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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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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집안 내력3. 한나라의 장군으로서
3.1. 한문제 시절3.2. 한경제 시절
3.2.1. 공성계(空城計)
3.3. 한무제 시절
3.3.1. 망신살3.3.2. 복직3.3.3. 더럽게도 안 풀리는 일생
4. 이광의 지휘 스타일5. 성격6. 가족 관계7. 이광의 무예8. 평가
8.1. 졸장?

1. 개요

파일:1jhLLIh.jpg
파일:adwZttN.jpg
생몰년도 ? ~ 기원전 119년
이름 이광(李廣)
출생지 농서군 성기현(隴西郡 成紀縣)[1]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명장. 활약 시기를 보면 무제의 조부인 한문제 시기부터였으니, 상당히 오랜 기간 한나라의 전쟁터를 누빈 역전의 장수였다. 그리고 전장을 날아다니는 장수라는 뜻의 비장[2]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한군의 지휘관 중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곽거병이라는 하늘의 사랑과 승리의 여신의 사랑을 동시에 독차지한 명장이 믿을 수도 없는 전과를 올리고 다닌 것에 비하여, 항상 더럽게도 꼬인 운세와 기껏 전공을 올려도 무시당하는 어이없는 경우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게다가 묵묵히 받쳐주는 역할조차도 위청이라는 확고한 인물이 있어, 그런 역할로도 애매한 위치. 게다가 최후까지 그리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전설적인 이름값에 비하면 상당히 좋지 못한 삶을 살고 떠났다.

2. 집안 내력

본래 집안 내력은 그닥 볼 것이 없었던 위청곽거병에 비하여, 이광은 상당히 유명한 인물을 조상으로 두었다. 그의 집안은 농서 이씨로 선조는 이신이었는데, 이신은 진(秦)나라시황제가 통일 전쟁을 벌일 무렵의 지휘관으로 연나라제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공적을 세워[3] 농서후에 봉해진 공신이었다.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항연에게 깨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본래 이광의 집안은 괴리(槐里)[4]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으나, 후에 농서군[5]의 성기현 지역으로 이주를 했다. 그리고 집안 대대로 활 쏘는 법을 후손에게 전수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이광을 떠올리면 보통 활 쏘는 모습을 떠올린다.

3. 한나라의 장군으로서

3.1. 한문제 시절

문제 시절, 한나라전국시대초한쟁패 시절의 참담한 피해를 회복하며 국력을 착실하게 키워나가고 있었다(문경지치). 그러나 고조 유방 시절부터 한나라의 숙적이었던 흉노는 이런 한나라를 가만히 두질 않아, 사이 사이에도 계속해서 쳐들어오는 일이 일상이었다.

한 문제 14년인 BC 166년. 흉노의 무리가 소관(蕭關)으로 대거 쳐들어오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이광은 양가(良家)의 자제로 종군하여, 적의 무리와 격돌했다. 아직 지휘관 시절은 아니었던 이광은 문자 그대로 직접 말타고 활을 쏘며 적과 싸웠고, 워낙 용맹하고 말 위에서 활을 쏘는 솜씨가 뛰어나 적을 많이 죽이고 포로도 잡아 중랑(中郞)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이광의 사촌동생이었던 이채(李蔡)도 공을 인정받아 낭관의 벼슬에 올랐고, 둘 모두 무기상시(武騎常侍)[6]에 임명되었다. 무기상시의 '질(秩)'은 600석인데, 이광은 중랑의 관직에 있으면서 무기상시로 보충되었기 때문인지 800석을 받았다.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며 시종하게 된 이광은 항상 용맹함을 보였으며, 한번은 위험한 맹수를 때려잡은 일까지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용맹하여 한 문제가 이렇게 감탄했을 정도였다.
"아깝구나! 때를 만나지 못한 이여! 만일 그대가 고제(高帝)의 시대에 태어났다면야, 어찌 만호후(萬戶侯)[7] 정도가 어려울 기량이었을까!"

만약 초한쟁패기 시절에 태어나, 주발이나 조참 처럼 유방을 도와 싸웠다면 대단한 공신이 되었을 것을, 비록 흉노가 쳐들어오긴 하지만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 벼락 출세도 어려운 때 이광이 태어난 점을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그러나 평화로웠던 한 문제 시대가 지나면서 거대한 전쟁이 연달아 벌어지긴 하지만, 한 문제의 한탄은 이상한 방향에서 맞아떨어졌다. 당대의 인걸이 난세를 만나긴 했지만 정작 그 난세는 그를 원하지 않았던 것. 사람의 인생에는 운도 따라줘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3.2. 한경제 시절

한 경제가 즉위하자 이광은 농서군의 도위(都尉)가 되었다가, 기랑장(騎郞將)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이 무렵, 한 경제 시기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던 오초7국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이 오초7국의 난에서 주발의 아들 주아부는 대활약을 펼쳤는데, 당시 이광은 효기도위(驍騎都尉)에 임명되어 반란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 당시 주아부가 오왕 유비의 군대와 교전을 벌인 곳은 창읍(昌邑)이었는데, 이광은 이 싸움에서 용맹하게 나가 적군의 깃발을 뺏어, 창읍의 병사들에게 자신의 이름 두 글자를 똑똑히 새겨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오초7국의 난에서 적군을 막아세운 지휘관은 주아부 말고도 양왕 유무(劉武)가 있었다. 양왕은 이광에게 장군의 인수를 주었는데, 그러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귀환한 이광에게 상을 주지 않았다.

이광을 장군으로 임명한 양왕의 행동은 제후왕의 월권 행위였다. 조정에서는 이런 월권을 용납할 수 없었고, 양왕이야 공적도 있고 입김도 강하니 이에 처벌은 못한다 하더라도, 양왕으로부터 장군으로 임명된 이광은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양왕이 오버하여 월권 행위를 벌여 되려 애먼 이광만 피를 본 상황.

이때부터 일이 꼬여가는 낌새가 보였지만 이광은 상곡태수(上谷太守)로 임명되었다. 상곡의 위치는 지금의 베이징 북쪽으로 흉노와 교전이 잦은 지역이었고, 이광은 여기서도 늘 하던대로 매우 용맹하게 매일같이 흉노와 교전하였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본 전속국(典屬國)[8] 공손곤야(公孫昆邪)는 이광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울면서 황제에게 말했다.
“이광은 재주와 용기는 갖춘 인재로 천하에 그와 견줄 사람은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능력을 자부하고 쉴 새 없이 적군과 접전하니 조만간에 목숨을 잃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에 이광은 상군태수(上郡太守)로 자리를 옮겼다. 이광은 농서, 상군, 상곡 등의 임지를 포함하여 북지(北地), 안문(雁門)、대(代), 운중(雲中)의 태수를 역임하며 북쪽 변경에서 힘껏 싸워 자신의 명성을 떨쳤다.

3.2.1. 공성계(空城計)

그러다가 흉노가 상군으로 크게 쳐들어오는 일이 있었다. 이에 황제는 중귀인(中貴人)[9]을 보내 이광을 따라다니면서 싸움을 배우게 했는데, 중귀인은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마음껏 활보하다가 흉노의 병사 세 명을 만나게 되었다. 이쪽은 수십 명이고 저쪽은 세 명이니 당연히 안심하고 싸움을 벌였지만, 흉노 병사들이 돌아가면서 활을 쏘자 되려 이쪽의 수십 명이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중귀인은 부상을 입고 이광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흉노와 자주 싸워 그들을 잘 알고 있는 이광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들은 필시 수리를 쏘는 자들이다."[10]

이광은 즉시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이들을 추격했다. 세 명의 흉노 병사는 말이 없어 걸어가고 있었으므로, 그 사이에 수십 리 밖에 이동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기병 100여 명이 닥쳐들자 대항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광은 좌•우익의 기병들에게 비키라고 명령을 하고, 직접 활을 쏘아 두 사람을 죽이고 나서 한 사람을 생포했다. 확인해보니 수리를 사냥하는 사람들이 맞았다.

이제 그 포로를 결박해서 말 위에 올라탔는데, 갑자기 흉노가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쪽은 기병 100여 명밖에 없었으니, 교전을 하면 거의 가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흉노 기병들은 이광의 병력이 자신들을 유인하려는 병사들로 알아서 착각하고 놀라서 달아나더니(……)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쳤다. 이광을 따르던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겁에 질려 이 사이에 얼른 달아나기를 원했으나, 이광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우리는 대군과 수십 리 떨어져 있다. 만일 지금 100명의 기병으로 도망친다면, 흉노가 우리 뒤를 추격하여 모두 죽이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머문다면, 흉노는 필시 우리가 저들을 꾀어내려는 부대로 오인하여 감히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100여 명의 기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진하라!"

그렇게 100여 명의 기병이, 수천 명의 흉노 병사를 향해 천천히 전진하고, 수천 명의 흉노 병사들은 되려 겁을 먹고 나오지 못하는 희극적인 풍경이 연출되었다. 적군과 거리가 2리 정도 남게 되자, 이광은 전진을 멈추고 다시 괴상한 명령을 내렸다.
"모두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당연히 멘붕한 병사들은 "아놔, 장군님. 쟤들은 숫자도 많고 거리도 가까운데, 어쩌려고 그러심?" 하면서 당황하였다. 그렇지만 이광은 뱃심도 좋게 대답했다.
"저 오랑캐들은 우리가 달아날 것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가 모두 안장을 풀어헤친 모습을 보여주고, 달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자 흉노 기병들은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그런데 이광은 적군 중에 백마를 타고 있는 사람이 장군이라는 것을 알고, 병사 10여 기를 이끌고 갑자기 내달려 백마에 탄 장수를 죽이고는, 다시 돌아와 안장을 풀었다. 게다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땅바닥에 눕고 뒹굴거리며 편하게 쉬게 했다.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밤이 어두워지자 흉노 병사들은, 이광의 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군대가 자신들을 야습할 것이 두려워 결국 달아났다. 이광은 날이 밝자 여유롭게 본대로 귀환했는데, 본대는 이광의 위치를 몰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공성계를 멋지게 실현한 것이다. 진짜 대단한 깡이라고밖에는...

3.3. 한무제 시절

오랜 시간이 흘러 경제가 붕어하고, 뒤를 이어 한 무제가 즉위했다. 한 무제 주위의 근신들은 이광이 명장이라고 추천했고, 이에 이광은 미앙궁(未央宮)의 위위(衛尉)[11]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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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한은 가공할 수준의 국력을 보유한 초강대국이었다. 하지만 한 고조 유방이 흉노 묵돌 선우에게 백등산 전투에서 패배한 뒤로, 군사적으로는 쭉 흉노에 눌려오던 상황이었다. 여후는 대놓고 흉노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고, 한 문제의 시대에는 쳐들어온 적은 막아냈으나 장수들이 적을 추격해서 북벌을 감행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 무제 시기에 이르러 내부 역량이 그야말로 절정을 치닫자, 자연스레 그 힘은 외부로 분출되게 되었다. BC 133년, 한 무제는 무려 30만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작전은 적을 유인해서 복병으로 섬멸하는 계획이었는데, 문제는 흉노의 군신선우에게 이 작전이 완전히 간파당해서 시도도 못해보고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마읍 전투). 아무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원정까지 하는데 드는 비용만 어마어마했다. 결국 관련 책임자를 죽이자는 여론이 강해져서, 작전을 입안한 왕회(王恢)는 절망하고 자살해 버렸다.

이 당시 30만 대군을 이끌었던 사람은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이었는데, 이광은 효기장군(驍騎將軍)에 임명되어, 경거장군(輕車將軍) 공손하(公孫賀), 장둔장군(將屯將軍) 왕회, 재관장군(材官將軍) 이식(李息)등과 함께 출전했다. 하지만 싸움이 벌어지지 못해 변변한 공도 못 세우고 돌아와야만 했다.

3.3.1. 망신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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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다시 한번 원정군을 준비한 것은 4년 뒤(원광 6년인 BC 129년. (이것은 《한서》의 기록에 따른 것이고, 《사기》에서는 원광 5년인 BC 13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의 일이었다. 첫 출전하는 위청, 공손오, 공손하, 그리고 이광 이 네 장수들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다른 방향으로 출진했다.

위청은 이때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어 출진을 했는데, 그 전까지 군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순전히 위청의 누이 위자부의 빽에 가까웠다. 한 무제가 위자부의 동생을 공 좀 세워보라고 밀어넣은 것이었고, 일반적이면 패망하는 것이 당연하나 결과는 전혀 의외의 상황으로 흘러갔다.

공손하는 흉노를 만나지도 못했고, 공손오는 무려 7,000명의 사망자를 남기는 참혹한 대패만 당했다. 이광은 이 넷 중에서 가장 운이 없었던 케이스로 흉노 선우가 거느리는 본대를 만나는 바람에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 밀려 전멸이라는 대패를 겪었고, 이광 본인도 포로로 잡혔다. 평소에 이광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들은 군신 선우가 "산 채로 데려오라." 는 명령을 내려, 이광은 흉노 기병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이광은 부상을 당한 상태라, 흉노 기병들은 두 말 사이에 그물을 이어 그물 침대처럼 해서 눕힌 후 운반했다. 이광은 이때 정신이 멀쩡했으나 마치 죽은 것처럼 하고 10리를 지날 동안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았다. 그런 이광의 눈에, 한 흉노 소년이 좋은 말을 타고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회를 포착한 이광은 갑자기 소년의 말에 펄쩍 뛰어들어 소년을 밀어버리고[12] 을 빼앗아 채찍을 때리고 남쪽으로 10여 리를 쏜살같이 달아나, 간신힌 본대와 합류했다. 흉노 기병들이 당연히 이광을 추격했으나 이광은 활을 쏘아대면서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나라에 도착한 이광은 형리들에게 넘겨졌고, 많은 병력을 잃어버린 데다 사로잡히는 일까지 당했으니 처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광은 공손오와 함께 속죄금을 바치고 서인으로 강등이 되어버렸다. 간신히 살아 돌아왔는데 처형을 내리는 것이 야속하기는 했지만, 이광도 대패하고 사로잡히는 굴욕까지 당했으니 뭐라고 할 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광을 비롯한 장수들이 전부 무성과 내지는 패배했을 때, 누나 빽으로 들어온 위청만이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닌가. 한나라의 조야(朝野)가 건국 70년 만에 마침내 한의 군대가 장성을 넘어 그 북쪽까지 위풍당당하게 공격해 들어간 일에 대하여 요시 그란도 시즌을 외칠 때, 이광은 씁쓸하게 시골로 내려가야 했다.

3.3.2. 복직

몇 년 동안 이광은 개국 공신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의 손자 관강(灌强)과 함께 시골에서 사냥이나 하면서 지내야 했다. 하루는 밤에 시종을 데리고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려 거나하게 을 마시고, 패릉정(覇陵亭)[13]에 당도했는데, 패릉의 현위는 술에 취해서 이광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시종이 이분이 전날의 이광 장군이라고 말하자, 술 먹은 현위는 이렇게 대답해버렸다.
“현직 장군이라도 야간 통행은 불가거늘, 전직 장군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이광은 통과하지 못해서 정자 아래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런데 그 무렵[14], 흉노가 침입하여 요서 태수를 살해하고, 한안국의 군대를 격파하는 일이 생겼다. 조정에서는 한안국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이광을 우북평의 태수로 임명했다. 그러자 예전의 일을 속에 담아두고 있던 이광은, 특별히 패릉위의 현위와 같이 움직이게 해달라고 요청하고는, 임지에서 그 현위를 살해해버렸다. 쪼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한 무제가 이 일을 듣고 오히려 잘했다며 이광을 칭찬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당시에는 이러한 행위가 오히려 상남자스럽게 보여졌을 수도 있다.

이광을 우북평에 머물게 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가 온 것을 안 흉노에서는 한나라비장군(飛將軍)[15]이라 부르며 공격하지 못했다.

3.3.3. 더럽게도 안 풀리는 일생

얼마 지나지 않아 낭중령인 석건(石建)이 죽자 후임으로, 낭중령에 임명되었으며, BC 123년에는 후장군에 임명되어 대장군 휘하에서, 정양군으로부터 출병해 흉노를 공격했다. 다른 장수들이 저마다 공적을 세워 상을 받는 와중에, 이광은 이상하게 공을 못 올려 상을 받지 못했다.

2년 후, 이광은 낭중령의 신분으로 4,000여 명을 이끌고 우북평에서 출발하고, 박망후 장건은 10,000여 명을 이끌고 길을 달리해서 출발했는데, 갑자기 이광의 군대보다 10배나 많은 흉노 좌현왕의 40,000명의 군대가 이광을 포위했다. 이광의 병사들은 멘붕에 처해 모두 패닉상태였으나, 이광은 자신의 아들 이감(李敢)에게 명령하여 적에게 돌격하게 했다. 이감은 수십여 기를 이끌고 수만 군대속으로 들어가서 적 기병을 정면 돌파하고, 다시 돌아온 뒤에, 저놈들 별것 아니라고 자신감 있게 말해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별것이 아니든 어쩌든 일단 싸워야 했기에, 이광은 부대를 원형으로 하여 밖을 둘러보게 했고, 사방에서 돌진해오는 흉노 병사들을 향해 활을 쏘았다. 이광 본인은 대황(大黃)이라는 쇠뇌를 쏘아 흉노 부장들을 쳐죽이며 분전했고, 날이 저물어도 포위가 여전하자 겁에 질린 병사들도 이광의 이런 용맹한 태도를 보며 용기를 얻어 열심히 싸웠다.

다음 날, 이광이 여전히 죽을 힘을 다해 싸울 때, 장건의 부대가 도착하여 적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너무 지쳐 추격하지 못했고, 이광의 부대는 전멸의 위기를 넘겼지만 몰골은 완전히 패잔병 꼴이었다. 장건은 행군을 지체하여 사형을 당해야 했지만 속죄금을 내어 목숨은 건졌다. 이광은 딱히 공이랄 것이 없어, 그토록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도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다. 《사기》 <흉노 열전>에 따르면, 이광의 4,000여 병력은 거의 대부분이 죽었고, 흉노는 이보다 더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원수 4년이었던 BC 119년, 한 무제는 장수들을 불러 의논을 했는데, 흉노 쪽에서는 한군이 보급 등 여러가지 문제로 사막을 건너서는 오래 싸우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점에 합의를 두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크게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취한다면 큰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해 봄, 한나라는 에이스였던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0,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병을 동원하게 하는 동시에, 수십만 명이나 되는 보병과 치중병으로 이를 지원했으며, 이광, 공손하 등 대흉노 전쟁에서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무장들을 모조리 참전시켰다. 근 10만명이 넘는 원정대가 사막을 넘기 시작했는데, 이 병력들이 원정군이라는 점, 그리고 사막과 계곡을 넘는 극히 힘든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숫자였다.

출발하는 데 있어서, 본래 곽거병은 정양(定襄)[16]에서 출발하기로 했는데, 출발 직전에 포로를 문초해본 결과, 선우는 동쪽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대군(代郡)에서 출발해 진격하기로 했다. 반대로 위청은 정양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선우를 상대하는 맛있는 역할은 곽거병이 골라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선우의 군단을 상대하는 것은 위청이 아니라 곽거병이 된다. 흉노 쪽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한나라 군대가 사막을 건너면 매우 피로에 지칠 것으로 판단, 군수물자를 전부 먼 북쪽에 두고 정예병을 북쪽에 두어 천천히 기다리려고 마음먹었다.

이때 이광은 자신도 나가서 싸우고 싶다고 계속 청했으나, 한 무제는 이광이 나이가 많다고 거절하다가 나중이 돼서야 간신히 그를 전장군으로 임명하여, 위청을 따라서 싸우게 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선우를 상대하는 역할은 곽거병이 할 일이었다. 그런데 위청은 포로를 통해 선우의 위치를 알게 되자, 몸소 정예병을 이끌고 이를 상대하려고 나섰다. 그런데 위청은 이광에게, 멀리 돌아가는 길인 동쪽 길로 행군하라고 명령했다. 용맹한 이광은 이에 당연히 반발했다.
"신은 전장군이온데, 지금 대장군께서는 저에게 동쪽 길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은 머리를 틀어올린 이래로 흉노와 싸워왔고, 지금이 돼서 선우를 대적할 기회를 처음으로 얻었습니다. 신이 앞장서서 선우와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위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그로서도 별 수 없는 것이, 그는 출발 전 한 무제로부터 은밀히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한 무제는 "이광이 늙고 운수가 사나우니, 선우와 대적하게 하면 일이 망할까 걱정이다. 선우와 싸우게 하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황제까지 저런 소릴 할 정도면 당대에도 이광의 불운함은 유명했던 모양이다.

위청은 윗사람들 말을 거스르지 않는 성격이라, 이광이 아무리 씩씩거리며 나서도 그를 싸우게 할 순 없었다. 이광도 그 사실을 알았고, 그 수작이 너무 화가 나서 위청에게 따진 것이었지만, 위청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난 이광은 인사도 하지 않고 막사를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화가 난 채로, 이광은 우장군 조이기(趙食其)와 함께 동쪽 길로 행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길잡이도 없이 알지도 못하는 길을 가는 것이라, 군대는 길을 잃고 상당한 시간을 헤멘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미 싸움은 끝나 있었고, 위청은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가장 중요한 흉노의 선우를 놓쳐버렸다. 위청은 밥과 술을 주면서 이광에게 길을 잃은 상황을 묻게 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보고를 하라고 했으나, 이광이 말을 듣지 않자 위청은 장사(長史)를 불러 이광을 질책했다.

이광은 그때서야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 교위들은 죄가 없다. 내 스스로가 길을 잃은 것이다. 내가 직접 심문을 받도록 하겠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 이광, 머리를 틀어올리고 흉노와 크고 작게 싸우기를 70여회, 이제 다행이도 대장군의 명을 따라서 출격하여, 선우의 군대를 막으려 했으나, 대장군은 이 이광을 멀리 돌아가게 했고, 또 군대는 길을 잃기까지 하였다. 이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광의 나이가 이미 예순을 넘었으니, 이제와서 어찌 도필리 따위나 상대할 것인가!"[17]

그리고는 말을 마치자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베어서 자결을 해버렸다. 이광의 군대와 사대부들은 비통하여 눈물을 흘렸고, 울음소리에 온 군영이 들썩거렸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나이가 적든 많든, 그를 알든 모르든 간에 모두들 이광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이광과 같이 길을 잃은 조이기는 참형을 당해야 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4. 이광의 지휘 스타일

이광과 함께 태수 직을 맡아 같이 싸운 정불식(程不識)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정불식은 항상 군대의 대오를 가지런히 정돈하였고, 늘 경계를 하여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겨를이 없었다. 이리하여 정불식은 해를 당한 적이 없었는데, 이에 반하여 이광은 군대의 대오도 그리 엄정하지 않았고 휴식 시간은 병사들이 마음대로 활보하면서 지냈으며, 막사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도 간략하게 했다. 하지만 척후를 멀리 보내 경계를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흉노는 이광과 정불식이 모두 이름난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광을 두려워했을 뿐이었고, 사졸들 또한 모두 이광을 따르기를 원하며 정불식을 따르는 일은 고통스럽게 생각했다.

정불식은 이광의 군대와 자신의 군대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이광의 군대는 업무를 지극히 간소화했다. 그러나 오랑캐의 군대가 그를 공격하더라도, 이광의 군대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졸들은 항상 편안하여 즐겁게 지내므로, 모두가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즐겁게 죽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업무가 번잡하다 하나, 우리 부대 역시 오랑캐들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5. 성격

이광은 대단히 청렴했다. 간간이 상을 받아도 모두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음식도 병사들과 같이 왁자지껄하게 어우러져 먹었다. 죽을 때까지 40여 년간 봉록 2,000석의 고위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닌 적이 없었으며, 항상 남들에게 나눠주어 집에는 재물이 남는 것이 없었다.

전투를 하다 궁핍하고 어려워져도 이광은 사졸들이 물을 마시지 않으면 절대로 물을 마시지도 않았고, 사졸들이 모두 음식을 먹지 않으면 자신도 먹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까다롭게 굴지 않아 병사들은 모두 그를 사랑했다. 위청도 모든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대했으나 사람들에게는 쪼다 같은 취급을 당했고, 곽거병의 경우에는 병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긴 했으나 워낙 막무가내라 따르기 어려운 지휘관이었다. 이에 비해 이광은 병사들이 따르기 쉬우면서도 사랑받는 지휘관이었다.

6. 가족 관계

처음 이광과 같이 벼슬을 받은 사촌 동생 이채에 대해서, 동시대 같이 살았던 사마천은 "사람을 9등급으로 나누면 하중(下中) 정도." 라고 평가했고 실제로 명성도 이광보다 훨씬 떨어졌지만, 그 하중 정도라는 이채도 위청을 따라 공을 세웠고 급기야 나중에는 공손홍(公孫弘)을 대신해 승상까지 되었다. 반면에 이광은 작위나 봉읍을 전혀 받지 못했다. 심지어 이광의 부하 중에서도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다. 다만 이채는 나중에 죄를 범해 자살했다.

이광의 맏아들 이당호(李當戶)는 낭관이 되었는데, 한언(韓嫣)이라는 신하가 무제에게 불손하게 대하자 그를 두들겨팼다. 한 무제는 이당호가 용감하다고 생각해 좋아했지만 당호는 빨리 죽고 말았다. 이당호의 아들이 이릉(李陵)이었는데, 이릉은 전투에 나섰다가 흉노에게 포위되어 결사적으로 버텼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흉노에 항복했고, 이 때문에 가족들이 죽임을 당했다. 사마천은 이릉이 불가항력이었다고 변호했으나 그때문에 궁형에 처해졌다. 이씨 집안의 명예도 모두 무너져, 사대부들은 이씨 문하에 있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광의 둘째 아들 이초(李椒)는 대군 태수의 벼슬을 했으나, 이당호와 함께 아버지보다 빨리 죽었다.

이광의 셋째 아들이자 흉노와의 전투에서 적 기병대를 돌파할 정도로 용맹했던 이감은, 이광이 사망했을 당시 곽거병을 따라 싸우며 공을 올리고 있었다. 이광이 죽자 이감은 낭중령에 임명되었는데, 이광이 죽은 탓을 위청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원망하여 대장군인 위청을 두들겨 팼다! 위청은 짐짓 이 일을 비밀에 부쳤으나 곽거병이 이 일을 알아버렸고, 곽거병은 친척인 위청이 두들겨맞았다는 사실 때문에 이감을 활로 쏘아 죽여버렸다. 무제는 곽거병을 아꼈기에, 사람들에게는 이감이 사슴 뿔에 받쳐 죽었다고 말했다.

이감의 딸은 태자의 중인(中人)이 되어 사랑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이감의 아들인 이우(李禹)는 태자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익을 탐하는 변변찮은 성격이라, 이릉의 일도 있고 하여 이때부터 이광의 집안은 기울어져 버렸다.

7. 이광의 무예

위청이나 곽거병이나 특별히 싸움 잘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지만[18] 이광은 무예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우선 흉노에 사로잡혔다가 기회를 보아 탈주한 이야기도 있고, 오초칠국의 난이나 한 문제 시절에도 적진에서 직접 싸워서 공을 세운 적이 있다. 맹수를 때려잡은 적도 있다.

또 이광의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화살 쏘는 법을 배웠는데,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광이 키가 크고 팔이 원숭이처럼 길었으며, 이광의 솜씨는 타고난 것이어서 아무리 배워도 이광만큼은 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평소에도 오로지 활쏘기만을 즐거움으로 알았다고 한다.

한 번은 이광이 사냥을 나섰는데 날이 어두워졌을 때 풀속의 웅크린 호랑이에게 활을 쏜 적이 있었다. 화살은 깊숙히 박혀들어갔고 호랑이는 숨을 거뒀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날 그 자리로 찾아가 다시 살펴보니 화살에 맞은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였다. 자기가 한 일이어도 신기한 이광은 다시 바위에 화살을 쏴보았으나 튕겨나갈 뿐 두 번은 들어가지 않았다. 중국 고전에서도 이 이광사석의 일화를 노래한 것이 있다. "이광은 어둠 속에서도 활을 쏘았네."

또 자신이 사는 군에 호랑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찾아가서 쏘아 죽였다고 한다. 우북평에 있을 때는 화살을 쏘는데 호랑이가 달려들어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기어코 호랑이를 죽인 적이 있다.

그런데 이광은 화살을 쏠 때 먼거리에서 쏘는 것이 아니라, 적이든 맹수든 아무리 맹렬하게 달려들어도 항상 수십 보 안에 들어와야만 쏘았으며, 그 이상이면 명중할 수 없다고 하여 아예 쏘지를 않았다. 최대한 가까운 적을 쏘다 보니, 장병들이 곤란한 적이 있었고 이광 또한 맹수에게 당한 적도 있었다. 대부분 군담 소설 같은 창작물에서 명궁을 묘사할 때 먼 거리에서 잘 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걸 생각하면 약간 아이러니한 부분. 근거리 사격전문이었던 모양.

수호전의 인물 중 화영의 별명인 '소이광'이 바로 이 사람에게서 유래한 별명이다. 삼국지 조조전에 나오는 '이광궁'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활로 적의 책략을 봉인하는 효과가 있다. '이광의 활'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도 나온다.

8. 평가

한 문제 시기부터 한 무제의 시기까지, 그야말로 온몸을 불사르고, 자신의 말대로 머리를 틀어올리고 나서 평생 동안 흉노와 맞서 싸운 역전의 명장. 한 문제는 이광이 난세에 태어나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으나, 한 무제의 시기에 벌어진 대 흉노 전쟁은 그에게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정작 이광은 이 시기 뚜렷한 활약을 하지 못했고, 대신 한 무제 시기가 되어 등장한 위청과 곽거병이라는 뉴타입이 맹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확실히 위청과 곽거병의 공적을 나열하여 이광과 비교하면, 이광은 이들에 비해 변변한 공을 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광을 마냥 평가 절하하기에는 이미 그 당시부터 흉노는 이광을 두렵게 여겼고, 한나라 군대도 그를 맹장으로 여겼다. 하지만 항상 공을 세워도 이상한 일이 생겨 인정을 못 받았고, 또 남들이 다 공을 세우면 자신은 공을 못 세웠으며, 가끔 가다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적도 있는 등 모든 일이 꼬이기만 했다. 한 무제가 그는 운수 사나우니까 괜히 맡겼다가 일 꼬일 것 같다고 한 걸 보면 알다시피 이미 당대에도 이광은 불운의 아이콘이었다.

이광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어, 점 잘보는 왕삭(王朔)이라는 사람에게 자신의 팔자가 왜 이리 사납냐고 물어보았다. 이에 왕삭이 후회하는 일이 있냐고 물어보자, 이광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전에 농서 태수로 있었는데, 강족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소. 그들에게 항복을 권하니 모두 800여 명이 항복했소. 그런데 그들이 날 속이는 바람에 모두 죽여버렸소. 지금까지 그 일을 후회하고 있소이다."

그러자 왕삭이 말했다.
"이미 항복한 자를 죽이는 것보다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장군이 후(侯)가 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사마천은 이광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였다.
勇于當敵
적을 만나면 용감히 맞서싸우고
仁愛士卒
사졸들에게 자애롭게 대했으며
號令不煩
호령은 번거롭지 않고 간결하니
師徒鄕之
장수들과 군졸들의 마음을 얻었다.
作<李將軍列傳>第四十九
그래서 <이장군열전> 제사십구를 지었다.
第十九 太 史 公 曰: 傳 曰 「 其 身 正 , 不 令 而 行 ; 其 身 不 正 , 雖 令 不 從 」 。 其 李 將 軍 之 謂 也 ? 余 睹 李 將 軍 悛 悛 如 鄙 人 , 口 不 能 道 辭 。 及 死 之 日 , 天 下 知 與 不 知 , 皆 ? 盡 哀 。 彼 其 忠 實 心 誠 信 於 士 大 夫 也 ? 諺 曰 「 桃 李 不 言, 下 自 成 蹊 」 。 此 言 雖 小 , 可 以 諭 大 也 。
태사공이 말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 스스로가 바르면 영을 내리지 않아도 실행되고, 그 스스로가 바르지 못하면 영을 내린다 해도 따르지 않는다> 한다. 이 말은 이 장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장군을 직접 보았다. 사람이 순박하여 마치 시골 사람 같았고, 말을 잘하지도 못했다. 그가 죽는 날, 그를 알든 모르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으니, 그의 충실한 마음이 진실로 사대부들의 믿음을 사게 되었던 것인가? 속담에, <복사꽃과 오얏꽃은 아무 말이 없지만 그 아래로는 절로 길이 생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비록 사소한 것이지만, 큰 것을 깨닫게 할 만하다.

후대의 사람들은 만약 이 장군이 살아계셨다면 흉노족이 감히 변경을 넘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시를 쓰기도 했다. 그 용맹한 삼국지여포가 비장군을 칭했던 것을 보면 이광의 명성이 후대에 어떻게 전해졌는지 짐작할 만하다.

8.1. 졸장?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광에 대한 비판론 역시 마이너하게나마 존재했다. 개인적 용맹 덕분에 돌격대장으로서는 유능했을지 모르나, 지휘관으로서는 많이 부족하다는 것.

우선, 사마천의 이광 관련 기록부터가 형평성 면에서 비판을 받는다. 주희의 제자인 황진이라는 사람은 사마천이 위청, 곽거병의 수많은 공적은 가볍게 넘긴 반면에 이광에 대하여는 변변찮은 공적이 없음에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대서특필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후대의 인기도 장수로서의 업적보다는, 사마천이 이광의 일대기를 드라마틱하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 이광은 인간적으로 인기를 얻을만한 점들(개인의 무용담, 청렴함, 병졸들을 선대)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기가 장수로서의 유능함을 증명하기 어렵다. 당장 위에 언급된 시에서도 이광을 변방의 수호신으로 추앙했으나, 정작 대흉노 전쟁에서 전과를 올린 장수는 위청, 곽거병이었다. 위의 패릉현위 처형 사건도 분명 패릉현위가 법대로 했을 뿐인데 후세의 문인들은 오히려 패릉현위가 실각한 유공자를 업신여긴 사건 쯤으로 오히려 이광을 옹호하고 있으니 이쯤되면 빠돌이 수준이다. 흉노가 이광을 두려워했다는 언급도 전적이 받쳐주지 않으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게, 회남왕 유안이 반란을 준비할 때 무신들 중에서 두려워한 대상은 오직 위청 한사람이었다. 똑같은 잣대를 적용한다면 유안에게 있어서 이광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지휘 스타일을 보자. 사마천은 지휘 스타일이 반대였던 정불식의 입까지 빌려서 이광이 군기에 신경쓰지 않은 것을 변호했다. 하지만 사마광은 이광의 방식대로 한다면 복멸하지 않는 경우가 적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광의 전과로 보면 오히려 이쪽이 사실에 가깝다. 설령 병사들이 장수에 대하여 충성한다고 해도, 군기가 엉망이라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이순신, 주아부, 서황 같은 역사상의 명장들이 괜히 군기를 잡은 게 아니다. 또한 삼국시대 관우나 위연의 예가 있듯이, 아무리 병졸들을 선대한다고 해도 위기상황에서는 뭐가 일어날지 장담하지도 못한다.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운다는 의지드립 하나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만큼 전쟁은 만만하지 않다. 오히려 이런식으로 의지드립을 쳤던 장수들은 패배한 예가 더 많았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이광은 조선시대의 신립과 비슷한 타입의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개인적인 용맹이 뛰어나고, 나름대로 전공을 쌓아서 명성을 날리긴 했지만, 지휘력은 생각보다 부족했다는 것.[19]

여담으로 이광이 막북전투에서 보여준 행보는 워털루 전투에서 에마뉘엘 그루시가 보여준 것과 비슷하다. 둘 다 명령대로 했는데 적을 만나지 못해서 아무 것도 못했다.


[1]간쑤성 징닝현.[2] 이 별명은 훗날 그 유명한 여포에게 붙을 정도로 대단한 칭호이다.[3]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조선국으로 도망치던 연 태자 희단을 조선국과의 경계지역인 압록강에서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있다.[4]중화인민공화국 싱핑 시.[5] 기원전 114년, 즉 이광이 죽고 5년 후에 천수군이 설립되고 성기현은 천수군 관할이 되었다. 그래서 동한 말 이후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는 천수군 사람이었다.[6] 황제를 시종하면서 맹수를 쏘아 죽이는 경관이다.[7] '현후'(縣侯)를 말한다. 왕 다음의 봉작(封爵)을 '후'(侯)라 하였는데, 한나라 때에는 봉지의 크기 순서대로 군(郡, 왕의 봉지), 현(縣), 향(鄕), 정(亭)후로 서열이 정해졌으며, 1현은 10,000호(萬戶)로 구성되었다. 기실 한고제의 공신들 중 진짜 1만 호 이상을 받은 사람은 조참, 유택, 장량 3명뿐이었고, 공신 1위인 소하는 정작 8,000호에 그쳤다.[8] 소수민족의 이민이나 귀항 및 조공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9]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10] 흉노가 물수리를 사냥할 때는, 활을 잘 쏘는 자들로 하여금 쏘게 했다고 한다.[11] 궁중의 위병을 지휘하고 궁내의 숙위를 관할하는 자리[12] 일설로는 아이를 태우고 가버렸다고 한다.[13] 한 문제의 능.[14] 이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장군 열전>에서는 연도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위청의 기록을 보면, BC 127년 흉노가 요서 태수를 살해해 반격하러 나선 기록이 있다. 이 사실을 보면 이 시기는 BC 127년이다.[15] '비장군'이란 별명은 후에 여포가 물려받는다.[16] 산시성(山西省) 신저우(忻州)에 있는 현.[17] 刀筆吏, 하급 문관을 뜻하는 단어이다. 아직 종이가 나오기 전이었으므로 문서의 기록은 대나무나 나무를 쪼개서 만든 목간과 죽간에 이루어졌다. 오자가 나올 경우에는 칼로 깎아서 지웠기에 기록을 담당하는 하급 문관의 상징이 칼(刀)과 붓(筆)이었다. 즉 이광의 유언을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그래도 수많은 전투를 겪은 장군인데, 이제와 나이 예순이 넘어서 어떻게 형사 앞에 초라하게 쪼그리고 앉아서 조서나 끄적거리고 있겠나!" 정도 될 것이다.[18] 단 위청은 위자부를 시기한 진아교 황후가 보낸 사람들에게 죽을 뻔하다가, 공손오가 도와주어 살아난 적이 있다. 이때 같이 싸웠을 수도 있다.[19] 반론 : 그러나 이광을 지휘관으로서 졸장이라고 단언하는 건 어디까지나 소수 의견이다. 전술했듯 이광은 다른 건 몰라도 정찰만큼은 확실했고 이광의 부대가 군기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널럴했던 이유도 (고대의 군기는 현대의 상상 그 이상으로 가혹함을 감안하자) 정찰을 통해 확보한 정보와 시간을 통해 여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게다가 병사들의 휴식 시간을 보장하는 것과 자질구레한 (그야말로 문서를 위한) 문서를 간소화하는 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똑똑하지만 게으른' 장군의 유형에 해당한다. 반면 비교 대상으로 제시한 신립에게는 그런 기록이나 자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