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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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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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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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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광역단위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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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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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 남녀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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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동산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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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삼성고등학교 }}}}}}}}}
<nopad> 파일:휘문고등학교 정문.jpg
{{{#fff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휘문고등학교 정문}}}
휘문고등학교
徽文髙等學校
Whimoon High School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colbgcolor=#181d6a><colcolor=white> 개교 1906년 5월 1일 휘문의숙[1]
유형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성별 남자고등학교
형태 사립학교
학교법인 휘문의숙
(徽文義塾)
교장 김현일
교감 김현철
교화 목련
교훈 큰사람이 되자
교목 느티나무
학생 수 1,236명[기준]
교직원 수 79명[기준]
관할청 서울특별시강남서초교육지원청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로 541 (대치동)
홈페이지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nopad>

1. 개요2. 학교 연혁3. 교훈 및 상징
3.1. 교표3.2. 교화3.3. 교목3.4. 교훈3.5. 건학이념3.6. 교육목표3.7. 교가
4. 학교 특징
4.1. 복장
5. 학교 시설6. 학교 생활7. 운동부8. 출신 인물9.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9.1. 버스9.2. 철도
10. 기타11. 관련 문헌12. 둘러보기

1. 개요

<nopad>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휘문고등학교 홍보영상


휘문고등학교[4](, Whimoon High School)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강남 8학군 소속 고등학교이자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이다.

구한말 설립되어 역사가 깊은 학교로, 2025년 신입생이 120기이다. 1904년 민영휘가 '광성의숙'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개교하였고, 1906년 고종으로부터 새 교명 '휘문의숙'을 하사받았으며 이 날을 개교기념일로 삼는다. 아름다울 휘(徽) 글월 문(文)으로, 글을 빛나게 하라는 의미이다.

수능 날 아침 언론사들이 시험장 풍경을 촬영하는 학교로 유명하다.[5]

2. 학교 연혁

<nopad> 파일:external/upload.whimoonob.kr/resize_main_sl_01.jpg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대한제국 시절 휘문의숙
1904년 9월 12일 민영휘가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열었고[6], 이후 1906년 5월 1일 고종에게 <휘문(徽文)> 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으며 새로 개교해 1910년에 32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수업 연한은 중학과 4년, 고등소학과 3년이었다. 1907년에는 많은 지원자가 몰려 예비과를 설치했으며 5월에 고등소학과를 예비과에 합병시켰다가 2년 후인 1909년 4월에 예비과를 폐지했다. 1911년에는 상업 학교로 전환하자는 논의와 함께 졸업 연한을 4년에서 3년으로 축소하였으나 1912년, 상업 학교 변경 건은 취소되고 졸업연한도 4년으로 환원되었다. 1918년 4월 1일부로 <사립 휘문고등보통학교>로 학교명이 바뀌었고 1922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 로 개명되면서 4년제에서 5년제로 연장됐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물리⋅화학 기구와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고, 1907년에는 사립 학교로는 최초로 야구팀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휘문의숙은 교과서 편찬에도 힘써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총 56종의 교과서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교육 사업을 펼쳤다.

1921년 휘문학교 교장 임경재 외에 휘문 교사, 동문들의 도움으로, 한글학회의 모체인 조선어연구회를 설립하였다. 그 외에도 창덕궁에서 72점의 악기를 기증받아 1923년 한국 최초의 취주악단을 창설하고, 1933년 한국 최초의 도서관을 만드는 등 한국 문화의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38년 4월 5년제의 <휘문중학교>로 개명됐으며 독립 후 6년제가 됐다가 1951년 개편된 중등교육법에 의해 중학교고등학교가 분리되고, 이에 따라 휘문중학교가 분리된 휘문고등학교(3년제)로 개칭되었다.
<nopad> 파일:external/www.whimoon68.co.kr/ps004.gif 파일:종로 휘문 전경.jpg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종로구 원서동 시절 본관 "희중당"[7]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종로구 원서동 시절 교사 전경

원래 휘문고등학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지금의 현대그룹 계동 사옥 위치에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강남 개발 당시 강북 주민을 강남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던 강북 명문고의 강남 이전 정책에 따라 현재의 대치동 교사로 1978년 이전하게 되었다. 현재의 휘문고 부지는 전 이사장 민병유의 사유지였다.[8] 2006년 창립 100주년[9]을 맞이한 기념식을 열었다.
<nopad> 파일:옛 휘문고.jpg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대치동 이전 초창기 휘문고[10]

2011년 3월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로 인가를 받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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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4cb00><colbgcolor=#181d6a><colcolor=#f4cb00> 날짜 연혁
1904년 9월
하정(荷汀) 민영휘 공(閔泳徽 公) 광성의숙(廣成義塾) 개숙(開塾)
1906년 5월
고종 황제 교명 휘문(徽文) 하사
1906년 8월
관상감 터에 교사 삼일재 낙성
1906년 8월
휘문의숙 첫 입학 시험 실시
1906년 8월
교재 인쇄, 편찬 기관인 휘문관 설립
1906년 9월
첫 수업 실시
1906년 11월
휘문의숙 개숙식
1907년
전국 최초 고교 야구부 창단 / 예비과 설치 및 고등소학과와 합병
1908년 4월
교복 착용
1908년 5월
민천식 등 4명 일본 및 상해 유학
1909년 4월
예비과 폐지
1909년 10월
교사 조원희 등 체육연구회 조직
1910년 3월
제1회 졸업식, 졸업생 32명 배출
1910년 5월
서울 5개 고교 연합 운동회 개최
1910년 10월
개성 수학여행
1911년
상업 학교 전환 논의, 졸업 연한 3년으로 축소
1911년 4월
문우회 창립
1912년
상업 학교 변경 취소, 졸업 연한 4년으로 환원
1912년 3월
교가 시창
1912년 6월
일제(日帝)의 교과용 도서 검정규정에 의해 휘문관 교재 대부분 폐기
1914년
축구부 창단
1918년
정구부 창단
1918년 1월
사립휘문의숙 →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 개칭
1919년 3월
3.1 운동 참여
1920년 6월
동맹휴학 돌입
1921년 3월
휘문 교우회 창립
1921년 3월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 발족
1922년
희중당 건립, 유도부 창설
1922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명, 수업 연한 5년으로 연장
1922년 6월
재단법인 휘문의숙 설립
1922년 8월
경우궁 터 매입, 운동장 확장
1923년 1월
교지 『휘문』 창간
1923년 6월
창덕궁에서 양악기 72점 하사, 악대 개편
1923년 7월
전 일본중등학교 야구우승권대회 조선 대표 출전
1923년 10월
동맹휴학 돌입
1925년
농구부 창단
1927년 4월
백선 모자 착용
1927년 5월
설립자 하정 민영휘 공 동상 건립
1928년
역도부 창단
1928년 9월
도서관 건축 기성회 조직
1929년 5월
광주학생항일운동 참여
1933년 9월
본교 출신 동경유학 음악생 <모교방문음악대회> 개최
1933년 10월
한국 최초 학교 도서관 개관
1934년 11월
조선 초유의 박물전람회 개최
1935년 10월
제12대 이병규 교장, 공학제 반대 글 조선일보 게재
1935년 12월
하정 민영휘 공 서거
1936년 7월
전 일본 역기대회에서 5학년 김성집 군 우승
1938년 4월
5년제 휘문중학교로 개명
1939년
아이스하키부 창단
1943년 7월
강제 노역 중 본교 학생 두 명 압사(壓死)
1946년 1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반탁 학생궐기대회> 참가
1946년 7월
5년제에서 6년제 학제로 변경
1947년 4월
<애교동지회> 발족
1949년 9월
<학도호국단> 편성
1950년 6월
6.25 전쟁으로 인한 무기 휴교
1950년 9월
영국군 본교 주둔, 동덕국민학교 임시 개교
1951년 8월
학제 개편에 따라 휘문중학교와 휘문고등학교로 분리
1951년 11월
김성집 교우 전국체전에서 역도 세계신기록 수립
1952년
레슬링부 창단
1952년 4월
서울 종로 내수동에 임시 분교 개교
1955년 4월
본 교사로 복귀
1955년 4월
영자신문 『The Whimoon Times』 창간
1956년 10월
제1회 7개교 문학의 밤 개최
1957년
농구부 36전 전승
1958년 6월
교내신문 『휘문』 창간
1959년 3월
두발 자유화 허용
1960년 4월
4.19 의거 참여
1960년 7월
제1회 전국아동글짓기 대회 본교 주관
1961년 5월
희중문학상 제정
1962년 6월
민병유 이사장, 삼성동 임야 2만4천 평 기증
1964년 11월
민영휘 선생 문화훈장 대통령장 추서
1970년 3월
새 교훈 ‘큰사람이 되자’ 제정
1972년 9월
사격반 창단
1975년 10월
학도호국단 발족
1976년 5월
휘문 70년사 간행
1976년 6월
미국 Palm Springs High School과 자매결연
1977년 9월
휘문중학교 교사 강남 이전
1978년 2월
휘문고등학교 교사 강남 이전
1979년 5월
제1회 교내 백일장 및 사생대회 개최
1983년 3월
교복 및 두발 자율화 시행
1983년 5월
휘문 기악반 교우 모임인 휘악회 결성
1987년 10월
휘문의 밤 행사 일환으로 제1회 한티가요제 개최
1991년 5월
원서동 현대그룹 계동 사옥에 휘문중·고등학교 옛터임을 알리는 표석 건립
1992년 5월
교훈탑 제막
1994년 9월
제49회 청룡기쟁탈 중·고 야구선수권대회에서 중·고 동반 우승
1995년 5월
정지용 시비(詩碑) 건립
1995년 10월
‘휘문의 밤’에서 ‘한티축제’로 명칭 변경
2003년 3월
교복 착용
2003년 9월
아이스하키부 해체
2005년 10월
휘문-보성 제1회 친선 축구대회 개최
2006년 5월
개교 100주년 기념, 기념탑 제막
2006년 5월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개교 100주년 기념 휘문인 큰 잔치 개최
2006년 11월
휘문 100년사 출판기념회
2009년 10월
고등학교 최초 봅슬레이부 창단
2010년 4월
자율형사립고등학교 지정
2010년 10월
제1회 아트콘테스트 개최
2011년 3월
자율형 신입생 517명 입학
2013년 12월
제1회 휘문연극제 개최
2014년 9월
제42회 봉황대기 야구부 우승
2016년 5월
창학 110주년 기념일
2016년 8월
제44회 봉황대기 야구부 우승
2018년 2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폐막식 총감독 송승환 교우(제67회 졸업) 연출
2018년 2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국가 대표 차준환(피겨 스케이팅, 1학년 재학), 감강찬(피겨 스케이팅, 제107회 졸업) 출전
2018년 8월
2018 한국중고농구 주말리그 왕중왕전 농구부 우승
2018년 10월
제10대 김정배 이사장 취임
2019년 5월
교문 신축 준공
2019년 6월
교복 자율화
2019년 8월
제47회 봉황대기 야구부 우승
2020년 4월
제60주년 4·19 민주혁명 기념동상 건립
2020년 6월
6·25 전쟁 제70주년 휘문 교우 참전 기념비 건립
2020년 8월
자사고 지정 취소, 지정 취소 가처분 신청 인용으로 자사고 지위 유지
2020년 11월
교복 검사 재개
2022년 5월
휘문 즈믄탑 준공
2024년 8월
제34대 김현일 교장 취임
2024년 9월
자사고 지정 취소 무효화
}}}}}}}}} ||

3. 교훈 및 상징

3.1. 교표

{{{#!wiki style="margin: -10px"<tablebordercolor=#ffffff><tablebgcolor=#ffffff>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휘문고등학교
교표 변천
}}}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구).svg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舊 교표
新 교표

휘문고등학교의 교표는 문()자 안에 휘()자가 들어간 모습이다.

글을 아름답게 한다는 뜻의 「휘문(徽文)」은 학문, 곧 배움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교명 「휘문(徽文)」은, 고종 황제께서 본교 설립자이신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공(公)의 「휘(徽)」자에 「문(文)」을 더해 지으신 후 1906년 개교기념일을 전후하여 하사하셨다.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출처: 휘문고등학교 홈페이지

3.2. 교화

<nopad> 파일:목련_8564.jpg

북향화(北向花)라고도 하며, 잎새가 돌아 오르기 전 홀로 봄이 왔음을 알리기도 하는 목련은, 꽃이 필 때의 상서로움과 활짝 핀 꽃송이의 은근한 향기와 우아한 기품, 자연에 몸을 맡기며 미련 없이 스러지는 처연한 모습은 고결하기까지 하다.

우리 휘문인은 북풍한설에 꽃을 피우는 목련처럼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담대한 용기와 새하얀 꽃잎처럼 순백의 희망을 품고 자신의 꿈을 향해 정진(精進)하기 위해 목련을 교화로 삼는다.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휘문고등학교 교육계획서』 발췌

3.3. 교목

<nopad> 파일:큰 느티나무.jpg

느티나무는 예부터 귀목(貴木)이라고 했으며, 죽은 몸통에서도 새 싹이 돋아 오르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인해 죽어서도 사는 나무라고 한다. 봄에는 자잘한 꽃이 피고 열매도 맺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다. 느티나무의 억센 줄기는 강인한 의지를, 고루 퍼진 가지는 조화를,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무성한 잎은 헌신을 상징한다.
우리 휘문인은 강인하되 조화로우며 재능을 나누는 큰사람이 되기 위해 느티나무를 교목으로 삼는다.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휘문고등학교 교육계획서』 발췌

3.4. 교훈

파일:Screenshot 2025-05-24 2.22.07 PM.png
파일:Screenshot 2025-05-24 2.21.43 PM.png

* <큰사람>은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휘문의 자율적 학풍 곧 스스로 절제하는 학풍을 토대로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함양하고 인문학적 학풍 즉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교풍을 바탕으로 인간존중의 정신과 상대를 배려하는 성품을 계발하여 지성과 창의와 실천을 겸비한 사람이다.
  • 지성인(知性人)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배우고 정의를 체득하며 자신의 적성과 특기를 계발하여 실천적 지혜를 습득하는 사람이다.
  • 창의인(創意人)은 문화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미래의 비전을 정립하고 문화적 감성을 향유하며 창의적 역량을 배양하여 인류에 공헌하는 사람이다.
  • 실천인(實踐人)은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생명과 인간을 존중하고 소통을 통해 배려하고 협력하며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고 행복을 나누는 사람이다.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휘문고등학교 교육계획서』 발췌

3.5. 건학이념

파일:Screenshot 2025-05-24 2.19.34 PM.png
파일:Screenshot 2025-05-24 2.18.41 PM.png

3.6. 교육목표

본교의 교육 목표는 올바른 가치관과 자주정신을 함양하고 창의력을 신장하여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에 공헌하며 나아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21세기의 큰사람을 육성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공동체 의식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지향하는 가치관을 함양한다. 나보다 우리를 우선하는 시민의식을 통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함양하고 나눔과 기부의 공동체적 삶과 후세에 물려줄 친환경적 삶을 실천한다. 또한 본교의 인문학적 교풍과 자율적 학풍을 토대로 자주성(自主性)을 함양한다. 본교의 인문학적 학풍을 바탕으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자율적 학풍을 토대로 인간의 고유한 자유 의지를 발현하는 가운데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시민의식을 기른다. 다양한 교육적・문화적・사회적 경험을 통해 창의성을 신장한다. 통섭적인 학습과 독서, 다채로운 문화 참여와 다양한 체험 활동을 통해 지식을 재구조화하고 문화를 재창조하며 활동을 재구성하여 발상을 전환하고 창의적으로 사고한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잠재력(潛在力)을 계발하고 수월성(秀越性)을 함양하며 가능성(可能性)을 배양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문화를 창조하며 진실을 추구한다. 이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에 공헌하며 인류에 기여하는 큰사람을 육성한다.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휘문고등학교 교육계획서』 발췌

3.7. 교가

<rowcolor=#fff>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출처: 휘문고등학교 홈페이지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휘문고등학교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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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old.whimoon.hs.kr/69_01.gif


애국가보다도 오래된 유구한 역사의 노래로 휘문고의 상징이다.[11] 작사가는 시인 최남선이며, 특이한 점은 가사 어디에도 휘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볼재에 우뚝한 우리 집'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볼재는 종로구 원서동 시절 휘문고 부지의 이름으로[12] 현재의 현대차그룹 계동사옥 자리다. 전통 있는 학교 중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한 학교는 교정을 옮겼다 해도 학교 전통의 일부인 교가 가사를 굳이 바꾸지 않았기에 대개 이렇다. 교가 내용에도 볼재 교사 시절 복닥대는 서울을 조망할 수 있는 모교의 전망을 묘사하는 내용이 있다.[13]

박자가 매우 특이한데, 요즘 노래에 거의 쓰이지 않는 4분의 5박자[14]로 작곡되어서 처음 들으면 매우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4분의 4박자로 바꿔 부른다.[15]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휘문고등학교 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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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old.whimoon.hs.kr/69_02.gif

파일:휘문고등학교 교표.svg
휘문고등학교 야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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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휘문고 야구가 악보.jpg


야구가는 미국의 군가 Marching Through Georgia를 개사한 것.

4. 학교 특징

4.1. 복장

5. 학교 시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휘문고등학교/시설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휘문고등학교/시설#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휘문고등학교/시설#|]]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학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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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휘문고등학교/생활#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휘문고등학교/생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운동부

8. 출신 인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휘문고등학교/출신 인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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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9.1. 버스

9.2. 철도

10. 기타

11. 관련 문헌

12. 둘러보기

학교법인 휘문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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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4년 9월 12일 광성의숙[기준] 2025년[기준] 2025년[4] 현대 표준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Hwimun High School'이 맞지만, 영문 표기가 정확히 정립되지 않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표기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영문대로 읽으면 '위문고등학교'라고 읽을 수 있지만 이 학교가 1906년에 개교했음을 감안하면 당시의 'Wh' 발음은 실제로도 '휘'였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맞는 표기였다. 때문에 휘문고등학교의 모든 운동팀이나 단체 이니셜이 W이다.[5] 중구 소재 이화여고나 여의도 소재 여의도고 등은 언론사가 그냥 회사에서 가까운 학교에서 찍은 거라면 휘문고는 강남 8학군을 대표하는 학교로서 출연하는 것이다.[6] 민영휘의 사저 중 일부를 활용하여 인근 학동 6~7명을 대상으로 교육하면서 시작되었다. 1905년 8월 광성 의숙은 학부로부터 정식 사립 학교 설립 인허를 받았고 그 해 11월에 상과(商科)와 야학(夜學)이 개설되면서 주⋅야간 숙생(塾生)이 70여 명에 이르렀다. 학생이 늘어남에 따라 광성의숙은 1906년 4월 학부에 청원하여 관상감(觀象監) 터를 얻어서 새로운 숙사(塾舍)를 세우고 1906년 11월 13일에 개숙식을 열었다.[7] 한국 최초의 3층 건물[8] 그가 기증한 토지는 약 24,000평 규모였는데, 현 휘문고 부지는 16,000평 정도이다. 이 차이는 친일파 재산 환수 과정 등에서 생겼다고 한다. 없어진 8,000평에는 현 대명중학교 부지와 포르쉐 코리아 사옥 등이 포함된다.[9] '휘문의숙'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시점부터 100년이다.[10] W타워가 없어 대운동장이 더 넓었다. 여담으로 네이버 지도에서 2010년 2월의 거리뷰를 보면 W타워가 없는 그때 그시절 휘문고를 볼 수 있다.[11] 개교기념식 등 대부분 행사에서는 2절까지만 부른다. (2025년 기준)[12] '-재'는 고개를 지칭하는 순우리말이며(e.g., 문경새재) 원래 이곳에는 조선 시대의 천문 기관 관상감의 천문대인 관천대가 위치하였고, '하늘을 보는 고개'라는 뜻에서 '볼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13] '잘 집'이란 아주 많은 집을 말한다. #[14] 그나마 알려진 4분의 5박자 곡으로는 데이브 브루벡Take Five, 미션 임파서블 메인 테마곡, 양방언Frontier!가 있는데, 미션 임파서블 테마곡과 Frontier! 두 곡은 6/8+2/4로 쪼갤 수 있어 순수한 5박자 곡은 아니다. 순수한 5박 계열의 곡으로는 프레데리크 쇼팽의 습작 피아노 소나타 1번(Op. 4) 3악장과 에이토르 빌라로부스의 "야만적인 시(Rudepoêma)" 최후반부 일부를 꼽을 수 있다(사실 후자는 변박이 수시로 일어나 전반적으로 어느 박자라고 꼽을 수는 없다).[15] 음악 시간에 배우는 교가는 4분의 5박자를 4분의 4박자로 잘라 바꾼 것이라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 부분이 살짝 어색하다.[16] 휘문중학교와 교복이 거의 같다. 구분하는 방법은 왼쪽 가슴 부분의 휘장의 글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휘문고는 한자 '徽'를, 휘문중은 한글 '휘'를 사용한다. 아니면 동복의 경우 착용한 넥타이를 보면 된다. 군청색 계열의 줄무늬가 있는 것은 같으나 휘문고는 노란색과 군청색 줄무늬고, 휘문중은 와인색과 군청색 줄무늬다.[17] 2024년까지는 교복은 아니지만, 한자 가 인쇄된 반팔티, 반바지, 바지, 후드집업, 패딩 등이 있어 교복 대용 역할을 하였었다. 2025년에 교복이 아니지만 여름철에 입고 생활할 수 있는 새로운 반바지가 제작되었다.[18] 맥심에서 스포츠 명문고 농구부분 1위로 2008년에 선정된 적 있다.[19] 1914년 창단하여 1921년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 참가 그리고 1922년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하며 초창기 고등학교 축구의 선두 주자였다. 해방 후까지 존속하였지만高校蹴球(고교축구)어제와오늘 힘껏차고달린 半世紀(반세기) 한국전쟁 이후 고등학교 축구부는 해체되고 중학교 축구부만 운영하다 이 역시 1950년대에 해체된것으로 추정된다.[20] 1922년 창단되어 배재, 보성, 중동, 경신, 양정 등의 학교와 일제강점기 한국유도 발전에 일조하였으나 이후 해체되었다.[21] 2009~2016년 대한민국 초·중·고·대학교 중 1번째로 봅슬레이부를 창단, 운영하였었다.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갔다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2016년 폐부되었다.[22] 2002년 해체되었으며, 해체 이유는 성적부진이라고 한다.[23] 정확히는 민영휘의 증손인 민덕기가 1944년 안유풍에서 이름을 따서 설립.[24] 간송 전형필 선생 맞다.[25] 리모델링하여 이제는 회색이다.[26] 가을에 보면 거의 옥상까지 덮여있다[27] 요즘말로 말하면 스타강사 같은 위치라 당시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학교에서 강의했었다.[28] 평소 휘문고등학교 야구부연세대학교 야구부로 많이 진학했고, 연세대 출신인 JBL사장도 연세대 야구부에 관심이 많아 이사장과 서로 알게 됐다고[29] 라고 했으나 2018년까지 배웠다. 2017년 입학생[30] 참고로 대리기사 폭행사건은 세월호가족대책위원회 김병권 전 위원장과 김형기 전 수석부위원장에 대해서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120시간의 사회봉사를,이용기 전 장례지원분과 간사는 벌금 100만원을, 한상철 전 대외협력분과 부위원장과 김현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무죄#를 받았으며, 박근혜 정부 당시 비서실장이던 김기춘수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31] 2년 후인 2018년까지 붙어있었다.[32] 자세한 내용은 진로선생님이 풀어주시는 썰에서 나온다.[33] 그것도 나름 깔끔한 12, 25 이런 숫자들이 아니라 37, 59 같은 현기증나는 숫자들이 많다.[34] 물론 당시에는 사형선고 및 신속 집행이 당연했고, 경찰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잡아가 고문하거나, 심지어 군인까지 동원해 통제하는 등 공권력 남용이 최고치였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