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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호 | 건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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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이문진 | ||
| 시기 | 6세기 고구려 | ||
| 언어 | 한문[1] | ||
| 권 수 | 5권 | ||
| 분량 | 기원전 37년 ~ 600년 동명성왕 원년 ~ 영양왕 11년 | ||
1. 소개
재위 11년(기원후 600년), 임금이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옛 역사를 요약하여 다섯 권의 『신집(新集)』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1백 권의 책을 쓰고 이것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1년》
고구려의 역사서. 4세기 후반 17대 소수림왕 때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기〉 100권을 집약하여, 600년(26대 영양왕 11년) 영양왕의 명으로 태학박사 이문진이 5권으로 편찬하였다.[2] 유기는 종래 구전되어 오던 신화, 전설 등이 섞인 고구려 건국 초반기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구려가 수백년 이어짐에 따라 역사 인식이 높아지게 되어 건국 이후의 역사를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에 신집을 편찬한 듯하다.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1년》
2. 삼국사기와의 관계
학계에서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특히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의 주요 내용이 『신집』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김부식이 『신집』을 직접적으로 참조했다기보다는, 『신집』의 내용이 먼저 『구삼국사』를 비롯한 고려 이전의 다른 역사서들(예: 삼한고기, 고려고기, 본국고기, 해동고기 등)에 인용 및 반영되었고, 김부식은 이러한 중간 사료들을 바탕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신집』 자체가 현존하지 않기에 단정할 수는 없으나, 여러 정황 증거들이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한다.- 첫째, 분량 및 내용의 질적 변화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총 10권인데, 이 중 첫 5권(1대 동명성왕부터 15대 미천왕까지)은 등장인물의 활동이나 발언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며, 사건의 전개도 단순 나열이 아닌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고구려 내부의 정치 상황이나 인물 간의 관계 등도 비교적 풍부하게 서술되어 있다. 반면, 같은 시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는 상대적으로 기록이 소략하다.
그러나 고구려본기는 16대 고국원왕 대부터 기록의 양과 질이 급격히 떨어진다.[3] 사건 발생 시점 정도만 간략히 언급되거나, 그나마 상세한 내용은 중국 측 사서(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에서 발췌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심지어 광개토대왕릉비에 명확히 기록된 신라 구원 기록과 같은 중요한 독자 기록도 누락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의 질적 차이는 『삼국사기』 편찬 당시 참고한 원사료가 달랐음을 시사하며, 『신집』이 5권으로 구성되었다는 점과 고구려본기 초기 5권의 상세함이 우연의 일치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즉, 『신집』의 내용이 반영된 초기 사료들이 동명성왕부터 미천왕까지의 역사를 주로 다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 둘째, 특정 명칭의 등장 시기와의 연관성이다.[4]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국상(國相)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을파소(9대 고국천왕 시기)부터 창조리(15대 미천왕 시기)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등장하며, 이들의 활동과 발언이 비중 있게 다뤄진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는 앞서 언급된 고구려본기 초기 5권의 상세한 기록 구간과 거의 일치한다. 즉, 『신집』이 편찬되면서 고구려 초기부터 미천왕 대까지의 주요 정치 제도와 인물에 대한 기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이것이 『구삼국사』 등 중간 사료를 거쳐 『삼국사기』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만약 『신집』이 이 시기를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면, 국상과 같은 핵심 관직과 그 인물들의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었을 것이며, 김부식은 이를 충실히 활용했을 것이다.
- 셋째, 『신집』의 편찬 배경이다. 『신집』의 원사료로 여겨지는 『유기』 100권은 소수림왕 대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영양왕 대에 이문진이 이를 5권으로 요약, 정리한 것이 『신집』이다. 소수림왕(17대) 시기까지의 역사를 담은 『유기』를 바탕으로 했다면, 『신집』은 건국부터 국가의 기틀이 잡히고 활발한 정복 활동이 전개되던 시기, 즉 미천왕(15대)이나 고국원왕(16대) 초기까지의 역사를 주요 내용으로 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러한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5권의 풍부하고 체계적인 서술은 『신집』의 내용을 상당 부분 이어받은 『구삼국사』와 같은 사료들을 재인용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후의 역사는 자세히 서술되어 남아있지 못했을까? 이는 영양왕 대에 『신집』이 편찬된 이후, 고구려가 수·당과의 대규모 전쟁에 휘말리면서 결국 멸망에 이르렀고, 이 과정에서 추가적인 역사 기록 편찬이나 기존 사료의 보존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후기 기록이 중국 사서에 크게 의존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이름이 중국 사서의 피휘를 거르지 못하고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5] 기록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결론적으로, 『신집』 5권은 고구려 건국부터 미천왕 대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를 집대성한 핵심 사료였으며, 그 내용은 『구삼국사』 등 고려 초기의 다른 역사서를 통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해당 부분을 서술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학계는 판단하고 있다.
[1] 당대 고구려의 공식 기록 및 외교 언어는 한문이었다.[2] 100권이 5권이 됐다는 것에 의문을 품기 마련인데, 유기는 목간, 즉 간독이고 신집은 종이책이 아니겠느냐라는 설이 있다. 게다가 '유기' 라는 것이 역사책이 아니라 한자 그대로 그냥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남겨진 기록'의 모음을 의미한다면, 이것저것 가지치기를 하고 중복되거나 모순되는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용은 크게 줄어들었을 개연성도 있다.[3] 정확히는 미천왕 말년부터 기록이 간략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나마 광개토대왕 시절까진 기타 사서나 광개토대왕릉비 등의 발견으로 어느정도 실체 파악은 되는 편이나, 장수왕 이후부터의 고구려사는 진짜 고구려 자체 내정 기록이 매우 부족한 수준이다.[4] 사실 첫째 내용과 본질적으론 이어지는 내용이다.[5] 당 고조 이연의 이름을 피휘하여 '연(淵)'을 '천(泉)'으로 표기한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