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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02:38:56

갑산파

파일:조선로동당_로고.svg 과거 조선로동당의 파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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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로동당_로고.svg 조선로동당계파
갑산파
甲山派

Kapsan faction
파일:박금철.jpg
▲ 갑산파의 리더 박금철
1. 개요2. 상세3. 특징4. 갑산파 사건5. 주요 인물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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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로동당의 계파. 박금철을 중심으로 했으며 갑산파 숙청 사건에 의해서 제거되었다.[1]

2. 상세

갑산파라는 명칭은 지명에서 따 온 것으로, 보천보 전투가 일어났던 함경남도 갑산군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갑산파는 광의의 개념으로 보면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던 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산파의 리더인 박금철은 1930년대에 김일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해 활동했고 보천보 전투에서도 참여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1938년 혜산시에서 일본에 체포된 후 8.15 광복까지 옥살이를 했기 때문에 김일성과의 연계가 끊어진 상황이었다.

대체로 이들은 김일성과 동조하는 흐름이었으나 김일성의 직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만주파와는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에 일종의 방계 세력으로 보면 된다. 넓은 의미에서 이들까지도 만주파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좁게 보면 김일성과 함께 만주, 연해주에서 활동한 빨치산 직계들이 만주파라면 조국광복회[2]의 갑산 지부에서 활동했던 자들이 갑산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대체로 이들은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으로, 대다수가 갑산공작위원회라는 단체 출신들이라 갑산파라고 칭해졌다.

현재 북한의 통일관에 이들이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이 독립군의 일부였듯이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고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3] 소련군삼팔선 이북에 진주하자 그들은 소련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반제국주의의 수장이자 약소 민족을 보호해주는 좋은 나라'로 인식하였고 반대로 미국을 '조선반도를 침략한 새로운 제국주의자'로 보고 미국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독립군이었던 이들이 무장 투쟁을 시도한 건 당연한 결과였고 결국 반미 사상과 소련에 대한 찬양, 그리고 무장투쟁 방법론이 합쳐져 6.25 전쟁적화통일 시도를 낳는 단초가 되었다.[4]

3. 특징

8월 종파사건으로 김일성은 소련파와 연안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직 김일성의 독재가 공고해진 것은 아니었다. 갑산파는 8월 종파사건에서는 김일성의 편을 들긴 했으나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흐름이 역력했다.

특히 이들은 한국의 전통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북한 사회를 이끌려는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갑산파가 중심적으로 관심을 가진 전통 사상가는 바로 다산 정약용으로, 이들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이는 곧 김일성과의 마찰로 이어졌다.[5] 김일성은 중공업 중시 정책을 추구하면서 군비 확장에 골몰했고 빨리 남한을 적화통일시키겠다는 조바심을 드러냈지만 갑산파의 중심 인물인 김도만박금철, 리효순 등은 이런 김일성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김도만은 "과도한 국방비 지출을[6] 줄이고 인민 생활 향상에 힘 써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며 "공장 및 관리소에서 지배인(책임자)의 권한을 높이고 당일꾼의 간섭을 줄여서 사실상 경제 정책은 경제 전문가에게 맡겨라."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는 사실상 김일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면 소련파, 연안파가 특정한 리더가 없고 결속력이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던 반면 갑산파는 갑산공작위원회 시절부터 박금철을 리더로 하여 결속력이 비교적 강한 편이었다는 점이다. 김일성과 함께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명분상으로도 밀리지 않았다.

4. 갑산파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갑산파 숙청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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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벌어졌고 김일성은 문화대혁명 노선에 동조하지 않아 마오쩌둥에게 수정주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조선은 소련과도 중국과도 다르다."는 소위 북한만의 독자 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주체사상의 기초가 시작된 셈이었다.

김일성은 이런 관점 하에서 조선로동당의 조직 개편을 단행해 비서국을 신설했고 조직지도비서와 조직비서가 중요 요직으로 부상했는데 이 중요 요직을 자신의 동생인 김영주에게 맡겼고 이는 갑산파의 반발을 불러왔다.

갑산파는 이에 맞서 김일성의 뒤를 이을 인물로 박금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김도만은 아예 대놓고 박금철 찬양 영화를 만들기까지 했는데 이는 김일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갑산파는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소비재 생산과 경공업 투자를 늘릴 것을 요구하면서 김일성의 이른바 "국방·경제 병진노선"에 반발했다. 중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 때 불쾌감

결국 김일성은 갑산파 제거를 결심하고 로동당 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과 리효순 등을 '반동적인 봉건주의 사상을 당간부들에게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숙청하기에 이른다. 소위 갑산파가 봉건주의, 수정주의, 부르주아 사상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결국 박금철, 리효순, 고혁, 박용국, 허석선, 김도만 등의 갑산파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사라졌고 갑산파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들은 모조리 썰려나가서 지방의 중견간부직 3분의 2가 공석이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서는 도서정리사업을 명목으로 심지어 마르크스주의까지도 금지되는 상황에 처했고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체제는 공고해졌다. 사실상 오늘날 퇴행적인 북한 사회를 만든 것이다. 게다가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김일성의 저 유명한 "함경도인들은 간부로 등용하지 말라."는 지시가 나온 것이며 당연히(?) 갑산파가 연구했던 목민심서를 비롯한 정약용의 저서들은 북한에선 금서가 되었고 한동안 연구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가 1980년대 이후에야 조금씩 연구를 재개하였다.

감산파 숙청을 마지막으로 조선로동당 내에는 김일성의 만주파와 구별되는 계파 내지는 정치 세력이 씨가 마르게 되었으며 김일성 1인 독재 체제 구축을 조금이라도 견제할 만한 모든 세력이 제거된다.[7]

이후 1968년 김일성의 생일이 국가명절로 지정되는 등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가 더욱 강화되었다.

5. 주요 인물

6. 여담

갑산파는 이렇게 대부분 숙청당했지만 보천보 전투조국광복회의 활동은 북한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북한 현대사에서 갑산파 자체를 전면 부정하기는 힘들어서 박금철이나 리효순 등 대신 감옥에서 고문으로 하반신 마비가 되어서 정치를 할 수 없었던 박달이나 해방 전에 사형당한 리제순(리효순의 동생) 등을 주요인물로 대신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들은 생전에 정치 전면에 나서지 못했던 덕(?)에 사후에 대성산혁명열사릉에 묻힘으로써 빨치산 출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1] 이후 북한은 김씨 일가의 유일독재 체계가 완성된다.[2] 북한에서 주장하는 만주와 국내에 분포해 있던 통일전선체.[3] 실제로는 사적 소유만 철폐되었을 뿐 생산력이 부족하고 노동자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지 못한 이행기 사회이지만.[4] 이상우, '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 을유문화사, 1990, pp526-528.[5] 당연한 소리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통제와 허락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정치적 움직임 자체를 전혀 묵인하지 않는 성향이었던 데다 공산권에서 이념은 모든 정치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민주주의 사회보다 훨씬 그 중요성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산파가 김일성과 만주파와 구별되는 사상적 흐름을 조직한다는 것은 김일성으로서는 용인할 수 없었다.[6] 국민총생산(GNP) 기준 시절 일본 재계에는 "국방비가 GNP의 6%를 넘어가면 그 나라 살림이 거덜나는 건 시간 문제"라는 격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국민총생산(GNP)의 10% 이상을 국방비로 할당하는 게 다반사였다. 참고로 냉전 시대 미국과 서유럽 NATO 국가들, 그리고 대한민국은 줄곧 GNP의 6~6.5% 정도를 국방비로 지출했으며 이스라엘도 최근까지 6%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경제가 파탄나지 않는 수준에서 쓸 수 있는 최대치라고 보면 될 듯하다.[7] 아이러니한 점은 북한 정권 수립 초창기에 김일성의 사박카라고 불리며 김일성 최측근으로 세도를 부리던 박영빈, 박정애, 박창옥, 박금철은 전부 다 만주파가 아닌 소련파, 국내파, 갑산파 소속의 인물이었으나 이들은 8월 종파사건과 갑산파 숙청을 거치며 전부 다 숙청되거나 권력 중심부에서 물러나게 된다. 김일성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파벌인 만주파가 아니면 누구도 근본적으로 신임하지 않았으며 방학세, 허정숙, 박문규 등 비 만주파 출신으로 숙청되지 않은 인물들은 독자적인 정치적 구심점을 전혀 형성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김일성과 만주파에 복종하고 김일성과 만주파의 권력 독점에 협조, 동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