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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 루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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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샤루흐.jpg
발굴된 유골로 재구성한 샤 루흐 두상

1. 개요2. 생애
2.1. 계승 전쟁과 반란2.2. vs 흑양 왕조2.3. 후루피야 탄압과 지식인 숙청2.4. 내정과 외교2.5. 후계자 문제2.6. 사망
3. 대중문화에서4. 기타

1. 개요

페르시아어 شاهرخ
우즈베크어 Shohrux / Шоҳрух
영어 Shah Rukh

생몰 1377년 8월 20일 ~ 1447년 3월 13일
재위 1409년 5월 13일 ~ 1447년 3월 13일

티무르 제국의 3대 군주. 샤로흐로도 불린다. 티무르 사후 제국의 붕괴를 막아내며 핵심 영토인 호라산트란스옥시아나를 보전해내었다. 그가 수도로 삼은 헤라트사마르칸트와 함께 실크로드 교역으로 크게 번영하였고, 예술과 과학 등 학문적으로도 발전하였다. 몽골 정복자 느낌이 강했던 부왕 티무르와 달리 샤 루흐는 전형적인 페르시아 무슬림 군주로써 현지 문화에 동화되었고, 티무르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며 신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티무르 제국의 수성 군주였다.

2. 생애

아미르 티무르의 4남이자 막내 아들로[1], 루흐는 그의 탄생 소식을 들은 티무르가 당시 자신이 쥐고 있던 체스의 말인 (로흐)에서 딴 이름이라 한다. 샤 루흐는 형제들 중에 가장 조용한 편이었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티무르는 내성적인 막내 아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으나[2], 1397년 샤 루흐는 20살의 나이로 호라산 총독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50년간 그는 헤라트를 거처로 삼았다. 1402년 샤루흐는 형 미란샤와 함께 티무르의 오스만 제국 원정에 동행하였고, 앙카라 전투 당시 좌익을 맡아 승리에 기여하였다.[3] 일찍이 두 아들을 잃은 티무르는 정신 착란을 보인 삼남 미란샤나 자신과 성향이 다른 막내 샤 루흐 대신 손자 무함마드 술탄 미르자[4]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그는 1403년 부르사 공방전 때의 부상이 도져 요절하였고, 후자의 동생 피르 무함마드가 후계자로 내정되었다.

2.1. 계승 전쟁과 반란

하지만 1405년 중국 원정 중 티무르가 사망한[5] 후 피르 무함마드는 친족 중에서 지지 세력을 확보하지 못하여 사마르칸트를 장악하는데 실패하였고, 영지인 칸다하르로 철수하였다가 1407년 암살당하였다. 한편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는 미란샤의 아들이자 페르가나 총독 칼릴 술탄의 것이 되었다. 헤라트의 샤루흐는 직속 군대와 사마르칸트로 진군했으나 아제르바이잔의 미란샤가 개입하자 일단 철수하였다.[6] 이를 틈타 티무르의 외손인 술탄 후세인 타이치우트가 제위를 주장하며 칼릴 술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한 후 헤라트로 도주했는데, 샤 루흐는 그를 처형하여 헤라트 바자르에 효수하였다. 기타 왕공들의 반란이 진압된 1407년부터 칼릴 술탄과 샤루흐는 지지부진한 협상과 국지적인 충돌을 이어갔는데, 대체적으로 사마르칸트와 국고를 장악한 칼릴 술탄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칼릴 술탄은 부인 샤드 물크의 충고대로 하급 아미르들을 고위직에 기용하여 기존 고위층의 반감을 샀고, 여론 역시 이어진 내전과 함께 엄습한 기근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불안을 느낀 칼릴 술탄은 페르가나 영지로 돌아갔는데, 참모인 후다이다드 후세인이 모반하여 그를 사로잡아 (티무르 제국의 속국) 차가타이 칸국의 샴스 자한 칸에게 넘겼다. 다만 칸은 후다이다드를 역모범으로 처형하고 칼릴 술탄을 되돌려보냈다. 1407년 피르 무함마드에 이어 1408년 미란샤는 흑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7] 칼릴 술탄의 든든한 지원군이 사라진 상태에서 샤루흐는 1409년 5월 대군을 모아 사마르칸트로 진군하였고, 도시에 무혈 입성하였다. 다만 여전히 헤라트를 중심지로 여긴 그는 장남 울루그 베그에게 사마르칸트 총독 및 트란스옥시아나 통치를 맡겼다.

페르가나의 칼릴 술탄은 사마르칸트에 남아있던 아내 샤드 물크가 포로로 잡히자 숙부에게 항복하였고, 그 대가로 라이 총독에 봉해졌다가 1411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8] 내전 종결 후 샤루흐는 반란의 방지를 위해 총독들의 임지를 자주 바꾸었다. 조카이자 의붓아들[9]인 이스칸데르 미르자의 경우 페르가나에서 하마단, 다시 쉬라즈로 임지가 변경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1413년 반란을 일으켜 이스파한에서 술탄을 칭하고 케르만을 공격하였다가 진압되어 실명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쉬라즈에 부임한 동생 바이카라 역시 이스칸데르의 설득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샤루흐가 친정에 나서자 항복하여 칸다하르에 유폐되었고, 재범 이스칸데르는 처형되었다. (1415년) 우마르 샤이크 미르자의 아들들 중 숙부 샤루흐에 충성을 유지한 이는 이복 형제들의 반란 진압에 적극 참여한 이스파한 총독 루스탐 뿐이었다.[10]

2.2. vs 흑양 왕조

제국 주요부를 통합한 샤 루흐는 서부 평정에 나섰다. 상술한대로 1414년 조카 바이카라가 자립해 있던 파르스를 병합하였고, 1416년에는 케르만에서 자립했던 술탄 우와이스 바를라스를 복속시켰다. 무력 행사 혹은 복속 유도의 형식으로 이란 고원을 평정한 그는 이제 1408년 이래로 아제르바이잔과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있던 흑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와 맞섰다. 1420년 가을 샤루흐는 아라스강을 건너 캅카스 방면으로 공격하였고, 때마침 카라 유수프가 사망하며 터진 내전을 틈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를 수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7월 흑양 조를 통합한 카라 이스칸데르는 키르쿠크를 거점으로 저항을 이어갔고, 샤루흐가 흑양 조의 라이벌인 백양 왕조 군주 카라 오스만의 아들 잘랄웃딘 알리 베그를 총독으로 봉하고 철수하자 즉시 공격하여 나흐츠반타브리즈를 수복하였다. 카라 이스칸데르는 티무르 조의 편에 섰던 시르반샤 왕조를 공격하였고, 1428년에는 티무르령 솔터니예 총독 카와자 유수프와 대결하였다.

이에 샤루흐는 에미르 알리카 쿠칼타쉬를 파견해 보복하였고, 1429년 9월 친히 10만 대군을 이끌고 살마스로 나아갔다. 이어진 전투에서 카라 이스칸데르의 이복동생 아부 사이드가 교전 중 샤루흐에 복속하며 전향하였고, 흑양 군대는 대패하여 디야르바크르로 철수하였다. 샤루흐는 재차 타브리즈를 장악하고 아부 사이드를 (티무르 조에 복속한) 흑양 조의 군주로 삼았다. 그러나 1431년 카라 이스칸데르가 타브리즈를 재수복, 아부 사이드를 처형하고 흑양 조의 군주로 복위하자 샤루흐는 3번째 아제르바이잔 원정을 계획하였다. 그 무렵 총독이던 이스칸데르의 아들 야르 알리가 현지 아르메니아 인들의 반발에 시르반으로 망명했으나, 시르반샤 칼릴울라 1세는 그를 사로잡아 샤루흐에게 압송하였다.[11] 분노한 이스칸데르는 재차 시르반을 공격해 파괴하였고, 칼릴울라 1세는 딸과 함께 라이에 당도하여 샤루흐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1434년 샤루흐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출정하였고, 이스칸데르는 도주하였다.

이를 기회라 여긴 백양 조의 카라 오스만은 1435년 8월, 샤루흐의 아들 무함마드 주키의 지원을 받아 아흘라트 동쪽의 아딜제바즈에서 이스칸데르에 매복 공격을 가하였으나 패배하고 곧 사망하였다. 다만 전세를 역전할 정도의 승리는 아니었기에 이스칸데르는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에 망명하였다. 무라트는 그를 토카트 총독에 봉하였으나 타브리즈 수복 지원은 거절하였다. 사태를 지켜보던 샤루흐는 이스칸데르의 동생 자한 샤를 흑양 조의 군주로써 타브리즈에 봉한 후 회군하였다. 이스칸데르는 단독으로 타브리즈 수복을 시도했으나 수피안 (타브리즈 서북쪽)에서 휘하 아미르들의 배반으로 자한 샤에게 패하고 나흐츠반의 알린자 성채에서 농성하던 중 아들 샤 쿠바드에게 피살되었다.[12] 이스칸데르의 잔존 세력은 이라크 흑양 조의 이스펜드에게로 망명하였다. 이후 자한 샤는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샤루흐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고, 이로써 비록 아제르바이잔과 메소포타미아의 수복 자체는 실패하긴 했지만 제국 서쪽의 위협은 종식되었다.

2.3. 후루피야 탄압과 지식인 숙청

하나님이 아랍-페르시아 문자에 발현되어 있다는[13] 범신론적인 우주관을 제시한 아스트라바드 출신의 수피 파즈랄라 아스트라바디 (1394년 사망)는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에서 선교하였고, 티무르까지 개종시키려 했으나 실패한 후 1394년 나흐츠반에서 미란샤에 의해 처형되었다. 파즈랄라를 아담, 모세, 무함마드에 이은 하나님 권위의 발현으로 여긴 후루피야 공동체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이로써 티무르 조와 원수지간이 된 후루피야는 정체를 숨기고 은둔한 끝에 1426년 모스크를 나서던 샤루흐의 암살을 시도하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암살 미수범인 아흐메드 루르는 샤루흐에게 탄원서를 올리는 척하며 그의 복부를 단검으로 찔렀으나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채로 경호원에게 처단되었고, 며칠 후 회복한 샤루흐는 조사 끝에 후루피야 종단의 소행임이 드러나자 보복에 나섰다.

우선 파즈랄라의 손자 아주드가 처형되었고, 후루피야 지도부는 전부 사로잡혀 심문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헤라트의 성직자 전반에 대한 사상 검증이 벌어져 후루피야와 무관한 학자들도 이단이 아님을 증빙해야 하는 대대적인 정풍 운동이 일어났다. 그중에는 샤루흐의 차남 이브라힘 술탄의 의뢰로 티무르의 일대기인 자파르나마를 저술한 샤라프 웃딘 알리 야즈디와 바이순구르 왕자의 후견인인 서예가 마루프 카타트도 있었고, 수피 시인 카셈 안바르는 샤루흐의 명으로 헤라트에서 추방되었다. 이러한 중앙아시아판 문자의 옥은 샤루흐 치세 전반부까지 유지되던 식자층과 티무르 왕실과의 우호적인 관계에 확고한 금이 가게 하였다. 이는 예술과 학문에 조예가 깊던 샤루흐의 차남 이브라힘 술탄[14]과 삼남 바이순구르[15]가 각각 1435년과 1433년 사망하며 더욱 냉각되었다.

2.4. 내정과 외교

샤루흐의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치세 동안 호라산 지역은 티무르 시기의 혼란에서 회복하여 경제, 문화적 안정을 이룩하였다. 샤루흐 본인 뿐만 아니라 왕비 가우하르 샤드와 네 아들들 역시 유능한 행정가였고, 고위 관료들 역시 유능하면 장기간 등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대장군 잘랄 웃딘 피루즈샤는 35년, 와지르 기야스 웃딘 피르 아흐마드 카바피는 31년, 재정총감 아미르 알리카 코쿨타쉬는 (샤 루흐와 같은) 무려 43년간 직위를 유지하였다. 이로써 15세기 전반 티무르 제국에서는 안정이 이어질 수 있었다. 또한 샤루흐는 부왕과 달리 몽골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고, 꼭두각시 칸 혹은 아미르 대신 이슬람-페르시아 칭호인 술탄과 파디샤를 취하였다. 사법에 있어서도 야르구와 퇴라 (törä)에 입각한 몽골-튀르크법에서 샤리아 체계로 전환하여 학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나마 요절한 형 우마르 샤이크의 과부인 모굴리스탄 칸국의 공주 말리카트 아가와 결혼한 것이 몇 안되는 몽골 정체성 (형사취수제)의 계승이었다.

외교에 있어 샤루흐는 티무르 말엽에 전쟁까지 이를뻔했던 명나라와의 관계 회복에 나섰다. 영락제는 1414, 16, 20년에 진성 (陳誠)을 필두로 한 사절단을 사마르칸트와 헤라트에 파견하였다. 이에 샤루흐는 1419-22년 더 큰 규모의 사절단을 베이징에 보내어 선물을 교환하였고, 영락제는 성대한 연회로 맞이하였다. 또한 샤루흐는 영락제에게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판본의 편지를 보내어 이슬람 법의 덕목을 칭찬하고 개종을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원나라를 멸한) 명나라에 대해 티무르 조의 자주성과 차별성을 명시하려는 의도로도 해석된다. 명나라 뿐만 아니라 샤루흐는 백양왕조, 델리술탄왕조, 오스만 제국, 킵차크 칸국, 호르무즈 왕국 등 이웃 국가들과의 친선을 유지하였고 그중 상당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델리 술탄들은 지속적으로 봉신 서약을 하였고, 벵골 술탄 샴스 웃딘 아흐마드 샤는 군사 원조를 청하였다. 다만 그의 패권적인 행보에 맘루크 왕조는 경계의 모습을 보였으나 술탄 자크마크 대에 우호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확립하였다.

2.5. 후계자 문제

대흑양조 전쟁을 통해 티무르 조의 장군으로 성장한 샤루흐의 막내아들 무함마드 주키는 1425-26년 킵차크 칸국의 바라크 칸이 시그나크 (크즐오르다 인근)를 공격하자 부왕의 불허에도 1427년 보복 원정을 가하였으나 대패하고 사마르칸트로 패주하였다. 그럼에도 말년의 샤루흐는 그를 선호하여 후계자로 삼으로 하였는데, (무함마드 주키의 친모인) 왕비 가우하르 샤드의 반대로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가우하르 샤드는 대신 (1433년 요절한) 바이순구르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알라 앗다울라 혹은 또다른 손자이자 울루그 베그의 아들인 압둘라티프를 후계자로 선호하였다.

1444년 샤루흐가 중태에 빠지자 발흐 총독이던 무함마드 주키는 헤라트로 향하여 임박한 계승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당시 모후 가우하르는 대장군 잘랄웃딘 피루즈샤로부터 알라 앗다울라의 계승을 약속받은 상태였는데, 샤루흐가 기적적으로 회복하며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미 부왕의 명으로 피루즈샤의 권력 남용을 조사하던 무함마드 주키는 감찰 결과를 올렸고, 분노한 샤루흐는 피루즈샤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모욕에 수치스러워 하던 피루즈샤는 얼마후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다만 모친과의 불화로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무함마드 주키 역시 이듬해 사락스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6]

2.6. 사망

파일:구르 에미르.jpg
구르 에미르에 위치한 샤 루흐의 관 (중앙 왼쪽)

1444년 죽을 고비를 넘긴 샤루흐는 점차 쇠약해졌다. 이를 틈타 1446년 바이순구르의 아들인 술탄 무함마드가 파르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샤 루흐는 70의 노구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술탄 무함마드는 곧 루리스탄 산지로 숨어버렸다. 손자의 반란을 진압한 샤루흐는 1447년 3월, 헤라트로 돌아가지 못하고 라이의 월동지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부고는 비밀에 부쳐졌으나 곧 제국 전역에 퍼졌고, 군대가 혼란에 빠지며 샤루흐의 운구마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였다. 사후 3일이 되어서야 (태후가 된) 가우하르 샤드가 손자 압둘라티프와 함께 운구 행렬을 이끌고 동진하였으나 후자가 이를 인질로 삼으며 제위를 노렸다. 하지만 압둘라티프는 곧 사촌 알라 앗-다울라에 패하였고, 그는 가우하르 샤드와 함께 헤라트로 돌아와 조부 샤루흐를 (헤라트의) 가우하르 샤드 모스크에 안장하였다. 다만 이듬해 헤라트를 점령한 울루그 베그는 부친의 시신을 사마르칸트에 위치한 티무르의 영묘인 구르 에미르로 이장하였다.

3. 대중문화에서

징기스칸 4》에서 티무르가 군주일 때 1384년에 임관한다. 정치/전투/지모 순으로 82/83/76, 병과 적성은 보병/궁병/기병/수군 순으로 B/A/A/E, 내정 특기는 농업/상업/문화, 전투 특기는 돌격/연사/공성으로 아버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매우 뛰어난 능력치이다. 다만 초상화가 가공 인물인 것은 아쉬운 부분.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아이 목록에서 울루그 베그를 볼 수 있다.

Europa Universalis 4》에서 티무르 제국의 스타팅 군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뛰어나지만 캠페인 시작 후 3년만에 죽은 걸 고증해서인지 나이가 많고 장군으로 되어있어 개복치급으로 잘 죽어나가는것이 문제. 특히 그가 가지고 있는 모디파이어와 영구 트레잇이 속국 독립 열망을 55%나 깎아주는데 그가 죽어버리면 이 독립 열망들이 고스란히 돌아와 속국들이 난리를 치기에 상당히 골아프다. 그렇기에 그가 살아있을 때 최대한 활용해서 티무르의 속국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끔 하는 것이 티무르 초반 플레이의 핵심이다.[17]

4. 기타

파일:마슈하드 고하르샤드 (2).jpg
마슈하드에 위치한 고하르샤드 모스크. 이맘 레자 성지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샤루흐의 정비 가우하르 샤드는 마슈하드와 헤라트의 신학교에 모스크를 더하였다. 그중 1418년 마슈하드의 이맘 레자 성지에 더해진 가우하르 샤드 모스크는 페르시아, 아랍, 중국의 미술 양식이 더해져 다채로움을 뽐내었다. 샤루흐는 자신의 치세 초반을 다룬 역사서인 타리크-에-샤로크를 의뢰하였고, 말년에는 치세 전반을 다룬 마즈무아예 하페즈-에-아브루 (통사)와 마주마 앗-타와리크 (집사)를 출판하였다.

파일:티무르 헤라트.png
헤라트에 남아있는 가우하르 샤드의 영묘


[1] 모친은 타지크계 왕비 타가이 타락칸 아가[2] 이는 (칭기즈칸의) 몽골 관습을 선망하던 티무르와 (일 칸국식) 이슬람 관습을 선호하던 샤루흐 간의 사상적 대립으로도 해석된다[3] 미란샤는 우익, 티무르는 직접 중앙을 맡음[4] 티무르의 차남이자 첫 후계자로 여겨졌던 자한기르 미르자 (1375년 요절)의 장남. 1375년생으로, 샤루흐보다 2살 많다.. 족보 붕괴[5] 임종 전 티무르는 샤 루흐를 만나고 싶으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며 한탄하였다[6] 미란샤 역시 잘라이르 왕조흑양 왕조의 준동으로 회군하였다[7] 이후 미란샤의 수급을 본 타브리즈가 항복하며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15년만에 티무르 제국에서 이탈하여 흑양 왕조령이 되었다. 패주한 미란샤의 다른 아들 아부 바크르 역시 1409년 사망하였다.[8] 부부 간의 금슬이 매우 좋았는지 아내 샤드 물크는 그의 사후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9] 이스칸데르의 모친은 우마르 샤이크가 사망한 후 시동생인 샤루흐와 재혼하였다[10] 다만 1425년 루스탐이 사망한 후 그 자녀들은 대장군 피루즈샤에 의해 추방되었고 피루즈샤의 동생이 이스파한 총독이 되었다[11] 야르 알리는 헤라트에 이어 사마르칸트에 유폐되었다[12] 맘루크 조에 도움 청했으나 당도하기 전에 사망함. 이후 샤 쿠바드는 1438년 4월 자한 샤에게 처형됨.[13] 그래서 아랍어로 문자인 후루프가 들어간 후루피야 (حُرُوفِيَّة)라 불린다[14] 파르스 총독으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1427년 6월 쉬라즈의 쿠란 문에 직접 필사한 쿠란을 봉안하였다. 이는 현재 파르스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또한 그는 쉬라즈에 2개의 마드라사를 세우고 아티크 모스크를 보수하였다.[15] 페르시아 세밀화를 비롯한 예술의 후원자였고, 기존 샤나메를 당대의 표현으로 재서술한 바이순구르 샤나메를 의뢰하였다. 페르시아 세밀화의 걸작으로 평가바는 이는 테헤란 골레스탄 궁전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그는 또한 1421년 타브리즈 점령 후 기존 잘라이르 조에서 일하던 예술가들과 서예가들을 헤라트로 데려왔고, 쉬라즈의 예술가들 역시 초빙하여 이란 최대의 예술 학교를 세웠다. 바이순구르 생전 헤라트 궁정에서는 티무르 궁정 문화가 꽃피웠다.[16] 사후 두 아들인 아부 바크르와 무함마드 카심이 각각 쿠탈과 발흐 영지를 계승하였다. 다만 둘다 향후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17] 보통 실제 역사대로 아잠을 공격해서 같이 싸워주는 속국의 군사력도 깎고 코어 영토 확보를 통한 직할령 확장과 그로 인한 국력 증가로 속국들을 힘으로 누른다는 선택지를 많이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