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05 02:33:40

이주하(1905)

파일:김삼룡이주하.jpg
김삼룡 이주하 사건 기사. 사진 중 위가 김삼룡 아래가 이주하.

李舟河
1905년 ~ 1950년

1. 개요2. 생애
2.1. 일제강점기2.2. 광복 후 행적

1. 개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원산에 이주하 그룹이 있었을 정도로 노동운동 리더였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었고, 남로당 총책 김삼룡의 고문격 지위였다. 생전 김일성과 사이가 최악이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언급을 안 하는 사람이다.

이주하에 대한 자료는 심지연의 《이주하 연구》라는 학술서, 최용탁의 《남북이 봉인한 이름 이주하》라는 소설 등이 있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1905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화전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왔다. 보광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의 주동자로 수배되었다. 갑상광산으로 도피했다가 다시 원산으로 와 객주 사환, 일본인 상원의 점원, 우편국 전보배달부 일을 하며 극빈자 생활을 한다.[1]

1921년 서울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해 3학년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당한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한다. 공산청년동맹에 가담했다고 한다. 그런데 학비를 댈 수 없어서 1928년 귀국한다.[2]

원산으로 돌아와서 화물을 하역하는 일당 노동자로 취업한다. 원산무역청년연합회에 가입해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1929년 원산총파업에서의 역할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지도부였다는 것을 나중에 그의 활동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원산총파업 지도부가 검거되자 이주하가 새로운 지도부로 적색노조 조직에 나선 것이다.[3] 1929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1931년 정달헌(鄭達憲) 등과 평양노동연맹 좌익위원회를 조직하고, 태평양노동조합 함경남도 책임위원을 맡았다가 소위 ‘제1차 태로 사건(태평양노동조합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고 1936년까지 복역했다.[4]

1936년 석방되어 2월부터 원산에서 노동운동을 재개하고 4월 원산 철도 노동자를 적색노조로 조직한다. 이 무렵 리강국, 최용달, 김재갑 등 경성제대 출신이 원산으로 들어왔다. 이주하는 그들과 1937년 6월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한다. 38회에 걸쳐 노동자신문을 발간한다. 활동 영역은 흥남, 원산, 평양, 진남포 등 북부 조선 전 지역으로 확장되었다.[5]
원산그룹사건은 혜산사건과 달리 코민테른·중국공산당·일본공산당 등과 전연 연락 없이 완전히 사상적 전과자에 의한 일군의 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을 기초로 했으며, 아래로부터 시작된 점에서 현저한 특색이 있다. 테러 행위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수뇌부의 높은 사회주의 의식 수준, 인민전선전술의 정확한 파악, 그 운동 전개의 교묘한 점, 특히 대중 획득을 위한 적극적인 문서 활동의 전개 등은 혜산사건에 비할 바 아니고, 그 대상이 국경 산악지대의 의식수준이 낮은 농민과 원산 같은 수준 높은 노동자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현저히 운동이 첨예화되고 있는 것으로 이 점 주목된다. 만약에 원산의 이 운동이 1, 2년 더 지속되었더라면 원산철도 2천 수백여 명의 종업원은 물론이고 원산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원으로 포섭하여 어느 때고 무장봉기에 동원할 준비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일제 경찰의 기록 #

혜산사건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사건이다. 나중에 북한 갑산파가 되는 세력과 관계있다고 한다. 일제 경찰은 갑산파보다 이주하 그룹을 훨씬 높게 평가하는 게 흥미로운 부분.

2.2. 광복 후 행적

김일성은 국내에는 조직 기반이 없었다. 김일성이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당을 세우려 하자 이주하를 선봉으로 오기섭, 정달헌 등이 반대하고 나섰다.

김일성은 처음에 김동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이주하는 김일성이 소련 지원을 받는 김일성이라는 걸 몰랐다. 그래서 자기 활동지역인 원산에 애송이로 보이는 김일성이 돌아다니자 잡아 가두었다. 김일성을 두들겨팼다고 전해진다.
원산은 본시부터 이주하의 아성으로 일본서 귀국 후 노동파업과 소작쟁의를 일으켰던 곳이고 일제 때 운영했던 태평양노조 국제적색노동조합 태평양 지부(본부 소재 모스크바)를 그가 조직, 지도해 우리나라 최대의 파업을 일으켜 그 나름대로 터전에 자신을 갖고 있는 곳이었다 한다. 나는 그곳을 잘 모르나 주의의 모든 사람이 원산은 누가 무어라 해도 이주하의 땅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어 그가 마치 성주와 같이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해방 후 이주하는 원산에서 조선공산당 원산시당과 강원도당을 조직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김동환(金東煥)이란 자가 난데없이 나타나 공산당을 조직합네 하고 돌아다니더라는 것이었다. 새파란 청년이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라 웃어 넘기려 했으나 그의 측근들이 김동환이란 자가 너무 설친다고 하기에 하루는 부하들을 동원해 그를 잡아 가두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곧 소련군부대에서 그 청년을 풀어주라는 지시가 왔고 그대로 한 뒤 알고 보니 그 김동환이란 자가 김일성이었다고 했다.
[현대사 아리랑]인민의 바다에 뜬 외로운 배 이주하

이주하는 소련 인사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도 해 소련에 완벽히 미운털이 박혔다.
치스차코프: 당신이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이주하: 사령관은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치스차코프: 나에게는 소련공산당 당원증이 있다. 귀하는 당원증이 있는가?
이주하: 공산주의자인지 여부는 신념으로 판단해야 하며 당원증은 형식에 불과하다. 당신은 소련공산당사를 잘 알 텐데, 레닌과 그의 전우들도 지하운동 시절 당원증이 없었다.
김국후 기자의 <평양의 소련군정> 중 정률 증언

그래서 이주하는 원산에서 쫓겨나 서울에서 미군정기 정치인으로 활동한다.

거의 모든 사안에서 박헌영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할 땐 박헌영과 그다지 인연이 없었는데 광복 후 행적은 그냥 박헌영파다 보니 반대파에겐 박헌영, 이현상, 김삼룡과 함께 '콤그룹 4인방'이라 불렸다.

다음은 어린이날을 맞아 쓴 이주하 기고문.
1. 어린이 동무들은 우리를 해방하여 준 련합국 어린이들과 온 세계 어린이들과 친선해야 합니다. 조선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잘났다고 남의 나라 사람들을 얕보고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독일의 힛틀러와 이태리의 뭇쏘리니와 덴노일본이 남의 나라 사람을 종으로 하려는 못된 버릇에서 나온 것입니다.

2. 남의 나라 어린이들의 잘하는 것을 배우고 남보다 뛰어나는 어린이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착한 사람 되겠다고 애써야 합니다.

3. 여러 어린이 동무들은 학교에 있거나 집에 있거나 동무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훈련하고 연구하며 성장하여야 합니다. 학교에 있어서 자치회를 조직하여 자립할 수 있는 훈련을 할 것이요, 애국소년단에 참가하여 단체적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피어오르는 새 조선의 새싹이 되어야 합니다.

4. 법률로서 어린이들을 공장에서 로동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어린이들은 누구든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가난해서 공장에 다니며 학교에 들 수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애달픈 일입니까!

5.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사람을 종을 만들기 위한 노예교육이 아니라 새로운 조선의 새로운 토대가 되는 어린이들을 자유로운 교육으로 자유롭게 퍼져나가고 커갈 수 있는 교육으로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6. 가정에서는 어린이라고 얕보고 구속될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존중히 하고 착하고 늠름하게 커가도록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잘 커야 조선도 커가고 발전될 수 있는 것입니다.
1946년 5월 7일 해방일보 이주하 기고문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어린이에게 줌>
박헌영, 여운형 등 좌파 정치인은 수시로 소련군정 지역을 오가는데 이주하는 김일성이나 소련과 사이가 나빠서 북한에서 김삼룡이 보일 때도 이주하는 안 나타났다고 한다. 이주하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뽑히기도 하지만, 같이 김일성을 싫어한 것으로 유명한 이현상이 북한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할 때도 이주하는 서울에 남아 남로당을 지휘했다.

김삼룡이 남로당 총책이 되자 이주하가 그의 고문격이 되어 남로당을 지휘한다. 김삼룡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을 받고 조만식과의 교환 협상이 오가던 도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서울지구 헌병대장인 차약도 중령에 의해[6] 처형된다. 위장전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로당 조직 정보를 다 말하고 전향 의사를 말했다고 한다.
“내 자식놈한테는 절대로 정치를 하지 말라고 전해주시오.”
이주하의 재판 최후진술(사실상 유언)
늦게 결혼해 어린 자식과 아내가 있었고 자식을 예뻐했다고 하는데 이들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전쟁 시기 노동자들이 이주하와 김삼룡의 시신을 찾아내 남산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들이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는 전쟁이 발발하자 중형을 받은 정치범을 죽이긴 했지만 다수 수감자는 풀려나서 이주하와 김삼룡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후 대한민국 경제발전 시기 남산 지역을 공사하여 무덤이 사라진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의 동지들과 함께 반공드라마에서 단골 악당으로 등장하였다.

북한에서는 김삼룡과 이현상은 애국열사릉에도 가묘가 있고 조국통일상도 받고 이현상은 영웅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주하는 일체 언급이 안 된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록말살형 비슷한 처지로 추정되는데, 있는 기록을 없애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구는 전혀 안 될 것으로 보인다.


[1] 출처: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2] 출처: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3] 출처: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4] 출처: 이주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 출처: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6] 광복군 출신의 독립유공자로 김삼룡 이주하 처형 이후 서울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한다. 일설에 따르면 포로로 잡혔으며, 남로당 숙청 당시 증인으로 참석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