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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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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제국 초대 아미르
티무르
تيمور
파일:Timur reconstruction.jpg
유골을 토대로 만들어진 두상, 미하일 게라시모프 (1941)
이름 중세 몽골어 테무르(ᠲᠡᠮᠦᠷ)[1]
현대 몽골어 트므르(Төмөр)
별칭 절름발이 티무르[2]
출생 1336년 4월 8일
파일:차가타이 칸국 국기.svg 차가다이 울루스, 케쉬
사망 1405년 1월 19일 (향년 68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0px-Timurid.svg.png 티무르 제국, 오트라르
재위 기간 티무르 제국 아미르
1370년 4월 9일 ~ 1405년 2월 14일
씨족 보르지긴 (ᠪᠣᠷᠵᠢᠭᠢᠨ)
부족 바를라스 (ᠪᠠᠷᠣᠯᠠᠰ)
부모 아버지 : 타라가이 노얀
어머니 : 테키나 카툰
자녀 장남: 우마르 샤이크 미르자 1세[3]
차남: 자한기르 미르자[4]
삼남: 미란 샤 미르자[5]
사남: 샤 루흐 미르자[6]

1. 개요2. 상세3. 이름4. 생애
4.1. 서차가타이 칸국 장악4.2. 35년 간의 대정복4.3. 급사, 그 이후
5. 칭기즈 칸과의 차이
5.1. 원정 방식의 차이5.2. 정치적 역량
6. 평가
6.1. 군사적 재능6.2. 우즈베키스탄에서
7. 중앙아시아에서의 계통 논쟁
7.1. 범투란주의 영향
7.1.1. 튀르크인 논쟁
7.1.1.1. 언어적 측면7.1.1.2. 유전적 측면7.1.1.3. 결론
8. 그 외
8.1. 체스 매니아8.2. 저주
9. 대중문화에서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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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무르 제국의 건국자.

2. 상세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몽골바를라스부 출신의 인물로, 역사 학계에서는 튀르크화된 몽골인을 의미하는 투르코-몽골(Turco-Mongol) 정복자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는 몽골 제국부활을 주창하면서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하였는데,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거의 구국의 영웅 취급이라 소련 치하 당시 카를 마르크스상이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을 정도. 그러나 우즈벡인들은 티무르의 후손들을 몰아내고 중앙아시아에 자리잡은 주치의 후손들이다. 우즈벡인들이 티무르를 숭배하는 이유는 아래 후술된 우즈베키스탄에서 문단 참조.

반면 침략약탈, 학살을 당한 서아시아인도 등지에서는 악의 축 또는 마왕 취급을 받고 있다. 중근세 유럽에서도 잠시 인기가 있었는데, 이유는 당시 유럽의 적이던 오스만 술탄국을 완파했기 때문이다. 잠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약탈하는 티무르군을 보고 "이 자들도 튀르크인만큼 잔인하지만 그래도 잘 모르는 자들보다 잘 아는 작자가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 실제로 베네치아제노바이탈리아의 해양 도시국가들은 티무르군을 피하여 유럽으로 건너가려는 오스만인들을 실어다주기도 했다. 특히 오스만과의 일전 이후 구호기사단이 지배하고 있던 스미르나를 말그대로 초토화시켰기에 기독교도라고 안전하지 않을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티무르는 문맹이었지만, 그가 활동했던 지역의 언어인 페르시아어튀르크어를 둘 다 유창하게 구사했고, 학자들과 역사과학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길 정도로 학식이 높았다. 그리고 무슬림으로서의 신심도 훌륭했다.

3. 이름

그의 이름을 페르시아어 기록에는 '티무르 이븐 타라가이 바를라스(تيمور ابن ترغيى برلس, Tāāmūūr ibn Tāraġaiyi Bārlās)', 즉 '바를라스 부족의 타라가이의 아들 티무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를라스(ᠪᠠᠷᠣᠯᠠᠰ) 부족은 몽골의 지배층에 속했던 황금씨족인 보르지긴 씨족을 구성하는 부족 중 하나이다. 그의 이름인 '티무르'는 그가 당시 활동하였던 지역의 언어인 페르시아어와 튀르크어의 영향으로 티무르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중세 몽골어의 원형 발음은 '테무르'에 가깝다. 이는 칭기즈 칸의 본래 이름인 테무진이 튀르크어로는 '티무친'으로 발음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또한 생전에 절름발이였다는 점에서 착안해 영미권에서는 '테멀레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4.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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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의 부계 혈통은 칭기즈 칸과 같은 보르지긴 씨족에서 갈라져 나온 바를라스 부족으로, 칭기즈 칸과 조상을 공유한다. 칭기즈 칸의 고조부인 툼비나이 세첸[7]의 장남 카불 칸의 증손이 바로 칭기즈 칸이었고, 3남 카출리의 증손이 티무르의 고조부인 카라차르(Qarachar)로, 칭기즈 칸의 사준사구 중의 한 명이었던 쿠빌라이의 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쿠빌라이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아닌 동명이인이다. 둘을 구별하기 위해 쿠빌라이 칸은 한자로 忽必烈 이라고 쓰고, 쿠빌라이는 忽必來 라고 쓴다.

그러니까 칭기즈칸과 이들 형제는 8촌 형제 사이인 셈이었다. 카라차르의 씨족인 보르지긴 오복 바를라스(Barlas) 씨족은 칭기즈 칸과 혈통이 꽤나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의 보르지긴(Borjigin) 오복 키야트 씨족과 떨어져 살다가 칭기즈 칸이 세력을 키우자 쿠빌라이와 카라차르의 아버지이자 바를라스 씨족의 수장인 소쿠 세첸이 부족을 이끌고 칭기즈 칸에게 귀순했다.

칭기즈 칸의 제국이 세워지자 카라차르는 영토를 받고 '노얀'[8](Noyan)[9]의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카라차르 노얀은 칭기즈 칸의 차남 차가타이의 신임을 받고, 그의 영지(領地)인 차가타이 칸국(汗國)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로 카라차르 노얀의 후손들은 대대로 차가타이 칸국에서 살았으며, 카라차르가 아들 이린기르를 낳고, 이린기르는 부르기르를 낳았으며, 부르기르는 티무르의 아버지인 타라가이를 낳았다. 타라가이 또한 조상의 작위를 이었기 때문에 차가타이 칸국의 노얀이었으나 그의 대에 들어서는 바를라스 가문의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군사적으로 재능을 발휘하여 대제국을 세운 티무르가 등장했다.

4.1. 서차가타이 칸국 장악

티무르는 바를라스 부족의 수령 집안 출신으로, 1336년 사마르칸트 부근의 도시, 케슈에서 태어났다. 실제 출생년도는 1320년대 중반이라는 학설도 있다. 1336년은 일 칸국의 아부 사이드 칸이 사망한 해이다. 티무르 제국의 사가들이 티무르가 이슬람 세계에서 칭기즈 칸 일족의 지배를 계승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티무르의 출생 연도를 이 때로 정했다는 주장이다. 차가타이 칸국은 1347년 카잔 칸이 피살되면서 동부와 서부로 분열되었다. 서부 차가타이 칸국에서는 카라우나스(Qara`unas)부의 수령 아미르 카자간(Qazaghan)이 실권을 장악하고 칭기즈 칸 일족을 허수아비 칸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1358년 아미르 카자간이 살해당하고 서차가타이 칸국이 혼란에 휩싸이자 동부 차가타이 칸국의 칸 투글룩 테무르[10](Tughluq Temur)는 1360년과 1361년 두 차례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했다. 티무르는 이때 투글룩 테무르에게 귀속해 바를라스부의 수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투글룩 테무르가 자신의 아들 일리야스 호자를 서차가타이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동차가타이 칸국으로 돌아간 후, 티무르는 그에 대항하며 점차 세력을 키웠다. 티무르는 그의 매부이자 카라우나스부의 수령이던 아미르 후세인과 함께 동차가타이 칸국에 반기를 들었다. 1365년 일리야스 호자는 아미르 후세인과 티무르를 격파했으나 진중에 역병이 돌아 사마르칸트를 함락하지 못하고 동차가타이 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 티무르는 서차가타이 진영의 맹주가 된 아미르 후세인과 불화를 빚어 결별했다. 티무르는 약탈 집단을 이끌며 보여준 리더쉽으로 휘하 유목민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지도자로 부상했다. 특히 약탈물을 공정하게 배분한 것으로 유명했다. 1370년에는 발흐를 근거지로 삼은 아미르 후세인을 격파하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칭기즈 칸의 후예가 아니었던 티무르는 '칸'을 칭하지 못하고 '부마'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11] 그러나 그는 무슬림들의 지도자를 뜻하는 '아미르(amir)'라고 불리며 사실상 군주로 군림하며 칭기즈 칸의 후손을 허수바이 칸으로 추대했다.

티무르의 아버지 타라가이(Taraqai)는 소지주에 불과했지만, 가문 자체가 칭기즈 칸과 같은 불운은 겪지 않았다.[12] 그러나 생애가 비슷한 부분은 있는데, 초기에는 동지였지만 후에 대립하여 티무르에게 참수당한 아미르 후세인도 칭기즈 칸과 의형제였지만 결국엔 갈라선 자무카와 비슷한 부분이다.

4.2. 35년 간의 대정복

파일:attachment/티무르/1405.jpg
마침내 왕위에 오른 티무르는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자처하였고 또 지하드를 선포하고 다녔다. 그가 무너뜨린 세력들은 대부분 현지화된 옛 몽골 제국의 세력과 각지의 이슬람 국가들이었다. 킵차크 칸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일 칸국에 성립해있던 여러 몽골 제국 계열 왕조를 복속시켰다[13]. 또 오스만 튀르크를 철저히 털어버리는 한편 북인도의 술탄국들까지 모조리 굴복시키는 위엄을 선보였다.

티무르의 원정은 1370년부터 1405년까지 35년간 지속되었는데, 초기 10년 가량은 동부의 동차가타이 칸국, 서부의 호라즘, 북부의 킵차크 칸국에 대해 이루어졌다. 당시 동차가타이 칸국의 카마르 앗 딘은 칭기즈 칸의 혈족인 황금씨족이 아니었음에도 칸을 참칭[14]하였고 이를 빌미로 티무르는 1370년 동차가타이 원정을 감행하여 이를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이어 1372년부터 1373까지는 호라즘 지방을 공략하였다. 이때 킵차크 칸국 동부(청장 칸국)의 군주 우루스 칸에 반발하던 토크타미쉬라는 인물이 도망쳐 와 도움을 청하자, 티무르는 이를 빌미로 1375년부터 1377년까지 킵차크 초원 원정을 단행, 우루스 칸을 패퇴시켰다. 1379년 호라즘의 쿵그라트 왕조와 다시 전쟁을 벌인 티무르는 수도 우르겐치를 함락하여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

1380년 이후 티무르의 관심은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들 미란샤를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하고, 1381년에는 아프간 지방의 헤라트를, 1383~84년에는 칸다하르를 점령했다. 이어 서부 이란으로 진출하여 마잔다란, 라이, 술타니야 등을 함락한 뒤 1386년 귀환했다. 그 사이에 자신의 후원으로 킵차크 칸국의 군주가 된 토크타미쉬가 타브리즈를 점령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자, 티무르는 그를 응징하기 위해 이란과 킵차크 등지에 대한 원정을 계속해 테레크 강 전투에서 토크타미쉬를 격파하고, 1395년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를 파괴했다.
파일:티무르 델리.png
파일:델리 티무르.jpg
티무르의 북인도 진격로 델리 전투를 묘사한 16세기 무굴 제국 삽화

그리고 인도로 관심을 돌린 티무르는 1398년 말, 북인도 술탄국의 수도 델리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 인도는 우상 숭배의 나라이자 재화의 나라였다. 이슬람에서 경멸하는 이교도의 나라였기에 이를 빌미로 지하드를 표방하여 쳐들어 간 다음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었다. 이른바 티무르식 성전. 그런데 정작 당시 북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는 델리를 수도로 삼은 이슬람 국가인 델리 술탄국이었다.

1392년부터는 서아시아를 목표로 소위 7년 원정을 단행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근거지를 둔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 세력을 격파한 뒤, 시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 세력을 몰아내고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1402년에는 오스만 술탄국과 전쟁을 벌여 앙카라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트 1세를 생포했고, 1404년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Chlebowski-Bajazyt_w_niewoli.jpg
티무르에게 패한 뒤 감금된 바예지트 1세를 그린 회화.[15]

오스만 술탄국을 쓰러뜨리고 난 다음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점령하여 유럽 정벌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지만 바이바르스가 이끌던 때와는 달라진 맘루크 왕조가 잔뜩 쫄아 사정을 하자, 같은 무슬림으로서 쳐들어가기 뭐해져서 방향을 동쪽으로 돌리게 된다.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명나라로 가는 도중에 1405년 2월 시르다리야 하반의 도시 오트라르에서 병사하여 무산되었다.

4.3. 급사, 그 이후

티무르가 앙카라 전투를 치를 무렵인 1402년, 동쪽의 중국 대륙에서는 영락제건문제 간의 대규모 내전인 정난의 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기회를 틈타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후손으로서의 (원을 장성 이북으로 몰아난 명에 대한) 복수심과 중국 대륙에 이슬람 국가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생각까지 들게 되어 동진을 개시하게 된다. 상대는 당시 정난의 변을 승리로 이끌고 황제에 즉위하여 후일 명나라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영락제. 허나 동정을 준비하던 티무르가 행군 도중에 사망하면서 끝내 이 세기의 대전은 벌어지지 않게 되는데, 때문에 소소한 if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16] 티무르의 사인은 한겨울에 무리한 원정을 한 탓에 병을 얻은 것이었다. 그것도 경솔하게 한겨울에 얼음물을 마셔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가 죽고 난 뒤 티무르 제국은 혼란기에 빠져들게 되지만, 그래도 바로 붕괴하진 않고 백 년 이상을 지탱했다. 사실상 티무르 개인의 탁월한 재능 하나로 세워진 제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존속기간도 사실 긴 편이다. 제국의 영토가 축소된 건 그 많은 원정을 치르면서도 뒷감당을 제대로 못한 티무르 탓이었고, 그나마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후손들의 능력 덕분이었다. 사마르칸트가 발전한 건 티무르가 보물들과 기술자들을 끌어 모은 것도 있지만 후손들이 이들을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후손들의 시대에는 주변 상대국들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가능하지만, 티무르의 시대도 그건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티무르의 시대에도 주변국이 마냥 약체들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먼저 킵차크 칸국토크타미쉬 칸은 처음에 티무르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청장 칸국의 칸으로 시작해 백장 칸국을 병합해 킵차크 칸국을 통일했으며 러시아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던 모스크바 공국을 털어버렸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침공도 막아냈고 중동 지역까지 영토를 넓힌 킵차크 칸국에선 중흥군주였다. 그리고 오스만 술탄국바예지드 1세도 아나톨리아 반도 상당수와, 불가리아를 정복한 정복군주였다.

그의 아들인 샤 루흐 미르자(Shahrukh Mirza)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티무르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그 아들인 울루그 베그(Ulug Beg) 또한 술탄인 동시에 뛰어난 수학자 겸 천문학자였다. 다만 티무르 제국은 티무르 사후부터 불안정했고, 샤루흐 미르자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각지의 반란들을 진압할 수 있었는데, 울루그 베그에겐 군사적 재능은 없었다. 그 때문에 재위 2년 만에 끔살. 티무르 제국은 샤루흐의 손자이자 티무르의 증손인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1469년 백양 왕조우준 하산에게 패하고 전사한 이후 분열되어 쇠락하게 된다. 그나마 호라산 지역은 다른 증손자 후세인 바이카라가 통합했으나 그마저 1506년 사망한 후 우즈베크 칸국의 샤이바니 칸이 침공하여 트란스옥시아나와 호라산을 장악하여 티무르 조는 멸망하였다. 다만 카불에 남아있던 티무르의 현손[17] 바부르는 바로 무굴 제국을 세우게 된다.

5. 칭기즈 칸과의 차이

5.1. 원정 방식의 차이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바로 원정 방식이다. 티무르는 대부분 원정에서 어느 한 곳을 확실하게 정복하지 않고 돌아갔다. 이 부분은 원정이라기보다 국가 규모의 노략질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 게다가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중동 지방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는 몽골보다 존재감이 작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위 혹평과 반대로 사마르칸트가 중심지인 티무르 제국의 수입만으로 정복한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에 두기 버거워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또 다른 의견으로 티무르가 원정을 행한 목적에 대해서 유의할 필요성을 환기하는 것이 있다. 이에 따르면 티무르의 초기 원정은 외부 세력을 절멸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당시 트란스옥시아나 내부에는 티무르 외에도 여러 부족 세력들이 존재했다. 칭기즈 칸의 시대에 몽골 고원은 자무카 덕분에 적을 절멸시키는 것이 이미 등장했었다. 그나마도 몽골 비사 등에 기록이 남을만큼 일반적이지 않았다. 반면 티무르의 시대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부족장을 죽이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짓이었다. 티무르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이들 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부하들을 키우려고 했다. 그 결과 티무르는 치세 중반에 차가타이 칸국의 대부족 2개를 해산시켰고, 그의 사후에는 나머지 부족들도 힘을 못 썼다. 역사에 이름만 겨우 올릴 정도.

후기 원정은 애초에 티무르가 정복할 의지가 없었던 땅과 정복하려 한 땅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티무르가 여러 차례 원정을 행했던 킵차크, 동부 이란은 여러 부족 연합체의 지배하에 있었다. 티무르는 초기 권력 장악 과정에서 부족 세력을 해체하거나 약화시키는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았기 때문에 굳이 이 땅을 세력화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부 페르시아는 두 번, 서부 페르시아는 최소 세 번, 러시아에도 두 번의 원정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무너진 국가는 의외로 적다. 오스만 술탄국, 킵차크 칸국, 차카타이 칸국 등 다른 칸국들, 델리 술탄국, 중앙아시아 일대의 여러 국가들은 전면전에서는 티무르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그가 휩쓸고 지나가자마자 연거푸 다시 일어서곤 했다.

점령해야 할, 또는 점령한 도시에 대한 태도도 달랐다. 칭기즈 칸은 살아 생전, 도시는 몇 번 본 적도 없고 방해되는 도시는 초토화시키는 유목민 생활에 익숙했다. 부하라가 그가 발을 들여놓은 유일한 도시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티무르는 사마르칸트 인근의 케슈(Kesh)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어떤 기록에서는 케슈 인근에서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케슈 인근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티무르의 가문이 아주 쇠락하여 케슈와 같은 도시에도 거주하지 못했다는 근거로 보는 학자도 있다. 티무르도 사마르칸트 안에서 지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며 전쟁 중이 아니라도 사마르칸트와 케슈를 오가며 지냈다. 어쨌거나 티무르는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도시인이었다.

또 칭기즈 칸은 일부 페르시아 측 사서에 보면 항복한 튀르크군을 칭기즈 칸이 죽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대체로 항복하거나 투항하는 적은 살려준 반면 티무르는 항복자도 모조리 학살했다.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했던 칭기즈 칸과 달리 티무르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자들 역시 죽였다. 하지만 칭기즈 칸을 따라 공예인이나 학자 등은 살려주었다. 그러나 정통성이 부족한 티무르는 학살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했다. 칭기즈 칸을 연상시키는 학살을 통해 몽골족 부하들의 신임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의 정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슬람 문화로의 도시 건설을 제외하면 약탈과 파괴에 집중되어 있었다. 티무르의 군대는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수입은 약탈에 의존해야 했다. 칭기즈 칸의 후예[18]답게 그 또한 엄청나게 잔인한 학살과 약탈의 명수였다. 칭기즈 칸처럼 해골로 탑을 쌓고 어린아이들을 말로 밟아죽였다.

사마르칸트의 건설은 그에 비해 페르시아무슬림 부하들의 신임을 얻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수도 사마르칸트의 역사도 칭기즈 칸은 파괴하고 티무르는 건설했다.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 티무르에 대한 책을 쓴 저널리스트 저스틴 마로치(Justin Marozzi)는 저서 티무르, 이슬람의 칼이자 세계의 정복자(Tamerlane: Sword of Islam, Conqueror of the World)에서 사마르칸트를 티무르의 애인처럼 묘사했다. 무슨 보물을 가져다줘도 만족하지 못하는 여인으로.

5.2. 정치적 역량

칭기즈 칸과 대비되는 점으로 티무르는 정복한 지역에 믿을 만한 대리인을 남기지 않았고 그리하여 반란이 계속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자의 권력에는 손을 안 댄 적도 있었다. 그 외의 수많은 정복 사업들은 사마르칸트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재력을 모으는 방도였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19][20]

확실히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의 발전에 많은 힘을 쏟았다. 하지만 정작 사마르칸트에 계속해서 오래 머무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 머문 게 2년 정도고, 나머지 기간은 정복사업에 집중했다고. 또한 사마르칸트에 돌아오면 사마르칸트에 지어놓은 정원들에서 지냈는데 이는 유목민들인 몽골의 풍습을 따랐기 때문이다. 즉 사마르칸트의 정원은 도시민인 이슬람계의 문화를 따름과 동시에 정원에서 막사치고 지냄으로써 유목민인 몽골의 문화도 따른 것이다.

티무르는 국정지도는 지도자에게, 종교지도는 종교지도자에게 맡겼다.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는 관례처럼 종교와 국정을 지도자 한 명이 통치했다는 걸 생각한다면 나름 파격적인 조치.

칭기즈 칸은 기반이 잡히고 난 다음에는 진두에서 지휘하기보단 부하들에게 맡긴 편으로 호라즘 정벌 때 부하가 고생하자 직접 가서 부하를 도와준 정도는 있다. 반면 티무르는 평생 진두에서 싸웠다. 한 번은 포위전 중 적이 "우리 둘 때문에 백성들이 고생하니 슬프다. 우리 둘의 결투로 끝장을 내도록 하자"고 말하자 진짜로 결투하러 갔다. 이때 부하들이 말렸지만 뿌리치고 적병들이 활로 쏴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문 앞에서 적에게 성에서 나오라고 요구했고, 적은 겁에 질려서 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티무르는 "자기 말도 못 지키는 놈은 살 가치가 없다"며 적과 그의 성을 갈아버렸다. 르네 그루세의 유라시아유목제국사에 따르면 우르겐치 성 공략전에서 발생한 일화라고 한다.

6. 평가

이런 정복자형 역사인물들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기 쉽지만, 티무르는 좀 다른 의미로 평가가 엇갈린다. 한편에선 "그냥 인간백정일 뿐"으로 치부하지만, 한편으론 "역사를 바꾼 인물인데 다른 인간들이 철저히 묻어버렸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35년간 대원정을 벌인 티무르의 목적은 몽골 제국이슬람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으로, 평생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중동을 돌며 정복사업을 단행하였다. 그가 무너뜨리거나 전쟁에서 이긴 세력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군사 강국이었다. 하지만 상대국이 대부분 몽골 제국 계열이나 이슬람 국가들이라서 이걸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예지트 1세에게 처음으로 보낸 친서에는 "넌 같은 무슬림이라 지금까지 봐줬는데 왜 지금 와서 덤비니?"라는 식의 내용이 적혀있었다.[21]

칭기즈 칸이 자신의 적들의 몰락을 그들의 단점으로 돌린 것처럼, 티무르도 비슷하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알레포의 카디(이슬람 법관)에게 티무르는 "과인은 결코 잔학한 자가 아니오. 알라께서 과인이 치른 모든 전쟁에 대해 알고 계시오. 과인은 학살자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 과인의 적들이 겪는 고난은 결국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것을 알라 앞에 맹세하오." 정도의 말을 했다는 소리가 있다.

하지만 이것과 별개로 이라크, 이란, 튀르키예, 인도처럼 그에게 직접 갈려나간 나라들 사이에서는 평이 매우 나쁜 편이다. 그래도 러시아의 경우, 자신들의 철천지 원수였던 킵차크 칸국을 박살내서 평가가 나쁘지 않다. 안 그래도 킵차크 칸국은 비틀거리던 신세였다가 그나마 토크타미쉬 칸의 등장으로 되살아나는 시점이었는데 티무르와 싸우느라 엉망진창이 되었다.

오스만 술탄국 정벌 당시 술탄바예지트 1세를 잡은 뒤 그의 앞에서 그의 아내와 딸들을 벌거벗기고 접대를 하게 했으며 그가 보는 앞에서 겁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다만 이건 세르비아 쪽의 얘기고 이슬람 쪽에선 잘 접대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바예지트 1세의 아내와 딸을 면사포를 씌우지 않은 채 하녀들과 함께 있게 해서 바예지트 1세가 열이 뻗쳤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런 악명높은 이미지가 나중엔 그의 조상인 칭기즈 칸에까지 번져서 칭기즈 칸의 악인화에 한 몫 하였다는게 잭 웨더퍼드의 주장.

6.1. 군사적 재능

군사적으로 탁월한 천재였는데, 체스 애호가였던 그는 체스를 통해 군사적 능력을 키웠고, 탁월한 군사전략과 전술은 기병을 활용한 기동전법과 현지의 무기와 전술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및 공포에 기반한 제압정책 등으로, 이 또한 칭기즈 칸의 그것과 유사하다. 또한 정벌을 나가기 1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고 그 동안 칭기즈 칸 못지 않게 첩보와 정보공작으로 상대방의 사기를 깎아먹는 데도 능했다. 칭기즈 칸이 몽골인들의 잔인성을 과장했던 것처럼 티무르도 출전하기 전에 그의 군대의 잔학함을 과장해서 소문을 퍼뜨려 상대의 사기를 꺾었다. 그의 군대를 아끼긴 했지만 봉급을 안 줘서 군인들의 수입은 약탈 뿐이었기 때문에 그의 군대가 잔인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화약 병기, 코끼리, 기병 등 자신의, 혹은 상대방의 전술적 요소들을 모조리 흡수하는 티무르의 탁월한 능력과 이렇듯 광대한 전선이 결합되었으니, 티무르 제국의 군대가 당대 중서부 아시아 최강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동유럽의 공포이자 신흥강국으로 성장하던 오스만 튀르크의 바예지드 1세도 티무르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이때 티무르는 전성기를 지난 노인이었다. 한미한 시작 이후로 제대로 된 세력을 갖추곤 난 뒤로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고, 오스만 튀르크맘루크 왕조가 복속하여 사실상 몽골 제국의 일 칸국 영토였던 서쪽 절반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그 강대함은 당시 유럽 국가들은 전혀 상대가 안될 정도.

이렇듯 티무르 시절 차가타이 칸국일 칸국, 킵차크 칸국 등의 잔재를 상당 부분 없앴으며, 서아시아남아시아의 여러 이슬람 세력도 줄줄이 개발살내버렸다. 게다가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에서 잘나가던 오스만 튀르크에게도 대패를 안겼다. '아직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이전'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술탄 바예지트 1세는 오스만 튀르크를 확고부동한 남동부 유럽의 패자로 만들어 오스만의 1차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인물이다. 티무르가 오스만을 갈아버린 이후 오스만은 공위시대를 맞이하여 10년 넘게 내전을 벌이며 잠시 팽창이 저지되었으나 메흐메트 1세무라트 2세가 수습한 이후 다시 한 번 도약하게 된다.

6.2. 우즈베키스탄에서

본래 우즈베크인들은 주치의 후손으로 티무르 제국을 몰아내고 그들의 국가를 세웠지만 현재 우즈베키스탄인들은 티무르를 국부 취급하고 있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우즈베크인들은 원래 유목민족이었는데, 소련이 정권을 잡고 우즈베키스탄을 장악하면서 공산주의에 바탕을 둔 국가관을 내세웠다. 그러다보니 정착 생활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적 사고에 따르면 유목민족은 취급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유목민족인 본인들의 조상보다 자신들이 정복한 땅의 조상인 티무르를 우대하게 된 것. 물론 티무르 본인도 유목민족 출신이었지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 생활에 익숙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칭기즈 칸 같은 철저한 유목민은 아니었다.

또한 티무르 제국은 그 문화적 역량이 극에 달했을 때 멸망해서 나라는 멸망해도 예술인이나 학자들은 그대로였고, 이 문화적 자원들은 그대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우즈베키스탄이 티무르 제국의 계승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내세울 인물이 국제적으로 티무르보다 유명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 점도 컸다. 소련 붕괴 후에 우즈베키스탄은 자신들을 홍보하고 국제 사회에서 우대받기 위해 국가홍보에 힘을 기울였는데, 티무르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었던 것. 티무르는 유목민과 도시민의 적절한 혼합과 문화 발전에 힘을 기울인 동시에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정복자라 정치적으로 선전하기에도 매우 유용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우즈베키스탄인들은 티무르의 후손들을 몰아냈던 역사에도 불구하고 티무르를 국부 취급하는 것이다. 근데 이때 홍보하면서 티무르가 몽골로부터 중앙아시아를 해방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가 사실이 아닌 걸 알았는지 나중엔 몽골 제국을 부활시키려 했다고 은근슬쩍 말을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대의 사마르칸트에는 소련 치하의 카를 마르크스 동상이 있던 자리에 티무르의 동상이 들어서있다.[22]

7. 중앙아시아에서의 계통 논쟁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4대 칸국 중 차가타이 칸국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차가타이 칸국은 본인이 티무르 제국을 건국할 때까지도 몽골 제국의 중앙아시아 정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바를라스 부족은 보르지긴 씨족을 이루는 부족 중 하나로 몽골에서도 알아주는 명문이었다. 칭기즈 칸의 출신 부족인 키야트 부족과 형제뻘인 혈통상의 이유와 몽골 제국의 개국공신들 중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사준사구 중 한 명인 쿠빌라이의 출신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지에서는 앞다퉈 자국의 영웅으로 경쟁하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7.1. 범투란주의 영향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사이에서 티무르를 놓고 유튜브 등지에서 벌어지는 키배는 사실 인터넷 시대 이전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정작 두 국가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국가였기 때문에 주된 논지는 티무르는 "자랑스러운 튀르크인들의 영웅"이며, 본인들이야말로 진정한 티무르의 계승자라는 맥락이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서에 기록된 티무르의 배경은 어느 방면에서 보아도 우즈벡, 카자흐가 아닌 몽골인, 좋게 봐줘도 몽골계 중앙아시아인이었다. 몽골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중국이 원나라 이전 몽골 제국을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중국의 역사왜곡의 원조격인 범투란주의로 바라보고 있다. 헝가리에서 시작된 범투란주의는 중국의 역사왜곡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태양어론과 같이 모든 언어가 튀르크어에서 왔으며, 과학적 근거 없이 자국사인 괵튀르크를 넘어서 한민족고구려뿐만 아니라 만주족, 몽골, 흉노 등의 모든 기마민족은 모두 튀르크인의 후예거나 튀르크인 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의 역사왜곡과 같은 정치적인 목적이 매우 크며, 일종의 국뽕을 이용한 국민들의 단합과 충성심을 기르는 목적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서는 티무르가 몽골의 바를라스 부족 출신으로 몽골 제국의 부흥과 명나라에 대한 복수심이 불탔다는 것이 학계의 주류가 되자 그가 튀르크어를 사용하였고, 스스로를 튀르크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몽골인이 아닌 튀르크인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7.1.1. 튀르크인 논쟁

7.1.1.1. 언어적 측면
몽골 제국의 확장은 얼핏 엄청나게 많은 몽골 기마부대가 전 세계를 휩쓴 것으로 보여지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정복 지역에서 몽골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단 1%도 넘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마저도 높게 쳐준 것으로, "몽골인이 없는 몽골 제국"으로도 농담이 오갈 정도의 처참한 인구 비율을 가진 나라가 바로 몽골 제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티무르의 바를라스 가문과 같은 몽골 귀족들은 통치를 이어가고 군대를 소집하기 위해서 현지의 언어와 종교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몽골어를 할 수 없는 수많은 튀르크인들과 현지인들에게 모두 몽골어를 가르치고 교육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몽골 제국이 현지에서 진행한 대부분의 활동은 현지 언어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난 티무르와 같은 2세대 3세대 이후의 몽골 귀족들은 몽골어가 아닌 현지 언어를 모국어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티무르는 튀르크어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어에도 능통하였기 때문에, 범투란주의의 논리에 따르자면 티무르는 튀르크인인 동시에 페르시아인이기도 한 것이 되니 자승자박이 따로 없다.
7.1.1.2. 유전적 측면
범투란주의자들의 또다른 주장으로는 티무르의 조상들은 튀르크인 여성들과 결혼을 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튀르크인 반 몽골인 반의 '투르코-몽골'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또다른 거대 민족 분류에 들어가는 페르시아인이 쑥 빠진 하나의 나사 빠진 가설에 불과하다. 과거로부터 우즈베키스탄 지역은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교역과 인구가 오가던 지역인데, 그곳에서 몽골 귀족들이 튀르크인들만 정확히 골라서[23] 결혼하고, 티무르가 몽골 반 튀르크 반으로 맞춰서 태어날 확률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비단 튀르크인과 페르시아인에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닌데, 당대 수도 없이 이뤄지던 정략결혼을 비추어 보았을때 티무르가 몽골인인가 튀르크인인가, 혹은 페르시아인인가 하는 논쟁은 아무 의미 없는 논쟁이 되는 것이다.
7.1.1.3. 결론
언어적, 유전적 분류가 의미없는 만큼 결국 남은 것은 티무르와 그의 바를라스 가문이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왔으며, 티무르가 무엇을 위해 싸워왔는가만이 그를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그의 가문이 통치를 위해 몽골 제국에서 차가타이 칸국으로 이주해 온 귀족 가문이었으며, 그는 스스로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내전에 빠진 몽골 제국을 통합하는 동시에 제국의 부흥에 힘썼다는 것이다.

실제로 티무르가 마지막으로 하고자 하였던 전쟁도 명나라와의 전쟁이었다. 몽골로 돌아간 북원과 힘을 합쳐 명나라에게 복수하여 옛 몽골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당시의 튀르크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중국의 명나라에 복수를 해야 할 이유는 몽골과 관련되지 않는 한 전혀[24] 없었다.

8. 그 외

젊은 시절 전투 중 오른팔과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그에게 부정적인 기록에서는 양을 훔치다가 양치기의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반신마비가 되었다고 한다. 열전에서 티무르는 자신이 정통성이 없다는걸 알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는 걸 꺼리는 걸로 보여지며 그의 신체적 장애에 대해선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는것으로 묘사된다. 이런 절름발이로 하여금 세계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름발이 증세를 고칠수 있는데도 알라의 뜻이라며 치료를 거부한다. 앞에서 언급된 열전은 반쯤 판타지에 가깝지만 원래 이런 저서들은 그 인물이 어떻게 평가받았는가 등을 알아보기 위해 이용한다.

이 부상 때문에 그의 적들은 티무르를 멸시할 때 "절름발이 티무르(Tīmūr-e Lang)"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영어에서 티무르를 부르는 말인 "태멀레인(Tamerlane)"은 이것이 변형된 것이다. 어찌되었든 여기서 유래된 별명이 루스벨트 이전 세계 최강의 절름발이. 다만 당대의 공식 기록인 승전기에서는 티무르가 절름발이였다는 기록이 없어 그가 진짜 절름발이였는가에 대해 잠시 논란이 있었으나 소련에서 행한 유골 조사기록이 명백한 증거로서 기능해서 현재까지는 절름발이라는 의견이 대세. 승전기에서 절름발이 관련 내용이 없는 것은 후손들이 티무르를 신격화하면서 조상의 단점을 감추기 위해[25] 적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8.1. 체스 매니아

티무르는 체스를 즐기는 온화한 인물로서 문화 진흥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체스를 통해 군사학을 연마했다고도 한다. 그의 집권기 사마르칸트는 당대 최대 규모의 대도시로 성장하고, 문화 또한 발전한다. 여담으로 말로우의 희곡 템버레인에서는 "내 고향 사마르칸트는 대륙의 가장 먼 곳까지 유명해지리라. 그곳에 나의 왕궁이 세워질 터인데, 그 빛나는 탑으로 인해 하늘이 무색해지고 트로이의 탑이 떨치는 명성도 지옥으로 떨어지리라."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상당한 체스 매니아로 새로 점령한 마을을 왕과 룩을 동시에 공격해서 체스 한판 이기고 샤루키아(왕:Shah+룩)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막내아들 이름은 아예 샤루흐(룩). 오죽하면 기존의 체스는 재미없다고 자신이 고안한 말 몇 가지를 더 추가하고 승급의 방식을 바꾼 '티무르 체스'라는걸 만들었다. 다만 학자에 따라선 당시 이미 유행하던 형식이었다는 말도 한다.

8.2. 저주

그와 관련된 괴담이 있는데, 티무르의 무덤에는
whoever would dare disturb the tomb would bring demons of war onto his land
누구든지 감히 내 무덤을 건드리면 전쟁의 악마가 그 나라에 닥칠 것이다.
…라는 문구가 있었다[26]고 한다. 세월이 흐른 먼 훗날에 소련 고고학자들이 알리셰르 나보이 탄생 500주년을 맞아 티무르의 무덤을 열었는데, 그 날이 하필이면 1941년 6월 22일이였고, 이에 기절초풍한 소련인들이 관뚜껑을 납으로 봉인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이 도시전설 자체는 실화로, 티무르와 독소전쟁 발발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기묘하게 맞아떨어지다보니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예이다.

1984년에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촬영 과정에서 당시 발굴에 참여한 촬영기사인 영화감독 말릭 카유모프(Malik Kayumov, 1912~2010)를 인터뷰하면서 나온 증언이 있는데, 다큐멘터리에 나온 그의 증언을 요약하면 대략 이러하다.
촬영이 시작된 당일 찻집에서 쉬고 있을 때 초라한 모습을 한 노인 3명 중 1명이 아랍어[27]로 쓰여진, 위 인용문과 비슷한 구절이 적힌 책을 들이대며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조사단의 고고학자들을 불러왔고, 그들은 노인들을 지팡이로 쫓아버렸다.[28] 그리고 무덤을 연 것이 1941년 6월 22일이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무덤 주위에는 호기심에 천 명도 넘는 군중이 모여있었다. 더운 계절이라 새벽 5시[29]부터 발굴을 시작했고, 대리석 판자를 걷어내자 절반 이상 썩은 나무 관이 나왔고 곧 티무르의 유해가 보였다. 인류학자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게라시모프(Mikhail Mikhaylovich Gerasimov, 1907~1970)가 관 속으로 내려가 티무르의 뼈를 하나씩 주워 위로 올렸다. (…) 무덤의 학술조사는 그 날 하루로 끝났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이튿날에 듣고 놀랐다. 발굴을 마친 뒤 나는 24일 타슈켄트로 돌아갔고 바로 독소전쟁 전선으로 출발했다.

이후로 독소전쟁에서 한동안 소련이 불리한 형국에 있었는데, 발굴조사가 끝나서 무슬림 전통 장례식을 거쳐 티무르를 재매장하였고,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밀어붙이게 되며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게 된다. 어쨌든 이 발굴조사로 티무르가 젊었을 때 낙마해서 장애를 입었다는 것과 티무르의 혈통은 페르시아계와 몽골계가 섞인 황백혼혈이라는 점, 이외에도 당대 기준으로는 꽤 키가 컸다는 점 등 여러가지 신체적인 특징이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초상화도 그릴 수 있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2015년 12월 20일에 이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9. 대중문화에서

아틸라처럼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및 동유럽에서 사람 인명으로 자주 쓰인다. 파생어인 타메를랑(Tamerlan)으로도 쓰이지만 원어로도 쓰이는 편. 예를 들면 우즈베키스탄의 축구선수 티무르 카파제. 상술한 1980년대 NHK의 <실크로드> 촬영팀은 티무르의 고향 마을에서 티무르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 교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소련에서는 피오네르 산하의 봉사단체로, 티무르 소년단 운동(Тимуровское движение)이라는 게 있었다. '티무르'라는 청소년과 그의 친구들이 선행(善行)하는 내용의, 소련 아동문학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의 1940년작 소설 <티무르 소년단>이 영화화도 되는 등 인기를 얻자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작가의 아들 티무르 가이다르가 모티브인 것으로 보이는데 후에 소련 해군제독이 된다. 그의 아들은 1990년대 초 혼란기에 러시아 총리 권한대행이었던 예고르 가이다르.

징기스칸 4》파워업키트에서는 시나리오 4 서역을 출발한 늑대에서 주인공급으로 등장. 시나리오 2에서도 등장은 한다. 좀 시간이 걸려야되지만. 시나리오 설명부터가 티무르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시나리오 시작시점의 능력치는 정치 80, 전투 98, 지모 91, 특기 건설, 문화, 등용, 전투 모든 특기를 가지고 있고, 병과 적성 보병 S, 궁병 A, 기병 S, 수군 E이다.

칭기즈 칸과 능력치 차이가 거의 없다. 아무래도 자칭 후손임을 인식한 듯. 이벤트를 몇번 보면 모든 능력치가 90 이상에 내정과 전투는 100을 찍는다.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는 정치 90 전투 100 지모 100으로 작중 인물들 중 가장 능력치가 좋다. 거의 혼자서 세계를 쓸어버릴수 있는 수준의 능력치이다. 거기다가 처음부터 모든 전투 특기를 가지고 있고 이벤트 다 찍은 티무르는 여포의 무력과 제갈량의 지력을 갖춘 존재.

그렇지만 명나라가 군사력은 훨씬 더 강력하다. 거기다가 칭기즈 칸과 비교하면 부하들이 너무 부실하기 때문에 재빨리 사마르칸트를 전술의 도시로 만든 다음에 등용으로 좋은 인재들을 뽑는 것이 좋다. 근처의 오스만 술탄국을 물리치고 운이 좋게 바예지드 1세가 등용되거나 킵차크 칸국에서 토크타미쉬를 물리치고 부하로 등용하면 좀 쉬울지도. 하지만 배신한 토크타미쉬를 죽여야 티무르의 능력치가 더 오른다는 문제가 있지만...안 그래도 이미 강한 인물인지라 딱히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부하들이 부실한 나머지 티무르에게 능력치를 몰빵한 모양.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부하들 없어도 충분히 혼자서 세계를 쓸어버릴 수 있긴 하다. 또한 티무르가 생존했던 시기 중앙아시아 지역은 적지 않은 군소국가가 난립하여 티무르에게 저항하거나 위기에도 몰아넣었던 세력이 적지 않았지만, 게임에서는 이 국가들이 전부 구현되지 않아서 의외로 쾌적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미디블2: 토탈 워》에서의 티무르 제국의 군대는 이벤트성이긴 하지만 탱크에 해당되는 코끼리 포병을 가지고 있어 사실상 최강의 군대. 덕분에 몽골과 더불어 튀르크 팩션의 난이도를 극악적으로 올려주시는 원인 중 하나다. Game FAQs의 공략 중에는 몽골은 두번째로 끔찍한 악몽이라고 해놓고 티무르 제국을 묘사할때 최악의 악몽이라고 써놨다. 물론 첫째 웨이브에서의 출연 순서상 칸은 아니지만 티무르 본인도 등장한다. 대신 이름도 듣지 못한 사람이 칸으로 나와서 가끔 유저가 티무르 본인을 매수하는 충공깽한 일도 일어난다.

에드거 앨런 포가《Tamerlane》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시를 썼다. 그 외에 크리스토퍼 말로가 템버레인이라는 제목의 희곡을 쓰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스키타이인으로 나온다. 사실 유럽인들은 스키타이인과 튀르크인을 잘 구분 못했다는 설도 있다. 페르시아 제국부터 시작해서 터키와 아프리카까지 정복하고 마침내는 자신이 신보다 위대하다며 쿠란을 불태우지만 결국 그것이 저주가 되어 사망한다는 내용이다. 쓰일 당시 영국에서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했고 티무르는 거기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이 작품은 특유의 무신론적인 요소 와 바예지드 1세의 아내의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과 같은 잔인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티무르는 자신이 전쟁의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얘기한다. 크레토스? 거기다가 아내가 죽자 신을 저주한다. 티무르는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무신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외에《타메를라노(Tamerlano)》라는 제목의 오페라도 있다. 하지만 극중 위치는 악역. 바예지드 1세를 물리치고 바예지드 1세의 딸과 결혼하려 하자 그 딸과 샤바샤바하던 그리스 왕자와 원래 티무르와 결혼하기로 되어있던 이레네라는 여인이 끼어들어 방해하게 된다는 얘기.

그의 별명을 딴《테머레인 체스》라는 변종 체스도 존재한다. 기존의 체스에 낙타, 공성병기, 기린 등의 새로운 말이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캠페인이 나왔다. 자세한 것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캠페인 공략/티무르를 참고. 구글에서 'Age of empires 2 the last khans art'로 이미지 검색을 하면 나오는 라스트 칸의 자켓 또는 팬아트에 해당되는 아트에서 중앙에 있으며 투구를 쓰고어깨 위에 외투 비슷한 것을 걸치고 있는 인물이 티무르다. 티무르의 우측에 검을 든 인물은 이바일로, 티무르의 좌측에 활을 들고 있고 쿠만 마스크를 쓴 인물은 코티얀(쾨텐) 칸이다. 모두 결정판에서 개인 캠페인이 있다.[30]

아래는 티무르를 소재로 한 은행광고. 지금은 사라진 은행이지만 역사를 소재로 많은 광고를 찍었고, 아래의 동영상도 그 중 하나.
14세기의 티무르 제국.

티무르의 명령으로 그의 전사들은 전장에 나갈 때 길에 돌을 쌓아두어야 했다. 언덕은 점점 커져갔다.
불과 승리가 있었다. 그 후에 전사들은 돌아오며 그들의 돌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남겨진 돌들이 있었다.
티무르는 마지막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는 무거운 돌들을 들고 오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이름들을 기억하며.

티무르.
세계의 역사.
임피리얼 은행.

《몽골 사용 설명서》를 집필한 작가 두눈뜬왕의 차기작《티무르 사용 설명서》에서 주인공인 고려의 왕족 출신이자 환생한 현대인인 왕 타르칸의 주군이자 장인어른으로 등장한다. 첫 등장은 토크타미쉬의 부하를 쓰러트린 타르칸을 칭찬하면서 자신이 그대의 정당한 왕좌(고려왕)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한 걸 잊지 않았다고 말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여기서는 승전기의 설을 따라 1327년생으로 설정되어 최신화 기준으론 이미 60대 노인인 것으로 묘사되며 자신을 닮은 모계 황금씨족이자 전장에서 엄청난 무력을 보이는 타르칸의 모습에 감탄하여 그에게 자신의 막내딸을 주고 고려 왕위를 되찾아 줄 것을 약속하면서까지 붙잡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주인공의 활약으로 원역사보다 빠른 페르시아 장악과 토크타미쉬 제거를 이뤄냈으며 원역사보다 10년이 빠른 1391년부터 동방 원정을 위한 준비를 진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1398년부터 동방 원정을 시작 섬서성과 양양성을 정복하고 건문제의 중앙군과 영락제를 연이어 격파했으나 전투 중 낙마로 인한 합병증으로 원역사보다 5년 빠른 1400년 사망한다.

프랑스 영화《울프 콜》에서 이슬람 테러집단이 러시아 부패 장성에게서 밀구입한 SSBN 함명으로 '티무르 3호'라는 함명이 나온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 소설 고양이, 문명에서 쥐 방면의 대장 역할로 등장한다.

10. 관련 문서



[1] 몽골어로 을 의미하며, 칭기즈 칸이 등장한 13세기 이후, 그의 본명인 테무(철)진(~는 사람) 중 '태무-'의 원형이 테무르이기 때문에 몽골 영향권에 들어간 모든 지역에서 매우 인기 있는 이름이 되었다. 몽골계 황족 계층에서도 물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름 중 하나이며, 몽골 제국 대칸 중에서도 1대, 6대, 10대, 12대, 15대, 17대, 21대, 22대, 23대 대칸까지 무려 9명의 대칸의 이름에 테무르가 포함되었다. 대칸이 아닌 황족과 군인까지 따지면 당대 테무르(철)의 의미를 포함한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몽골에서 차고 넘쳤다. 심지어 몽골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고려의 공민왕과 몽골의 다루가치였던 태조 이성계의 조부(이춘)까지도 몽골어 이름에 테무르를 포함하여 작명하였을 정도이다. 여담으로, 청나라의 건국자인 누르하치의 6대조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또한 몽골의 영향으로 지은 뭉케 테무르라는 이름이다.[2] 몽골어: ᠳᠣᠭᠤᠯᠤᠩ ᠲᠡᠮᠦᠷ, 더걸렁 테무르
페르시아어: تیمور لنگ, 테무리 랑
영어: Tamerlane, 태멀레인
[3] 후일 술탄에 오르는 후세인 바이카라의 조부 (1356 ~ 1394)[4] 티무르의 공식적인 후계자이던 마흐무드 술탄과 피르 무함마드의 아버지 (1356 ~ 1376)[5] 티무르 제국의 2대 군주 칼릴 술탄의 부친이자 무굴 제국의 창건자 바부르의 고조부 (1366 ~ 1408)[6] (1377 ~ 1447)[7] 현명한 자[8] 현대 몽골어로는 조선의 '양반'과 같은 어감의 귀족 계급으로 인식된다.[9] 몽골에서 장군을 이르는 말로, 일종의 작위[10] 티무르와 같은 이름이 포함된다. 현대 들어서는 다르게 표기되고 있으나, 당대에는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티무르와 테무르를 구분하는 일은 없었다.[11] 같은 보르지긴 씨족이라도 칭기즈 칸의 후손과 그 외에는 격에서 차이가 있었다.[12] 잭 웨더퍼드가 지은《칭기즈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책의 평중에는 "칭기즈 칸만큼의 불행을 극복하고 승리한 다른 예는 거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칭기즈 칸의 젊은 시절은 암울함으로 점철되어 있다.[13] 이를 몽골 학계에서는 제국 내의 힘겨루기 내전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14] 이는 명분으로써는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강력한 명분이었다.[15] 지팡이를 짚은 수염 난 남자가 티무르고, 앉아 있는 노인이 바예지트 1세다. 실제로는 당시 티무르가 고령의 노인이었고 바예지트가 중년이어서 연령이 잘못 묘사된 그림이다.[16] 티무르 제국의 역사서인 《승전기》에는 영락제가 "너 7년 동안 나한테 한 번도 조공 안 바쳤더라? 죽을래?"라고 말하자 티무르가 "밀린 7년치 내가 직접 갖다줄게."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17] 손자의 손자[18] 혹은 그렇게 자처하는 자[19] #[20] 근데 이러한 비판은 티무르에게는 억울하다. 왜냐하면 그가 태어났던 곳 자체가 몽골계 국가와 이슬람 국가가 자리잡은 서아시아이기 때문. 애초에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 칸도 자기들과 비슷한 몽골계 부족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을 멸하고 몽골 초원을 통일해 몽골 제국을 세웠다. 거기다가 기존의 이슬람 국가라고 저희들끼리 잘 지낸건 아니라서 호라즘 왕조의 무함마드 2세는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호라즘 왕조를 크게 넓혔는데 그런데 그의 상대한 국가 대부분은 이슬람을 믿는 국가였고 그나마 서요, 몽골 제국은 확실히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나라는 아니긴 했으나 서요의 경우 지배층만 이슬람을 믿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슬람을 믿었다.[21] 이 친서에 대해 첨언하면 오스만을 비롯해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에 할거해 있던 여러 튀르크계 공국들은 룸 술탄국에서 갈라져 나갔는데, 각지의 지방 세력들이 독립해나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룸 술탄국이 몽골의 침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티무르의 논리는 '한때 아나톨리아 반도를 일 칸국, 즉 몽골이 통치했으니 이제 내가 통치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 사실 티무르가 주장한 전쟁 명분의 대부분은 지하드였다.[22] 또 다른 국부이자 다른 동상의 모델은 우즈베키스탄 최고의 시인 알리세르 나보이.[23] 그마저도 혼혈이 이뤄지지 않은 튀르크인. 물론 그런 인류는 존재하지 않는다.[24] 괵튀르크가 중국과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명분이 있다고 하는 범투란주의자들도 있으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1405년을 기준으로 봐도 무려 661년전 일이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25] 절름발이라는 것은 명백한 단점이니[26] 는 전승이 전해졌다.[27] 아랍 문자로 쓰여진 다른 언어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증언을 따름.[28] 이후 그는 그 노인들과 책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을 유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29] 이 시각을 사마르칸트 기준이라 가정했을 때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브레스트는 대략 새벽 2시경이었다. 전쟁은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30] 티무르 - 타타르, 이바일로 - 불가리아, 코티얀 칸 - 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