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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CF0921><colcolor=#fdfa00> 베트남 민주 공화국 초대 국가주석 | |||
| 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초대 주석 호찌민 Hồ Chí Minh | 胡志明 | |||
| | |||
| 본명 | 응우옌신꿍 (Nguyễn Sinh Cung, 阮生恭) | ||
| 출생 | 1890년 5월 19일 | ||
| 인도차이나 연방 프랑스령 안남 응에안 주 남단 구역 낌리엔마을[1] | |||
| 사망 | 1969년 9월 2일 (향년 79세) | ||
| 베트남 민주 공화국 하노이 | |||
| 재임기간 | 초대 국가주석 | ||
| 1945년 9월 2일 ~ 1969년 9월 2일 | |||
| 묘소 | 호찌민 주석릉 |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F0921><colcolor=#fdfa00> 배우자 | 쩡쒸에밍[2] | |
| 학력 | 국학 (중퇴)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 국제레닌학교 (졸업) | ||
| 신장 | 165cm, 58kg | ||
| 직업 | 공산주의 혁명가, 독립운동가, 정치인 | ||
| 정당 |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SFIO ]] (1919 ~ 1921)(1921 ~ 1925) (1925 ~ 1969) | ||
| 약력 |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주석 (1945년 9월 2일 ~ 1969년 9월 2일)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정부 주석 (1945년 9월 2일 ~ 1955년 9월 20일) 초대 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주석(1951년 2월 19일 ~ 1969년 9월 2일) 제2대 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의장 (1956년 11월 1일 ~ 1960년 9월 10일) | }}}}}}}}} | |
1. 개요
Không có gì quý hơn độc lập, tự do.
독립과 자유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독립과 자유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베트남의 초대 국가주석.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며 현대 베트남의 국부이다. 베트민(월맹)을 조직하여 프랑스에 의해 강점되었던 베트남의 해방을 이루었으며, 이후 베트남 전쟁을 통해 남·북 베트남의 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3] 검소한 삶과 유연한 지도자적 이력 등은 해당 시기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첫 독립운동가 출신 지도자 중에서는 프랑스, 미국 등에서도 지략가, 해방가 등으로 평가되며 서방에서 존경받는 편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한국에서도 이미지가 좋은 편으로, 베트남에서도 두루 존경 받고 있다. 반면 전후 베트남을 탈출한 보트피플 출신 베트남계 미국인들이나 비슷한 반공주의자들은 베트남 공산당이 벌인 반대파 탄압,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거나 그가 사상적으로 뛰어나진 않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호찌민'은 그가 썼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이다.[4] 그는 대표적으로 본명인 응우옌 신 꿍(Nguyễn Sinh Cung), 10살 때 아버지께서 다시 지어주신 응우옌 떳 타인(Tất Thành), 1919년 베트남 식민지 개혁을 청원할 때부터 쓴 응우옌 아이 꾸옥(Ái Quốc) 그리고 1940년 중국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 썼던 가명 '호찌민'으로 불렸다.[5] 호찌민은 '계몽하는 자'[6]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베트남인은 'Bác Hồ(호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과거에는 한국 한자음으로 '호지명'으로 표기했었고, 이후에는 원어 발음을 따라서 ‘호치민’이라는 표기도 통용되었으나, 2004년 외래어 표기법에 베트남어 표기에 관한 세칙이 추가된 후에는 ‘호찌민’이라고 표기한다. 그러나 완전히 정착되지 않아 영화나 다큐멘터리, 관련 서적 등에서 옛 표기를 간간이 볼 수 있다.[7] 현재 베트남의 우방인 북한은 여전히 '호지명'이라는 한국 한자음 표기를 고수한다.[8]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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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호찌민/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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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호찌민 사상#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호찌민 사상#|]]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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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호찌민/평가#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호찌민/평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5. 어록
처음에 내가 레닌과 코민테른을 믿도록 한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주의였다.[9]굉장히 잘못된 이해다. 해당 구절의 바로 뒷부분은 "하지만 점점 나는 이론을 연구하고 실제로 행동하면서 오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만 압박받는 민족과 전세계 노동자를 해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다. 원전의 글도 1960년 4월 22일, 레닌 탄생일을 맞아 호치민이 당기관지 <인민>에 작성한 것으로 제목부터가 "나를 레닌주의로 이끈 길"이다. 사실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공산주의의 성격을 경제적 측면에만 한정하여 이해한 배경에서 나온 바가 큰데, 레닌 이후의 대부분의 공산주의는 단순히 생산수단의 공유화라는 아젠다 뿐만 아니라 약소국에 대한 민족해방 역시 그 사상 내부에 포함하고 있다. 즉, 애초에 호치민 스스로가 민족주의자로써, 또 공산주의자로써의 모습이 모두 부각된 것은 레닌주의 관점에서 볼 때 전혀 특이한 게 아니다. ]
어려운 것이란 없다. 단지 흔들리는 마음이 두려울 뿐. 산을 파고 바다를 메울 수 있다.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할 수 있다.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내 안의 변하지 않는 한 가지로 세상의 만 가지 변화에 대처한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코끼리와 호랑이의 싸움이 될 것 입니다. 만일 호랑이가 가만히 서 있는다면 코끼리가 그 막강한 엄니로 호랑이를 짓누르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낮에는 밀림에 숨어 있고 밤에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의 등에 뛰어올라 코끼리의 가죽을 찢어놓고 다시 어두운 밀림으로 뛰어들어 갑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1946년 9월 11일, <뉴욕타임스> 통신원 쇼에브런과 한 인터뷰에서
1946년 9월 11일, <뉴욕타임스> 통신원 쇼에브런과 한 인터뷰에서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자신을 방어하고, 여러분과 싸우는데, 여러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
1924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1924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여러분이 이 작은 그룹 내에서도 단결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조국으로 돌아간 뒤에 어떻게 대중을 단결시켜 식민주의자들과 싸우게 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나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왜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를 문명화한다고 하기 전에 자기 동포들부터 문명화하지 않는 거지?
1911년 7월 6일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구에 입항한 이후 프랑스의 모습을 보면서 남긴 말.[11]
1911년 7월 6일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구에 입항한 이후 프랑스의 모습을 보면서 남긴 말.[11]
정부가 어려워서 너희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지만, 너희들은 지금 전쟁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는 것이다.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은 분명하지만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국의 많은 인재들이 희생될 것이고 너희들의 부모형제들도 죽어갈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이 할아버지가 너희들에게 받아두어야 할 약속이 꼭 하나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희들은 학업을 마치기 전에는 돌아와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 너희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의 강산을 과거보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
1965년 미국의 참전으로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자 몇몇 장학생들을 해외로 유학보내며 유학생들에게 남긴 명언
1965년 미국의 참전으로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자 몇몇 장학생들을 해외로 유학보내며 유학생들에게 남긴 명언
미국은 최신형 총기와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B-57, B-52 폭격기 혹은 B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싸워야 하고 어쨌든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베트남 전쟁 항미전쟁의 종결 p.293
베트남 전쟁 항미전쟁의 종결 p.293
당신들 미제국주의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유지하고자 막대한 자금을 쓰고 있소..... 역사에서 인민들이 과도하게 억압받으면,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남베트남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지엠 정권에 의해 과도하게 억압받고 있소이다. 장제스나 이승만 그리고 바티스타처럼, 지엠 또한 몰락할 것이오... 미국이 지금 지엠 정부를 위해 쏟아붓는 돈은 전부 밑빠진 독에 물 붙기에 불과하오.
1961년 5월 22일, 영국 일간지 더 가디언에 실린 인터뷰
1961년 5월 22일, 영국 일간지 더 가디언에 실린 인터뷰
미국 전투기를 더 많이 격추하시오. 그러면 건강 상태가 최고일 것 같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방공 시찰 하던 중 했던 말
베트남 전쟁 당시 방공 시찰 하던 중 했던 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은 세계 혁명 공통의 스승들이다. 모택동 동지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이데올로기를 훌륭히 '중국화', 중국의 실천적 상황에 올바르게 적용했으며, 그럼으로써 중국 혁명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었다. 중국 혁명은 지리적,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 제조건으로 인해 베트남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베트남 혁명은 그로부터 많은 경험을 배워야 했으며 또 실제로 배웠다.
레닌은 우리의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동지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밝게 비춰준 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과업 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1924년 1월 27일 레닌과 식민지 민족
1924년 1월 27일 레닌과 식민지 민족
일본으로부터 뉴기니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긴 뱀처럼 누워 있는데, 그 목이 바로 인도차이나다. 만일 연합군이 이 목을 강타한다면, 일본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1945년 3월 19일자 일본의 쿠데타 이후 호찌민이 남긴 메모
1945년 3월 19일자 일본의 쿠데타 이후 호찌민이 남긴 메모
현재 미제 침략자들이 우리 베트남에서 극악무도한 침략전쟁을 점점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미제 침략자들은 북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부에서도 수만 명의 애국적인 우리 동포와 동지들을 아주 잔인하게 죽이고 학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소련에서 주는 최고 영예인 레닌 훈장을 받게 된다면 지도자로서 제 마음이 결코 편치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영예로운 훈장을 주신 소련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 최고회의 동지들에게 깊이 감사드리지만, 당분간 이 위대한 훈장 수여를 연기해 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우리 베트남 인민들이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조국을 해방하게 되는 날, 나 호찌민은 베트남의 모든 동포들을 대표하여 위대한 블라디미르 레닌 동지의 이름이 새겨진 영예로운 훈장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받겠습니다.
러시아 혁명 50주년에서 한 연설 중 일부.
러시아 혁명 50주년에서 한 연설 중 일부.
6. 여담
- 호찌민이 유럽이나 미국을 일하며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의외의 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보스턴의 유서깊은 호텔인 Omni Parker House(옴니 파커 하우스)는 호찌민이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제빵사로 일했던 사실로 유명하다. 지금도 꽤나 고급스러운 호텔이다. 이 호텔은 현재 보스턴 Park Street(파크 스트리트)역 근처에 있다.
1929년 국제레닌학교 재학 당시 앞줄 왼쪽에서 3번째가 박헌영, 뒷줄 맨 오른쪽이 호찌민으로 추정되나 1921년 사진이라는 의견도 있다.
- 1929년 소련에서 국제레닌대학교에 유학했을 시절에 박헌영과 만나 교류했고 친분관계를 쌓았다.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로 주었다는 일화가 있으나 사실이 아닌데 2006년 호찌민 관련 유품이 12만 점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목민심서가 없다는 기사가 있다.
- 프랑스에서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만나 교류하고 서로 협조한 사실이 2018년 문서로 확인되었다. 당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정보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의 기록에 따르면 "호찌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 호찌민과 파리의 임정 인사들간의 교류가 굉장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 프랑스어를 상당히 잘했다. 프랑스어로 미군에게 경고하는 영상도 남아있다.
- 현재 바딘 광장에 있는 호찌민 주석릉은 하절기에는 07:30~10:30, 동절기에는 08:00~11:00에만 출입이 가능하며 및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휴관한다. 그리고 매년 10월부터 12월까지는 호찌민시신의 방부 처리를 위해 폐관한다.[13] 호찌민 주석릉 구내에서는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전자 기기의 휴대 및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만일 호찌민 주석릉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휴대전화를 제외한 모든 전자·통신 기기를 내놓고 들어가야 한다. 휴대폰 보조 배터리 정도는 들고가는 것을 허용해준다. 호찌민 주석릉에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는데, 일반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바딘 광장의 모습과는 달리 줄을 서야 하며, 줄을 서는 와중에 촬영하려 하면 지키고 있던 군인이 막기도 하며 모자를 쓰고 있으면 군인이 와서 모자를 벗으라고 지시한다. 호찌민 주석릉에는 흰색 제복을 입은 경비병이 4인 1조로 시신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입구 및 출구에 경비 근무를 서는 경비병을 볼 수 있다. 호찌민 주석릉 내부에서는 휴대전화는 진동 혹은 무음으로 전환해야 하고 절대로 큰 소리로 대화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참배 시에 유의하자. 이때문에 능에 입장하기전 앞에 있는 군인들이 정숙하라고 지시한다. 참배를 마치고 반대편으로 나오면 입구에서 맡겨 두었던 전자·통신 기기를 찾아갈 수 있다. 사실은 호찌민의 유언에 따라 북부, 동부, 남부의 화장되어 나눠지고 방문록 정도를 적을수 있고 나무를 심을 수 있게 해 후일 베트남의 도움이 되어야 했으나, 베트남 국민들은 유언에 따르지 않고 전국에서 온갖 재려를 모아 지었다 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호찌민 박물관과 일주사, 그리고 집무실이 있다. 호찌민 박물관은 어른 40,000동 어린이는 무료 입장이며, 들어갈 때 짐을 사물함에 넣거나 공항에서 볼 수 있는 x-ray를 통과해야 한다.
- 여담으로 호찌민이 이오시프 스탈린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는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며 친필 사인을 요청했는데 그가 사인을 받아들고 돌아간 뒤 스탈린은 갑자기 "그 작자, 태도가 수상해."라면서 NKVD에게 자기 사인을 도로 훔쳐오도록 시켰다. 이후 사인이 없어진 것을 알고 호찌민은 소지품을 모두 뒤지며 매우 당황했다고 하는데 라브렌티 베리야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탈린은 굉장히 기뻐했다고 전한다.
- 삼국지, 수호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네이버캐스트 호찌민
- 호찌민은 중국에 방문했을 당시 공자 생가를 방문하며 "나는 공자를 존경해왔다."라고 얘기했다 한다.[14]
-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1년 전인 1969년에 북한과 북베트남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호치민에게 감명받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에 따르면, " 아옌데는 당시 호치민이 스페인어로 자기 일행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눈 사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호치민은 젊은 시절 프랑스로 유학 가는 길에 이용했던 아르헨티나 증기선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치민의 그 시절의 실력을 발휘해, 베트남 인민들에게 연대를 표하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와준 아옌데 일행에 감사 인사를 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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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이 1958년 11월 방월 당시 호찌민 주석과 건배를 하는 모습. |
- 호찌민과 김일성 간의 일화로,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 중에 같은 사회주의 동지로 호찌민이 파병 요청을 하지만 김일성은 난색을 표하고 다만 간접적이나마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이후 김일성이 '청와대 침투 계획', 즉 1.21사태를 주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 독립운동가 김산과도 인연이 있었다. 1926년 동방피압박민족연합이 중국 광저우에서 조직될 당시, 조선, 중국, 대만, 베트남 쪽 인사들이 참가했는데, 이 중에는 김산과 호찌민도 있었다.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보면 > 우리는 그들 모두와 사진을 찍으면서 단단한 국제적 연대감이 증명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하였다.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인도차이나 출신의 훌륭한 공산주의자도 왔다. 1926년에 우리들은 ‘동방피압박민족연합’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조선청년연맹, 인도차이나민족당, 타이완인, 개인자격으로 참가한 인도인 등이 참여했다.(님 웨일즈·김산, 송영인 옮김, 『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동녘, 2005, 215~216쪽.) <라고 나오는데, 이는 호찌민을 의미한다. 따라서 김산 또한 호찌민을 직접 본 셈이다.
- 남들에게도 매우 친절하였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호찌민이 친척의 집에 갔을 때 친척들이 나중에 그가 유명한 호찌민이라는 것을 알아서 어찌할 줄 모르자 그는 "그냥 평소대로 해주세요."라고 했다.
-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했는데 낡은 옷을 기워서 입고 폐타이어로 고무신을 만들어 신었을 정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고가 귀중품은커녕 고물 라디오 한 대와 책 몇 권이 있는 게 전부였다고 하니 이는 그가 얼마나 검소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3찬 만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왜 3찬 만을 드시냐고 물으니 "'내가 반찬 하나를 더 먹을 때마다 우리 국민 하나가 더 죽는다.'"라고 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허수아비이던 바오다이나 라이벌(?) 응오딘지엠와 비교가 된다. 바오다이는 금빛 잔으로 술을 즐겨마시며 프랑스가 물러나자 "이제 짐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 인물이다. 물론 허수아비로서 좌절하며 한 말이기도 하지만.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내세우지만 되려 그에게 퇴위당해 프랑스로 망명해 그동안 숨겨둔 돈으로 마음껏 살면서 1997년까지 84살 천수를 누렸다. 물론 바오다이 항목을 보면 그도 그럴 이유가 있긴 했지만 결론은 암군으로서 욕을 먹고 있다. 이렇듯 무욕하다 못해 해탈한 듯 보이지만 실은 그도 사람인지라 화려하고 풍족하게 살고픈 욕망이 없던 건 아니었다. 친구에게 털어놓은 고백을 보면 "나도 마음껏 먹고 싶은 걸 먹고 편하게 살고 싶다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욕망을 끝까지 참고 절제하며 살았다.(참고 서적 '호찌민과 시클로-이지상 베트남 여행기'.) 일화에 따르면 딱 하나 그가 차마 양보하지 못한 사치가 있는데 바로 영국제 담배 555였다. 555는 담배 중에선 고급에 속하는 담배이며, 무엇보다도 베트남에서 생산하지 않는 양담배다. 이것을 사치라고 불렀던 것은 오직 국산품만 쓰던 그에게 유일한 수입품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술이나 담배 정도만 사치를 부리는 수준의 절제도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성인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아무리 그 당시 담배가 비싸다고 해도 일국의 국가원수가 다른 거 다 검소하게 쓰고 담배 딱 하나만 비싼 거 피우는 건 오히려 사치 축에도 못 드는 것이다. 이 담배 외에도 살렘, 말보로, 켄트도 좋아했고 누가 양담배를 구해주면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가는 곳을 경호원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갈 곳을 알리면 그 곳에 있는 주민들이 귀찮아지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 하노이에는 호찌민이 기거했던 옛 주석부가 있는데, 이곳은 본래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총독부였다. 당연히 상당히 호화로운 곳이지만, 호찌민은 정작 이 옛 총독부 관저를 쓰지 않고, 주석부 안의 연못 옆에 작고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와서 수염을 당기면서 '파파 호호'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면 미소 지으면서 손수 베트남 고유악기를 치면서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며 같이 놀아주곤 했다. 하루는 아랫사람이 아이들이 마구 뛰어놀면서 시끄럽다고 화내자,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처럼 활기찬 곳은 없다면서 놔두라고 했단다. 그 시절 그를 돌보던 가정 도우미는 그가 화를 내거나 불평불만을 낸 걸 좀처럼 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호찌민은 개인적으로 프랑스인이나 미국인들 역시 친절하게 잘 대해주었다. 그래도 어떤 프랑스 관료가 인도차이나 전쟁 직전 프랑스와의 관계가 몹시 악화될 당시 베트남에서 자꾸 미적거리자, 나는 프랑스인을 꽤나 좋게 생각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그를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고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실제로 프랑스인 중에도 친구가 있다. 그리고 미국인들의 경우에는 아닌 게 아니라 당시 북베트남/베트콩 정보부가 아직 기밀 해제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미국·유럽 현지의 대학가 중심 반전 운동 세력과 접촉을 하며 반전 여론 강화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 거의 확실한 사실에 가깝기 때문에 도의적으로 '우리의 투쟁의 상대는 일반 미국 인민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이다'라는 식으로 유화적인 선전을 했다. 애초에 북베트남 당국과 민족 해방전선은 문화적으로 선비와 글로 된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가 짙은 곳이고, 공산측 지도부도 국제 동향에 빠삭한 엘리트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폭력 투쟁을 할 땐 하더라도 대외 선전에서 깔끔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 호찌민부터가 선비 집안 출신이고, 그도 유학을 공부하던 선비였다.
- 베트남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지는 호찌민은 소수민족 통합을 중요한 국가 과제로 인식하고, 그들과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였다. 그는 “소수민족도 우리의 동포”라며 각 부족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고, 실제로 일부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그들의 전통 가옥에 머물며 공동체적 유대를 강조하기도 했다. 초기 북베트남 정부는 문맹 퇴치와 정치 선전을 위해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신문과 노래, 교육 프로그램 등을 제공했으며, 일부 유능한 젊은이들은 중국과 소련 등지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다수의 소수민족들이 베트민에 협력하게 되었고, 이들의 지지는 이후 베트남전쟁에서 북베트남이 승리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 이는 과거 응우옌 왕조 시절 참족 등 소수민족에 대한 동화 정책이나 탄압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접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초기 접근과는 별개로, 통일 이후 베트남 공산당 정부 하에서의 소수민족 정책은 복잡하고 모순된 양상을 보였다. 특히 몽족 등 일부 민족 집단은 전쟁 시기 미군과의 협력 혐의로 인해 보복성 탄압을 당했고, 이후로도 산간 지역에서 빈곤과 사회적 차별에 직면해 왔다. 문화와 종교 활동에 대한 제한, 토지 개발로 인한 이주 강요, 정치적 배제 등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국제 인권 단체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15]
7. 관련 서적
<호치민 평전>(윌리엄 J. 듀이커 지음/정영목 역, 푸른숲 출간)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듀이커가 호찌민이라는 인물에 매료되어 30년간 중국, 베트남, 프랑스, 러시아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비교하여 쓴 호치민 평전이다. 신화로서의 호찌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호찌민을 재조명 했다. 특히 호찌민의 초기 성장과정부터 독립운동 투신 그리고 베트남 독립 선언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의 내용이 매우 탄탄하다. 다만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에 대해선 깊게 다루지 않는다. 책 서문에 저자가 왜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 행적을 깊게 다루지 않았는지 나온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호찌민의 일과는 사실상 병가로 인한 중국에서의 요양이 대부분이었기에, 깊게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알고 싶다면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기 전 이 사실을 참고하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책으로서는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이 좋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을 체계적으로 다룬 명저중 하나다. 976페이지이고 각주를 빼면 844페이지라는 엄청난 분량이 압도적이기는하나 호찌민을 아는데 매우 유용하다.
<호치민 평전>(찰스스펜 지음/김기태 역, 자인 출간)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 OSS로 근무하며 호찌민을 직접 만났던 찰스 스펜이 쓴 호치민 평전이다. 3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호치민 평전이기에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읽기 버거우면 이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책 저자가 호찌민을 직접 만나봤던 사람이기에 호찌민을 만났던 미국인이 호찌민에 대해 어떤관점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왜 호찌민인가?>(송필경 지음, 에녹스 출간)
치과의사이자 대구환경연합 집행위원장이자 한베평화재단 이사역을 맡고 있는 저자 송필경이 쓴 책이다. 베트남 여행을 통해서 저자가 알게 된 호찌민과 베트남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국군 문제에 대해 알 수 있다. 사실상 저자의 여행기이도 하다. 책을 통해서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가 의외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과 호찌민을 직접만났던 베트남 사람들, 예를 들면 1960년대 호찌민의 추천으로 해외 유학의 길에 올랐던 베트남 유학생들에 대한 스토리를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책 초반부에 영화 풀 메탈 자켓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다만 저자가 사회활동가임을 인지하면서 읽는 것이 좋다. 현재 국내에선 절판된 상황이었으나, 2020년 베트남 국영출판사에서 베트남어로 번역해 출판했다.관련 기사 아마 한국인이 쓴 호치민 관련 책 중에는 유일하게 베트남어로 번역된 책일 것이다.
<옥중일기>(호찌민 지음/안경환 역,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간)
1942년 호찌민이 감옥에 있을 당시 감옥에서 쓴 옥중일기 라고 하지만 4행시 형태의 시집이다. 호찌민 주석이 비참하고도 혹독한 수감 생활과 베트남 독립을 염원하는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는 시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집이기에 읽는데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된 옥중일기는 한글 번역본과 한자 베트남어가 같이 있기에 비교해가며 읽을 수 있다.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김태완(글)/주경훈(그림)/손영운(기획),주니어김영사 출간)
어린이 위인전이다. 2012년 12월 28일 초판을 발행했다. 어린이용 도서이긴 한데 호찌민에 대한 내용과 베트남 전쟁 관련한 내용이 굉장히 탄탄하다. 호찌민의 일대기와 베트남 전쟁 관련해서 있을 내용은 거의다 있다. 심지어 호찌민의 최대 실책이라 할 수 있는 토지개혁도 응오딘지엠의 탄압과 더불어 이 책에서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다산 어린이에서 출간한 Who? 시리즈의 호찌민 위인전에 비해 역사에 대한 설명과 고증 면에서 매우 탄탄하다. 평전 자체가 부담스럽다면 입문격으로 읽어 볼 만한 책이다. Who? 시리즈 중 하나인 호찌민 위인전은 특히 미국과의 전쟁을 다룬 베트남 전쟁을 다룬 내용이 매우 부실하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1963년 틱광득 스님이 소신 공양 했다는 소식을 호찌민과 북베트남 공산당 관료들이 듣고 난 뒤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해 비판하는 장면이 나오다 통킹만 사건 한번 언급하고 갑자기 미군이 기습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시간을 거슬러 호찌민이 기침하다 사망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 뒤 바로 1975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진격하는 장면과 동시에 어느 병사가 눈물을 흘리며 호 주석님 보이십니까라고 얘기하는 장면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설명이 끝난다. 즉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전개됐고 미군은 왜 철수했으며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은 왜 무너졌는지에 대한 맥락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든 셈이다.
<식민주의를 타도하라>(호찌민 지음, 윌든 벨로 (엮음)/배기현 (옮긴이), 프레시안북 출간)
호찌민이 살아생전에 남긴 글과 편지 그리고 연설들을 묶은 책이다. 1920년 투르 회의에서 했던 호찌민의 연설부터 1969년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까지 다루고 있으며, 그의 연설과 글을 통해 많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자료들 대다수는 예를 들면 여기 나무위키에 상술된 호찌민의 어록들 대다수가 이책에도 나온다고 보면 된다. 아쉽게도 현재는 절판된 상황이다.
8.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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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호찌민/대중매체#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호찌민/대중매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9. 참고 문헌
-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푸른숲(2003)
- 호치민 평전, 찰스 스펜, 자인(2010)
-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2013)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1999)
- 호치민 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다니엘 에므리, 시공사(1998)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2002)
-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책갈피(2004)
-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손영운 / 김태완, 주니어김영사(2012)
- 베트남 전쟁, 박태균, 한겨레출판(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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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現) 베트남 응에안성 남단군 낌리엔마을[2] 베트남 공산당 측에서는 평생 국가와 결혼한 독신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윌리엄 듀이커는 본인의 호찌민 평전에서 프랑스 해외문서고(Centre des Archives d’Outre-Mer)가 소장 중인 호찌민과 쩡쒸에밍 사이의 편지를 근거로 두 사람 사이에 혼인관계가 존재했음을 밝혔고, 베트남 당국은 호찌민 평전 베트남어판에서 이 부분을 검열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가 거부하자 출간 자체를 금지했다. 피에르 브로슈(Pierre Brocheux)의 Ho Chi Minh: A Biography에 따르면 호찌민과 쩡쒸에밍은 1926년 결혼하여 1932년 영국령 홍콩 당국이 구금돼 있던 호찌민을 비밀리에 방면했을 때까지 혼인 관계를 유지했다.[3] 20대 초반부터 노년 시절까지 반평생을 반(反)식민지 해방 투쟁을 전개하며 살았다.[4]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베트남 내셔널리스트란 이유로 수배되어 세계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호찌민을 포함 대략 196개의 가명이 있었다고 한다.[5] 가명 사용은 호찌민만 그런 게 아니고 지하 활동을 하는 공산주의자라면 당연했다. 레닌, 스탈린도 가명이다.[6] 호(胡)는 중국식 성이고, 찌민(志明)은 '밝은 뜻'을 의미한다.[7] 과거 자료 중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어 발음인 ‘후즈밍’도 가끔 보인다. 1980년대 후반에 KBS에서 더빙 방영한 플래툰 더빙판에서도 베트콩을 쏴 죽이면서 "덤벼라, 이 후즈밍의 개들아!" 라는 한국어 더빙이 나온 바 있다.[8] 베트남 정부는 호찌민을 문화어로 소개할 때 그의 한국 한자음 표기인 호지명 석자의 크기를 크게 키우고 볼드체로 표기하여, '호지명주석' 혹은 '위대한 수령 호지명동지'라고 지칭한다. 이는 김일성과 동격의 인물임을 선전하는 것이다.[9] 보통 "나를 이끈 건 애국심이지 공산주의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호치민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는 데 많이 사용되는 구절이다. 다만 이를 두고 '호치민은 민족주의를 위해 공산주의를 수용(혹은 이용)하였다'라고 말하면[10] 베트남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소장인 장생트니에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정말 현실이 되었다. 20년 뒤인 1966년 7월 호찌민은 미국과의 전쟁을 중재하러 수도 하노이에 온 한때 적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장생트니를 다시 만났는데 미국과의 전쟁을 중재하기 위해 프랑스 대표로 온 장생트니에게 호찌민은 미국이 베트남의 모든 도시들을 초토화 시킬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미군이 철수하지 않는 한 베트남 민족은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얘기했다.[11] 참고로 젊은 시절 호찌민은 프랑스에 사는 프랑스 인들은 베트남에 사는 프랑스인들보다 친절하다고 말했다.[12] 2009년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번역한 베트남측 전쟁사 서적이다.[13] 7월에도 폐관할 때가 있다.[14] 출처: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2003 p806[15] 따라서 베트남은 중국이나 미얀마처럼 국제사회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는 수준은 아니지만, 소수민족 문제가 '없다'고 평가하기에는 부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