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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3 23:11:07

예화부인


고려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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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제18부인
예화부인 | 禮和夫人
생몰년 미상
성씨 춘주 왕씨
부모 부친 - 대광 왕유(大匡 王柔)
부군 태조
자녀 기록없음
직위 부인(夫人)
시호 예화부인(禮和夫人)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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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창업군주 태조의 제18부인. 춘주의 호족 대광 왕유의 딸이다.

2. 생애

왕유는 성격이 곧고 유학에 능통하여 궁예정권 아래에서 동궁기실이 되었으나 정치의 어지러움을 보고 출가하였는데 그는 원래 박씨였다가 태조로부터 사성 왕씨 성을 하사받은 인물로, 또한 해주 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원래 궁예 휘하에 있었으나, 궁예의 난정으로 깊은 산 속에 은거하였다가 고려 개국 후 태조에게 찾아왔으며, 이후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사성을 받은 것이다. 또한 후당태조와 신혜왕후의 책봉을 요청하여 받아내기도 하였으며 예종 때 여진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참지정사가 된 왕자지는 그의 현손이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상은 즉위를 도와준 무장세력, 학문적 능력을 가진 문사층(文士層), 귀부해온 지방호족 및 신라왕족과 같은 광범한 세력이었다.

왕유의 딸이 태조의 왕비가 된 것은 바로 왕유의 문필가로서의 활동이 태조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거기에다 출신지 춘주는 개경에서 강원도로 가는 교통로의 요충으로 태백산 이서(以西)의 강원도 일대를 장악할 수 있는 요지에 해당한다.

그리고 궁예(弓裔)가 세웠던 태봉(후고구려)의 수도가 철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수도과 근접하면서도 이 지역과 대결할 수 있는 지방세력과의 제휴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춘주는 이러한 여러 목적에 합당한 지역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당시 춘주는 개경에서 강원도로 가는 길의 요충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일부에서는, 태조가 이러한 춘주 지역의 특성을 바탕으로 영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 이 지역 호족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23명의 부인들 중 시호를 받은 5명 사람이다. 호족가문의 세력이 막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가족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