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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등학교 徽文髙等學校 Whimoon High Schoo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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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81d6a><colcolor=white> 개교 | 1906년 5월 1일 휘문의숙[1] |
유형 |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
성별 | 남자고등학교 |
형태 | 사립학교 |
학교법인 | 휘문의숙 (徽文義塾) |
교장 | 김현일 |
교감 | 김현철 |
교화 | 목련 |
교훈 | 큰사람이 되자 |
교목 | 느티나무 |
학생 수 | 1,236명[기준] |
교직원 수 | 79명[기준] |
관할청 | 서울특별시강남서초교육지원청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로 541 (대치동) |
홈페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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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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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등학교[4](徽文高等學校, Whimoon High School)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강남 8학군 소속 고등학교이자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이다.
구한말 설립되어 역사가 깊은 학교로, 2025년 신입생이 120기이다. 1904년 민영휘가 '광성의숙'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개교하였고, 1906년 고종으로부터 새 교명 '휘문의숙'을 하사받았으며 이 날을 개교기념일로 삼는다. 아름다울 휘(徽) 글월 문(文)으로, 글을 빛나게 하라는 의미이다.
수능 날 아침 언론사들이 시험장 풍경을 촬영하는 학교로 유명하다.[5]
2. 학교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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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연한은 중학과 4년, 고등소학과 3년이었다. 1907년에는 많은 지원자가 몰려 예비과를 설치했으며 5월에 고등소학과를 예비과에 합병시켰다가 2년 후인 1909년 4월에 예비과를 폐지했다. 1911년에는 상업 학교로 전환하자는 논의와 함께 졸업 연한을 4년에서 3년으로 축소하였으나 1912년, 상업 학교 변경 건은 취소되고 졸업연한도 4년으로 환원되었다. 1918년 4월 1일부로 <사립 휘문고등보통학교>로 학교명이 바뀌었고 1922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 로 개명되면서 4년제에서 5년제로 연장됐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물리⋅화학 기구와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고, 1907년에는 사립 학교로는 최초로 야구팀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휘문의숙은 교과서 편찬에도 힘써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총 56종의 교과서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교육 사업을 펼쳤다.
1921년 휘문학교 교장 임경재 외에 휘문 교사, 동문들의 도움으로, 한글학회의 모체인 조선어연구회를 설립하였다. 그 외에도 창덕궁에서 72점의 악기를 기증받아 1923년 한국 최초의 취주악단을 창설하고, 1933년 한국 최초의 도서관을 만드는 등 한국 문화의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38년 4월 5년제의 <휘문중학교>로 개명됐으며 독립 후 6년제가 됐다가 1951년 개편된 중등교육법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고, 이에 따라 휘문중학교가 분리된 휘문고등학교(3년제)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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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휘문고등학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지금의 현대그룹 계동 사옥 위치에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의 강남 개발 당시 강북 주민을 강남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던 강북 명문고의 강남 이전 정책에 따라 현재의 대치동 교사로 1978년 이전하게 되었다. 현재의 휘문고 부지는 전 이사장 민병유의 사유지였다.[8] 2006년 창립 100주년[9]을 맞이한 기념식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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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로 인가를 받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rowcolor=#f4cb00><colbgcolor=#181d6a><colcolor=#f4cb00> 날짜 | 연혁 |
1904년 9월 | 하정(荷汀) 민영휘 공(閔泳徽 公) 광성의숙(廣成義塾) 개숙(開塾) | |
1906년 5월 | 고종 황제 교명 휘문(徽文) 하사 | |
1906년 8월 | 관상감 터에 교사 삼일재 낙성 | |
1906년 8월 | 휘문의숙 첫 입학 시험 실시 | |
1906년 8월 | 교재 인쇄, 편찬 기관인 휘문관 설립 | |
1906년 9월 | 첫 수업 실시 | |
1906년 11월 | 휘문의숙 개숙식 | |
1907년 | 전국 최초 고교 야구부 창단 / 예비과 설치 및 고등소학과와 합병 | |
1908년 4월 | 교복 착용 | |
1908년 5월 | 민천식 등 4명 일본 및 상해 유학 | |
1909년 4월 | 예비과 폐지 | |
1909년 10월 | 교사 조원희 등 체육연구회 조직 | |
1910년 3월 | 제1회 졸업식, 졸업생 32명 배출 | |
1910년 5월 | 서울 5개 고교 연합 운동회 개최 | |
1910년 10월 | 개성 수학여행 | |
1911년 | 상업 학교 전환 논의, 졸업 연한 3년으로 축소 | |
1911년 4월 | 문우회 창립 | |
1912년 | 상업 학교 변경 취소, 졸업 연한 4년으로 환원 | |
1912년 3월 | 교가 시창 | |
1912년 6월 | 일제(日帝)의 교과용 도서 검정규정에 의해 휘문관 교재 대부분 폐기 | |
1914년 | 축구부 창단 | |
1918년 | 정구부 창단 | |
1918년 1월 | 사립휘문의숙 →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 개칭 | |
1919년 3월 | 3.1 운동 참여 | |
1920년 6월 | 동맹휴학 돌입 | |
1921년 3월 | 휘문 교우회 창립 | |
1921년 3월 |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 발족 | |
1922년 | 희중당 건립, 유도부 창설 | |
1922년 4월 | 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명, 수업 연한 5년으로 연장 | |
1922년 6월 | 재단법인 휘문의숙 설립 | |
1922년 8월 | 경우궁 터 매입, 운동장 확장 | |
1923년 1월 | 교지 『휘문』 창간 | |
1923년 6월 | 창덕궁에서 양악기 72점 하사, 악대 개편 | |
1923년 7월 | 전 일본중등학교 야구우승권대회 조선 대표 출전 | |
1923년 10월 | 동맹휴학 돌입 | |
1925년 | 농구부 창단 | |
1927년 4월 | 백선 모자 착용 | |
1927년 5월 | 설립자 하정 민영휘 공 동상 건립 | |
1928년 | 역도부 창단 | |
1928년 9월 | 도서관 건축 기성회 조직 | |
1929년 5월 | 광주학생항일운동 참여 | |
1933년 9월 | 본교 출신 동경유학 음악생 <모교방문음악대회> 개최 | |
1933년 10월 | 한국 최초 학교 도서관 개관 | |
1934년 11월 | 조선 초유의 박물전람회 개최 | |
1935년 10월 | 제12대 이병규 교장, 공학제 반대 글 조선일보 게재 | |
1935년 12월 | 하정 민영휘 공 서거 | |
1936년 7월 | 전 일본 역기대회에서 5학년 김성집 군 우승 | |
1938년 4월 | 5년제 휘문중학교로 개명 | |
1939년 | 아이스하키부 창단 | |
1943년 7월 | 강제 노역 중 본교 학생 두 명 압사(壓死) | |
1946년 1월 |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반탁 학생궐기대회> 참가 | |
1946년 7월 | 5년제에서 6년제 학제로 변경 | |
1947년 4월 | <애교동지회> 발족 | |
1949년 9월 | <학도호국단> 편성 | |
1950년 6월 | 6.25 전쟁으로 인한 무기 휴교 | |
1950년 9월 | 영국군 본교 주둔, 동덕국민학교 임시 개교 | |
1951년 8월 | 학제 개편에 따라 휘문중학교와 휘문고등학교로 분리 | |
1951년 11월 | 김성집 교우 전국체전에서 역도 세계신기록 수립 | |
1952년 | 레슬링부 창단 | |
1952년 4월 | 서울 종로 내수동에 임시 분교 개교 | |
1955년 4월 | 본 교사로 복귀 | |
1955년 4월 | 영자신문 『The Whimoon Times』 창간 | |
1956년 10월 | 제1회 7개교 문학의 밤 개최 | |
1957년 | 농구부 36전 전승 | |
1958년 6월 | 교내신문 『휘문』 창간 | |
1959년 3월 | 두발 자유화 허용 | |
1960년 4월 | 4.19 의거 참여 | |
1960년 7월 | 제1회 전국아동글짓기 대회 본교 주관 | |
1961년 5월 | 희중문학상 제정 | |
1962년 6월 | 민병유 이사장, 삼성동 임야 2만4천 평 기증 | |
1964년 11월 | 민영휘 선생 문화훈장 대통령장 추서 | |
1970년 3월 | 새 교훈 ‘큰사람이 되자’ 제정 | |
1972년 9월 | 사격반 창단 | |
1975년 10월 | 학도호국단 발족 | |
1976년 5월 | 휘문 70년사 간행 | |
1976년 6월 | 미국 Palm Springs High School과 자매결연 | |
1977년 9월 | 휘문중학교 교사 강남 이전 | |
1978년 2월 | 휘문고등학교 교사 강남 이전 | |
1979년 5월 | 제1회 교내 백일장 및 사생대회 개최 | |
1983년 3월 | 교복 및 두발 자율화 시행 | |
1983년 5월 | 휘문 기악반 교우 모임인 휘악회 결성 | |
1987년 10월 | 휘문의 밤 행사 일환으로 제1회 한티가요제 개최 | |
1991년 5월 | 원서동 현대그룹 계동 사옥에 휘문중·고등학교 옛터임을 알리는 표석 건립 | |
1992년 5월 | 교훈탑 제막 | |
1994년 9월 | 제49회 청룡기쟁탈 중·고 야구선수권대회에서 중·고 동반 우승 | |
1995년 5월 | 정지용 시비(詩碑) 건립 | |
1995년 10월 | ‘휘문의 밤’에서 ‘한티축제’로 명칭 변경 | |
2003년 3월 | 교복 착용 | |
2003년 9월 | 아이스하키부 해체 | |
2005년 10월 | 휘문-보성 제1회 친선 축구대회 개최 | |
2006년 5월 | 개교 100주년 기념, 기념탑 제막 | |
2006년 5월 |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개교 100주년 기념 휘문인 큰 잔치 개최 | |
2006년 11월 | 휘문 100년사 출판기념회 | |
2009년 10월 | 고등학교 최초 봅슬레이부 창단 | |
2010년 4월 | 자율형사립고등학교 지정 | |
2010년 10월 | 제1회 아트콘테스트 개최 | |
2011년 3월 | 자율형 신입생 517명 입학 | |
2013년 12월 | 제1회 휘문연극제 개최 | |
2014년 9월 | 제42회 봉황대기 야구부 우승 | |
2016년 5월 | 창학 110주년 기념일 | |
2016년 8월 | 제44회 봉황대기 야구부 우승 | |
2018년 2월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폐막식 총감독 송승환 교우(제67회 졸업) 연출 | |
2018년 2월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국가 대표 차준환(피겨 스케이팅, 1학년 재학), 감강찬(피겨 스케이팅, 제107회 졸업) 출전 | |
2018년 8월 | 2018 한국중고농구 주말리그 왕중왕전 농구부 우승 | |
2018년 10월 | 제10대 김정배 이사장 취임 | |
2019년 5월 | 교문 신축 준공 | |
2019년 6월 | 교복 자율화 | |
2019년 8월 | 제47회 봉황대기 야구부 우승 | |
2020년 4월 | 제60주년 4·19 민주혁명 기념동상 건립 | |
2020년 6월 | 6·25 전쟁 제70주년 휘문 교우 참전 기념비 건립 | |
2020년 8월 | 자사고 지정 취소, 지정 취소 가처분 신청 인용으로 자사고 지위 유지 | |
2020년 11월 | 교복 검사 재개 | |
2022년 5월 | 휘문 즈믄탑 준공 | |
2024년 8월 | 제34대 김현일 교장 취임 | |
2024년 9월 | 자사고 지정 취소 무효화 |
3. 교훈 및 상징
- 출처: 휘문고등학교 홈페이지 및 『휘문고등학교 교육계획서』
3.1. 교표
{{{#!wiki style="margin: -10px" | <tablebordercolor=#ffffff><tablebgcolor=#ffffff> | 휘문고등학교 교표 변천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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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 교표 | 新 교표 |
휘문고등학교의 교표는 문(文)자 안에 휘(徽)자가 들어간 모습이다. 글을 아름답게 한다는 뜻의 「휘문(徽文)」은 학문, 곧 배움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교명 「휘문(徽文)」은, 고종 황제께서 본교 설립자이신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공(公)의 「휘(徽)」자에 「문(文)」을 더해 지으신 후 1906년 개교기념일을 전후하여 하사하셨다. |
3.2. 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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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향화(北向花)라고도 하며, 잎새가 돌아 오르기 전 홀로 봄이 왔음을 알리기도 하는 목련은, 꽃이 필 때의 상서로움과 활짝 핀 꽃송이의 은근한 향기와 우아한 기품, 자연에 몸을 맡기며 미련 없이 스러지는 처연한 모습은 고결하기까지 하다. 우리 휘문인은 북풍한설에 꽃을 피우는 목련처럼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담대한 용기와 새하얀 꽃잎처럼 순백의 희망을 품고 자신의 꿈을 향해 정진(精進)하기 위해 목련을 교화로 삼는다. |
3.3.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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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는 예부터 귀목(貴木)이라고 했으며, 죽은 몸통에서도 새 싹이 돋아 오르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인해 죽어서도 사는 나무라고 한다. 봄에는 자잘한 꽃이 피고 열매도 맺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다. 느티나무의 억센 줄기는 강인한 의지를, 고루 퍼진 가지는 조화를,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무성한 잎은 헌신을 상징한다. 우리 휘문인은 강인하되 조화로우며 재능을 나누는 큰사람이 되기 위해 느티나무를 교목으로 삼는다. |
3.4.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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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사람>은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휘문의 자율적 학풍 곧 스스로 절제하는 학풍을 토대로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함양하고 인문학적 학풍 즉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교풍을 바탕으로 인간존중의 정신과 상대를 배려하는 성품을 계발하여 지성과 창의와 실천을 겸비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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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건학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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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교육목표
본교의 교육 목표는 올바른 가치관과 자주정신을 함양하고 창의력을 신장하여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에 공헌하며 나아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21세기의 큰사람을 육성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공동체 의식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지향하는 가치관을 함양한다. 나보다 우리를 우선하는 시민의식을 통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함양하고 나눔과 기부의 공동체적 삶과 후세에 물려줄 친환경적 삶을 실천한다. 또한 본교의 인문학적 교풍과 자율적 학풍을 토대로 자주성(自主性)을 함양한다. 본교의 인문학적 학풍을 바탕으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자율적 학풍을 토대로 인간의 고유한 자유 의지를 발현하는 가운데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시민의식을 기른다. 다양한 교육적・문화적・사회적 경험을 통해 창의성을 신장한다. 통섭적인 학습과 독서, 다채로운 문화 참여와 다양한 체험 활동을 통해 지식을 재구조화하고 문화를 재창조하며 활동을 재구성하여 발상을 전환하고 창의적으로 사고한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잠재력(潛在力)을 계발하고 수월성(秀越性)을 함양하며 가능성(可能性)을 배양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문화를 창조하며 진실을 추구한다. 이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에 공헌하며 인류에 기여하는 큰사람을 육성한다. |
3.7.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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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등학교 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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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보다도 오래된 유구한 역사의 노래로 휘문고의 상징이다.[11] 작사가는 시인 최남선이며, 특이한 점은 가사 어디에도 휘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볼재에 우뚝한 우리 집'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볼재는 종로구 원서동 시절 휘문고 부지의 이름으로[12] 현재의 현대차그룹 계동사옥 자리다. 전통 있는 학교 중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한 학교는 교정을 옮겼다 해도 학교 전통의 일부인 교가 가사를 굳이 바꾸지 않았기에 대개 이렇다. 교가 내용에도 볼재 교사 시절 복닥대는 서울을 조망할 수 있는 모교의 전망을 묘사하는 내용이 있다.[13]
박자가 매우 특이한데, 요즘 노래에 거의 쓰이지 않는 4분의 5박자[14]로 작곡되어서 처음 들으면 매우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4분의 4박자로 바꿔 부른다.[15]
휘문고등학교 응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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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등학교 야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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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가는 미국의 군가 Marching Through Georgia를 개사한 것.
4. 학교 특징
4.1. 복장
- 교복은 동복(춘추복)과 하복이 있다. 휘문고등학교는 1983년부터 교복을 입지 않았고 이후 타 중고등학교에서 교복 도입이 대세가 된 1990년대에도 교복 자율화 정책을 유지했었는데, 2003년에 대세를 따라 교복을 도입하였다. 참고로 그 당시 강당에서 패션쇼를 해서 교복 디자인 후보군 중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투표하게 되었는데 학생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선택한 것을 채택했다고 한다.[16]
- 2019년 6월 학생, 학부모, 교직원의 의견을 총합하여 대의원회의를 통해 교복 자율화를 결정하였다. 기존 교복을 구매한 학생들은 자율화 이후에도 교복을 착용할 수 있으며 사복은 당연히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2020년 11월부터 다시 교복 검사가 시작되었다.
- 이후 다시 교복 검사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으나, 2025년부터 다시 검사가 시작되었다.[17]
- 체육복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복을 입고 체육 활동을 한다.
- 휘문은 동아리마다 배지보다는 보통 'W'가 적힌 야구점퍼가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느 대학교의 과잠으로 생각할 수 있다.
- 2025년 기준 명찰색은 1학년 파란색, 2학년 노란색, 3학년 초록색이다.
5. 학교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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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휘문고등학교/시설#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휘문고등학교/시설#|]] 부분을
참고하십시오.6. 학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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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휘문고등학교/생활#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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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휘문고등학교/생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7. 운동부
- 휘문고등학교 야구부
- 휘문고등학교 농구부[18]
휘문고등학교 축구부[19]휘문고등학교 테니스부휘문고등학교 유도부[20]휘문고등학교 역도부휘문고등학교 레슬링부휘문고등학교 봅슬레이부[21]휘문고등학교 아이스하키부[22]
8.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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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9.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9.1. 버스
- 학교 앞: 143, 350, 2413, 2416, 3422, 4425
- 영동대로 쪽: 343, 401, 4318, 4319, 강남01, 강남06, 11-3, 500-2, 6900, 9407, 9507, 9607
- 대치사거리 정류장: 2415, 3011, 3411
- 포스코사거리 정류장: 강남07, 강남08
- 한국무역센터/삼성역 정류장: 146, 333, 341, 360, 740, 1100(신사역-마석), 1700, 2000(강남역-광릉내), 3411, 7007, 8001, 9303, G3202, M6450
9.2. 철도
10. 기타
- 여운형이 8.15 광복 때 사람들에게 요청받고 연설한 곳이다.
- 설립자 민영휘는 풍문여자고등학교의 설립자인 안유풍의 남편이다.[23]
- 설립자가 친일반민족행위자라 학교 또한 친일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절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연구회의 본진 이었고, 독립운동이나 학생운동 참가도 많이 했다. 주시경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11년간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 간송[24], 월탄, 여초와 같은 시설에 붙어있는 이름들은 휘문 출신 인물들의 호다.
- 옛날에는 현재 대명중학교 부지랑 학교 건너편에 있는 노란색 공기업 건물[25]까지 학교 부지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 노란색 공기업 건물 자리는 옛날에 휘문고 테니스장이었다고 한다. 현재 학교 부지의 건물은 글로벌홀을 제외하고 총 7개다.
-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본관 건물의 벽 절반 이상이 담쟁이넝쿨로 덮여있다. 겨울엔 잎이 없어서 모르지만 봄, 여름, 가을에 보면 매우 예쁘다.[26]
- 유명한 전현직 교직원으로 주시경[27], 기상호, 손은정이 있다.
- 건국대 사태 당시 최루가스가 당시 허허벌판이던 강남구를 넘어 휘문고까지 흘러들어왔다.
- 2006년 8월, 르브론 제임스가 비타 500 월드바스켓볼 챌린지 2006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하면서 휘문고 대운동장 동남쪽 모서리 지역에 설치한 농구코트 증정기념으로 백보드 사인과 핸드프린팅 기념비 증정, 학생들과 3:3 경기를 진행하였다.# 현재는 W타워가 해당 부지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 2014년 마리아노 리베라가 방문했다. 음향기기회사 JBL홍보모델 차 방문했지만, 한국JBL사장과 휘문고 이사장이 연세대 야구부를 통해 알던 사이었고[28] 그래서 휘문고 이사장이 JBL사장에게 리베라 방한시 여유시간이 있다면 휘문고에 방문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질문시간때 첫 번째로 나온 질문이 '두유 노 김치'였다.
- 2015년부터 모든 이과 2학년들에게 물리Ⅱ를 강제로 듣게 해서 학생들이 뒤집어졌다. 잠깐 대신 화학Ⅱ를 배우는 대안도 논의되어 신청까지 했지만 엎어지고 고2 2학기부터 진도를 나갔다. 결국 2017년까지만 2학년이 물리Ⅱ를 배우게 되었다. [29]
- 2015년 4월 식당 앞 게시판에 세월호 1주기 관련 포스터가 붙었다. 여기까진 별 일이 아니나 다음날 그 포스터 아래에 세월호 단원고 유가족들의 대리기사 폭행사건 관련 프린트가 나붙었다. 다음날 둘 다 뜯겨나갔다.[30]
- 2016년 개교 110주년을 맞아 본관 전면에 커다란 110주년 기념 현수막을 붙여놨다. 낮에는 저게 뭐다냐 싶지만 밤에 조명을 잘 받으면 웅장하다.[31]
- 2017년 2월 19일 111주년 휘문문화예술제가 열렸다. 남산에 있는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렸는데 휘문 사십몇기 출신의 백발의 어르신들부터 현재 111기인 재학생들까지 다양한 연령,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볼 수 있었다.
- 학교에서 정기고사 등 교실 안내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휘문중을학교를 포함한 학교 전경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옛날에 재학생이 만든 것이다.[32]
- 에어컨과 히터가 엄청나게 잘 나와서 여름엔 춥고 겨울엔 덥다. 여름에 잠바나 가디건을 들고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중앙관리시스템이라서 행정실에서 틀어주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 교내에서 핸드폰 및 전자기기 소지 및 사용이 가능했다. 전자기기 규정이 없었던 2025년 기준 고3 (118기)는 한정적으로 교육 목적의 태블릿 사용이 가능하다.
- 내신을 따기가 굉장히 어려워 재수 비율이 매우 높은데, 하필 휘문고 앞에 종로학원이 있어 휘문고는 사실 4년제라는 드립이 있다(...)
- 수학은 그 강남 8학군에서도 등급을 따기가 매우 어려운 편이다. 기출을 풀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문제들이 정말 상상 이상으로 더러운 경우가 많다. 발상 자체가 매우 힘든 문제도 물론 있지만, 분명 풀이 방법을 알 것 같기는 한데 경우의 수가 너무 많거나 발상이 전혀 없고 엄청나게 긴 계산 노가다를 해야 하거나, 숫자가 떨어지지 않고 분수로 나오는 경우[33] 등이 부지기수. 실제로 해설지를 보면 한 문제가 한 페이지를 꽉 채우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휘문고 교사진들은 50분 내에 다 푼다...
본인들이 출제하고 푸는거니까 - 졸업생 출신 교원이 꽤 계신다. 선생님 학교 다니실 때 선생님이셨던 선생님에 관한 썰을 아주 맛깔나게 들을 수 있다. 이는 장기근속하시는 선생님이 많은 편에 속하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 나 다닐때는 하키채로 맞았는데 너무 분해서 나도 때리고 싶은 거야, 그래서 교사가 됐는데 이제 체벌이 안 된다네요 - 박현도의 말에 따르면 체벌이 횡행하던 시기, 교사들이 아이스하키부가 다 쓴 하키 스틱으로 체벌을 했다고 한다. #[34]
- 최근 야구계에서는 NC 다이노스 소속 내야수 박민우의 휘문고 부심 폭발 초장문 주접이 밈으로 자리잡았다. 어느 정도냐면 NC팬이 아니더라도 해당 밈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일명 휘랄.
야휘문이란말이지강남8학군노른자땅으로해당 영상 심지어 유튜브에 '휘문'만 검색해도 박민우의 영상이 상위권에 뜰 정도이다. 덕분에 휘문고는 야구 팬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고등학교가 되었다(...)
11. 관련 문헌
- 휘문 칠십년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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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4년 9월 12일 광성의숙[기준] 2025년[기준] 2025년[4] 현대 표준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Hwimun High School'이 맞지만, 영문 표기가 정확히 정립되지 않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표기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영문대로 읽으면 '위문고등학교'라고 읽을 수 있지만 이 학교가 1906년에 개교했음을 감안하면 당시의 'Wh' 발음은 실제로도 '휘'였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맞는 표기였다. 때문에 휘문고등학교의 모든 운동팀이나 단체 이니셜이 W이다.[5] 중구 소재 이화여고나 여의도 소재 여의도고 등은 언론사가 그냥 회사에서 가까운 학교에서 찍은 거라면 휘문고는 강남 8학군을 대표하는 학교로서 출연하는 것이다.[6] 민영휘의 사저 중 일부를 활용하여 인근 학동 6~7명을 대상으로 교육하면서 시작되었다. 1905년 8월 광성 의숙은 학부로부터 정식 사립 학교 설립 인허를 받았고 그 해 11월에 상과(商科)와 야학(夜學)이 개설되면서 주⋅야간 숙생(塾生)이 70여 명에 이르렀다. 학생이 늘어남에 따라 광성의숙은 1906년 4월 학부에 청원하여 관상감(觀象監) 터를 얻어서 새로운 숙사(塾舍)를 세우고 1906년 11월 13일에 개숙식을 열었다.[7] 한국 최초의 3층 건물[8] 그가 기증한 토지는 약 24,000평 규모였는데, 현 휘문고 부지는 16,000평 정도이다. 이 차이는 친일파 재산 환수 과정 등에서 생겼다고 한다. 없어진 8,000평에는 현 대명중학교 부지와 포르쉐 코리아 사옥 등이 포함된다.[9] '휘문의숙'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시점부터 100년이다.[10] W타워가 없어 대운동장이 더 넓었다. 여담으로 네이버 지도에서 2010년 2월의 거리뷰를 보면 W타워가 없는 그때 그시절 휘문고를 볼 수 있다.[11] 개교기념식 등 대부분 행사에서는 2절까지만 부른다. (2025년 기준)[12] '-재'는 고개를 지칭하는 순우리말이며(e.g., 문경새재) 원래 이곳에는 조선 시대의 천문 기관 관상감의 천문대인 관천대가 위치하였고, '하늘을 보는 고개'라는 뜻에서 '볼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13] '잘 집'이란 아주 많은 집을 말한다. #[14] 그나마 알려진 4분의 5박자 곡으로는 데이브 브루벡의 Take Five, 미션 임파서블 메인 테마곡, 양방언의 Frontier!가 있는데, 미션 임파서블 테마곡과 Frontier! 두 곡은 6/8+2/4로 쪼갤 수 있어 순수한 5박자 곡은 아니다. 순수한 5박 계열의 곡으로는 프레데리크 쇼팽의 습작 피아노 소나타 1번(Op. 4) 3악장과 에이토르 빌라로부스의 "야만적인 시(Rudepoêma)" 최후반부 일부를 꼽을 수 있다(사실 후자는 변박이 수시로 일어나 전반적으로 어느 박자라고 꼽을 수는 없다).[15] 음악 시간에 배우는 교가는 4분의 5박자를 4분의 4박자로 잘라 바꾼 것이라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 부분이 살짝 어색하다.[16] 휘문중학교와 교복이 거의 같다. 구분하는 방법은 왼쪽 가슴 부분의 휘장의 글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휘문고는 한자 '徽'를, 휘문중은 한글 '휘'를 사용한다. 아니면 동복의 경우 착용한 넥타이를 보면 된다. 군청색 계열의 줄무늬가 있는 것은 같으나 휘문고는 노란색과 군청색 줄무늬고, 휘문중은 와인색과 군청색 줄무늬다.[17] 2024년까지는 교복은 아니지만, 한자 徽가 인쇄된 반팔티, 반바지, 바지, 후드집업, 패딩 등이 있어 교복 대용 역할을 하였었다. 2025년에 교복이 아니지만 여름철에 입고 생활할 수 있는 새로운 반바지가 제작되었다.[18] 맥심에서 스포츠 명문고 농구부분 1위로 2008년에 선정된 적 있다.[19] 1914년 창단하여 1921년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 참가 그리고 1922년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하며 초창기 고등학교 축구의 선두 주자였다. 해방 후까지 존속하였지만高校蹴球(고교축구)어제와오늘 힘껏차고달린 半世紀(반세기) 한국전쟁 이후 고등학교 축구부는 해체되고 중학교 축구부만 운영하다 이 역시 1950년대에 해체된것으로 추정된다.[20] 1922년 창단되어 배재, 보성, 중동, 경신, 양정 등의 학교와 일제강점기 한국유도 발전에 일조하였으나 이후 해체되었다.[21] 2009~2016년 대한민국 초·중·고·대학교 중 1번째로 봅슬레이부를 창단, 운영하였었다.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갔다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2016년 폐부되었다.[22] 2002년 해체되었으며, 해체 이유는 성적부진이라고 한다.[23] 정확히는 민영휘의 증손인 민덕기가 1944년 안유풍에서 이름을 따서 설립.[24] 간송 전형필 선생 맞다.[25] 리모델링하여 이제는 회색이다.[26] 가을에 보면 거의 옥상까지 덮여있다[27] 요즘말로 말하면 스타강사 같은 위치라 당시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학교에서 강의했었다.[28] 평소 휘문고등학교 야구부가 연세대학교 야구부로 많이 진학했고, 연세대 출신인 JBL사장도 연세대 야구부에 관심이 많아 이사장과 서로 알게 됐다고[29] 라고 했으나 2018년까지 배웠다. 2017년 입학생[30] 참고로 대리기사 폭행사건은 세월호가족대책위원회 김병권 전 위원장과 김형기 전 수석부위원장에 대해서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120시간의 사회봉사를,이용기 전 장례지원분과 간사는 벌금 100만원을, 한상철 전 대외협력분과 부위원장과 김현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무죄#를 받았으며, 박근혜 정부 당시 비서실장이던 김기춘이 수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31] 2년 후인 2018년까지 붙어있었다.[32] 자세한 내용은 진로선생님이 풀어주시는 썰에서 나온다.[33] 그것도 나름 깔끔한 12, 25 이런 숫자들이 아니라 37, 59 같은 현기증나는 숫자들이 많다.[34] 물론 당시에는 사형선고 및 신속 집행이 당연했고, 경찰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잡아가 고문하거나, 심지어 군인까지 동원해 통제하는 등 공권력 남용이 최고치였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