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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1:54:30

응제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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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製詩註.
파일:응제시주.jpg
1. 개요2. 편찬 배경3. 내용

1. 개요

조선 태조 5년, 1396년에 권근이 지은 응제시를 훗날 1462년(세조 8년)에 권근의 손자인 권람이 주석을 붙여 간행한 책. 보물 제 1090호이며, 현재 1991년 10월 4일에 지정된 1090-1호와, 2005년 7월 7일에 지정된 1090-2호 모두 별도의 개인 소장품이다. 1090-1호는 서울의 삼성출판박물관에, 1090-2호는 경남 진주시의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2. 편찬 배경

14세기 후반의 난세가 종식되고 한반도와 대륙엔 각각 조선명나라가 건국된다. 하지만 건국 초기 두 나라 사이엔 매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게 제대로 터진 것이 바로 표전문 사건이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낸 표문의 언사가 매우 불손하다며 명나라 황제인 홍무제(주원장)가 매우 분노했고, 결국 홍무제가 글을 지은 정도전에게 당장 명으로 오라고 소환한 것이다.

당연히 직접 갔다가는 정도전의 목이 날아갈 판이라 정도전 대신 책임지고 명나라로 향한 사람이 권근이었다. 명나라에 도착한 권근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홍무제를 알현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도중 즉흥적으로 홍무제가 내어준 시제(詩題)를 받고 그 운에 따라 24수의 시를 짓는다. 이것이 바로 응제시이다.

권근의 응제시 24수를 본 후 크게 감탄하고 마음을 푼 홍무제는 기념으로 자신도 직접 태조고황제어제시(太祖高皇帝御製詩) 3수(제압록강,題鴨綠江 고려고경,高麗古京,, 사경요좌,使經遼左,,,)를 지어 권근에게 하사한다. 이후 권근은 그 학식과 문재(文才)를 인정받아 문연각(文淵閣)에서 명나라 학자들과 경사(經史)를 논하고, 홍무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으로 돌아온 후 권근은 크게 환대받게 되고 영광을 기리는 의미에서 응제시 24수와 어제시 3수가 국가에 의해 간행된다. 이후 손자인 권람이 이 27수의 시에 주석을 붙여 1462년(세조 8년)에 편찬한 것이 바로 이 응제시주이다. 1470년에는 서거정(徐居正)[1]이 내용을 좀 더 보완하여 새롭게 복각하였다.

3. 내용

권근이 지은 응제시는 총 24수로 나뉘어져 있다.양촌집(陽村集) 어제시(御製詩) 및 제1권 응제시(應製詩)

최초 왕경작고(王京作古) 외 8수는 고려의 멸망, 조선의 건국, 명나라로 오는 동안 본 평양, 압록강, 요동 등의 풍취를 읊었다. 다음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 외 10수는 동이, 삼한, 신라, 탐라 등 한반도 역대 국가들의 흥망과 금강산, 대동강 등 한반도의 아름다운 명승들을 주제로 시를 지었다. 마지막 청고가어내빈(聽高歌於來賓) 외 6수는 명태조가 베풀어준 잔치에서의 흥취를 시로 지었다.

전체적으로 한반도 역사의 유구함과 독자성, 그 땅의 아름다움과 신비함, 풍요로움 등을 묘사하는 한편 명태조의 덕을 칭송하고 중국과 한국의 유구한 우호를 시로 표현했다.

이후 손자인 권람은 역사인식을 가지고 각 시에 우리나라의 고대사와 그와 관련한 신화, 전설, 설화 그리고 역사지리에 관한 기록 등을 첨부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각종 역사책과 여러 잡록(雜錄)들을 인용하여 고대 한반도의 역사와 신화, 설화 등의 내용을 상세히 주석으로 달았다.

특히 현대에는 단군조선의 내용이 나오는 책으로 유명한데 권근의 시 중에는 요(堯)임금 원년 무진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자 사람들이 단군이라 불렀다는 시구가 있고, 거기에 권람이 단 주석에는 상제(上帝)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웅(雄)이 천부인 3개를 받고 삼천인과 함께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와 환웅 천왕(桓雄天王)이 되었으며, 바람, 비, 구름의 신을 거느리고 인간사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다고 나와 있다. 이후 웅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 하였다. 그가 곧 동부여의 왕이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 단군은 1048년 동안 살았다' 등의 내용이 나온다.

이를 통해 조선 초기에는 조선 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려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 동국통감 등을 지은 조선시대 문인으로 권근의 외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