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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명 초대 황제 홍무제 | 洪武帝 | |||
출생 | 1328년 10월 29일 | ||
원 호주 종리현 (現 안후이성 추저우시 펑양현) | |||
즉위 | 1368년 1월 23일 | ||
명 금릉 (現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 | |||
사망 | 1398년 6월 24일 (향년 69세) | ||
명 남경 응천부 황궁 서궁 (現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 | |||
능묘 | 효릉(孝陵) | ||
재위기간 | 오국공(吳國公) | ||
1356년 8월 5일 ~ 1364년 2월 4일 | |||
오왕(吳王) | |||
1364년 2월 4일 ~ 1368년 1월 23일 | |||
초대 황제 | |||
1368년 1월 23일 ~ 1398년 7월 2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성씨 | 주(朱) | |
휘 | 원장(元璋)[1] | ||
부모 | 부황 인조 순황제 모후 순황후 진씨 | ||
형제자매 | 4남 2녀 중 4남 | ||
배우자 | 황후 효자고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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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26남 16녀 | ||
자 | 국서(國瑞) | ||
작호 | 오국공(吳國公) → 오왕(吳王) | ||
묘호 | 태조(太祖) | ||
시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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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 홍무(洪武, 1368년 ~ 1398년) | ||
절일 | 천수성절(天壽聖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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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사에서 주원장의 사례만큼 개별 인물이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경우는 매우 드물다.[3]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p.190
원말 시기 홍건적의 3대 수장이자 명나라의 초대 황제.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p.190
묘호와 시호를 합쳐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라고 한다. 명나라는 일세일원제를 따랐으므로 보통 연호인 홍무를 붙여 홍무제(洪武帝)[4]라고도 하는데, 창업군주들이 늘 그렇듯[5] 본명인 주원장(朱元璋)으로도 유명하다.
여러 세력 휘하에 차례로 있으면서 장강 이남의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 북벌을 단행하여 강북의 원나라를 만리장성 이북으로 밀어내어 천하통일을 완성했다.
명암이 공존하는 황제로, 황제권의 강화를 위해 개국공신을 비롯한 많은 신료들과 그 가족들을 잔혹하게 대숙청한 것으로도 유명해 폭군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원나라 말기의 혹독한 난세를 극복하고 뛰어난 행정 체계를 거의 혼자서 구축한 명군이기도 하다.
명 황제들 중 가장 장수한 황제로 유일하게 세는 나이로 70을 넘겼다. 여담으로 홍무제 다음으로 장수한 영락제를 제외하면 명나라 황제들 중 환갑을 넘긴 황제는 아무도 없다.[6]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홍무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자세한 내용은 홍무제/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대외 관계
사방의 제이(諸夷)는 모두 산으로 막히고 바다로 떨어져 있어 단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땅을 얻어도 산물을 가져올 수가 없고, 그 백성을 얻어도 감히 부릴 수 없다. 만약 그들 스스로가 살피지 못하고 우리 변경을 소란하게 한다면, 이는 그들에게 좋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중국의 걱정이 되지 않는데도 우리가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한다면, 역시 좋지 못할 것이다.
나는 후세의 자손이 중국의 부강함을 믿고 단지 한때의 전공을 탐하여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인명을 살상할까 그것이 두려우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라. 다만, 호융(胡戎: 몽골)과 중국은 국경이 붙어있어 오랫동안 전쟁을 펼쳐왔으니, 반드시 좋은 장수를 가려 뽑아 병사를 훈련시켜 그들에게 대비하여야만 한다.
이제 나는 정벌하지 말아야 할 여러 나라의 이름을 열거하겠다.
동북에서는 조선국. 정동편북에서는 일본국. 정남편북에서는 대유구국, 소유구국. 서남에서는 안남국(베트남), 진랍국(캄보디아), 섬라국(태국), 점성국(참파), 소문달랍국(수마트라), 서양국(인도 남부), 일형국(말레이시아), 백화국(자바 섬), 삼불 제국(팔렘방), 발니국(브루나이).
<황명조훈> 中
나는 후세의 자손이 중국의 부강함을 믿고 단지 한때의 전공을 탐하여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인명을 살상할까 그것이 두려우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라. 다만, 호융(胡戎: 몽골)과 중국은 국경이 붙어있어 오랫동안 전쟁을 펼쳐왔으니, 반드시 좋은 장수를 가려 뽑아 병사를 훈련시켜 그들에게 대비하여야만 한다.
이제 나는 정벌하지 말아야 할 여러 나라의 이름을 열거하겠다.
동북에서는 조선국. 정동편북에서는 일본국. 정남편북에서는 대유구국, 소유구국. 서남에서는 안남국(베트남), 진랍국(캄보디아), 섬라국(태국), 점성국(참파), 소문달랍국(수마트라), 서양국(인도 남부), 일형국(말레이시아), 백화국(자바 섬), 삼불 제국(팔렘방), 발니국(브루나이).
<황명조훈> 中
짐이 조선과의 분쟁을 그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함이라!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이란 백성들에게 있어 재앙이 되지 않겠는가? 예부로 하여금 문서로 그들(조선)을 질책하도록 하고, 그래도 그들이 뉘우치지 않는다면 그때 토벌을 이야기해도 실로 늦지 않을 것이다.
《명 태조 실록》권 257
《명 태조 실록》권 257
주원장은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해서, 중국은 이미 충분히 큰 나라이자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업국이고, 노동력도 충분한 데다가 당시의 수준으로 상공업 및 국외 시장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경제적 차원'에서 다른 나라를 공격하기란 '무의미한 짓'이고, 이미 중국에 땅이 충분하고 사람 또한 넘치도록 있는데 풍속이 전혀 다른 나라를 점령해봐야 쓸모 있는 영토를 얻을 수도, 의미 있는 노동력을 얻을 수도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얄궂게도 그의 4남이었던 제3대 성조 영락제 주체는 아버지 홍무제가 남긴 <황명조훈>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무려 50만 대군을 다섯 차례나 동원하여 북방 원정에 나섰고[7], 남으로는 찬탈당한 황좌를 되찾기 위해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쩐 왕조의 쩐티엠빈을 돕고, 역적 호꾸이리를 처단한다는 구실로 80만 대군을 이끌고 당시 대우국으로 불리던 베트남을 침공하여 호 왕조의 상황 호꾸이리와 황제 호안트엉을 잡아 남경에서 처형했다. 이후 베트남은 명나라에 합병되어 20년 동안 잠깐의 식민지배를 받다가[8] 레러이가 등장하여 명나라로부터 완전 독립했다. 영락제는 군사원정 이외에도 그 유명한 정화의 대함대를 조직하여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했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영락제 시기에 이르러 홍무제 주원장 말기에 비교해 60개국 이상 늘어났다. 그렇다고 유럽처럼 대항해시대를 열고 자체 발전에 뭔가를 투자한 것도 아니었다. 위세를 떨칠 수는 있었지만 돈만 잔뜩 썼을 뿐이었다.
4.1. 고려 · 조선
명 태조 홍무제의 치세는 한국사로 따지면 고려 말기의 공민왕 중후기 (1368년 ~ 1374년), 우왕 (1374년 ~ 1388년), 창왕 (1388년 ~ 1389년), 공양왕 (1389년 ~ 1392년) 그리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 (1392년 ~ 1398년)와 겹친다.주원장이 중국을 통일해 대명을 건국한 뒤 고려에선 젊은 시절 원나라에서 유학해 중국어에 능통했던 이색을 1388년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색이 중국어에 능하다는 말을 전해들은 태조 주원장은 통역 없이 그와 대화하려 했는데, 막상 이색이 중국어로 입을 열자 알아듣질 못해 너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분위기가 차가워지려고 하자 배석했던 예부의 관리가 급하게 끼어들어 입조한 지 오래되어 말을 잊어먹은 모양이라고 둘러대고 통역을 했다. 이때 주원장은 이색의 말이 꼭 요동 방면의 몽골족 군벌이었던 나하추와 같다고 평가했다.
이색은 원나라에서 유학하는 동안 몽골화된 대도(북경)쪽의 중국어를 배웠는데, 주원장은 오늘날의 안휘성 출신이었다. 가뜩이나 중국은 땅도 넓고 인구도 많아서 말이 방언이지 다른 언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지역별 차이가 큰데, 원나라 지배 시기의 북경 말은 몽골인들의 영향으로 얼화 현상이 나타나는 등 다른 중국 지방의 말과는 다른 특징이 생겼다. 현대의 표준 중국어도 북경쪽의 말에 기반하기에 여전히 원나라 시기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을 정도이다. 안휘성 출신인 주원장이 몽골인들의 영향을 받은 북경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어 생긴 헤프닝이었다. 반면 정몽주가 사신으로 왔을 때는 정몽주의 강단이나, 첫 번째 사신 방문 이후 조난을 당해 죽을 뻔 함에도 다시 목숨을 걸고 어려운 걸음을 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는지 상당한 우대를 해주기도 했다. 어쨌든 지속적으로 태조 주원장은 고려가 원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신생 통일제국인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충성할 것을 강요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아 고려 말기 상당한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1392년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조선의 국왕 이성계에게 대놓고 '내가 보기에 넌 왕노릇을 할 자격이 없다. 자꾸 까불면 치겠다.'고 서신으로 협박을 일삼으면서도[9], 실제로 조선을 치자는 여론이 나오자 이를 대번에 묵살해버렸다.
이러한 점은 외교 관계에도 적용되어, 태조 주원장 시절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험악해져 갔다. 조선의 초대 왕 이성계가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었던 상당한 무공을 세운 명장이었고, 만주의 여진족에게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명나라 건국 이후 철령위 설치 등의 문제로 인해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위해 군제 개혁을 벌이는 것이 주원장을 자극해 매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정도전 일파의 사신들이 명나라에서 모욕을 받거나 사사당하면서[10] 급기야 양국 간 무력 충돌로 발전될 기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詔停造遼王宮室勑武定侯郭英曰遼東軍務物情來者多言其艱苦况邊境營繕朕嘗為卿言不宜盡力以困之今役作軍士皆強悍勇力善戰之人勞苦過多心必懷叛故往往逃伏草野山澤間乘間刼掠近者高麗表奏言多不實朕已命有司究之聞彼自國中至鴨綠江凡衝要處所儲軍粮每驛有一萬二萬石或七八萬十数萬石東寧女真皆使人誘之入境此其意必有深謀朕觀高麗自古常與中國爭戰昔漢唐時遼東地方。皆為所有直抵永平之境恃遠不臣時時弄兵自古無狀如此今遼東乏糧軍士飢困儻不即發沙嶺倉粮賑之必啟高麗招誘逋逃之心非至計也使高麗出二十萬人以相驚諸軍何以應之今營繕造作暫宜停止且令立營屋以居十年之後再為之古人有言人勞乃易亂之源深可念也。
수도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역마다 1, 20,000석 또는 7, 80,000석, 100,000여 석에 이르고, 사람을 보내 동녕부의 여진(東寧女真)을 유인하여 넘어가고 있으니,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을 것이다. ...(중략)... 지금의 요동은 군량 부족으로 군사가 굶주리고 있는 바, 즉시 사령창(沙嶺倉)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진제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유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못 된다. 만일 고려가 200,000명을 일으키면 우리는 어떻게 응전할 수 있겠는가? (중략)
- 《명태조실록》, 홍무 28년(1395) 4월 8일 두 번째 기사
《명실록》에 따르면 조선(이성계)이 강병 200,000명을 동원해서 요동 정벌을 시작하면 답이 안 나온다는 보고를 듣고 태조 주원장이 우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가 당시 조선 내부의 상황을 잘 몰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당대의 조선은 고려 말부터 홍건적·나하추·여진족·왜구 등의 침략으로 인하여 나라가 혼란한 상황을 겪어서 왕조 초기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었고,[11][12] 주원장이 저 발언을 하기 고작 7년 전에 있었던 위화도 회군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이 실제로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0,000명 정도에 불과했다.[13] 심지어 조선보다도 국력이 더 강성했던 고구려가 국운을 걸고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을 때도 단일 전투에 200,000명을 동원하지 못했으니[14] 고려 말기의 각종 폐단을 극복하지 못한 건국 초의 조선이 총 병력 200,000명을 정상적으로 동원하기는 매우 어려웠다.수도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역마다 1, 20,000석 또는 7, 80,000석, 100,000여 석에 이르고, 사람을 보내 동녕부의 여진(東寧女真)을 유인하여 넘어가고 있으니,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을 것이다. ...(중략)... 지금의 요동은 군량 부족으로 군사가 굶주리고 있는 바, 즉시 사령창(沙嶺倉)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진제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유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못 된다. 만일 고려가 200,000명을 일으키면 우리는 어떻게 응전할 수 있겠는가? (중략)
- 《명태조실록》, 홍무 28년(1395) 4월 8일 두 번째 기사
하지만 조선이 명나라 내부의 사정을 몰라서 이렇게까지 경계한 측면도 있는데, 실제 주원장의 정책은 겉으로만 엄포를 놓고 전쟁에 대비한 방어만 철저하게 하지, 실제 대외전쟁은 꺼리는 성격이었다. 당장 위화도 회군 직전 공요군의 진격 당시에도 주원장이 한 조치는 방어 강화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15]
부연하자면 정확히, 주원장이 우려하는 상황은 만주 최고의 전쟁영웅 이성계가 건국을 한 여세를 몰아 정도전의 입김을 타고 여진족을 선동해 가별초와 함께 요동을 어지럽히는 것이었으며, 적어도 용장 이성계의 전투 의지나 영향력만큼은, 나중에 왕자의 난 이후 도성에서 탈출하자마자 웬수같은 아들놈을 때려잡기 위해 가별초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관군을 격파한 것을 볼 때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주원장이 선택한 전략은, "만약 이성계가 가별초를 끌고 여진족과 요동을 도모하려 한다면 명군이 조선의 본토를 먼저 침공해버릴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주원장은 이성계와 분쟁을 벌인 적도 있었다. 또한 주원장과 이성계 사이에는 희한한 전설이 하나 있었다. 주원장의 집안이 원래는 한반도쪽 가문이었는데 어릴 때 이성계의 아버지와 명당을 다투다가 주원장이 차지한 명당으로 주원장은 명 태조가 되고, 옆에 명당을 차지한 이성계는 조선 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구체적으로 해당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이성계의 선조가 황해도 모처에 자손이 황제가 될 묏자리와 왕이 될 묏자리를 두고는 선친을 묻으려고 했더니, 주씨 성의 노비가 몰래 묏자리를 바꾸어서 후손들이 각각 명 태조 및 조선 태조로 뒤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16] 우연히 만난 스님과 장수가 훗날 각각 명나라의 초대 황제, 조선의 초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한 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이성계와 주원장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탁발승에 도적 출신인 주원장과 군벌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출신은 다르지만, 변방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명당 이야기를 떠나서 사실 명나라가 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객관적인 근거들은 꽤 있다는 주장도 있다. 명나라가 국가 사업으로 편찬한 지리서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명 태조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주원장의 아들들 중 4남인 명 성조 영락제의 생모가 고려 사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즉 영락제의 생모가 효자고황후 마씨가 아닌 고려에서 원나라로 온 공비(貢妃)라는 기록이다. 명나라 황실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곳인 태상시의 기록인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는 영락제의 생모가 공비(碽妃)라고 했다.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에는
"여러 비빈들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비(妃)만이 서쪽에 있다. 이는 성조(영락제)를 낳았기 때문인데,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할 수 없다."
고 했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권근도 이를 언급한 걸 보면 조선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으니, 조선과 명나라의 일화에는 기저에 이러한 역사적인 이유들도 있었을 것이다.이와 별개로 주원장이 이성계와 사돈을 맺을 뻔한 적도 있었는데 잘 안 알려졌만 실제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의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이 먼저 사돈 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을 맺으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못되게 나오니 할 수 없다"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취소되었다고 한다.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4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했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했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했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했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했는데, 다음날 안장을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1,000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1,000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했다."
-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아마도 정황상 태조 주원장은 "결혼까지 하면 이성계가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성계는 "결혼까지 할 정도면 요동 정도는 지참금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같은 일을 두고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취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혼담이 완전히 물건너가자 조선에서는 거의 곧바로인 1397년 6월부터 제3차 요동정벌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때 조준이 반대하자 남은이 조준은 셈은 잘 세도 큰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397년 9월에 심씨를 공식적으로 세자 이방석의 현빈으로 삼으면서 관련 논의들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되었다. 실제로 저 국혼이 성사되었다면 그 이후의 역사에 있어 큰 변수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태조 주원장이 1398년 5월에 붕어하기 때문에 국혼이 성사되었으면 8월에 발생하는 정난의 변과, 마찬가지로 8월에 벌어진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선의 입장이 굉장히 미묘해졌을 것이다.[17] 세자 이방석이 명나라 황제의 부마가 되는 만큼 그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졌을 테니 아무리 이방원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명나라와 척을 지고 요동 정벌을 할 것이 아니라면 제1차 왕자의 난은 시도조차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그렇게까지 명나라 황실과 가까워진 상태라면 정난의 변에서 조선이 건문제의 편을 안 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장인의 나라가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관여하지 않을 명분이 없으니 정난의 변에 조선군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18]
4.2. 일본
중원에서 원나라를 몰아낸 1360년대부터 홍무제는 일본에 사람을 파견하여 왜구의 침입을 근절하라고 요구하고, 이를 행하지 않으면 일본을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1380년대 후반까지 북원 문제에 주력하던 홍무제의 주요 관심사를 생각해보면 이는 진짜로 일본을 공격하겠다는 의사라기보다는 산동, 남직예(南直隸), 절강, 복건 일대에서 왜구가 들끓는 현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시기의 외교적인 협박에 가깝겠으나 당시 일본은 난보쿠초시대의 혼란으로 왜구를 근절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홍무제의 강경 발언은 계속되었다.이후 1379년~1380년,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올린 문서가 홍무제 앞으로 도착했는데, 그 내용이 심히 불손하고 오만하다고 하여 홍무제는 일본이 조공을 바치는 일을 금지시켰다. 이후 1381년 무렵에 또다시 일본측에서 조공을 바치려는 시도를 했지만 명나라는 이를 거부하며 남조와 북조를 가리지 않고 외교적인 협박을 계속했다. 이에 대해 남조의 카네요시 친왕(懷良親王)[19]은 홍무제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臣聞三皇立極,五帝禪宗,惟中華之有主,豈夷狄而無君。乾坤浩蕩,非一主 之獨權,宇宙寬洪,作諸邦以分守。蓋天下者,乃天下之天下,非一人之天下也。臣居遠弱之倭,褊小之國,城池不滿六十,封疆不足三千,尚存知足之心。陛下作中華之主,為萬乘之君,城池數千餘,封疆百萬里,猶有不足之心,常起滅絕之意。夫天發殺機,移星換宿。地發殺機,龍蛇走陸。人發殺機,天地反覆。昔堯、舜有德,四海來賓。湯、武施仁,八方奉貢。
신은 삼황(三皇)께서 제위를 세우시고, 오제(五帝)께서 군권을 선양하셨다고 들었사오나, 오직 중화(中華)에만 군주가 있고 어찌 이적(夷狄)에는 군주가 없단 말입니까? 하늘과 땅이 한없이 넒기에, 군주 한 사람이 권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며, 우주가 크고 넓어 여러 나라로 지키게 했습니다.
대개 천하(天下)는 천하인(天下人)의 천하이며, 한 사람만의 천하가 아닙니다.[20] 신은 중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약소한 왜(倭)에 살고 있는데, 나라가 작고 좁으며 다스리는 성지(城地)는 60여 개에 미치지 않고, 강역은 3,000리에도 미치지 못하오나, 항상 만족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중화의 주인으로써, 만승(萬乘)의 군주이시며, 다스리는 성지는 수천여 개에 이르고, 강역은 100만 리에 달하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다른 나라를 멸절시킬 뜻을 일으키십니다.
무릇, 하늘이 살기를 드러내면 별자리가 바뀌며, 땅이 살기를 드러내면 용과 뱀이 달아납니다. 인간이 살기를 들어내면 하늘과 땅이 뒤집어집니다. 예전에 요와 순임금에게 덕이 있자 사방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탕왕과 무왕이 인자한 정치를 펼치니, 팔방에서는 조공을 바쳤습니다.
臣聞天朝有興戰之策,小邦亦有禦敵之圖。論文有孔、孟道德之文章,論武有孫、吳韜略之兵法。又聞陛下選股肱之將,起精銳之師,來侵臣境。水澤之地,山海之洲,自有其備,豈肯跪途而奉之乎?順之未必其生,逆之未必其死。相逢賀蘭山前,聊以博戲,臣何懼哉。倘君勝臣負,且滿上國之意。設臣勝君負,反作小邦之差。自古講和為上,罷戰為強,免生靈之塗炭,拯黎庶之艱辛。特遣使臣,敬叩丹陛,惟上國圖之。
신은 천조(天朝)에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저희 같은 작은 나라 역시 적군을 대적할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문(文)으로써 논하자면, 공자와 맹자의 도덕만한 문장이 있으며, 무(武)에 논하자면 손무, 오기의 도략만한 병법이 있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수족과 같은 장군을 선발하고 정예한 군대를 일으켜 신의 국경을 침범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택(水澤)의 땅과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는 스스로의 방비가 있으니 어찌 기꺼이 쳐들어오는데도 무릎 꿇어 절하며 받들겠습니까? 순복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며, 거역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죽는 것은 또 아닙니다.
하란산(夏蘭山) 앞에서 서로 만나 내기(전투에 대한 은유)하며 서로 겨루니, 신이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21]
만약 전쟁에서 빼어난 군주께서 승리하시고 신하가 패한다면 잠시 상국의 뜻을 채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만, 만약 신하가 승리하고 군주께서 패한다면 오히려 소국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화의를 도모하는 것을 높게 평가하고, 전쟁을 그만두는 일을 강하다고 한 것은, 백성을 도탄에서 벗어나게 하고 뭇 백성을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에서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 폐하에게 예를 갖추어 조아리니, 오직 상국은 이 점을 헤아리기를 바라옵나이다.
《명사》 322권 <일본전>에 적힌 카네요시 친왕의 답서
신은 삼황(三皇)께서 제위를 세우시고, 오제(五帝)께서 군권을 선양하셨다고 들었사오나, 오직 중화(中華)에만 군주가 있고 어찌 이적(夷狄)에는 군주가 없단 말입니까? 하늘과 땅이 한없이 넒기에, 군주 한 사람이 권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며, 우주가 크고 넓어 여러 나라로 지키게 했습니다.
대개 천하(天下)는 천하인(天下人)의 천하이며, 한 사람만의 천하가 아닙니다.[20] 신은 중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약소한 왜(倭)에 살고 있는데, 나라가 작고 좁으며 다스리는 성지(城地)는 60여 개에 미치지 않고, 강역은 3,000리에도 미치지 못하오나, 항상 만족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중화의 주인으로써, 만승(萬乘)의 군주이시며, 다스리는 성지는 수천여 개에 이르고, 강역은 100만 리에 달하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다른 나라를 멸절시킬 뜻을 일으키십니다.
무릇, 하늘이 살기를 드러내면 별자리가 바뀌며, 땅이 살기를 드러내면 용과 뱀이 달아납니다. 인간이 살기를 들어내면 하늘과 땅이 뒤집어집니다. 예전에 요와 순임금에게 덕이 있자 사방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탕왕과 무왕이 인자한 정치를 펼치니, 팔방에서는 조공을 바쳤습니다.
臣聞天朝有興戰之策,小邦亦有禦敵之圖。論文有孔、孟道德之文章,論武有孫、吳韜略之兵法。又聞陛下選股肱之將,起精銳之師,來侵臣境。水澤之地,山海之洲,自有其備,豈肯跪途而奉之乎?順之未必其生,逆之未必其死。相逢賀蘭山前,聊以博戲,臣何懼哉。倘君勝臣負,且滿上國之意。設臣勝君負,反作小邦之差。自古講和為上,罷戰為強,免生靈之塗炭,拯黎庶之艱辛。特遣使臣,敬叩丹陛,惟上國圖之。
신은 천조(天朝)에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저희 같은 작은 나라 역시 적군을 대적할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문(文)으로써 논하자면, 공자와 맹자의 도덕만한 문장이 있으며, 무(武)에 논하자면 손무, 오기의 도략만한 병법이 있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수족과 같은 장군을 선발하고 정예한 군대를 일으켜 신의 국경을 침범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택(水澤)의 땅과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는 스스로의 방비가 있으니 어찌 기꺼이 쳐들어오는데도 무릎 꿇어 절하며 받들겠습니까? 순복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며, 거역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죽는 것은 또 아닙니다.
하란산(夏蘭山) 앞에서 서로 만나 내기(전투에 대한 은유)하며 서로 겨루니, 신이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21]
만약 전쟁에서 빼어난 군주께서 승리하시고 신하가 패한다면 잠시 상국의 뜻을 채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만, 만약 신하가 승리하고 군주께서 패한다면 오히려 소국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화의를 도모하는 것을 높게 평가하고, 전쟁을 그만두는 일을 강하다고 한 것은, 백성을 도탄에서 벗어나게 하고 뭇 백성을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에서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 폐하에게 예를 갖추어 조아리니, 오직 상국은 이 점을 헤아리기를 바라옵나이다.
《명사》 322권 <일본전>에 적힌 카네요시 친왕의 답서
홍무제는 표문을 읽고 격노했으나, 결국 몽골의 전철(쿠빌라이 칸의 침공 실패)를 거울 삼아 병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일본에게 윽박지르다가 원나라를 막아낸 일본의 자화자찬과 소국에도 막을 방도가 있다는 도발적인 표문에 분노하기는 했으나 북방의 일이 정리 되지 않았을 뿐더러 쿠빌라이처럼 먼 바다를 건널만한 수군이 정비된 것도 아니라, 실제로 침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수비만 강화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술했듯이 홍무제는 북방의 이민족을 격멸하는 것 외에는 대외 원정을 삼간 군주기도 했다.
사실 저런 수위가 높은 국서를 보내 홍무제에게 받아쳤던 카네요시 친왕도 여유있는 상황이 결코 못 되었다. 카네요시 친왕이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세력이 쇠퇴해 버렸는데, 1372년에 명나라 사신이 카네요시 친왕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러 하카타에 왔더니만 이미 하카타는 카네요시 친왕과 대립하던 북조 측의 단다이 이마가와 료슌에게 넘어가 있었다.
또 《명사》에는 홍무 9년(1376년) 4월에 '일본 국왕 양회'가 승려 규정용(圭廷用) 등을 보내 명나라에 공물을 바치며 왜구 피해에 대해 사과했다고 적었다. 일본의 사학자인 사쿠마 시게오(佐久間重男)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군세에 밀려 카네요시 친왕을 옹립한 남조의 기쿠치 세력이 쫓기던 여러 긴박한 정황상 카네요시 친왕이 명나라에 사절을 보낼 겨를은 없었고, 아마도 규슈의 다른 세력들이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공인받은 카네요시 친왕 즉 '일본 국왕 양회'의 이름을 도용하여 명나라와 접촉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렇다면 저 도발적인 국서 역시 카네요시 친왕이 쓴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는 얘기가 된다.[22]
이처럼 홍무제는 일본과는 왜구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는데, 일본에 사절을 세 번이나 보내며 단속을 요청했지만 당시 일본은 조정이 남북조로 갈라져 있었고, 아시카가씨의 무로마치 막부도 별 힘이 없었던 시절이라[23] 형식적인 답변을 듣는 것으로 그쳤다.
4.3. 대월
대월(= 베트남)과는 1372년 안남왕 책봉 문제가 잠시 불거졌다. 당시 안남 국왕[24]은 제9대 예종 진숙명이었는데, 홍무제는 진숙명이 선대 군주인 양일례를 이유없이 폐위시켰다는 이유로 정식 국왕에 책봉하지 않고 '전왕인친사'(前王印視事)라는 애매한 작위로 책봉했으며 진숙명이 붕어했을 때도 애도하지 않은채 그를 비판했다.「安南自陳叔明逼逐其陳日熞,使不得其死,因篡位,廢置相,仍未來告。叔明懷奸挾詐,殘滅其王,以圖富貴,不義如此,庸可與乎?今叔明之死若遣使吊慰,是撫亂臣而與賊子也。異日四夷聞之,豈不效尤,狂謀踵發,亦非中懷憮外夷之道也。爾禮部咨其國知之。」
진숙명이 진일견(양일례)을 강제로 쫒아내어, 죽게 한 건 그릇된 일이고, 찬위 등 여러 문제가 있으며 숙명이 간사한 마음을 품고 일례를 멸하고 부귀를 탐하는 것은 불의에 해당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지금 숙명의 죽음을 사자를 보내서 조위하는 것은 난신[25]을 위로하고 도적과 함께 하는 것이다.
진숙명이 진일견(양일례)을 강제로 쫒아내어, 죽게 한 건 그릇된 일이고, 찬위 등 여러 문제가 있으며 숙명이 간사한 마음을 품고 일례를 멸하고 부귀를 탐하는 것은 불의에 해당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지금 숙명의 죽음을 사자를 보내서 조위하는 것은 난신[25]을 위로하고 도적과 함께 하는 것이다.
4.4. 티무르 제국
중앙아시아의 정복군주였던 티무르 바를라스와의 관계는 극도로 험악해서 서로 전쟁 직전까지 갔으나 여건이 좋지 않아 일단 화해하고 티무르가 사절단을 보냈는데 홍무제는 이를 조공 사절로 여겼다. 결국 화가 난 티무르는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다만 그 전에 홍무제가 붕어하고, 이후 티무르도 동진하던 중 오트라르에서 붕어하여 두 제국의 드림매치는 이뤄지지 않았다.그뒤 티무르 제국과 명나라는 티무르의 4남인 샤 루흐때 다시 국교를 복원하고, 티무르의 사절단이 다시 한 번 명나라를 방문했다. 당시 티무르 왕조 사절단의 공식 일지를 담당하던 기야스 웃딘 나카의 기록에 따르면 사절단은 명나라의 부유함, 역참 등의 인프라 및 명나라 조정의 행정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놀라운 점은 이들 사절단이 방문한 지역들은 강남(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화북 지방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북로남왜로 인해 약해진 후반기의 명나라면 몰라도 홍무제 ~ 선덕제 시기의 명나라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세계 최강국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강한 티무르 제국이라고 한들 무력으로 꺾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5. 가족
5.1. 조상
- 현조부: 주중팔(朱仲八) - 홍무제의 초명이었던 주중팔(朱重八)과는 한자가 다르다.
- 고조부: 덕조 현황제 주백륙
- 증조부: 의조 환황제 주사구
- 조부: 희조 유황제 주초일
- 부황: 인조 순황제 주세진
5.2. 아내
위 사진의 사람은 주원장의 현처였던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씨(1332년~1382년)이다. 이름은 수영(秀英)이었으며 회서 숙주 신풍리 출신으로 위에서 언급된 곽자흥의 양녀였다. 마 황후는 중국사 최고의 국모로 꼽히는 여인 중 한 명이다. 자세한 건 효자고황후 항목 참고.
5.3. 자녀
5.3.1. 황자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1남 |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 | 1355년 | 1392년 | 제2대 혜종 건문제의 아버지, 훗날 흥종으로 추존 |
2남 | 진민왕(秦愍王) 주상 | 1356년 | 1395년 | |
3남 | 진공왕(晉恭王) 주강 | 1358년 | 1398년 | |
4남 | 연왕(燕王) 주체 | 1360년 | 1424년 | 훗날의 제3대 성조 영락제 |
5남 | 주정왕(周定王) 주숙 | 1361년 | 1425년 | |
6남 | 초소왕(楚昭王) 주정 | 1364년 | 1424년 | |
7남 | 제공왕(齊恭王) 주부 | 1364년 | 1428년 | 정난의 변 시기에 폐서인되었다가 이후 복권 |
8남 | 담왕(潭王) 주재 | 1369년 | 1390년 | |
9남 | 조왕(趙王) 주기 | 1369년 | 1371년 | |
10남 | 노황왕(魯荒王) 주단 | 1370년 | 1390년 | |
11남 | 촉헌왕(蜀獻王) 주춘 | 1371년 | 1423년 | |
12남 | 상헌왕(湘獻王) 주백 | 1371년 | 1399년 | |
13남 | 대간왕(代簡王) 주계 | 1374년 | 1446년 | |
14남 | 숙장왕(肅莊王) 주영 | 1376년 | 1420년 | |
15남 | 요간왕(遼簡王) 주식 | 1377년 | 1424년 | |
16남 | 경정왕(慶靖王) 주전 | 1378년 | 1438년 | |
17남 | 영헌왕(寧獻王) 주권 | 1378년 | 1448년 | |
18남 | 민장왕(岷莊王) 주편 | 1379년 | 1450년 | 중화인민공화국 제5대 국무원 총리 주룽지의 직계 조상 |
19남 | 곡왕(谷王) 주혜 | 1379년 | 1428년 | 영락 연간에 폐서인 |
20남 | 한헌왕(韓憲王) 주송 | 1380년 | 1407년 | |
21남 | 심간왕(沈簡王) 주모 | 1380년 | 1431년 | |
22남 | 안혜왕(安惠王) 주영 | 1383년 | 1417년 | |
23남 | 당정왕(唐定王) 주경 | 1386년 | 1415년 | |
24남 | 영정왕(郢靖王) 주동 | 1388년 | 1414년 | |
25남 | 이려왕(伊厲王) 주이 | 1388년 | 1414년 | |
26남 | 황자 주남 | 1394년 | 요절 |
5.3.2. 공주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1녀 | 임안공주 주경정 | 1360년 | 1421년 | |
2녀 | 영국공주 | 1364년 | 1434년 | |
3녀 | 숭녕공주 | 미상 | ||
4녀 | 안경공주 | |||
5녀 | 여녕공주 | |||
6녀 | 회경공주 | 1366년 | 1425년 | |
7녀 | 대명공주 | 1368년 | 1426년 | |
8녀 | 복청공주 | 1370년 | 1417년 | |
9녀 | 수춘공주 | 1373년 | 1388년 | |
10녀 | 공주 | 미상 | 요절 | |
11녀 | 남강공주 주옥화 | 1373년 | 1438년 | |
12녀 | 영가정의공주 | 1376년 | 1455년 | |
13녀 | 공주 | 미상 | 요절 | |
14녀 | 함산공주 | 1381년 | 1462년 | |
15녀 | 여양공주 | 미상 | ||
16녀 | 보경공주 | 1394년 | 1433년 |
6. 여담
- 어느 날 홍무제 주원장이 《맹자》를 읽다가 한 대목에서 크게 노했다."임금이 신하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君之視臣 如土芥 則臣視君 如寇)
그리고 미친 듯이 소리치며 신하들에게 "이 늙은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당장 이 자의 신주를 사당에서 내치고 책을 불태워라."라고 명령했다. 그런 말은 신하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한 주원장은 명령을 내린 뒤 이 문제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대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죄명에 '대' 자가 붙으면 '그 죄를 범한 자는 처형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당시 전당(錢唐)이라는 신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황제에게 간언했다. 주원장이 목을 칠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신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전당은 처형당할 각오를 하고 맹자의 복권을 위해 간한 것이었다. 그러자 주원장도 전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살려두었다.[26] 이후 그의 간언을 따라 맹자를 공자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도록 허락했다. 목숨을 걸고 간했던 전당은 1394년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어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맹자와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자신의 말이 정말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홍무제는 끝내 맹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당 같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하는데 맹자를 불태우거나 하지는 못했다.[27] 결국 그는 한림학사였던 유삼오(劉三吾)를 불러서 《맹자》 다이제스트, 곧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게 했다. 《맹자》에 있는 글 중 내용이 불온하다 싶은 부분을 삭제하고, 검열판을 만든 것이었다. 유삼오는 모두 260개 장인 《맹자》 중 무려 88개 장을 삭제하고 172개 장만 남겨두었는데 글자수만 따진다면 거의 절반을 삭제했다. 어떤 대목을 삭제했을까? 맹자가 폭군을 비난하는 대목은 모두 삭제했다. 물론 맹자가 백성이 존귀하다고 한 대목도 삭제했다. 인정을 말하는 대목, 왕도를 말하는 대목도 삭제하고, 혁명을 말하는 대목은 당연히 삭제되었다. 그렇게 만든 《맹자절문》을 과거 시험 교과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맹자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무 27년(1394년)에 반포되어 과거 시험의 교재로 쓰이다가 영락 12년(1414년) 성조 영락제의 명령으로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의 《맹자》를 과거 교재로 쓰면서 《맹자절문》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홍무제의 맹자 탄압은 고작 20여 년 만에 끝난 셈이었다. 사실 홍무제의 맹자 탄압은 홍무제 특유의 의심많은 성격과 명나라 건국 초기에 나라를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반대 세력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인 안배가 합쳐진 결과였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고아에 천민 출신이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원장에 반발하는 세력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 이를 가차없는 숙청으로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28] 그러다보니 홍무제의 입장에서는 군주의 덕치를 주장하고, 지방의 지주들인 사대부들이 주도하는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맹자》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가 즉위할 때쯤이면 이미 황권은 안정되어 있었고, 때문에 굳이 《맹자》를 검열할 필요가 없었다.
- 서민 출신으로서 일개 세력의 대장이 되었다가 통일 제국을 개창했다는 점과 말년의 토사구팽 때문에 전한의 태조 고황제 유방과 이미지가 묘하게 겹친다. 그래서 비교도 자주 되는 편이다. 하지만 홍무제는 가족애가 대단한 대신 신하들에게 가혹했고, 한태조는 자녀들에게 매정한 대신 신하들에게 너그러웠다. 그리고 한태조의 토사구팽 이미지는 과장과 왜곡이 많이 가미된 편이지만[29] 홍무제의 공신 숙청은 일부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상당수가 진짜였다.
- 황권 강화를 위해 승상직을 폐지하고, 신하들을 무지막지하게 숙청했으며, 어지간한 일은 직접 처리한지라 업무량이 엄청났다. 얼마나 많았던지 하루에 수백 개의 상소문을 읽으며, 안건을 처리했다고 한다. 홍무 17년(1384년) 9월, 급사중 장문이 이에 대해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황제 폐하)는 9월 14일부터 21일까지 딱 여드레 동안 나라 안팎에서 올린 상소문 1,660개에 올라와 있었던 사안 3,291건을 해결하셨다."
결국 일감이 너무 많아지자 홍무제도 감당이 안되어서 황제를 보좌하는 기구가 생겼으니 바로 그것이 내각(內閣)이었다. 물론 신권이 강해지는 걸 막기 위해 정5품의 낮은 관리들을 채용했으며, 이들을 내각대학사라 하고, 모든 상소문에 각자의 의견을 덧붙여서 황제의 업무를 돕도록 했다. 허나 낮은 직급 출신이다 보니까 고위 관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결국 원활한 업무 처리를 위해서 내각의 직품은 점점 높아져, 나중엔 고위 관료들이 내각의 일을 겸하게 되었다. 명말 신종 만력제 때의 재상이었던 장거정은 명나라에 본래 없었던 재상이나 다름없는 내각 수석대학사 또는 내각 수보로서 국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직급이 낮았기에[30] 황제가 맘먹고 근무를 태만하게 하면 답이 없었다.
- 중국의 《베이징커리》 신문은 역대 황제 중에서 심리적(인문학적) 소양이 가장 떨어지는 황제로 명 태조 주원장을 꼽았다. 과거에는 공부라는 것이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었던 만큼, 길바닥에서 남에게 빌어먹어야 할 시기까지 보냈어야 했던 주원장은 따로 공부를 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31] 그래도 황제 생활을 오래 하면서부터는 공부도 하고 사람이 좀 바뀌긴 했다.
- 빈민 출신이어서 적어도 백성들에게는 어진 군주라는 인상이 강했지만, 또한 빈민 시절의 아픈 기억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큰 실책을 저지른 바도 있었다. 명나라 건국 이후 자신의 가난한 고향을 크게 발전시켜보자고 수도를 고향인 봉양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결국 입지조건이 적절치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문제는 작고 가난한 고을인 봉양을 수도로 건설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인데, 천도가 취소되었음에도 큰 도성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은 못버려서 이곳 주민들이 되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좁고 척박한 땅에 갑자기 수많은 인구가 모여들다보니 도리어 자기 고향인 봉양의 경제가 파탄이 나 버렸다.[32] 또한 주원장은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해 툭하면 부모 형제 일족이 쫄쫄 굶은 트라우마가 너무 큰 나머지 자기 자손들은 절대 굶는 일이 없도록 하겠답시고 황실 후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제도를 확립했는데, 일단 조금이라도 자기 피를 이은 주씨 성의 남계 후손이기만 하면 최소 200석의 녹봉을 받을 수 있었다.[33] 물론 이것도 8대 이상까지 거리가 멀어진 방계의 경우에 해당되는 최저 녹봉이었고, 친왕급으로 가면 더 높았다. 문제는 황실 자손들이 눈덩이 굴리듯 불어서 명나라 말기에 가면 무려 200,000명이라는 숫자를 자랑했다. 이 20만 명의 인구를 전부 명나라 재정으로 먹여 살려야 했으니, 결과적으로 그 부담이 누구한테 갔는지 생각해보자.
- 하루는 형부주사(刑部主事) 여태소(茹太素)가 올린 상소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주원장이 보기에 상소문의 서문에 있는 황제 칭송이 지나치게 길었고, 정확히 6,370자까지 읽자 보다못한 주원장이 결국 여태소를 친히 두들겨 팼다. 다음 날, 아무래도 상소문의 뒷부분이 신경쓰였던 주원장은 이걸 도로 찾아다가 계속 읽었고, 총 16,500자를 넘어가자 겨우 서문이 끝났다. 반면에 본문의 글자수는 총 500자로 건의사항 5가지가 있었다. 읽어보니 취할 점이 꽤 있다 싶었던 주원장은 이 가운데 4건을 즉시 실행했다. 그 뒤 주원장은 여태소를 불러서 오해가 있었다는 언급을 하고 사과한 뒤 그의 정책을 칭찬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글을 번잡하게 쓰지 말라고 말한 뒤 이 일화를 전국에 널리 알렸다. 그런데 전근대 중국에는 당팔고주의라 하여 관공서용 문서 작성, 특히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형식이 별도로 정해져 있어서 여러 문학적인 기교가 가미된 황제 찬양을 넣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중국 뿐만이 아니라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흔히 행했던 것인데, 주원장은 홍건적 출신이라 이게 황실의 권위를 세우는 방편이라는 걸 몰라서 벌인 일이었다.
- 이희안(李希顏)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크게 대단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인품은 뛰어났고, 과거시험을 보라고 주위에서 권유는 많이 받았지만 출세에는 별 관심이 없어 산간벽지에 은거하던 기인이었다. 어디서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홍무제는 친히 손수 편지(手書)를 써서 보냈다."그대가 학문에 대해 조예가 있다고 들었다. 이번에 황자들이 공부할 대본당(大本堂)을 지었는데, 황자들을 가르칠 스승이 필요하니 궁에 와서 벼슬을 받도록 하여라."
편지의 형식은 초대였지만 그 당시 황제의 친필 서한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면 경을 치게 되니 사실상 명령과 다름 없었다.[34] 결국 이희안은 조정에서 벼슬을 받았는데, 황궁에서 비단 옷을 입고 도롱이갓(蓑笠, 그러니까 삿갓)을 쓰는 기묘한 패션으로 주목을 받았다. 왜 행색을 그렇게 하고 다니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머리에 쓴) 삿갓은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옵고, 비단 옷은 황제께서 하사한 거(라 입고 다닌)다."(笠本質, 緋, 君賜也)
이런 기인이던 이희안이 가게 된 곳은 대본당으로 황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을 맡았다. 일개인으로 살 때는 자유분방을 추구했어도 교육자로서는 엄격한 규율을 중시한 이희안은 어린 나이[35]에, 주원장이 홍건적으로 활동할 때 태어나 도적들 사이에서 제멋대로 자란 황자들은 규범은 고사하고 어른을 대하는 황실의 예법도 잘 지킬 줄 모르는 문제아들이어서 수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애들이 명색이 황자이므로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 적당히 공부 가르치는 시늉만 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필 또 이희안은 아첨이나 타협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다시 규범을 가르치려고 시도하던 이희안은 황자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개판을 치자 화가 치솟아서 자기가 대본당에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그중 한 명을 붙잡은 다음, 자기가 시골에서 마을 아이들을 가르칠 때처럼 머리통을 잡고 이마를 후려쳤다(擊其額)! 그냥 귀족도 아니고 자그마치 황제의 아들에게 물리적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살면서 처음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이 어린 황자는 아버지 홍무제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 사실에 대해 고했다.
'황제가 (이마를) 어루만지며 성을 냈다.'(帝撫而怒)
천하의 대명 천자께서 마치 유치원에서 자기 아들이 친구에게 얻어맞고 오자 "아이고, 우리 아들이 이마를 이 정도나 다쳤네!" 하는 보통 아버지들처럼 아들의 부어오른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화를 냈다는 것이다. 평소 황실의 권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주원장의 성질대로라면 이희안은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도 마황후가 한 발 앞서서 이희안을 두둔했다.
"선생께서 스승으로서 우리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려는 것이니, 이는 노하실 일이 아니옵니다."(烏有以聖人之道訓吾子, 顧怒之耶)
황후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홍무제는 이희안의 벼슬을 되려 좌춘방(左春坊)의 우찬선(右贊善)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한편 이 사건을 두고 기록에서는 '엄히 벌하였다' 정도로 돌려 말하지 않고 '칠 격'(擊) 자로 직설적으로 표현했다.[36]
- 자신이 나중에 묻힐 장소 근방에 오나라의 초대 황제였던 대제 손권의 능이 있어서 황릉을 만들기 위해 다른 무덤들처럼 파헤쳐질 상황에 놓였으나, 주원장이 묘지기인 셈 치자며 그대로 두라고 지시한 덕분에 손권의 능은 무사하게 되었다. 때문에 명효릉 내에서 손권의 능을 볼 수 있다.
-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에게는 무자비한 황제였지만, 자신이 정벌한 군벌들의 자손들에겐 되려 온화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숙적 진우량의 아들 진리, 명옥진의 아들 명승을 고려로 보내 융숭한 대접을 받도록 배려해 주었고, 붙잡은 몽골의 보르지긴씨 황족에게도 굴욕을 주지 않고 곱게 대접했다. 항상 그렇지만 주원장의 숙청 기준은 어디까지나 자기에게 위협이 되느냐 마느냐였기 때문에, 공신들은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아 쳐죽이기 일쑤였던 반면, 일개 백성은 자기를 뒤에서 욕한다고 해도, 대놓고 선동하거나 하는 정도가 아닌 불평불만 표시 정도로는 딱히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그냥 욕만 하고 끝이니까.
- 편집증적인 꼼꼼함과 기억력 덕분에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은원을 모두 잊지 않는 인물이었다. 즉 잘해준 사람들은 그만큼 보은을 받았고,[37] 주원장에게 정당하지 않은 이유[38]로 원한을 샀으면 당장 황궁에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야 했다. 한편 고려의 정몽주는 그 기억력 덕에 목숨을 걸고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울 수 있었다. 홍무제의 강박증 때문에 공을 세울 수 있었던 사람
- 본인이 신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교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직접 모스크 건설을 지시하고, 예언자 무함마드를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대신 원나라 때 유입된 회회인들에게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 한족과 통혼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 원나라 때 전래된 중세 이슬람 역법을 한문으로 번역할 것을 명령하면서 회족 천문학자와 한족 천문학자에게 협업을 지시했는데 그 결과물이 《회회력》이었다.
- 중국 요리 중에는 홍무제와 연관된 설화가 있는 음식들이 몇 가지 있다. 가령 중국식 두부전인 샹또우푸(鑲豆腐)의 경우, 주원장이 빈곤한 시절 샹또우푸를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면서 그 맛을 알았고, 황제가 된 후 궁중 요리사에게 이 음식을 만들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두부를 곰팡이로 발효해서 요리하는 호피모두부(虎皮毛豆腐)의 경우, 훔친 두부가 썩어서 곰팡이가 피자 버리기 아까웠던 주원장이 어쩔 수 없이 먹어 봤더니 의외로 맛이 좋아서 황제가 된 이후에도 두부를 발효해서 만든 음식을 즐겼고, 그것이 현대의 호피모두부로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39] 또 진주비취백옥탕에 관한 일화도 있는데, 주원장이 거지로 지내던 시절, 어떤 가난한 여인으로부터 먹다 남은 두부와 채소를 같이 끓여서 만든 요리를 대접받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맛있게 먹었던 그 요리를 잊지 못한 주원장은 황제가 된 후 다시 그 요리를 찾았지만 이미 주원장의 혀는 온갖 산해진미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때 느꼈던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 두 가지 판본이 전해진다. 하나는 이것 때문에 그 여인에게 아예 직접 요리를 부탁하고자 여인을 수소문했고, 세월이 흘러 노파가 되어 있었던 여인이 부름을 받고 황제에게 이것을 설명해줘서 주원장이 노파의 말에서 교훈을 얻어 초심을 찾았다는 내용과 다른 하나는 어떤 요리사가 고급 식재료를 써서 모양새만 비슷하게 흉내낸 요리를 올려 주원장이 맛있게 먹었다는 다소 블랙유머스러운 결말이다.
- 《명사》(明史) 권 300 <외척전>에 따르면 주세진(주오사)의 장인, 즉 홍무제의 외조부는 원나라와 남송의 마지막 혈전이었던 애산 전투의 생존자였다고 한다. 몽골에 의해 한족 왕조가 종언을 고한 애산 전투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의 후손이 몽골이 세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웠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명사》를 집필한 주체는 청나라였으므로, 명나라 황실을 띄워주기 위해 거짓 내용을 남겨놓을 리도 없고, 일부러 윤색을 하려면 친조부로 하는 것이 더 좋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부적인 내용에서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허구는 있을 수 있어도 홍무제의 외조부가 애산 전투의 참전자라는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 어진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얼굴로 그려졌다. 왼쪽처럼 후덕하고 위엄있는 초상화도 있는 반면, 오른쪽처럼 얼굴형이 턱과 입이 길게 나온 데다가 곰보 자국 투성이인 못생긴 초상화[40]들도 있다. 언뜻 보면 다른 얼굴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목구비와 수염의 형태는 거의 똑같은 걸 보아, 형식이 다를 뿐 같은 얼굴을 묘사한 것은 맞는 듯하다.
둘 중 어느 쪽이 진짜 얼굴에 가까운지는 확실치 않다. 보통은 "귀와 코가 크고 턱이 이마보다 튀어 나왔으며 전염병에 걸린 적이 있어 곰보자국 투성이였다"는 기록과 "화공이 홍무제의 얼굴을 너무 잘생기게 미화했다고 죽이고, 그대로 그렸더니 또 못생기게 그렸다고 죽였다"는 야사[41]에 따라 오른쪽의 못생긴 얼굴이 원래 얼굴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귀와 코가 크고 턱이 튀어나온 것이 당시 기준에서 오악을 연상시키고, 얼굴의 곰보 자국은 하늘의 72개 별자리와 같으니 천하 영웅의 상에 부합하는 것이라 일부러 못생긴 초상화를 프로파간다로 뿌렸다는 설도 있다.[42]
또한 대만에서는 얼굴의 주걱턱이 망고와 닮았다고 하여 '芒果臉'(망고 얼굴)이라고 칭한다.
7. 대중매체
- 인물이 인물인만큼 중국에서도 주역으로 등장할 정도로 자주 영상화되거나 주역이 아니라도 비중있는 주변인물로도 자주 등장했지만, 그를 다룬 드라마로는 2006년 제작된 호군(胡軍)[43] 주연의 46부작 드라마 <주원장>이 대표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홍건적의 수령, 군벌을 거쳐 황제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홍건적의 리더에서 잔혹한 숙청을 일삼으며 고독한 황제로 변모해 나가는 주원장의 변화를 배우 호군의 열연이 어우러져 잘 묘사한 작품이다. 특히 해당 작품의 주원장은 흔한 사극 주인공들처럼 정의로운 절대선의 주인공은 아니다. 잔머리를 쓰거나 부하들이나 신료들을 의심하는 모습[44]을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며 잔혹한 면도 자주 묘사된다. 그가 그나마 인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아내 마황후와 태자 주표 정도로 작중 주원장이 이들을 보고 웃는 모습이 부하들 앞에서 웃는 모습과 많이 차이가 난다. 어릴적 가난한 농민일때부터 같이 고생을 한 동료와 공신들을 숙청할때마다 괴로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어릴때 자신이 황제가 되면 모두와 행복하게 살줄알았으나 현실은 누구보다도 냉혹해야했던 황제의 의무에 외로워하는 주원장의 인간적인 고뇌 연기가 일품이었다.
- 2015년 드라마 <주원장과 유백온>에선 무술 실력은 출중하지만 도덕성이 좀 부족한 것으로 표현된다. 이미 나라는 세웠지만 유백온(유기)을 제외한 이선장 같은 신하들은 국가 운영에 도움이 안되고, 탐관에 불과해 애를 먹는다. 조정을 유능하고 청렴한 인재들로 채우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신하들로 채우는 것을 좋아한다. 이선장에게 처녀를 수백 명이나 선물받을 정도로 여자를 좋아하는데 특히 발이 작은 여자를 좋아한다.
- 2022년 드라마 <산하월명>에 등장한다. 자신도 지배층의 착취 때문에 거병했고, 다른 창업군주들도 이전 왕조의 착취 때문에 거병했다며 주표에게 백성을 괴롭히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아들 중에서 장남 주표를 가장 아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주표가 세상을 떠난 이후, 후계자 문제로 황태자를 누구로 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주체와 주윤문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엄청난 고뇌를 느끼기도 했다. 장례는 최대한 간소하게 하고 숙부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유언을 건문제에게 남기고 붕어했다.
- 2024년 드라마 <금의야행>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남방과 북방의 균형발전을 위해 과거시험의 합격자 선발에 지역할당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지역할당제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처형했다.
- 영화로도 나온 《비천무》에서는 주인공 유진하가 진우량에게 토사구팽 당한 후 마지막으로 몸을 맡기는 주군으로, 진우량 사후 원작에서 딱 한 번 얼굴을 드러내 유진하와 모종의 계약을 맺는다. 이후 유진하는 주원장의 명으로 장사성 토벌 중 타루가 야훌라이 휘하 몽골 전사들과 싸우다 전사한다. 그가 주원장과 맺은 모종의 계약이란 아들을 비롯한 자기 주변 인물들의 편안한 삶의 보증으로,[45] 아리수가 현재 황제가 공신들을 숙청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래도 백성들에게 도량이 있는 분이니 유진하와의 약속은 지켜 줄 것이라는 언급을 한다. 이후 나레이션으로 그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나온다. "가난한 농민 태생이라는 점 때문에 황제가 되어 공신들을 무척 괴롭혔지만, 중국 역사에서 그만큼 백성들을 위한 군주도 좀처럼 없었다." 만화에서는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중에서 언급되거나 등장할 때마다 한 나라의 개창자로서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 게임 <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2와 4에서 등장하며 정치 91, 전투 72 지모는 92, 특기는 농업, 상업, 건설, 화공, 복병, 병과속성은 보병 B, 궁병 B, 기병 B, 수군 E로 내정은 물론 전투에서도 준수하게 활약할 수 있는 장수다. 시나리오 2는 미등장 재야장수지만, 시나리오 4는 명나라 군주이다. 시나리오 4의 명나라는 국력도 세계 최강급이고 무관으로는 서달이나 이문충, 남옥 등이 부하로 있고 내정으로는 요광효나 호유용, 이선장 등이 부하로 있으며 후계자인 영락제 역시 중국문화권 최강의 장군이라 세계구급 인재가 널려 있어서 적당히 플레이해도 충분히 세계정복을 할 수 있다. 오프닝 이벤트로는 원의 카라코룸을 정복하면 주원장의 능력치도 상승한다. 다만 이 시나리오의 주역이 티무르이고, 티무르가 명으로 원정을 가던 도중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여러 모로 티무르로 플레이했을 때의 최종보스 포지션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걸로 보인다. 참고로 이전 시나리오의 남송 이상으로 호전적이라서 명 주변의 국가로 플레이할 경우에도 최종보스 포지션에 가깝다. 특히 고려와 일본을 자주 공격한다.
- 김용의 장편 소설 《의천도룡기》에서는 파계승으로 등장하며 몇몇 친구들과 함께 어린 장무기와 잠깐의 만남을 가진다. 이때 이미 명교 소속이었는데, 훗날 명교 교주가 된 장무기와 재회하게 된다.[46] 후에 장무기를 반쯤 속이고 반쯤 겁박해서 교주직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다른 경쟁 군벌들마저 모두 날려버린 끝에 명나라를 건립한다. 명교 세력의 공을 잊지 않았기에 국호를 명으로 정했지만, 훗날 명교가 백성들을 감싸고 돌며 조정에 반항하자 탄압했다고 묘사된다. 1990년대 영화판에서는 장무기를 은근히 부추기다가 속내를 들키는 인물로 나오고 2019년판 드라마에서는 검열 때문인지 주 대장으로 불리는데 상당히 거칠게 나오는 외모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민심 장악을 위해 지도자로 한림아를 내세우는 등의 전략적인 행보를 보이며 교주인 장무기 몰래 여양왕을 암살하는 등의 행동이 실제 주원장에 가깝다.
- 태규의 첫 무협 소설 《풍사전기》에서는 조연 백가흔[47]으로 출연하며, 위에서 언급한 실제 역사의 인물들도 무림 고수로 출연한다.
- <기황후>에서는 51회 마지막에서 언급만 되었다.
- KBS 1TV 사극인 <용의 눈물>, <정도전>, <태종 이방원>에 등장한다. <용의 눈물>의 주원장은 두 개의 초상화 중 온화한 인상의 초상화와 비슷한 통통한 인상의 배우 김순철을 섭외했고, <정도전>의 주원장은 심술굳은 표정의 두 번째 초상화에 가까운 마른 체형의 배우를 섭외했다. 이는 두 드라마의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방원이 주인공인 <용의 눈물>의 주원장은 조선에서 사신으로 온 이방원을 환대하며 그를 높게 평가해주지만 제목 그대로 정도전이 주인공인 <정도전>의 주원장은 끊임없이 조선을 의심하고 압박하는 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정도전>에선 이성계가 주원장을 향해 아예 쌍욕을 박았다. 드라마 <정도전>에선 조광유가 맡았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김성강이 맡았다.
- 영화 <무사>에서는 얼굴은 한번도 비추지 않는데 반해 자주 언급되는데, 어째 영 나쁜놈 포지션이다. 극 시작과 동시에 사이가 좋지 않던 고려의 사신단을 고비사막으로 유배를 보내버렸고, 북원의 장수 쿠쿠 테무르에게는 자신의 누이를 납치해간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는다. 작중 장쯔이가 연기한 부용공주는 주원장의 막내 딸이라는 설정이다. 고려인들은 북원의 기병들에게 납치당한 그녀를 구해 남경으로 돌아가 주원장에게 신뢰를 얻는다는 작전을 세운다.
- 액션 코미디 영화 <추영>에서는 무림고수들이 주원장이 남긴 보물을 찾고자하는 갈등에서 언급되며, 주인공 일행이 그토록 찾던 주원장의 보물은 곡괭이였다. 주원장은 단지 살기 위해서 괭이를 들고 홍건적에 들어가 노력한 것이 자신을 황궁에 갇힌 죄수로 만들었다며 한탄하면서 황궁에서 나오는 진수성찬은 가난한 시절에 먹었던 진흙통닭보다 따뜻하지도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며 "부귀영화가 반드시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하는 내용의 유서와 함께 농민 시절에 사용했던 괭이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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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제 | 회충태자 | 도회태자 | 헌회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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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숙귀비115권 「종실전(宗室傳)」 주표 · 주우원 116·117·118·119·120권 「제왕전(諸王傳)」 주상 · 주강 · 주숙 · 주정 · 주부 · 주재 · 주기 · 주단 · 주춘 · 주백 · 주계 · 주영(朱楧) · 주식 · 주전(朱㮵) · 주권 · 주폐 · 주혜 · 주모 · 주영(朱楹) · 주경(朱桱) · 주동 · 주이 · 주남 · 주웅영 · 주윤통 · 주윤견 · 주윤희 · 주문규(朱文奎) · 주문규(朱文圭) · 주고후 · 주고수 · 주첨용 · 주첨선 · 주첨점 · 주첨은 · 주첨오 · 주섬강 · 주첨개 · 주첨게 · 주첨연 · 주견린 · 주견순 · 주견주 · 주견택 · 주견준 · 주견치 · 주견패 · 주견제 · 주우극 · 주우륜 · 주우빈 · 주우휘 · 주우운 · 주우저 · 주우팽 · 주우순 · 주우추 · 주우해 · 주후위 · 주재기 · 주재수 · 주재로 · 주재려 · 주재궤 · 주재숙 · 주익익 · 주익령 · 주익류 · 주상서 · 주상순 · 주상치 · 주상호 · 주상윤 · 주상영 · 주상부 · 주유학 · 주유즙 · 주유모 · 주유허 · 주유전 · 주자연 · 주자육 · 주자경 · 주자랑 · 주자훤 · 주자형 · 주자소 · 주자환 · 주자찬 121권 「공주전(公主傳)」 태원장공주 · 조국장공주 · 임안공주 · 영국공주 · 숭녕공주 · 안경공주 · 여령공주 · 회경공주 · 대명공주 · 복청공주 · 수춘공주 · 남강공주 · 영가공주 · 함산공주 · 여양공주 · 보경공주 · 복성공주 · 경양공주 · 강도공주 · 남평군주 · 영안공주 · 영평공주 · 안성공주 · 함녕공주 · 상녕공주 · 가흥공주 · 경도공주 · 청하공주 · 진정공주 · 덕안공주 · 연평공주 · 덕경공주 · 순덕공주 · 상덕공주 · 중경공주 · 가선공주 · 순안공주 · 숭덕공주 · 광덕공주 · 의흥공주 · 융경공주 · 가상공주 · 고안공주 · 인화공주 · 영강공주 · 덕청공주 · 장태공주 · 선유공주 · 태강공주 · 영복공주 · 영순공주 · 장녕공주 · 선화공주 · 상안공주 · 사유공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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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삼오등전(劉三吾等傳)」 유삼오 · 안연 · 오백종 · 오침 · 계언량 · 송눌 · 조숙 · 이숙정 · 유숭 · 나복인 · 손여경 138권 「진수등전(陳修等傳)」 진수(陳修) · 양사의 · 주정 · 양정(楊靖) · 단안인 · 설상 · 당탁 · 개제 139권 「전당등전(錢唐等傳)」 전당 · 한의가 · 소기 · 풍견 · 여태소 · 이사로 · 엽백거 · 정사리 · 주경심 · 왕박 · 장형 140권 「전당등전(錢唐等傳)」 위관 · 도후중 · 유사훤 · 왕종현 · 여문수 · 왕관 · 도동 · 노희 · 청문승 141권 「제태등전(齊泰等傳)」 제태 · 황자징 · 방효유 · 연자녕 · 유대방 · 탁경 · 진적 · 경청 · 호윤 · 왕도(王度) 142권 「철현등전(鐵鉉等傳)」 철현 · 포소 · 진성선 · 장병 · 송충 · 마선 · 구능 · 장륜(張倫) · 안백위 · 왕성 · 요선 · 진언회 143권 「왕간등전(王艮等傳)」 왕간 · 요승 · 주시수 · 정본립 · 황관 · 왕숙영 · 황월 · 왕량 · 진사현 · 정통 · 고외 · 고현녕 · 왕진(王璡) · 주진 · 우경선 144권 「성용등전(盛庸等傳)」 145권 「요광효등전(姚廣孝等傳)」 성용 · 평안 · 하복 · 고성 요광효 · 장옥 · 주능 · 구복 · 담연 · 왕진(王真) · 진형 146권 「장무등전(張武等傳)」 장무(張武) · 진규 · 맹선 · 정형 · 서충 · 곽량 · 조이 · 장신 · 서상 · 이준 · 손암 · 진욱 · 진현 · 장흥 · 진지 · 왕우 147권 「해진등전(解縉等傳)」 148권 「양사기등전(楊士奇等傳)」 149권 「건의등전(蹇義等傳)」 해진 · 황회 · 호광 · 김유자 · 호엄 양사기 · 양영 · 양부 건의 · 하원길 150권 「욱신등전(郁新等傳)」 욱신 · 조공 · 김충 · 이경 · 사규 · 고박 · 진수(陳壽) · 유계호 · 유진 · 양지 · 우겸(虞謙) · 여승 · 탕종 151권 「여상등전(茹瑺等傳)」 여상 · 엄진직 · 장담 · 왕둔 · 정사 · 곽자 · 여진 · 이지강 · 방빈 · 오중 · 유관 152권 「동륜등전(董倫等傳)」 동륜 · 의지 · 추제 · 주술 · 진제 · 왕영 · 전습례 · 주서(周敍) · 가잠 · 공공순 153권 「송례전(宋禮等傳)」 154권 「장보등전(張輔等傳)」 송례 · 진선 · 주침 장보 · 황복 · 유준(劉儁) · 여의 · 진흡 · 이빈 · 유승 · 양명 · 왕통 155권 「송성등전(宋晟等傳)」 송성 · 설록 · 유영 · 주영(朱榮) · 비환 · 담광 · 진회(陳懷) · 장귀 · 임례 · 조안 · 조보 · 유취 156권 「오윤성등전(吳允誠等傳)」 오윤성 · 설빈 · 오성(吳成) · 김충 · 이영 · 모승 · 초례 · 모충 · 화용 · 나병충 157권 「김순등전(金純等傳)」 김순 · 장본 · 곽돈 · 곽진 · 정진 · 시차 · 유중부 · 장봉 · 주선 · 양정(楊鼎) · 황호 · 호공진 · 진준 · 임악 · 반영 · 하시정 158권 「황종재등전(黃宗載等傳)」 황종재 · 고좌 · 단민 · 장창(章敞) · 오눌 · 위기 · 노목 · 경구주 · 헌예 · 황공소 159권 「웅개등전(熊概等傳)」 웅개 · 진일 · 이의 · 진일 · 이당 · 가전 · 왕우 · 최공 · 유자(劉孜) · 이간 · 원걸 · 팽의 · 모봉 · 하훈 · 고명 · 양계종 160권 「왕창등전(王彰等傳)」 왕창 · 위원(魏源) · 김렴 · 석박 · 나통 · 나기 · 장선 · 장붕 · 이유 161권 「주신등전(周新等傳)」 주신 · 이창기 · 진사계 · 응이평 · 임석 · 황종 · 진본심 · 팽욱 · 하시 · 황윤옥 · 양찬 · 유실 · 진선 · 하인 · 진장 · 장병 · 송단의 162권 「윤창륭등전(尹昌隆等傳)」 윤창륭 · 경통 · 대륜 · 진조 · 유구 · 진감 · 종동 · 장륜 · 요장 · 예경 · 양선(楊瑄) 163권 「이시면등전(李時勉等傳)」 164권 「추집등전(鄒緝等傳)」 이시면 · 진경종 · 유현(劉鉉) · 형양 · 임한 · 사탁 · 노탁 추집 · 익겸 · 황택 · 범제 · 요양 · 좌정 · 조개 · 유위 · 단우 · 장소 · 고요 165권 「도성등전(陶成等傳)」 166권 「한관등전(韓觀等傳)」 도성 · 진민 · 정선 · 왕득인 · 엽정 · 오기 · 모길 · 임금 · 곽서 · 강앙 한관 · 산운 · 소수 · 방영 · 이진 · 왕신 · 팽륜 · 구반 · 장우 167권 「조내등전(曹鼐等傳)」 168권 「진순등전(陳循等傳)」 조내 · 광야 · 왕좌 · 손상 · 원빈 진순 · 왕문 · 강연 · 진문 · 만안 · 유후 · 유길 · 윤직 169권 「고곡등전(高穀等傳)」 170권 「우겸전(于謙傳)」 171권 「왕기등전(王驥等傳)」 고곡 · 호영 · 왕직 우겸 왕기(王驥) · 서유정 · 양선(楊善) · 왕월 172권 「나형신등전(羅亨信等傳)」 나형신 · 후진 · 양녕 · 왕래 · 손원정 · 주감 · 양신민 · 장기 · 마근 · 정신 · 백규 · 장찬 · 공용 · 등정찬 · 왕식 · 유병 173권 「양홍등전(楊洪等傳)」 양녕 · 석정 · 곽등 · 주겸 · 손당 · 범광 174권 「사소등전(史昭等傳)」 사소 · 무개 · 허귀 · 주현 · 구신 · 왕새 · 노감 · 유녕 · 팽청 · 강한 · 안국 · 항웅 175권 「위청등전(衞靑等傳)」 위청 · 동흥 · 하홍 · 유옥 · 구월 · 신영 · 조웅 · 풍정 · 장준 · 양예 176권 「이현등전(李賢等傳)」 177권 「왕고등전(王翱等傳)」 이현 · 여원 · 악정 · 팽시 · 상로 · 유정지 왕고(王翱) · 연부 · 왕횡 · 이병 · 요기(姚夔) · 왕복 · 임총 · 엽성 178권 「항충등전(項忠等傳)」 179권 「나륜등전(羅倫等傳)」 항충 · 한옹 · 여자준 · 주영(朱英) · 진굉 나륜 · 장무 · 황중소 · 장창(莊昶) · 추지 · 서분 180권 「장녕등전(張寧等傳)」 장녕 · 왕휘 · 모홍 · 구홍 · 이삼 · 위원(魏元) · 강진 · 왕서(王瑞) · 이준 · 왕규 · 탕내 · 강관 · 강홍 · 조린 · 팽정 · 방반 · 여헌 · 엽신 · 호헌 · 장홍지 · 굴신 · 왕헌신 181권 「서부등전(徐溥等傳)」 182권 「왕서등전(王恕等傳)」 서부 · 구준 · 유건 · 사천 · 이동양 · 왕오 · 유충 왕서(王恕) · 마문승 · 유대하 183권 「하교신등전(何喬新等傳)」 하교신 · 팽소 · 주경(周經) · 경유 · 예악 · 민규 · 대산 184권 「주홍모등전(周洪謨等傳)」 주홍모 · 양수진 · 장원정 · 부한 · 장승 · 완성 · 부규 · 유춘 · 오엄 · 고청 · 유서 185권 「이민등전(李敏等傳)」 이민 · 가준 · 황불 · 장열 · 사종 · 증감 · 양경 · 서각 · 이개 · 황가 · 왕홍유 · 총란 · 오세충 186권 「한문등전(韓文等傳)」 한문 · 장부화 · 양수수 · 허진 · 옹태 · 진수(陳壽) · 번형 · 웅수 · 반번 · 호부 · 장태 · 장내 · 왕경(王璟) · 주흠 187권 「하감등전(何鑒等傳)」 하감 · 마중석 · 육완 · 홍종 · 진금(陳金) · 유간 · 주남 · 마호 188권 「유천등전(劉蒨等傳)」 유천 · 여충 · 조우 · 대선 · 육곤 · 장흠(蔣欽) · 주새 · 탕예경 · 허천석 · 장사륭 · 장문명 · 범로 · 장흠(張欽) · 주광 · 석천주 189권 「이문상등전(李文祥等傳)」 이문상 · 손반 · 호관 · 나교 · 엽쇠 · 대관 · 황공 · 육진 · 하양승 · 하준 190권 「양정화등전(楊廷和等傳)」 191권 「모징등전(毛澄等傳)」 양정화 · 양저 · 장면 · 모기 · 정이 모징 · 왕준(汪俊) · 오일붕 · 주희주 · 하맹춘 · 풍희 · 서문화 · 설혜 192권 「양신등전(楊愼等傳)」 양신 · 왕사 · 장충 · 유제 · 안반 · 장한경 · 장원 · 모옥 · 왕시가 · 정본공 · 장왈도 · 양회 · 장찬 · 곽남 193권 「비굉등전(費宏等傳)」 비굉 · 적란 · 이시 · 고정신 · 엄눌 · 이춘방 · 진이근 · 조정길 · 고의 194권 「교우등전(喬宇等傳)」 교우 · 손교 · 임준 · 김헌민 · 진금(秦金) · 조황 · 추문성 · 양재 · 유린 · 장요(蔣瑤) · 왕정상 195권 「왕수인전(王守仁傳)」 196권 「장총등전(張璁等傳)」 왕수인 장총 · 계악 · 방헌부 · 하언 197권 「석서등전(席書等傳)」 198권 「양일청등전(楊一淸等傳)」 석서 · 곽도 · 웅협 · 황종명 · 황관 양일청 · 왕경(王瓊) · 팽택 · 모백온 · 옹만달 199권 「이월등전(李鉞等傳)」 이월 · 왕헌 · 호세녕 · 이승훈 · 왕이기 · 범총 · 왕방서 · 정효 200권 「요막등전(姚鏌等傳)」 요막 · 장정 · 오문정 · 채천우 · 첨영 · 유천화 · 양수례 · 장악 · 곽종고 · 조시춘 201권 「도염등전(陶琰等傳)」 도염 · 왕진(王縝) · 이충사 · 오정거 · 방양영 · 왕광 · 왕월 · 서문 · 장방기 · 한방기 · 주금 · 오악 202권 「요기등전(廖紀等傳)」 요기(廖紀) · 왕시중 · 주기옹 · 당룡 · 왕고(王杲) · 주용 · 문연 · 유인 · 손응규 · 섭표 · 이묵 · 주연 · 가응춘 · 장영명 · 호송 · 조병연 203권 「정악등전(鄭岳等傳)」 정악 · 유옥 · 왕원석 · 구천서 · 당주 · 반진 · 이중 · 구양탁 · 도해 · 반훈 · 여경 · 구양중 · 주상(朱裳) · 진찰 · 손무 · 왕의(王儀) · 증균 204권 「진구주등전(陳九疇等傳)」 205권 「주환등전(朱紈等傳)」 진구주 · 적붕 · 손계로 · 증선 · 정여기 · 양수겸 · 상대절 · 해일귀 · 양선(楊選) 주환 · 장경 · 호종헌 · 조방보 · 이수 · 당순지 206권 「마록등전(馬錄等傳)」 마록 · 정계충 · 장규 · 정일붕 · 당추 · 두란 · 엽응총 · 해일귀 · 육찬 · 소경방 · 유세양 · 위양필 207권 「등계증등전(鄧繼曾等傳)」 등계증 · 주제 · 양언 · 유안 · 설간 · 양명(楊名) · 곽홍화 · 유세룡 · 장선 · 포절 · 사정천 · 왕여령 · 양사충 208권 「장근등전(張芹等傳)」 장근 · 왕응진 · 소명봉 · 제지란 · 원종유 · 허상경 · 고제 · 장교 · 여산 · 위상신 · 여관 · 팽여실 · 정자벽 · 척현 · 유회 · 전미 · 홍원 · 주사겸 · 안경 209권 「양최등전(楊最等傳)」 양최 · 풍은 · 양작 · 주이 · 유괴 · 심속 · 심연 · 양계성 · 양윤승 210권 「상교등전(桑喬等傳)」 상교 · 사유 · 하유백 · 서학시 · 여여진 · 왕종무 · 주면 · 조금 · 오시래 · 장충 · 동전책 · 추응룡 · 임윤 211권 「마영등전(馬永等傳)」 212권 「유대유등전(俞大猷等傳)」 마영 · 양진 · 왕효 · 주상문 · 마방 · 하경 · 심희의 · 석방헌 유대유 · 척계광 · 유현(劉顯) · 이석 · 장원훈 213권 「서개등전(徐階等傳)」 214권 「양박등전(楊博等傳)」 서계 · 고공 · 장거정 양박 · 마림 · 유례건 · 왕정(王廷) · 갈수례 · 근학안 215권 「왕치등전(王治等傳)」 왕치 · 구양일경 · 주홍조 · 첨앙비 · 낙문례 · 정이순 · 진오덕 · 왕문휘 · 유분용 216권 「오산등전(吳山等傳)」 오산 · 육수성 · 구경순 · 전일준 · 황봉상 · 여계등 · 풍기 · 왕도(王圖) · 옹정춘 · 유응추 · 당문헌 · 이등방 · 채의중 · 공내 · 나유의 · 요희맹 · 허사유 · 고석주 217권 「왕가병등전(王家屏等傳)」 218권 「신시행등전(申時行等傳)」 219권 「장사유등전(張四維等傳)」 왕가병 · 진우폐 · 심리 · 우신행 · 이정기 · 오도남 신시행 · 왕석작 · 심일관 · 방종철 · 심확 장사유 · 마자강 · 허국 · 조지고 · 장위 · 주갱 220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1권 「원홍유등전(袁洪愈等傳)」 원홍유 · 왕정첨 · 곽응빙 · 경정향 · 왕초 · 위시양 · 학걸 · 조참로 · 장맹남 · 이정 · 정빈 222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3권 「성응기등전(盛應期等傳)」 224권 「엄청등전(嚴清等傳)」 성응기 · 주형 · 반계순 · 만공 · 오계방 · 왕종목 · 유동성 · 서정명 엄청 · 송훈 · 육광조 · 손농 · 진유년 · 손비양 · 채국진 · 양시교 225권 「장한등전(張瀚等傳)」 226권 「해서등전(海瑞等傳)」 장한 · 왕국광 · 양몽룡 · 양외· 이재(李戴) · 조환 · 정계지 해서 · 구순 · 여곤 · 곽정역 227권 「방상붕등전(龐尚鵬等傳)」 방상붕 · 송의망 · 장악 · 이재(李材) · 육수덕 · 소름 · 가삼근 · 이이 · 주홍모 · 소언 · 손유성 · 사걸 · 곽유현 · 만상춘 · 종화민 · 오달가 228권 「위학증등전(魏學曾等傳)」 229권 「유대등전(劉臺等傳)」 위학증 · 이화룡 유대 · 부응정 · 왕용급 · 오중행 · 조용현 · 애목 · 심사효 230권 「채시정등전(蔡時鼎等傳)」 231권 「고헌성등전(顧憲成等傳)」 채시정 · 만국흠 · 요신 · 탕현조 · 녹중립 · 양순 · 강사창 · 마맹정 · 왕약림 고헌성 · 고윤성 · 전일본 · 우공겸 · 사맹린 · 설부교 · 안희범 · 유원진 · 엽무재 232권 「위윤정등전(魏允貞等傳)」 위윤정 · 왕국 · 여무형 · 이삼재 233권 「강응린등전(姜應麟等傳)」 강응린 · 진등운 · 나대굉 · 이헌가 · 맹양호 · 주유경 · 왕여견 · 왕학증 · 장정관 · 번옥형 · 사정찬 · 양천민 · 하선 234권 「노홍춘등전(盧洪春等傳)」 235권 「왕여훈등전(王汝訓等傳)」 노홍춘 · 이무회 · 이기(李沂) · 낙우인 · 마경륜 · 유강 · 대사형 · 조학정 · 옹헌상 · 서대상 왕여훈 · 여무학 · 장양몽 · 맹일맥 · 하사진 · 왕덕완 · 장윤의 · 추유연 236권 「이식등전(李植等傳)」 237권 「부호례등전(傅好禮等傳)」 이식 · 강동지 · 탕조경 · 김사형 · 왕원한 · 손진기 · 정원천 · 이박 · 하가우 부호례 · 강지례 · 포견첩 · 전대익 · 풍응경 · 오종요 · 오보수 · 화옥 238권 「이성량등전(李成梁等傳)」 239권 「장신등전(張臣等傳)」 이성량 · 마귀 장신 · 동일원 · 두동 · 소여훈 · 달운 · 관충병 · 시국주 · 진백우 240권 「엽향고등전(葉向高等傳)」 241권 「주가모등전(周嘉謨等傳)」 엽향고 · 유일경 · 한광 · 주국조 · 하종언 · 손여유 주가모 · 장문달 · 왕응교 · 왕기(王紀) · 손위 · 종우정 · 진도형 242권 「진방첨등전(陳邦瞻等傳)」 진방첨 · 필강무 · 소근고 · 백유 · 정소 · 적봉충 · 홍문형 · 진백우 · 동응거 · 임재 · 주오필 · 장광전 243권 「조남성등전(趙南星等傳)」 244권 「양련등전(楊漣等傳)」 조남성 · 추원표 · 손신행 · 고반룡 · 풍종오 양련 · 좌광두 · 위대중 · 주조서 · 원화중 · 고대장 · 왕지채 245권 「주기원등전(周起元等傳)」 246권 「만조천등전(滿朝薦等傳)」 주기원 · 요창기 · 주순창 · 주종건 · 황존소 · 이응승 · 만경 만조천 · 강병담 · 후진양 · 왕윤성 247권 「유정등전(劉綎等傳)」 248권 「매지환등전(梅之煥等傳)」 유정 · 이응상 · 진린 · 등자룡 · 마공영 매지환 · 유책 · 이약성 · 경여기 · 안계조 · 이계정 · 방진유 · 서종치 249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0권 「손승종전(孫承宗傳)」 주섭원 · 이운 · 왕삼선 · 채복일 손승종 251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2권 「양사창등전(楊嗣昌等傳)」 이표 · 유홍훈 · 전용석 · 성기명 · 하여총 · 서광계 · 문진맹 · 장덕경 · 방악공 양사창 · 오성(吳甡) 253권 「왕응웅등전(王應熊等傳)」 254권 「교윤승등전(喬允升等傳)」 왕응웅 · 장지발 · 설국관 · 정국상 · 진연 · 위조덕 교윤승 · 조우변 · 손거상 · 조광 · 진우정 · 정삼준 · 이일선 · 장위 255권 「유종주등전(劉宗周等傳)」 256권 「최경영등전(崔景榮等傳)」 유종주 · 황도주 최경영 · 황극찬 · 필자엄 · 이장경 · 유지봉 257권 「장학명등전(張鶴鳴等傳)」 장학명 · 동한유 · 조언 · 왕흡 · 양정동 · 웅명우 · 장봉익 · 진신갑 · 풍원표 258권 「허예경등전(許譽卿等傳)」 허예경 · 화윤성 · 위정윤 · 모우건 · 오집어 · 장정신 · 황소걸 · 부조우 · 강채 · 웅개원 · 첨이선 · 탕개원 · 성용 · 진룡정 259권 「양호등전(楊鎬等傳)」 양호 · 원응태 · 웅정필 · 원숭환 · 조광변 260권 「양학등전(楊鶴等傳)」 양학 · 진기유 · 웅문찬 · 연국사 · 정계예 · 정숭검 · 소첩춘 · 여응계 · 고두추 · 장임학 261권 「노상승등전(盧象昇等傳)」 262권 「부종룡전(傅宗龍等傳)」 노상승 · 유지륜 · 구민앙 부종룡 · 왕교년 · 양문악 · 손전정 263권 「송일학등전(宋一鶴等傳)」 송일학 · 풍사공 · 임일서 · 채무덕 · 위경원 · 주지풍 · 진사기 · 용문광 · 유가인 · 유지발 264권 「하봉성등전(賀逢聖等傳)」 하봉성 · 남거익 · 주사박 · 여유기 · 왕가정 · 초원부 · 이몽진 · 송사양 · 마희 · 왕도순 · 전시진 265권 「범경문등전(范景文等傳)」 범경문 · 예원로 · 이방화 · 왕가언 · 맹조상 · 시방요 · 능의거 266권 「마세기등전(馬世奇等傳)」 마세기 · 오인징 · 주봉상 · 유이순 · 왕위(汪偉) · 오감래 · 왕장 · 진량모 · 진순덕 · 신가윤 · 성덕 · 허직 · 김현 267권 「마종빙등전(馬從聘等傳)」 268권 「조문조등전(曹文詔等傳)」 마종빙 · 장백경 · 송공 · 범숙태 · 고명형 · 서견 · 녹선계 조문조 · 주우길 · 황득공 269권 「애만년등전(艾萬年等傳)」 애만년 · 이비 · 양구주 · 진우왕 · 후량계 · 장령 · 맹여호 · 호대위 · 손응원 · 강명무 · 우세위 · 후세록 · 유국능 270권 「마세룡등전(馬世龍等傳)」 271권 「하세현등전(賀世賢等傳)」 마세룡 · 하호신 · 심유용 · 장가대 · 노흠 · 진양옥 · 용재전 하세현 · 동중규 · 나일관 · 만계 · 조솔교 · 관유현 · 하가강 · 황룡 · 김일관 272권 「김국봉전(金國鳳等傳)」 273권 「좌양옥등전(左良玉等傳)」 김국봉 · 조변교 · 유조기 좌양옥 · 고걸 · 조관 274권 「사가법등전(史可法等傳)」 275권 「장신언등전(張愼言等傳)」 사가법 · 고홍도 · 강왈광 장신언 · 서석기 · 해학룡 · 고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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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전(文苑傳)」 양유정 · 호한 · 소백형 · 왕면 · 대량 · 위소 · 장이녕 · 조훈 · 서일기 · 조총겸 · 도종의 · 원개 · 고계 · 왕행 · 손분 · 왕몽 · 임홍 · 왕불 · 심도 · 섭대년 · 유부 · 장필 · 장태 · 정민정 · 나기 · 저권 · 이몽양 · 하경명 · 서정경 · 변공 · 고린 · 정선부 · 육심 · 왕정진 · 이렴 · 문징명 · 황좌 · 가유기 · 왕신중 · 고숙사 · 진속 · 전여성 · 황보효 · 모곤 · 사진 · 이반룡 · 왕세정 · 귀유광 · 이유정 · 서위 · 도륭 · 왕치등 · 구구사 · 당시승 · 초횡 · 황휘 · 진인석 · 동기창 · 원굉도 · 왕유검 · 조학전 · 왕지견 · 애남영 · 장부 289·290·291·292·293·294·295권 「충의전(忠義傳)」 화운 · 왕개 · 손염 · 모로 · 왕강 · 왕의(王禕) · 웅정 · 역소종 · 금팽 · 황보빈 · 장영(張瑛) · 왕정 · 만침 · 주헌 · 양충 · 오경 · 곽은 · 손수 · 허규 · 황굉 · 송이방 · 왕면 · 진문시 · 왕부 · 전순 · 주부 · 손당 · 두괴 · 황천 · 왕덕 · 왕일중 · 소몽양 · 장진덕 · 동진륜 · 공만록 · 관양상 · 서조강 · 희문윤 · 주만년 · 장요(張瑤) · 하천구 · 반종안 · 장전 · 하정괴 · 고방좌 · 최유수 · 정국창 · 당환순 · 이헌명 · 장춘 · 염생두 · 왕조곤 · 손사미 · 교약문 · 장병문 · 언윤소 · 길공가 · 형국새 · 장진수 · 등번석 · 장혼방 · 장윤등 · 장광규 · 이중정 · 방국유 · 하승광 · 방유 · 윤몽오 · 노겸 · 공원상 · 왕신 · 사기언 · 양지인 · 왕국훈 · 여홍업 · 장소등 · 왕도(王燾) · 장가징 · 서상경 · 완지전 · 학경춘 · 장극검 · 서세순 · 무대열 · 전조징 · 성이항 · 안일유 · 반홍 · 진예포 · 유진지 · 이승운 · 관영걸 · 장유세 · 왕세수 · 허영희 · 이정좌 · 노세임 · 유인 · 하섭 · 조흥기 · 하통춘 · 진미 · 심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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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장 · 양옥영 · 우봉랑 · 예미옥 · 고형와 · 항숙미 304·305권 「환관전(宦官傳)」 정화 · 김영 · 왕진(王振) · 조길상 · 회은 · 왕직(汪直) · 양방 · 하정 · 이광 · 장종 · 유근 · 장영(張永) · 곡대용 · 이방 · 풍보 · 장경 · 진증 · 진구 · 왕안 · 위충현 · 왕체건 · 최문승 · 장이헌 · 고기잠 · 왕승은 · 방정화 306권 「엄관전(閹黨傳)」 초방 · 장채 · 고병겸 · 최정수 · 유지선 · 조흠정 · 왕소휘 · 곽유화 · 염명태 · 가계춘 · 전이경 307권 「영행전(佞倖傳)」 기강 · 문달 · 이매성 · 계요 · 강빈 · 육병 · 소원절 · 도중문 · 단조용 · 공가패 · 호대순 · 전옥 · 왕금 · 고가학 · 성단명 · 주융희 308권 「간신전(奸臣傳)」 309권 「유적전(流賊傳)」 호유용 · 진녕 · 진영 · 엄숭 · 주연유 · 온체인 · 마사영 이자성 · 장헌충 310권 「호광토사전(湖廣土司傳)」 311·312권 「사천토사전(四川土司傳)」 313·314·315권 「운남토사전(雲南土司傳)」 316권 「귀주토사전(貴州土司傳)」 317·318·319권 「광서토사전(廣西土司傳)」 320·321·322·323·324·325·326·327·328권 「외국전(外國傳)」 조선(← 고려) · 안남(대우 → 후여조 → 막조 → 후여조) · 일본 · 유구(삼산 → 유구) · 여송 · 합묘리 · 미락거 · 사요 · 계롱 · 파라 · 마엽옹 · 고마랄랑 · 풍가시란 · 문랑마신 · 점성 · 진랍 · 섬라 · 과왜 · 삼불제 · 발니 · 만랄가 · 소문답랄(팔석 → 아제) · 수문달나 · 소록 · 서양쇄리 · 람방 · 담파 · 백화 · 팽형 · 나고아 · 여벌 · 남발리 · 아노 · 유불 · 정기의 · 파나서 · 불랑기 · 화란 · 고리 · 가지 · 소갈란 · 대갈란 · 석란산 · 방갈랄 · 소납박아 · 좌법인 · 목골도속 · 불랄왜 · 죽보 · 아단 · 알살 · 마림 · 홀로모사 · 유산 · 비날 · 남무리 · 가이륵 · 감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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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명은 중팔(重八)로 알려졌지만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팔'은 사촌들 이름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다. 하여간 중국의 미디어에서도 보통은 중팔이라 부르는거 보면 일단 초명으로는 중팔이 가장 유명하기는 하다. 이후 흥종(興宗) → 덕유(德裕) → 원장(元璋) 순으로 개명했다.[2] 자매 사이.[3] Seldom has the course of Chinese history been influenced by a single personality as much as it was by the founder of the Ming dynasty, Zhu Yuanzhang.[4] 병음: Hóngwǔdì (훙우디).[5] (중국사) 유방, 양견, 이연, 이세민, 조광윤, 누르하치 등 / (한국사) 고주몽, 박혁거세, 대조영, 왕건, 이성계 등.[6] 가정제와 만력제는 재위 기간이 각각 무려 46년, 48년으로 환갑을 넘겨야 정상이나 그들의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려도 너무 어렸기에 사망 당시 50대 극후반으로 환갑을 넘기지 못했다. 그나마 가정제는 세는 나이로는 환갑을 넘겼다.[7] 오출삼려(五出三犁)[8] 역적 호꾸이리를 처단한 것까지는 좋은데 명나라가 베트남을 다시 통치하려다가 명군과 쩐 왕조 부흥군이 서로 싸웠다.[9] 하도 갈궈대니 열이 받은 이성계가 "황제란 작자 하는 짓이 어린아이에게 공갈이나 치는 수작 아닌가?" 하고 벌컥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이성계 본인도 신하들이 "그래서 어쩌실려구요?"라고 물으면 "내가 더 사려야지 뭘 어쩌겠냐"는 식으로 대답해 화만 냈을 뿐 명나라를 침공하거나 하진 않았다.[10] 이와는 반대로 정도전의 반대파인 이방원과 그의 측근들은 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종의 '견제'를 한 것이다. 이때문에 훗날 이방원이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후 명나라의 공인을 손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11] 조선의 국경이 안정되는 것은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고 한참 뒤에야 이루어지는데 개경을 위협했던 왜구의 경우, 제4대 세종대왕 시대에 대마도를 정벌하고 나서야 그 위세가 꺾였다. 심지어 4군 6진 지역은 세종 시대에 정벌된 이후에도 여진족이 강성하여 제7대 세조 시기, 조선군이 대규모 작전을 전개해야 했을 정도였고 제14대 선조 시기에도 신립과 이순신, 이일 등이 여진족 소탕 작전을 펼쳤음이 잘 알려져 있다.[12] 다만 명나라도 150,000명의 대군으로 북원을 정벌할 정도의 군세가 있었지만, 유독 왜구들에게 약해서 국토 동남부를 탈탈 털리고 있었다. 오히려 조선이 대규모 침략을 겪지 않는 반면 명나라는 재정 상태가 좋은 강남(중국)까지 계속 털리면서 재정에 부담이 갔고, 심지어 단지 53명에 불과한 왜구들이 수도 난징을 공격하여 군인들을 포함 사상자 4~5,000명을 내는 만화같은 일까지 발생했다. 또 명나라 군대가 조선보다 강하다고는 하나 숫자에 뻥튀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일례로 서몽골 오이라트족의 수장 에센 타이시가 명나라를 쳐들어 왔을 때, 중국 기록에는 명나라 제6대 영종 정통제가 5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친정(親征)에 나섰다고 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정통제의 군대가 80,000명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직접 당사자인 중국 측 기록이 더 정확하겠지만 굳이 조선에서도 숫자를 후려칠 까닭이 없고, 또한 명나라 황제 정통제는 에센 타이시의 오이라트 군대에게 포로로 잡히기까지 했다.[13] 물론 공민왕 때 요동 정벌을 한 적이 있고, 홍건적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느라 고려가 200,000명을 동원한 적이 있으나, 이 200,000명의 병력에는 유생들+노비들까지 포함된 사실상 활동 가능한 남성들은 다 모은 군대라서 숫자만 많지 전투력은 의문이다. 이때 20만 군대의 선봉에 서서 개경에 입성한 군대가 바로 이성계의 사병이었던 가별초였다. 게다가 주원장이 저 발언을 하는 당시 조선은 동래·기장·동평성이 함락당하는 등 한반도 남부가 왜구에게 탈탈 털리고 있었기 때문에 요동 정벌은 커녕 당장 방어에 급급했고, 결국 조선은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된다.[14] 흔히 150,000명의 대군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진 주필산 전투 역시 15만 명이 한꺼번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고, 15만 대군 중 최대 50,000명을 고연수가 말아먹었다.[15] 왜냐하면 당시 명나라는 천하를 제패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신생국가였고, 아직 북원이 잔존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이민족들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내부 정리가 제대로 끝나지도 않은 상황인데다가 한반도를 제외하고도 이미 몽골과 이민족 등을 모두 견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즉, 명나라 입장에서는 정말 조선과 전쟁이라도 했다가는, 내부 분란이나 북원의 재침공 등 자국에 큰 피해가 되거나 멸망의 원인이 될 만한 위험요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는, 정난의 변 이후 명나라 내부가 안정되고, 제3대 태종 이방원 대에 조선과의 관계가 안정되자, 북원을 비롯한 이민족들에 대한 대원정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마무리를 짓게 된다. 그야말로 스케일의 차이만 있을 뿐 조선이나 명나라나 각자 내부의 안정화가 시급해서 외부에 국력을 투사할 여유 자체가 없었다.[16] 비슷한 전설을 가진 곳이 전국에 꽤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의 '한영정'이라는 사람 집의 머슴이었는데 주인 딸인 '한여비'와 눈이 맞아 지나국으로 도망갔다던지, 경상남도 진해시의 천자봉 이야기라든지.[17] 당시 통신이 불편해서 조선은 무인정사 후에야 홍무제의 붕어를 알았다. 요동에 다녀온 사신이 이 사실을 조정에 전했다.[18] 다만, 설령 이방석이 명나라의 황녀와 결혼했어도 무사히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대다수의 사대부들은 자질이 검증된 이방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던 데다가, 명나라에서도 정난의 변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터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19] 겐무 신정으로 유명한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이었다. 규슈를 점령하여 명나라로부터 '양회'(良懷)라는 이름으로 일본국왕에 책봉받았는데 이 때문에 친중 성향이 강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도 책봉 이전까지 명나라로부터 '자국의 신하 책봉을 받은 자인 양회와 일본의 국왕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는 자'로 간주되어, 외교 관계 수립의 상대로 인식되지 못했다고 한다.[20] 이는 천하는 공공의 것이라는 동양 사대부들의 천하위공(天下爲公) 사상을 나타낸다. 황제의 독재권력을 강화하려는 홍무제의 역린을 찌를 정도로 당대 중국의 사정에 카네요시 친왕이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중국의 사상을 습득한 교양인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21] 하란산은 현재의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위치한 산으로 북방 이민족의 주된 거처지인 오르도스 지역에 있어 중원을 위협하는 북방 이민족의 거처를 뜻하는 말로 쓰였는데 이 부분을 언급함으로써 일본 역시 중국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22] 이와는 별개로 이 서신 자체는 천하의 홍무제를 상대로도 도발을 걸 만큼, 중일관계에 있어서 일본은 당당하고, 중국에 밑지는 관계만은 아니었다는 일본 내부의 국뽕용으로 일본 역덕들이 자주 인용하는 서신이다.[23] 고려에서도 마찬가지로 무로마치 막부에 "니들 왜구 단속 똑바로 안 할래?"라고 항의했지만 무로마치 막부는 "걔네들은 우리한테서 도망친 놈들이라서 우리도 지금 못 잡아요"라고 말해, 왜구에 잡혀온 고려인 포로들 일부를 돌려받는 정도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마가와 료슌은 "그놈들은 규슈를 차지하고 있는 서변해도(西邊海道)의 완민(頑民)들인데, 지금 우리가 규슈를 평정하려고 군사를 보내 싸우는 중이니까 규슈가 평정되고 나면 왜구를 진압할 수 있습니다. 장담합니다"라고 호언했고, 승려 신홍을 보내 고려군과 합동해 왜구 진압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24] 대월은 외왕내제를 취하고 있었다.[25]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26] 늘 그랬듯이, 마황후가 만류한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27] 게다가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유교의 쌍두마차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 맹자를 탄압했다가는 전 중국의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이는 아무리 홍무제라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28] 주원장은 온갖 영웅호걸이 나타나서 활개치던 중원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미천한 신분이었다. 심지어 평민 출신 황제였던 한태조 유방조차도 주원장 정도는 아니었고, 비록 낮은 직위기는 해도 사수정의 정장이라는 벼슬을 살았던 적도 있었다.[29] 대부분의 개국공신들은 요직에 남아, 유방 사후에 외척인 여씨를 숙청하고 유씨 황실을 지켰다. 유방이 숙청한 인물은 한신, 팽월, 영포 정도인데 이들은 다른 공신들에게도 위험인물로 꼽혔고 실제로 숙청당할 짓을 했다. 게다가 유방이 아닌 여후가 처벌을 주도했다. 또한, 유방의 자녀 대접도 아들을 수레에서 집어던졌다는 일화가 유명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과장이 많이 되었다. 유방이 죽인 자녀는 공신과 마찬가지로 거의 없었다. 폐위를 생각한 혜제도 실제로는 여씨 견제를 위해 그런 것이었고 또, 황제의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명분이 없다고 판단하여 실행하지는 않았다.[30] 이것은 제4대 인종 홍희제때 편법을 써서 겸직 벼슬로(2, 3품직) 품계가 상승했고, 이어서 고위급 명예직의 겸직(태자 태, 소OO)으로 종1품, 정1품으로 상승시켰다. 이때쯤이면 사실상의 재상이었지만, 단지 재상(승상)이라는 직명을 쓰지 않을 뿐이었다. 또한 명나라 특유의 절대군주제로 인해 황제가 허수아비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학사들은 말 그대로 재상급 비서로서 황제를 보좌했다.[31] 오히려 중원을 통일한 역대 황제들은 공자든 맹자든 충을 강조하는 유학 성현의 이론을 최대한 이용해서 오히려 자신의 권위와 통치를 안정화하려고 했다. 마찬가지로 밑바닥에서 건국자가 된 한태조 유방도 황제가 된 후로는 숙손통을 중용하여 예법을 재정비했다. 반면 주원장은 같은 내용을 가지고도 신권에 유리한 내용이 나왔다는 이유로 덜컥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다.[32] 재밌게도 이 역시 한태조 유방과 반대되는 사례다. 유방은 패현 땅에 애정이 없진 않았지만 옹치와 함께 자신을 배신했던 섭섭함도 컸기 때문에 굳이 애써서 특별대우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 유태공이 고향을 그리워할 때도 고향 땅 자체를 건드리진 않고 수도 장안 주변의 마을을 고향과 비슷하게 꾸며 조성한 뒤 고향 이웃들을 불러와서 유태공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죽기 직전에 향수병이 북받쳐서 고향으로 찾아왔을 때 고향 사람들의 부탁으로 세금과 복역을 면제해주긴 했지만, 그때도 풍읍은 제외하려고 했다.[33] 참고로 당시 명나라에서 1개 현을 관리하는 지현의 녹봉이 겨우 90석이었다.[34] 보통이야 칭병하고 안 나가면 그만이지만 주원장은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35] 홍무 원년(1368년)에 맏이인 태자 주표가 13세였다.[36] 북원의 코케테무르와 그가 이끌고 있는 수만 명의 기병조차도 그 당시 최고의 권위와 권력을 가진 주원장의 자식들에게 '격' 자를 쓸 상황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당시 명나라에서 주원장은 천하제일의 권력자였다. 그런 사람의 아들을 때렸으니 이희안의 성깔도 장난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37] 부모를 여윈 후, 묻을 땅이 없어 장례를 지내지 못하고 있었을 때 흔쾌히 땅을 내준 유계조라는 사람도 이 덕분에 '의혜후'(義惠侯)라는 작위를 받았다.[38] 다만 개인적인 원한으로 숙청을 하지는 않은 듯하다.[39] 취두부의 기원 일화와 약간 비슷하다.[40] 최소 2점 이상. 얼굴에 곰보 자국은 없지만 턱은 여전히 튀어나온 초상화도 존재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과 래리 고닉의 만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서는 오른쪽 초상화를 바탕으로 주원장을 그렸다.[41] 그리고 세 번째 화공은 못생긴 외모는 그대로 두되, 인상을 인자하고 푸근하게 그려서 주원장의 마음에 들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42] 조선미 저, 《왕의 얼굴》 참조. 못생긴 초상화를 전국에 뿌렸다는 점을 볼 때 주원장의 의도가 실린 것은 확실해 보인다.[43] 영화 <적벽대전>에서 조운 역으로 출연했다. <천룡팔부> 2003년 드라마 버전에서 소봉역을 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이 배우는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이다. 자신의 민족이 세운 나라에 의해 망하는 나라의 시조를 연기한 셈. 게다가 호군은 이후 <건원풍운>에서 주인공 쿠빌라이 칸을 맡았는데, 이렇게 되면 만주족의 조상의 나라를 멸망시킨 나라의 군주까지 연기한 셈이다.[44] 특히 파양호 전투 전 진우량에 대한 대응책을 두고 부하들이 갑론을박을 벌일 때, 아무래도 본인이 부하들 앞에 있을 때보다는 없을 때 본인을 의식하지 않은 채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이야기가 보다 잘 나오는 점을 이용하여, 회의장 뒤켠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쪼그려앉아 부하들의 발언을 쪽지에 적으며 엿듣는 모습이 그 절정이다.13화의 28분 30초~29분 20초 경에서 볼 수 있다. 참모 유기는 이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45] 너무 소박해 보이지만 유진하는 《비천신기》때문에 수도없이 쫓겼고 진우량의 배신까지 당해 죽을 뻔 했다. 《비천신기》를 계승한 아들까지 그런 운명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아버지로서의 배려였던 셈이었다.[46] 이때 원나라 승려들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죄없는 말장수들을 죽이고 그 시체들을 자신 일행의 것으로 위장시켰다고 나오는데, 죄없는 사람을 해쳤다는 얘기를 듣고 장무기가 경각심을 가진다.[47] 남궁검가 창천의혈문의 하부 세력인 제검장의 셋째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