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 베트남 남부에 존재하던 공화국에 대한 내용은 베트남 공화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da251d><colcolor=#ffd700> 고대 | 반랑 (문랑) | ||
어우락 (구낙) | ||||
남비엣 (남월) 찌에우 왕조 | ||||
한나라 - 한 구군 | 참파 | |||
남비엣 (남월) 쯩 자매 | ||||
한나라 - 교주 | ||||
자오찌 (교지) 사씨 정권 | ||||
중국 남조 - 교주 | ||||
반쑤언(만춘) 전 리 왕조 | ||||
중국 남조 - 교주 | ||||
중근세 | 안남 응오 왕조 | |||
십이 사군 시대 | ||||
다이꼬비엣 (대구월) 딘 왕조 | 전 레 왕조 | ||||
다이비엣 (대월) 리 왕조 | 쩐 왕조 | ||||
다이응우 (대우) 호 왕조 | ||||
명나라 - 교지 | 다이비엣 (대월) 후 쩐 왕조 | |||
다이비엣 (대월) 후 레 왕조 | ||||
막 왕조 | 후 레 왕조 | |||
후 레 왕조{{{#!wiki style="margin:-5px -5px -12px" | 다이남 (대남) 찐씨 정권 | 꽝남 (광남) 응우옌씨 정권 | }}} | |
떠이선 왕조{{{#!wiki style="margin:-5px -5px -12px" | 귀인 정권 | 부춘 정권 | }}} | |
근대 | 다이남 (대남) 응우옌 왕조 | |||
안남 응우옌 왕조 | 프랑스 - 코친차이나 | |||
프랑스 - 인도차이나 연방 | ||||
일본 제국 - 베트남 제국 | ||||
현대 | 베트남 민주 공화국 | 프랑스 -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 | ||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 | ||||
베트남국 | ||||
베트남 공화국 | ||||
남베트남 공화국 | ||||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베트남 제3공화국| 베트남 제3공화국 ]] |
남월 南越 Nam Việt | |||||
남월의 영토 | |||||
기원전 204년 ~ 기원전 111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진나라 | 한나라 | ||||
어우락 | |||||
위치 | 중국 광둥성, 푸젠성, 광시 좡족 자치구, 하이난 성, 베트남 북부 | ||||
수도 | 번우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성 | 조(趙) | ||||
국가 원수 | 황제[1] → 왕 | ||||
주요 황제 | [ 펼치기 · 접기 ] | ||||
언어 | 고대 베트남어, 좡어 외 여러 언어들 | ||||
민족 | 중국인, 베트남인 | ||||
인구 | 130만 명[2] | ||||
주요 사건 | [ 펼치기 · 접기 ] |
[clearfix]
1. 개요
중국 광둥성 및 광시 좡족 자치구와 베트남 북부에 존재했던 나라다.초한쟁패기때 활동했던 한족 출신 군웅인 무제 조타가 중국 남부의 광둥성을 거점으로 삼아 건국한 나라였다. 그 뒤에 지금의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있었던 어우락 왕국과 전쟁을 벌여 어우락의 군주인 안양왕을 패배시키고, 베트남 북부를 획득했다.
시조였던 남월 무제의 성씨가 조씨(趙氏)였기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조씨 왕조인 조조(趙朝)나 조가(趙家)라는 명칭으로도 부른다. 한때는 베트남 북부에서 중국 광동-광시까지 아울렀고, 중국 남부를 위협할 정도로 잘 나갔지만, 전한의 세종 무황제 유철에 의해 멸망했다.
2. 역사
그러나 진시황이 붕어하고, 그 뒤를 이은 2세황제의 폭정으로 인해 진나라가 대혼란에 빠지자 이들은 독립을 꾀하게 되었다. 도중에 임효가 고령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부관이었던 조타에게 대업을 넘겼다. 이후 조타가 남방 3군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우니 이 나라가 바로 남월(남비엣)이었다. 월(越)은 당시 중국 남쪽의 월족, 혹은 옛 월나라에서 따온 것이었다.[4] 베트남의 역사서에 따르면 조타는 현지인처럼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한다.[5]
그러던 와중에 한왕 유방이 초한전쟁의 최종 승자가 되어 전한을 건국했다. 기원전 196년, 태조 고황제 유방은 조타(찌에우 다)를 제후로 인정하며 남월왕(南越王)에 봉했다. 양국은 한동안 별 일 없이 지냈으나, 고황후가 철기 교역을 금지하면서 한나라와 남월은 대립관계에 들어가게 되었고, 조타는 스스로 무제(武帝)를 칭했다. 이때 남월군이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있었던 어우락 왕국을 정복했다.
베트남 제국의 남부 확장 과정을 담은 지도. 남월(지도의 Nam Viet)의 영토 중 오늘날 중국에 속하는 쪽은 표시가 안되어 있다.
남월은 최전성기 시절 현재의 오령산맥 남부, 베트남 북부, 광둥성 및 푸젠성 서부를 다스리는 나라였지만, 제2대 국왕인 문제 조말(조호)의 치세 이후에는 스스로 직위를 황제에서 왕으로 낮추고, 외왕내제의 형식으로 가서, 제국이라고 부르기에는 약간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홍콩과 마카오 지역도 이때는 남월의 영역이었는데, 이 때문에 남월시대에 홍콩과 마카오를 비롯한 광동 지역 사람들은 본토의 한족과 합치지 않고, 이민족인 베트남인과 하나의 나라를 이뤘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광동에는 한족이 거의 없었고, 베트남인의 선조들인 월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타가 국호를 월이라 한 것이었다.[6]
태종 문황제 유항의 치세때는 화평이 맺어졌지만, 세종 무황제 유철이 즉위한 뒤 정복전쟁을 개시하자 남월 역시 침략의 대상이 되었다. 시조 조타가 살아있을 적에는 전한을 상대로 북벌을 하기도 하는 등 위세를 떨쳤으나, 제4대 군주인 애왕 조흥[7]과 토착민 출신이었던 재상 여가[8] 사이에 대립이 불거져서 남월 내부에 쿠데타가 일어나 제5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인 조건덕[9]이 추대되자, 이에 전한은 노박덕을 사령관으로 삼아 혼란에 빠진 남월을 공격했다. 결국 기원전 111년, 한군에 의해 남월은 멸망했다.
남월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남월 남부의 교지[10]와 구진[11] 지방의 세력가들은 한군에게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전한에 항복했으며, 한무제는 옛 남월 영토에 9개군(한9군)을 설치했다. 이 사건이 약 1,000년에 이르는 중국 복속시대[12]의 시작이었다.
이 9개 군은 나중에 교주[13]로 편성되었는데, 교주의 중심지는 남월의 중심지였던 남해군(南海郡)이 아닌 쟈오 찌[14]군이 되었다. 남해군이 아닌 쟈오 찌군이 중심지가 된 이유는 당시 쟈오 찌군이 남방과 베트남 북부에서 생산되는 물자의 집산지였고, 쟈오 찌군과 당시 주요 항구였던 합포군 합포현[15] 사이의 거리가 남해군과 합포현의 거리보다 가까워 합포현을 통제하기에 수월했기 때문이었다.[16]
3. 역사적 평가
3.1. 베트남
베트남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월을 자신들의 역사로 여겼다. 조타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대중국 투쟁의 시발점이 되었고, 현지인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쩐 왕조 시절에《대월사기》를 편찬할 당시, 남월을 베트남의 기원으로 삼은 사실과《영남척괴열전》등의 전설집에서 현지인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현대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 또한 남월을 베트남의 역사로 여겼다. 예외적으로 18세기의 학자였던 응오티씨[17]가 조타를 중국인 군주로 취급하긴 했지만, 주류 의견은 아니었다.하지만 현재 베트남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1970년대 이후로 남월을 자신들의 역사로 보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남월이 한족과 토착민의 연합정권이었다고는 해도 군주들이 중국계였던데다가, 현 베트남 북부에 있었던 토착 민족 국가인 어우락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우락의 시조였던 안양왕 툭판도 촉(蜀) 지방 출신이라고는 하는데, 현 사학계는 이를 오류로 보고 있다.[18]
그런데 남월이 멸망한 후에 세워진 교주(交州)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가 남월의 수도였던 번우(番禺)가 있었던 남해군(南海郡)이 아니라 현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북부의 교지군(交趾郡)이었고, 전통시대 베트남에서 남월을 자신의 기원이자 정체성으로 여겨 남월과 그 시조였던 조타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베트남과 중국 사이의 역사적인 관계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3.2. 중국
중국에서는 남월을 별개의 국가로 취급한 한나라 시절을 제외하고는,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남월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보고 있다. 조타가 중국 출신이고, 남월이 지배했던 광둥성과 광시성이 한무제의 침략 이래로 계속 중국의 영토였으니 남월을 중국사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이미 진시황 때 중국이 정복한 지역이긴 했지만 그 시기도 짧았고, 얼마 안되어 조타가 독립정권을 세웠으니 실질적인 편입 시기는 한무제 이후다.하지만 조타의 고향이 있는 조나라의 상산(常山) 지방이 본래 까마득한 북쪽 변방으로서, 이웃인 흉노 및 동호와 교류가 잦은 곳이었던지라 조타가 혈통적으로 순수한 한족이었는지도 불분명하다는 문제가 있다.[19] 또 조타는 남월을 다스릴 때, 현지인들에게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이며 그들의 습속을 따랐다. 한고조가 조타를 책봉하려고 사신을 보냈을 때, 조타는 현지 방식의 상투를 튼 차림새로 두 다릴 뻗고 앉아서 한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등 현지의 풍속에 동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명왕 치세때의 왕후였던 규씨(樛氏)의 전횡을 억제하며 대립각을 세웠던 승상 여가[20]가 토착민 출신이었다. 또한 남월이 이후 베트남에서 행해진 대중국 저항의 기원이 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로 볼 수는 없다. 게다가 반랑과 어우락의 역사적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뒤따른다.
3.3. 동아시아
옛 남월 영토에 9개의 군을 설치한 것은 한무제의 침략전쟁 및 식민지배 정책에 해당된다. 한국의 역사적 기준에서 한사군의 설치는 비교적 한반도만의 사건으로 보는 편이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무제의 침략전쟁 및 식민지배와 그 이후의 추이, 역사적 반향 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전한이 위만조선을 상대로 공세를 펼침에 있어 어느정도 부침이 있었던 것은 위만조선의 역량도 있었지만 전한이 당시 남월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월이 멸망한 이후 위만조선과의 전쟁에 모든 힘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면서 위만조선도 결국 멸망하게 되었고, 남월과 마찬가지로 4군이 설치되었다.
9군과 4군의 설치로 월인과 조선인들은 한나라와 직접적인 교류를 하게 되었다. 베트남 또한 한군현의 설치 이후 재지계 유물이 유지되면서도 일부 위세품과 신분을 상징하는 한나라식 유물이 부장되기 시작했으며,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재지계 유물과 함께 한나라식 유물들이 삼한에서 다량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4. 여담
베트남의 한자어인 월남은 남월을 베트남어 어순대로 뒤집은 것이다.[21] 정•완 분쟁과 서산조 이후 베트남을 통일한 가륭제가 국호를 남월로 정할 예정이었지만, 청나라의 반대로 국호는 월남이 되었다.5. 역대 군주 목록
대수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1 | 무왕(武王) 무제(武帝) | 조타(趙佗) | 기원전 204년경 ~ 기원전 137년 | |
2 | 문왕(文王) 문제(文帝) | 조말(趙眜) 조호(趙胡) | 기원전 137년 ~ 기원전 125년경 | |
3 | 명왕(明王) | 조영제(趙嬰齊) | 기원전 125년 ~ 기원전 113년경 | |
4 | 애왕(哀王) | 조흥(趙興) | 기원전 113년경 ~ 기원전 112년 | |
5 | - ,<술양후(術陽侯)>, | 조건덕(趙建德) | 기원전 112년 |
[1] 사실상의 외왕내제 체제로, 중국에 조공할 때는 스스로 몸을 굽히며 들어갔다.[2] 기원전 111년 기준[3] 베트남식 독음은 찌에우 다(Triệu Đà)이며, 위타(尉佗)로 불리기도 한다.[4] 당시 중국 남부 해안 지방의 민족을 중국에서는 주로 월이라고 불렀다. 월나라 문서 참조.[5] 마찬가지로 위만조선의 창건자였던 위만도 조선으로 넘어갈 때, 조선인처럼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6] 비슷하게 위만도 왕이 된 후 국호를 조선 그대로 유지했다.[7] 趙興, Triệu Hưng, 찌에우흥[8] 呂嘉, Lã Gia, 라지아[9] 趙建德, Triệu Kiến Đức, 찌에우끼엔득[10] 交趾, Giao Chỉ, 쟈오찌[11] 九眞, Cửu Chân, 끄우 쩐[12] 제1차 중국 지배(BC 111년~AD 972년)[13] 交州, 베트남식으로는 Giao Châu[14] Giao Chỉ, 交趾, 교지[15] 合浦縣: 지금의 광시좡족자치구 베이하이시 허푸현 북동부[16] 출처는 유인선의《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17] Ngô Thì Sĩ, 吳時仕, 오시사[18] 출처: 유인선,《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및《베트남의 역사(고대에서 현대까지)》[19] 그러나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조타 개인의 혈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한족이란 개념 자체가 한나라 시기를 거치며 형성된 것이었으므로 진한교체기에서 '순수한 한족'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현대에도 한족은 지역에 따라 유전자에 차이가 있기에, 민족은 문화적 개념이지, 유전적 개념은 아니다.[20] 呂嘉, Lữ Gia, 르쟈[21] 베트남어에서는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