정리해서 써야 해야 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이 부분은 삼국사기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사대주의자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김부식은 중국과 다른 한반도 고유 문화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데 몇가지를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삼국의 역사를 제후가 아닌 황제의 역사에 해당하는 '본기(本紀)'로 구성하였다는 점이다. 참고로 이후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는 《삼국사기》와 같은 기전체 형식을 따랐지만 고려의 역사를 본기가 아닌 세가(世家), 즉 제후의 역사로 기록하였다. "고구려사가 어디에 귀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진행 중이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존재로 인해, 고구려사는 중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32]
- 또한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33]에 의거해 저술한 《삼국사기》에서도 정작 고구려 시조, 신라 시조의 탄생 설화를 기록해 두었다. 또한 각종 당시 한반도의 기이한 설화들을 기록해두며 "믿지는 못하겠는데 일단 전해지니까 기록해둡니다."라고 각주를 달아놓기도 했다.[34]
- 중국측 기록과, 한반도 기록이 서로 엇갈릴 때는 한반도 국가의 기록을 우선시했다. 예를 몇 가지 들면
- 경덕왕 본기의 왕의 사망 기록에 "우리쪽 기록에는 경덕왕이 765년에 사망했다고 나오는데 구당서랑 자치통감에는 767년에 죽었다고 나오는데 중국쪽 기록이 잘못인거 같은데?"는 각주를 달아놓았다.
- 태조왕 본기에는 "후한서에는 태조왕이 121년에 죽은 것으로 나와있는데 (우리 쪽 기록인) 해동고기에 따르면 121년에는 재위 69년째라 멀쩡히 살아있었음. 이거 중국 쪽 기록이 잘못된 것 같은데?"라는 각주를 달아놓았다.
- 유리왕 본기에 고구려측 장수 연비가 엄우에게 머리를 베여 머리가 왕망에게로 보내졌다는 기록을 적어놓으면서, 주석으로 "『한서(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이른다."는 내용의 글귀를 달아놓았다.
- 거서간, 마립간 같은 고유어 왕호는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이걸 제왕연대력에서 모두 '왕'으로 바꿔 썼던 최치원을 비판하는 논평을 넣었다.[35]사관이 논평한다.신라왕으로서 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차차웅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이사금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사람, 마립간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이다. 신라 말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서는 모두를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으로 칭하지 않았다. 혹시 그 말이 천박하여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서일까? 『좌전(左傳)』과 『한서(漢書)』는 중국의 역사책인데도 오히려 초(楚)나라 말인 ‘누오도(穀於菟)’,[36] 흉노(匈奴) 말인 ‘탱리고도(撑犁孤塗)’ 등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신라의 일들을 기록함에 그 방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본다.
- 중국에 항복하고 고구려를 멸망하게 한 연남생과 연헌성을 '남생, 헌성은 당나라에는 공신일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반역자다.'라고 사론에서 평가했다.
- 주필산 전투에 대해서도 "중국 사서에는 별다른 언급이 안되어 있는데, 내가 찾아보니 당나라 놈들도 고구려 만큼 피해를 크게 입은거 같단 말야. 중국애들이 쪽팔려서 안쓴게 아닐까?."라며 중국사를 디스하기도.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짝 못하였네. 영공(이세적)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였을 때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네.’라고 하였다. 비록 끝내는 스스로 탈출했으나 저와 같이 겁을 내었거늘 『신ㆍ구당서』나 사마공(司馬公)의 『자치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니겠는가.《삼국사기》
- 《삼국사기》 진삼국사표에선 "하물며 생각건대, 신라ㆍ고구려ㆍ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예를 갖추어 중국과 교통하였으므로, 범엽(范曄)의 『한서(漢書)』나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는 모두 열전(列傳)을 두었는데,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고기(古記)라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事跡)이 누락되어 있어서, 임금된 이의 선함과 악함, 신하된 이의 충성과 사특함, 나라의 평안과 위기, 백성들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 등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라면서 중국이 남의 나라 역사까지 왜곡을 한다는 것을 맨 처음 알린 사람이다.
- 당 태종과 대결해서 끝내 승리를 거둔 안시성주에 대해선 대단히 용기 있고 지략이 뛰어난 장수라고 극찬하고 있으며, 그런 장수의 이름이 후대에 알려지지 않음을 크게 아쉬워하고 있다.
- 을지문덕 열전을 보면 수서의 기록을 상당수 인용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교묘하게 평론을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을지문덕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있다. 관련 글을 참고하자.
정리하자면 김부식은 개인적으로 중국의 문화를 깊이 흠모했던 모화주의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사대주의자라 보기는 어렵다. 학자로서의 김부식은 유학의 대가답게 모화주의의 면모가 있지만 정치인로서의 김부식은 정치현실주의자였다. 묘청이 금나라를 공격해 우리의 옛 땅을 되찾자는 이상적 자주주의자라면 김부식은 현실적으로 지금 고려의 국력으로 창성하는 금나라를 적으로 돌리면 이득이 될 게 없으니 차라리 금나라와 관계 개선을 통해 국익을 얻어내자는 현실적 자주주의자였다.[37]
따라서 묘청과 김부식 간의 대결은 자주 대 사대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이상주의와 정치현실주의 간 싸움이라 보는 것이 옳다. 흔히 사대주의와 모화주의를 합쳐 사대모화라고 하기 때문에 양자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 김부식은 모화주의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화 왕조를 섬겨야 한다는 삼학사 같은 고지식한 사대주의자는 아니었다. 아니 그랬다면 송을 위해 금을 공격하는걸 찬성했을 수도 있다.
4.3. 본관?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여 낙랑왕이 된 것처럼 김부식의 작위가 낙랑군 개국후였던 것을 볼 때 김부식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경순왕과 같은 경주 김씨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고려사와 위키백과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김부식의 본관에 대한 의문은 김부식의 선조와 후손의 행적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면서 족보상 선후 관계를 고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나왔다. 김부식의 혈통은 위로 조상 2대, 아래로 후손 2대씩까지만을 정확히 상고할 수 있고, 김부식의 후손을 자칭하는 가문도 없어서 어느 집안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김부식이 혈통적으로 신라 왕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경주 김씨라고 보기도 한다. 김부식의 증조부인 김위영은 신라가 멸망하고 금성을 경주로 개편할 때, 경순왕을 따라 여러 귀족들이 개경으로 올라가는 와중에 경주에 남은 집단의 유력자로서 고려 태조가 경주의 주장으로 임명한 이래 일가가 경주에서 살았는데, 이 김위영이라는 사람의 출신을 알 수 없다. 경주 출신이니 신라계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반드시 신라 국왕 계열의 가문은 아닐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가야 김유신계인 김해 김씨가 있다. 또한 신라 왕 계열이라 할지라도 경주 김씨만 있는것이 아니다. 경주 김씨 말고도 강릉 김씨, 부안 김씨, 통천 김씨 등이 있다.[38]
김부식의 손자인 김군수가 동도객관이라는 시를 지어 거기서 자신을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라 칭하는데, 강릉 김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주 김씨는 내물왕계로, 무열왕의 부계 후손은 아니다. 신형식 교수가 쓴 <신라통사>라는 책에는 고려 개국 당시에도 무열왕계는 강릉으로 물러나 세력이 위축된 상태였기에 경주와 관련이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신라 하대의 중시조인 원성왕 김경신이 외가 쪽으로 무열왕의 후손이므로 경주에서도 무열왕의 혈통 자체는 이어져 왔다. 조선시대 부계 조상을 중시한 것과는 달리 신라시대와 고려 시대의 상속 문화는 부모 양계 혈통에 대한 권리를 복합적으로 물려받았으므로, 모계로 무열왕의 후손이므로 그런 언급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일단 삼국사기 기준으로 박씨의 부계 혈통은 아달라 이사금 대에서 끊기지만 신라 말기에 다시 박씨 혈통으로 왕이 된 신덕왕의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 두 시대에서 모계 혈통을 내세우는 여성들이 쉽게 발견되는 반면, 남성의 사례는 아직 불분명하고 추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다.
이와 별개로 조선 왕조의 관찬 사서이자 공식 정사인 고려사에선 김부식의 둘째 형인 김부일 열전을 통해 김부식이 신라종성(新羅宗姓)이라고 했다.
김부일은 자가 천여로 경주 사람이다. 그 선조는 신라종성(新羅宗姓)이다.
태조가 처음 경주를 두어 김위영(金魏英)을 주장으로 삼았으니, 그가 부일의 증조다. 아버지 김근(金覲)은 국좌제주 - 좌간의대부를 지냈다. 형제는 4인으로, 장남은 김부필(金富弼), 다음 김부일(金富佾), 다음 김부식(金富軾), 다음 김부의(金富儀)다.
다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김부식의 증조부 김위영이 어떤 신라국왕의 몇 대손인지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의혹의 여지가 남아있긴 하다. 또는 김씨인 것만 보고 김부일 일가를 신라 종성이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태조가 처음 경주를 두어 김위영(金魏英)을 주장으로 삼았으니, 그가 부일의 증조다. 아버지 김근(金覲)은 국좌제주 - 좌간의대부를 지냈다. 형제는 4인으로, 장남은 김부필(金富弼), 다음 김부일(金富佾), 다음 김부식(金富軾), 다음 김부의(金富儀)다.
고려사 김부의 열전을 보면 과거 김부의가 자기 집에서 우연히 '청당지인(靑幢之印)'이라고 적힌 신라의 도장을 발견했다고 한다. 청당은 신라 수도[39]군 편제인 9서당 중 청금서당[40]을 의미하는데, 이 기록을 보면 김부식 형제가 경주에서 거주했던 것은 맞는 듯 하다. 결정적으로 동국여지승람의 마전군 편을 보면 숭의전[41]에 모셔진 고려시대 명신들의 약력이 기재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김부식의 본관을 경주라고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김부식의 본관은 적어도 김부식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경주였다고 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김부식은 경주 김씨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의 본관에 대한 의문은 김부식이 경주 김씨냐 아니냐 보다는, 김부식과 신라 왕실의 관계가 어떠냐는 의문에 가깝다.
5. 라이벌
평가가 크게 엇갈리지만, 김부식의 재능은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김부식 본인은 뛰어난 능력만큼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던 인물이었고 거기에 비타협적인 성품의 소유자라 이래저래 라이벌이 많았던 사람이었다.5.1. 정지상
동시대 인물인 정지상과 라이벌로 많이 부각되는 편인데, 현대 국문학계에서 고려시대 문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 정지상이고 김부식 역시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정지상과는 달리 김부식은 시보다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당송대의 고문체에 능한 문장가였다. 그 때 즈음 고려에서는 그간 대세를 이루던 사륙변려체 대신 고문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흔히 김부식이 문장에서 한 수 뛰어난 정지상을 질투했다고 하는 식으로 많이 언급되는데 사실 복잡한 속사정이 있다. 우선 정지상과 김부식은 동일한 연배가 아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정지상의 정확한 생몰연도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나이 차이는 알 수 없지만 과거에 급제한 시기가 18년 차이가 난다. 그런데 정지상은 초고속 승진하여 과거에 급제한지 불과 10년 정도 후에 이미 조정에서 큰 목소리를 내는 위치에 있어서 정지상의 실력이 출중했거나 음서의 혜택을 보았거나 둘 중 하나로 추정된다. 정지상이 조정에서 열심히 자기 소리를 내던 1120년대 중반이면 김부식은 관직에 진출한지도 30년이 넘은 중진이었고 나이도 50대에 이르고 있었다.훗날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김부식은 먼저 정지상부터 잡아 죽였는데 결국 정지상이 죽음을 맞으면서 둘의 관계는 끝난다. 정지상은 서경파였기 때문에 묘청과 연결고리는 분명히 있었지만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태평스럽게 개경에 남아 있었다는 것만 봐도 반란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때문에 묘청 토벌을 담당한 김부식이 개경에 있던 서경파인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의 목부터 날린 것은 동경파가 서경파를 "기회는 이 때다"하면서 제거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42] 이는 고려 건국 시기부터 있었던 고구려 계승주의와 신라 계승주의 간의 대립의 종결이기도 했다. 즉, 처음에는 예종이 윤관 등을 통해서 동북 9성을 개척한 시기까지 고구려 계승 세력이 주도했지만 외척 이자겸이 득세하여 금나라에 사대를 받아들이는 때는 신라 계승 세력이 정권에 중용되었다. 그런데 서경파인 정지상 등이 척준경 등을 동원해 이자겸을 제거하면서 이자겸에 협조한 동경파도 같이 눌러 버리다가 결국 척준경도 제거되면서 고구려 계승 세력이 정권을 대부분 장악하게 되고 이에 대한 절정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김부식이 이를 제압했고 그 결과 서경파가 완전히 박살나버린 것.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서 내용을 발췌해 편집한 야사 《백운소설》[43]에 의하면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이고 난 뒤 어느날 한 절의 뒷간에 쭈구리고 앉아 큰일을 보고 있었는데, 원한을 품은 정지상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 김부식의 고환을 덥썩 움켜쥐고 터트릴듯 말듯 오물락쪼물락 거리며 "이놈의 가죽주머니는 왜 이리 무르냐?"라고 묻자 부랄이 터질까봐 식은 땀을 흘리던 김부식은 그 희롱에 발끈하며 "네 아비 음낭은 무쇠였더냐!"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화가 난 정지상이 그 즉시 고환을 터트려 죽였다[44]고 전해진다.
또 백운소설에는 김부식이 시를 짓자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더 좋은 구절을 제시해서 김부식을 망신시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정지상이 죽은 후의 어느 날 김부식은 '봄'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柳色千絲綠 버들가지 천 가닥 실처럼 푸르고 / 桃花萬點紅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정지상 귀신이 김부식의 뺨을 때리더니 다음과 같이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버들가지가 천 가닥인지 복사꽃이 만 송이인지 일일이 세어 보는 바보가 세상에 어딨냐? 시를 쓰려면 "柳色絲絲綠(버들가지 가닥가닥 푸르고) / 桃花點點紅(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라고 짓지 못하는 건가?"
겨우 두 글자만 바꿔서 김부식을 망신준 일화의 사실 여부야 어쨌든, 이 일화는 시를 퇴고하는 하나의 요령으로 인용되곤 한다.
정지상을 죽인 것 때문에 결혼이 어려워진 후손이 있다. 이 일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김부식의 본관이 경주 김씨인 것으로 단정짓고 있는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확실한건 아니다.[45]
고은이 만인보에서 김부식과 정지상에 대한 시를 썼는데 김부식에 대해 쓴 시는 김부식을 억지스러울 정도로 폄하하는 낡은 사관에 입각한 것이라 비판을 들을 소지가 어느 정도 있다. 고은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승전고도 올리지 않고 신라가 왜 가장 먼저 건국된 것으로 기록했느냐고 까는데 김부식은 고구려가 수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였고 특히 수양제를 격퇴한 을지문덕과 당태종을 격퇴한 안시성주에 대해서도 사론을 통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발해를 다루지 않은 것은 책이 삼국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되었다고 서술한 것도 김부식의 손에 들어와 있는 국내 사료에서 그렇게 기술되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46]
5.2. 묘청
본인이 토벌한 인물인 묘청과는 신채호가 떡밥의 불을 지핀 이후로 지금까지도 한국사 속 사상적 라이벌의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각각 사대주의와 자주의 대표나 유학자와 승려라는 구분점, 고구려계 서경파와 신라계 개경파의 대립이라는 등 여러 입장 등으로 라이벌 플래그를 형성하는 모양. 물론 이렇게 단순화해서 보기에는 많이 복잡한 부분.묘청과의 관계를 라이벌 구도로 인식하게 된 데에는 신채호의 영향이 컸는데 신채호는 묘청의 난이 실패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이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은 무자비하게 비난했다.[47] 신채호는 보수주의 유학자이자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게 되자 이후 한반도의 역사에서 진보가 거세되어 발전이 정체되었다고 보았고 최종적으로는 이 정체성 때문에 일제강점기가 왔다고 보고 있다.[48] 신채호가 이름있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라 김부식을 까내리는 논평은 국사 교과서나 교재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고 현대 사람들이 김부식을 무조건 중국에 굽신거리는 사대주의자라고 여기게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49]
5.3. 윤언이
묘청이나 정지상에 비해 덜 알려진 감이 있지만 윤관의 넷째 아들인 윤언이와도 여러 사연이 얽혀 거의 평생을 대립했다. 윤관은 예종의 명으로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의천의 제자들이 나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항의를 하게 된다. 이에 예종은 김부식에게 비문을 고치게 하는데, 문제는 이때 김부식은 아직 신진 관료에 불과했고, 또한 형식적으로라도 사양하지를 않아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분노를 샀다. 이에 대한 복수로 윤언이는 김부식이 자기 전공인 <주역>을 인종에게 강의하는 자리에서 그가 진땀을 뺄 정도로 몰아붙여 무안을 주었다.묘청의 난 진압 때 함께 참전하여 공을 다투기도 했는데 총대장 김부식은 윤언이가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부대를 작전 방향과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정지상 등과 어울러지냈다는 이유로 묘청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는 윤언이를 지방으로 좌천시켜 윤언이는 한동안 중앙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게 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김부식이 가장 껄끄러웠던 대상은 정지상이나 묘청보다는 윤언이가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하고 있다. 윤언이의 아들인 윤인첨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계에 있을 때 낮은 관직을 전전한 것만 보더라도 김부식 집안과 윤관 집안의 관계는 결국 김부식 집안이 무신정변으로 끝날 때까지 껄끄러움을 유지하였다.
5.4. 장흥 임씨
김부식의 최종보스는 외척 가문인 장흥 임씨의 임원후와 공예태후였다. 장흥 임씨는 묘청 세력이 흥성할 당시 가장 크게 반기를 들고 죽여야한다고 강력히 청했고, 이내 김부식과 친한 관계가 된다.하지만 이들을 갈라서게 한 결정타는 외척 문제와 후사 문제였다.
김부식 계열은 인종의 신임을 얻으면서 그가 지정한 공식 후계자인 의종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정작 인종의 왕후 공예태후나 임원후 일가는 세간의 평이 괜찮았던 의종의 동생 대령후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후사문제가 제대로 꼬였고, 마침내 또 김부식은 갈라서게 된다. 임원후는 역사학에 조예가 깊었지만 삼국사기에서 이 사람의 이름이 빠졌을 정도다.
6. 기타
-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김부식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기록에는 '얼굴은 시커멓고 키가 크고 뚱뚱하며 눈이 튀어나왔다'고 적혀 있다. 서긍은 김부식에 대하여 '고금의 일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 대학사였다'고 기록했다. 또한 서긍은 소동파 빠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김부식, 김부철 형제의 이름 돌림자를 보고 슬그머니 어떤 뜻인지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 그가 등장하는 가사가 "죽림칠현 김부식"인데 이 때문에 김부식이 죽림칠현이었다거나 혹은 죽림칠현과 관계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김부식은 고려의 죽림칠현과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고 죽림칠현보다 한 세대 전의 사람이다. 죽림칠현은 김부식이 죽고 난 뒤인 무신정권기에 주로 활동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가사는 단순히 죽림칠현과 김부식을 동시에 나열한 것뿐이다.
恢恢一道 분명한 하나의 가르침을
落洛其音 분명하게 이야기하건만
機聞自異 근기에 따라 서로 다르게 들으니
大小淺深 크고 작고 깊고 옅은 이해의 차이가 있네.
如三舟月 같은 달이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과 같고
如萬竅風 바람이 구멍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것과 같네.
至人大鑒 지인(至人)의 큰 이해로 보면
卽異而同 다르면서 또한 같도다.
瑜伽名相 유식[瑜伽]은 명상(名相)을 이야기하고
方廣圓融 화엄[方廣]은 원융을 이야기하지만
自我觀之 내가 보기에는
無往不通 서로 통하지 않음이 없네.
百川共海 백 개의 강이 모두 같은 바다로 가고
萬像一天 하나의 하늘이 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네.
廣矣大矣 크고도 넓어서
莫得名焉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뿐이다
- 화쟁국사영찬(和諍國師影贊). 원효를 칭송하는 시이다. 출처는 동문선.
落洛其音 분명하게 이야기하건만
機聞自異 근기에 따라 서로 다르게 들으니
大小淺深 크고 작고 깊고 옅은 이해의 차이가 있네.
如三舟月 같은 달이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과 같고
如萬竅風 바람이 구멍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것과 같네.
至人大鑒 지인(至人)의 큰 이해로 보면
卽異而同 다르면서 또한 같도다.
瑜伽名相 유식[瑜伽]은 명상(名相)을 이야기하고
方廣圓融 화엄[方廣]은 원융을 이야기하지만
自我觀之 내가 보기에는
無往不通 서로 통하지 않음이 없네.
百川共海 백 개의 강이 모두 같은 바다로 가고
萬像一天 하나의 하늘이 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네.
廣矣大矣 크고도 넓어서
莫得名焉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뿐이다
- 화쟁국사영찬(和諍國師影贊). 원효를 칭송하는 시이다. 출처는 동문선.
- 유학자임에도 도저히 유학자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시를 적었고 불교에 대한 조예는 생각보다 깊었다. 불교를 비판했음에도 정작 본인 역시 불교를 좋아했던 유학자인데 실제로 개인 절간도 있었다. 실제로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 유학자들로부터 "유자의 탈을 쓴 불자"라고 비판을 받은 적은 있으나 정작 조선시대의 사대부들도 불씨잡변을 외치면서 뒤로 승려들을 만나거나 불경을 읽는 등 할건 다 했다. 당장에 불씨잡변을 쓴 정도전부터가 그러했다.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 이터널스의 프리퀄 만화인 타이인 코믹스 '이터널스: 500년의 전쟁' 3화에 등장한다. 그곳에서 고려에 살고 있던 구미호 형태의 데비안츠를 토벌하러온 킨고와 스프라이트를 만나게 되고 스프라이트의 환영으로 삼국시대를 생생하게 본 덕에 삼국사기 편찬에 도움이되었다는 설정이다. 킨고와 스프라이트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삼국사기를 선물로 준다.#
- 2019년 장대호가 자신의 범죄가 정당한 것을 알리기 위해 김부식에 대해 언급을 한 이력했다. 그는 "고려시대 김부식의 아들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이 있었다. 정중부는 그 원한을 잊지 않고 있다가 무신정변을 일으킨 당일 잡아죽였다. 그냥 장난으로 수염을 태운 것 같지만, 당사자한테는 상대방을 죽일 만큼의 큰 원한이다"라고 했다. 일부는 이를 범죄자의 황당한 변명이라고 하나, 장대호가 범죄를 일으킨 동기가 피해자에게 받은 심한 모욕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애초에 장대호는 숙박업 종업원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피해자인 조선족은 그런 사람을 순식간에 눈이 뒤집히게 만들 정도로 심한 모욕을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한국사에서 최초로 고양이를 언급한 기록을 남겼다. 아계부(啞鷄賦)라는 부에서 도적을 보고도 짖지 않는 개, 쥐를 보고도 잡지 않는 고양이, 새벽이 되어도 울지 않는 닭을 언급한다.
- 정강의 변을 간접적으로 목격하였다. 1126년(인종 4) 9월 고려는 송 흠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명목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이 대표가 김부식이었다. 즉위 축하는 명목상이었고, 실제 이유는 송나라의 군사 지원 요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신이었다. 당시 송나라는 금나라의 침공을 받고 있어서 흠종의 즉위를 알리러 온 사신을 통해서 고려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지만 고려는 일단 이를 거절했고, 이후 김부식을 비롯한 사신단을 보내서 이 문제를 다시 상의하려 했다. 하지만 송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김부식은 수도 개봉까지 가지 못하고 송의 항구도시인 명주에서 대기해야 했는데, 그 사이에 개봉이 함락되고 흠종, 휘종을 비롯한 송의 황실이 포로로 끌려가는 사태가 벌어진 것.[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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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부식의 본관을 명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논란 항목 본관? 문단 참조. 고려사는 김부식의 성씨가 신라의 국성이라고 명시했지만 3대조 이상과 3대손 이하를 알 수 없음을 들어 부정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면서 낙랑왕(樂浪王)이 된 것처럼, 김부식 역시 낙랑후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적어도 김부식 당대에는 경순왕의 김씨와 같은 김씨로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2] 金敦時[3] 고려 시대의 대표적 권신으로 이자겸과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들(정중부, 최충헌, 최우 등)과 함께 거론된다. 다른 시대/국가의 권신으로는 고구려의 명림답부,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실질적인 왕의 위치에 있었던 수준의 권신이었다.), 신라의 김유신, 김양, 김위홍(3명 다 사후 왕으로 추존되기까지 할 정도의 권신이었다.), 조선의 한명회, 윤원형, 김자점, 송시열, 김조순 등이 있다.[4] 삼사(관직) 문서 및 수춘궁 문서 참조.[5] 경원 이씨 가문.[6] 무신 집권기의 신라 부흥 운동인 동경의 난으로 인해 중심지였던 경주로 격하되게 된다.[7] 이자겸의 난.[8] 김부식이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것은 아니다. 인종이 직접 최사전을 기용해 상황을 타개한 것이다.[9]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개경에 남아 있었다는 것부터가 정지상 등이 묘청의 반란과 연관성이 약하다는 증거이지만 어쨌든 같은 서경파였으므로 왕에게 알리지 않고 벤 뒤 보고했다. 물론 당대의 라이벌로써 사적인 감정이 들어갔을지도 모르지만.[10] 김부식의 동생 김부의의 제안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김부식이 이러한 전략적 의도와 결과를 예견할 식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11] 동생인 김부철의 능력도 컸다. 지구전도 김부철이 장기 전략책인 평서십책(平西十策)이다.[12] 고려의 최고 중앙 정치 조직인 중서문하성의 장으로 신라로 치면 상대등, 조선으로 치면 의정부의 영의정에 해당한다.[13] 다만 윤언이와 김부식의 관계는 오래 전부터 뒤틀린 관계였는데 김부식이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벌어진 비문 사건부터 시작해서 질긴 악연은 20년이 넘도록 지속된다.[14] 이는 김부식이 사망했을때의 나이가 77세로 당시로서는 굉장히 장수했던 것이 컸다.[15] 제석(除夕)[16] 잡기(杂技)라고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귀신쫓는 춤 같은 것을 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7] 고려시대의 내시는 조선시대의 내시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엄연한 관직으로 왕의 최측근역을 맡은 정식관료들이었으며, 다른 관직을 지닌 자가 겸임하였다. 고려 중기까지는 유력 귀족 자제들이 주로 맡았으며 이를 환관이 맡게 되는 것은 원간섭기를 거쳐 가며 원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다. 그래서 고려 초중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선 내시에게 수염이 있다.[18] 견룡군은 고려 왕실을 지키는 근위대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경호실. 즉 대통령비서실 하급 공무원이 대통령경호실 요원의 수염을 태워먹은 것이다.[19] 정중부는 외모도 훤칠하고 멋진 수염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외모가 왕과 여러 대신에게 주목을 받자 김돈중이 이를 시기하여 벌였다고 한다.[20] 신체발부 수지부모가 중요했음을 생각하면 정중부의 입장도 이해는 가나, 상대가 먼저 수염을 태웠다곤 하나(폭력) 정중부도 폭력으로 김돈중을 두들겨 패면서 욕설을 날린 잘못은 있었다. 법치를 따르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결국엔 피장파장에 불과했었는데, 김부식은 아들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정중부가 아들을 때린 것만을 나무란 것이다. 특히 인종이 김돈중의 잘못이 있기에 고문을 반대하는데도 해달라고 한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걸 지켜보던 무신들은 그야말로 어이없고 기가 찼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 때문에 정중부는 김부식 일가에게 크나큰 원한을 품게 된다.[21]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22] 사실 김돈중은 이것 말고도 또 하나 죄를 지었는데 1167년에 김돈중의 실수로 그의 말과 한 무신이 말이 부딪히는 사고가 벌어졌는데 그러면서 그만 그 무신이 실수로 활을 오발해버렸다. 이것도 문제였지만 하필 그 오발된 화살이 의종 앞에 떨어졌다. 의종은 이를 암살시도로 여기고 범인을 색출했는데 김돈중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무신들에게 죄를 떠넘겨 무신 여럿이 유배에 처해졌다. 정중부가 당한 일이야 정중부 개인의 일이라 쳐도 이 사건으로 인해 김돈중은 무신 전체의 적으로 찍혔다. 김돈중이 죽는 와중에 이걸 들먹이며 스스로가 죽어도 싸다고 말하고 죽임당했을 정도로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 무신정변 당시 사실 무신들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문신들을 싹다 죽이고 싶어한 이들도 있었고, 적당히 죽이자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김돈중이나 한뢰같은 원흉들은 죽이자는데 동의했다.[23] 仲尼鳳賦, 중니는 공자의 자로 사기의 열전 중 하나인 중니제자열전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자를 봉황에 빗대어서 칭송하면서 자기도 공자의 뜻을 따르고 싶다는 글이다.[24] 흔히 고려는 불교의 나라, 조선은 유교의 나라라는 편견이 깊숙히 박혀있는데 고려의 국교가 불교라는 주장은 애저녁에 논파되었고, 고려도 유교가 통치이념이었다[25] 게다가 동생 이름조차도 소식의 동생인 소철에게서 이름을 따와서 김부철이다.[26] 그러나 비슷한 예로 일본의 미나모토노 요시미츠도 신라명신의 신사에서 성인식을 한 뒤 신라사부로라는 아명을 부여받았으나 이를 두고 미나모토가문이 신라에게 사대했다고 비난받지는 않는다.[27] 오히려 김부식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제후국이면서 세가가 아닌 천자국의 역사인 본기를 쓰는게 불손하다는 식으로 까였다. 어떤면에서는 자주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 미묘하다.[28] 거기다 당시 고려는 여진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어차피 쳐봤자 이득은 별로 없이 북송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라 그리 내키는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강동 6주를 얻은 이상 어지간해서는 침략을 받더라도 방어하기 어렵지도 않았으니 굳이 전쟁을 먼저 벌일 필요가 없었던 셈.[29] 심지어 삼국사기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명칭을 이어받았지만, 사마천처럼 김부식이 집에서 홀로 만든 사서가 아니라 왕의 명령을 받아서 편찬작업을 시작했으며, 김부식은 지휘와 감독을 맡아서 완성된 후에는 조정에서 왕과 대소신료들이 편찬내용을 확인하였다.[30] 환자 계열 추종자라거나, 일본이라거나, 중국이라거나 꼽아보면 꽤 많다.[31] 삼국사기 본기를 보면 알겠지만 4세기까지의 경우 신라 본기는 고구려 본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32] 보통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그 나라의 정통성을 증명할 가장 큰 증거로 본다. 더구나 본기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자주성이 더 크게 나타난다.[33] 군자는 기이한 것을 쓰지 말아야 하며, 없는 이야기도 지어내어선 안된다.[34] 이렇게 김부식이 남긴 탄생 설화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의 탄생 설화다. 그러니까 주몽 신화와 박혁거세 신화가 오늘날까지 알려지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는 김부식이 기여한 바가 크다는 뜻이다. 그나마 수로왕 탄생 설화는 싣지 않았는데, 이건 단순하게 수로왕이 다스린 가야가 열전으로도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부식은 박씨 시조인 박혁거세와 함게 석씨, 김씨의 시조가 되는 석탈해, 김알지의 탄생 설화는 빼먹지 않고 기록했는데 이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의 탄생 설화다.[35] 물론 최치원이 촌스럽다고 왕이라고 바꿨다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36] 사실 이건 인명이라서 당연하지만.[37] 사실 당시 설령 금나라를 친다고 한들 고려 입장에서는 딱히 이득될 것이 없었다. 단독으로 쳐봤자 금을 완전히 만주에서 몰아내는 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송과 연합한다고 해도 송이 먼저 금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송만 좋은 일 시켜주는 꼴이다. 당시 송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면 고려의 협력이 필요했지만 고려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급한 땅도 없었다. 이전에 금나라 이전에 요나라가 점거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에 보주성을 요금 교체기에 고려는 점령하고자 하였는데, 이곳 성 하나 점령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장에 금나라가 이를 핑계로 전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냥 넘어가줬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금나라와의 전쟁을 할 상황도, 명분도 없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일전에 이미 남송은 고려를 상대로 외교적 결례를 저지르는 병크까지 터뜨렸다.[38] 신라 김씨 왕족 계열의 가문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신라 김알지 후손들의 연합체인 ‘신라김씨연합대종원’도 있는 형편이다.[39] 즉 지금의 경북 경주시.[40] 청금서당의 구성원은 백제인의 후손이었다. 즉 김부일 일가의 조상이 백제인의 후손이었다가, 통일 신라 시기에 김씨를 칭했을 가능성도 있다.[41] 연천에 있는 4명의 고려 왕(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고려의 명신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42] 당장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모두 당시 사람들이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의 재주가 자기보다 뛰어난 것을 시기하다가 이번 일을 기회로 정지상을 쳐내 버린 것"이라고 수군댔다고 적고 있으니 말 다했다.[43] 조선 시대 사람인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엮은 《시화총림》에 31편 중 28편이 수록되어 있다.[44] 판본에 따라서는 이 부분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뒷간에 빠져 죽었다고 좀 순화하기도 한다.[45] 사실 밑에 댓글보면 알 수 있듯이 글쓴이가 초면에 대놓고 자기 본관을 모르는 티를 내서 어르신한테 찍힌 것에 가깝다.[46] 아무래도 통일신라 대에 신라의 정통성 우위를 드러내기 위해 신라의 건국연도를 앞당긴 것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다. 물론 신라가 고구려, 백제보다 먼저 건국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빠른 건국이 꼭 빠른 국가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 물론 그렇게 따진다면 고구려나 백제도 건국 자체는 신라보다 더 빨랐거나 비슷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해진다.[47] 《조선사연구초》의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부분.[48] 제일대사건이라는 표현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채호는 김부식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 평가를 내리며 일제강점기를 부른 역사적 죄인 취급을 하고 있다.[49] 함규진이 쓴 <역사법정>이라는 책에서는 아예 피고 김유신을 취조하는 민족주의 검사 신채호와 김유신을 옹호하는 사대주의 변호사 김부식 구도로 진행했다. 여기서 김부식은 실제 역사에서 신채호 못지않게 꼬장꼬장한 노인네였는데도 무슨 중국에 굽실거리며 노회한 대신이라는 이미지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작가의 의도적인 비틀기가 들어갔지만 막바지에 등장한 소정방한테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면서 골수까지 중화주의자는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나마 이 정도는 양반인데 한창 역사 비틀기 내지 역사 재조명 붐이 불었을 때 나왔던 황근기 작가의 <엽기 고대왕조실록>(원래는 딴지일보 출신 이성주가 쓴 <엽기 조선왕조실록>의 스핀오프 개념. 그래서 작가도 다르고 필력이나 문체,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도 다르다.)에서는 한 파트를 할애하면서 마지막 장에 작가가 참고한 서적이 무색하게 김부식을 모화주의, 중화주의, 사대주의에 찌들은 꼰대로 묘사했다.[50] 역사스페셜에서는 이 때문에 이상주의적인 묘청,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었다고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