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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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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대한민국의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
全鎣弼
파일:간송_전형필.png
성명 전형필(全鎣弼)
출생 1906년 7월 29일
한성부 동서 연화방 중로계 이현[1]
사망 1962년 1월 26일 (향년 55세)
서울특별시
본관 정선 전씨[2]
천뢰(天賚)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 옥정연재(玉井硏齋)
학력 어의동공립보통학교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법학 / 학사)
직업 교육자, 문화재 수집가, 문화재 보존가, 저술가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간송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한국 미술사를 거론할 수 없다.[3]

한국의 교육자이자 문화재 수집가.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간송(澗松).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 등을 수집해서 이 땅에 남긴 인물.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에 위치한 간송미술관은 전형필이 1938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인 박물관이다.

2. 생애

1906년 7월 29일 한성부 동서 연화방 중로계 이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4가)에서 10만석 지기인 아버지 전영기(全泳基, 1865 ~ 1929)[4]와 어머니 밀양 박씨[5] 사이의 2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전계훈(全啓勳, 1812 ~ 1890)은 본래 교서관(校書館:경서와 역사서 등의 인쇄 및 반포를 관장하는 관서)의 수장제원(守欌諸員)으로 근무하다가, 1872년 창덕궁 위장(昌德宮 衛將)·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877년 정3품 오위장(五衛將), 1885년 종2품 경상도 중군(慶尙道 中軍) 등을 지냈다. 작은아버지 전명기(全命基, 1870 ~ 1919)는 한성부의 가관(假官)을 전전하다가 1888년 종4품 부호군(副護軍), 1898년 경기관찰부 주사(京畿觀察府主事), 1906년 풍경궁 참서관(豊慶宮參書官) 등을 역임했다.

그는 이후 작은아버지이자 당숙[6]인 전명기에 입양되었지만, 99칸 한 집[7]에서 양부모와 양조부모까지 사는 관계로 양육은 그대로 친부모가 맡았다.[8] 이 배경으로 훗날 양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하늘이 내린 백만장자, 어쩌면 억만장자가 되는데 전형필이 막대한 양의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24살 때 이러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9]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서울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라 잃은 백성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어라"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만 평생의 스승 위창 오세창[10]을 만나며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일세."

전형필은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오세창이 건넨 '근역화휘'와 '근역서화징'으로 문화재를 감식하는 눈을 기른다.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를 시작으로 본격 우리 문화 유산을 수집하는 데 헌신한다. 전형필은 1900년대 초부터 일본인들의 손에 흘러 들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우리의 문화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 붓기 시작한다. 고서화 수집의 전진 기지로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이후 고려 청자, 조선 백자, 돌로 만든 탑과 부도, 금동여래입상 등 보기 좋은 예술품을 지켜낸 것이 아닌 예술적 가치를 넘어선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혼을 지켜낸 것이다. 고려 청자의 대표작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국보 제270호) 등은 모두 전형필이 일본으로 팔려갈 뻔한 것을 거액을 주고 사들여 지켜낸 작품들이다.

1938년 서울 한복판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며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중 하나인 간송미술관이 세워진 것은 전형필에 의해서다. 설립 당시 오세창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이라고 이름붙였다.

1940년대 일제조선어 사용 금지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등 민족 말살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6월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판매자가 천 원이라고 했지만 귀한 물건은 제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집 10채 값인 만 원을 주고 천 원[11]은 수고비로 주며 사들였고 한국 전쟁 때는 몸에서 떼지 않은 채 지켜[12]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귀한 것을 귀하게 보는 눈으로 먼 미래까지 보며 내 나라를 지켜낼 방법을 알았던 전형필이기에 기와집 400채 값으로 영국인 존 개츠비에게 고려 청자와 조선 청화백자 20점을 사고[13][14]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 문화재 특히 혜원 신윤복의 그림 '혜원 전신첩'을 찾아온다. 1945년 광복이 되어서도 '고적 보존 위원'으로 피촉되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정리해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느라 박물관 개관은 뒤로 미룬다.

6.25 전쟁 때 북한군들이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등 국보급 문화재를 포장할 것을 명령해 강탈당할 위기를 맞았으나, 문화재들을 일부러 늦게 포장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유물들을 평양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포장하라고 협박했는데, 북한군의 선전으로 인해 경계가 다소 약해진 것과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적은 점들을 이용해서 문화재 포장을 지연시켰다고 한다. 당시 전형필은 모처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등 가장 중요한 문화재 몇 점만 간신히 들고 은신하면서 지냈고 전형필이 소장한 문화재들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던 최순우[15], 손재형 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미 포장한 유물들도 이런저런 이유들을 갖다 붙이면서 다시 꺼냈다 포장하기를 반복하고 문화재를 나무 궤짝에 담아야 한다며 궤짝이 제작되기까지 시간을 끌었다고 하며 심지어 어느날은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면서까지 시간을 끌었으며 허구한 날 북한군에게 화이트 홀스 위스키우키요에, 춘화도를 주면서 경계심을 풀게 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의도를 들키고 말았으나 3일 만에 서울이 탈환되면서 북한군들은 결국 문화재를 챙기지 못한 채 헐레벌떡 평양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다만 1.4후퇴 때는 어쩔 수 없이 적지 않은 소장품들을 놔둔 채 피난을 가야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적지 않은 유물들이 도난당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전형필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자 전형필 본인보다 먼저 소장품들이 부산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풀려서 골동품상에 팔리고 있기도 했다고.

1953년 휴전 후 남은 소장품들을 정리하며 미술학자들과 함께 보다 규모있는 박물관을 구상하였고, 아버지의 유언으로 현재 서울의 보성중학교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육 사업도 하였지만[16] 1959년 엄청난 재정 사고가 발생해 그 빚을 갚기 위해 가족들까지도 극심한 쪼들림에 시달려야 했다. 재단에서 빚을 갚지 못해 학생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며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아 돈을 댔다. 사실 서화와 도자기 몇 점만 팔았어도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았겠지만 전형필은 끝까지 자신의 문화재 수장품들을 지켜낸다.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재단의 빚을 모두 갚은 후 갑작스레 들이닥친 병마인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져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하다 1962년 자택에서 향년 55세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보성중고등학교 교정에서 영결식을 행하였으며, 장지는 양주군 노해면 원당리의 집안 선산이다. 행정구역이 바뀐 현재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431번지이다.

이후 보성중고등학교 재단법인 '동성학원'의 이사장직은 전형필의 후손들이 맡고 있다. 그 뒤 후손들은 선친 전형필의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 1966년 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이를 중심으로 간송 전형필 수집품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와 학문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971년 가을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품 전시회를 연다. 2018년 4월 6일 사망한 전성우 이후 새로 취임한 전인건 둘 다 간송 전형필의 후손이다.

3. 기타

파일:external/t1.daumcdn.net/20121228114618194.jpg

*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선수 및 야구부장으로 활약했다. 참고로, 포지션은 1루수였다. 출처 이때 축구부장 박정휘[17], 미술부장 이마동[18]과 함께 친하게 지내서 '삼총사'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특이하게도 친구들은 자기 적성과 맞게 직업을 가졌는데 전형필은 야구와 관련없는 쪽으로 직업을 가졌다.


[1]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4가 #[2] 채미헌공파 43세 형(鎣) 항렬.[3] 이충렬, 「간송 전형필」(2010)[4] 1925년 12월부터 경기도 경성부 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반도여자학원(半島女子學院)에 매달 100여 원씩 기부하는 등 # 여성교육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5] 소설가 박종화의 고모이다. #[6] 왜 작은아버지이자 당숙이냐면, 전명기 역시 자신의 작은아버지에게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형필에게 전명기는 실제 혈통상으로는 작은아버지이고, 족보상으로는 당숙이 된다.[7] 100칸부터는 왕가의 영역, 즉 궁궐이다. 민간에서는 최고 부자라는 의미[8] 과거 대가족 문화에서는 이런 일이 제법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6촌을 넘어서는 친척들까지도 한 집이나 바로 옆 집에 사는 경우도 흔했다. 이 경우는 한 집에 살면서 호적과 족보만 옮겼다고 보면 된다.[9]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재적 관점으로 보면 전형필이 집안의 유산을 물려받은 건 참으로 다행이지만 전형필 개인 사정으로 보면 딱한 일이었다. 조부모, 삼촌, 부모가 거의 같은 시기에 돌아가시자 물려받을 사람이 없어서 전형필이 가족과 친척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다.[10] 1864년~1953년. 개화 사상가 오경석의 아들이며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예가로 유명하다.[11] 당시 금액을 현재 환율로 보면 만 원은 대략 70억, 천 원은 7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12] 남쪽으로 피난갈 당시 전형필이 직접 품에 안고 걸어갔으며 밤에는 베개 밑에 두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13] 이때 사온 고려 청자와 청화백자 도자기들을 한데 묶어서 이를 먼저 수집했던 "존 개츠비 컬렉션"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현재 원화로 약 1,200억 원.[14] 원래는 22점이었으나 개츠비가 2점은 기념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를 전부 넘겨서 20점이다.[15]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개성에 있었던 고려청자들을 당시 개성에서 벌어지던 남북 간의 교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놔서 한국이 북한보다 고려청자를 더 많이 소장할 수 있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16] 현재 보성중고등학교 중시조 급의 인물로, 지금도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동상이 있다.[17]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18] 훗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역임.[19] 국보 118호[20] 그리고 무장독립운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