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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古記
1. 개요
또 고려고기(高麗古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수나라 양제가 대업(大業) 8년 임신(壬申)에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쳐들어왔다. 10년 갑술(甲戌)(614년) 10월에 고구려왕[원주]이 글을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몰래 작은 활을 가슴 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져가는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양제가 표문을 들고 읽을 때 활을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양제가 군사를 돌이켜 세우려 하다가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으로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아뢰기를,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서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황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고 하였다.
황제가 죽은 후 [양명은] 고구려에 태어나서 15세에 총명하고 신무(神武)하였다. 그때 무양왕(武陽王)이 그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원주2]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라고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고 하였는데,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렀으니, 곧 시중(侍中)의 직이다.[원주3]
삼국유사 제3 흥법(興法第三)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수나라 양제가 대업(大業) 8년 임신(壬申)에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쳐들어왔다. 10년 갑술(甲戌)(614년) 10월에 고구려왕[원주]이 글을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몰래 작은 활을 가슴 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져가는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양제가 표문을 들고 읽을 때 활을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양제가 군사를 돌이켜 세우려 하다가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으로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아뢰기를,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서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황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고 하였다.
황제가 죽은 후 [양명은] 고구려에 태어나서 15세에 총명하고 신무(神武)하였다. 그때 무양왕(武陽王)이 그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원주2]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라고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고 하였는데,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렀으니, 곧 시중(侍中)의 직이다.[원주3]
삼국유사 제3 흥법(興法第三)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고구려 기록을 다룬 것으로 추정되는 찬자 미상의 역사서. 연개소문과 관련된 야사를 수록한 내용만이 일연의 삼국유사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일연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에 도교를 도입해 고구려를 쇠망하게 만들었다고 깠는데[4], 고려고기의 해당 내용(양명환생설화)을 수록한걸 보면 연개소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는 입장의 사서였거나 설화적 성격이 강한 책으로 추정된다.
[원주] 이때는 제36대 영양왕(嬰陽王) 즉위 25년이었다.[원주2] ≪국사≫에는 영류왕의 이름이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무양(武陽)이라고 하니 잘 알 수 없다.[원주3] ≪당서≫에는 “개소문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고 했으니,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하였다.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에는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과 아울러 주석하다”고 했으니, 즉, 소문이 곧 직명인 것은 문헌으로 증명되지만, 전기에 이르기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의 서문”이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4] 실제로 650년 고구려 승려 보덕화상은 고구려에서 백제로 망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