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박제상(1935) 문서 참고하십시오.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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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colbgcolor=#191970> 대아찬(大阿飡) 박제상 | |
관등 | 대아찬(大阿飡) |
출생 | 363년 |
삽량 (現 경상남도 양산시) | |
사망 | 419년 (향년 56세) |
왜국 목도(木島) | |
직위 | 삽량주 간(歃良州 干) / 삽라군 태수(歃羅郡 太守)[1] / 질지(叱智)[2] |
성씨 | 영해 박씨 |
이름 | 제상(堤上) / 모말(毛末) / 모마리(毛麻利)[3] |
아내 | 국대부인(國大夫人) / 치술신모(鵄述神母)[4] |
아버지 | 물품(勿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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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 박제상신라의 관료이자 충신(忠臣). 영해 박씨의 시조.
2. 소개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파사 이사금의 5세손이라고 한다. 박아도의 손자이자 파진찬 물품(勿品)의 아들로, 이름을 모말(毛末)이라고도 한다.[5]삼국사기 초기 기년만으로 보면 박아도나 물품의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는데 당연히 현실적으로 그럴 리 없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선 삼국사기의 계보 관련 기사들은 대체로 취신할 만하지만 초기 기년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고 보기에, 굳이 말하자면 박아도나 물품은 삼국사기 기록보다는 후대 인물이라고 본다. 현대 고고학계에서는 제상의 4대조인 파사 이사금의 주 활동 연대가 4세기 초반~초중반이라 보기 때문에 제상이 4세기 후반 출생인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 즉 김씨로 기록되어 있다.[6]
《일본서기》에는 박제상의 이름을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삼국사기》에 나온 이름 모말+존칭어미 또는 관직명 질지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서는 모마리질지가 일본에 볼모로 온 신라 왕자 미질기지 파진간기[7]을 신라로 빼돌리고서 붙잡혀 화형을 당했으며 일본군이 보복으로 도비진(蹈鞴津)으로 건너와 모마리질지가 다스리던 초라성(草羅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약탈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박제상 관련 설화에서 빠지지 않는 박제상의 부인 치술부인은 삼국유사 왕력 제18대 실성 마립간 조에 의하면 실성의 딸이다. 즉 박제상은 눌지와 마찬가지로 실성 마립간의 부마였던 것이다. 다만 왜에서 393년생인 미사흔이 박제상을 아버지처럼 여긴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나이 차이가 상당했을 것이다. 실성 마립간은 350년대생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박제상은 360년대~37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402년 실성이 즉위할 당시 보반부인의 장남 눌지 마립간이 어리다는 언급이 있고, 410년대에 눌지가 보반부인의 여동생 아류부인의 딸인 차로부인과 혼인한 것으로 보아 눌지는 380년대생일 가능성이 높다. 내물이 330~340년대생으로 추정되는 반면 보반부인의 세 아들이 380년대~393년에 태어나는 등 내물과 보반부인의 세 아들간의 나이 차이는 40~50대에 달한다. 원인은 다름 아닌 광명부인으로 보이는데, 보반부인과 아류부인의 아버지인 미추 이사금이 내물의 아버지 말구의 친형이라 310~320년대생으로 추정되는 반면[8] 광명부인은 미추의 이복 누나 옥모부인 김씨의 '친손녀'다. '누나의 친손녀'와 결혼한 것과, 광명부인의 딸들이 자식을 가진 시기를 역산하면 광명부인은 340년대생일 가능성이 높다. 이복형제인 옥모부인과 미추는 20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데 미추가 딸뻘인 광명부인과 혼인하여 광명부인의 두 딸이 내물과 실성의 딸뻘이 되었고, 내물과 실성이 마찬가지로 딸뻘인 보반부인, 아류부인과 혼인해서 내물과 미사흔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서 치술부인의 어머니가 아류부인이라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치술부인은 실성이 젊을 적 혼인한 전처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제상의 가문 행록에는 그의 아들이 백결선생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등에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삼국유사》로부터 딸 셋의 존재만이 확인될 뿐이다. 한편 미사흔은 자신을 살려낸 박제상의 차녀와 결혼하는데, 박제상의 아내 치술신모가 왕의 장모를 뜻하는 국대부인으로 추존된 점을 고려하면 장녀는 눌지 마립간의 후비가 되었을 수도 있으나 기록은 전무하다. 눌지 마립간의 왕후로는 실성 마립간과 아류부인의 딸인 차로부인만이 확인된다.
3. 생애
삽량주(歃良州)[9]의 간(干)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간은 거서간, 마립간의 간과 같은 글자다. 따라서 제상은 양산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한 세력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신라 사회에서는 일정 이상의 세력을 가진 간들을 모두 신라왕이라 불렀기 때문에, 제상이 삽량주의 간이라 불릴 정도였다면 제상은 서라벌 밖이 근거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왕'들' 중 하나로 취급될 만큼 상당히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신라 제17대 내물 마립간에게는 아들로 김눌지, 미사흔, 복호 3형제가 있었다. 내물 마립간이 죽으면 눌지가 왕위를 잇는 게 맞았겠지만 399년 광개토대왕이 신라 대신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물리쳐준 대가로 신라는 50여년간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 된다. 402년 내물 마립간이 죽자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에서 오랫동안 지냈던 친고구려파 인물 실성[10]을 왕위에 오르게 만드는데 제18대 실성 마립간이다. 실성 마립간 때 각각 고구려와 왜에 눌지 마립간의 두 동생들이 인질로 갔다. 사실 인질을 보내는 이유는 '너희에게 거슬리는 짓은 하지 않겠다'라는 뜻이고 만약 어긋나면 인질은 죽을 것이다. 그런데 실성 마립간 입장에서 복호와 미사흔은 정적이므로 고구려나 왜에서 죽어도 별로 손해가 아니다. 고구려나 왜국에 선심쓰는 척도 하고 전왕의 아들들을 신라 밖으로 보내서 세력을 약화시키고 숙청시키려는 목적이었던 듯하다.[11]
제17대 나밀왕(那密王)[12] 36년 경인(39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이르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께서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신 등을 시켜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에게 아뢰게 하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왕자 한 분을 보내어 우리 임금에게 성심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라 하였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 미해(美海)【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한다.】를 왜국에 보냈는데 이때 미해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말과 행동이 아직 익숙지 않았으므로 내신(內臣) 박사람(朴娑覽)[13]을 부사로 삼아 왜국에 보냈다. 왜왕이 이들을 억류하여 30년 동안이나 보내지 아니하였다.
삼국유사 김제상
“우리 임금이 대왕께서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신 등을 시켜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에게 아뢰게 하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왕자 한 분을 보내어 우리 임금에게 성심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라 하였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 미해(美海)【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한다.】를 왜국에 보냈는데 이때 미해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말과 행동이 아직 익숙지 않았으므로 내신(內臣) 박사람(朴娑覽)[13]을 부사로 삼아 왜국에 보냈다. 왜왕이 이들을 억류하여 30년 동안이나 보내지 아니하였다.
삼국유사 김제상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14]은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볼모로 하여 금(金)‧은(銀)‧채색(彩色)‧능(綾)‧라(羅)‧縑견(絹)을 배 80척에 싣고 관군(官軍)을 따르게 했다.
《일본서기》 진구 황후기.
나중에 눌지 마립간이 실성 마립간에게 복수하고 즉위했는데 눌지 마립간은 친동생들을 신라로 다시 데려오고 싶었다. 협상을 잘하는 사람을 신라 전국에서 찾았는데 가장 추천을 많이 받은 이가 박제상이었다.《일본서기》 진구 황후기.
눌지가 즉위한 417년 복호를 돌려받기 위해 교섭해야 하는 상대인 장수왕은 23세(394년생)의 청년이었지만 412년 18세에 즉위하자마자 복호를 인질로 삼고 실성이 자신의 기분을 거스름+실성보다 눌지가 왕인 쪽이 복호 인질 가치가 오름이라는 이유로 실성을 죽이고 눌지가 왕이 되도록 돕고, 이후에도 수많은 나라를 공격하고 정복했으며, 북연 황제 풍홍이 망명 오자 조롱하고 풍홍이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자 죽였으며, 백제 개로왕이 472년 북위에게 고구려 침공을 요청한 걸 알게 되자 475년 81세에 친정에 나서 한성백제를 멸망시키고 개로왕 일가를 죽일 정도로 호전적이고 사나운 성격이었다.
장수왕이 즉위 기념으로 받아온 복호의 몸값이 낮은 게 마음에 안 들어 눌지를 즉위시켜 복호의 몸값을 올려놨더니, 즉위하자마자 몸값 올라간 복호를 돌려달라? 장수왕의 성격상 바로 '눌지를 죽여야겠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눌지 본인이 직접 장수왕을 찾아가서 설득하는 건 당연히 택도 없다. 따라서 복호의 몸값이 올라간 것에 기분이 좋아졌을 장수왕을 '설득'해서 복호를 돌려받는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인지 알 수 있다. 눌지가 전국을 뒤져가며 장수왕을 설득할 만한 사람을 찾겠다고 공을 들인 것도 당연하며, 이런 상황에서 제상이 제일 많이 추천받은 것이다.
박제상은 눌지 마립간 2년(418년)에 고구려로 가서 눌지 마립간의 아우인 복호를 신라로 데려오는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빼오는 방법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데 《삼국사기》에서는 장수왕을 찾아가 유려한 문장으로 설득해서 데려왔고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 추격군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몰래 빼왔다. 사실 강원도 고성 항구에서 추격군에 따라잡혔는데 복호가 고구려에 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추격군들은 복호를 불쌍히 여기어 모두들 화살촉을 뽑고 쏘았다고 한다.
424년 눌지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장수왕의 비위를 맞추고 433년 나제동맹을 체결하며 449년 고구려에 비위를 맞추고 450년부터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척치기 시작한 걸 고려하면 삼국유사처럼 장수왕의 허락 없이 복호가 도망쳤다기보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제상이 어떻게든 장수왕을 설득해서 허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진짜로 삼국유사 기록대로 몰래 도망쳤으면 장수왕의 성격상 바로 눌지를 죽이려 하지 복호가 돌아간 이후에도 15~38년 동안 보복 조치 하나 없이 겉으로나마 우호적으로 지낼 리가 없다. 설령 진짜 탈출극을 찍었어도 장수왕이 복호를 돌려보내도 된다고 생각을 바꿔 경고 차원에서 위협만 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제상의 언행이 장수왕의 마음을 바꾸게 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제상이 장수왕에게 엄청나게 말을 잘했던 모양이다. 정확히 어떤 말로 장수왕을 설득시킨 건지는 기록이 없어 불명이나 '그 장수왕'을 변심시킬 정도의 언변이라면 굉장히 그럴싸한 논리였을 것이다. 다만 천하의 장수왕이라도 이때는 24세밖에 안 되었음을 고려하면(미사흔보다도 1살 연하다) 제상의 언변에 넘어가도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다.
이후 눌지 마립간은 “마치 몸 하나에 팔 하나만 있고 얼굴 하나에 눈 하나만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다른 동생 미사흔도 데려와 달라고 박제상에게 부탁했다.
“신이 비록 재주가 노둔하오나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끝까지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그 왕 또한 어진 임금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마디 말로써 그를 깨닫게 할 수 있었사오나, 왜인 같은 경우는 말로써 깨우칠 수 없으니 속임수를 써야 왕자를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저곳에 가거든 신이 나라를 배반하였다는 이야기를 퍼뜨려서 저들이 그 소문을 듣게 하소서.”
그 장수왕도 설득시켜 복호를 빼내온 것과 달리, 제상은 미사흔을 인질로 삼은 왜왕은 설득이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하고 자신이 나라를 배반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달라고 눌지에게 요청한다.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364~404/407년에 걸쳐 신라-왜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수십 년에 걸친 전쟁으로 양국의 악감정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 이전에도 320년(이주갑인상) 석우로의 실언으로 왜와 전쟁이 나 우로가 책임지고 죽는 일도 있었고, 400년에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개입하여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궤멸시키는 사건도 있었다.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이 소강된 지 10년이 막 지난 상황에서 인질을 돌려보내 달라는 말은 왜의 입장에서 다시 전쟁하자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제상이 설득을 포기할 만하다.
박제상은 죽을 각오를 하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율포(栗浦)의 해변에 이르렀다. 박제상의 아내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왔지만 남편은 벌써 배에 올라 타 있었다. 아내가 간절하게 불렀지만 박제상은 손만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박제상은 야마토 왕조와 접촉하여 신라를 배신하고 왜인(倭人)으로 귀화하러 왔다고 왜왕(倭王)을 속이면서 왜왕의 명으로 신라를 공격하는 군대의 선봉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왜왕이 박제상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었던 이유로 1) 앞서 왜에 들어와 있던 백제인으로부터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침공하려 하고 있다"고 참소해서 왜왕이 병력을 보내 신라 국경 바깥에서 순찰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때마침 어떤 이유로 쳐들어온 고구려군에 의해 피살당했고, 2) 박제상이 왜로 떠나면서 미리 자신이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도망친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라고 눌지왕에게 일러두고 갔었는데 왜왕이 신라에 보낸 첩자가 마침 돌아와서 "신라가 미사흔과 박제상의 가족들을 모두 역모죄로 잡아 가두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진군하는 길에 바다 위에 있는 산도(山島)에 이르러서 박제상은 미사흔에게 몰래 혼자서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해놓고 자신은 "어제 배를 타서 몸이 노곤해 못 일어나겠다"는 핑계로 일부러 늦잠을 자면서 미사흔이 도망칠 시간을 벌었다. 이렇게 눌지 마립간의 아우 미사흔을 신라로 도망시키는데는 성공하였지만 이 사실이 왜왕에게 알려지면서 결국 왜왕을 속이고 죄인을 방도하게 한 장본인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이 때 《삼국유사》의 내용에 따르면 왜왕은 "왜국의 신하가 된다면 상을 내리고 계림의 신하로 남는다면 온갖 형벌을 가할 것"이라고 협박했지만[15]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목도(木島)로 유배를 보냈다가 박제상을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뾰족하게 베어놓은 갈대 풀밭 위를 걷게 하고 벌겋게 달군 쇠 위를 걷게 하는 등의 끔찍한 고문 끝에 화형에 처하게 되면서 419년 왜국에서 사망하였다. 신라의 눌지 마립간은 박제상의 충정에 보답하고자 박제상의 차녀를 미사흔의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대아찬 관품을 추증하고 포상을 내렸다. 이후 미사흔과 차녀 사이에 난 딸이 461년에 제20대 자비 마립간과 혼인하여 제21대 소지 마립간을 낳으니 비록 본인은 타지에서 생을 마쳤지만 외손이 임금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박제상의 아내는 남편의 결심을 꺾지 못하고 매일같이 남편이 돌아올 날을 그리며 밖으로 나섰지만 끝내 남편이 죽었단 소식에 절망하여 한참을 울었고 얼마나 울었는지 다리까지 풀려 주변인들이 겨우 부축해서 집에 갈 수 있었으니, 이 때 부인이 울었던 곳은 벌지지라 불렸다. 이후 박제상의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치술령에 매일 오르며 애끓게 울다가 몸은 굳어서 망부석이 되었고 영혼은 치술신모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화는 조금 다르다.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박제상)가 오례사벌(汙禮斯伐), 부라모지(富羅母智)와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고 나와 있다. 이들은 일본에 도착한 후[16] 미사흔에게 뭔가 꾀를 귀띔해주었다. 그리고 미사흔이 진구 황후에게 "내가 일본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 왕이 의심을 해 가족을 모두 노비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니 잠시 본토로 돌아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고 진구 황후가 그 말을 듣고 카츠라기노 소츠히코(葛城襲津彦)를 딸려 보내준다. 미사흔 일행이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박제상이 뱃사공과 짜고 미사흔만 신라로 돌려보내는데 성공한 후 잡초를 이용해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고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에게 "미사흔이 아파 죽으려고 한다."라며 간호를 부탁한다. 이에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사람을 붙여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인형이었고 세 사람 모두를 화형에 처했다.[17][18]
4. 박제상과 관련된 유적지
전국 이곳저곳에 박제상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유적지가 많이 존재한다.4.1. 경주 장사 벌지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망덕사지 남쪽의 남천 제방 위에 있다. 박제상이 고구려에서 복호를 구출한 후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왜국으로 떠날 때 치술부인이 남편의 뒤를 쫓다 만나지 못하자 주저앉아 울부짖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비석이 세워져 있다.4.2. 치술령
경주시 외동읍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꼭대기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동해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망부석과 치술부인을 기리는 사당, 기우단 등이 있다.4.3. 은을암
울산 울주군 범서읍 소재. 치술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 몸은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 되어 바위 속으로 숨어 그 바위가 은을암으로 전해진다. 은을암 바위 앞에 은을암이라는 사찰을 세웠다.4.4. 치산서원
울산 울주군 두동면 소재. 박제상과 부인 및 두 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세운 서원이다.4.5. 효충사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소재. 박제상의 생가로 전해지고 있으며 사당 안에 박제상과 백결선생을 모시고 있다. 조선 숙종과 정조가 직접 지은 시가 걸려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5일에 제를 지낸다.4.6. 경양사
강원도 강릉시 저동 293번지 소재. 강릉 박씨 경포 문중에서 박제상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4.7. 박제상 순국비
일본 쓰시마의 가미아가타초의 사고 마을에 있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이 곳이 왕자 미사흔을 구해내고 박제상이 죽은 곳이라 기록했는데, 신숙주 본인이 일본에 자주 사행하면서 지도를 비롯한 여러 정보를 채록한 만큼 조선시대 당시에 일본 현지에서 이러한 전승이 전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박제상을 기리는 순국비가 세워졌다.5. 기타
- 박제상의 아내도 매우 유명한데 그녀가 딸들을 데리고 왜가 보이는 바닷가로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돌이 되어 죽었다는 망부석(望夫石) 일화의 주인공이 박제상의 부인이다. 박제상이 출발할 때 그녀는 이를 듣고 쫓아갔으나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망덕사 정문의 남쪽 모래벌에서 아무렇게나 누워서 오래 울었다. 그래서 모래벌을 '장사(長沙)'라고 이름지었다고 하며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어지간히 상심했는지 부인의 다리가 풀려서 앉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고 이름붙였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렸다는 곳은 경상북도 경주시와 울산광역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인 '치술령'(14번 국도)이라는 고개라고 전해진다.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박제상 사당이 있으며 박제상의 처는 죽어서 '치술신모'라는 이름의 치술령 산신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치술령 정상에는 치술신모를 모신 '신모사'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표시가 있으며 치술령 아래에 살던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치술신모에게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치산 서원으로 확대됐고 없어졌다가 1993년 다시 복원됐다.
[1] 간은 삼국사기 기록, 태수는 삼국유사 기록이다.[2] 일본서기의 기록. 발음은 시치(しち)이며, 존칭 혹은 관직으로 추정된다.[3] 일본서기의 기록.[4] 모두 삼국유사 기록.[5] 이로 보아 ‘堤上’의 훈독이 '모말'인 것으로 보인다. ‘제(堤)’는 고구려어로 ‘토(吐)’로 읽는데, ‘모(毛)’는 ‘량(梁)’으로도 쓰며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유어 ‘량’은 ‘도(道)’로도 읽으므로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6]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성씨 기록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예로 들면 이사부가 있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박-석-김 3성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실제로는 박씨가 초월적인 위치이고 석-김은 본관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어 일부 인물들의 성씨가 서로 다른 기록이 모순되는 서술은 아니라고 할 여지가 있다.[7] 미사흔 파진찬을 발음한 것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글자의 음독은 미시코치 하토리칸키(ミシコチハトリカンキ)인데, 당시 가나 음가는 미시코티 파토리칸키에 더 가까웠으리라 여겨진다.[8] 김씨 족단이 사로국에 출몰한 고고학적 시기는 4세기 초반에서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더 이전은 아니다.[9]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10] 내물 마립간의 4촌 형제 또는 5촌 조카이자 동서(둘 다 미추 이사금의 사위다)이다. 항렬은 어쨌든 내물과 동세대로 여겨진다.[11] 본인도 앞서 내물 마립간에 의해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졌던 적이 있으니 그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다.[12] 내물 마립간이다.[13] 이름이 '사람'이다.[14] 파사 이사금. 눌지 이사금과는 까마득히 연대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이유는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당시의 신라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라 정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었으니 그냥 끼워맞추기 역사왜곡.[15] 물론 <삼국사기>에 따르면 왜국도 신라를 치는데 미사흔과 박제상을 선봉으로 삼으면서 "신라를 멸망시키고 나면 미사흔과 박제상의 가족들을 전부 왜로 잡아오자"고 했었다.[16] 접촉한 날짜가 《일본서기》 진구 황후기에 나오는데 진구 황후 5년(201년) 3월 계묘(癸卯) 초하루 기유일(己酉日), 그러니까 <삼국사기>에 묘사된 연도와 무려 200여 년이 넘게 차이가 난다. 단 마냥 구라는 아닌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오류가 있기도 하고 교차검증과 이주갑인상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시기를 맞출 수가 있다.[17]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는 당대 일본 최고의 권신 중 하나로 382년 백제의 요청을 받아 신라를 공격하러 갔다가 신라의 미인계에 낚여 치라는 신라는 안 치고 반파국을 공격했다 분노한 백제 왕에게 죽을 뻔하고 간신히 야마토로 복귀한 전적이 있다. 박제상 사건은 삼국사기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으므로 36년 뒤에 또 신라에게 낚인 셈.[18] 아이러니하게도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카츠라기 씨족은 신라 도래인이라는 가설이 있다. 단 야마토의 신라 도래인이 신라와 친하기는커녕 신라와 전쟁하는데 주저가 없었다는 정황이 많기 때문에 카츠라기 씨족인 신라 도래인이 맞다고 해도 별 의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