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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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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A8443><colcolor=#fff> 목민심서
牧民心書
파일:목민심서1.jpg
출간 1818년 (순조 18)
편저 정약용
권수 48권 16책
소장 장서각
1. 개요2. 내용3. 역사 왜곡으로 판명난 호찌민 애독설4. 여담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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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날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1]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들은 여위고 병들어 줄지어 굶어죽은 시체가 구덩이를 메우지만 다스린다는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목민심서 서문 中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책이다. 제목의 뜻은 목민할 마음만 가졌지 몸소 시행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라고 다산 본인이 밝혔다. 혹은 목민관이 가져야 할 마음(牧民心), 백성을 다스리는 마음에 관한 책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내용적으로는 수령, 관리가 걸어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즉 관리, 윗사람으로서의 솔선수범, 청렴함 등을 강변하고 있는데 사실 실질적인 행정 업무 설명서적인 성격도 강하다. 또 관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현대에 시민으로서, 그리고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로 의미를 확장해서 읽으면 부정한 상사(上司)에게 굴해서는 안 된다는 말 등 굉장히 유익한 내용이 많다(함부로 따라하면 작자처럼 귀양가기도 한다). 책 자체의 평가는 매우 높다.

저자인 정약용은 1801년 순조 1년 일어난 천주교 박해인 신유박해에 휘말렸다. 이 사건은 노론 벽파의 주도로 남인을 주축으로 한 정조의 친위세력인 시파(時派)를 완전히 몰락시킨 사건이다. 남인 청류당 계열 가운데 이가환, 이승훈 베드로[2], 정약종 아우구스티노[3], 이벽 세례자 요한, 권철신 암브로시오 등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 정약용은 겨우 살아남아 16년간 땅끝이나 다름 없던 강진으로 귀양살이를 보내게 되며, 이런 유배 생활에서 쓰여 진 것이 바로 목민심서이다.

이런 내용과는 별도로 정약용의 개인적인 주관 등이 들어가서 의외의 재미가 있다. 논어를 딱딱한 책으로 생각하고 처음 읽어 본 사람이 공자가 제자의 뒷담화를 하는 장면이나 제자가 공자에게 반항하는 장면 등을 읽으면서 놀라는 것과 비슷하다. 당시 목민관들 사이에 돌던 '업계의 속사정'이라든가, 시장터에서 골목대장 행세를 하는 자를 묘사한 장면 등 가볍고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정약용 개인 취향이 보이는 부분도 있는데 나라에서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서 금주령을 내리면 설사 서울에 끈이 있는 지방의 토호라고 할지라도 잡아다가 엄단할 것을 설파하던 분이 '농주는 식사대용도 되니까 그냥 넘어가라......'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총 분량은 부임(赴任)·율기(律己,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 典)·진황(賑荒)·해관(解官, 관원을 면직함) 12편이며, 각 편을 6조로 나누어서 총 72조로 구성한다.

목민심서는 크게 두 가지의 이본(異本)이 있다. 하나는 1817년 강진(康津)에서 이루어진 초고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 초고본을 수정ㆍ가필하여 1821년에 마현(馬峴)에서 마무리한 완성본이다. 완성본에는 초고본의 조명(條名)을 다소 바꾸고 문장을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대 중국과 조선의 순리(循吏)들의 선행(善行)에 관한 사례를 대폭 증보했기 때문에 책의 분량이 3분의 1 이상 증가하였다.

2. 내용


이전편부터 공전편까지는 각 방의 세부 업무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조직은 수령 아래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방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므로, 마땅히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3. 역사 왜곡으로 판명난 호찌민 애독설

국내에서 1990년대부터 북베트남의 국가주석이었던 호찌민이 즐겨 읽었다는 미확인 정보가 유홍준 전 문화재청창이 집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등을 통해 퍼지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2017년 11월 11일에 문재인 대통령은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열린 '호치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 개막 축하 영상 메시지에서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하였다.
“베트남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호찌민 주석의 애독서가 조선 시대 유학자 정약용 선생이 쓴 목민심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 2006년 연합뉴스에서 호찌민 박물관 등에 문의하여 취재한 결과 호찌민의 유품 중에는 목민심서가 없으며 현지에서도 금시초문이라는 사실을 밝혀 역사 왜곡임이 드러났던 설이었고# 2011년에 '호찌민의 목민심서 애독 여부와 인정설의 한계'라는 논문을 통해 다시 한번 역사 왜곡임이 재확인되었다.#

호찌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가 박헌영이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했다는 설로 《박헌영 평전》(안재성/실천문학사)에서 소개되었다. 또한 손석춘 교수가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과의 인터뷰를 쓴 《박헌영 트라우마》에도 박헌영이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했다는 설이 아래와 같이 나온다.
박헌영과 호찌민은 각별히 친밀했다.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조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민중을 어떤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가를 서술한 이 책은 베트남 혁명의 지도자가 되는 호찌민에게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
손석춘, 박헌영 트라우마

그러나 박헌영이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했다는 설은 사료상으로 전혀 근거가 없으며 기록으로 볼 때 모스크바박헌영호찌민이 있던 시기는 겹치지 않고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박헌영 평전》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밝혀졌다.##

《박헌영 평전》이 《박헌영 트라우마》보다 유명해서 저자인 안재성만 비난받아 왔지만 원경스님의 인터뷰를 그대로 쓴 손석춘 저서에도 이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이 역사왜곡의 출처는 원경스님으로 추측된다.

그 후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근거 없이 호찌민 애독설을 소개한 것에 대하여 사과했으며.# 호찌민 애독설이 왜 역사왜곡인지는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등의 기사에 종합적으로 정리가 되어있다.##

4. 여담

5. 외부 링크


[1] 목자[2] 한국 가톨릭 최초의 영세자.[3] 정약용의 형.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큰아들 정철상 가롤로와 함께 시복되었다. 아내 유 체칠리아, 작은아들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때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항목 참조.[4] 아전들 중 우두머리.[5] 전두환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을 필두로 국제 무대 외교에 상당히 공을 들였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과 필사적으로 경쟁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최대한 우방국을 많이 만들려는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