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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제4대 무신 집권자 이의민 | 李義旼 | |
출생 | 미상 |
고려 동경(東京) (現 경주시) | |
사망 | 1196년 5월 15일[1] (향년 불명) |
고려 미타산(彌陀山) 별장[2] (現 개성시 근교?) | |
본관 | 정선 이씨 |
신장 | 8척(196cm)[3] |
형제자매 | 3남 중 3남 |
배우자 | 부인 최씨 |
자녀 | 아들 이지순, 이지영, 이지광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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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무신(武臣).
고려 무신정권의 제4대 집권자로 계림의 천민 출신 한량에서 시작해 고려를 호령하는 권신의 자리까지 오른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허나 이렇듯 출세했지만 탐욕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해 여러 난행을 벌였고, 그만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 일생
무신정변 이전 이의민의 관직 | ||
직위 | 대정(隊正) | 소속 부대는 국왕의 친위대로 보임. 종9품 |
별장(別將) | 대정에서 승진. 정7품. |
3남 중 막내로 아버지 이선은 소금과 체(篩)를 팔던 장사꾼이었고, 어머니는 옥룡사라는 절의 노비였다. 이의민이 어렸을 때 이선은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은 채로 황룡사 9층 목탑을 올라가는 꿈을 꾸었고 깨어난 뒤 이의민이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라 여겼다.
기골이 장대해 키가 무려 8척, 환산하면 약 196cm 수준에[4][5] 완력이 유달리 빼어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형들과 함께 횡포를 부리다 경주 안렴사[6] 김자양의 손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 끝에 두 형들은 옥에서 죽었으나 이의민은 혼자 살아남았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김자양이 이의민을 무관으로 발탁하였고, 아내와 함께 개경으로 상경해 경군에 속하게 되었다. 수박 실력이 뛰어났던 그를 의종이 눈여겨 보아 최하급 장교인 대정에서 단번에 정7품 별장까지 파격 승진시켜줬다.
2.2. 출신
정선(旌善) 이씨(李氏) 문중에서는 자신들의 시조가 이양곤(李陽焜)이고, 이의민은 그의 5대손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양곤은 베트남 이조의 제5대 황제인 신종(神宗)의 동생이며 송나라를 거쳐 고려로 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영 무리가 있는데, 먼저 이양곤의 망명 자체를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데에 문제가 있다. 그는 제위 다툼에서 밀려난 후 송나라로 망명했다가 1123년 금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고려로 재차 망명했다고 하는데 신종이 1116년생이므로 이양곤은 아무리 일찍 태어났어도 1117년생이고, 이 말은 7세에 불과한 어린이가 2번이나 망명을 했다는 말이다. 또한 이의민의 생년이 분명하지 않지만 1160년대부터 활동하고, 무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1117년생의 아들이라면 모를까, 5대손씩이나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부자 관계라면 납득이 되지만 이의민의 아버지는 《고려사》 <이의민 열전>에 떡하니 기록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베트남 황손설은 정선 이씨 문중의 족보에만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인데 정선 이씨의 첫 족보는 조선의 숙종 재위기인 1677년에 가서야 편찬되었기 때문에 이의민이 베트남의 황손이라는 설은 전형적인 숭조미화의 허황된 이야기이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중국의 사서를 구해 읽어보는 게 어렵지 않았으므로 숭조(崇祖) 과정에서 《송서》 등을 참고하여 만든 이야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2.3. 무신정변
무신정변 이후 이의민의 관직 | ||
직위 | 중랑장(中郞將) | 정5품 직위. 무관직 중 4번째로 높다.[7] |
장군(將軍) | 정4품 직위. 무관직 중 3번째로 높음. |
이의민이 군인이 되어 장교로 특진했을 시기는 문관과 무관의 갈등이 격해지고, 의종이 주색에 빠져 국정이 혼란해져 있었던 때였다. 1170년 8월 마침내 그동안 쌓인 불만이 폭발한 정중부, 이의방 등이 보현원에서 무신정변을 일으키자 이의민 역시 이에 가담해 문신들을 마구 학살했다. 기록으로는 이의민이 죽인 사람의 숫자가 매우 많았다고 하는데 그의 행적을 감안해보면 그가 문신들에게 큰 원한이 있거나 싸이코패스였던가 혹은 무신정변 당시 의종의 총애를 받은 무신이라서 함부로 문신들을 옹호했다가는 자칫하면 본인 또한 친문신파로 간주되어 살해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더 설친 면모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의종의 총애를 받던 무사라 무신정권에 바로 신용받지는 못했는지 무신정변의 주역 가운데 얼굴마담이었던 정중부를 제외한 나머지 2명인 이의방, 이고의 직급은 정8품 산원의 견룡행수로서 정7품 별장인 이의민의 하급자들이었으나 정변을 통해 곧바로 중랑장으로 진급했고 의종을 폐위한 후, 명종을 옹립하고 대장군으로 진급하는 등 초고속 승진을 하는 동안 이의민은 장군 진급에 만족해야 했다.[8]
이고는 가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이의방은 천출 이의민과 대비되는데 전주 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의방의 조부 이궁진은 호장이었고, 부친 이용부는 대장군(종3품)을 지냈다. 호장은 향리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대표자들이 대물림하는 직책이니 전주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토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의방과 이고가 역임하던 견룡행수는 임금을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경호원의 위치에 있던 요직으로 임금이 총애하면서 특진까지 시켜줬던 이의민은 이 보직을 맡지 못했다.[9] 족보의 기록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이의방의 직책이나 인맥 등으로 미뤄보건데 천출 이의민이 계급대로 내려다보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2.4. 의종 시해
의종 시해 이후 이의민의 관직 | ||
직위 | 대장군(大將軍) | 종 3품 직위. 무관직 중 2번째로 높다.[10] |
1173년 10월 무신들의 정변에 반발한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의 의종 복위 음모를 막기 위해 산원 박존위와 함께 의종의 유배지인 경주로 직접 내려갔다. 같이 술상에 앉아 기회를 엿보다가 의종의 척추를 접었다 펴서[11] 시해한 후 시신을 가마솥에 넣어 연못에 던져버렸다. 그래도 한때는 자신을 총애하던 군주였는데 통수 제대로 갈긴 셈.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왕을 끌어내서 곤원사의 북쪽 못가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가 담요로 싸고 2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중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의종 시해의 공을 세워 대장군으로 승진하지만 자신을 후대해 준 의종을 직접 시해했기 때문에 이후로 두고두고 반대파에게서 배은망덕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낙인이 찍혀 버렸다. 무신정권 제3대 집권자였던 경대승이 집권한 후 축하연에서
"선왕을 죽인 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그대들은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
라고 일갈한 것이 대표적이다.2.5. 무신정권의 해결사
조위총의 난 토벌군 | ||||
원수(元帥) | ||||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인첨 | ||||
부원수(副元帥) |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기탁성 | ||||
<rowcolor=#fff> 중군(中軍) 병마사(兵馬使) | 좌군(左軍) 병마사(兵馬使) | 우군(右軍) 병마사(兵馬使) | 전군(前軍) 병마사(兵馬使) | 후군(後軍) 병마사(兵馬使) |
상장군(上將軍) 최충렬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진준 |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경진 | 상장군(上將軍) 조언 | 상장군(上將軍) 이제황 |
<rowcolor=#fff> 지병마사(知兵馬使) | 지병마사(知兵馬使) | 지병마사(知兵馬使) | ||
섭대장군(攝大將軍) 정균 | 섭대장군(攝大將軍) 문장필 | 사재경(司宰卿) 하사청 | ||
기타 지휘관 | ||||
동로 가발 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 → 후군 총관사(後軍摠管使) 두경승 |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지병마사(知兵馬事) 이의민 |
이어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자 정동대장군 - 지병마사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조위총의 난을 진압했으며, 1177년 5월 보향산에 모인 조위총의 잔당을 공격하여 300여 명을 참수하는 등 대승을 거두고 개선했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던 도중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래도 군사를 이끌고 철령으로 돌격하여 적들을 개박살냈고, 그 다음 연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직접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수천명을 뚫어 적장의 목을 베었고 그 이후 적들은 이의민의 이름만 들어도 도망칠 정도였다. 그 공으로 상장군이 되었다. 다만 눈을 정통으로 맞으면 시신경과 뇌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죽는다. 그리고 눈 한쪽이 실명되면 그 쪽으로는 방향 전환이 힘들다. 사서에서 이의민이 애꾸라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선 이의민이 눈을 맞았다고 해도, 화살이 눈 근처를 스쳤다고 봐야 할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까지의 행적을 보면 무신정변 당시 가장 많은 문신들을 죽인 일이나 정치적 리스크가 큰 일임에도 불구하고 의종을 시해하고[12] 조위총의 난과 김보당의 난을 진압하는 등 무신정권의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며 무신정권의 중심에 남아있고자 했던 점으로 볼 때 출세 지향적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의종의 총애를 받은 간신 영의 같은 인물이 무신정변으로 인해 참수된 것과 달리 이의민의 경우, 단순히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라는 기록만 있지 이를 바탕으로 조원정과 석린처럼 재물을 탐했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으며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라는 이유만으로도 살해된 사람들이 있었던 무신정변 당시의 상황에서 특별히 이의민에게 신변의 위협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루어보면 이 때까지의 이의민은 처세술과 자기 관리에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6. 기해정변과 낙향
경대승 집권 시 이의민의 관직 | ||
직위 | 형부상서(刑部尙書) - 상장군(上將軍) | 형부상서는 형부의 장관이다. 상장군은 정3품 직위. 무관직 중 최고위.[13] |
1181년 형부상서 겸 상장군에 임명되었지만 청년 장군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기해정변) 중방을 무력화시킨 후, 무신정권 제3대 집권자로 군림하면서 폐왕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을 죽이겠다며 사병 조직인 도방을 동원해 노골적으로 그를 위협하자 4월에 병을 핑계대고 개경보다는 나름대로 기반이 있는 자신의 고향인 경주로 낙향했다. 이 때 이의민이 받은 신변의 위협은 꽤나 컸던 모양으로 위협에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노비들을 무장시켜 대비하기도 했으나 노비들인 그의 사병들은 전문적으로 전투 훈련을 받은 경대승의 도방 병력에 상대가 될 수 없었기에 무관의 최고직인 상장군 직위마저 내버리고 낙향했다.
2.7. 무신정권의 집권자
무신 정권 기구 | ||||
<rowcolor=#fff> 정치 기구 | 사병 기구 | 친위 겸 정규군 기구 | ||
<rowcolor=#fff> 연립 ~ 최충헌 | 최충헌 | 최우 ~ 임연 | 경대승 ~ 임연 | 최우 ~ 임유무 |
중방(重房) | 교정도감(敎定都監) | 교정도감 & 정방(政房) & 서방(書房) | 도방(都房) | 삼별초(三別抄) |
집권 시기 이의민의 관직 | ||
직위 | 공부상서(工部尙書) | 상서공부의 장관이다. |
좌복야(左僕射) | 공부상서에서 승진. 복야 계열의 직위. 중서문하성의 정2품 고문직이다. | |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 판병부사(判兵部事) | 좌복야에서 승진. 동~평장사는 정2품 재상직, 판병부사는 국방부 장관이다. | |
문하시중(門下侍中)[14] | 《고려사》 <두경승 열전>에만 기록됨.[15] | |
수직 | 수사공(守司空) | 좌복야와 같이 받음. 수직은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16] |
1183년 7월 경대승이 병을 앓은 끝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권력에 공백이 생겼다. 그러자 명종은 경대승의 위협을 피해 경주로 낙향해 있던 이의민을 불러들여 1184년 2월에 공부상서 직에 임명했는데 이는 무신정변이라는 비정상적 쿠데타에 의해 옹립된 정통성이 약한 왕의 정권 보위 차원에서 행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경대승의 책임도 분명히 있는데 경대승은 '무신정변 이전으로 나라를 되돌려 놔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고, 문신들은 이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무신정변 이전으로 나라를 되돌려야 한다면 당연히 무신들에 의해 왕위에 올라 정통성에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명종 입장에서는 경대승과 그 주장에 동조하는 문신들을 마냥 신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의민이 다시 수도로 돌아오게 되자 곧 이의민의 천하가 열리게 되었고, 벼슬도 수사공 좌복야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1190년 동 중서문하 평장사 판병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194년에는 공신에 임명되는 영예를 누린다.
그러나 권세를 누리는 것에서 한발 더 나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야심이 생긴 이의민은 <십팔자위왕>을 퍼뜨리며 반란을 일으킬 궁리를 하게 된다. 이 때부터 집에다 사당을 차려놓고, 경주 일대에서 널리 믿던 두두리라는 목신(木神)을 밤낮으로 섬겼다고 한다.
이의민은 자신이 최고 실권자였지만 천민 출신이라는 신분적 콤플렉스 탓인지 항상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무신정권 자체가 피바람으로 얼룩진 정권으로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이 죽는 일종의 배틀로얄 서바이벌 자체였다. 그 난장판 속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며 그 자리에까지 올라왔으니 말이다. 사료에 따르면 신라 부활을 목표로 김사미·효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의민이 직접 식량과 무기 지원도 했다고 한다. 김사미·효심의 난은 양인들의 농민 전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혹 자신의 신분에 동병상련을 느낀 게 아닌가 추측된다. 자기 고향인 경주와 같은 구 신라 지방에서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들을 이용해 반역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의민이 죽은 뒤 그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이의민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한 후대의 조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의 이의민 정권은 최충헌처럼 이의민 단독으로 정국을 운영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고, 조원정, 두경승과의 연립 정권의 집단지도체제 성향을 띄고 있었다. 중간에 조원정, 석린이 두경승과 문극겸으로부터 횡령 혐의로 탄핵당해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처형당했으나 두경승은 이의민이 죽는 순간까지도 서로 견제하며 정국을 운영하는 사이였다. 이는 이의민이 절대적 독재자가 아닌 이의민 정권이 무신들의 집단 과두제로써 이의민의 권력기반이 상당히 강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데 이의민의 폭주를 염려한 명종의 안전 장치로 풀이된다.
2.8. 병진정변: 처참한 말로
하지만 이의민은 사소한 문제로 인해 권력과 생명까지 송두리째 잃게 되는데 바로 아들들이 저지른 만행 탓이었다. 김사미·효심의 난 토벌대에 파견된 장남 이지순은 반군과 내통해 관군이 여러 번의 싸움에서 패배한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는데, 이를 들킨 탓에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17] 다른 아들 이지영과 이지광도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나쁜 짓들은 골라 했는데 이 둘을 가리켜 쌍도자[18]라는 악명으로 불렀을 정도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19]를 다짜고짜 강탈해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려사》에는 워낙 기록이 간략하여 세부적인 정황을 알기 힘들지만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뺏었다는 기록과 더불어 이지영의 집에 최충수가 가서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말투가 무례해서 이지영이 결박했다는 기록 등이 나온다.아무튼 이것이 발단이 되어 최충수와 그의 형 최충헌이 이의민을 처단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결국 미타산의 별장에 있던 이의민은 최충헌 형제의 습격을 받아서 1196년 4월에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만다(병진정변). 이 때 최충수가 말을 타고 있는 이의민을 급습하여 칼을 휘둘렀으나 빗나갔는데 최충헌이 덤벼들어 그를 칼로 베어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에 목을 베었다고 한다. 아들인 이지순과 이지광은 그 자리에서 잠깐 피하여 군을 일으켜 반격하려 했지만 결국 이들도 붙잡혀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지순과 이지광이 먼저 죽자 이지영은 모든걸 포기했는지 마지막 죽기 전에 해주로 달아나서 거기서 잔치를 벌이며 즐기다가 그를 추격해 온 장군 한휴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이후 이의민의 일가 3대가 모두 몰살당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을 단순히 비둘기 1마리 때문에 죽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데 당시 우봉 최씨들 역시 음서로 벼슬을 할 만큼 나름 힘이 있는 가문이었는데 그런 최씨 일가의 재산을 이의민 일가가 함부로 뺏어갔다는 점은 이의민의 가족이 얼마나 앞뒤 안 가리고 행패를 부리고 다녔는지 짐작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의민은 본래 천민이었는데 천민 출신들이 귀족 출신의 무장들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고 다녔으니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던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도 한 가지 시사점으로 비둘기는 이의민과 그 일족을 제거하게 만드는 구실이었다. 《고려사》에 실린 <이의민 열전>과 <최충헌 열전>을 보면 이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에 최충수가 최충헌을 찾아가 이의민을 제거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바로 얼마 뒤에 이의민 일파가 제거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최충헌 형제가 일찍부터 이의민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발적인 사고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최충헌 형제가 애초부터 이의민을 죽일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면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찾아간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기 때문. 음모를 꾸미고 있으면 거사일까지 안 들키기 위해 싸매는 게 정상인데 이렇게 대놓고 이의민 일가에게 원한살 일을 할리가 없기에 정말로 그냥 비둘기 빼앗긴 것에 빡쳐서 질러버린 걸 수도 있다. 혹은 이렇게 당돌하게 찾아오는 놈이 암살 음모를 꾸밀리가 없다고 이의민이 역으로 생각하게 하기 위한 최충수의 큰 그림이거나, 아니면 그냥 최충수가 생각이 없어서 거사가 발각될 위험은 생각도 않고 돌려달라고 했거나.
연락용 비둘기였다는 말에서 나온 이야기로 하필 반란을 모의하기 위해 비둘기로 통신하던 중이었다는 추측도 있다. 혹시라도 그 비둘기가 반란에 대한 서신을 담고 있는 채로 강탈당한 것이 아닌가 싶어 최충수가 앞뒤 안 가리고 비둘기를 서둘러 돌려받으려 했다는 것. 아니면 돌려달라고 하지 않으면 너무 순순히 뺏기는 그림이 더욱 의심을 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짜 단순히 비둘기 때문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전서구로 사용할 정도의 비둘기라면 현대에도 억 단위를 넘는 가치가 있는데# 전 근대 시기라면 훨씬 귀했을 것이다. 억 단위의 가치가 있는 물건을 이유도 없이 탈취당하면 항의를 안 하는 게 이상한 수준이다.
3. 평가
고대부터 귀족정, '문'을 중시하는적인 성격이 짙었던 한국사에서 사실상 최초로 천민 출신으로서 자신의 "무력적 소양"만을 바탕으로 나라의 실권을 거머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런 사례는 이후 집권자 중 김준밖에 없다.조원정과 마찬가지로 출세 지향적인 인물로 보이는데 자신의 하급자들이었던 이의방과 이고가 어느새 자신의 품계를 뛰어넘어 상급자가 되고 이들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 되었지만[20] 초창기 무신정권의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며 다른 무신들이 꺼리는 의종 시해 같은 일과 두 차례에 걸친 반 무신 반란 진압같은 일을 기꺼이 맡아서 해내는 모습을 보였다.
무신정권의 권력자 겸 용력만 쓰던 불학무식한 무부라는 인식과는 달리 의외로 이고와 이의방, 조원정, 석린처럼 막 나가는 인물이 아닌 적어도 초반에는 자기 절제를 했던 정치군인의 능력이 출중한 성격도 보이는데, 훗날 자신의 집권기에도 두경승이 문하시중에 오르며 자신을 견제하자 이에 서로 주먹 자랑을 일삼을지언정 이전 무신 집권자들처럼 툭하면 군대나 사병을 동원하여 칼부림을 벌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대외적인 호방한 면모와는 달리 젊은 장군 경대승이 집권하자 도망쳐 두문불출한 것도 모자라 왕이 친히 불렀는데도 사양하기까지 했던 것을 보면 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입지가 불안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대승의 경우, 의종을 시해한 역적 이의민을 척살하겠다고 천명했으므로 어려웠을 것이고 왕인 명종이 그를 부른 것은 당시 조원정이 경대승 사후에 득세하던 시기라 주저했을 여지가 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의민이 누렸던 13년간의 장기 집권은 선대 집권자 경대승이 마련해놓은 기반 덕분에 가능했다. 경대승 이전의 무신 집권자들은 고려 무신들의 합좌 기관인 중방에 매여있어서 권한이 축소되어 있는 부분이 있었고, 이런 묘한 상황 덕분에 그나마 권력의 견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경대승의 집권 과정에서 벌어진 쿠데타에서 경대승이 첫 타겟으로 삼은 상대가 바로 중방인데다가 경대승의 집권 전후를 기점으로 하여 무신정변에 참여했던 고위 무장들이 줄줄이 자연사하는 바람에 경대승이 사망하자마자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던 것이다. 명종이 왕정 복고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무신정변을 통해 옹립된 왕인데다 왕정 복고를 꾀할 능력이 없어서 무장 세력이 아니면 자신을 옹호할 정치 집단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 때까지 생존해있던 무신정변 참여자 중 1명이었던 이의민을 복귀시켰다. 이의민의 폭주를 염려해서인지 명종은 안전 장치를 마련해 두었는데 이가 바로 두경승이다. 우직한 군인 스타일인 두경승에게 이의민보다 높은 품계를 줘서 이의민을 견제코자 한 것인데 이는 적중하여 이의민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간에 장장 13년에 달하는 동안 무신들의 연립 정권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한 뒤 그냥 명종을 허수아비로 그대로 둔 게 아니라 이의민의 국정 농단을 방조한 암군을 몰아낸다는 핑계로 정변을 일으켜 명종도 쫓아냈던 것이다. 그래도 최충헌에게 이의민의 행실이 반면교사가 되긴 했는지 명종을 죽이지 않고 섬으로 보내지도 않으며, 그냥 궁에 유배시키는 선에서 끝냈고, 훗날 희종이 최충헌 암살을 주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한 후 유배 보냈을뿐 해치지는 않았는데 이는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하면서 얻은 수많은 클레임과[21] 악조건을 지켜본 결과로 설명된다. 또한 문신들을 중용함으로써 무신 정권 시기 무너졌던 국가 체제를 회복했다.
4. 기타
- 이의민의 아내 최씨는 부창부수랬다고 상당히 포악한 인물이었다고 전하는데 이의민이 총애하던 여종을 때려 목숨을 잃게 했고 남편과의 불화가 극심해지자 남자 종과 간통까지 저질러 격분한 남편한테 쫓겨난 막장 여인이었다. 이의민은 최씨를 쫓아낸 이후에 많은 양갓집 규수들을 데려다 결혼하고 싫증나면 내쫓아버리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이런 부모를 닮아 아들들도 인성이 개차반이라 아무 여자나 겁탈하고 건드리기 일쑤였고 특히나 차남 이지영은 명종의 후궁을 능욕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의민의 딸 또한 부모를 닮아서 불륜을 일삼아 남편인 이현필이 딴 방에서 지낼 정도였으며, 그 아들 이진옥도 외가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렸다.
- "키가 8척이고 힘이 대단한 장사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걸로 봐서 상당한 강골이었던 모양이나 그 힘을 자기 마음대로 써서 심각한 민폐를 끼쳤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민폐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두경승과 힘 자랑을 벌였던 사건.[22] 이의민이 기싸움을 하는 도중 기선 제압을 위해 "어떤 자가 힘자랑을 하길래 내가 이렇게 때려 눕혔죠."라고 말한 뒤 건물 기둥을 주먹으로 후려쳐 기둥을 울리자 두경승은 "그래요? 나도 일전에 한 번 저잣거리에서 주먹을 썼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모두 도망갔답니다."이라고 대답하고 벽을 주먹으로 한 방에 뚫어버렸는데 이것이 다름아닌 당시 국가의 중요 회의 기관이었던 중서성에서 벌인 짓. 그 싸움의 정도가 극심하여 두 사람이 만나 눈을 마주치면 주위 사람들은 무서워서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당시에 이런 시도 나돌았으니 말 다했다.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위풍이 당당해서 진짜 재상 같거든황각에 앉은 지 삼사 년에주먹 바람은 만 번도 넘게 불었네吾畏李與杜屹然眞宰輔黃閣三四年拳風一萬古《고려사》 <이의민 열전> 중
- 드라마에서 표현되듯 이의민의 권력이 정점일 때는 신도재상이라고 불리기는 했으나 정작 그정도로 편하게 권력을 누리지는 못한 듯 보인다. 애초에 입지가 불안한 천민 출신에다가 선왕인 의종을 시해한 일은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시중이 되고서도 두경승과 집권 기간 내내 서열 싸움을 신경써야 했다.
그리고 이의민을 대표하는 것은 두두리라는 귀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래 두두리 신앙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민간신앙으로 믿는 목신이었다. 이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목랑을 숭배했던 이는 비형랑을 그 시조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 신앙을 믿고 있었던 이는 공교롭게도 이의민 본인 그 자신으로서 두두리 신앙을 숭배하는 가운데 있어서 점차 성격이 포악해지고 또한 힘이 강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 권세가 권불십년이라는 말처럼 어느날 두두리를 숭배하던 이의민을 보고 두두리가 통곡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지금까지 너(이의민)의 집을 잘 수호해 왔으나, 이제 하늘이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더 이상 너를 보호해 줄 수 없고 나도 의지할 곳이 없어져서 슬퍼서 운다."
이후 이의민은 향후 고려 시대의 무신정권을 주도하던 최충헌의 아우인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은 사건을 통해 결국 원한을 사게 되었고 이후 권력다툼에서 밀려나게 되면서 허무하게 참수를 당하게 되고 말았다.
물론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두두리 신앙은 소멸의 단계로 이어지게 되었지만, 이후 소규모로 유지되고 있다가 어느새 소멸하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럼에도 유독 이의민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이 두두리 설화가 그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었다는 것이 그 설로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 대중매체에서
-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한 세대 이후 시점이므로 극 중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나레이션이나 대사로만 언급되는데 최충헌의 졸기에 잠깐 언급되며 최우가 박송비와 김준에게 도방을 넘겨줄 의논을 하며 잠시 언급된다.
- 국내 학습만화 Why? 폐위된 임금 편의 의종 파트 마지막에 등장한다. 처음에는 폐하라고 하며 예의를 갖추지만 의종이 그러지 말라 권하자 마지막으로 예의를 지킨 것이라 답하고 달려들어 단숨에 허리를 꺾어버려 숨통을 끊고는 이제 나 같은 천민도 출세할 세상이 열린다고 냉정하게 읇조린다. 이에 분노한 신천지가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나쁜 놈이라 고함치자 그렇게 좋으면 너도 네 주인 곁으로 가라며 물에 던지고 미소와 강마루도 전부 던진다.
6. 같이보기
[1] 음력 4월 9일. 율리우스력 5월 8일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던 사이인 두경승보다 1년 먼저 죽었다.[2] 옛 동경의 영역이었던 경상남도 의령군이라는 설도 있으나 개성 근교의 어느 산이라 보는 게 개연성이 높다.[3] 《고려사》에 8척이라 나온다.[4] 현대에도 이 정도면 엄청난 장신인데 풍족하게 먹는 사람이 드문 고려시대니, 현대로 치면 230cm와 같은 수준이다.[5] 신라시대에 들여온 당척의 길이가 24.5cm이므로 계산을 하면 196cm가 된다.[6] 조선의 관찰사, 지금의 도지사와 비슷한 직위.[7] 상장군 > 대장군 > 장군 > 중랑장 순이다.[8] <무인시대>에서는 이의민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수박을 좋아한 의종에 의해서 낙하산으로 임명된 케이스였기에 이 부분을 따로 언급하면서 이 때문에 이의민은 오랫동안 계급에 비해 인정받지 못했었다고 나온다.[9] 최충헌의 가계에서 증조부 최주행과 조부 최정현이 관직을 지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10] 상장군 > 대장군 > 장군 > 중랑장 > 낭장 > 별장 > 산원 > 위 > 대정 순이다.[11] 단백질과 칼슘이 교차한 구조라 단단하면서도 어느 정도 탄력이 있고, 인대와 근육으로 지탱되고 있는 인체 중 중심을 이루는 척추는 상당히 단단하다.[12] 이 사건은 평생 이의민의 경력에 치명적으로 남았다.[13] 상장군 > 대장군 > 장군 > 중랑장 > 낭장 > 별장 > 산원 > 위 > 대정 순이다.[14] 정중부와 더불어 최고위 문•무관직을 모두 역임한 인물이다.[15] 1193년 쯤에 받은 듯한데 특이하게 《고려사》 <명종 세가>에는 나오지 않는다.[16] 이의민은 정2품, 사공은 정 1품.[17] 물론 이지순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 이의민의 장남이었으므로 따로 처벌은 받지 않았고, 정작 토벌군 총사령관인 전존걸이 고심 끝에 자결해버린다. 이의민의 아들을 처벌했다간 보복을 당할 것이 뻔한데, 적과 내통하는 배신자를 못본척 하고 전투를 수행하는 것도 말이 안 되었던 것.[18] 雙刀子, 쌍칼같이 흉폭한 아들.[19] 참고로 무슨 비둘기였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당시 무신들이 쓰던 전서구였다는 추측도 있고, 애완 비둘기였다는 추측도 있다.[20] 이의민은 원래 신분이 노비였기 때문에 일자무식에 천민출신이 다수인 무신들 사이에서조차 외면받았다,[21] 이의민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가장 먼저 내건 슬로건이 "왕을 죽인 역적을 처단한다"였다.[22] 그나마 이의민과 두경승이라 이 정도로 마무리 된 거지 만약 이고, 이의방, 정균, 경대승이었다면 서로 죽고 죽이는 칼부림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