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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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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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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의 실제 역사서2. 박창화 창작 '화랑세기 필사본'
2.1. 박창화 '필사본'의 내용2.2. '필사본' 진위 여부 논란
2.2.1. 위작이라는 주장2.2.2. 진서라는 주장2.2.3. 국문학계의 상황
2.3. '필사본'의 발견 경위2.4. 결론: '화랑세기 필사본'은 위서2.5. 여담
3. 관련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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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의 실제 역사서

故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말하기를, "어진 보좌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겼다."라고 하였다.[1]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37년(576) 원화를 받들다 #
전(傳)과 기(記) 몇 권을 지었다. 그 가운데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 남아 있다.
삼국사기 김대문 열전 中

신라 시대 화랑을 다룬 사서. 신라 중대의 진골 역사학자 김대문이 저술하였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신라의 왕호에서부터 각 화랑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인용되어 있다.

적어도 고려 시대 후반, 즉 화랑세기가 편찬된 시점에서 500여년이 지난 원 간섭기까지는 원본 화랑세기가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며 이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서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서적에서는 이미 화랑세기가 실전되었다는 언급이 있는 만큼 이 무렵에는 이미 사라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후술된 '필사본 화랑세기'의 위서 논란 때문에 환단고기 비슷하게 오인되어 '화랑세기란 책 자체가 위서다'라고 주장, 설명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후술된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일 수는 있어도 신라시대에 쓰여진 '화랑세기'라는 책 자체는 실존했던 역사책이 맞다. 다만 이미 사라져 현존하지 않을 뿐이다.

2. 박창화 창작 '화랑세기 필사본'

파일:화랑세기 필사본.jpg
만약 이 책이 진본이라면 그것은 사료 부족에 허덕이는 고대사 연구에 백년대한(百年大旱)의 단비와 같은 것으로, 필사본 '화랑세기'의 출현은 그야말로 세기의 발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2]
"(박창화는) 비록 방향은 잘못되었지만 대단히 노력하고 상당한 수준의 문필력과 창작력을 지닌 인물로 파악됩니다."
"자신이 생각한 사상을 가지고서 새롭게 발견된 사서의 진위를 논하는 것은 전도된 접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노태돈(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이 책을 쓴 남당 박창화일제강점기 ~ 대한민국 초기의 인물로, 소위 '화랑세기 필사본'은 비공개하고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이 책이 공개된 것은 박창화가 이미 사망한 지 30여 년이 지난 1989년 2월이었다. 박창화의 제자 김종진의 아내 김경자가 생전에 박창화가 남겼다는 소위 '화랑세기 필사본'(이후 등장한 필사본(모본)의 발췌본으로 칭해짐.)을 서울신문에 공개하였고, 6년 뒤 1995년 4월에는 일본 궁내성 용지에 필사되어 있는, 그 전 발췌본보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의 필사본(모본)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이 '필사본'[3]그대로 옮겨 적다'라는 뜻인데, 이 책이 화랑세기 원본과 일치하지 않는 위서라면 당연히 '필사'를 한 것도 아니게 되며 그저 '창작물'에 불과한 책이 된다. 다만 이 책이 공개 당시부터 "화랑세기 원본을 필사한 책"이라고 알려졌기에 편의상 계속 '필사본'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다. 즉 엄밀히 말하면 "화랑세기 원본을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책"이 정확한 표현이다.]은 공개 당시부터 진위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았으며, 위서론과 진서론 사이에서 최근까지 상호 치열한 논박이 이루어졌다. 남당의 자세한 행적. 이게 진서라고 전제하면 위에 나온 1의 화랑세기와 내용이 동일한 텍스트가 되는 것이고, 위서라고 전제하면 1과 아무 상관 없는 현대의 창작물이 된다.

현재는 고고학적인 발견 등의 내용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부합되지 않는 점이 많아[4], 대부분의 한국사 연구자들의 의견은 거의 위서로 취급한다. 화랑세기 진서론을 주장하는 경우는 제도권 학계에서는 이종욱 교수, 이희진 박사, 이영훈 교수 등 서강대 학파가 대표적인데[5] 향후 새로운 유적이나 유물에서 결정적인 단서 발견이 없는 이상 현재의 구도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2.1. 박창화 '필사본'의 내용

구성은 역대 화랑 '풍월주'별로 전기의 본문, 그 화랑을 기리는 4구체의 찬, 그리고 세계(世系)가 덧붙여져 있는 형식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삼국사기 등 기존 역사서에 나오는 기록들과 크게 다르거나 충돌하는 부분은 별로 없다. 도서관 등지에서 국역본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책의 명성 때문에 뭔가 파격적이고 자극적이고 외설적인 내용이 많을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책 전체로 따지면 의외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똑같은 내용이 대부분이다.

고려시대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 《화랑세기》라는 신라의 역사책을 참고해서 썼다는 것은 이 필사본의 진위여부와 별개로 분명한 사실인데, 이 책이 김부식이 참고한 그 책과 내용이 같은 책이라면 당연히 큰 줄기에서는 비슷한 기록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다. 환단고기마냥 전혀 다른 뜬금없는 이야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면 애초에 학계에서 논란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고, 필사본 화랑세기는 그런 어설픈 위서들보다는 훨씬 내용이 탄탄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이만큼이나 언급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같은 부분에 대한 기록이라도 좀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는 편이고 삼국사기와 큰 줄기에서 모순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새로운 기록들이 보이는 식이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에서는 동륜태자572년에 죽었다는 기록만 있지만, 화랑세기에서는 동륜태자가 보명궁주를 몰래 만나기 위해 궁의 담을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 책이 진서라면 '김부식이 군더더기로 보고 생략했다고 할 수 있는' 기록들이 많고, 논란이 된 것도 이런 부분들에서 주로 나온다.

유교 문화가 정착된 고려 중후기 이후에 쓰여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비해서 고대국가의 국풍이 강했을 신라 당대 기록으로 추정되는 필사본 화랑세기(이하 화랑세기)의 내용은 성적으로 상당히 파격적이다. 하급 낭도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왕족이나 자기 상관과 동침시키는 등 현대인의 시각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6]가 나오는가 하면 미실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내용이 많다. 예를 들어 6세 풍월주 김세종의 기사를 보면 진흥왕과 미실이 서로 눈이 맞았을 때 서라벌의 다른 남녀들을 불러모은 다음 예절염치 팽개치고 단체로 정을 나눴다는 기록이 있다.

한 개인이 배우자를 여럿 두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으며 심지어 후궁조차 왕 이외의 다른 남자를 뒀다는 기록도 있다. 그것도 왕에게 전혀 숨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도 후궁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족보가 꼬여 있어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작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시피 한 신라 왕실의 가계도가 더욱 얽히고설키게 되었다.[7] 특히 초반부 비중이 많은 인물이 바로 모즉지 매금왕으로, 겐지모노가타리히카루 겐지같이 다섯명의 처첩을 두고 숱한 자식들을 낳는다. 이 때문에 정실부인인 보도부인과의 관계도 험악해서 한명만 본 이래 태자를 낳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8] 은근히 화랑들 간의 동성애를 의미하는 듯한 내용도 있기 때문에 역사 관련 부녀자들의 좋은 이야기거리가 되기도 한다. 사다함무관랑의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아주 친한 친구 사이로도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 끈적하다.

하지만 화랑세기 내에서 성적으로 충격적인 내용이 많지만 책 전체 내용 중에서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았을 때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저자로 되어있는 김대문의 출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의 서문에 따르면 김대문의 집안은 초대 풍월주를 비롯하여 5대에 걸쳐 풍월주를 배출한 화랑의 최고 명문가였다. 그러던 것이 681년 신문왕의 장인인 김흠돌이 화랑 세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왕은 진압 후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풍월주 중심의 화랑 시스템을 해체시키게 되는데, 김대문은 이러한 배경에서 자신의 집안을 비롯한 화랑의 수장이었던 역대 풍월주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다. 화랑세기 내에 등장하는 풍월주 중에는 사다함이나 김유신, 김춘추 등 잘 알려진 인물들도 등장하고 있다.

또한 신라 궁중 내에서의 혈통 문제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이 된다. 진골정통대원신통이라 불리는 이 두 혈통은 인통(姻統)으로 일컬어지며, 왕과 그 일족의 부인을 공급하는 핏줄을 의미한다. 이들이 신라 지배층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친다고 보면 된다. 위로는 왕부터 아래로는 귀족과 화랑들까지 해당된다.[9] 이 인통은 반드시 모계로만 이어진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인통에 관계없이 어머니의 인통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10] 때문에, 신라에서 모계 중심사회의 흔적이 존속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일례로, 왕이나 풍월주 등을 어느 계통에서 배출하느냐는 그 어머니에 따라 결정되므로, 왕족 여성들이 속한 인통의 세와 핏줄의 범위를 늘리고자 일부종사하지 않고 여러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을 두는 케이스가 많았다. 지소부인만 하더라도 입종, 이사부, 박영실 등 여러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았다.

이 두 인통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어, 사이가 별로인 모양새로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진골정통 계열)와 법흥왕의 후궁인 옥진궁주(대원신통 계열). 옥진의 손녀가 바로 그 미실이다. 옥진의 딸 사도부인(사도태후)도 시어머니인 지소태후와 사이가 안 좋았다. 이는 당시 왕의 후계를 어느 인통으로 잇느냐에 대해 알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소태후는 사도부인의 장남인 동륜태자 대신, 자신의 딸인 숙명부인이 낳은 정숙태자를 후계로 내세웠으나[11] 숙명이 바람이 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진흥왕의 후계는 사도의 차남 진지왕이 이었으나 곧 쫓겨나고, 동륜의 맏아들 진평왕이 이었다. 진평왕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이므로 결국에는 그녀의 뜻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12]

특이 케이스로, 15세 풍월주였던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지소의 외손녀)이 진골정통, 할머니 아양공주(진흥왕과 사도의 딸)가 대원신통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계혈통은 가야 왕실이었기 때문에 '3파의 자손'이라고 불리우는 대목이 있다.

필사본에 등장하는 풍월주의 목록/챕터명은 아래와 같다.

2.2. '필사본' 진위 여부 논란

금석문들을 제외하면 신라시대의 1차 사료가 사실상 전무한 현실[21]에서 공개된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이라면 그 역사적 가치는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발견된 경위가 불확실한 데다 기존 학계의 연구나 다른 사서와 배치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화랑세기가 진짜라 가정하고 내놓은 논문도 상당수 있으며 학계에서는 화랑세기가 진서인지 위작인지의 여부에 대해 상당한 논쟁이 벌어졌고, 현재 주류 사학계에서는 위작으로 보고 있다. 위서로 결론이 난다면 진서라고 가정하고 나온 논문들은 문헌오염으로 봐야 할 것이다.

2.2.1. 위작이라는 주장

현 한국사학계의 주류인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의 노태돈 교수를 비롯해 이기백, 이기동, 주보돈 등이 필사본 화랑세기의 위서론을 주장한다. 다음은 완전 창작된 위서라는 주장과 완전한 위서는 아니지만 진서를 바탕으로 부분적으로 창작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박창화의 소설 화랑세기 잔본을 발견하여 1930년에 박창화가 소설 화랑세기를 집필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 역사서라고 주장되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들어졌다는 내용의 글을 동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다. 기사

박창화의 행적을 살펴보면 추모경연의 등 역사 배경 한문 소설 다수를 집필했으며 그 중에는 역사서 형식을 빌린 것도 있다. 그 저작들 중 화랑세기만이 소설이 아닌 진짜 역사서라고 볼 수는 없으며 그는 어을우동전 같은 역사 배경의 야한 한문소설도 창작해 내었으므로 화랑세기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인 탓에 박창화가 야한 내용의 신라사 소설을 쓴게 화랑세기가 아니냐는 평가가 나왔고, 1989년에 공개된 발췌본은 1995년 공개 필사본의 요약본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구나 '정말로 귀중한 사료를 필사한 것이라면 박창화 본인이 죽을 때까지 진본 화랑세기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왜인가?'에 대한 의문도 들 수밖에 없다.[22]

일단 진위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필사본 화랑세기의 경우 주류 사학계에서는 그 내용이 사실이라 할 수 없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원본이 아닌 필사본이기 때문에 그 내용에 신빙성은 없다는 것. 이 원본이란 김대문의 저술을 신라인 혹은 그 후대 사람이 편찬한 경로가 명확한 사서를 말한다.

2.2.2. 진서라는 주장

필사본 화랑세기 진서론은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총장을 역임한 이종욱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사실상 화랑세기를 포함한 한국 고대사 논쟁은 좁게 보면 서울대 vs 서강대[23]의 학파 간 대결이기도 하다. 이종욱 교수는 주류 한국 사학계가 정립한 고대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으며, 같은 맥락에서 현행 국사 교과서의 고대사 부분 또한 전방위에 걸친 비판을 계속했다. 이종욱환빠유사역사학 비판으로 유명한 인터넷 블로거 '초록불'의 학부 시절 스승이라 연결짓는 비판도 있지만 실은 교수 시절 수많은 제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2.2.3. 국문학계의 상황

화랑세기는 비단 역사학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은 작품이 극히 드문 향가 연구에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참고로 현재 전해지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린 14수와 균여전에 실린 11수, 장절공신선생실기에 수록된 1수를 포함하여 총 26수뿐이다. 그리하여 국문학계 내에서도 위서론과 진서론이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화랑세기에 수록된 향가는 송사다함가, 청조가로 총 2수이다.

이쪽의 쟁점은 역시 수록된 향가인데, "향가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 연구들은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가 1929년 발표한 '향가 및 이두의 연구'와 무애 양주동이 1935년 발표한 '고가연구'인데, 박창화의 필사시점은 1930년대로 추정되며 이 시점에 향가를 맘대로 지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진서론 쪽 주장과, "필사자 박창화가 한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수록된 두 향가의 해석이 너무 쉽다. 또한 송사다함가의 1, 3연에 나오는 '~라고 해도'라는 표현은 19세기 후반에나 최초로 발견되어 20세기 초기에 와서야 일반적으로 굳어진 표현이므로 신라시대에는 있지 않았다"고 보는 위서론의 주장이 부딪히고 있다.

또한 보통의 신라 향가와 일부 다른 향찰 표기를 두고 위서론에서는 '근대에 향가를 창작한 근거'라 하고, 진서론에서는 '보다 오래된 향가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향가가 분석된 게 1930년대였다는 사실을 위서론에서는 '1930년대 이후에 창작되었다'의 근거로 내밀고, 진서론에서는 '그 시점에서 향가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근거로 본다.

진서론 쪽 주장은 다음과 같다.출처
이 작품에 대해 주로 문법적 파악에 주력한 김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김영욱 교수)는 이 향가가 가짜일 가능성을 두 가지, 조작이 불가능한 까닭을 다섯 가지를 각각 들었다.

먼저 조작 가능성으로 문장 종결 어미로 19세기 이후에 발견되는 奴(노)가 쓰이고 있는 것을 근대 국어문법적 요소가 발견되고 있고 기존에 알려진 신라 향가와 일치하지 않는 문법적 요소가 많은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의문사와 설명형 종결어미가 서로 어울린다는 사실이 국어학계에 보고가 된 것이 1965년이고 이를 향가 해독에 응용하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임에도 1930년대에 필사됐다는 필사본에 이미 그러한 향가문법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 등을 비롯해 조작할 수 없는 고대 문법적인 요소 5가지를 지목했다.

이에 김 교수는 "향가가 가짜라면 그 창작자는 1990년대 국어학계 연구성과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대단한 문법사학자여야 한다"고 전제한 뒤 "향가가 완전한 창작물이 아님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향가에서 근대적인 문법요소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화랑세기」가 처음 나온 이래 필사 과정에서 변개(變改)가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이 작품의 저자 박창화는 1960년대까지 살았는데, 양주동 등이 1940년대에 향가 해독에 대한 연구를 일정 정도 내놓았다. 박창화가 1930년대에 책을 저술했다고 해도 이후 이런 점을 반영하여 개작했을 공산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본다면 화랑세기 필사본의 향가가 현대의 해독법으로 쉽게 해석되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게다가 진서론자들도 "근대적인 문법요소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필사 과정에서 변개가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애초에 그들조차 박창화가 향가를 지어내거나 내용을 다수 뜯어고쳐 근대 한국어의 모습으로 바꾸었으며 화랑세기의 향가는 원래 형태를 상실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2.3. '필사본'의 발견 경위

진서론 측에서는 박창화가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일했던 까닭에 을사조약 ~ 일제강점기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규장각에서 빼간 도서 중 화랑세기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이 일본의 황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되어 그곳에서 근무하던 박창화가 이것을 보고 필사했다는 가설을 주장하고 있다.[27][28]

하지만 현재 데이터베이스화된 서릉부 도서 목록에는 화랑세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 서적 관련 조사 결과.

문제는 궁내청 서릉부가 보유 도서의 목록을 전부 공개하고 있지 않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건물 공간에 비해 목록에 나와있는 도서의 수는 지나치게 적다는 게 대부분의 의견이며, 특히 한국인이나 한국학 연구자들의 자료 열람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도 사실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매우 많다. 진위 여부를 가장 명쾌하게 가리는 방법은 박창화가 필사한 원본이 실제 궁내청 서릉부에 있는지만 알면 되는데, 궁내청 서릉부가 폐쇄적이며 특히 외국인의 접근에 비협조적이라서 논란이 길어진 측면이 있다. 한창 선덕여왕이 방영되어 화랑세기가 화제가 되었던 2009년 8월 13일MBC 뉴스후 취재진이 궁내청 서릉부를 방문하여 이를 재확인했다.

그런 책이 있다면 굳이 일본측에서 왜 그걸 공개하는 데 협조하지 않고 숨기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일단 필사본으로 밝혀진 내용상으로 화랑세기에는 일본 측에서 달갑지 않은 기록이 존재한다. 화랑세기 8세 풍월주 문노조에서 문노의 어머니 문화공주가 야국왕(野國王)의 딸로 신라에 공녀로 바쳐졌다고 했는데, 이 야국왕은 맥락상 왜국, 즉 일본의 천황[29]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일본이 신라에 왕녀를 바쳤다는 신라 중심적 서술은 당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행해진 식민사학 연구를 전면 부정하게 만드는 내용이다. 그리고 화랑세기 자체는 큰 문제가 없더라도 한반도에서 실전된 책을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한 번 공개하면 혹시 그런 책이 일본에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공개 압력을 받거나 환수 운동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선례를 만들지 않는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서릉부는 그냥 의혹일 뿐이지만 또다른 궁내청 소속 보물창고인 정창원에는 실제로 한국에 있었으면 국보 지정은 100%에, 하나 더 있으면 한국사 자체가 뒤집힐만한 중요 문화재가 다수 존재하는 것이 제한적인 정보 공개로나마 실제로 밝혀져 있다. 관련 내용은 항목 참조.

또 단순 비협조나 반환 논란을 애초에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한 은폐 가능성 뿐 아니라 실제로 서릉부에서 자기들이 소장한 책의 정확한 목록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사실 대한민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예전은 물론 2019년까지도 계속해서 소장 사실을 몰랐던 문화재들이 박물관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발견되고 있는 상황이다[30].

서릉부에 들어가 본 유일한 한국인 학자로는 울산대 역사문화과 허영란 교수가 있는데, MBC 뉴스후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취재진이 갔던 서고 이외에 다른 서고를 방문했으며 서릉부의 목록은 1950년대에 작성된 것인데 그 목록에 누락되거나 이후 정리했거나 새로 추가된 부분은 우리가 알 수 없고 서릉부 내 한국 관련 사료의 전체 현황도 모르기 때문에 화랑세기 원본이 거기에 없다고 단언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식민지 출신 일개 촉탁사원(요즘으로 치면 특수 비정규직)에 불과했던 박창화가 이런 비밀서고를 들여다 볼 수 있었는지는 대체적으로 회의적이다. 하지만 박창화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12년간 서릉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기에 회의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1999년 방영된 역사스페셜 35회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편 # 참조. 그리고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개 식민지인 조선의 역사에 대해 정통한 일본 학자가 조선인보다 부족한 것은 당연했으므로 박창화가 자신의 직책보다도 훨씬 중요한 임무를 맡았을 가능성은 충분하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전보시키지 않고 12년 동안이나 같은 업무를 담당하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필사자(?) 박창화 자신은 광복 이후에 이러한 증언을 한 바 있다.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이다. 삼국사기 이전은 약간의 전설뿐이다. 신라의 나정 선도성모, 탈해의 까치, 알지의 닭 같은 것과 고구려의 단군, 유화, 금와 등의 전설과 백제의 소서노 같은 것이다. 이 전기(傳記)를 기록한 고기(古記)가 지금에는 하나도 남아있지 아니하므로 삼국유사같이 허황된 기록이라도 유일한 사료로 참작하는 것이나 이것도 또한 개찬된 흔적이 있다.

그러나 증언에서는 화랑세기라는 책이 있으나 별 것 아니라거나, 화랑세기라는 책이 있는데 화랑들의 잡다한 족보라면서 화랑세기의 가치를 낮게 보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실제로 남겨진 박창화의 유언은 '화랑세기 필사본은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할 것이며, 강역고(疆域考)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며, 나머지는 있으나 마나한 책'이라는 내용이었다고.

진서론의 이종욱 교수는 필사한 내용이 유학자였던 그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많다보니 화랑세기의 가치를 낮게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화랑세기 필사본은 소중한 거니 잘 보존하라'는 박창화의 유언과 상충된다. 박창화가 남겼다는 말 자체도 서로를 공격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진서론을 주장하는 소수 계열에서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 원본을 어느 정도 보존한 책이었을 것이라고 인식하며 '지금의 도덕적 잣대로 신라를 재단하여 위서로 몰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신라 중대에 상류계층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여기고 있다. 다만 필사자의 전력으로 인해 성적인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필사되었을 가능성(…)까지는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 위서론을 주장하는 계열 중 일부에서도 박창화가 화랑세기 원본과 연관되거나, 그 내용을 반영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하여 필사본을 '제작'했을 가능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조상을 모욕하다니!"라고 분개하거나 "조상들이 동성애나 자유분방한 성관계를 즐겼다는게 모욕이냐."[31]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일종의 정치적 논쟁이 불거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역사서의 진위를 논의하는데 있어 조상에 대한 모욕이라거나 성소수자 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모두 논점이 빗나간 주장이다. 성(性)에 대한 가치 판단과 이 기록물의 진위를 판별하는 것은 다른 문제로, 화랑세기 필사본에 대한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은 이 사료가 진서인지에 대한 여부이며, 내용 자체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2.4. 결론: '화랑세기 필사본'은 위서

현재 학계에서 정리한 정설은 현재 공개된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서라는 것이다. 설령 고대 사서를 기반으로 집필되었더라도 필사자의 생각이 첨부되어 심각한 문헌오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와 부합되는 부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필사본'이 원본과 일치하는 점이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애초에 필사본의 뜻이 '손으로 베껴 쓴 문서'라는 것으로 원본의 존재를 전제로 하지만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원본 자체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원본의 내용과 일치하는지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이미 현재까지 전해지는 금석문 등 1차 사료와 '화랑세기 필사본'은 상충되는 부분이 많으며, 필사본 내부에서도 내용 상의 모순이 여러건 발견되었다. 서릉부에 있다는 원본 화랑세기가 실제로 발견되지 않는 이상, '화랑세기 필사본'이 사료적 가치가 있는 진서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심히 빈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서라고 보는 주장이 우세한 것이다.

2.5. 여담

현재 주류 사학계를 비롯한 한국사 연구자들은 이 책을 사서의 탈을 쓴 잘 만들어진 신라 역사 소설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역덕 커뮤니티에서는 "저자의 후손들이 저작권 소송을 내어 드라마 선덕여왕 등 2차 생산물에 대한 로열티를 받는 게 이득이 아닌가." 하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32]

나무위키를 비롯해서 네이버 백과 등 온라인상에서 5~7세기 삼국시대나 신라와 관련된 정보를 찾으면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가령 나무위키의 신라 관련 항목에도 화랑세기 필사본에만 나오는 내용이 작성되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심지어는 정설처럼 적어놓은 경우도 종종 있다.[33] 하지만 현재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은 위서로 보는 관점이 주류이기 때문에 정설처럼 서술하는 것은 문제의 여지가 있다.

문제는 화랑세기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34] 예를 들어서 미실의 경우 드라마 때문에 유명해졌지만 그 외 하종, 보종 등은 화랑세기 필사본'에만' 나오는 인물이고, 문노는 삼국사기에서 간략히 나오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설원이나 임종삼국유사와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각종 신라를 무대로 한 역사소설이나 사극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온 내용을 반영하는 경우가 잦다. 정사와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이 혼재된 상황이라서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을 정사라고 착각하고 넣는 경우도 있겠지만 신라에 대한 기록이 많지도 않은 상황에서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나오지 않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위서라 할지라도 창작의 영역에서 반영하는 것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작품으로는 드라마 선덕여왕과 소설 미실이 대표적이며, 연개소문이나 대왕의 꿈 등에서도 부분적으로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을 반영했다.[35] 그러나 위서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내용에 대해 고증오류라며 반발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문노나 임종 같은 인물을 필사본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가공의 인물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나무위키 각 문서에서는 구분을 위해 정사와 '화랑세기 필사본'에 모두 나오는 인물의 행적은 '화랑세기 필사본' 한정 단락을 따로 나눠서 서술한다. 이는 삼국지 관련 문서에서 삼국지연의에 한정된 부분을 서술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리고 필사본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은 분류:화랑세기 필사본의 등장인물 참조.

3. 관련 카테고리



[1] 오늘날 직접적으로 전하는 《화랑세기》의 유일한 구절이다. 화랑세기를 인용했다고 밝힌 부분은 이곳뿐이지만 삼국사기의 다른 부분이나 혹은 삼국유사 등에서도 화랑세기를 인용한 다른 부분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2]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서인지 분석하는 과정에서 한 발언으로, 이후 검토 결과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서라는 결론을 내렸다.[3] 따옴표가 쳐져 있는 이유는, 화랑세기 원본이 이미 실전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의 내용이 원본의 내용과 일치하는지조차 검증이 불가능한데 필사 여부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필사(筆寫)는 '어떤 문서의 내용을[4] 이를테면 울주 천전리 암각화나 제천시의 점말동굴에는 예로부터 화랑들이 성지순례 식으로 낙서를 해놓았는데, 여기에 적힌 화랑의 이름과 화랑세기에 적힌 화랑들의 이름이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5] 이종욱은 비교적 적극적으로 진서론을 주장하는 편이고, 이희진은 본인의 저서 신라왕조실록에서 이르기를 '이렇게 논란이 있는 사료를 이용하면 이를 기반으로 복원된 역사도 자칫 조작된 역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알려진 화랑세기 내용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의 내용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을 뿐, 상반되는 내용이 많지는 않다. 따라서 화랑세기 기록이라는 점을 밝히고 내용을 소개한다면 특별히 신라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해서 알릴 일은 적어진다'라고 언급하였다.[6]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아내나 딸을 집에 방문한 손님이나 웃어른과 동침시키는 관행은 비슷한 시기 세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누군가가 집에 오게 되어 접대를 하게 되면 먹을 것과 잠자리만을 제공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고려 초기의 기록이나 성경에도 등장하며, 이누이트족처럼 오지에 사는 부족들 중 일부에서는 아직까지 행해지고 있다. 자세한 것은 접대의 관습 항목 참조.[7] 사실 이런 개족보는 신라 하대에 가서 더욱 두드러진다. 남편과 자식이 있는 여자가 갑자기 왕태자와 재혼하거나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의 전처였던 언니의 손자와 재혼하고, 자신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기도 하며, 큰아버지가 죽자 큰어머니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기도 한다.[8] 법흥왕의 친아들은 어머니가 백제 여인(백제 동성왕의 딸)이거나 후궁의 자식이라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려났다. 정실부인이 살아있기도 했고, 결국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가 삼엽공주 파벌과 연합해서 왕위를 삼맥종이 이어받도록 만들었다.[9] 반면,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성골, 진골골품제와 관련된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10] 세종과 미실의 아들인 하종은 아버지 세종이 진골정통이었으나 어머니인 미실을 따라 대원신통이다.[11] 이 과정에서 이미 진흥왕에게 멀쩡히 왕비 사도부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딸 숙명부인을 또 다른 왕후로 삼았다.[12]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인 진지왕을 쫓아내고 진평왕을 앉힌 이는 다름아닌 사도태후였다.[13] 축복이란, 상기된 것 처럼 임신한 아내를 고위귀족/왕과 동침시키는 그 전통(...)을 의미한다. 법흥왕이 이 마복칠성의 필두라고 하며, 이사부도 마복칠성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14] 삼엽공주의 어머니는 아래의 사다함에 언급되는 그 벽화부인으로 나온다.[15]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 22년에 등장하는, 소지 마립간의 경북 영주 출신 여자친구.[16] 필사본에서는 습보갈문왕의 아들 아진종과, 보옥공주(하필이면 보옥공주의 부모 파트가 지워진 상태)의 아들로 나온다. 즉, 지도로 갈문왕의 조카이자 모즉지 매금왕의 사촌형제.[17] 전국칠웅의 위나라 안리왕이 총애하던 용양의 이름에서 따왔다는데, 일종의 남자친구로 암시되는 듯 하다.[18] 일본-대가야 혼혈. 문화공주의 아버지는 대가야의 찬실인데, 일본에서 건너온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고 한다. 월광태자의 숙부로 등장하는데, 친신라 외교 및 결혼동맹을 진행한 친형 이뇌왕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대가야의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19] 신라 입장에서는 대가야의 반신라파 왕족 출신이라 대가야가 신라에 합병된 이후로도 주류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빌빌대고 있었는데, 문노의 재능을 눈여겨 본 거칠부 가문의 딸이 문노의 정치적 후원자로 접근했다고 한다.[20] 필사본에서는 법흥왕의 사랑을 받는 서출 비태와, 법흥왕의 조카 겸 외손주(...)인 삼맥종 사이의 왕위계승 다툼이 심각했던 것으로 묘사된다.[21] 삼국사기삼국유사조차 신라가 망한 뒤 몇백년 후에 남아있던 사서들을 정리한 것으로 당대에 집필된 사료가 아니다. 심지어 삼국사기의 경우 김부식이 직접 집필한 판본은 남아있지 않다.[22] 처음 세간에 공개된 화랑세기 필사본은 종이가 삭아버리간 닳은 부분이 많아서 아예 떨어져 나갔거나 읽을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정말로 소중한 문서라서 박창화 본인이 직접 필사한 것이라면,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해둘 수 있는지 의문이다.[23] 고려대에서는 암묵적으로 진서론에 가깝게 보는 듯하며, 박창화가 저술한 역사서로서 평가하고 분석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으로 보여진다.조선일보 기사[24] 그러나 박창화는 해방 이후 17년 동안이나 더 살아있었던 인물이라, 해당 구절이 나중에 개작한 부분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25] 다만 이는 방어 시설로서 구지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한 결과라는 반론도 제기된 바 있다. 구지(溝池)는 이미 예기 예운편에 城郭溝池以爲固(성곽구지이위고)라는 표현으로 언급되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구지를 일반적인 해자의 의미로 사용한 용례가 다수 확인된다. 이 경우 구지는 '연못과 도랑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형태의 해자'가 아닌 '성곽과 구지'라는 식으로 묶여 관방시설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구지라는 표현이 월성 해자의 구조를 알고 있는 당대의 저자 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26] 다만 포석정의 용도에 대해서 아직까지 논쟁이 분분하다는 점은 감안하여야 한다.[27] 위서론의 중심인 노태돈 교수도 박창화가 서릉부에서 근무할 때 고전승을 보았을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았다.[28] 실제로 없어진 줄 알았던 고서가 언젠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외국이 약탈 혹은 반출하여, 외국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실제로 종종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직지심체요절과 어람용 외규장각 의궤.[29] 화랑세기의 배경인 6~7세기엔 천황이라고 부르진 않았지만, 나중에 천황을 자칭하고 그 이전의 역대 오키미(大君)들도 소급 적용한다.[30] 이는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와 관계가 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소장품을 이관 받아 제대로 정리를 마치기도 전에 한국 전쟁이 발생해, 소장품 일부가 망실되어 기존의 소장 목록은 큰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박물관 소재지가 계속 옮겨다니게 되면서 주요 소장품을 제외한 상당수의 소장품은 수장함에 쳐박힌 채로 수십년 간 잠들어 있게 되었다. 수장함을 모두 개봉해 제대로 된 목록을 작성하게 된 것은 2003년 이후의 일로, 용산의 신축 박물관으로 이사하면서부터이다. 이 때문에 2022년에도 분기별로 소장 목록이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는 상황이다.[31] 박노자처럼 현재의 성소수자를 보는 관점과 연계시키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사실 굳이 화랑세기 안 들고와도 고려도경 등을 보면 혼욕처럼 조상들의 나름 자유분방했던 성 문화는 이미 제시되고 있다.[32] 물론 한 번 퍼블릭 도메인으로 내놓은 책에 갑자기 저작권을 주장하면 인정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첫 단추를 잘 뀄어야지.[33] 박창화도 드러냈듯이 화랑세기 필사본을 진서로 보는 시각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대한 일종의 반감도 어느 정도 한몫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34] 사실 도서관 등지의 국역 화랑세기를 읽어보면, 삼국사기와 겹치는 내용이 굉장히 많다. 두 책의 내용을 모두 잘 알지 않는 이상 화랑세기에만 기록된 내용을 구분하기 힘들다. 특히 일부 내용은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삼국유사, 파한집 등 다른 사서에 나오는 내용과 연관된 부분이 있다.[35] 대왕의 꿈의 경우 기존 사서만으로 부족하거나 밋밋한 내용에 대해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을 참고는 하되, 미실과 용수처럼 기존 사서와 상충되는 부분은 사서를 우선해서 따르고 화랑세기의 비합리적인 부분은 배제한다는 자체 방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