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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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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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26대 국왕 영양왕 | 嬰陽王 | |||
영양왕릉으로 추정되는 강서대묘 전경. | |||
출생 (음력) | <colbgcolor=#fff,#1c1d1f>559년 전후[1] | ||
고구려 평양성 | |||
사망 (음력) | 618년 9월 | ||
고구려 장안성 | |||
능묘 | 강서대묘 (추정) | ||
재위기간 (음력) | 고구려 왕태자 | ||
565년 1월 ~ 590년 10월 (25년 10개월) | |||
고구려 제26대 국왕 | |||
590년 10월 ~ 618년 9월 (27년 11개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본관 | <colbgcolor=#fff,#1c1d1f>횡성 고씨 | |
성씨 | 고(高) | ||
휘 | 원(元) / 대원(大元)[2] | ||
부모 | 부왕 평원왕 모후 미상 | ||
형제자매 | 3남 1녀 중 장남[3] | ||
왕후 | 미상[4] | ||
종교 | 불교 | ||
시호 | 영양왕(嬰陽王) | ||
평양왕(平陽王) | |||
대흥왕(大興王)[5] | |||
별호 | 영탕왕(嬰湯王)[6] | ||
평탕왕(平湯王)[7] | |||
연호 | 건흥(建興)(?)[8], 연가(延嘉)(?)[9], 대흥(大興)(?)[10] | ||
작위 |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고구려왕, 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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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제26대 태왕.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618년 9월에 승하했다. 후술되어 있지만 평강공주와 남매지간이다.수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한, 고구려 후반기를 대표하는 명군이자 성군 중 한 명으로 영양왕의 재위 기간은 고구려-수 전쟁 기간과 일치한다. 덕분에 조선 시대에도 인정받아 을지문덕과 함께 제삿밥을 먹기도 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영양왕/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최대 업적은 역시 수 문제와 수 양제 부자의 도합 4차례, 200만 대군에 이르는 수나라의 침공을 철저히 막아낸 것이다. 직접 적을 물리친 신하쪽이 왕보다 더 유명하긴 하지만 실상은 위기관리, 외교,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딱히 모난 것 없이 밸런스있게 잘한 고구려 후기 최고의 명군이자 성군이라 할만하다.또 영토 측면에서는 흔히 고구려 최전성기로 일컬어지는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 시절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거란, 말갈 등의 이민족도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11] 《당서》에는 6,000리까지는 아니지만 기존의 동서 2,000리보다 커진 3,100리라는 기술이 등장하며, 고구려의 영토가 요하를 넘어 요서의 영주에 이른다는 설명까지 더해져 단순히 수치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지리를 기준으로도 영토의 변화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거란과 말갈에 대한 통제력 강화, 그리고 요서 일대의 중원 세력 거점의 미약함 등이 관련되어 분석되는 편이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이인철, 윤용구, 윤병모, 정원주 등은 동서 6,000리라는 수치를 《당서》 등과 연관지어 보통 고구려 동북쪽과 서북쪽에 위치한 거란과 말갈 방면으로 뻗은 것으로 보고 대릉하 하류, 의무려산 이동 ~ 연해주 방면으로 추정한다. 이정빈은 좀 더 구체적으로 1차 고구려-수 전쟁 이후 수나라가 점차 동진해오면서 요하 하류까지 세력을 넓힌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수나라의 압박과 침공도 이러한 고구려의 성장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 볼 여지도 있는 대목이다.
영양왕은 통일된 중화제국의 등장을 상대로 고구려가 생존하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다시피 했다. 실제 영토가 늘어난 것도 거란이나 말갈을 활용하여 수나라의 도발을 적극적으로 응징한 것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숫자에 대해선 학자마다 왈가왈부가 있지만 어찌됐든 총력전에 임한건 분명한 수나라 대군을 상대로 경직된 정면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보급로 차단 및 보급 손실을 충분히 한 연후에 결정타를 날리는 것만 봐도 전략적인 안목이 꽤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668년 고구려 멸망 때까지도 고구려를 배신하지 않은 말갈이나 거란 등 북방 이민족 세력들을 보면,[12] 부용 세력들을 다루는 수완도 상당히 뛰어났던 듯 보인다.
게다가 전쟁통이고 기록이 부실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내치에서도 기근이나 폭동, 반란 등의 큰 문제가 특별히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내치가 허술했다면 건국 이래 가장 강력한 적을 맞이해 승리를 거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양왕은 뛰어난 상황 판단 능력으로 수문제를 도발하여 1차 전쟁을 유리한 상황에서 마무리지었고, 뛰어난 인재 등용 능력으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수양제의 2차 대침공 때는 을지문덕과 동생 고건무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큰 승리를 두 차례 거두는 등 눈부신 성과를 냈다. 즉, 6세기 중엽 내란으로 무너진[13] 고구려를 다시 중흥시킨 고구려 최후의 명군 및 성군인 셈.
다만 《동국통감》의 평가는 처음에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뜻을 두었으나 나중에 수나라와 전쟁을 일으킨 건에 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영양(嬰陽)은 처음 즉위(卽位)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할 뜻을 두었으나, 하늘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기는 의리를 알지 못하여, 말갈(靺鞨)과 작당하여 상국(上國)을 침략하였으며,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함에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였으니, 의당 순리를 본받아 죄를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바야흐로 또 신라를 치고 백제를 침범하여 병화(兵禍)를 좋아하였으므로, 다시 수나라 양제(煬帝)의 토죄(討罪)를 빚게 한 것이며, 백만 대군이 요갈(遼碣)을 지나 살수(薩水)를 건너와서, 소혈(巢穴)을 공격해 전복시키는 것이 목전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응변(應變)과 양현감(楊玄減)의 반란이 없었더라면,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었습니다."
4. 기타
- (고구려의) 땅은 후한 시기에 2,000리 정도였다.위나라에 이르러 남북으로 좁아져 겨우 1,000여 리에 불과했으나수나라에 이르러 동서로 6,000리에 달했다.《통전》
대체적으로 고구려가 요하를 장악한 이래로도 고구려는 멈추지 않고 팽창적인 정책을 지속하였고, 흔히 고구려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 시절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요서 방면으로 팽창하고 서북쪽의 거란, 동북쪽의 말갈 등의 이민족들을 흡수한 것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14] 아직 고고학적인 검증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역사부도》에는 반영되지 않지만 고구려의 영토가 요하에서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뻗어나갔다는 점을 시사하는 문헌 기록들은 매우 많으며 이에 대한 연구도 적지 않다.[15] 북한의 《조선력사》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고구려의 7세기 영역을 넓게 표시하고 있다.
5. 관련 인물
아버지는 평원왕이고 어머니는 친모와 계모 둘이 있었다. 누이로 평강공주, 이복동생으로 고건무(영류왕), 고대양이 있었다. 그 외 온달, 을지문덕, 이문진, 혜자, 가서일, 담징 등 당대의 쟁쟁한 인물들이 영양왕 대에 활동한걸 보면 사람 보는 눈은 좋았던 것 같다.[16] 이외에 강이식도 영양왕대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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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영양왕 본기>
一年冬十月 영양왕이 즉위하다
一年 수 문제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벼슬을 주다
二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三月 수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夏五月 수에 사신을 보내 감사하다
三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八年夏五月 수에 조공하다
九年春二月 수가 30만 대군으로 침입해오다
九年夏六月 수 문제가 영양왕의 관작을 빼앗다
九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다
九年秋九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九年秋九月 백제 변경을 침략하다
十一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十一年春一月 이문진이 신집 5권을 편찬하다
十四年秋八月 신라 북한산성 공격에 실패하다
十八年 고구려 사신과 수 양제가 돌궐 극한 처소에서 마주치다
十八年夏五月 백제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十九年春二月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하다
十九年夏四月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다
二十二年春二月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하다
二十二年夏四月 수의 병력이 탁군으로 집결하다
二十三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총공격을 명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요동성을 포위하다
二十三年夏五月 수가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 황제가 장수들을 질책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장군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을지문덕이 수의 진영에 거짓 항복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다
二十三年秋七月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에 대첩을 거두다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다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다시 논의하다
二十四年夏四月 수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다
二十四年夏四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二十五年春二月 수 양제가 또 고구려 정벌을 명하다
二十五年秋七月 항복을 청하다
二十五年秋八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수가 다시 침략해오지 못하다
二十九年秋九月 영양왕이 죽다
7. 대중매체에서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이효정[17]이 연기했다. 외세에 강경하게 맞서는 강단있는 모습으로 나오지만 수 양제의 침공 즈음해서 노환으로 앓아누워 동생 고건무에게 국정을 맡기면서 비중이 급감소하며 심지어 고건무와 무장들 간의 알력 조정조차 못한다. 사실상 연개소문과 반대진영에 선 주요인물인 고건무, 연태수에게 비중을 몰아줌과 동시에 사서에 나온 고구려가 수나라에 저자세를 보이는 기록을 전부 고건무에게 떠넘기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 2021년 KBS 드라마 <달이 뜨는 강>에서는 아역 시절은 배우 박상훈이, 성인 시절은 배우 권화운이 연기했다.
- 신동민의 만화 《고구려혼 대장군 온달》에서 등장. 이 때는 태자 신분이자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서 등장한다. 매우 근육질의 다부진 몸매를 갖고 있으며 호쾌한 모습으로 등장하나 고구려의 태자답게 매우 왕권 지향적인 권모술수의 달인이기도 하다. 온달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호쾌하게 여기며, 온달을 태자 직속이자 설정상 고구려 중앙군 최고 부대인 개마무사단에 들여서 국내성 일파를 견제하는 것의 철저하게 정치적 입장이라는 사실의 이중성도 보여준다.[18] 하지만 그외 별개로 기본적으로는 호쾌하고 대범한 성격이나 여자한테 인기가 없다는 말에 민감하여 개마무사단에 들어온 온달이 야자타임때 안좋은건 죄다 꼽는 바람에 죽일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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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65년 1월에 고구려의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영양왕은 565년 1월 이전에 태어난 것은 확실하며 지식백과에서는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했을때 영양왕은 매우 어린 나이에 태자가 된 것으로 추정했고 영양왕의 출생연도는 559년 무렵으로 추정했다.#[2] 삼국사기에는 원이 먼저 표기되어 있고 대원이라고도 한다고 같이 등재되어 있다. 이는 중국 사서에서 삼국시대 왕들의 휘를 되도록 간결하게 기록한 것 및 삼국시대 왕들이 중국과의 교류에서 휘를 표기할 때 관습적으로 축약했던 것이 함께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비슷한 경우로 보장왕의 사례가 있다.[3] 형제 고건무, 고대양, 누이 평강공주[4] 4번 문단의 추남 설화 참조.[5] 일본서기 기록.[6] 삼국유사 기록.[7] 삼국유사 기록.[8]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삼국시대 불상인 건흥5년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쓰인 '건흥'이 바로 영양왕의 연호로 유력하게 추정되고 있다.[9] 6세기 말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삼국시대 주요 불상인 국보 제119호 연가 7년명 여래입상에서 쓰인 '연가'가 바로 영양왕의 연호로 추정되기도 한다.[10] 대흥이 연호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11] 영양왕 때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6,000리였다는 기록이 《통전》, 《태평환우기》 등에 등장한다.[12] 물론 유목세력인지라 부족마다 입장차가 있다보니 모든 거란 말갈 부족들이 고구려에 협력했다기보단, 고구려와 친밀한 관계를 맺은 일부 부족들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13] 물론 내치 자체는 부친인 평원왕 때부터 수습이 되고 있긴 했다.[14] 또한 《구당서》에는 6,000리까지는 아니지만 기존의 동서 2,000리보다 커진 3,100리에 고구려의 영토가 요하를 넘어 요서의 영주에 이른다는 설명까지 더해져서 단순히 수치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지리를 기준으로도 영토의 변화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15] 이인철, 윤용구, 윤병모, 정원주 등은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대릉하, 의무려산, 연해주, 내몽골 방면으로의 팽창을 연구하기도 하였다.[16] 다만 온달은 영양왕 원년(1년)에 죽었다.[17]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은 바 있다.[18] 동시에 평강공주에게 온달을 이용하기 위하여 접근시키게 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면 권모술수와 이중적 모습으로 잘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