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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6:30:21

설(성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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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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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주·순창 설씨(慶州·淳昌 薛氏)
2.1. 남한 집성촌2.2. 북한 집성촌2.3. 설(薛)씨 유명 인물
2.3.1. 근대 이전2.3.2. 근·현대 인물
2.3.2.1. 세수 미상
3. 경주 설씨(慶州 偰氏)
3.1. 설(偰)씨 유명 인물
4. 설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5. 외국 인물6. 가상 인물

1. 개요

한국의 성씨다. 경주·순창 설씨(慶州·淳昌 薛氏)는 (맑은대쑥 )을 사용하고, 경주 설씨(慶州 偰氏)는 (맑을 )을 사용한다.

2. 경주·순창 설씨(慶州·淳昌 薛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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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신라 6성 {{{#!wiki style="margin: -1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290><tablebordercolor=#dde7e7>
파일:순창 설씨 종문.svg
慶州·淳昌 薛氏 (月城 薛氏)
경주·순창 설씨 (월성 설씨)
}}}
<colbgcolor=#003458> 관향 경상북도 경주시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시조 호진(虎珍)
집성촌 경기도 고양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전라남도 진도군
경상남도 밀양시·의령군
평안남도 평원군
인구 42,646명 (2015년)
링크 경주·순창설씨 대종회

[clearfix]
설씨의 약 94%가 한자 薛(맑은대쑥 )을 사용한다. 시조인 설거백(薛居伯)은 신라가 생기기 이전인 기원전 57년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에 나오는 6부 촌장 중 한 사람이다. 진한 땅이었던 명활산 고야촌(지금 경상북도 경주시 천북면)의 촌장으로 나머지 5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고 32년[1]에 6촌이 6부로 개칭되면서 명활산 고야촌도 습비부로 고쳐 불렀고 성도 설씨를 하사받았다. 족보에 따르면 이후 516년(법흥왕 3년) 무신공(武信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태종 무열왕 때에 장무왕(壯武王)으로 추봉되었다고 전해진다.

설씨는 설거백(薛居伯)을 시조로 받들고 경주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다가 고려시대에 36세손 설자승(薛子升)이 1124년(인종 2년) 호부시랑이 되고 순화백[2]에 봉해지자 본관을 순창으로 했다. 인구는 2015년 기준 42,646명으로 그렇게 흔치 않은 성씨다.

2.1. 남한 집성촌

2.2. 북한 집성촌

2.3. 설(薛)씨 유명 인물

2.3.1. 근대 이전

2.3.2. 근·현대 인물

2.3.2.1. 세수 미상

참고로 위 인물들 중 薛씨인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인구분포상 薛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경주 설씨(慶州 偰氏)

설손은 초명(初名)이 백료손(百遼遜)[5]이고 위구르 사람이다. 대대로 설련하(偰輦河)에 살았으므로 설(偰)을 성씨로 삼았다. 고조부 에렌테무르(嶽璘帖穆爾, Yolum-Temür)[6] 때부터 원(元)에 귀부하였고 대대로 원에서 벼슬하였다. 에렌테무르의 아들이 카라부카(合刺普華)로 그의 아들 즉 설손의 할아버지 문질(文質) 때부터 강남의 율양(栗陽)[7]으로 이주하고 한족풍으로 외자 설씨 성을 쓰는 등 한족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설문질의 다섯 아들 가운데 셋째였던 철독(哲篤)이 설장수의 할아버지로, 그는 『요사(遼史)』의 편수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벼슬이 강서행성우승(江西行省右丞)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설손은 순제(順帝)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한림응봉문자(翰林應奉文字)와 선정원단사관(宣政院斷事官)을 지냈으며, 단본당정자(端本堂正字)로 선발되어 황태자에게 경전(經典)을 가르쳤다. 승상 합마(哈麻, 카마)의 시기를 받아 단주(單州)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우거하였다. 홍건적이 대령을 침략하자 공민왕 7년(1358)에 병란을 피하여 우리나라로 왔다.[8] 왕이 원에 있을 때 황태자를 단본당에서 시종하며 설손과 구면이 있었으므로 그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집을 하사하고 고창백(高昌伯)으로 봉하였다가 부원후(富原侯)로 고쳐 봉하였고 부원(富原)에 토지를 하사하였다. (공민왕) 9년(1360)에 죽었고 저술로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아들은 설장수(偰長壽)·설연수(偰延壽)·설복수(偰福壽)·설경수(偰慶壽)·설미수(偰眉壽)이다.
『고려사』 권112 열전 제25 제신 편 설손 조

본관은 경주 단본이다. 시조 설손은 원래 위구르 사람으로[9], 조상이 대대로 설련하(偰輦河, 셀렌가강)에 살아서 성을 설이라고 했다고 한다.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이 모두 원사에 언급된다. 설손은 원나라에서 단주태수 벼슬을 지냈으며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가 상을 당하여 대령에 가있었는데 1358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귀화하자[10] 공민왕이 그를 대접하여 부원후에 봉했다. 설손의 아들 설장수(시호는 문정)는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다.[11]

설손의 후손이 스타 강사 설민석과 그의 아버지 설송웅이다. 바둑기사 설현준과 정치인 설영주도 이 설씨를 쓴다. 인구는 2015년 기준 2,937명으로 薛씨의 10%도 못 미친다.

여담으로 이라는 한자는 완성형에 없는 한자이다. 비슷하게 생긴 로 대신 입력하기도 한다.

3.1. 설(偰)씨 유명 인물

4. 설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5. 외국 인물

6. 가상 인물

눈 설()과 발음이 같아서 차가운 느낌을 주는 편이라, 보통 성격이 냉정하고 진지한 인물에게 자주 부여된다. 특히 여성 캐릭터 이름으로 자주 등장한다.

[1] 유리 이사금 9[2] 순화는 순창의 별칭이며, 백은 오등작의 하나인 백작 작위이다.[3] 독립유공자 설진창, 설인수 前 국회의원이 이 마을 출신이다.[4] 독립유공자 설만진이 이 마을 출신이다.[5]원사』에는 遼만 僚로 바뀐 설백료손(偰百僚遜)으로 등장한다.[6] 가승보에 따르면 돈욕곡(暾欲谷)의 현손이자 극직보이(克直普爾)의 증손으로, 악필岳弼의 아들인 아사필亞思弼의 아들이다.[7] 현재는 물 수 변 붙여서 溧陽이라고도 쓴다. 현지 발음은 리양(Lìyáng)이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양기탁이 1938년에 이곳에서 서거했다.[8] 이때 고향으로 갔으면 좋았는데 하필이면 고향 율양이 강남 지역으로 홍건적 세력의 핵심 지역이었다.[9] 위구르인이라고 해서 꼭 지금의 동투르키스탄에만 살았을 리도 없고, 비록 몽골인색목인 위주라고는 하나 엄연히 국제적인 대제국을 표방하던 원나라였던지라, 위구르인이 중국동북아시아 주요 대도시로 이주해서 살지 않았을 리도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려가요 중의 하나인 쌍화점의 제목부터가 위구르만두를 파는 가게라는 뜻이고, 거기서 대놓고 주인공 여자가 꼬시는 위구르인과 동침하는 내용까지 나온다.[10] 설손이 고려로 이주한 해가 고려사는 공민왕 7년(1358년), 정종실록(定宗實錄)은 공민왕 8년(1359년)으로 되어 있어 1년 차이가 난다. 어느 쪽이든 홍건적 때문에 고려로 오게 되었다는 건 공통된다.[11] 다만 설손의 동생 즉 설장수의 삼촌인 설사(偰斯)는 그대로 대륙에 남아 있다가 1367년 주원장에게 귀순했고 이듬해 명이 세워진 뒤 그 사실을 고려에 알리는 첫 번째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되었으며, 명나라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예부상서(禮部尙書)에까지 이르는 등 꽤 출세했다.[12] 雪(눈 )자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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