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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7:07:28

제왕연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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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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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王年代歷
1. 개요2. 필사본3. 같이보기

1. 개요

통일신라최치원이 저술한 사서김부식삼국사기를 쓸 때 참고하고 인용하였으나, 현재는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신라 역대 왕의 연대기 혹은 연표로 추정되는데 최치원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신라 고유의 왕호를 사용한 초기 군주들도 모두 무슨 왕 무슨 왕이라고 중국식 왕호로 바꿔 기술했고, 훗날 김부식이 이러한 점을 비판하였다. 흔히 김부식은 사대주의자라고 욕을 먹지만 삼국사기의 논평들을 보면 이는 잘못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최치원을 비판하는 이 대목이다.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왕으로서 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차차웅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이사금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사람, 마립간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이다. 신라 말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서는 모두를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으로 칭하지 않았다. 혹시 그 말이 천박하여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서일까? 『좌전(左傳)』과 『한서(漢書)』는 중국의 역사책인데도 오히려 초(楚)나라 말인 '곡오도(穀於菟)', 흉노(匈奴) 말인 '탱리고도(撑犁孤塗)' 등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신라의 일들을 기록함에 그 방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본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지증 마립간
조상들이 쓴 왕호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중국 사서들도 조상들이 쓰던 왕호에 대해서는 당대 명칭 그대로 썼는데 최치원은 왜 다 바꿔 썼느냐고 비판한 것.

2016년 국가직 7급 시험 한국사 문제 중에서, 제왕연대력을 알지 못하면 답을 알 수 없는 킬러 문제가 출제됐다.

2. 필사본

오랫동안 소실되었다고 생각했다가 일제강점기에 제왕연대력을 재발견해 그것을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필사본이 있는데, 한글 '에'가 보인다거나 우발수를 '在今寧邊府'라 표시하는 등[1] 있을 수 없는 기록들이 쓰여 위서로 본다. 화랑세기와도 비슷하지만, 화랑세기는 학자들 중에서도 조금이나마 진서론을 미는 사람이 있긴 있는데 이건 미는 사람조차도 없다.

3. 같이보기



[1] 즉, 고주몽 신화에 등장하는 지명 우발수를 "오늘날의 영변부에 있다"라고 적었다는 소리. 영변부는 작금의 영변군이다. 영변부는 15세기 초 연산도호부와 무산현을 합치면서 생겨났기 때문에 최치원의 시대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