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는 조선미전-국전풍 구상 회화를 통해 대내외 활동을 전개하면서, 각각 구미 추상표현주의, 유럽 앵포르멜 미술을 참조한 《회화 No.1-57》(1957?), 《作品 No.18-59》(1959)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무렵 박서보는 김창열, 하인두 등과 반국전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58년에 이르러 이들은 본격적으로 비구상화를 선보이고 비평가 이경성이 이를 “안 ・ 홀멜”(앵포르멜)로 지칭하면서 탈식민적 비평 시공이 창출되었다.[2]
原形質 No. 1-62, 캔버스에 유채 및 복합재료, 161×131cm, 1962.
1961년, 유네스코 산하 국제조형예술협회(IAA) 주최의 ‘세계청년미술가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동안 프랑스에 체류할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브 클랭의 작품과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의 비평적 토대에서 누보 레알리슴 운동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귀국 후 “앙훠르멜은 포화상태”가 되었다고 논평하면서, 이듬해 10월에는 국립화랑도서관에서 ‘원형질전’을 열어 《원형질》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 연작은 사실상 이브 클랭의 작업세계를 립오프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는 그것을 여전히 한국 전쟁 체험을 통해 자생한 앵포르멜 미술 운동의 일환으로 자기개념화 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현대미술의 사조와 미학이 더 적극적으로 수입되자, 박서보는 1968년에 이르러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회화전'에 옵아트를 립오프하는 기하추상화 《유전질》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는 서울의 도시개발 및 한국 앵포르멜 계파 운동의 쇠퇴와 맞물린 극적인 변화였고, 탈식민적 시공간의 미학적 몰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遺傳質 No, 7-69-70, 캔버스에 유채, 90.9×116.5cm, 1970.
그의 《유전질》 시리즈는 기하추상을 립오프 하는 데서 더 나아가(역으로) 근대인의 실루엣을 의사-옵아트적으로 재구성하는, 실존과 환영을 동시에 성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를 “오프아트”(옵아트)로 정의하고 있는데, 계보적으로는 사물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추상과 실재를 유희했던 시즈오카의 겐쇼쿠(幻觸) 그룹-이우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2022년 광주비엔날레에 박서보의 이름을 딴 예술상이 제정되었다가 " ‘광주비엔날레의 국제적 위상’과 오월정신,광주정신을 매판 하는 행위"라는 지역예술계의 비판을 받고 1회만에 폐지되었다.* 당시 지역예술계에서는 "1960~70년대에 지금은 박제된 당시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의 상징적 대표로서, 1960년 4·19혁명에 문화권력의 기회를 엿보고 박정희 정부에 순응하며 기록화 사업에 활발히 가담했으며,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관변미술계의 수장으로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라 외면하고 개인의 출세와 권력 지향과 영달을 위해 살아왔을 뿐이다"라고 비판했다.
[1] 동양화 전공으로 입학했다가 2학년 때 서양화 전공으로 전과했다.[2] 당시 서구/구미의 형식 및 미학은 미군이나 일본 잡지를 통해 피상적으로 수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미술계에서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경향은 동일한 것으로 혼용되었다. 게다가 다다-앵포르멜 경향의 피상적인 이해 탓에, 추상표현주의=앵포르멜 모방을 통한 계파 운동이 곧 반국전적 반예술-전위 운동 비스무리한 것으로 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