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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고려 태조의 제19부인 대서원부인 | 大西院夫人 | |
생몰년 | 미상 |
성씨 | 동주 김씨 |
부모 | 부친 - 대광 김행파(大匡 金行波) |
부군 | 태조 |
형제 | 2녀 중 장녀 여동생 - 소서원부인 |
자녀 | 기록없음 |
직위 | 부인(夫人) |
작호 |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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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창업군주 태조의 제19부인. 동주의 호족 대광 김행파의 딸이다.2. 생애
동주출신으로 대광 김행파의 장녀이다. 태조의 제20비인 소서원부인과는 자매간이다.《고려사》〈열전〉에 대서원부인 항목에는 그녀의 출신지와 아버지만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열전〉의 소서원부인 항목에는 그녀와 동생 소서원부인이 태조와 인연을 맺게 된 경위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두 자매의 아버지인 김행파는 922년(태조 5년) 태조의 명으로 서경로 옮겨가 살았는데, 김행파는 활을 잘 다뤄서 태조로부터 김씨 성을 사성받은 인물이다.
하루는 태조가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김행파는 자신과 함께 사냥하는 무리들과 길에서 태조를 알현하고 태조에게 자신의 집에 오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자신의 집으로 오자, 김행파는 자신의 두 딸에게 각각 하룻밤씩 태조를 모시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태조는 서경을 다시 찾지 않았고, 이로 인해 김행파의 두 딸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훗날 이 이야기를 들은 태조가 두 자매를 불쌍히 여기고 불러보았는데, 태조는 이들을 보고 "너희가 이미 출가하였으므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다"라고 하며 서경에 명령을 내려 성 안에 대서원(大西院)과 소서원(小西院)의 두 절을 만들게 하고 각각 밭과 노비를 두어 자매를 각각 그곳에서 살게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대서원부인, 소서원부인 자매의 이야기가 제1왕후인 신혜왕후의 혼례과정과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차이점은 머리를 깎고 출가한 류씨를 왕건은 직접 맞이하여 정실부인으로 들였지만 대서원ㆍ소서원 자매들은 외방으로 내쳤다는 것이다. 전후관계를 보아 김행파가 두 딸을 차례대로 하룻밤 상대로 바친 이후 태조가 서경을 다시 찾지 않자 다급해진 김행파가 태조와 신혜왕후와의 이야기를 이용해 두 딸을 상기시키자 태조가 김행파의 속셈을 간파하고 그냥 두 딸을 승려로 냅두었다는 점이다. 대신 서경에 궁원을 두개를 짓고 절로 만들어 그녀들에게 각각 나누어주며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렇게 하여 대서원에 살던 언니를 대서원부인이라 하고, 소서원에 살던 동생을 소서원부인이라고 한 것이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태조와 대서원ㆍ소서원부인 자매의 혼인을 두고, 태조의 혼인이 지방 세력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대서원부인의 자세한 생애나 생몰년, 능지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자녀는 없었으며, 작호는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이다.
참고로 같은 가문에 천추태후의 연인 김치양이 있다. 고려 초기 동주 김씨의 야망이 보이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