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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23:42:42

기병

1. 개요2. 역사3. 역사상 기병의 장점 및 단점
3.1. 장점3.2. 단점
4. 유명한 기병대5. 기병으로 유명한 인물들, 혹은 기병 출신인 유명 인물들6. 미디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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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기병4.jpg
설리번 윌리엄 홈즈(Sullivan William Holmes) 작,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1898년
영국 육군의 로열 스콧츠 그레이즈(Royal Scots Greys) 기병대[1]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군기를 빼앗고 있다.
파일:external/www.cavhooah.com/Cav-Branch-Insignia-300x158.gif
미합중국 육군 기병 병과 휘장. 기병용 외날도 세이버 두 자루를 교차시킨 모양새다.
현재는 미 육군 기갑, 공중강습, 기계화보병 등의 부대 중 기병 부대에서 개편된 일부 부대가 전통 계승 차원에서 전투 병과 인원들이 해당 휘장을 사용한다.
기병은 전투 전에도, 전투 중에도, 전투 후에도 유용하다.[2][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4]
언어별 명칭
한국어 기병; 말탄이[5]
언어별 명칭
한문 [6]
영어 Cavalry

기병은 육군에 존재했던, 군마에 탑승한 채로 싸우는 전투병과다. 똑같이 말을 타더라도 이동을 위해서만 말을 사용하는 보병 병과 장교, 기마보병, 포병, 수송 병과 등은 기병이 아니다. 화기의 위력이 충분치 않고 냉병기가 효과적이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을 타고 싸우는 사전적 의미의 전통적인 기병은 현대에 와서는 의장대기마경찰과 같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사라졌으나, 이들의 역할은 기술 발달로 육군이 기계화되면서 등장한 기갑 병과와 육군 항공대, 일부 수색대가 인계받아서 수행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의 여러 기갑부대나 육군 항공대는 과거의 기병 병과의 전통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타는 것이 말에서 기갑차량이나 항공기가 되었을 뿐 이전에 기병이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이들을 현대의 기병이라고 봐도 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기마보병의 경우에도 군대에서는 기계화보병차량화보병이, 경찰에서는 싸이카가 그 역할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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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상 기병의 장점 및 단점

3.1. 장점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 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을 타고 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나는 기병들이 보병 대열의 중앙에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창을 들고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보병들이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자, 그들은 전선 곳곳에서 동시에 돌격을 시작했다. 한 부대는 우익, 다른 부대는 좌익, 그리고 세 번째 부대는 중앙으로 돌격해 나갔다. 우리 군사들은 그들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중앙에 있었는데, 많은 군사들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가장 가까운 사단인 좌익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좌익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우익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그들이 좌익과 중앙보다 더 비참하게 도주한 것을 보았다.
바하 앗딘, 『술탄의 일화와 유수프의 공덕』[7]
왜적철환(鐵丸)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 이 적병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아서 다른 기예(技藝)는 없고 단지 궁시(弓矢)와 전마(戰馬)만이 있을 뿐인데, 그 궁시는 사거리(射距離)가 우리 군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다. 다만 그들의 전마는 힘이 매우 좋아 치달리며 진격하기에 적격이라서, 순식간에 아군(我軍) 속으로 돌입(突入)하기 때문에 아군이 저절로 그 위세에 눌려서 무너지곤 한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와 전투를 벌일 적에 접전할 때마다 꼭 패하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그들의 전마를 막을 기구를 설치하여 돌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군의 마음을 안정시켜 동요되지 않게 하고는 꿋꿋이 서서 사격을 하게 하면, 적병이 진입을 하려다가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지체하며 머뭇거릴 것이요, 그러는 사이에 선봉(先鋒)이 모두 죽으면 뒤에 오는 자들도 모두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이 분명하니, 그들이 도망치는 기회를 이용해서 추격하며 사격한다면 크게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조익, 『포저집』
기병의 전성기였던 전근대시기, 기병은 아래와 같은 강점으로 인해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가졌다. 크게 분류하자면 하나는 충격력, 다른 하나는 기동력이다.
온갖 날붙이와 화살촉이 스쳐 지나가는 전쟁터에서, 딛고 선 대지마저 적들이 뒤흔드는 상황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병사는 없다. 멀리서부터 돌진해 오는 기병대의 위압감은 상상 이상으로, 시각적인 위용뿐 아니라 소음, 특히 땅이 울릴 정도의 진동은 충분히 훈련받고 준비된 보병이라도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9][10] 역사에 기록된 전투 묘사를 보면 기병대가 돌진해오는 것만으로도 비숙련보병들은 사기가 무너져 그대로 패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기병 돌격에 대열이 무너지면, 거의 대부분은 그걸로 끝이었다. 대열이 무너진 구멍으로 기병들이 계속 돌파해 들어오며 보병대의 내부, 후방, 측면을 정신없이 타격하기에, 아무리 정예보병이라 할지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진형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11][12]
기병의 돌격이 전투 전체의 전황을 결정지은 사례 중 하나를 들자면,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 전쟁을 벌이던 와중인 1578년 1월 31일에 벌어진 젬블루(Gembloux) 전투에서 2만 5천 명의 네덜란드 독립군은 불과 1200명의 스페인 기병대가 돌격하자 공황 상태를 일으키며 무너졌고 그 결과 무려 1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완전히 참패하였다.[13] 반면 승리한 스페인군의 사상자는 고작 20명에 불과했다! 이건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엄연히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다. # 이 밖에도 십자군 전쟁의 람라 전투나 몽기사르 전투 등에선 불과 수백기의 기사들이 수만의 이슬람 보병대를 격파했었고 17기의 금나라 기병이 2000의 송나라 보병대를 격파하는 등 기병의 엄청난 전투력을 증명해주는 사례는 동서양을 통틀어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동일한 역할을 전차나 일부 장갑차대체한다.
그런 역할만큼 위험성도 컸다. 기동력과 돌격력을 살려 공격력을 극대화하는 대신 방어력이 그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기병이라는 병종의 약점이었다.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메이지 시대 일본 육군에 기병이라는 병종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육군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자리에서,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박살내 버린 다음,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놀란 학생들한테 보여 주면서 "기병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한 일화가 있는데, 적에게 기동력을 살려 타격을 가하는 것이 기병의 궁극적인 역할이고, 그러기 위해 방어력을 버리는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병종이 기병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근대 이후부터 대기병 전술과 화기가 발달함에 따라 보병과의 정면승부는 기병에게 점차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병은 기동력을 가지고 적의 취약점을 타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결론적으로 기병 전력이 우세한 쪽은 열세한 쪽에 비해 전장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기병은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적의 취약점인 측면이나 후방을 우회하고 돌파하는 망치의 역할로서 널리 운용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적의 정면은 가장 전투력이 강력하나 측면과 후위는 상대적으로 훨씬 취약하다. 기병은 기동성을 살려 적의 취약점인 측후방으로 우회하고 돌파하는 것, 즉 포위섬멸을 유도할 수 있었다. 물론 보병으로도 가능하나 속도가 기병만큼 빠르지 않아 효과가 떨어졌던 반면에 기동성을 갖춘 기병은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에 취약점인 측후방을 신속하게 우회하고 돌파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기병은 대개 양 측면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측 기병 역시 보통 같은 방식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기병의 제일 우선시되는 임무는 적 기병을 격파하여 아군의 측면을 엄호하고 동시에 적의 측면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밖에 정찰력에서도 우위를 점하며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거나 약탈을 할 때도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고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할 때도 훨씬 신속하며 위기에 빠진 아군을 도와주러 갈 때도 훨씬 빠르게 갈 수 있고 심지어 전황이 불리해 후퇴할때조차 보병은 기병에게 잡히지만 기병은 보병을 따돌리고 탈출할 수 있는 등 직접적인 전투력을 빼고도 기동력이 가져다주는 이점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실제로 1524년부터 1526년까지 독일 전역에서 일어났던 독일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12~15만 명이나 되는 많은 병력 수에도 불구하고 훨씬 적은 수의 귀족 연합군인 슈바벤 동맹군한테 패배하였는데, 그 이유는 기병 때문이었다. 농민군은 기병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으며, 어쩌다 있는 극소수의 기병들도 정찰용으로만 썼지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동성에서 창기병을 내세운 슈바벤 동맹군에게 밀려서 패배하였던 것이다.
차량과 항공기가 발달하기 이전에 적정파악에는 기병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적 역시 당연하게도 기병 등으로 척후대를 구성하여 정찰과 정보수집에 나설 것임으로 적의 정찰부대를 사전에 미리 제거하거나 쫓아내는 차장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정찰과 차장활동은 통상 소규모 제대가 산개하여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정찰대만으로는 대응하기 힘든 규모의 적을 만난다면 신속히 접촉을 끊고 이탈해야 했다. 반대로 정찰대만으로도 상대할만한 규모의 적과 만났다면 신속히 집결하여 적을 제거하거나 쫓아내야 했다. 따라서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이 이런 임무를 맡기에 제격이었다. 차장활동은 적으로부터 아군 주력부대의 규모나 위치, 의도나 이동방향 등을 은폐할 수 있고 잘만하면 아예 은폐를 넘어 적을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교란시켜 적이 아군의 의도를 오판하게 만들 수도 있다. 반대로 정찰을 통해서는 적의 정확한 규모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기병을 적절하게 운용한다면 적에게 의도치 않은 기습을 받을 가능성을 낮추면서 동시에 적에게 기습을 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따라서 기병은 본격적인 결전에 앞서 승리의 여건을 조성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결전이 끝난 이후에도 기병의 역할은 중요했다. 결전에서 패배한 경우 패자측은 잔존병력의 전력을 유지한채 적과의 접촉을 끊고 전장에서 이탈하여 한번의 전투에서의 패배로 주력이 소멸되는 대참사만큼은 피해야했다. 반대로 기병의 임무는 퇴각하는 적의 이러한 의도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저지하여 전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보병으로도 추격이 가능하긴 하지만 적이 퇴각하는 시점에서 충분한 기병대가 있다면 아예 퇴각하는 적을 앞질러 퇴로를 차단해버리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런 대전과는 흔하게 일어나진 않았지만, 적을 계속 추격하며 접촉을 유지하며 적이 재집결하여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계속 압박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적에게 손해를 강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도 충분한 기병 예비대를 유지하며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할 때까지 신중히 사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이유에서 앞서 소개되었듯이 나폴레옹은 기병이 전투 이전에도, 전투 중에도, 그리고 전투 이후에도 중요하다는 말로 기병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척후와 차장 그리고 적 추격은 현대전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다. 오늘날에는 이런 임무는 거의 기계화부대의 역할이 되었다. 전차와 장갑차가 사실상 기병의 후예라고 불리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통신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구두와 수신호, 깃발이나 악기 등으로 병력을 통제해야 했는데 전쟁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이마저도 한계에 부딪쳤다. 따라서 기병을 통한 전령이나 명령전달, 보고가 이루어졌고 때로는 이러한 요인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기도 했다. 대분란전이나 점령지에서의 치안유지에도 기병은 기동성을 살려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 넓은 지역을 커버할 수 있었다. 또한 점령지에 분산되어 주둔하더라도 필요시에는 신속히 집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유용했다.

이렇듯 기병은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갖기에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 역할을 담당하는 등 핵심전력으로 분류되어 왔다. 보병으로도 망치 역할을 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정통 농경왕조처럼 기병전력이 부족한 경우에나 어쩔 수 없이 택한 것이고, 언제 어디서나 망치 역할로는 기동력과 충격력이 있는 기병을 더 선호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심지어 한니발 같은 전쟁사상 최고의 명장조차 기병전력이 상대보다 열세인 경우에는 패하기도 했다.

3.2. 단점

이토록 강력한 기병이지만, 많은 단점도 있다.
또한 먹이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것도 아니다. 이 밖에도 군마 운용에는 온갖 전문인력들이 필요했다. 대표적으로 수의사편자공이 필요하고 훈련에는 당연히 전문 조교사가 필요하며 또한 말이라는 동물이 인간의 개량을 거치며 온갖 이유로 죽는 생각 이상으로 연약하고 섬세한 동물인지라 뜬금없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말이 죽는 사태를 막으려면 마필관리사(구무원)가 하루종일 다수의 말과 붙어있어야 한다. 따라서 보급의 양만 많을 뿐 아니라 체계까지 복잡해진다. 지원인력과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면 군마 손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곤 했다. 이는 아래에서 후술할 군마 보충과 양성이 어렵다는 점과 맞물려 군마 부족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곤 했다.
결론적으로 기병, 특히 군마를 전투가능 상태로 유지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가령 흉노와의 전쟁을 위해 30만 명의 기병을 유지했던 한나라의 경우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의견이 많긴 하지만 아무튼 매우 많은 기병을 운용했음은 분명해 보이는데, 평시에 식량을 포함한 기병1기의 유지 비용은 보병의 8.7배에 달했고, 이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예산은 1년 총 세익의 2.18배에 달하였다.[23][24] 기병의 재정을 연구한 창춘수 교수에 의하면, 전시에는 감가상각이나 소모품 비용이 급증하므로 유지비는 평시의 저것보다 증가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4. 유명한 기병대

5. 기병으로 유명한 인물들, 혹은 기병 출신인 유명 인물들

6.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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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스코틀랜드산 회색 군마로 무장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다만 이들은 이 돌격 이후 프랑스 창기병대의 반격을 받아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이 전투에서 더 이상의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이들을 이끌던 폰슨비 소장도 이때 전사했다.[2] 전투 전에는 척후병으로서 주변 정찰 및 진격로 확보를, 전투 중에는 상대방 기병에 대한 견제와 요격, 진격해오는 적 전열 보병들에게 방진을 강요하여 아군 포병 화력 밀집도 극대화, 또 상대 포대 습격이나 빈약한 적 보병 전열에 대한 직접적 강습 및 돌파등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으며 전투 후에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며 전과 확대를 할 수 있다. 물론 패전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기병 예비대가 있다면 추격해오는 적을 교란시킬 수 있다.[3]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시대에는 이전에 비하면 보조적이지만 여전히 기병이 다양한 상황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기병 병과가 생겨났고 이들은 전장의 상황에 맞게 많은 활약들을 할 수 있었다.[4] 나폴레옹의 휘하에는 조아킴 뮈라라는 뛰어난 기병지휘관이 있었고 아일라우 전투에서 프랑스 기병대 1만 1천 기의 돌격은 제2차 빈 포위전에서의 윙드 후사르 1만 8천 기의 돌격 다음가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으로 남았다.[5] 후자는 순우리말이다. 다만, 실제로는 거의 전자를 쓴다. #우리말샘[6] 한국어와 일본어 등. 중국어에서는 간체자인 "骑"를 쓴다.[7] 원 제목은 "al-Nawādir al-Sultaniyya wa'l-Maḥāsin al-Yūsufiyya"이다. 해당 장면은 제3차 십자군 전쟁 당시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의 전술적 움직임을 묘사한 것.[8] 군마의 몸무게는 약 380~500kg이다. 여기에 사람 무게와 각종 보호 장구류, 말에도 씌워지는 마갑과 안장 등의 무게까지 합치면 충분히 넘고도 남았다.[9] 흔히 "지축이 울린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현대 보병 훈련 과정 중에 대인수류탄을 터뜨려 땅이 잠깐 흔들려도 병사들이 전율을 느끼는 걸 생각해 보자. 수천의 군마가 떼지어 오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땅은 보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충분했다.[10] 과장되었지만 최종병기 활에서 이런 묘사를 상세히 보여주었다.[11] 요한 반 나사우가 훈련시키면서 파이크를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양민이라고 모욕한 스웨덴군도 그 근방 동네에서는 나름대로 우수한 창병대였는데 장비 면에서는 서유럽 기병에게 밀리던 윙드 후사르에게 처참하게 털렸다. 물론 기병들이 제대로 된 파이크 방진을 정면돌파로 이긴 기록은 희귀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된 총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제대로 된 파이크 방진도 희귀했다는 게 함정이다. 5~6m에 이르는 길고 무거운 장창을 지휘관의 구호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다루는건 그 자체로 고도의 훈련이 필요했고 병종 특성상 주로 하는 임무가 기병돌격을 저지하는 것이므로 깡다구도 대단해야 했다. 즉 파이크병은 기병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자원과 훈련시간을 필요로 하는 정예병들이었고 때문에 필요할때마다 제깍제깍 마음놓고 펑펑 투입할 수 있는 흔한 병종이 아니었다.[12] 초창기 고구려에 뼈아픈 패배를 안긴 위나라 장창병의 대승도 중국 기록에 의하면 보병과 기병의 합동공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3] 이 중 기병 돌격으로 죽은 자는 6천 명 가량이며 나머지는 겁에 질려 도망치면서 우왕좌왕하다가 자기들끼리 짓밟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14]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실제 군마들은 창칼이나 화살에 한 두대 맞는다고 해서 픽픽 쓰러져 죽는 약골들이 아니었다. 예시로, 조조의 말은 화살을 여러 발 맞고 심지어 한 발은 눈에 맞았는데도 조조를 적진에서 무사히 탈출시켰다.[15] 꼭 기병이 아니라도 전장에서 지휘관들이 말을 탔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16] 현대 경마에서도 유명한 경주마들이 분쇄, 복합 골절을 당해 안락사 처분되어 관중에게 충격을 주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말의 다리가 순환계 또한 겸한다는 구조적인 약점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21세기의 발달된 의학으로 수의사 여럿을 동원해도 절대 완치를 보장하지 못하며, 치료에 성공해도 예전처럼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여 대부분 종마 등의 진로로 은퇴하게 된다. 그리고 말 하나에 수의사 여럿을 동원하는 것은 마주가 부자거나 말이 유명해야만 베풀 수 있는 사치이다.[17] 예외적인 사례겠지만 기병이 성벽을 돌파하는 경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성벽 앞에 흙주머니를 잔뜩 던져 언덕을 만들어서 타고 올라가거나, 말이 오를 수 있는 거대한 사다리차를 만들어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18] 정확히는 총구에 삽입하는 플러그식 총검이 아닌 장착한 상태에서도 총을 사용할 수 있는 탈부착식 총검의 등장 이후[19] squadron[20] 사각형 대열을 짜면 정면 화력은 ¼로 줄어드는 셈인 데다 포탄을 피하기도 어려웠기에 자칫하면 기병을 보낼 필요도 없이 포병에 의해 몰살당할 위험이 매우 컸다.[21] 경주마들의 경우 한번 경주를 하고 나면 10일 가량 휴식 기간을 가지고나서 다시 훈련을 시작한다.[22] 사실 보병도 이러한 특성이 있기는 하다. 한 번 시작한 전면공격을 갑자기 취소하면 왕성하던 병사들의 사기가 자칫 한순간에 최악(아군에 무슨 큰 일이 생긴 것으로 오인→공포심이 급속도로 전염)으로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수대전 항목 참조. 동서고금의 병서들이 "한 번 내려진 군령은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취소하지 말 것"이라는 금언을 넣은 것은 이 때문이다.[23] A cavalryman on average cost 87,000 cash, not including rations, while a regular soldier only 10,000 cash. The total expenditure of a 300,000 strong cavalry force would therefore have been around 2.18 times the entire government's annual revenue. 위키피디아, Chang, Chun-shu (2007), The Rise of the Chinese Empire 1,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24] 창춘슈 교수의 원책 내용에 의하면 식량과 사료값, 의복비를 다 포함한 비용이 8.7배에 달한다고 서술하고 있으므로 위키피디아에 나온 내용은 오독으로 보인다.[25] 가령 메이지유신 때 일본은 외국으로부터 전투용 2살 망아지를 사들여 3년간의 훈련을 시켜서 기병부대에 배속한 후 1-2년의 훈련을 추가로 거쳤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훈련을 거듭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26] 개마무사를 고구려만의 고유한 병종이었다고 보는 오해가 많은데,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중장기병을 운용한게 고구려인건 맞지만 백제 외에도 신라, 가야등 삼한계 남방 국가들 역시 적지 않은 수의 개마무사를 운용했다. 카타프락토이 참조.[27] 별무반의 하나[28] 장용영, 총위영 소속.[29]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소속.[30] 훈련도감 소속.[31] 국왕을 호위하던 정예 기병들로, 신분보다는 무재(武才)가 더 중시되었다.[32] 밀덕들이라면 한번은 들어보았을 장철부 중령이 지휘했던 부대다.[33] '오랑캐의 복식과 마상궁술(胡服騎射)'이란 뜻의 궁기병 부대로 당시 조나라가 마상궁술을 제일 먼저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34] 무제 치세때는 30만을 넘었다.[35]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만든 친위 부대로 약 1천~3500명의 중무장 기병들로 이루어졌다#[36] 여진족, 몽골족 등 명나라 치하의 북방 유목민족 및 이들에게 동화된 한족들로 구성된 기병부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엄청난 약탈을 저질러서 조선에서는 순수 한족들로 구성된 남병 위주로 파병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37] 명나라 말기의 명장인 원숭환이 요동 출신 중국인들로 모집하여 훈련시킨 중무장 기병 부대로 그 수는 대략 9천 명에서 1만 명 사이였다. 후금(청)의 군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싸워 이길 만큼 강력한 부대였다. #[38] 민족의 이름이지만, 러시아가 이들로 구성된 경기병 부대를 양성하여 병과의 이름과 같이 쓰였다. 물론 이 이름은 괜히 쓰인 건 아니고 당연히 카자크 족이 기마에 능숙한 전투민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이 바로 대장 부리바다.[39] 스페인어로 '기병'이란 뜻으로 중세 스페인에서 이베리아 무어인을 막기 위해 창설된 경기병 부대이다.[40] 인도 북부의 시크교도들이 세운 나라인 시크 왕국의 기병 부대로 사람과 말이 모두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채로 긴 을 쥐고 돌격하는 창기병으로 운영되었다. 이 사르다르 부대와 맞서 싸운 영국군조차 그들을 가리켜 "세계 최고의 기병대"라고 칭송할 만큼 용맹스러운 부대였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92쪽.[41] 중세 유럽에서 독일인들은 유럽 각지에서 용병으로 고용되어 싸웠는데, 대부분은 중무장을 한 기병으로 싸웠다. 아래에서 언급한 세르비아 기사단 대부분도 독일인 용병들이었고, 이들은 매우 사납고 난폭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전통적인 중기병 강국인 프랑스에서조차 16세기에 독일인 용병 기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할 정도였다. 그밖에도 16세기 유럽 최강의 군사 강국이었던 스페인에서도 기병들의 대부분은 독일인 용병들이었다.[42] 노르만 기사들이 워낙 다양한 곳에 진출하였고 따지고 보면 프랑스와도 봉신관계이긴 해서 마냥 잉글랜드만을 대표하는 기병대라 보긴 힘들 수 있으나 결국 이들이 최후까지 가장 네임드 메인 지배계층으로서 정착한 국가가 잉글랜드이다. 현세엔 이들의 후손들이 노르만족의 정체성을 내세우지는 않으나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왕가에는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이들을 좀 더 정확히 지칭하자면 앵글로-노르만이다. 그리고 채널 제도의 노르만족은 영국 본토의 노르만계 후손들과 달리 현재까지도 노르만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43] 잉글랜드가 백년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노르망디를 상실한 이후로도 계속 노르망디에 잔류한 노르만족은 잉글랜드로 이주한 노르만족과 달리 현재까지도 나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프랑스의 노르만족은 백년전쟁 종전 이후에는 잉글랜드의 노르만족과 달리 메인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44] 프랑스 헌병대의 기원으로 프랑스 왕이 지휘하던 중기병대였다.[45] 후사르라는 이름의 병종은 근세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나, 그 원조는 헝가리 후사르이다.[46] 1402년 벌어진 앙카라 전투에서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참전한 세르비아 기사단은 두꺼운 갑옷을 입고 다녀 적수인 티무르 제국 군대가 쏘아대는 화살을 막아내며 전장을 해집고 다녔고, 그들의 용맹함을 본 티무르조차 사자처럼 용감하다고 칭찬했다. 오히려 다른 오스만 제국 군대의 부대들이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와중에서도 이 세르비아 기사단은 최후까지 주군인 바예지드를 지키며 용감하게 싸웠다. 다만 세르비아 기사단의 대부분은 독일인 용병 출신들이었다.[47] 신속한 기동전으로 서라벌 기습을 성공하고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대패시켰다.[48] 이 양반도 1차 대전때 러시아 제국군 제 10 기병사단 예하 제 10 노브고로드 드라군 연대 소속 기병으로 참전한 전적이 있었고, 볼셰비키 공산당 가입 후 아래 부됸늬와 스탈린처럼 적백내전때도 적군파 기병으로 참전했었다.[49] 전부 중국인이었으나 몽골과 인접한 지방 사람들이었다.[50] 이쪽은 사실 1차대전 당시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더 유명하지만 원래는 황실 제1기병대의 육군 기병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했던 기병 출신 인물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기병이란 병과 자체가 쇠퇴하던 시대에 난지라 식료품만 나르는 신세로 전락했고 이에 병과전환을 신청, 항공장교로 전과했으며 이는 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계기가 된다.[51] 일본 역사상 최초로 기병을 신설한 인물이다.[52] 출신이 흉노의 영토와 가까운 병주 출신이라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기마술이 뛰어났다고 하며,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할 때도 자신을 기병대장으로 삼으면 된다고 꼬드겨 조조가 일순간 고민하게 했을 정도다. 참고로 조조 역시 기병으로 유명했는데 그런 조조를 고민시킬 정도면 기병대장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했던 듯 싶다.[53] 이 양반의 어록 중에 "포병은 전장의 신이다." 라는 말 때문에 포병 출신이라고 오해받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적백내전 당시 볼고그라드 부근에서 기병대 정치위원, 즉 기병대 정치장교로 처음 참전했다. 이 때 지휘를 해보기도 했는데, 안톤 데니킨 휘하 부대의 단독 공격을 격퇴하는 등 2차대전때 병력을 신나게 갈아마시며 쥐어 터졌던 것과는 대조되는 군사적 소질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54] 북관대첩 당시 소수의 기병대로 기습전을 펼치며 가토 기요마사를 농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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