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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23:46:13

기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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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3. 중세
3.1. 중기병
3.1.1. 랜스 돌격
3.1.1.1. 충돌3.1.1.2. 백병전3.1.1.3. 연속돌격?
3.2. 경기병3.3. 중기병 VS 경기병
4. 근세
4.1. 서유럽
4.1.1. 헌병군의 탄생
4.2. 다른 지역들
5. 근대
5.1. 기동 속도
6. 20세기7. 21세기
7.1. 역할 대체7.2.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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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병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이다.

2. 고대

세계 곳곳의 전쟁터에서는 기병 이전에 전차(Chariot)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러다 사람이 직접 말 위에 타는 기병이 등장하고, 전차는 초창기 기병보다 장점도 조금 있어 같이 쓰이다 기병의 발달로 결국 도태되었다. 전차와 기병의 장단점 비교는 전차(고대 무기) 문서의 쇠퇴 문단 참조.

대부분 문화권에서 초창기 기병은 칼이나 활을 쓰는 전투는 말에서 내려서 하고, 말에 탔을 때는 보통 정찰이나 투창 공격만 하였다. 후대의 용기병 또는 현대의 기계화보병과 유사한데, 말의 기동성만 이용한 것이다. 등자가 없어 안정성이 없었기 때문에 말에 탄 채로 정신없이 싸우면 낙마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예외로 스키타이말에 탄 채로 활을 쏘며 싸웠는데,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이 부분에 매우 주목해 기록을 남겼을 정도로 고대 기준으로는 특이 케이스였다.

이후 마구 발달을 통해 무장한 전사(戰士)를 태우고 싸울 수도 있고, 빠르게 질주할 수 있는 군마가 탄생하면서 전차는 도태되고 중기병(重騎兵)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등자 없이 승마하여 칼과 창, 투창, 활 등을 다루는 훈련영상
물론 이때까지 등자가 없었고, 안장도 제대로 개량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낙마하지 않고 달리면서 창과 검을 자유롭게 쓰고 돌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초기에는 추격전과 투창 등을 이용한 유격전이 많았다가,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2세 때부터 장창을 들고 충돌전술을 쓰는 기병이 등장하면서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의 기병들도 창을 쥐고 적 보병을 향해 돌격하여 진형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안장과 등자가 있는 것에 비해 승마 안정감이 떨어졌고, 중세 유럽처럼 겨드랑이에 창을 끼워놓아서 대열을 더 촘촘하게 구성하는 것도 어려웠다.

한편,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초원지대의 유목 민족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 전투법을 일찍부터 썼는데, 주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궁기병이 주력이었다. 이들을 본떠 전국시대 중국에서는 조나라를 필두로 각국에서 기병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활을 이용한 경기병이 존재하였으며, 후한시대부터 기병을 이용한 충돌 및 돌격전술이 부분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남북조시대부터는 마갑까지 갖춘 중무장기병대의 돌격전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며 한민족 국가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개마무사를 다룬 벽화가 등장하거나, 마구, 마갑 등이 출토되기도 한다.

2.1. 경기병

파일:e0079724_4c7cfd94a1778.jpg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호복기사.
당시 마종의 크기를 고려하여 작게 그렸다.

고대의 전장에서 기병이 처음으로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을 사용하는 궁기병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활을 든 기병대가 제일 먼저 등장하였으며 일찍이 아시리아 제국에서도 주요 병과로 취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들의 기병대에 착안하여 등장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오랑캐 옷을 갖춘 기마무사)들 또한 을 쏘는 경기병이었다.

궁기병은 서쪽으로는 동유럽 우크라이나스텝 지대로부터 동쪽으로는 동아시아 만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목민들의 주력 병종이었다. 유목민들에게는 목축과 수렵채집이 생계수단이었기에 고대부터 자연스럽게 경기병이 육성되었고, 광활한 초원에서 활은 필수품이었기에 양다리만으로 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양손으로 활을 쏘았다고 한다.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스스로를 '활의 백성'이라 자처했으며 중국의 문헌에도 이들을 '장성 이북 궁술의 나라'라고 일컫는 표현들이 보인다.

궁기병들이 모이면, 칼이나 창 등의 냉병기를 든 보병은 그저 과녁일 뿐이고 같은 기병조차도 대응이 힘들었다. 똑같이 원거리 무기를 갖추지 않으면 이들의 화살 공격에 맞설 수 없었고, 무장이 가벼워 빠른 탓에 말을 타고도 이들을 추격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궁기병을 많이 보유한 유목민족들은 정주민들에겐 악몽 같은 존재들이었다.
파일:Parthian_Shot.gif
파르티아의 궁기병
이 활을 든 경기병들은 다른 병과들처럼 한번에 모여서 뭉친 다음 적과 교전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여러 뭉텅이로 쪼개어 적을 에워싼 뒤 벌레떼(swarm)처럼 우르르 달려들어 공격하다가 우르르 빠지는 것을 반복하였다. 반복되는 화살 공격에 적들이 손실을 견디지 못해 전투의지를 상실하거나, 대오가 무너질 때 중기병 등을 이용한 돌격을 겸하여 적을 무너뜨리기도 했는데 카르헤 전투가 대표적이다.[1]

다만 근접전에서는 불리하였고 마상사격이 일반 사격에 비해 어렵고 사거리가 짧아서, 보병들이 전투력을 온존하고 있다가 역습, 경기병들에게 근접전을 강요함으로써 패배시키거나, 보병의 화망에 압도당해 경기병이 패배한 경우도 많았다. 보통 보병은 사거리가 더욱 길고 관통력 운동에너지가 모두 큰 롱보우/장궁을 사용한 반면 경기병은 말 위에서 사용할 때 덜 거치적거리는 숏보우/단궁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사례로는 중국 전국시대 때에 조나라 이목이 흉노군을 유인, 백병전을 펼쳐 흉노군 10만 명을 몰살한 적이 있었고, 한나라의 흉노 원정에서는 곽거병이나 이감이 기병대로 돌격하여 백병전으로 이들을 제압한 이력이 있었다. 이릉은 비록 패배했지만, 보병이 주력이었던 병력 5천으로 기병이 주력이었던 흉노군과 맞붙어 수레와 방진을 이용하여 며칠을 버티며 비록 부대는 거의 궤멸되었지만 흉노도 8만 명이 넘는 병력 중 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삼국시대 때는 원소군의 국의가 활을 쏘며 전진해오는 공손찬의 백마의종 기병부대를 방진과 쇠뇌를 이용하여 격퇴한 바 있고, 위나라의 전예조창과 함께 수송용 수레를 원형으로 빙 둘러 장애물을 삼아 원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쇠뇌를 쏘면서 오환의 기병대를 격퇴한 바 있다.

드물게도 정주민족이 기병을 양성하여 유목민족의 기병을 상대한 사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나라의 흉노 원정은 고대 세계 최강의 유목제국이었던 흉노와 정주 제국이던 한나라가 초원지대에서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기병을 동원해 정면 승부를 벌인 패권전쟁이다. 기원전 119년의 막북전투에서 한나라는 10만의 기병을 동원하였는데 정확한 숫자는 불명이나 흉노도 그만한 기병을 동원하였다고 하면 적어도 20만에 달하는 기병이 격돌한 전투인 셈이다.

또한 로마에서는 트라야누스 집권기 이후부터 기병과 궁병을 대규모로 육성하여 파르티아 원정을 펼쳐 파르티아의 기병대를 제압하고 그들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2.2. 중기병

파일:external/www.cais-soas.com/Achaemenid_Cavalry.gif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카타프락토이

인류 최초의 기병은 경기병이었으나, 말의 품종과 마구가 개량되어 보다 무거운 무게를 지탱할 수 있어져 중기병이 탄생하게 된다.

최초의 중기병은 고대 중동에서 등장한 카타프락토이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기원전 10~7세기경에 아시리아 기병의 화려한 장식에 영향을 받아 마갑을 입힌 카타프락토이가 등장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렇게 말과 기수를 갑주로 감싼 중장기병은 기원전 5~6세기경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때 화살에 잘 견디기 위해 등장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중장기병은 철제 흉갑, 투구, 그리고 말 전면만 가리는 철제 마갑을 씌운 모습이었다. 활과 단창, 철퇴와 장검으로 무장하여 돌격과 돌파보다는 말을 타고 적을 기습하거나, 측면과 후방교란, 그리고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활을 쏘는 적 궁기병 혹은 궁병과 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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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왕국의 중기병 헤타이로이

기병의 돌격전술은 조금 나중인 기원전 4세기경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즐겨 쓰면서 대외 원정을 다니다 보니 아시아 고원에까지 알려졌다. 보병과 협동하여 기병의 충돌력을 활용하는 이 전술을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고 한다. 파르티아, 박트리아의 유목민들은 철제비늘갑주와 마갑을 씌우고, 장창을 도입한 중장기병으로 돌격과 충격 전술을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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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중기병 간의 교전 장면.
양손으로 창을 쥐고 어깨 위로 들어서 찌르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시기 중기병은 아직 안장의 발달이 미흡하고 등자도 없어 후대의 본격적인 중기병과는 차이가 있었다. 보통 말 위에서는 창을 겨드랑이에 끼는 방식인 카우치드 랜스가 아니라 양손으로 창을 움켜쥐고 내지르거나 어깨 위로 들어서 찌르는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승마 시 안정감이 떨어졌고 양팔을 모두 사용하는 동작의 한계상 전투 간격이 넓어 조밀한 전투대형을 이루기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육중한 갑주와 말의 돌파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당시 이들 중기병들이 막강한 활약을 펼치는가 하면 고대 지중해 유역에서도 중기병은 많은 활약을 펼쳤다. 흔히 궁기병에 로마군이 유린됐다고 알려진 카르헤 전투에서도 이들 중기병이 돌격전을 벌여 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파일:external/cfs8.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DJRbW1AZnM4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TUuanBnLnRodW1i&filename=1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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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고구려 벽화에 남아있는 개마무사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동아시아에서는 기원후 2~3세기경 삼국시대까지도 마갑을 입힌 중장기병의 수가 없거나 매우 적었으며 본격적으로 대량 운영된 것은 중국판 게르만족 대이동이라 할 수 있는 5호 16국 시대부터였다. 마갑이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되었는지는 아니면 유목민들을 통해 중앙아시아로부터 수입된 건지는 불분명하지만, 기원후 2~4세기경 선비족이 먼저 중장기병을 대량 운용하기 시작해 본격적으로 등장함을 보면 유목민으로부터 전파받은 걸로 추정된다. 한국은 서기 3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안악 3호 고분에 개마무사가 나타나, 그쯤에 중장기병이 운영된 걸로 추정된다. 이밖에 가야의 기마인물형 토기나 마갑 유물 등이 발굴되어,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이 한반도 남부에서도 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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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갑의 등장이 늦다는 것이지, 동아시아에서도 중기병을 이용한 충격 전술 자체는 일찍부터 존재하였다.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경 한나라흉노 원정으로 이광의 아들 이감이 흉노 기병대에게 돌격전을 펼쳐 승리하거나 곽거병이 기병 800명을 이끌고 흉노군 2천 명을 궤멸하는 등 주로 기병 간 돌격전이 많이 펼쳐졌다.

이후 기원후 2세기경 삼국시대 때에 여포가 기병을 이끌고 장연에게 돌격해 승리한 기록이 있고, 조인이 기병을 이끌고 돌격전을 펼쳐 포위당한 아군을 구출한 기록들이 등장해 기병대가 보병에게 돌격한 사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 밖에 기원후 240년경에 고구려의 동천왕이 5천의 철기병(중장기병인지는 불분명)으로 위나라 군대에 돌격하여 위나라의 관구검이 방진으로 맞섰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인터넷상에는 중국의 통일왕조인 당나라가 중무장 기병을 두지 않았고 경기병만 있었다는 주장이 돌아다니지만 잘못된 견해이며, 당나라 역시 엄연히 중무장 기병들을 실전에 배치하고 아주 잘 활용했다당태종 이세민이 만든 정예 부대, 현갑군, 당나라 경기병이 중기병을 멸망시켰는가? 터무니없는 소리!.

3. 중세

한국사 역대 왕조들은 기병 비중이 은근히 높은 편인데 이는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1018년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기병 12,000기를 매복시켜 거란군을 격파한 바 있으며, 고려사 병지에 따르면 북계의 주진군 총병력이 4만 명인데 그중 기병이 약 5천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체 병력 중에 8분의 1이 기병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기병으로 윤관이 창설한 별무반의 신기군을 들 수 있으며, 고려 말 홍건적왜구[2]를 상대로 싸운 인간흉기 이성계사병가별초 2~3천도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3] 한반도는 다른 내륙 국가들에 비해 말 육성이 어려웠음에도 개경, 정주, 강음, 황주, 철원, 청주 등지의 마장(馬場)을 운영하였는데[4] 1376년에 고려가 보유한 기병은 1만 4700기였다.[〈우왕(禑王)]

일본의 사무라이도 덜 알려진 사실이지만 초기에는 기마궁수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헤이안 시대부터 길이 2.2m가 넘는 일본장궁을 사용했고 그들의 기예는 야부사메로 그 전통이 남아 있다. 현재는 신사에서 매년 예대제를 지낼 때마다 치르는 필수요소가 되어 일본 각지에서 시연되고 있다. 이외에 명맥이 끊기긴 했지만 카사가케(笠懸), 이누오모노(犬追物) 등 자체적인 기마궁술도 존재했다. 이런 사실이 덜 알려진 이유는 일본의 지리적, 역사적 문제에 있다. 우선 일본은 열도라는 특성상 군마 사육과 육성에 있어서 한반도보다 훨씬 더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말은 기원전 한반도를 통해 전래된 난부우마(南部馬, なんぶうま), 기소우마(木曽馬, きそうま) 정도를 제외하고 군마로써 활약할만한 품종은 사실상 없었고,[6] 이마저도 시대가 지나면서 군의 수요에 충족할 만한 수급은 어려운 형편이었다. 전국시대가 되면서 총포의 등장, 전술의 변화 등 여러가지 문제가 겹치면서[7] 특정 부유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에도 막부 시대에 보병화되었다. 이후 1862년 분큐의 군제개혁(文久の軍制改革)으로 서양식 군대 제도인 삼병(三兵)[8] 편제가 도입되고 나서야 일본 역사에 처음으로 전문적인 기병부대가 창설되었다.

유럽에 경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즈음의 서유럽에서는 기병대의 역할은 종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미 동서 로마 제국에서도 보병보다 중무장한 기병대가 전력의 주축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세워진 프랑크 왕국의 군대도 초기에는 보병이 중심이었으나, 8세기 중엽부터 군벌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고 각각 사병을 육성하고 기마병을 육성하기 수월한 봉건제도를 실시하였고, 이미 그전부터 기사계급이 성장하고 활약도 증가하면서 중요성이 부각되어갔다. 주로 창이나 냉병기를 이용해 백병전 위주로 싸웠고 창대를 겨드랑이에 끼는 카우치드 랜스라는 창 파지법이 유행하면서 창을 든 중기병대가 주축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과 중동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대규모로 기병을 육성하였는데, 서유럽에서 중기병들이 대거 활약하는 것에 비해, 동로마와 중동의 중기병대는 측면이나 후방의 돌파를 위해 가끔 쓰이는 것에 그쳤다. 대신 서유럽과 달리 궁기병의 활용이 매우 빈번했다.

3.1. 중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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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이란계 민족 소그드족의 허리띠 장식. 5세기경

동로마 제국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중기병대와 궁기병대의 제병협동 전술이나 돌파전술이 유행하였고, 서로마 제국 멸망 후 프랑크 왕국에서도 백병전을 하는 기마병의 사회적 위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후한~ 남북조 시대를 기점으로 중기병의 역할이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3-4세기 무렵인 남북조시대에는 마갑을 갖춘 선비족 기병대 등 마갑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한국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중장기병이 집중 육성되었다. 삼국시대 공손찬의 백마의종도 마찬가지지만, 유럽의 중기병과 달리 동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에서는 기병대열에 궁기병을 섞어서 활을 쏘면서 돌격하는 진형이 많았다.

더불어 동로마와 중동에서 중기병대는 적진의 측면이나 후방에 돌진하였으나, 서유럽의 중기병은 정면과 측면을 가리지 않고 적진을 돌파하였다. 그리하여 11세기말에 벌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부터는 서유럽의 중기병대는 근접전에서 이슬람권의 기병대를 압도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숫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기병의 돌격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는 했다.

동로마 역사가 안나 콤니니는 서유럽의 노르만인 기병대를 보고 "거인의 힘으로 당긴 화살을 튕겨내며 바빌론의 성벽마저 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라고 평가하였는데, 1097년 도릴라이움 전투에서는 앞뒤로 서유럽 중기병대의 돌격을 받은 튀르크군은 패주를 면치 못했고,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 왕국군 500명과 성당 기사단 8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해 2만 6천 명의 살라딘 군대를 박살내버리기도 했다.

유럽 중세 초-중기 중기병의 갑옷은 체인메일로, 휘황찬란한 플레이트 아머가 도입되기 훨씬 전이었으며 말도 이후의 육중한 체구의 군마보다는 작은 소형마를 썼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옷을 갖춰 입은 중기병대의 돌파에 보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장창병들이 빼곡히 늘어서서 돌격을 저지하거나 똑같이 중기병을 돌격시켜 맞불을 놓거나, 그도 아니면 지형과 요새 등의 기물을 이용해야 했는데, 보병은 기병 돌진에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버틸 강단 있는 정예여야만 했고, 중기병 맞돌격의 경우는 장비와 기량 차이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문제가 있었으며, 마지막의 경우는 전술적인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잉글랜드의 경우 11세기에 노르만 왕조가 열리면서부터 서유럽 깡패 기병대 중 하나였던 노르만 기병대의 후예로서 기병전력이 훌륭했고 존 왕의 시대[10]에 잃어버리기 전까지 프랑스땅도 많이 소유했었기에 좋은 기병들과 평지를 확보했었다. 또한 11세기 이전에 잉글랜드는 허스칼이라고 하는 우수한 중보병대를 보유했었는데,[11] 노르만 왕조부터는 노르만 기병들과 이 허스칼들의 합동훈련도 실시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강력한 기병과 보병의 합동 훈련이 발판이 되었는지 실제로 12세기엔 리처드 1세와 함께 십자군 전쟁에서도 중기병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 리처드 1세와 잉글랜드 기사들의[12] 파괴력은 살라딘과 투르크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으며 아예 투르크 측 기록에서마저 언급되어 있다. 이는 유럽식 중기병대의 위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었다. 또한 동시대의 잉글랜드 기사인 윌리엄 마셜 역시 유럽 내 온갖 마상창시합에서 승리하고 잉글랜드 기사대를 이끌며 각종 전투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존 왕 시대부터 잉글랜드 왕국의 기병 전력은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프랑스 영지를 전부 상실하며 평지와 생산력을 잃게 되었고 기존처럼 대규모의 기병대 유지 및 양성이 어려워졌다. 이 시기쯤 웨일스와의 전투에서 장궁의 위력을 알게 되었으며 14세기 백년전쟁에서 자신들보다 양적, 질적으로 우수한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하면서 중기병들을 하마, 중보병 전력으로 활용하고[13] 장궁병을 대폭 활용하여 방진을 짠 후 니가와를 시전하는 전법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중기병들은 자주 하마하였으나 말에서 내린 중기병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말에 올라 본래의 기병 역할을 수행했으며 기본적으로 기병인 만큼 마상전투를 고도로 훈련했다고 한다.[14] 몇 개의 사례로 크레시 전투에서는 하마기사들이 후퇴하는 적들을 향해 기병으로 전환하여 추격 섬멸하였고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일단 하마하여 싸우다가 막바지에 전황이 불리한 순간 다시 중기병으로 전환, 결정타를 날리며 승리를 이끌었으며 장미전쟁에서도 일단은 하마한 채로 싸우다가 추후에 기병돌격을 감행했다.
파일:attachment/Mongol_Heavy_Carvaly.jpg
몽골 중기병

동시대 동아시아에서는 발해의 멸망 이후 거란, 여진족 등 만주의 철광을 확보한 유목민족들이 집중적으로 중기병을 육성, 그 군사력으로 북송을 재패하고 연해주, 북중국을 장악하면서 한때를 호령했으며, 남송고려 역시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을 운용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몽골족 역시 군의 편성에서 중장기병을 많이 운영하였다. 마갑을 씌운 중무장기병은 원나라 말기까지, 멀리는 청나라 때까지 존속하였다.
파일:e9fba0459f5be42b99acd6c826ce6ce1.jpg
청나라의 갑주와 마갑

조선은 초기에는 창기병과 궁기병을 5:5, 4:6 정도로 구성했으나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궁기병의 비중이 높아지며 임진왜란 직전에는 주로 궁기병들이 주를 이루게 된다. 단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에 창기병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중기병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아시아 기병들은 창기병 궁기병이라고 한 무기만 쓰는 게 아니라 여러 무기를 쓰는 올라운드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올라운드 부대 체제가 굳어진거지 특정 병과가 사라졌다 보긴 힘들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편곤 등의 근접무기들이 자리 잡으면서 서양과 비슷한 방향으로 기병 활동 성격이 변하게 된다.최형국,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

3.1.1. 랜스 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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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드 랜스

서기 9~10세기에는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돌진하는 "카우치드 랜스(Couched Lance)"라는 새로운 기병전술이 등장했다. 등자와 함께 등장한 이 기술이 서유럽에서 기병이 활약할 수 있게 더욱 보탬이 되었다. 카우치드 랜스는 창을 잡을 때 겨드랑이를 활용함으로써 한손만으로도 창을 안정적으로 쥘 수 있었고, 남은 다른 한손으로는 방패를 쥐어 화살이나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으며[15], 양손으로 창을 쥐는 것과 달리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거나 양팔의 간격이 넓지 않아 좌우로 간격을 좁혀 집단으로 대열을 이루기도 수월하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린 화이트(Lynn Townsend White Jr)에 의하면 이미 서기 10세기 이전부터 동로마 제국이슬람에서는 흔하게 쓰였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몽골 등이 많이 사용하여 수렵이나 전투를 그린 회화에서 많이 보이고, 청나라 시대에 기병을 그린 삽화에서도 확인된다. 10세기 이전 서유럽에서는 마상전투를 다룬 그림이나 태피스트리에서 창을 쓸 때는 여전히 말 위에서 두 손으로 창을 잡은 모습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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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추세에 맞춰 창의 형태도 한손으로 잡고 겨드랑이에 끼기 쉬운 랜스로 변화했다. 랜스 착용이 빈번해지자, 플레이트 아머에는 이를 위해 오른쪽 가슴 부위에 창받침을 두기도 했다.
3.1.1.1.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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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겨누며 돌격하는 기병들. 1335년경 그림 크레마 전투. 1515년경 제작
기병대의 진형은 크게 얇은 횡진(橫陣, Line)과 두꺼운 종진(縱陣, Column)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느쪽이든 회전에서 대열을 이루고 돌격하는 기병들은 무거운 장화나 다리 갑옷을 신지 않으면 짓눌려서 다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다리를 딱 붙인 채 느린 속도로 달렸다.[16] 12-13세기 기사문학의 표현을 빌리면 '장갑이나 과일을 위에 던져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창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어야 했다.

기병 연구자인 프랑스 역사학자 프레드릭 쇼비레(Frederic Chauvire)에 의하면, 이렇게 무릎과 무릎을 맞댄 밀집대형을 유지하기 위해 기병의 돌격은 달리기 좋은 지형에서조차 충돌 직전 최고 속도가 빠른 캔터나 느린 갤럽(15㎞/h 전후) 정도로, 사람이 뛰어서 따라잡을 수 있을만큼 꽤 느린 편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퀴레시어들의 사례를 대입하면 지형이 좋지 않은 곳에서는 느린 캔터로 충돌한 경우도 흔했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의 기동 속도 항목을 참고. 때문에 많은 군사 저술가들이 오해의 여지가 있는 충돌(collision)이라는 용어 대신에 교전(engagement), 접촉(contact), 강습(onset), 침범(boarding)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양측 모두 똑같이 잘 지휘되고, 똑같이 지휘관을 신뢰하고 자신들의 임무에 확신을 가지며, 똑같이 용감할 때, 두 기병대의 교전(meeting)이 발생할 수 있다.
이후 강습(boarding)이 시작되지만, 충돌(shock)은 아니다.
양측 기병대가 서로 접근할 때, 말과 기수는 상대방과 전속력으로 부딪혀서 무익하게 박살날 것임을 실감하며 이를 본능적으로 자제한다.[17]
Pierre Marie Burnez, Notes pour le cours de tactique applique a la cavalerie, monographie, 1889
기병 충격 전술은 속력이 느려지더라도 진형을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유리했으므로 충동적이고 단순무식한 기사의 이미지와 달리 인내와 규율이 가장 중요했다. 1220년대에 편찬된 윌리엄 마셜의 전기에는 토너먼트 단체전에서 밀집대형으로 동료들과 열을 맞추어 일정한 속도로 진격한 기병대가 무질서하게 돌진한 상대편 기병들을 물리치는 장면들이 묘사된다.
의 부대는 훌륭한 밀집대형으로 모여 섰지만, 상대편은 그렇게 하는 것을 멸시하며 거부했다: 수적인 우세를 믿고 거만한 자신감을 내보이면서, 그들은 어지럽게 뒤섞여 돌격했다.
예선전(preliminary)이나 준비운동용 창시합(warm-up joust)은 없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서 진격해 젊은 왕의 부대로 무질서하게 뛰어들었고, 왕의 부대는 전의를 불태우며 사납게 맞서 싸웠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철퇴가 머리를 깨부수고 칼이 머리와 팔을 베어 가르는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던 측이 더 못 싸웠다: 전혀 서로 뭉치지 못하고, 대형을 갖추지 않은 상태로 돌격했기 때문에, 그들은 빠르게 격퇴당했고 뒤로 휘청거리며 쫓겨났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가장 먼저 도망쳤다.
윌리엄 마셜은 왕의 곁을 떠나서,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적 부대 하나를 뒤쫓아 말을 달렸다. 그는 강한 기세로 적들 가운데 돌격해서 기사 한 명을 쓰러뜨렸지만 그를 포로로 잡기 위해 멈춰서지 않았다: 그는 누구라도 진실한 증언을 할 수밖에 없을 그런 (흠 없는) 공적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공격들로 도망칠 방향을 가르쳐주며 적들을 물리치고 쫓아냈다.
이후 다른 부대가 수적 우위를 앞세우며 윌리엄 마셜에게 덤벼들어서 그를 젊은 왕이 있는 대열로 몰아붙였지만, 그들은 윌리엄 마셜을 더 추격하지 않고 전장을 떠났고, 그 싸움에서 윌리엄 마셜이 보인 무용은 그것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에게 커다란 존경을 가져다주었다.[18]
Nigel Bryant, trans., The History of William Marshal, 2016.
창기병들끼리 맞기창돌격을 했을 때의 대응방법은 이렇다.
기병 두 명이 공격할 때, 창으로 첫 교전을 할 때. 그때 너를 지킬 방어장비가 있다면 상대의 말을 조준하는 것이 보통 효과적이다. 창대 중간을 붙잡고 있다가, 상대의 창공격을 비껴내라
When two horsemen come to fight, in the first encounter of the spears, it is often useful to aim our spear at the opponent's horse, as long as we have defensive arms to protect our body. We should hold our spear by the middle, and deflect the opponent's spear-encounter.
Pietro del Monte(1457~1509), Petri Montii Exercitiorum Atque Artis Militaris Collectanea in Tris Libros Distincta (1509)
다만 기창돌격의 경우 흔히 알려진 만큼 강한 위력을 가지지 못했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큰 충격을 줄 때 공격자가 받는 반발력도 엄청났기 때문. 이러한 충돌 시의 반발력을 버텨내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무리로, 사용에는 상당한 완력과 단련이 요구되었다.[19]

또한 갑옷을 뚫지 못해도 충격만으로 직격당한 자가 중상을 입는다는 낭설이 있지만, 일반 창보다 전체 질량이 큰 긴 창이 가진 질량과 말의 속도로 만든 운동 에너지 정도로 즉사할 정도의 운동에너지를 만들어 내기에는 질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설사 가능하더라도 창을 들고 있는 기사도 같은양의 반작용을 얻어야하는데 차지를 건 기사가 멀쩡할리가 없으므로 불가능하다. 애초에 이런 경우 전체 질량은 무겁지만 부분 질량은 일반 창보다 더 가벼운 기창이 먼저 부러지게 되어 모든 운동 에너지를 제대로 전해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16세기 프랑스의 군인이었던 프랑수아 드 라 누(François de la Noue)는 갑옷입은 기병이 랜스에 찔려죽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고, 실제로 창기병들은 시기불문하고 갑옷의 방어력과 전투법의 향상이 있은 후에는 기창으로 적 기병을 상대할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무장한 군마를 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파일:British Lancers on manoeuvres, c1902.gif
영국군의 창기병 훈련. 1902년경
프랑스 흉갑기병 훈련. 1896년
중요한 것은 실제 기병은 영화 등 매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어디를 가든 항상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도 생물이고 당연히 무게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군마로 사용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도, 말도 완전군장을 한 상태에서는 오래 달리기는 힘들다. 각종 매체에서는 기병이 등장할 때면 어디를 가든 두다다다 풀 갤럽으로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사료에 묘사되는 보병방진을 상대로 한 충격기병돌격에서 갤럽으로 최고 속력을 내는 구간은 목표물 50m 전방 지점 정도였다.

즉, 기병대가 처음 기동을 시작할 때에는 대열을 맞춰 나아가야 할 필요성도 있고 말의 체력을 보존해야 할 필요도 있었으므로 트롯과 같은 가벼운 속보로 대부분의 거리를 주파했으며, 목표물을 100m 정도 둔 지점에서부터는 캔터로 달리기 시작하여, 그리고 마지막 50m부터는 최대 '스퍼트'인 갤럽으로 질주하여 보병대에게 돌격을 개시했다. 놀랍게도 화살이나 총포가 쏟아지는데도 목표물 100m 앞 정도 까지는 조금 빠른 속보 정도로 터벅터벅 이동했다는 것. 괜히 기사들이 용감해야 했던 게 아니다

1119년의 브레뮬 전투를 기록한 오더릭 바이탈리스의 묘사는 엉성한 기병 대열이 단단한 보병 방진에 정면으로 부딪혔을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프랑스군은 첫 번째 맹공격을 가했지만, 무질서하게 돌격해서 격퇴당했으며 빠르게 지쳐서 등을 돌려 도망쳤다. 의 아들인 리처드와 기사 100명은 말 위에 앉은 채 전투준비를 갖추었고, 나머지는 왕과 함께 전장에서 도보로 싸웠다. 선두에서 윌리엄 크리스핀과 (프랑스의) 기사 80명이 노르만인들을 향해 돌격했지만 그들의 말은 순식간에 살해당했고 기수들은 모두 포위당해 단절되었다. 세랑의 고드프루아와 벡생 출신의 다른 기사들은 이후 용감하게 저항했고, 적진 전체를 어느 정도 밀어붙였다. 하지만 노련한 전사들은 용기와 힘을 회복하여 Burchard, Otmund, Aubrey of Mareil, 그리고 다른 많은 낙마한 프랑스 기사들을 포로로 잡았다.[20]
-Orderic Vitalis, trans. Marjorie Chibnall,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Orderic Vitalis
기병 돌격은 전투에서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이며, 이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대열을 횡으로 늘릴수록 이론상 충격력은 증가하지만, 용기와 능력이 부족한 기병들이 전방에 서는 비율도 높아지며, 조절을 잘못 할 경우 교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탈자가 발생하고 그것을 본 정예병들도 사기가 떨어져서 순식간에 대열이 와해될 수 있었다. 아니면 어떻게든 적 대열 앞에 도달은 했지만 일부는 '빠르게 지쳐서 등을 돌려 도망'치고 일부는 '포위당해 단절'되는 결말을 맞거나.

반대로 대열의 종심이 깊을수록 전방에 선 정예병의 밀도를 높일 수 있으며, 더 많은 기병들이 후열에서 돌격과 충돌의 스트레스로부터 보호받고, 용기를 얻은 후열의 지원을 통해 다시 전열의 사기가 오르는 상승효과가 발생해서 더 강하고 지속적인 힘으로 전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종종 보병대나 기병대가 밀집된 종진이나 쐐기진을 취해서 포위당하기 전에 상대 전열을 뚫어버리는 것은 이런 원리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열에 최고의 기병들(choice men)을 세운 다음, 두 번째 열에는 두 번째로 용맹한 기병들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두열에 세울 최소 25명의 정예병을 가지지 못한 기병중대는 불행한 부대(miserable companie)다
지휘관이 선두열에 세우기에 충분히 용맹하지 못하다고 평가한 나머지 기병들은 선두열에 세운 정예병들의, 말하자면 그림자 아래에 놓이도록 배치되는데, 그렇게 하면 이들은 선두열만이 모든 위험과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반면 그들에 의해 적진이 무너진다면 자신들도 그들과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을 알기 때문에 선두열을 따라서 돌격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열에 선 기병들의 용기가 그들을 적진에 충돌하게 만들고, 마지막 열에 선 기병들의 확신이 그들을 뒤따라 파고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종진으로 배치된 기병대가 돌격에 실패하는 것은 상당한 겁쟁이들이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기병대가 선형진으로 배치된다면, 비록 소수의 정예 기병들이 적진에 충돌하기 위해 힘차게 진격하더라도, 의욕이 부족한 나머지 기병들은(이들은 코에서 피가 터지고, 등자가 망가지고, 말굽에서 편자가 벗겨진 것처럼 가장한다) 옆에서 따라가지 않고 멈춰서며, 그 결과 200보도 못 가서 우리의 긴 선형진 안에 연약한 유리창들(glasse windowes)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커다란 구멍들이 생겨날 것이며, 그것을 본 적들의 사기가 크게 오를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병 100명 중 고작 25명이 돌격에 끝까지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도 창으로 한 번 찌르고 검으로 한 번 공격을 가한 직후, 자신들을 지원할 병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 잠깐의 교전에서 적의 공격에 쓰러지지 않는다면) 퇴각할 것이다.[21]
La Noue, François de. 1587. 'The politicke and militarie discourses of the Lord de la Novve. Whereunto are adioyned certaine obseruations of the same author, of things happened during the three late ciuill warres of France'
그러므로 헐리우드 영화의 클리셰처럼 기병대가 무질서하게 흩어진 채 질주하며 횡대든 종대든 밀집대형을 이룬 적 진형에 달려드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상대방 역시 수준이 떨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양측 모두 똑같이 사기만 높고 기마술과 규율이 부족한 전투에서는 두 진형의 밀집대형이 풀어지면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공격을 주고 받으며 지나쳐 부대 전체가 '깍지 낀 손가락처럼' 일제히 통과해 나가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는데[22], 이는 서유럽 기병대의 평균적인 수준이 하락한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 사이 기병전에서 특히 자주 목격된 현상이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계기로 다시 근접 전투 훈련을 중시하게 된 18세기 후반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쯤이 돼서야 감소한다.

이런 요행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적 기병대를 마상전투로 맞상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중기병들을 대부분 하마시켜서 보병 전열을 강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때문에 북프랑스 지역을 제외한 서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사들은 도보전투를 마상전투에 못지 않게 중시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마상전투보다 더 중시했다. 북프랑스는 유독 마상전투 만능주의 성향이 강했지만 백년전쟁 초반에 잇따른 패전의 영향으로 도보전투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23]
군대들이 서로 합류한 뒤, 프랑스인들이 옛날부터 독일인들에게 말하곤 했던 특정한 상투어가 공공연히 사용되었는데, 이는 대략 "움직여라, 독일놈아." 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설명하자면 이런 모욕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이 두 종족은 전투를 벌이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프랑스인들은 훌륭한 진형을 이룬채 말을 타고 달리거나 창으로 공격하는 데 능숙하며, 그들의 기병대는 속도에서 독일 기병대를 능가한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프랑스인들보다 도보전투에 더 능숙하며, 큰 검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프랑스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할 때마다, 자신들의 기병대의 능력에 의심을 가지고는 도보로 싸우기로 결정한다.
기병대의 교전이 벌어진다면, 프랑스 기병들이 규율 없는 독일 기병들을 물리친다.
독일인들이 더 자신있어하는 분야인 보병 진형에 돌격해도, 병력이 열세임에도 프랑스 기병들이 도보로 싸우는 독일 기병들을 물리친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위와 같은 표현으로 독일인들을 조롱한다. 그들이 말을 타고 싸울 수 있는데도 도보로 싸우기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프랑스인들은 이 말을 계속 반복해서 독일인들을 매우 화나게 만들었다.[24]
Joannes Kinnamos(1143-?), trans. Charles M. Brand, Deeds of John and Manuel Comnenus.
3.1.1.2. 백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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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케런 전투. 1530년경 제작
기병대, 특히 중기병대의 랜스 돌격의 충격은 당대의 여러 군사서와 군인 회고록 저자들이 증언하듯이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 자체로 부대 간의 교전의 승패를 결정짓지는 못했다.

돌진하면서 들이받는 카우치드 랜스의 위력으로도 같은 중기병의 방패와 사슬갑옷, 또는 후대의 플레이트 아머를 뚫고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려웠으며, 특히 제일 앞열에 서는 정예 기병이 입는 상등품 갑옷을 뚫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5세기의 콘도티에로 피에트로 몬테는 오직 어리석은 자들이나 말이 아닌 기수를 겨냥한다고 주장했으며 16세기의 군사저술가 프랑수아 드 라 누는 갑옷을 입은 기병이 창에 맞아 죽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라고 표현했다. 동시대 카스티야의 기사인 후안 퀴자다도 일단은 기수의 배를 찌르라고 조언하지만 기수가 아닌 말을 찌르는 사람도 많다고 덧붙인다.

돌격의 목적은 병사 개인을 살상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진형을 흔들고, 부대의 관절 마디에 해당하는 기수와 장교들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공포와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응집력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16세기 네덜란드 독립 전쟁 참전자인 로저 윌리엄스(1540?-1595)는 제대로 장전해서 쏠 경우 무기 자체의 살상력은 권총이 랜스보다 더 강했지만 달리면서 들이받을 때의 물리적인 충격과 공격적인 기세에서 전해지는 심리적인 충격으로 대오를 갖춘 돌격전에서 창기병이 권총기병에 비해 이점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돌격에서 랜스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제일 앞열에 선 숙련된 창잡이 뿐이며, 나머지 인원이 든 랜스는 거의 장식에 가깝고 진형을 잘 유지하면서 따라가기만 해도 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졌다. 기병의 절반 이상은 검이나 권총같은 근접무기를 바꿔 들기 편하게 왼손에 미리 들고 있으라고 지시받는다.
창기병대와 함께 돌격하는 부대장들은 부대원들이 적을 제대로 찌르든 안 찌르든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그저 단호하게 진격하고 서로 가까이 선 대형을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제대로 지휘된다면, 지휘관들은 창기병들 중 절반 이상이 고삐를 잡은 왼손에 검이나 권총을 쥐고 있으라고 지시하며, 그렇게 해서 (백병전에서) 랜스를 버린 뒤 검과 권총을 쓰지 못하게 되는 일을 방지한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창기병들 중 정예들, 즉 일반적으로 100명당 창을 잘 다루는 15-20명을 제일 앞열에 배치할 것이다:
좋은 품질의 창대와 창날로, 잘 겨냥된 랜스의 타격은 권총 사격에 비교할 때 기백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창기병들의 돌격은 무섭고 단호하다, 그들이 창으로 찌르기 위해 진격하는 모습을 본 적들은 그들의 확고한 결심이 권총기병처럼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대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지휘관들이나 중요한 기병들은 방탄인증된 갑옷으로 무장하며[25], 따라서 지휘관들이 부하들에게 (갑옷을 입은 기수 대신) 말을 공격하라고 명령한다면 권총보다는 창으로 이 명령을 수행하기가 더 쉽다.[26]
Williams, Roger, Sir (1540?-1595), 'A briefe discourse of warre. written by Sir Roger williams Knight; with his opinion concerning some parts of the martiall discipline]'
그러므로 비록 창기병 부대가 용감하게 돌격하더라도, 그것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창기병의 돌격은 충돌 순간 아무도 죽이지 못하며, 누구라도 창에 맞아 죽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단지 말 몇 마리에게나 부상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
비록 첫 번째 열의 창기병이 창으로 적에게, 특히 적이 탄 말에게, 약간의 피해를 입힐 수 있더라도 뒤따르는 다른 열들은, 최소 두 번째와 세 번째 열은, 그렇게 할 수 없으며 대신 창을 버리고 검을 들고 싸워야할 상황에 처한다.[27]
La Noue, François de. 1587. 'The politicke and militarie discourses of the Lord de la Novve. Whereunto are adioyned certaine obseruations of the same author, of things happened during the three late ciuill warres of France'
파일:Issus1529.png
이소스 전투. 1529년 그림

랜스로 앞열의 적을 찔러서 넘어뜨리거나 부상을 입힌 다음에는 검이나 워해머 등 짧은 무기를 들고 싸움을 계속했다. 백병전은 이렇게 교전을 시작한 두 부대 중 하나가 집단으로서 응집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응집력의 와해는 충돌 순간 대열을 더 잘 유지한 측이, 점차 우위를 점하면서 압박 강도를 높이고, 아군의 진형을 유지한 채 상대의 대열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면서 발생했다.
'그러므로 서둘러 저들을 공격하여, 우리의 랜스가 부러졌을 때, 뽑아든 칼을 저들의 머리 주위로 휘두르며 가능한 한 빨리 가까이 접근하자. 그렇게 해서 우리의 끊임없는 타격으로 저들의 긍지가 꺾이도록.'[28]
Walter the Chancellor, trans. Thomas S. Asbridge and Susan B. Edgington, Walter the Chancellor’s the Antiochene Wars.
중무장 상태의 마상전투에서, 너는 항상 말머리를 상대가 있는 방향쪽으로 유지하고, 반대로 상대는 너를 정면에서 마주하지 못하도록 상대의 측면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제자리에서 버티거나 상대를 강하게 밀어붙어야한다. 상대가 너를 밀어붙일 때 고삐를 잡아 버티거나 가능한 한 정면에서 맞받아치지 못한다면, 너의 말은 간단히 뒤로 밀려날 것이고, 너는 결국 시합장(또는 전열)에서 벗어나거나 그밖에 여러 치욕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가 네 쪽으로 말을 몰아서 달려들면, 너도 반드시 정면에서 맞받아쳐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검, 에스터크, 워해머 등의 무기로 공격을 가하면, 너도 오른손에 든 검이나 건틀릿을 낀 왼손으로 정면에서 받아쳐야 한다. 상대가 너를 밀어붙이면 너도 강하고 빠르게 정면에서 밀어붙여야한다.[29]
Pietro Monte, (1509), Pietro Monte's Collectanea: The Arms, Armour and Fighting Techniques of a Fifteenth-Century Soldier, trans. Jeffrey L. Forgeng.
앞에서 인용된, 선두열에서 멈추지 않고 돌격할 수 있는 기병은 100명 중 25명뿐이라는 드라누의 관찰은 백병전에서도 유효했다. 소수의 정예 기병들만이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침착하게 검술을 구사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공격도 방어도 제대로 못 하고 잔뜩 흥분한 채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다가 부상을 입고 쓰러지거나 도망치는, 사실상 인간 방패 역할을 하면서 이들을 보조했다. 갑옷도 입지 않고 백병전 경험이 부족한 근대의 경기병의 경우 제대로 싸우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인원은 10명 중 1명에 불과하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프랑스 제1제국의 한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기병 100명 중 2-3명은 찌르기를 가하는 것만 생각하며[30], 전투에서 쓸모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이들뿐이다.
5-6명은 공격들을 방어하다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안전한 기회가 생겼을 때만 가끔 한 번씩 찌르기를 가한다.
나머지 91명은 적에게 맡겨진다."[31]
Pierre Cantal, Etudes sur la cavalerie, 1905
충돌 상황이 병사들에게 주는 정신적인 충격은 대단히 크기 때문에, 생전 처음으로 적진에 돌격한 부대원들이 무기를 사용하게 하기 위해서는 장교들의 본보기와 격려가 필요하다.
경험에 따르면, 전장이 좁지 않고 적과 서로 거리를 벌릴 공간이 충분히 있으면 병사들은 백병전에서 무기를 사용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으며, 그 결과 적들이 입게 되는 인명 피해는 미미하다.[32]
William Balck, Tactics Volume II: Cavalry, Field and Heavy Artillery in Field Warfare,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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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무장 전사들을 앞세운 채 원거리에서 활로 교전하고 있는 보병 전열.
1220년경 그림.

야생 상태의 동물들이 보이는 모습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대등하거나 더 강해 보이는 경쟁자와의 근접 전투 상황에서 커다란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가능하면 그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러한 본능을 억제하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집단의 응집력이었다. 따라서 보병대든 기병대든 분열되고 고립되어가는 느낌에서 쌓이기 시작한 두려움이 병사들의 전투수행의지를 꺾는 임계점을 넘는 순간 더 이상 의미 있는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Q. 중기병의 공격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A. 적의 의도를 알아채는 즉시, 주어진 시간에 따라서 기병들을 하나 또는 여러개의 밀집된 종진으로 배치하고, 중기병 대열의 중앙으로 돌격해야 한다.
중앙을 뚫고 나간 다음 반바퀴 돌면 이 크고 무거운 기병들의 뒤를 잡을 수 있고, 매우 쉽게 하나씩 포위해서 각개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
창기병도 흉갑기병과 동일한 방식으로 상대해야 한다; 즉, 종진으로 돌격해서 중앙을 뚫고 나가는 것이다.
대열을 돌파해서 포위한 뒤, 백병전으로 최대한 강하게 압박해서 창기병들이 서로 무질서하게 뒤섞여 무력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창날로 찌를 수도 창대를 휘두를 수도 없게 된 창기병들은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창을 계속 들고 있거나[33], 창을 버리고 세이버를 뽑아들거나.
전자는 아주 쉽게 제압할 수 있고, 후자는 서로 동등한 조건에서의 싸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제국 근위 창기병 연대들은 양익의 기병들이 창으로 무장하지 않았다.
나는 1814년에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사례(하나는 브레다 근처의 호흐스트라텐에서, 다른 하나는 릴 근처의 퐁아트레셍에서)를 겪었다.
우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양 옆에 깊은 도랑이 파인 좁은 도로를 차지하기로 결심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창기병대와 교전했다.
나는 종진의 전위에 용감한 용기병들을 배치하고, 후위에 창을 내려놓고 세이버로 무장한 창기병들을 배치했다.
우리가 적들의 밀집한 대열 가운데를 뚫고 나간 뒤, 이어진 성공은 예상을 뛰어넘어서 우리는 아무런 위험 없이 적들을 검으로 베었다.[34]
-Antoine Fortune de Brack, (1831), Cavalry outpost duties
적 대열에서 그렇게 돌파당한 부분의 병사들은 이어지는 백병전(melee)에서 수적 열세로 곧 패배하거나, 또는 그러한 필연적인 결과를 예상하고 미리 도망치며, 부대의 사기가 좋지 않은 경우 대열이 유지된 부분의 병사들도 그들을 따라서 도망친다.
적과 아군 대열 모두에 돌파당한 부분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빠르게 패주하거나 싸우기도 전에 전황이 불리하다고 믿고 도망치는 병사들이 양쪽 대열 모두에서 생겨날 것이다.
따라서 적진을 향해 진격하고 돌격하는 도중 응집력이 약화된 정도가 크고, 교전을 시작했을 때 적에게 돌파당한 부분의 수가 많고, 등을 돌려 도망치기 용이한 상황일 수록 백병전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병사의 수가 빠르게 증가한다.
반대로 말하면, 적이 가진 응집력의 국소적 우위가 병사 개개인이 평가하는 개인 신변의 위험의 정도를 증가시킨 만큼 백병전을 회피하는 병사의 수가 증가한다.
충돌 순간 전의를 상실한 병력의 수가 많을수록 그 부대가 백병전을 성공적으로 마칠 가능성은 낮아진다.[35]
William Balck, Tactics Volume II: Cavalry, Field and Heavy Artillery in Field Warfare, 1903
그러므로 단단하게 밀집한 채 자리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는 보병 대형은 근접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예하고 규율 잡힌 중기병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상대였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 공작이 이끄는 노르만 기사들은 계속해서 궁수들과 보병들의 지원을 받고, 결국에는 거짓 후퇴 전술로 잉글랜드군의 진형을 흔드는 데 성공했음에도 전투 중에 윌리엄이 타고 있던 말이 두 마리 또는 세 마리나 죽고, 한번은 윌리엄이 전사했다는 소문에 전군이 붕괴할 위기까지 겪는 치열한 접전 끝에 어렵게 승리했다.
잉글랜드인들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용감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투창을 비롯해 치명적인 도끼와 막대기에 묶은 돌 등 다양한 원거리 무기를 던졌다.
……
기사들은 원거리 전투를 멸시하고 거부하여 검을 들고 대담하게 공격을 가했다.
노르만인들과 외국인들이 곳곳에서 지르는 커다란 함성이 무기 부딪치는 소리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찬 신음에 파묻혔다. 그렇게 한동안 양측 군대는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잉글랜드인들은 높은 지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방어에만 전념하는 전술의 이점, 많은 병력과 밀집대형, 그리고 방패와 다른 방어 장비들을 쉽게 관통하는 그들의 전쟁 무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그들은 감히 검을 뽑아 들며 공격해온 적들을 완강하게 막아서거나 쫓아냈다. 심지어 멀리서 투창을 던진 적들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그래서 이 맹렬한 반격에 겁을 먹은 좌익의 보병들과 브르타뉴 기사들, 그밖의 보조병들이 등을 돌려 도망쳤고, 무적의 노르만인들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공작의 전열의 대부분이 패주했다.
……
노르망디 공작의 말 세 마리가 전투 도중 죽어서 쓰러졌다. 그는 위기에 굴하지 않고 세 번 모두 땅으로 뛰어내렸고, 준마를 잃은 원한을 지체 없이 갚았다.
여기서 공작의 속도와 체력과 용기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분노를 실은 칼날로 끊임없이 방패와 투구와 사슬갑옷을 꿰뚫었고 방패로 많은 공격을 받아쳤다. 많은 기사들이 부상당하고 지쳤음에도 공작이 도보로 싸우는 것을 보고 경탄하여 다시 용기를 얻었다.[36]
William of Poitiers(c.1020–1090), trans. R.H.C Davis and Marjorie Chibnall, The Gesta Guillelmi of William of Poit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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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의 약점을 찌르기 좋게 개량된 형태의 검을 들고 싸우는 기병들.
13세기 그림.

검을 들고 싸울 일이 없어진 현대에는 옛사람들이 검에 부여한 (그리고 현대의 문학이나 매체에서 재해석된) 수많은 상징적 의미들 때문에 오히려 단순한 도구이자 병장기로서의 실용적인 의미를 간과하기 쉽지만[37], 검은 기병의 필수 무기 중 하나로 검에 대한 이해 없이는 마상전투의 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1266년 베네벤토 전투를 다룬 여러 연대기들은 새로 개발된 칼끝이 뾰족한 짧은 검으로 독일 기사들의 갑옷의 겨드랑이 틈새를 노린 프랑스 기사들의 전술을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지목한다.
만프레드의 어리석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샤를의 군사들은 지치고, 굶주리고, 수적으로도 상당히 열세였으며, 결국에는 전투에서 거의 질 뻔했다. 왜냐면 커다란 검을 들고 갑옷으로 중무장한 독일 기사들에게 프랑스와 프로방스 기사들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독일 기사들은 무릎과 무릎을 맞댄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천천히 진격하면서 눈앞의 적들을 베어넘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검을 휘두르기 위해 팔을 들어올릴 때 팔 아래의 약점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챘다.
이 전투를 다룬 연대기 작가들은 모두 프랑스 기사들이 독일 기사들의 검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의, 길이가 더 짧고 칼끝이 매우 뾰족한 검으로 무장했음을 강조한다.
독일 기사들의 팔 아래의 취약한 갑옷 틈새를 알아챈 프랑스의 기사가 이렇게 외쳤다. "칼끝으로 찔러!"
그의 동료들은 그렇게 했고, 자신들의 작고 날카로운 검을 독일 기사들의 흉부에 찔러넣었다.
곧 독일 기사들의 굳건한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38]
Ewart Oakeshott, Sword in Hand.
이후 전신 갑옷으로 중무장한 군인이 전장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백병전에서 갑옷 입은 적을 공격할 때는 주로 얼굴과 골반과 겨드랑이의 갑옷 틈새를 노렸다. 그리고 충돌 상황과 마찬가지로 기수 대신 말을 먼저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갤럽으로 달리면서, 랜스를 겨드랑이 창받이에 끼우고, 적의 배를 겨눠라.
랜스가 부러지면, 뽑을 때 검집이 딸려오지 않도록 안장턱 왼쪽에 고정시켜 묶어둔 에스터크를 뽑아들고 면갑과 배와 겨드랑이의 갑옷 틈새를 찔러라.
에스터크를 부러트리거나 잃어버리면, 왼쪽 허리에 찬 아밍소드를 뽑아들고 싸워라.
아밍소드를 부러트리거나 잃어버리면, 오른쪽 허리에 걸어둔 워해머로 손을 뻗어서 잡고 위로 당겨서 고정을 푼 다음 들고 싸워라.
워해머를 잃어버리면 등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들어라.
에스터크 또는 아밍소드, 워해머를 손에 들고, 배와 겨드랑이와 면갑의 갑옷 틈새를 때리고 찌르면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가지고 적과 격투를 벌여야 한다. 머리와 손에 부상을 입히면 적은 어쩔 수 없이 항복할 것이기 때문이다.[39]
Juan Quijada de Reayo, (1548), Doctrina del arte de la cavalleria.
말을 공격해도 된다면, 상대의 말이 네 말보다 강하더라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한 말도 약한 말처럼 쉽게 죽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결투에서 말을 공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면, 크고 강한 말을 탄 사람이 대단히 유리하다. 면갑 틈새에 칼끝을 박아넣거나 머리를 후려치는 공격을 가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모두가 상대의 말을 공격해서 죽일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무기를 정확하게 휘둘러 맞히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에, 크고 힘센 말로 밀어붙이는 전술이 일대일 결투에서만큼 유용하지는 않다.[40]
-Pietro Monte, (1509), Pietro Monte's Collectanea: The Arms, Armour and Fighting Techniques of a Fifteenth-Century Soldier, trans. Jeffrey L. Forg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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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비딤 전투. 1370년경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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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us Hector Mair (1548), Opus Amplissimum de Arte Athletica, 뮌헨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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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hausen, (1614), Ritter kunst: Darinnen begriffen, I. Ein trewhertziges Warnung- schreiben wegen deß Betrübten Zustands jetziger Christenheit. II. Undersicht aller Handgriffen so ein jeder Cauallirer hochnötig zu wissen bedarff

17세기의 군사저술가 조르조 바스타는 패주하는 적을 추격할 때를 제외하면 수축구보(collected canter)가 가장 적절한 속도이며 그보다 빨리 달리면 검을 다루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승마 수축구보(collected canter) 강좌

말을 잃거나 말에서 떨어진 기병들이 도보로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때문에 후안 퀴자다는 전투 중 말을 잃었을 때 도보전투에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리 전면만 판금이고 뒷부분과 발 부분은 사슬로 이루어진 경량화된 다리 갑옷을 입을 것을 추천한다.
카파르땁의 프랑크족 기병대가 적은 수로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는 적군 수가 적음을 알고 그들을 공격하러 갔다. 그들은 한 무리를 이루어 우리를 공격하려 매복하고 있었다. …
우리는 적군 중 18명을 낙마시켰다. 그중에는 창에 찔려 죽은 자,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지고도 무사한 자, 그리고 타던 말이 창에 찔리는 바람에 걸어가야 하는 자가 있었다.
적군 중 무사하여 땅에 있던 자들은 자신들의 칼을 붙잡고 서 있다가 자신들의 옆을 지나가는 모든 병사를 칼로 쳤다. 줌아 알누마이리가 적군 중 한 명의 옆을 지나가자 그 적병은 줌아에게로 걸음을 내딛어 그의 머리를 칼로 쳤다. 줌아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적병은 칼로 투구를 절단했고 그의 이마를 갈랐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피가 다 마를 정도로 나왔고 이마의 상처는 물고기 입처럼 열려 있었다. 우리가 프랑크인들과 싸우는 가운데 나는 줌아에게 가서 말했다. "아부 무함마드, 당신은 왜 상처에 붕대를 감지 않소?"
그는 "지금은 붕대로 상처를 처맬 시간이 아니오." 라고 말했다.
우사마 이븐 문끼드(1095-1188) 저, 김능우 역, '성찰의 서'
창들은 깨지고 검과 단검이 맞부딪친다. 전사들은 도끼로 상대방의 머리를 부수려 하고 검으로 말의 배를 찌른다. 기수는 철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칼날이 그것을 뚫고 지나가기 힘들다……
공격하는 자와 공격당하는 자가 지나치게 근접하여 뒤엉켜 있으며 보다 강력한 타격을 가하기 위해 팔을 뻗을 공간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각자가 자기편을 식별하도록 갑옷 윗부분에 부착된 명주천은 곤봉, 칼, 창에 의한 타격이 갑옷 위에 가해짐으로써 수많은 조각으로 갈라지고 찢어졌으며 그 결과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가 극히 힘들었다……
말들이 전장의 곳곳에 나뒹굴고, 아랫배에 칼을 맞거나 무릎을 베인 채 마지막 숨결을 쉬기도 하고, 주인을 잃고 이리저리 날뛰다가 우연히 누군가가 올라타 달려나가기도 하였다. 시체가 나뒹굴지 않거나 죽어가는 말이 발견되지 않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백작이 적군의 대오 속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투르넬 출신의 피에르라는 인물은 자신의 말을 잃고 걷고 있었다. 혈통이나 무예면에서 기사가 될 자격이 있는 이 전사는 왕의 진영에서 귀하고 훌륭한 자질의 사람이었다. 불로뉴 백작이 결코 물러서려는 마음 없이 전투를 개시하고 그를 에워싼 사람 모두를 상대로 불굴의 저항을 하는 것을 본 피에르는, 신속히 그를 향해 나아가 가죽과 쇠사슬로 만들어진 마갑을 왼손으로 들어올리고 오른손에 든 검을 말의 배에 찔러넣었다.
기욤 르 브르통(1165-1225), Philippide
3.1.1.3. 연속돌격?
한국에서는 기사들이 일렬씩 순차적으로 돌격하여 랜스로 찌르고 난 뒤, 곧바로 방향을 돌려 빠져나와서 후방으로 가서 다시 랜스를 보급받으며, 후열이 먼저 돌진한 앞열을 엄호하면서 연쇄적으로 돌진했다는 설이 2011년 한 역사 커뮤니티에서 있었던 논쟁으로 퍼져나간 적이 있었는데, 사실은 이것이 보편적인 랜스 전술이었다는 근거는 커녕 실존했다는 근거조차 없다.

창기병들을 얇은 대열을 이룬 여러 개의 소부대로 나눈 뒤 방진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공격하는 전술은 실제로 사용되었지만, 이건 적을 포위해서 교란하고 노출된 약점을 찌르는 목적이지 랜스를 공급받으며 정면에서 연쇄 돌격으로 방진을 깎아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중세의 지배적인 전술이 아니라 고대부터 근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기병 전술이었다.
클루시노 전투(1610). 파이크를 앞세운 보병 전열에 돌격하는 후사르. 1620년경 그림

그리고 이런 이론의 타당성을 강화하는 근거로 자주 사용되는,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 역시 랜스로 앞열만 찌르고 열이 번갈아가며 연쇄 돌격을 행하였다거나, 이를 위해 대열이 얇았다거나, 창병을 이기기 위해 기병창이 의도적으로 길어졌다는 이야기들도 애초에 사실이 아니다.

우선 후사르 랜스가 보병들의 장창보다 길다고 기록에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이 시기쯤 보병용 장창이 기동성을 위해 4.2~4.8m로 짧아졌기 때문이다. 1629년 스웨덴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후사르 랜스의 길이는 5m 정도(3.8-5.6m)로, 초기에 5.98m였다가 1616년부터 5.3m로 규정된 스웨덴 장창보다 짧은 편이었다. 1737년 Kampenhausen 소장이 랜스의 길이가 3싸젠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18세기 폴란드와 19세기 러시아의 도량기준이 달라 폴란드식으로는 5.3m인 것을 러시아 것으로 치환하여 6.2m로 착각한 것으로 시작하여 파이크를 상대하기 위해 후사르의 랜스가 그에 맞춰서 길어졌다는 추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에 2열 횡대로 바꾸기 이전까지 후사르들은 huf라고 불리는 두꺼운 4-5열 종진[41]으로 돌격했다.

연쇄돌격은 무슨 비장의 전술 같은 게 아니라 단순히 돌격이 실패해서 패주하거나 예비대의 지원을 받으며 후퇴하는 기병전의 일반적인 상황들을 앞의 '스웨덴 장창에 맞춰서 길이를 늘린 랜스' 떡밥과 연결해서 과잉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빠르게 사기를 회복하고 다시 힘을 냈다. 그리고 마치 새끼들을 빼앗긴 암사자와 같이 복수심에 불타며, 더욱 힘차게 돌격해 그물을 찢듯이 적진을 뚫고 나갔다.[42]
순례자들의 여정과 리처드 왕의 무훈 - 아르수프 전투(1191)
엄청난 분노에 사로잡혔고 어떠한 군사 기술도 가장할 수 없었던 리샤르는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했고, 정확히 로마군의 중앙에 이르러 전투를 교착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로마군) 최전열의 궁수 부대가 돌격을 잠시도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로마군 후위의) 바송빌에게 압력을 가하며 강하게 뒤로 몰아붙였고, 그런 다음 두카스의 부대를 공격했다. 그곳에서 집요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리샤르를 따라간 기병들 중 많은 수가 쓰러졌다; 하지만 기병들이 강하게 밀고 나가는 가운데 쓰러졌기 때문에 군대 전체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기병들의 압력이 엄청났고, 방패에 부딪힌 창이 부러지면서 큰 소음이 울려 퍼졌다; 수많은 화살이 날아왔고 모든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음에도 리샤르는 결국 사나운 돌격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로마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창에 맞아 쓰러진 두카스가 거의 포로로 잡힐 뻔했다.[43]
Joannes Kinnamos(1143-?), trans. Charles M. Brand, Deeds of John and Manuel Comnenus.]
이 시대의 군사저술가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병 돌격은 단번의 돌격으로 적의 대열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서 가능한 한 빨리 진형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일단 말과 기수의 체력과 정신력이 무한하지 않다. 이름만 가난한 전우들이지 부유한 기사들이었던 성전기사단조차도 기사 한 명당 전투마 '2마리', 서전트 기병 한 명당 한 마리씩만 지급되었으며, 보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13-14세기의 평범한 기사들의 군마의 품질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연속된 돌격으로 말이 지쳐도 함부로 바꿔탈 수도 없었다. 더구나 십자군 국가들 같이 항시 전시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면 군대의 주력이자 직업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 30%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 중기병들은 전의가 낮은 편이고 심하면 거의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경우도 있었다. 위의 충돌 항목에 인용된, 얇은 선형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프랑수아 드 라 누의 말처럼 이런 훈련도 낮은 기병들은 단 한 번의 패주로도 전의를 잃고 전투력을 상실할 수 있었으며 보통 정예병력도 2-3번이 한계였다. 십자군과 중기병 돌격

헤이스팅스 전투크레시 전투 같은 중세의 유명한 전투들의 기병 연속 돌격 사례가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건 자세히 뜯어보면 전부 돌격이 실패하고 패주한 것이거나(치비타테 전투)(1053)[44][크레시(1346)] 유인후퇴전술이었다. 헤이스팅스 전투를 기록한 푸아티에의 윌리엄(c.1020–1090)의 연대기에서는 그냥 대놓고 잉글랜드인들의 맹렬한 반격에 겁을 먹은 기사들이 등을 돌려 도망쳤고 윌리엄 공작의 전열의 대부분이 패주했다고 표현한다.

살라딘의 측근이었던 바하 앗딘은 아르수프 전투에서 십자군 기사들이 도망치는 무슬림 기병들을 추격하다가 매복을 경계하며 멈춰서서 재정비를 하고 다시 추격하는 식으로 총 3번의 돌격을 가했다고 표현한다.[아르수프(1191)][47]

왜 이런 오해가 시작되었는지 명확한 기원을 찾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다음의 링크에 나오는, 몇 개의 제대로 나뉘어서 사선 대형으로 달려가다가 첫 번째 제대의 돌격이 성공하면 두 번째 제대가 전과를 확대한 다음 이후 제대들은 상황에 맞게 싸우고, 첫 번째 제대의 돌격이 실패하면 후속 제대들의 엄호 하에 돌아온다는 자료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섣불리 추격에 나서면 다음 열의 기병에게 당하기 때문에 보병은 꼼짝도 못하고 맞아야 했다'는 서술이 이 자료의 상황과 유사점을 보이기 때문. *

위에 인용된 프랑수아 드 라 누의 묘사처럼, '랜스를 든 중기병들이 얇은 횡대로 돌격하고, 한번에 일부 제대(100명 중 25명)만이 돌격하고, 창으로 한 번 찌르고 검을 한 번 휘두른 뒤 후퇴'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들 자체는 실제로 많은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문제는 매우 중요한 세부사항들이 인지되지 못했거나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드라누의 정확한 설명에 따르면 횡대로 돌격하는 건 멀리서 창으로 찌르고 빠르게 물러나기 위함이 아니라 접촉 순간의 충격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고[48], 100명 중 25명만이 한 번에 돌격하는 건 나머지 75명은 교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서워서 도망쳤기 때문이고(...), 창으로 찌르고 바로 후퇴하는 건 이미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도망쳤고 돌격이 실패한 상황에서 혼자 남아서 싸우다가 개죽음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런 돌격 실패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드라누는 얇은 횡대보다는 4열 이상의 두꺼운 대열을 추천한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추정해보면 아마도 19세기 군사사학자들의 '기사/중기병의 중세 천 년 지배' 이론과 린 화이트의 등자이론을 그것에 반박하는 최신 학설들과 어설프게 절충하려 한 점일 것이다. 기사의 중세 천년 지배 이론은 문명적인 19세기의 전쟁에서 군대의 중추는 정교한 전술에 따라 배치된 보병들이므로 반대로 미개한 중세의 전쟁은 멍청하고 난폭한 기병들의 힘에 지배되었을 거라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린 화이트의 등자이론은 등자의 발명이 무거운 갑옷을 입은 중기병의 카우치드랜스 충격 전술을 가능케 했으며 이로 인한 중기병의 무력 우위가 중세 유럽 봉건제의 형성에 기여했고, 기병의 우위를 가져온 등자와 카우치드랜스라는 기술이 장궁과 장창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대체되는 '14세기 보병 혁명'으로 봉건제가 해체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술결정론이다. 반면에 존 프랑스 등 현대의 연구자들은 19세기의 편견을 버리고 사료를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중기병과 봉건제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으며[49] 기사 지배 이론은 매우 과장됐고 중세시대의 전쟁에서도 보병과 보병전술이 매우 중요했다고 주장한다.중기병의 신화중세 봉건 기사에 대한 오해들. 누군가 이러한 양측의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타당성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고 서로 모순되는 여러 주장들을 대강 절충한 결과 '중세의 보병들은 기사들이 돌격하기만 해도 겁먹고 흩어지는 오합지졸이 아니었고 기병 돌격은 잘 짜인 보병 방진을 절대 정면으로 돌파할 수 없지만 그렇게나 막강한 보병들을 중세의 기사들이 정면으로 짓밟고 전장을 지배했다'는 모순된 결론이 나왔고 이 말도 안 되는 이론을 그나마 말이 되게 설명하기 위한 시도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연쇄돌격으로 방진 깎아내기 이론이었을 수 있다.

이렇듯 인터넷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반박의 여지 없는 정설로 인정되어온 이론들도 거슬러 올라가면 전제부터가 잘못된 경우가 많다.

3.2. 경기병

고대부터 최초의 기병은 경기병[50]이었고, 활약의 내용은 고대나 중세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보통 경기병이 자주 맡은 역할은 정찰 및 적진 교란과 전투 종반에 후퇴하는 적의 추격이었다.

14세기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에서 chevauchee라는 기마 약탈 전략을 운용했는데 경기병의 기동성을 활용해 프랑스 영토들을 초토화하고 약탈하는 전략을 운용했다. 다만 약탈하는 과정에서 하마하는 경우도 있었을 테니 관점에 따라 승마보병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 잉글랜드만 썼던 전략은 아니었으나 유독 잉글랜드가 자주 사용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화살을 소진한 장궁병들 중 일부가 즉흥적으로 기병으로 합류하기도 했는데 잉글랜드가 저런 기마 약탈 전략을 상당히 자주 썼던 만큼 충분히 가능했을 수 있다.

활을든 궁기병은 중세에도 활약이 두드러졌다. 12세기 초반에는 경무장한 금나라 기병 17명이 자기들을 쫓아오는 2,000여 명의 북송 보병대를 활만 쏘아 일방적으로 유린하여 궤멸시키기도 했고,[51] 금나라의 기병 편제는 항상 중기병과 경기병이 한 부대로 편성되어, 같이 돌격하면서 화살을 쏴주면서 엄호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이 경우 충돌 전에 먼저 적의 숫자와 기세를 꺾어둘 수 있어 중기병의 돌파가 쉬워졌다. 게다가 전투의 종반에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전력을 가장 확실하게 줄이는 데에 경기병만큼 좋은 병과도 없었다.

몽골 제국의 경기병은 두 종류의 합성궁과 세 종류의 화살을 사용했는데, 활의 사용은 단순한 엄호, 견제를 넘어서 적의 대열을 와해시키고 타격을 주는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중기병도 다수 존재했으나 역시 동시대의 기병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경장이고, 전투의 주력은 주로 활을 든 경기병이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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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군 중보병을 쏘아죽인 몽골 경기병

유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나라들에서 유독 활을 이용한 경기병을 많이 운용하였는데, 예컨대 유럽의 헝가리중동의 여러 이란계, 튀르크계 제국들이나 중국이 많은 경기병을 운용했다. 그중에서 사산 왕조맘루크에서는 중무장한 기병이 활을 쏘며 돌격하는 전술로 유명했다. 조선은 무과시험들에 기마궁술을 포함해 정책적으로 궁기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였고, 일본의 초기 사무라이들은 마상궁술을 중시 여겼다. 또한 카우치드 랜스가 발달하기 전 극소수 서유럽 기사들도 마상궁술을 사용하곤 했다.

3.3. 중기병 VS 경기병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현대 역사가들은 경기병을 중기병보다 우위에 두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유럽 봉건시대 기사의 갑주를 '리더십 결여'의 산물로 평하며 기병의 생명인 기동성과 화력을 떨어뜨리고 기습을 불가능하게 만든 반면, 몽골의 경기병은 기동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유기적인 전술을 펼 수 있었다고 평했다. 또한 존 키건은 날붙이끼리 부딪히던 중기병의 전법을 육탄전을 고무하던 게르만족의 군사문화와 결부시켰다. 특히 레그니차 전투는 유럽식 중기병과 중앙아시아 경기병의 충돌로 서양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오히려 서양 쪽에서 많은 의의를 두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프로이센이 리그니츠의 전장 위에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바람에 숱하게 강의주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주로 전장에서의 기동력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례로 차용되며 당시 유럽식의 충격기병이 경장비의 기병을 상대하는 데 겪었던 어려움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에도 언급이 있다.

하지만 몽골군 전력의 20~40%은 항시 중기병이었다. 더불어 중기병을 열심히 육성한 세력이 경기병 위주의 세력을 제압하고 복속시킨 사례 또한 많다. 최초로 중장기병을 육성했을 거라 추정되는 사르마티아는 그 중장기병의 힘으로 다른 유목민들을 제압하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고구려에서는 유목민족들의 경기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으로, 요동에서 생산 되었던 많은 양의 우수한 철을 바탕으로 중장기병을 양성하여 남만주와 중만주를 오랫동안 지배하였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들어선 요나라와 금나라에서도 중장기병을 운영했고 청나라도 중장기병을 운영했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기마술과 궁술이 뛰어나 궁기병으로 한가락 했다는 나라나 민족들은 실제로는 중기병도 열심히 육성하였다. 이유는 직접적으로 싸우는 데는 중장기병이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금나라는 극단적인 초중장기병[52]까지 나올 정도로 중장기병 육성에 심혈을 기울인 국가였는데, 바로 그 중기병의 힘으로 다른 유목민인 요나라를 완파하고[53] 몽골고원의 유목민 또한 복속시켰다.[54]

이는 아랍에서도 드러나는데, 이집트맘루크 중기병과의 전투에서 몽골기병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맘루크 기병과의 근접전을 강요받았고, 그 근접전에서 몽골기병은 크게 패한다. 맘루크는 기마술, 창술, 검술, 궁술에 모두 통달해야 했으며 4 과목에 대한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충실한 갑옷의 힘으로 마상사격에서도 우위를 점했고 결국 몽골군은 사격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해 근접전 승부에 끌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 원정에서도 이슬람 경기병은 번번히 유럽의 중기병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570기의 중기병이 2만이 넘는 이슬람군을 박살내는 전투까지 있었고 이런 전투들이 한두가지도 아니고 아예 시리즈물로 많았다. 결국 나중에는 이슬람에서 육성한 동급의 중기병이 이에 대항하여 맞돌격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또한, 중기병 위주인 이란 사파비조의 경기병 위주인 몽골계 칸국들의 전쟁에서는 이란 사파비조가 대한 대단한 우세를 띠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징기스칸 기병 VS 호라즘 기병의 2차전이었는데, 이 삼백 년 만의 승부에서 결과가 달라진 건 앞서 맘루크 기병 VS 몽골 기병의 사례와 같이 사파비조 측이 몽골 기병에게 근접전을 강요하는 전법을 집중적으로 개발한 데 있었다.

사실 무장이나 전술에서 딱히 달라진 건 없었고 몽골계 칸국들이라고 무능한 장군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란계 중기병이 징기스칸 시기에 당했던 결과의 설욕에 성공했던 건, 이들을 지휘했던 그 당시 지휘관들 자체가 몽골-튀르크계 전법의 전문가였기에 징기스칸식 전법의 강약을 너무나도 잘 꿰고 있었던 반면 몽골계 칸국들은 징기스칸 시기와는 달리 아군의 강약을 파악하는 데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달라진 점은 우선 몽골계 칸국들에겐 없거나 부족한 화기를 직접 공격용이 아닌 전장을 제한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정찰 용도로 경기병 부대를 반드시 따로 편성해서 징기스칸 때와는 달리 몽골계 기병의 우회 타격이나 지휘선 교란을 결코 허용하지 않은 데 있었다. 이러니 사파비조 기병을 상대하는 몽골 기병들은 징기스칸 시기와는 달리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중기병들과의 근접전을 자주 강요당해야 했고, 그냥 봐도 알 수 있듯 호라즘 시절 당시 중기병과 거의 무장이 달라진 적 없었던 이란 중기병들에게 속절없이 깨져나갔다.

그리고 몽골군이 헝가리를 공격해 대승리를 거두었다고 알려진 모히 초원의 전투로부터 약 44년 후의 제2차 헝가리 침공(1285~1286년)에서 노가이 칸과 탈라부가가 이끄는 경기병 중심의 몽골군 3만 명(혹은 5만 명)은 중무장한 기사 즉 중무장 기병이 주축인 3만 명의 헝가리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전멸당했던 반면 헝가리군의 피해는 매우 미미했다.#

아울러 제3차 십자군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끈 독일 십자군은 1190년 5월 14일에 벌어진 이코니움 외곽의 전투에서 경기병이 주력인 셀주크 술탄국의 군대 1만 2천여 명을 격파했는데, 이는 당시 십자군의 주력이 마상창을 가진 7천 명의 중무장 기병들이었고 이들이 셀주크 군대를 향해 감행한 파괴적인 중기병 돌격 덕분이었다.#

이렇듯 중기병은 전장에서 매우 강력한 병종이었으며 중기병 무시 풍조는 17-19세기에 걸쳐 유럽에 팽배했던 중세 무시 사고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경기병과 중기병 중 어느 쪽이 언제나 우세하다고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으며 '전투의 상황에 따라' 그 효력이 다른 병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두 차례의 도릴라이움 전투로 십자군 중기병이 근접전을 강요한 1차 도릴라이움전투에서는 십자군이 승리했지만 투르크 궁기병의 스웜전술에 휘말인 2차 도릴라이움 전투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십자군이 궤멸당했다. 근접전에서는 중기병이 우세한 반면, 경기병은 적과 직접 충돌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데에 더 유용했다.[55] 어차피 대부분의 전쟁은 전투에서 승부가 나기 때문에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경기병이 보조하는 형태로 병력을 구성했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논쟁이 '큰 말을 탄 기병 VS 작은 말을 탄 기병'인데, 경기병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사람들은 작은 말을 탄 몽골 기병이 그보다 큰 말을 탄 유럽 기병과 싸워 이긴 사례를 들어 '작은 말을 탄 기병'이 '큰 말을 탄 기병'을 이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계 전쟁사를 보면 그와 반대되는 사례들도 있는데, 우선 13세기 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전쟁에서 작은 말을 탄 스코틀랜드 기병들은 그보다 큰 체구의 말을 탄 잉글랜드 기병들에 밀려 열세를 면치 못했으며, 18세기 인도에서도 작은 말을 탄 마라타 동맹의 기병들은 그보다 큰 체구를 가진 중앙아시아산 말을 탄 아프간 기병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바 있다. 즉, 그저 단순히 작은 말을 탄 기병이라고 해서 무조건 큰 말을 탄 기병보다 우세하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4. 근세

4.1. 서유럽

16세기 초, 장창병총병, 스위스 용병으로 대표되는 보병의 발전으로 기병은 위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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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군의 화기에 의해 저지당하는 프랑스 중기병의 돌격.
1503년에 벌어진 체리뇰라 전투(Battle of Ceriñola)를 다룬 그림이다.

예를 들어 1503년 4월 28일에 일어난 체리뇰라(Cerignola) 전투가 있는데 이 전투에서 활약한 에스파냐의 명장인 'Great Captain' 곤살로 데 코르도바는 프랑스군이 잘 볼 수 없는 위치에 야전 참호와 토담을 만들고 총병과 쇠뇌병을 다수 배치하여 프랑스군 기병대가 지근거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총지휘관인 느무흐 공작 루이도 그 피해자 중 하나로 등록될 정도. 이후 프랑스군의 포병대는 에스파냐군의 야전축성을 파괴하는 데 실패했고, 에스파냐군의 기보 총돌격은 프랑스군을 패주시키며 에스파냐군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그래도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는 여전히 기병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기병의 위상약화는 백 년 정도 늦출 수 있었다. 또한 16세기 중엽부터 기병이 권총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기병은 다시 보병에 대한 우위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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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년 드뢰 전투에서 위그노 기병에게 포위당한 스위스 용병
드뢰 전투는 보병이 기병에 비해 열세가 된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로, 화기의 발전으로 도태된 것은 기병이 아니라 총기병들에게 얻어맞은 스위스 밀집방진이었다.

이후 1587년 쿠트라 전투(Battle of Coutras)에서는 프랑스 국왕군의 중기병이 위그노군의 총기병에게 패배했다. 이때부터 기존의 중기병들인 돌격기병들이 확실히 쇠퇴하고, 사격 위주로 싸우는 총기병대가 오와 열마다 번갈아 교차 사격을 하는 카라콜 전술이 조명받기도 했다. 그러나 보병화기의 화력이 기병화기보다 위력이 높았기 때문에 카라콜의 변형전술인 신교도 카라콜, 스네일(snail), 리마콘(limacon) 등이 주를 이루다가 30년 전쟁에서 스웨덴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총을 쏜 뒤 돌격하는 "하카펠리타트"를 육성함으로써 돌격기병을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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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기병의 퀴레이스 아머

이에 따라 마갑 역사 줄어들고 기마병이 입는 갑옷도 변화하였는데, 화기가 발달하기전에는 전신 판금 갑옷을 입다가, 화기가 발달하고 나서부터는 총알을 막으면서 사람이 입고 다닐만한 무게를 지니기 위해 맞아도 덜 치명적인 부위의 갑옷을 없애는 대신, 중요 부위를 매우 두껍게 하는 퀴레이스 아머가 유행한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며 보병에 대한 기병의 우위는 17세기 중반 들어 보병의 장창병 비율 감소로 인해 더 심화되어, 기병은 이전 세기보다 전투에서 더 중요해졌다.[56]
보병전에 참여하지 말고 짐의 기병을 활용하라, 보병전은 손실만 많고 승패를 결정짓지는 못한다.
루이 14세가 뤽상부르 원수에게 내린 명령
물론 유럽에서는 동아시아처럼 무턱대고 보병에게 기병이 들이박는 경우는 덜했고 보병이 기병을 막아내는 경우도 꽤 있었으나 전투에서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기병이었다. 보병전은 지리멸렬했으나 기병전은 단 5분 만에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30년 전쟁 이후 서유럽에서는 측면전투가 굉장히 중요해졌는데 이때 측면전투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기병이었다.[57]

그러나 17세기 극후반에 소켓식 총검이 개발되고 수발총이 개량되어 대량보급된데다가 포병이 엄청나게 강해져서 18세기가 되면 기병은 보병과 포병을 제대로 뚫어낼 수 없었고 전투에서의 중요도도 이전보다 낮아져 16세기 중후반~ 17세기처럼 전투에서의 승패가 기병으로 결정되는 일은 적어진다.

4.1.1. 헌병군의 탄생

한편, 이 무렵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강화되고 군주권이 상승하면서 기병들한테 새로운 역할이 부여되기 시작했는데, 왕립 기병대들은 그 기동성을 살려 각 지방의 치안 업무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헌병군은 프랑스 왕국에서 탄생하였다. 중세 말에도 원수(Maréchal)가 통솔하는 원수군(Maréchaussée)이나 상원수(Connétable)가 이끄는 상원수군(Connétablie)은 전투수행이 주임무였으나 치안임무도 겸하였었는데, 이를 통합하여 국왕 직속부대로 만든 것이 바로 장다름(Gendarme)이었다. 근세~근대 동안 유럽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프랑스로부터 각국이 헌병군 제도를 도입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를 가리키던 프랑스어 단어 "Gendarmerie", "Maréchaussée",[58][59] "Connétablie"[60] 등이 헌병군을 가리키거나 이 개념을 대표하는 말로서 정착하게 되었다. 왕정이 폐지된 후에도 그 관념이 이어졌고, 오늘날의 프랑스 헌병대(Gendarmerie nationale)로 계승되었다.

물론 모든 나라가 프랑스말을 그대로 쓴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요먼으로 편성된 요먼대(Yeomanry)나 용기병대, 기타 기병부대가 그 역할을 맡았다가 근대적 경찰제도가 탄생하면서 임무를 이양하였고, 스페인 왕국의 카라비네로스(Carabineros)나 이탈리아 왕국카라비니에리(Carabinieri) 등은 총기병부대에 그 역할을 맡겼다. 더 후대에 탄생한 헌병군은 아예 기병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름을 쓰기도 하는데, 가령 현대 스페인 헌병군은 "시민수비대"(Guardia Civil; Civil Guard), 멕시코 헌병군은 "국가수비대"(Guardia Nacional; National Guard)라고 한다. 그래도 제도적으로는 이러한 헌병군에도 역시 영향을 주었으며, 헌병군을 두지 않고 국가경찰이 그 역할을 하는 나라에서도 기마경찰이라는 형태로 영향을 받았다.

4.2. 다른 지역들

신 등이 진영에 임하여 눈으로 그의 용병(用兵)하는 것을 보니, 그 병기가 심히 예리하여 나아감은 있으나 물러남은 없으므로 화살은 미처 잇달아 쏘지를 못하고, 총은 미처 다시 재지를 못할 정도이니, 이 오랑캐와는 같이 들에서 싸울 수가 없다는 것은 형언하기가 어렵습니다. 개원(開原)·무순(撫順) 양진(兩鎭) 및 이 동쪽 길은 한번 가자마자 뒤집히고 함락되어 심지어는 우리 나라 군사 만여 명이 해가 바뀌도록 비바람을 무릅쓰고 다녔으나 결국은 패배를 당하였으니 이는 신등이 못난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강홍립
―속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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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기병대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병대의 전술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명나라 군대는 마갑을 폐지하고 핸드 캐논 등을 활용하는 기병대를 같이 운용하기도 하였고, 청나라 군대는 별도의 편성없이 기병대가 기병무기 전반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도 부분적으로 마갑까지 갖춘 중장기병을 잔존시켜 운영하기도 하였고, 사르후 전투에서는 조선군을 상대로 돌격전을 펼쳐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창기병들은 경기병의 장비를 갖추어 빠르게 이동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경우 일찍이 창기병이 사장되었으며[61], 왜란 이후 국영 목장들이 파괴된 것을 복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조총의 위력을 알게 되어 조총수 중심으로 편제가 뒤바뀜에 따라 서양 국가들처럼 다른 기병-특히 궁기병-들의 입지도 매우 좁아진다. 또한 인구 증가로 인해 초지가 농지로 개간되며 말을 키울만 한 지역 자체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양대호란에서 조총병 중심의 군대가 청나라의 중기병에게 고전하면서[62] 기병 양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기병을 육성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양성된 조선군의 기병은 유럽의 용기병이나 후사르를 결합한 듯한 운용법을 보이게 된다. 거점 방어 시에는 하마하여 가지고 있던 총이나 활로 보병들과 함께 방어전을 수행하였으며, 야전에서는 수색대로 활동하거나 포병과 보병을 엄호하였다. 그러다 화력에 짓눌린 적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말을 타고 돌진하여 편곤이나 기병용 환도를 휘두르며 그 뒤를 추격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입히고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이들의 주된 역할이었다.링크

일본의 경우 보병 중심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국시대와 평화로운 에도 막부를 거치면서 전투용 마술의 맥은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센다이 번과 토사 번을 중심으로 의전용 마술이 근근히 이어져내려왔다. 특히 토사 번(현재 고치 현)은 마술 문화가 매우 발달해 말을 키우기에는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2위에 달하는 약 3만 5천마리의 말을 생산했을 정도였다. 토사의 번교에서는 무사들에게 마술 교육을 매우 장려했으며, 심지어 조선 통신사가 보여준 조선군 기병대의 진법인 마상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까지 카와고에 번(현재 사이타마 현)에서 배워와서 번의 주요 마술로써 가르치기도 했다.논문

서유럽의 카라콜 등장처럼, 총기가 등장하고부터는 활을 이용하는 궁기병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머스킷이나 권총을 이용하는 기병의 수가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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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가르군과 청군의 교전

특히 준가르청나라의 전쟁에서 기병대의 화기사용이 더욱 두드러졌다. 준가르군은 뛰어난 소구경 화포와 기동력을 이용하여 화력전을 펼쳤고, 적이 다가오면 지리적인 엄폐물을 활용하거나 수송용으로 쓰인 낙타등을 엄폐물로 삼아 말에서 내려 총격전을 펼쳤는데, 청나라 군대도 이에 하마사격과 화력전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군의 기병대가 마상궁술과 하마총격술, 화포사격술 등 다양한 사격전술을 펼치며 기술적 변화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아프리카 서부와 북부의 여러 나라들도 강력한 기병들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 오늘날 수단 공화국은 군대의 주력 부대는 기병들이 맡았는데, 중장기병의 대표 사례인 맘루크가 주적이다 보니 이들 역시 중무장을 했다. 이런 중무장 기병을 슈크리(Shukuri)라고 불렀는데 말한테 두꺼운 카폭[63]으로 만든 누비갑과 구리로 만들어진 머리 보호대와 가슴 받이 등으로 구성된 마갑을 입히고 기수 본인들도 카폭으로 만든 누비갑과 철제 사슬갑으로 단단히 중무장했다. 이러한 수단의 기병들은 대부분 사회 상류층인 귀족들이라서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것을 우려해 총이나 대포 같은 화약 무기들을 도입하는 정책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래서 1770년대 초에 수단 북부의 푼즈 술탄국을[64] 방문했던 유럽인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는 푼즈 술탄국의 군대 전체에 머스킷 소총이 하나도 없다고 기록했다.#

또한 오늘날 북아프리카 내륙의 차드 지역에 있었던 카넴 보르누 제국도 군대의 주력은 기병 부대였다. 카넴 보르누 제국의 기병들은 이웃나라인 푼즈 술탄국의 기병들처럼 두꺼운 퀼트로 만든 전투복을 말한테 입혔으며, 기병들이 가진 창은 날의 길이가 굉장히 길어서 거의 창 전체 길이의 3분의 1이나 되었다. 전성기인 11세기 말과 12세기 초 무렵, 카넴 보르누 제국은 무려 10만 명의 기병들을 거느렸으며[65]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이 아프리카 북부를 잠식해오자 오스만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오스만 군대 방식으로 훈련을 받은 머스킷 소총병을 말에 태운 기마 총병 부대를 편성하였다.#

5.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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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시기 오스트리아 제국군퀴레시어, 후사르, 울란을 재현한 모습.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기병의 위상은 예전보다 줄어들었다. 머스킷을 사용하는 전열보병이 대두되었고, 소총에 간편하게 탈부착 하는 소켓형 총검까지 발명되자 더 이상 장창병의 보호를 받을 필요도 없어져서 이내 장창병이 폐지되었다. 그러고도 잘 정비된 총병 전열은 단독으로 자신들을 향해 돌격해오는 기병대에게 잘 저항할 수 있었고, 격퇴 사례도 두드러졌다.

거기에 기술의 발달로 포병이 더욱 강화되면서 굳이 기병을 보내지 않더라도 선제타격으로도 꽤 위력적인 충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원거리 투사무기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사격전 특화 경기병 역시 거의 사라져 돌격전에서 한 두발 사격하고 바로 기병도 뽑아 돌격하는 방식이었고, 마상에서 활과 총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이집트 맘루크 기병대는 피라미드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보병방진의 화력을 못이기고 궤멸하기도 했다.

기병이 엄청 비싼 병과임에도 고대부터 세계 각국이 기병 육성에 필사적이었던 이유는 그 비싼 비용을 감당할 가치가 있는 막강한 위력 때문이었는데, 근대에는 대포와 총기의 발달로 화력에서 보병과 포병에 완전히 밀리게 되었고, 여전히 양성과 유지비용은 보병보다 훨씬 비싸서 전쟁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전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에도 여전히 유럽 각국은 기병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근대 유럽인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기병이 여전히 중요한 전력이었기 때문이다. 전투 이전이나 초반에 주요거점 장악이나 소규모 지역 쟁탈전, 정보수집 등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 전초전은 주로 기병들이 맡았으며, 빠른 투입이 필요할 때 포병과 보병은 절반도 못간 시점에 기병은 이미 도착하여 아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또한 적의 정찰병, 소규모 치중대를 습격하여 전황을 유리하게 조성하거나, 승리 후 적이 후퇴할 때 기병만큼 추격/섬멸에서 효율적인 병과는 없었다. 반대로 아군이 패배하여 후퇴할 때도 기병은 본인들이 빠르게 후퇴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성급하게 추격해오느라 본대와 멀리 떨어지게 된 적의 추격군을 기습하는 등 아군의 후퇴까지 엄호해줄 수 있었다. 다른건 몰라도 기동력만큼은 도저히 포병과 보병이 따라잡을 수 없는 장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 원정에서 후퇴하던 나폴레옹의 프랑스 대육군의 치중대나 정찰대, 그외 소규모 부대나 나뉘어져 있는 수많은 병사들과 행군 낙오병들은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대에 의해 직접적인 전투나, 보급부족 등으로 목숨을 잃은 바 있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야전과 회전에서 기병의 중요성은 다시 대두되었다. 가령 이시기 유럽각국은 기병의 역할을 축소시키면서 보병과 혼재편성하는 일이 지배적이었으나[66], 나폴레옹은 기병의 기동력과 돌파력을 잘 살리기 위해 마치 현대의 기계화 보병사단처럼 기병으로만 구성된 단독부대를 사단급 병력 규모(Corp)로 창설 및 재편성하였으며, 기병의 작전수행을 엄호하기 위해 기마포병대를 적극 활용하였다.[67] 또한,독일·폴란드 원정이후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창기병만의 독자부대로서 울란을 창설하여 자기 통솔하에 두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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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시에라 전투 전개도

또한 근대에 기병이 옛날처럼 돌격하지 못하고 철저히 포병과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로 전락했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일단 발달한 화기의 일제사격 앞에 더 이상 기병대가 옛날처럼 보병에게 '정면으로' 들이대기 힘들어 진 건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화기의 발달은 기병에게 위기와 더불어 기회 또한 제공했는데, 바로 총 때문에 방패나 갑옷, 그리고 각종 대기병 냉병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전열보병의 군복과 총검은 과거 중보병들의 갑옷과 방패, 장창과 폴액스에 비하면 기병과의 근접전에선 명백하게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68] 기병 입장에서는 화살과는 비교도 안되는 막강한 화력의 총포 때문에 적 보병대열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워지긴 했지만, 대신 일단 접근하는데 성공만 한다면 과거 중보병보다 훨씬 근접 대항능력이 떨어진 보병대를 그야말로 쓸어버릴 수 있었다. 초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 됐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근대의 기병대는 통념과 달리 중세 못지않은 수준의 엄청난 양학을 기록한 사례가 다수 있다. 기병이 보병대열로 뛰어드는데 어떻게든 성공만 한다면 그 쇼크 효과는 엄청나다는 것은 심지어 훨씬 후대의 2차 세계대전에서조차 확인되었으니 근대에는 말 할 것도 없다. 보병 입장에서는 머스킷 일제사격의 힘으로 기병이 접근도 못하고 우수수 녹아버릴 정도의 막강한 화력을 손에 넣게 됐지만, 반대로 기병돌격을 허용했을 경우에는 과거 중보병들보다 더 큰 재앙을 감내하게 되었다. 때문에 근대의 전투는 적 보병과 사격전을 펼치면서 동시에 여차하면 적 기병에게 총구를 돌리거나 아예 방진을 짜야하는 보병과, 적 기병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적 보병이 빈틈을 보이면 잽싸게 뛰어들어야 하는 기병의 숨막히는 눈치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아무튼 기병의 돌격은 근대에도 큰 위력을 발휘하였고, 제병협동이 되면 성공율도 높아졌다. 대표적으로 아일라우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의 포병과 보병의 압박에 밀려나 패배의 위기까지 갔으나, 나폴레옹이 예비대로 아껴뒀던 뮈라가 지휘하는 기병대가 그것도 근대에는 자살 행위나 다름 없다는 정면에서의 돌격을 성공시킨뒤, 이미 돌파해온 루트에 재돌격까지 하여 문자 그대로 러시아군을 앞뒤로 관통해버리며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을 패배의 위기에서 건져내는데 성공한다. 또한 스페인 전역에서 벌어진 소모시에라 전투(Battle of Somosierra, 1808)에서는 기병에게 있어서 거의 공성전이 다름없는 좁은 비탈길과 언덕에 포진되어 있는 스페인군의 방어진을 울란이 선봉에 서서 4열종대로 비탈길을 올라가며 돌격을 가하여 적 포병과 보병진을 휘저으며 아군 공격의 활로를 열어 격퇴시키기도 하였다.[69]

또한 대전투 속에서 벌어지는 부분 교전이나 쟁탈전에서도 기병부대가 돌격하여 보병부대를 격퇴하거나 고전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기병의 투입율도 꽤 높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전선 중앙에 위치한 프라첸 언덕 쟁탈전 중 중앙군의 좌익에 위치하며 적과의 교전으로 지쳤던 프랑스군 제4전열보병연대를 러시아 콘스탄틴 대공의 근위중장기병대가 일시 격퇴하여 4연대 예하 1대대를 궤멸시켰으나, 이후 나폴레옹이 예비대로 둔 근위기병대와 함께 기마포병의 포격으로 이들을 후퇴시키자, 러시아 근위중장기병대가 자군의 보병진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대열이 붕괴되어 버려 다시 프랑스 근위기병대가 돌격하여 격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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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돌격하는 프랑스군의 엽기병. Keith Rocco 作

같은 전투에서 전선 북쪽에 위치한 뮈라가 맡은 프랑스군의 좌익과 바그라티온이 맡은 러시아군의 우익은 아예 기병대가 선봉에 서서 전선을 주도하였고, 프랑스측의 2개 흉갑기병사단이 전선 중앙의 틈으로 돌격을 가하여 북쪽전선 전체를 프랑스군의 승리로 뒤집어놓았다.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이 자신들이 구축한 3개의 보루에서 방어를 펼치며, 공격에 지치거나 물러나려는 프랑스군을 향해 기병대로 돌격을 하며 특히 바그라티온다부가 이끌던 공격부대를 몇 차례에 걸쳐 격퇴한 적이 있으며, 이에 맞서 뮈라가 나서 맞대응을 하며 격렬한 기병전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전투 후반부에는 러시아의 마트베이 플라토프 장군이 이끄는 코사크 기병대가 보로디노 마을에 주둔중인 프랑스 보병대의 후방으로 쇄도하자 공황상태에 빠진 프랑스군 좌익 대부분이 2시간 동안 진격이 지연되었었고, 전투 종반부 마지막 남은 러시아군의 대보루에 대해서 프랑스군 제2기병사단이 우회돌격을 감행하여 러시아군의 보병과 포병을 무력화시켰다.

더불어 가끔 보병과 떨어져있거나 측면을 노출시킨 포병을 기병이 기습하거나 혹은 예기치 않게 발견한뒤 공격하여 무력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포병은 측면을 노출시키면 무거운 대포를 재빨리 돌리기가 힘들기 때문에 기병의 빠른 습격이나 예기치 못한 조우 상황에서 매우 무력하였으며 이렇게 기병에게 포병을 제압당한 쪽은 적에게 일방적으로 포격을 당하여 패배할 수 있기 때문에 전투의 성패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예나 전투에서는 비록 나중에 격퇴되었지만, 네 장군의 휘하 6군단 소속 기병연대가 프로이센군 포대 30문을 유린한 적이 있고, 앞서 언급한 소모시에라 전투에서는 울란이 스페인군 포병진을 분쇄하여 프랑스군이 공격활로를 열어 승리할 수 있었으며, 보로디노전투에서도 프랑스 기병이 러시아군 보루를 우회하여 보병의 후방에서 돌격해들어가 포대까지 무력화 시킨 바 있다. 그리고 워털루전투에서는 영국의 스코츠 그레이(Scots Grey)기병대가 프랑스 기병대에 격퇴되기전까지 프랑스군 포병진에 들이닥쳐 큰 피해를 입힌 적도 있다.

이시기 회전에서 기병은 보통 좌/우익 등의 측면에서 적진에 대한 우회돌격에 주력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필요할 때에는 포병과 보병 지원 혹은 아예 단독으로 중세 기사들처럼 정면에서 적 보병에게 돌격하여 적을 직접 물리치고 와해시키는 역할도 꾸준히 맡아왔고 그 전과도 혁혁하였다. 비록 포병과 보병의 사격과 전투능력의 향상으로 인하여 이전 시대에 비해서 입지도 줄어들고, 공격과 돌격이 실패하는 일도 그전에 비해 잦아졌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과 기회를 포착하여 투입하는 것이 관건이었고, 이것이 전장의 성패를 좌우 하는만큼 세밀한 기병운용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더욱이 이시대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나폴레옹은 포병과 보병의 제병협동과 기병만의 장점을 부각시키어 운용함으로써 자신의 군사적 성취를 이루는데 기병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하였다.

나폴레옹 시기 대략적인 프랑스 대육군의 기병편성비율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전쟁 당시 원정군 편성에서 총원 17만 6천 명 중 보병이 20사단, 기병사단만 11개로, 각 군단에 배치된 기병을 제외하고 뮈라가 지휘한 5개 기병사단(division)의 규모가 21,000명에 베시에르가 지휘한 2개 기병연대(regiment)의 규모가 6,000명으로 독립 기병부대의 규모가 27,000명에 달하였다.[70] 제4차 대프랑스 동맹전쟁 중이던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총병력 60,000 ~ 75,000 명중 기병은 11,000 ~ 17,000명 정도[71], 제5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이자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편성비율은 보병 145,000명에 기병 27,000명[72]으로 보병과 기병은 4.37~5.51:1의 편성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여담으로 이 시기가 되면 기병용 갑주가 거의 사라져 중기병과 경기병의 차이는 주로 말의 중량에 좌우되고[73] 승마자의 장비는 별 상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나폴레옹 전쟁기의 워털루 전투에서 괴멸당한 영국군의 스코츠 그레이(Scots Grey) 중기병대는 경기병인 후사르와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했고, 근위 기병대 역시(Horse Guard)는 군복에 투구만 착용했지만 말이 대형마였기 때문에 중기병으로 분류된다. 물론 이 시기에도 퀴레시어나 캐러비니어 같이 갑옷을 입은 기병은 존재하고 있었으나, 이들 역시 과거 중기병처럼 온몸을 둘둘 말은 게 아니라 흉갑과 투구만 착용하였다. 이들은 당연히 중기병으로 분류되었다.

더불어 보병이나 기병에게 돌격전을 치러야 하는 중기병들은 중세 기사들과 동일하게 돌격할 때는 촘촘한 밀집대형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고, 대열유지를 위해 시속 20㎞ 내외의 속력을 유지하며 달려나갔다. 이 시대 기병지휘관으로 유명했던 뮈라도 되도록이면 행군때 말은 걷게하고, 적에게 접근하여 돌격전까지 되도록 천천히 달리는 트롯(trot)으로 달리게 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링크 단, 예외적으로 워털루 전투당시 아서 웰링턴휘하의 기병대는 풀갤럽 즉 전속력으로 질주하여 돌격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주요 기병의 병과는 다음과 같다. 각 병과의 자세한 설명은 개별 문서를 참고.

5.1. 기동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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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약 6.4㎞/h
트롯: 훈련 11.2㎞/h, 실전 13.6㎞/h
갤럽: 훈련 14.4㎞/h, 실전 17.7㎞/h
40야드 이내 돌격: 가장 느린 말의 최고 속도
Thomas Robbins, The Cavalry Catechism, 1859
걷기: 약 6.4㎞/h
트롯: 약 12.8㎞/h
갤럽: 18㎞/h
Ordonnance provisoire sur l'exercice et les manoeuvres de la cavalerie, 1810.

나폴레옹 전쟁 시기 교범들에는 영국군과 프랑스군 모두 80야드(73m) 이내로 접근한 후 빠른 갤럽(fast gallop)으로 돌격하라고 규정돼 있었지만 실전에서는 50야드를 넘어가면 대열이 무너져서 돌격력이 급격히 약화된다는 인식이 만연했으며, 1850년대 이후의 교범들에는 이러한 전훈이 반영되어 40야드 이내에서 돌격할 것으로 규정되었다.

돌격 속도[74] 역시 실전에서는 규정의 반도 못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증언에 따르면 서유럽 기병대의 평균적인 수준이 하락한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 사이 "기병대는 갤럽으로 달리면서 대형을 유지할 수 없다고 오랫동안 믿어졌다." 18세기 후반부터는 훈련이 개선되면서 기병대가 상당한 거리를 갤럽으로 돌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전장에는 면이 고르지 않거나 미끄러운 지반 등 온갖 방해요인이 존재했고 군마 중 한 마리에 이상이 생겨도 대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대 전체가 속도를 맞춰야 했다.

6. 20세기

1904년 미합중국 육군 기병 교육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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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기병대. 붉은 바탕에 녹색 옷깃·소매는 기병병과의 복색이였으며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기병창 및 기병도는 전부 독일, 러시아제를 구입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 이름은 騎兵이지만 사실상 機兵으로 체계화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미국 남북 전쟁을 참관한 유럽 기병 장교들은 "미국 기병은 총만 쏘네?"하며 비웃었다. 미군, 특히 북군의 총이 발달한 것도 있지만[75] 남북 전쟁 시기에는 남군이건 북군이건 급히 군의 규모를 늘리다 보니 마상 검술을 비롯한 수준 높은 승마술을 훈련시키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북부에 비해 공업화가 덜 되어 목축업이 발달했던 남군이 북군에 비해 기병 동원은 쉬웠다고 한다. 남군의 기병 사령관이었던 존 싱글톤 모스비의 부대는 세계 최초로 기병도를 장비하지 않은 기병대로 유명하며 젭 스튜어트와 함께 남군 최고의 기병사령관으로 꼽히는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의 기병대는 말은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고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하마 상태에서 치렀다. 거기다 리볼버레버액션식 라이플을 비롯한 연발총의 발달로 굳이 익히기 어려운 마상검술을 훈련시키느니 마상에서 연발총 쏘게 하는 것이 효율도 더 좋았다. 그래서 남군의 한 장교는 세이버는 캔따개나 요리용으로 쓰는 것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단 세이버라는 무기 자체가 몇백년은 쓰인 기병 무기의 스테디셀러다 보니 기병의 세이버 돌격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라고 한다.영문위키를 참조

한편 유럽에서도 보불전쟁, 미국 남북전쟁 등의 전훈이 쌓이고 19세기 중후반부터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 발달로 인해 전장환경에 변화가 생기면서 이에 맞추어 새로운 기병 운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차 세계대전 전후 시점에서 기병은 기존의 기동력을 살리면서 여기에 화력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운용하자는 이야기가 활발히 논의되었고 1차 세계대전 무렵에 기병은 전통적인 활용법에서 벗어나 승마보병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대표적으로 제정 러시아의 경우 1882년에 정규 경기병(후사르), 창기병(울란) 연대들을 용기병 연대로 전환시켜 46개의 정규 용기병 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76] 독일 제국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중반 즈음에 기존 경기병, 창기병 등 각종 기병부대를 참호전에 적합한 기마소총사단(kavallerie-Schtüzen, 카발레리 쉬츤)으로 일괄 전환하여 운용했다.

사실, 세계대전 시기 이전부터 기병의 역할은 꾸준히 축소되는 경향을 겪었다. 이러한 경향은 화약의 성능이 시대에 따라 개선되어 가면서 시작된 일로 여겨진다. 특히나 무연화약의 개발이 결정타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화약 성능이 개선되어 유효 사거리와 살상력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장터에서 불발탄의 비율도 크게 낮아졌다.[77] 더군다나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참호에서 기관총을 난사해대니 기병의 입지는 더 급추락했다.[78][79]

6.1.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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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헝가리 후사르 기병대

하지만 이러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1차 세계대전기까지는 기병이 여전히 중요한 병과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다. 1차대전기 '끊임없이 쏟아지는 기관총의 포화 아래 덧없이 스러져 가는 기병 돌격' 이라는 이미지는 엄밀히 말하면 기관총의 위력에 충격을 받은 당대 사람들의 상상 속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기병대가 무턱대고 돌격하다가 기관총에 녹아내리는 상황은 참호전이 일상적으로 펼쳐진 서부전선에서도 전쟁 초반에나 몇 번 있었지 전쟁 내내 자주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1차 세계대전기까지는 아직 보병에게 기동력과 충격력을 부여해줄 자동차나 기갑장비의 개발 및 보급이 대전 이후의 다른 전쟁들에 비하면 턱없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여전히 기병의 기동력과 충격력이 유효한 상황이 많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기관총이 발명되었고 많이 사용된 전쟁이 1차대전이었으니 당연히 이때 기병들은 기관총에게 무력하게 털려나갔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현대인의 오만에 가까운 것인데, 상식적으로 돌격하다가 기관총에게 털려나간 상황이 몇 번 펼쳐졌다면 그와 같은 전술은 웬만큼 꽉 막힌 지휘관이 아닌 이상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 뻔하며, 1차대전 이후 2차대전은 물론 심지어는 한국전쟁 시기까지도 제한적으로나마 문자 그대로 말을 타는 기병이 운용되었던 것을 보면, 기관총 진지에 무작정 달려드는 것 외의 용도로는 기병이 계속 유효하게 쓰였다는 말이 된다.[80]

이 때문에 1차대전기의 기병대는 적 견제, 측면 엄호 및 정찰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으며, 훗날의 공수부대나 기갑부대처럼 기동력을 살려 유리한 지점을 미리 차지하는 역할 역시 자주 수행했다.[81] 특히 전선에 우회할 공간이 적었던 서부전선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기병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차 대전 시기에 기병이 활약한 대표적인 예시로 동부 전선 초기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제국 제1기병사단의 사례가 있다. 타넨베르크 전투 당시에 독일군과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의 늪지와 산림이 많은 지형에서 맞붙었다. 이 때 제1기병사단은 기동력을 잘 살려 산림 지대에서 병력을 신속히 산개하여 러시아 제1군 전체를 견제하여 독일군 주력의 측면을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결국 고작 1개 사단이 러시아 1개 야전군 전체를 견제하여 발목을 붙잡는데 성공했고 전투는 독일군의 유례를 찾기 힘든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비행기가 전장에 도입된 이후로는 정찰병으로서의 역할은 다소 축소되기는 했다. 그래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거나 기동력을 살려 유리한 거점을 적보다 빨리 차지하는 등의 활동은 꾸준히 행하고 있었다. 동부전선, 특히 인구밀도가 낮은 중동 지역에서는 특히 활약상이 더 컸는데, ANZAC 용기병대가 오스만 보병대에 돌격해 승리한 베르셰바 전투나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해진 아랍 반란군의 활약을 들 수 있다.

6.2. 전간기

1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기병대는 주로 인구밀도가 낮고 낙후된 동유럽에서 중요한 전력으로 활용되었다. 러시아 내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폴란드는 기병을 대량으로 운용하여 기동부대와 정찰병으로 요긴하게 활용했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서도 튀르키예 대국민회의의 기병대가 지나치게 늘어진 그리스군의 보급선을 공격하여 역전의 단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기병의 역할을 대신할 전차의 개발과 급격한 화력증가로 인해 기병의 도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해졌다. 적어도 독일은 다수의 기병부대를 해체하거나 병종을 변경하여 기병의 도태를 인정하고 기갑부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교리를 개발했고, 소련도 기병 자체는 유지했지만 기갑부대도 대거 육성했다. 다른 국가들도 기갑부대 육성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교리의 문제, 기술력과 경제력의 문제 등으로 인해 경전차와 탱켓 위주의 빈약한 기갑부대만 육성하거나 설령 기갑부대를 창설하더라도 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했다.

6.3. 제2차 세계 대전

1차 세계대전때보다도 기술이 더 발달한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도 기병들은 계속 쓰였으며 특히 폴란드창기병대러시아카자크 기병대가 크게 알려졌다. 전간기에는 신생 폴란드의 창기병대와 러시아 카자크 기병대 간의 기병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폴란드 창기병대는 창 들고 전차에 꼬라박은 뒤 전차가 나무로 만들어진 줄 알았다고 말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나, 이건 사실 용맹히 싸웠던 폴란드군을 바보로 선전하기 위한 이탈리아 왕국과 나치 독일, 헝가리 왕국과 같은 추축국의 프로파간다였던 것을 폴란드가 공산화된 뒤 세계대전 중 공산국가들의 기여를 격하하고 싶던 영국과 미국이 받아서 퍼뜨린 것이다. 실제 폴란드 기병대는 독일군 보병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전차부대와 충돌, 끝까지 저항하다가 몰살당한 사례이며 이 장면을 찍어다 프로파간다용으로 쓴 게 퍼진 것이다.

이 시대의 폴란드 창기병은 말이 창기병이지 기관총도 가지고 있었고,[82] 전원 개인 화기로 무장한, 말로 이동하는 정예 보병에 가까웠고 말의 역할도 이전 시대같은 충격 전차보다는 고기동차량에 더 가까웠다. 연대 규모로 가면 대전차포와 대공포, 부속 기갑중대까지 붙은 세계대전 기준으로는 매우 현대화된 부대였으나 "창기병"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도록 기병창과 기병도 역시 지급하고 훈련도 했으며, 실제로 창기병 돌격으로 독일군 보병중대를 격파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멸한 사례 중 일부는 퇴각 중인 후방부대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우다 전멸했다고 한다. 폴란드 기병대는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몇년 전에 일어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붉은 군대를 분쇄한 활약으로 세계에 막강한 폴란드군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로 동부전선에선 나치 독일에 포섭된 카자크 기병들이 활약했지만, 소련 육군 역시 카자크족을 징집해 추격전이나 게릴라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소련 육군은 여기에 1개 기병군단과 1개 기계화군단을 조합하여 임시편제한 기병-기계화 집단으로 전차나 차량화, 기계화소총제대가 기동하기 힘든 지형에 투입하거나 일반적인 전차부대보다 더 빠른 기동력을 발휘하게 하여 추격과 포위 기동에 활약하게 했다. 후방과 퇴로를 차단한 소련군 기병대는 독일군에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일반적으로 소련 기병군단들은 말을 이용해 중기관총이나 곡사포 등을 끌고 빠르게 이동하며 지원용으로 T-34같은 전차들도 배속되어 있었다. 전투시에는 대부분 내려서 중화기를 배치하고 전차와 함께 보병으로 전투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카자크들이 도망치는 독일군들의 목을 수확하고 다녔다고 한다. 1944년에 벌어진 소련군의 기병돌격을 보면, 당시 기병전술의 양상과 효과 및 활약을 볼 수 있다. # 해당 글에서 현대 전장에서의 기병은 하마 보병으로서 싸웠고 합리적인 전술적 테두리 안에서 운용되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보기 드문 전근대적인 기병돌격이 행해지기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병사들에게 추격하는 기병의 위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투를 경험하고 훈련된 군마가 어떻게 다른지도 잘 나와있다.

독일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6개 기병 사단을 운용했으며, 대부분 동부전선에서 운용했고 일부 발칸 반도에서 사용한 기록도 있다. 대부분 후방의 빨치산에 대응하기 위한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차량과 함께 기병을 편성해 운용했다. 또, 적백내전 당시 백군파에 속했던 카자크를 모집해 2개 카자크 사단을 창설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서부전선에도 참전한바 있다. 무장친위대는 치안유지와 후방 게릴라 소탕을 위해 여러 기병부대를 유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무장친위대의 제8 SS 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가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일화가 있는데, 미 육군으로 입대한 어느 인디언 병사(Joe Medicine Crow)는 워치프가 되기 위한 과업 중 2가지, 아군을 전쟁으로 이끌고 적의 말을 훔치는 것을 휘하 부대를 이끌고 SS의 말 50필을 훔침으로써 달성한 바 있다. 기병이 아니라 군마의 경우, 독일군의 차량화와 기계화 비율은 대단히 낮은 편[83]으로 전쟁 기간동안 엄청난 숫자의 말을 징발했다. 1939년 개전 당시에 59만 마리, 1945년 1월에는 120만 마리에 이를 돌보는 인원만 수만명이었다. 중간에 죽거나 다친 말까지 포함하면 유럽 전역에서 최대 700만 마리의 말을 징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독일군은 고질적인 석유 부족으로 최일선의 전차부대를 제외하면 말을 굴려야 했다. 이 말들은 수송부대나 포병대, 지원장비 등을 견인하는데 사용되었다.[84] 기마경보병 사단 등 독일군 기병사단들 역시 전투시에는 주로 하마 보병으로 전투했다.

이탈리아 왕국군 역시 기병대가 존재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독소전에 파견된 육군 사보이아 기병연대의 기병돌격. 1942년 8월 24일에 있었던 일로 이즈부셴스키에서 포병 지원까지 받던 소련 육군 시베리아 보병연대를 기병 돌격으로 박살내버렸다. 졸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군이지만 이런 분전도 많았다. 그리고 실질적인 기병대가 투입된 마지막 전투는 후술된 후베이성 전투지만, 그 기병대로 성공적인 돌격을 달성한 것은 사보이아 연대의 기병돌격이 현재 역사상으론 마지막이다.관련 위키

일본 제국 육군태평양 전쟁 당시 기병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1차대전 직후인 1919년 기병폐지론이 강하게 일어나서 이를 주장한 쿠니시 고시치 육군 소장과 이를 반대하는 제4기병여단장인 요시하시 토쿠사부로 육군 소장 간에 격론이 벌어졌는데, 요시하시 장군이 자살하면서 기병 폐지론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20년대부터 보병사단에 소속된 기병연대를 먼저 기병정찰대대로 축소한 다음 차츰차츰 폐지했다. 다만 중일전쟁 당시에도 4개 기병여단이 유지되고 있었는데, 이들도 차츰차츰 폐지하면서 1940년 기병 1여단이 차량화되었고, 1941년 기병2여단이 해체, 1945년에 초에 기병3여단이 해체되어 패전 당시에는 기병4여단 하나만 남았다. 1945년 6월 중국 후베이 성 라오허커우시에서 비행장을 확보하려는 중국군과 일본군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 일본 제국 육군 기병4여단이 참전하였고 이 이후 대단위 기병 투입기록이 없어 후베이 성 전투가 여단 이상급 대단위 기병대가 전투를 벌인 마지막 전투로 남아있다.[85]

몽골군 역시 2차대전 시기에 기병대가 존재했고, 할힌골 전투에서 활약 했다. 그 외 핀란드, 헝가리, 루마니아군 등도 2차대전간 기병대를 편제했다.

2차대전 당시 자력으로 전군의 기계화를 이뤄낸 군대는 단 한 곳도 없었다. 미군이 그것을 해냈다고 알려졌으나 실상은 그들 역시도 2차대전 당시에는 완전 기계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물론 말과 마초를 저 멀리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수송하는 것보다 차량을 수송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고 경제적이었기 때문에 기계화 수준은 모든 국가들을 통틀어 가장 높았던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제2차대전 까지도 소수의 기병대가 운용되고 있었으며 1942년 1월 16일 필리핀 바탄 반도 방어전을 수행하던 필리핀 척후대 제26기병연대 G중대 소대장인 에드윈 램지가 일본군을 상대로 미국 역사상 최후의 마상 돌격을 시행해 수적 우세를 점하던 일본군을 격퇴한 전적이 있는 것을 보면 미군 역시 기병을 아예 안쓴 건 아니었다.

이렇듯 1차대전기까지는 세간의 인식보다는 훨씬 많이, 2차대전기에는 많이 제한되긴 했지만 약간이나마 정찰, 기동력을 살린 침투, 충격력을 살린 돌격 등의 기병의 '전통적인 역할' 이 쓰일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부터 이미 자동차나 오토바이, 기갑장비, 항공기 등 기병의 기동력과 충격력을 쌈싸먹는 병기들이 대거 개발되고 일선에 보급된 탓에 기병의 역할이 확 줄어들었고, 2차대전이 터지자 전간기의 병기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으로 병기들이 발전하면서 사실상 다른 병과들이 기병의 역할을 대부분 빼앗아 갔다. 이 때문에 1차대전 이후로 기병은 가면 갈수록 비중이 줄어들었고, 2차대전이 끝난 이후로는 사실상 사장되다시피 했던 것. 그러더니 1950년에 벌어진 6.25 전쟁을 마지막으로 기병대는 모두 전장에서 퇴장했다.[86]

6.4.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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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대구역에 집결한 대한민국 육군 기병대
한국전쟁에서도 대한민국 육군 독립기갑연대 휘하에 기병대가 2개 중대 정도의 규모로 있었고 개전 초기 전역부터 지연전역 때까지 전장에서 계속 싸웠다.[87]물론 북한군 탱크에 정면으로 돌격하는 미친 전술은 당연히 아니었고,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교전시 말에서 내려서 보병 전투를 진행하는 드라군처럼 운용하였다.[88] 지연전 전개 기간 동안에는 기병대장 장철부 소령이 적에게 포위되어 전사[89]하는 등 사실상 괴멸되었지만, 북한군을 상대로 기병돌격을 감행포위망을 뚫고 이기는 등 상당한 활약도 했다. 그러나 1950년 8월을 전후한 무렵에는 말이 거의 전멸한 상태에서 추가 수급이 불가능해 보병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말들은 훗날 경찰 및 육군 헌병에 흡수되어 기마경찰대와 기마헌병대가 되었다가 역시 195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1972년에 육군 제1군사령부에서 강원도 산악지대에서의 수송과 대간첩 작전의 효율성을 위해 토종 조랑말을 이용한 타마(駝馬)부대를 창설하기도 했으나 말먹이를 수급하기 어렵고, 기계화 장비들을 도입하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어 1982년에 공식 해체되었다.[90] 현대 한국군에서 정식으로 말을 운용하는 곳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의 승마 교육을 담당하는 군마대가 유일하다.

6.5. 그 외

로디지아군도 게릴라전에 쓰기 위해 기병을 운용했었다. 지형상 차량을 원활히 운용하기 어려운 곳에서 유용했을뿐만 아니라, 말이 원래 남아프리카 지방에 사는 동물이 아니라서 그런지[91]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흑인 게릴라들은 말의 존재를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심리적 압박감도 상당했었다고 한다. 로디지아군 항목의 동영상을 보면 중간에 드라군 마냥 총들고 말 달리는 모습이 나온다.

7. 21세기

7.1. 역할 대체

현대전에서는 기술 발달로 육군이 기계화되면서, 의장대기마경찰 정도를 제외하면 을 이용하는 부대는 거의 없으며, 과거에 기병이 맡았던 역할은 오토바이, 전차장갑차 등의 차량들과 헬리콥터들이 계승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이들을 현대의 기병이라고 봐도 된다. 실제로 기갑 부대나 헬기 강습 부대 등은 이전에 기병이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다. 타던게 말에서 장갑판 두른 자동차나 헬리콥터가 되었을 뿐이지. 현대에 와서 중기병의 "충격력" 개념은 전차가 계승했고, 경기병과 총기병의 "속도와 범용성" 개념은 헬기장갑차가 계승한 격이다. 이 중 장갑차는 기병처럼 기동하는 역할이 아니라 보병을 수송하는 개념이므로,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병의 기동성을 가진다.[92] 즉, 과거의 승마보병 드라군의 개념을 계승한 것이다. 처음에는 하마(하차) 전투를 위주로 하다가 점점 승마(승차) 전투를 주요 교리로 하게 된 것도 드라군과 장갑차를 타는 기계화보병의 공통점이다.

많은 기갑 부대[93], 헬기 강습 부대들이 부대 마크에 편자를 넣고, 기병시절의 병과색과 병과장을 유지하거나, '기병(Cavalry)'이라거나 '드라군(Dragoon)'[94] 등을 부대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명한 예로는 미합중국 육군제1기병사단이나 제2기갑기병연대 등이 있다. 2차 대전기의 독일군 기갑부대는 복장과 마크에서 프로이센 왕국군 창기병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육군 제1기병사단을 개편해 창설한 제24기갑사단은 기병부대가 기원임을 강조하고자 사단 내규로 기갑 병과 인원들이 피복 부착물에 기갑 병과의 분홍색 대신 기병 병과의 노란색 병과색을 쓰게 했다. 심지어 헬기를 한번도 못본 아프간인들도 소련의 하인드 헬기를 사탄의 마차로 부르는 걸 보면 직관적으로 각인된 셈이다.

보통 유럽 군대에게 있어서는 기병대는 과거 군대의 전통을 상징하기에 부대의 역사가 몇백년 되어 기갑으로 변환한 병과들도 후사르, 창기병, 샤쇠르, 쿼러시어, 드라군 등의 명칭을 이어받고 있다. 러시아 군가 초원에서도 가사에 말, 전차가 번갈아 나온다.

반면에 이런 전통이 빈약한[95] 미국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모든 기병 병과가 단 하나로 통일되었고, 수색대 단대호는 미국 기병의 단대호다. 이러한 미국의 기병은 베트남 전쟁 무렵에 들어와서는 UH-1을 주력으로 공중강습전을 벌이는 항공수색대인 공중 기병대(Air Cavalry), 기갑차량을 편제받아 위력정찰 역할을 하는 기갑수색대인 기갑 기병대(Armored Cavalry)로 개편된다. 이후 공중 기병대는 보다 전문적인 공중강습부대나 공수부대 등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대신 카이오와 정찰헬기 등을 사용해 기갑 기병대의 눈 역할을 맡고 있으며, 기갑기병은 각 사단 내지 여단전투단에 연대 단위로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한다.

7.2. 유지

그러나 일부 산악 지역, 사막 등 차량이 이동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진짜 기병이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도 있다. 정말 험난한 곳은 말로도 못 가니까 걸어가야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도 산악이나 비탈길, 숲 같이 길도 제대로 닦이지 않은 험한 곳은 일반 차량은 물론이고 궤도차량도 접근하기 어렵다. 이때는 말이 유용하게 쓰인다. 게다가 기갑차량이 작전을 하려면 이들의 연료를 보급할 차량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이동때만 말을 타고 싸울 때는 말에서 내린다 해도 이런 지형에서는 기병이 매우 유용하다. 그냥 걷는 것보다는 빠르기에 험지에서도 기동성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으며, 연료보급이 힘든 대신에 마초와 식수 등을 현장에서 충족할 수 있다면 보급에서도 용이하고 사람 대신 기관총이나 견인포 같은 무거운 공용 화기를 운반하는 용도로도 쓸 수도 있기에[96] 합당하다. 실제로 독소전쟁에서는 소련군이 이런 식으로 기병군단을 독일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여러차례 포위를 성공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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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 기병대 독일연방군 산악부대에서 밀란 대전차 미사일을 수송 중인 군마 러시아군 산악여단에서 보병을 운송하는 군마
한 예로 사막과 산악이 대부분인 중국의 서북부 지역에는 기병대가 현존하고 있다. 이쪽은 아무래도 지형 특성상 차량화부대의 유지, 보수가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로 발달한 듯. 비슷한 이유로 몽골 역시 기병대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과 러시아의 산악부대도 산 같은 험지에선 바퀴달린 탈것보다 4족 보행 군마가 더 적합해 사용중이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기병이 활약했다. 원래 이 땅에 살던 북부동맹이나 탈레반 등은 기계화된 기동 병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특성상 기병을 운용했다.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부동맹의 지원을 위해 투입된 미군 특수부대가 폭격 유도를 해주면 북부동맹이 기병 돌격을 실시했다고 한다. 몇몇 전투에선 미군 특수부대도 합류해 같이 기병 돌격을 했다고 한다. 이후에 미군도 현지의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노새를 이용한 물자 수송을 하기도 했다. 이 일화를 다룬 영화가 12 솔져스다.

7.2.1. 기마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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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로마군은 테스투도(한자어로 풀면 귀갑진형)라고 불리는 스쿠툼을 거북이 등딱지 형태로 쌓아 화살 공격을 막는 방법으로 대응하였는데 테스투도는 중기병의 돌격에 취약했다. 파르티아는 이 점을 찔러 로마군이 궁기병의 화살 공격을 테스투도로 막는 동안 카타프락토이를 돌격시켜 진형을 붕괴시키고 로마군이 이에 대응하면 붕괴된 진형에 궁기병들이 다시 화살을 퍼붓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로마 쪽에서는 당시 궁기병이 소유할 수 있었던 화살의 양이 제한된 것을 생각해 화살이 고갈나길 기대했지만 파르티아 군은는 궁기병들이 화살을 쉽게 보급받을 수 있도록 전장에 화살통을 가득 실어놓은 낙타들을 배치해두었다. 더운 날씨와 익숙지 않은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는 로마군의 대응을 어렵게 했다지만 이미 로마군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 카타프락토이를 상대로 압도적인 물량으로 근접전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승리를 챙겼던 전적이 있다. 즉 크라수스의 보급 경시, 전술 식견 부족, 약탈에 눈이 멀어 로마군 답지 않게 군기가 무너지고 훈련을 게을리했기에 수레나스의 합동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 것이다. 이후 카라칼라 시기 니시비스 전투에서 로마군이 귀갑진형으로 궁기병을 방어하는 동시에 카타프락토이의 돌격에 대응하여 마름쇠를 뿌려 저지했던 것을 고려하면 크라수스의 전술적 식견과 그의 군단의 숙련도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나마 카이사르가 선별해서 보낸 1000명의 갈리아 중기병과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분전을 펼쳤지만 전력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멸했다.[2]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왜구도 나름 군마를 운용했었다. 우왕 5년 5월, 왜적 기병 700, 보병 2000(倭賊騎七百·步二千寇晉州)이 진주를 공격했고,# 황산 대첩 때는 전투 후 노획한 말만 1600여필이었다는 등 자체적으로 군마를 운용한 기록이 존재한다.#[3] 이들은 몽골어로 가베치라고 불렸는데, 고려인과 몽골인과 여진족 등으로 이루어진 혼성 부대였다.[4] 개경, 정주, 강음의 각 마장에 파견된 인원이 각각 목감장교(牧監將校) 2명, 간수군(看守軍) 수십여명이었다.[〈우왕(禑王)] 2년 (1376)〉 8월에 여러 도(道)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군사를 검점하였다. 양광도(楊廣道)는 기병(騎兵)이 5,000, 보졸(步卒)이 20,000이고, 경상도(慶尙道)는 기병이 3,000, 보졸 22,000이고, 전라도(全羅道)는 기병이 2,000, 보졸이 8,000이고, 교주도(交州道)는 기병이 400, 보졸 4,600이고, 강릉도(江陵道)는 기병이 200, 보졸이 4,700이고, 삭방도(朔方道)는 기병이 3,000, 보졸이 7,000이고, 평양도(平壤道)는 기병이 600, 보졸이 9,000이고, 서해도(西海道)는 기병이 500, 보졸이 4,500이었다. #[6] 이중 현재 난부우마는 근대에 들어온 외래품종과 교잡해 멸종된 상태이다.[7] 특히 전국시대에는 통일된 중앙정부가 아닌 여러개의 다이묘로 쪼개져 기병을 대량 운용할 경제력이 없었던 것도 한 몫했다. 그럼에도 다케다 기마군단이 실제로 존재한 것 마냥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을 생각하면 영향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8] 보병, 기병, 포병. 여기서 보병은 전열보병을 의미한다.[9] 하지만 큰 말을 타고 싸운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예로 그 자신이 여러 이슬람 왕조들을 섬기면서 중동으로 쳐들어온 유럽 십자군과 직접 싸우기도 했던 관리이자 학자였던 우사마 이븐 문끼드는 그의 저서인 성찰의 서에서 "낙타처럼 덩치가 큰 검정 말을 타고, 갑옷흉갑을 걸친" 필립이라는 프랑크인 기병을 보았고 자신이 그를 상대로 말을 탄 채로 직접 창으로 그를 찔렀는데 그 부위가 허리의 피부 근처라서 필립은 살아났다고 전해진다. 출처: 성찰의 서/ 우사마 이븐 문끼드 지음/ 김능우 번역/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28쪽[10] 13세기 초[11] 당시 꽤나 강력한 보병 전력으로, 헤이스팅스 전투에서도 노르만 기병대와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12] 물론 이때 리처드 1세 휘하 기사들은 순수 잉글랜드 왕국 출신뿐만 아니라 앙주와 아키텐 등 프랑스 영지의 기사들도 포함되어 있다.[13] 기병은 방어 측면에선 이점이 없기 때문. 예나 지금이나 탱커 역할은 보병이 훌륭했다.[14] '푸아티에 전투(1356), 클리포드 J. 로저스' 발췌.[15] 플레이트 아머가 발달한 중세 후기 유럽의 중기병대는 방패를 장비하지 않거나 장식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방패를 들었기 때문에 대신 고삐를 쥐어 더 안정적인 승마가 가능했다.[16] 이때의 훈련방식이 현재 영국근위기병대에 남아있다.링크[17] What can happen is the meeting of two cavalry when they are equally well conducted, equally confident in their means and in their chief, equally brave.
There is then boarding, but not shock.
At the moment of approaching there is an instinctive restraint in the horse, in the rider, who feels very well that it would break unnecessarily by hitting the enemy at full speed.
[18] His side drew up in good and serried order, but their opponents scorned to do so: oozing proud confidence because of their mighty numbers, they charged in disarray to meet them before their lists.
There were no preliminaries or warm-up jousts!
They went straight at it with all their might, storming in disorder at the Young King's battalion, who met them fiercely, fired to fight well.
You'd have seen maces smashing down on heads, swords cutting through heads and arms.
And the over-confident came off worse: charging as they were with no formation, not keeping together at all, they were quickly routed and sent reeling back, the first to arrive the first to leave.
The Marshal left the king and rode after a troop who were trundling off in retreat; he charged into their midst with such force that he brought a knight crashing down, but he didn't stop to take him captive: he was bent on giving such an account of himself that all who saw him would have to bear true witness!
He drove them back and sent them packing, showing them the way with fearsome blows.
Another troop now fell on him in numbers, forcing him back to the Young King's lines; but with that they left the combat, in which the Marshal's display had won him mighty esteem that day from all who'd witnessed it.
[19] 기창돌격은 반발력을 팔로만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등자를 이용해서 온몸으로 반발력을 억제시키게 되는데 이때부터 개인의 단순 완력만을 믿지 않고도 기창돌격이 가능해졌다. 등자의 발명 이전까지는 제대로 된 돌격이 불가능 했는데, 그 시절에는 돌격하여 창으로 찌르는 순간 창에서 손을 놓아 반발력을 최소화 시키는 전술을 구사하였고 이는 효과적인 공격법도 아니며 묘기 수준의 기량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돌격의 위력 역시 상당히 강력했는데 마르켈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카타프락토이의 돌격은 잘 무장한 로마 보병 2명을 꿰뚫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이런 돌격이 약했다면 애당초 돌격전술이 얼마 안가 도태되었을 것인데 카우치드 등장 이전까지도 돌격전술은 잘만 쓰였다.[20] Certainly the French launched the first fierce attack but, charging in disorder, they were beaten off and, quickly tiring, turned tail. Richard the king's son and a hundred knights were sitting on their horses ready for battle; the rest fought on foot in the field with the king. In the forefront William Crispin and eighty knights charged the Normans, but their horses were quickly killed, and they were all surrounded and cut off. Godfrey of Serrans and other knights of the Vexin then fought back valiantly, and made the whole line fall back somewhat. But the seasoned warriors re–covered their courage and strength and captured Burchard and Otmund and Aubrey of Mareil and many other French knights, who had been unhorsed.[21] Now is it like that those whom wee set foremost are choice men, and the second doe wel second them in valour:
and it is a miserable companie that hath not at the least 25. good men in it.
As for the rest whō I presuppose not to be so valiant, they be placed as it were in couert vnder the shadow of the former, which maketh them to followe the more cheerefullie to the charge, as knowing that the head must beare all the daunger and hurt, which if it breake the enimie, they shall be partakers of the same honour.
So that it is a notable signe of cowardlynesse, when a troupe so ordered dare not joyne. Considering that the valour of the first should vrgè them to the onset, and the assurance of the last to follow and thrust in.
But when a troupe is set in a wing, although the good, which ordinarily are the smallest number, do march cheerely to the onset, yet the rest that are not so willing to bite, (which faine to bleede at the nose, to haue a broken stiroppe, or to haue their horse vnshooed) doe staie behinde, so as within two hundred paces of waie, we shall see glasse windowes in that long file, & great breaches wil appeare therein, which greatly incourageth the enimie:
and many times among an hundred horse, scarce 25. doe enter in:
who afterwarde knowing themselues to haue no supporte, when they haue broken their staues and stroke one blowe with the sword, (if they be not ouerthrowen at their first comming,) do retire.
[22] 게임 마운트 앤 블레이드 2: 배너로드의 기병 근접전 AI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23] 노르만 왕조부터의 잉글랜드 왕국 역시 북프랑스의 노르망디 출신이었던 노르만 기사들이 대거로 잉글랜드 지배계층을 꿰차면서 마상전투를 중시하는 전술들이 도입된다. 토착 앵글로색슨족의 정예 중보병대인 후스카를들과 노르만 기병이 합동 훈련을 실시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러나 백년전쟁부터 방어적인 전술을 도입하면서, 역사 문단에서 상술했듯 하마전투를 기본으로 깔고 전투 중간에 유동적으로 기병으로 전환하는 등의 형태로 발전했다. 다만 마상전투 훈련은 고도로 유지했다고 한다.[24] When the armies united together, a certain byword which from of old used to be uttered by the French to the Germans was then openly applied, which verbally runs something like "Budge, German."
Whence such a thing takes its origin I will immediately reveal.
These nations' fashion of waging battle is not the same.
The French are particularly capable of riding horseback in good order and attacking with the spear, and their cavalry surpasses that of the Germans in speed.
The Germans, however, are able to fight on foot better than the French and excel in using the great sword.
So whenever the Germans campaign against the French, they feel doubtful of their cavalry and determine to wage war on foot.
Encountering their undisciplined cavalry, the French defeat it;
charging the more expert part of the Germans, they drive back those who go on foot, although they are greatly inferior to them in number;
they mock them with the said expression, because while it is possible to fight with horses, they choose warfare on foot.
As stated, this was then repeatedly applied by the French to the Germans and greatly vexed them.
[25] 실제로 1525년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아 1세파비아 전투에서 여러 발의 총상을 입었지만 단단한 판금 갑옷을 입고 있어서 생명에 지장이 없었으며, 1627년 라로셸 포위 공격에 참가했던 세인트 마틴 대위도 방탄 기능을 지닌 두터운 판금 갑옷을 입은 덕분에 무려 30회 이상이나 머스킷 총탄에 맞았아도 다치지 않았다!#[26] The captains or captaine that charges either with troups or troupe, cares not much whether the companies breake their launces or not, but desires them to enter resolutely, and to keep close together.
If they be wel conducted, their leaders command more than half of them to carie their swords or pistols in the bridle hand, rather than faile to vse the sword & pistoll, & quit their Lances;
but they wil be sure to place the best of the Lantiers in the forefront. Lightly of euery hundred, 15. or 20. know how to breake:
being wel broken, with care of the goodnesse of the staffe and head, the blowe of the Launce is little lesse in valor vnto the pistoll:
the charge of the Lantiers is terrible and resolute, being in carier to breake, the enemies perceiues their resolution is to enter, and not to wheele about like vnto the pistolers.
……
The most Chiefes or Souldiers of account are armed at the proofe of the Pistoll. If the Leaders commaund their troupes to spoyle horses, the Launces are more sure.
[27] Whereupon I will say that although the squadrons of spears do give a gallant charge, yet it can work no great effect, for at the outset it killeth none, yea, it is a miracle if any be slain with the spear. Only it may wound some horses ……
Although the first rank may with their spears do some hurt, especially to the horses, yet the other ranks following cannot do so, at the least the second and third, but are driven to cast away their spears and to help themselves with their swords.
[28] 'Therefore let us hasten to attack them and, when our lances are broken, let us approach closer as quickly as possible brandishing our unsheathed swords around their heads, so that their pride may be brought low by our constant blows.'[29] In fighting on horseback with heavy armor, we must keep our horse's head toward the opponent, trying to get him by the side or back, and so that he cannot do the same to us. And furthermore, and most importantly, we must stand our ground or push toward the opponent, particularly when the opponent drives his horse over us, since if we do not then collect the reins, or do not press forward as much as possible, and our horse will easily fall backward or we will eventually be driven from the lists(Line of battle?), and various other disgraces will happen to us.
Therefore whenever the opponent drives his horse toward us, we should drive ours toward him, and if he throws a blow with a sword, estoc, warhammer, or similar weapon, we should receive it with our sword or with one arm. If the opponent pushes at us, we should push him back with speed and strength, so that he falls backward.
[30] 즉 정석적이고 제대로 된 검술을 훈련받은 대로 구사한다는 의미. 프랑스 제국의 표준적인 검술 교리에 의하면 휘두르기는 방어용이고 유효한 공격은 오직 찌르기뿐이다. 아래에 인용된 1266년 베네벤토 전투부터 이어진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31] "On a hundred riders," said an officer of the first empire, "two or three think only of to give a thrust; it is they who do all the useful work; Five or six block the blows that are stroke at them, and sometimes extend a thrust when they see the possibility, without running any risk. The rest is delivered to the enemy."[32] The impression produced by the collision is so tremendous that in a force that charges the enemy for the first time the example and encouragement of the officers is required to cause the men to make use of their weapons.
Experience teaches that, if the melee does not come to a standstill but moves along over a wide space, the troopers rarely if ever think of using their weapons, and the losses that the enemy suffers are in consequence insignificant.
[33] 당황해서인지, 아니면 익숙한 무기에 대한 의존이나 애착 때문인지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 창을 버리기를 주저하다가 허망하게 죽은 창기병들이 있었다고 한다[34] Q. If attacked by heavy cavalry?
A. As soon as you discover his design, ploy quickly into one or several close columns, according to the time at your disposal, and then charge the centre of the advancing line; turn back as soon as you have pierced it; then by deploying and making a half turn, you can take in rear these great heavy troopers, whom you will surround and overthrow, one by one, at very little cost to yourself.
……
Carbineers should, then, attack lancers as they would cuirassiers; that is to say, charge in column, and pierce their centre.
Once among them, the carbineers should close in on them, hand to hand, and try always to roll them up in mass, to drive them back huddled together and helpless, as far as possible.
The lancers, crowded together, can neither point nor parry, and one of two things must happen: either they will throw away their lances to draw their sabres, in which case you will fight them with equal chances, or they will decide to keep the lances, in which case you will get them very cheaply.
Our flank files in the lancers of the Imperial Guard did not carry lances.
I remember in two cases in 1814 (at Hoogstraaten, near Breda, and Pont-Atrecin, near Lille) coming in contact with a body of Russian and Prussian lancers who, like ourselves, were bent on holding a narrow road, bordered by deep ditches.
I placed at the head of my column our gallant carbineers, and ordered my lancers to follow them, after having put their lances in the boots and drawn sabres.
Having penetrated to the centre of the enemy's crowded masses, our success exceeded our highest expectations, as we sabred them without risk to ourselves.
[35] The broken part of the line then either begins the melee, in which it will soon succumb on account of its numerical inferiority, or, in view of that inevitable outcome, evacuates the battlefield, carrying with it, if the morale of the force is not good, parts of the line still intact.
Both opponents may have their line penetrated. Both will likewise lose a number of troopers who, believing the turn taken by affairs in their front to be unfavorable to hand-to-hand combat, leave the field voluntarily or are soon forced to do so.
The number of men thus withdrawing from the melee grows apace as the cohesion with which the line advances to the charge decreases, as the number of points of penetration offered the enemy increases, and as the ease with which the men can turn tail is enhanced.
On the other hand, the number of men so shirking the fight, increases in proportion as the enemy, thanks to better cohesion (local superiority) increases, in the mind of the individual opponent, the impression of personal danger.
The larger the number of those morally vanquished at the moment of impact, the smaller the prospects of that unit's victoriously terminating the melee.
[36] The English for their part resisted bravely each one by any means he could devise. They threw javelins and missiles of various kinds, murderous axes and stones tied to sticks.
……
Disdaining to fight from a distance, they attacked boldly with their swords.
The loud shouting, here Norman, there foreign, was drowned by the clash of weapons and the groans of the dying. So for a time both sides fought with all their might.
The English were greatly helped by the advantage of the higher ground, which they held in serried ranks without sallying forward, and also by their great numbers and densely-packed mass, and moreover by their weapons of war, which easily penetrated shields and other protections. So they strongly held or drove back those who dared to attack them with drawn swords. They even wounded those who flung javelins at them from a distance.
So, terrified by this ferocity, both the footsoldiers and the Breton knights and other auxiliaries on the left wing turned tail; almost the whole of the duke's battle line gave way, if such a thing may be said of the unconquered people of the Normans.
……
Three horses were killed under him and fell. Three times he sprang to the ground undaunted, and avenged without delay the loss of his steed.
Here his speed, here his physical strength and courage could be seen. With his angry blade he tirelessly pierced shields, helmets, and hauberks; with his buckler he threw back many. Marvelling at seeing him fight on foot his knights, many of them smitten with wounds, took heart again.
[37] 이를테면 왕이나 영웅이 사용하는 '귀중하고 특별한 무기'라는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검 역시 창이나 다른 무기들처럼 일반 병사들 손에서 험하게 다루어지며 망가지고 소모되는 전쟁 도구라는 사실을 쉽게 상상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검 자체가 일부 귀족 장교들만 소지하는 예장용 무기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거나 검술에 숙달하지 않으면 검을 전혀 다룰 수 없다는 식의 편견을 가지게 되며, 사극 등에서 병사들이 검을 들고 대충 막싸움을 벌이는, 현실에 충분히 있을법한 장면들을 역으로 허구로 여기기도 한다.[38] Charles' men were very worn out, starving and well outnumbered, but in spite of Manfred's idiocy, they very nearly lost the battle after all - because those heavily armoured Germans, with their great swords, seemed to be impervious to the utmost that the French and Provencal knights could do to them.
They began to mow their opponents down, keeping knee to knee together and steadily forcing their way forward, hewing down all in front of them.
Then somebody noticed that when they lifted their arms to strike, a more or less unprotected place appeared under their arms.
All the chroniclers who wrote of this battle emphasise that the French were armed with swords quite different from those of the Germans, shorter and more accutely pointed.
The knight who noticed the weak, unarmoured place under the Germans' arms yelled out "a l'Estoc!, a l'Estoc!" "Use the point!"
And they did, thrusting their sharp little swords into the Germans' chests.
Very soon, their solid formation began to break up.
[39] And setting off at the gallop, placing your lance in the lance-rest, aim for the enemy's belly,
and once the lance is broken, you shall take hold of the estoc, which should be strapped onto the left-hand side of the front arcon, secured in place in such a way that you draw it the scabbard does not come with it. And when fighting with these weapons, strike at the visor and the voids, that is, the belly and the armpits.
After you have lost or broken the estoc, you shall take hold of the arming sword, which shall be girded on your left-hand side, and fighting until you have lost or broken it, you shall take hold of the hammer, which shall be attached to the right-hand side of the belt with its hook. Reaching down, you shall find it, and pulling upwards, the hook will release and, with hammer in hands, you shall do what you can with it until you lose it.
And after it is lost, you shall reach behind you and draw the dagger from behind your back.
And you shall grapple with your enemy with all these weapons that you have at your disposal, striking and aiming at the voids, that is, the belly and the armpits, and at the visor, with the estoc or sword and with the hammer in hand, for by wounding the head and the hands he will inevitably surrender.
[40] When we can kill the horse, it matters little if the opponent's horse is greater than ours, since we can kill it as easily, or almost as easily, as if it were some what weaker.
But when there is an agreement that the horses are not to be killed, someone who has a large and strong horse has a huge advantage, for things like sending his sword into the opponent's visor or striking him on the head.
In war this is less helpful than in single combat, since everyone can kill the opponent's horse, and there is little opportunity to plant the weapon exactly where we wish.
[41] 상황에 따라 3열까지 줄일 수 있었다[42] However, they swiftly recovered their spirit and resumed their strength. Thirsty for revenge, like a lioness whose cubs have been stolen from her, they charged even more vigorously into the enemy and passed through them as if they were breaking through a net.[43] Richard, possessed by great anger and not capable of making any pretence of military science, charged with the cavalry around him, until, reaching the very center of the Roman army, he brought the battle there to a standstill, since the archer force on the front line did not withstand him even briefly. Then exerting pressure on Bassonville, he forcefully drove him back, and next attacked those about Doukas. There an obstinate battle developed, and many of those with Richard fell; but since they fell in the midst of a great press, no awareness of it reached the army. The pressure was immense, and a heavy din of spears breaking on shields arose; numerous arrows flew and danger lurked everywhere, until, pressing heavily with a fierce charge, Richard constrained them to give back. Then Doukas himself, who had been overthrown with a lance, came near being captured.[44] Then Robert, seeing his brother so fiercely attacked by enemies resolved to yield not an inch, charged fiercely and proudly into the midst of the hostile ranks, aided by the troops of Count Gerard and followed by the Calabrians whose leadership had been entrusted to him. He speared them with his lance, beheaded them with his sword, dealing out fearful blows with his mighty hands. He fought with each hand, both lance and sword hit whatever target they were aimed at.He was unhorsed three times; thrice he recovered his strength and returned more fiercely to the fray. His fury merely increased, as does that of the lion that roars and furiously attacks those animals less strong than himself, and if he meets resistance becomes more ferocious and burns with greater anger. He gives no quarter, he drags off his prey and eats it, scatters what he cannot devour, bringing death to all. In such a way did Robert continue to bring death to the Swabians who opposed him. 한 치도 물러설 마음이 없는 적들에게 형이 사납게 공격당하는 것을 본 로베르는, 자신이 지휘를 맡은 칼라브리아인들을 이끌고 제라르 백작의 부대의 지원하에 적들 가운데로 맹렬하고 당당하게 돌격했다. 그는 힘센 두 팔로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하며 적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칼로 목을 베었다. 그는 양 손으로 싸웠고, 그가 휘두르는 창과 검이 모두 정확하게 목표를 맞혔다. 그는 세 번이나 낙마했고, 세 번 모두 힘을 회복하고 전보다 더 사납게 전투로 돌아왔다. 사자가 자기보다 약한 동물들에게 포효하고 맹렬하게 공격하다가 저항에 부딪히면 더 사나워지고 더 큰 분노에 불타는 것처럼, 위기를 겪을수록 그의 분노는 오직 늘어날 뿐이었다. 사자는 무자비하게 먹이를 끌고 가서 잡아먹고 남은 잔해를 흩어놓는다. 그런 식으로 로베르는 자기에게 대적하는 슈바벤인들에게 계속해서 죽음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 아풀리아의 기욤, 치비타테 전투(1053)[크레시(1346)] 알랑송 백작의 부대는 대오를 잘 갖추고 진격해 잉글랜드군과 교전에 들어갔고, 다른 방향에서 플랑드르 후작의 부대도 그렇게 했다. 두 영주가 거느린 부대들은 궁수의 저지선을 뚫고 잉글랜드 태자의 대대에 달려들어 상당시간 격전을 벌였다. 프랑스왕은 그들의 깃발이 보이는 곳까지 나아가고 싶어했지만 앞에 있는 궁수들의 울타리를 넘을 수 없었다. "그 날 왕은 에노의 존 경에게 멋진 흑마 한 마리를 선물로 주었는데, 존 경은 자기 깃발을 드는 기사 쟝 드 퓌셀 경을 그 말에 태웠다. 기사를 태운 흑마는 달려 나가 잉글랜드군 사이를 휘젓고 다니다가 발을 헛딛고 도랑에 빠지면서 기사에게 심한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그 날 잉글랜드군은 포로를 잡으러 대오를 떠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사에게 더 이상의 위협은 없었다. 종자가 그를 일으켜 주었지만 왔던 길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돌아와야 했다. 라브루와와 크레시 사이에서 토요일에 치러진 이 전투는 험하고 잔혹한 싸움이었다. 수많은 용감한 행위가 전해지지 못한 채 이곳에 파묻혔다. 저녁 무렵이 되어갈 때 많은 프랑스 기사와 시종들은 영주를 잃고 들판을 오락가락하다가 작은 무리를 지어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금세 격퇴당했다." - 프루아사르, 크레시 전투(1346)[아르수프(1191)] The enemy made a charge and they fled, but then the enemy halted for fear of an ambush, so our men halted and made some resistance. Then there was a second charge and our men fled but fought as they fled. The enemy halted again, as did our men. A third charge followed, which brought them to the tops of some hillocks there and a ridge of hills. 적군의 돌격 앞에 우리 군사들은 도주했으나, 적들이 매복을 경계하며 추격을 멈추자 우리 군사들도 돌아서서 약간의 저항을 시작했다. 적들이 두 번째 돌격을 시작하자 우리 군사들이 다시 도망쳤지만, 그러면서도 싸웠다. 적들이 다시 추격을 멈추자 우리 군사들도 다시 멈춰섰다. 세 번째 돌격은 우리 군사들을 나지막한 언덕 위와 구릉지의 능선으로 몰아붙였다. - 바하 앗딘 - 아르수프 전투(1191)[47] 프랑수아 1세마리냐노 전투 이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다름이 스위스군에게 가한 30번의 돌격을 자랑했지만, 이게 각 부대가 30번씩 돌격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모두 합쳐서 30번이라는 의미인지, 애초에 얼마나 진지한 의도로 말한 숫자인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바야르의 전기에 의하면 마리냐노 전투에서 장다름들은 장창방진 안으로 침투해서 치열한 혼전을 벌이다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프랑스군이 그저 장다름의 돌격만으로 스위스군을 물리친 것도 아니었고, 프랑스군이 가진 포병들로 계속 집중 포격을 가하여 스위스군한테 큰 타격을 입히는 틈틈이 계속 장다름이 돌격을 하여 간신히 스위스군을 물리친 것이었다.[48] 드라누 자신은 어차피 기수와 장교들만 제압해도 부대는 쉽게 와해되기 때문에 접촉 면적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49] 봉건제는 전쟁을 위한 기병 양성에 유리한 제도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에 봉건제를 최초로 도입한 노르만 왕조는 정작 전시에 봉신 기사들의 능력을 믿지 않았고 처음부터 방패세를 걷어서 그 돈으로 용병 기사와 승마궁병을 고용하는 것을 더 선호했으며 연대기 작가 슈거는 윌리엄 2세를 '부자이며, 뛰어난 상인이자 기사들의 봉급 지급자paymaster'로 묘사했다.[50] 투창 기병이나 투석 기병, 궁기병[51] 폴 J. 스미스, 《천부(天府)에 과세를 해서》, 하버드대학 출판국, 1992[52] 송나라 기록에는 중기병끼리 쇠사슬로 서로를 묶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금나라 기록에는 없어 청 건륭제 시기인 18세기에 이미 이거 기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걸 쇠사슬로 묶었다고 비유한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로 신빙성이 떨어진다.[53] 요나라와 금나라의 전쟁을 보면 그야말로 요나라가 불과 10년도 안 되어 훨씬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훨씬 적은 병력을 거느린 금나라한테 거의 일방적으로 참패를 당하고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이는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의 군사 주력이 활을 주무기로 삼은 경기병이었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모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중무장 기병을 주력으로 내세운 금나라 군대한테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참패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요나라가 결코 허약한 나라는 아니었으니, 금나라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약 200년 동안 동북아에서 송나라서하를 억누르며 최강대국으로 군림했던 군사 강국이었다. 심지어 금나라한테 철저하게 얻어맞고 다 망해가던 와중에도 송나라 10만 대군을 두 번이나 패주시킬 만큼 거란족들은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그런 거란족들을 상대로 박살을 낸 것을 보면 금나라의 중무장 기병들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54] 몽골 고원의 부족들이 전투민족으로 유명하지만 그건 칭기스칸 이후의 일이고 그전에는 오히려 요나라와 금나라의 압제에 신음하던 약소세력이었다. 정말 경기병이 우월하고 중기병이 저열하다면, 몽골은 칭기스칸이 등장하기도 전에 그 우월한 경기병의 힘으로 요금의 중기병을 대파하고 제국을 세웠어야 한다. 결국 경기병은 우월하니 중기병이 우월하니 하는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55] 정찰, 약탈, 수송대 호위, 패퇴하는 적 추격, 후방 급습 등의 비정규전 등 전면 교전 이외의 모든 부류의 작전에 쓰임새가 있었다.[56] Frederic chauvire-The new knights(2021)[57] David parrott-Strategy and Tactics in the Thirty Years' War: The Military Revolution(1985)[58] 실제 전근대에 헌병군을 가리키는 말로써 가장 많이 쓰인 것은 Maréchaussée였다.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군주정 요소를 공화정 요소로 치환하면서 오늘날 널리 알려진 Gendarmerie로 대체되었다. 프랑스 헌병대의 정식 명칭이 프랑스 국립헌병대인 것도 왕립 헌병군(Maréchaussée Royale; Royal Maréchaussée)을 국민 헌병군(Gendarmerie nationale; National Gendarmerie)으로 바꾸면서 정착한 것이다.[59] 오늘날 이 단어를 쓰는 사례로는,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헌병군 제도를 도입한 네덜란드가 있다. 이곳에서는 프랑스 헌병군의 탄압에 대한 부정적 기억 탓도 있거니와 군주국이니만큼 외세적이고 공화주의가 물씬 풍기는 Gendarmerie 대신 그 동의어인 Maréchaussée를 자국 헌병군에 붙여주었다.[60] 이쪽은 다른 어휘보다 사용례가 많지는 않으나, 영국 치하 아일랜드의 왕립 아일랜드 헌병군(Royal Irish Constabulary)이나 2차세계대전 후 미군정 하 독일·오스트리아의 미합중군 헌병군(United States Constabulary) 정도가 있었다.[61] 조선에서 창기병의 도태는 필연이었는데 이전의 삼국시대부터 한반도 왕조의 기병들은 창보다 활을 선호하였다. 창기병의 위력은 대회전을 치를 때 기병이 밀집해서 충돌하는 충격 전술에서 두드러지고, 전후좌우로 적과 아가 뒤섞여 벌이는 난전에서는 가치가 급감한다. 문제는 한반도의 산지가 대규모 회전에 극악한 환경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한반도에서 기병이란 신속한 기동력으로 적을 구릉에서 각개격파하는 고속기동전력, 혹은 여진족 기병을 전면에서 붙어 깨뜨리는 요격전력에 가까웠다. 때문에 한반도에서 창기병의 가치는 단기접전과 기동전에 능한 궁기병이나 검기병보다 훨씬 저평가되었고, 회전에서도 창기병을 일방적으로 유린했던 몽골의 궁기병 스웜 전술이 정착한 여말선초부터는 창기병의 입지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동아시아 기병들은 원래부터 다양한 무기를 함께 쓰는 올라운드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마냥 창기병이 사장되었다기 보다는 서서히 궁기병, 검기병과 섞여 올라운드화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특히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운용된 유럽의 윙드 후사르의 사례만 봐도 창뿐 아니라 권총과 기병도도 함께 썼기에 그것과 비슷하다보면 된다.[62] 사실 쳐발렸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청나라 기록을 보면 오히려 조선군에 의해 고전했다고 적혀있다. 역사의 승자인 청나라의 기록이 이런 것을 보면 조선군은 청나라 기병을 상대로 꽤 잘 싸웠다는 걸 알 수 있다. 한때 3만vs3백으로 패했다고 알려진 쌍령 전투도 실상은 2천 vs 최소 3천~최대 7천 5백으로 오히려 조선군이 수적 열세였으며 그런 상황에서도 최고 지휘관인 실투를 전사시키는 등 분전했다. 다만 이 전투에서 경상도 근왕군 지휘부가 괴멸되며 경상도 근왕군 결집 및 남한산성 지원이 실패로 돌아갔기에 청군의 승리라 보는 것이다.[63] 아프리카에서 자라는 식물인데 가볍고 통풍이 잘 되며 물을 흡수하지 않고 단열도 잘 해줘서 아프리카에서 직물 재료로 상당히 애용되었다.[64]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문장에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그려졌는데, 원래 수단은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기 11세기 이후로 이슬람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십자가를 그려넣는 식으로 기독교 문화의 영향이 남아있었다.[65] 근대 이전에 10만 명의 기병이면 굉장히 막강한 전력이다.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칭기즈칸몽골군도 처음엔 그 수가 9만 5천 명 가량이었다.[66] 예를 들어 모리스 백작은 한 군단을 3580명으로 편성하여 그 중에서 정찰용 기병을 대대급 병력인 220명의 절반가량(110?)으로 혼재편성하였었고, 나폴레옹기 프랑스 원정군 편성을 살펴 보면 기병군단 외에 각 군단에도 경기병 병력이 약간씩 혼재편성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67] 기마포병을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입한건 30년 전쟁당시 스웨덴의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이고, 뒤이어 러시아가, 그 이후 더 대규모로 본격적으로 편성하고 운용한 것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2세)이었다. 프랑스는 이를 보고 베껴서 1791년에 도입하였다.링크 및 James Marshall-Cornwall, <Napoleon as military commander>, Penguin Books, 2002, p.31[68] 전열보병의 총검은 전근대의 파이크를 계승한 무기이고 이를 바탕으로 전열보병 역시 총검을 이용한 대기병 총검 방진을 짰기에 근접전에서 기병에게 약했다는 것은 반만 사실이다. 다만 두터운 갑옷과 장창으로 무장한 전근대 대기병 방진에 비하면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69] 나폴레옹의 프랑스 기병편성과 운용에 대한 설명 출처는 '주정율, <나폴레옹의 기병전술에 관한 연구>, 군사89호, 군사편찬연구소, 2013'[70] James Marshall-Cornwall, <Napoleon as military commander>, Penguin Books, 2002, p.131 책에서 적고 있는 각 군단별 light Cavalry division이 어느정도 규모인지는 불명확함[71] 인용서적 마다 숫자 차이가 있고, 예비대로써 돌격전을 치른 병력이므로 독립기병사단으로 추정되며, 각 군단에 편성된 기병은 제외한 수치로 짐작됨[72] James Marshall-Cornwall, 같은 책, p.195[73] 더하여 보통 중기병들은 경기병보다 키나 덩치가 더 컸고 사용하는 기병도 역시 더 길고 무거웠다.[74] 1924년 영국군 교범에 따르면 풀 갤럽으로 24㎞/h[75] 특히 연발총이 막 나오던 시기라 공업화가 덜된 남부에서는 북군을 두고 월요일에 장전해서 일주일 내내 쏘는 빌어먹을 양키들이라고 욕했다.=게임 ㅈ같이 하네[76] 다만 러시아 전쟁성(국방부) 산하가 아닌 황실 소속인 근위대 및 카자크나 비슬라브족 기병부대에는 이 같은 개혁이 적용되지 않았다.[77] 전장식 화기를 쓰던 시절에는 불발탄의 비율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78] 영화 워 호스를 보면 초반에 영국 기병대가 독일군의 MG08 십자포화에 일제히 전멸하는 것을 볼 수 있다.[79] 그러나 후술되듯 기병은 1차대전때도 전장의 축 중 하나였으며(그리고 기관총 십자포화로 인한 기병 전멸도 전쟁 극초반때 이야기지 극초반만 지나면 기록에 없다.) 기병이 완전히 전장에서 퇴장하려면 최소 6.25 전쟁까진 가야했고 심지어 현대에 들어와서도 살아있는 걸 보면...[80] 반자이 돌격의 경우 유효한 전술이라기보다는 앉아서 죽느니 공격이라도 한번 해보고 죽자는 식의 옥쇄의 일종이었던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진지 돌파를 목적으로 한 기병 돌격과 똑같이 대치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81] 이미 기병은 남북전쟁을 전후하여 총을 주무장으로 삼는 비율이 급격히 올라갔다. 세계대전기에 들어설 무렵에는 사실상 창칼을 들고 돌격하는 역할을 맡은 기병들조차도 총을 소지하지 않은 자들이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세계대전기에는 기관총, 박격포, 보병포 등 작지만 강한 화력을 내줄 수 있는 병기들이 발전하면서 자연스레 기병대 역시 기병대 소속의 소규모 화포나 기관총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때문에 기병들이 적이 오기 전에 미리 기동력을 살려 빠르게 유리한 고지대를 점령한 뒤 기병대 소속의 소구경 화포와 기관총을 배치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는 상황이 상당히 자주 펼쳐졌다.[82] 사실 전술했다시피 1차대전기에도 기병대가 기관총이나 소구경 화포를 보유한 경우는 흔했다. 폴란드 창기병과 그들의 돌격이 워낙 유명한 탓에 새삼스럽게 느껴질 뿐이다.[83] 전격전의 전설의 자료에 따르면 독일군의 월간 차량 생산량으로는 비전투손실의 2%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저조하여 10개의 기갑사단과 6개의 차량화보병사단에게 보유한 차량 대부분을 집중 배치했을 정도였다.[84] 단, 이는 어디까지나 수송용으로 말이 사용된 것에 가깝지 이것을 본격적인 기병대를 굴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장 독일군처럼 부족한 기계화 탓에 똑같이 말을 많이 사용했던 일본군의 경우 대포를 말로 끄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말들은 포병대 소속이었지 기병대 소속이 아니었다.[85] 싱가포르 전선에서 기병의 기출변형인 자전거 부대(은륜 부대)를 활용한 적은 있지만, 이러한 자전거 보병은 엄밀히 말해서 문자 그대로 보병으로 간주되니 논외다.[86] 정확히 말한다면 중국이나 몽골이 차량을 운용하기 힘든 험지 지역에서 기병을 운용 중이며 로디지아 분쟁, 미국-아프간 전쟁 등에서도 기병이 활약했기에 완전한 퇴장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87] 의외로 말을 구하기가 쉬웠는데 일본군이나 일경이 쓰다 두고 간 말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말을 탈 기수가 문제였는데 이는 대학교에서 마술과를 다니던 학생들을 찾아서 해결했다.[88] 물론 기병인 만큼 말을 탄채로 기마 돌격을 감행한 사례도 당연히 존재한다.[89] 완전히 포위되어 포로로 잡히기 직전에 스스로 권총 자살하였다. 이 때 애석한 부분이 더 있는데, 당시 장철부를 포위한 북한군 부대인 12사단 766여단은 하필이면 장철부가 징용된 일본군에서 탈영 후 함께 싸웠던 조선의용군 전우들이었다. 이런 인연에 따른 사심 때문인지 아니면 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하려는 책략이었는지는 불분명하나 당시 북한군 부대는 장철부에게 투항할 것을 여러번 권고했다고 한다.[90] 미처 수습되지 못한 말들은 야생화되어 2000년대 초엽까지 야생마로 살기도 했다.# ,#[91] 말과 친척이며 외형도 유사한 얼룩말이 살지만 사나운 성격과 질병 탓에 가축화되진 못했다.[92] 사실 이는 헬기도 마찬가지. 공중으로 수송하는 헬기는 보병이 승차하는 장갑차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93] 당장 대한민국 육군의 기갑 병과 휘장에도 편자가 들어가있다![94] 이쪽은 영국 육군에서 주로 볼 수 있다.[95] 실제로 미국은 독립전쟁기에 드라군밖에 보유할 수 없었고, 폴란드에서 온 의용병단으로 풀라스키의 군단이라는 창기병대를 하나 보유하게 된다.[96] 헬리콥터도 가능하겠지만 대공무기에 취약한 것과 상대적으로 노출이 쉽게 되고, 연료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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