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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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 |
1. 개요
왕(王)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2. 한국의 왕씨
고려 왕조 당시 번성하였던 개성 왕씨가 대표적인 본관이다. 이 탓에 어떤 사람들은 개성 왕씨가 한국의 유일한 왕씨인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본관이 다른 왕씨도 분명히 남아있다. 고려 건국 이전 삼국시대에는 낙랑 왕씨 출신으로 보이는 고구려[1][2]와 백제[3]의 왕씨 인물들이 확인되며, 남북국시대에도 발해[4]와 통일신라[5]에서 왕씨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근대에도 왕유식[6]과 같이 개성 왕씨와 별개의 가문이 확인되고, 이들의 후손은 당연히 현대에도 있다. 전주 왕씨도 있었으나 19세기 후반 개성 왕씨로 편입했는데, 왕희 문서와 왕사희 문서 참조. 다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한민국의 왕씨 중 실제로 한국인을 시조로 하며 한국 땅에서 유래된 토종 왕씨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개성(옛 송악)을 본관으로 하는 개성 왕씨가 유일하다. 이들은 고려 왕조의 왕족이기도 했다.
고려가 원 간섭기에 부마국이었던 역사로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가문이자 황실가였던 보르지긴 가문의 피도 흐르는 것이 아니냐는 사람도 있는데, 개성 왕씨 중에서도 시중공(侍中公)파[7] 정도를 빼면 모두 원종 이전 임금들의 후손이라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전 왕조의 왕족이라는 점 때문에 왕씨 몰살을 당하게 된다. 태조 3년에 삼척, 강화, 거제에서 공양군 왕요와 폐세자 왕석, 왕요의 삼촌들을 포함한 유력 왕씨 135명이 살해되었고 한양으로 숨어든 몇몇 서자들도 죽임을 당했다. 직접적으로 해를 입지 않은 방계 왕씨들은 외가의 성을 따르도록 했고, 공을 세워 사성받은 경우에는 원래 성으로 돌아가도록 했다.[8]
왕씨들에 대한 경계는 20여 년이 흘러 왕조의 기반에 자신감이 붙은 태종 13년 공주에 거주하던 순흥군 왕승의 손자 왕거을오미의 무죄방면을 기점으로 풀리기 시작하여 세종과 문종대를 거치며 다시 왕씨 후손을 찾고 제사를 정비하게 했고, 세조 대에는 고려 왕실의 제사를 받드는 연천 숭의전 부사가 2품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노비와 혼인 지원을 받아 한결 융숭해졌다. 그리하여 15세기 중반부턴 지방 사족으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안에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왕씨보다 적은 왕족으론 발해 왕족인 밀양 대씨, 협계 & 영순 & 남원 태씨와 고구려 왕족인 횡성 고씨, 백제 왕족인 부여 서씨, 의령 여(余)씨가 있다.[9][10]
대한민국의 개성 왕씨는 28,000명 정도 되는 희성이다. 그러나 의령 옥씨 단일본으로 내려오는 옥씨는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과 고려문과방목(高麗文科榜目)에 동일인이 성만 바꾼채 등장해 왕씨에서 개성했음이 거의 확실하니 이들만 더해도 5만으로 단숨에 2배 가까이 불어나며, 1798년 편찬된 개성 왕씨 족보에 이(李)씨, 유(柳)씨 등 외가 성으로 개성한 왕족들이 다수 발견되는 점, 공주에 정착한 순흥군 왕승의 후손 왕거을오미가 외가성인 이씨로 살고 있었던 점이나 거을오미의 배다른 형제 왕미의 아들 왕우지(왕순례)가 제씨 성을 쓰고 있었던 점, 공양왕의 동생으로 왕씨 제거에서 비껴갔던 정양군 왕우의 두 아들이 외가성을 따라 노씨로 잠깐 개성했었던 사례까지 감안하면 우리가 모를 뿐이지 왕씨에서 갈라져나간 후손들은 충분히 많을 것이다.
3. 중국과 베트남의 왕씨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로 통계 지역에 따라 이씨와 번갈아 1, 2위를 다툰다.[11] 이는 중국은 워낙에 광대하고 이씨, 왕씨 숫자가 9000만명대로 비슷하기 때문. 지역에 따라 이씨, 왕씨 순위가 뒤바뀌고 있지만 성씨 전국 통계는 주민등록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므로 정확하게 통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하튼 오래 전부터 왕씨가 대세를 이루었기에, 중국인을 상징하는 왕서방이라는 캐릭터가 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그 외, 인터넷 유행어로 '이웃집 왕씨'가 있는데 아내의 불륜 상대라는 의미를 가진다.광둥어로는 웡(Wong)으로 읽으며[12], 베트남에서도 브엉(Vương)씨라 하여 일부 존재한다. 민남어에서는 옹이라고 읽는다.
4. 목록
자세한 내용은 왕(성씨)/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1] 거문고를 만든 재상 왕산악(王山岳), 대승상 왕고덕(王高德), 유격장군 왕구루(王求婁), 삭방장군 왕건위(王虔威) 등이 전해진다. 왕구루의 아들 왕모중(王毛仲)과 왕건위의 아들 왕사례(王思禮)는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에서 관직에 진출했으며, 왜국으로 망명한 고구려 유민 2세대 출신인 왕중문(王仲文)은 음양오행설에 능했다고 한다.[2] 한편 본관이 다른 태원 왕씨 중에도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해 요동으로 이주한 왕렬(王烈)의 17대손 왕문림(王文林)이 고구려에서 서부장(西部將)을 지낸 바 있으며, 선조가 영가의 난 당시 고구려로 이주했다는 왕담(王湛)의 아들 왕배수(王排須)는 고구려-당 전쟁 도중 당나라에 귀부하여 안동부대도호의 벼슬을 추증받았다. 왕배수의 아들은 왕경요(王景曜, 680~734), 손자는 왕우굉(王右肱)이라고 한다.[3] 박사 왕인(王仁), 건무장군 왕무(王茂), 오경박사 왕유귀(王柳貴), 역(易)박사 왕도량(王道良), 역(曆)박사 왕보손(王保孫), 장사 왕변나(王辯那), 좌평 왕효린(王孝隣) 등이 전해진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 도래인 왕진이(王辰爾)의 후손 중에도 왕평(王平), 왕후(王後)처럼 왕씨 성을 유지한 사례가 있다.[4] 정당좌윤 왕신복(王新福), 장수 왕탄(王誕), 태수 왕효렴(王孝廉), 판관 왕승기(王昇基), 영녕현승 왕문구(王文矩), 부사 왕보장(王寶璋), 사생 왕록승(王祿昇), 왕문림의 후손 왕낙덕(王樂德), 문적원 소감 왕구모(王龜謀) 등이 전해진다. 발해 멸망 이후에도 동단국의 왕계원(王繼遠), 후발해의 왕헌(王憲), 흥료국의 왕광록(王光祿), 요나라의 왕함칙(王咸飭)·왕숙녕(王叔寧)·왕영수(王永壽), 금나라의 왕정(王政)·왕준고(王遵古)·왕정옥(王庭玉)·왕정견(王庭堅)·왕정균(王庭筠)·왕정담(王庭淡), 몽골 제국의 왕만경(王萬慶)·왕현경(王顯卿) 등 발해 유민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5] 대야주에 은거하다가 신라 조정을 비방하는 벽서를 유포한 혐의로 수감된 왕거인(王居仁)이라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6] 제남 왕씨다.[7] 충정왕의 서자 왕제(王濟)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전하는데,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8] 그래서 약목 류씨처럼 개성 왕씨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문중도 있다.[9] 다만 횡성 고씨는 중국의 요양 고씨와 다르게 제주(도) 고씨의 방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고, 부여 서씨 같은 경우 당나라에서 백제 왕손인 부여융이 서씨 성을 받았다는 것에 근거를 두는데 정작 중국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횡성 고씨의 경우는 과거 제주도 계통 고씨들 중 횡성 고씨 분파가 실제 별도로 존재했었고, 이 두 횡성 고씨들의 족보가 별도로 있었기에(그리고 제주도 계통 횡성 고씨의 인구가 훨씬 더 많았기에), 제주도 계통 고씨들이 모두 제주 고씨로 합본을 한 이후에도 과거 제주도 계통 횡성 고씨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던 일부에서 혼동을 하는 케이스이다. 물론 그것이 현존하는 횡성 고씨가 고구려 왕족 후손임을 확증한다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이러한 오해에 따른 의심은 이들에게 많이 억울할 것이다.[10] 백제가 망한 후, 부여씨들이 부여의 여(餘)를 살짝 바꾼 서(徐)로 성씨를 바꿔서 살았다는 설도 있다. 개성 왕씨도 왕(王)을 살짝 바꾼 전(全), 전(田), 옥(玉)씨 등으로 바꿔 살았다. 그러나 부여 서씨 같은 경우 집성촌이 충청남도 부여군이 아니라 평안남도 개천군(개천시)다. 태씨들이 남한에 사는 쪽과 북한에 사는 쪽에 비교하면 북한에 사는 쪽에 몰려있다던가,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 서울 관악구였던 등, 본관과 집성촌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다만.[11] 3위는 장씨.[12] 광동어에서 흔한 성씨인 황(黃)씨도 웡(Wong)으로 성조까지 똑같기 때문에 혼동의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