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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金英煥 | Kim Young-hwan | |||
<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출생 | 1921년 1월 8일 | ||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 |||
사망 | 1954년 3월 5일 (향년 33세) | ||
강원도 명주군 묵호읍 상공 (現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묵호동 상공)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묘역-58 | ||
본관 | 경주 김씨[1] | ||
호 | 창공(蒼空)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945년 | |||
대한민국 공군 | |||
1945년 ~ 1954년 3월 5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부모 | 아버지 김준원 | |
형제자매 | 형 김정렬 | ||
친인척 | 큰아버지 김기원 | ||
학력 |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졸업) 간사이대학 (법학과 / 중퇴)[2] 일본육군예비사관학교 (졸업) 일본 센다이 육군비행학교 (졸업) | ||
종교 | 불교 | ||
임관 | 군사영어학교 (1기)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특3기) | ||
최종 계급 | 소위 (일본제국 육군) 준장 (대한민국 공군) | ||
상훈 | 충무무공훈장 수훈 미국 비행훈장 수훈 공비토벌기장 수훈 한국전쟁 종군기장 수훈 대통령수장 수훈 을지무공훈장 수훈 유엔종군기장 수훈 미국 공로훈장 수훈 금관문화훈장 추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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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영환 대령의 F-51 205번기 |
2. 생애
일본 간사이대학 법과 재학 중 징집되어 비행훈련을 받았고, 실전에 투입되지 못하고 일본 제국 육군 항공소위로 종전을 맞으면서 소집해제되었다. 즉, 학병 출신이다. 광복 후 조선경비대 정보국장을 거쳐 최용덕, 김정렬 등과 함께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앞장섰다.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2월 15일, 김영환 대령은 공군 제1전투비행단 예하 제10전투비행전대에서 비행단으로 승격된 제10전투비행단의 초대 비행단장이 되었다. 당시 제1전투비행단은 후방에서 조종사 훈련에 전념하고 있었기에 제10전투비행단 단장이 된 김영환 대령은 공군에서 실질적인 전투력을 책임진 지휘관이었다.
김영환 장군이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해인사를 구해낸 작전에서 중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잔당 토벌명령을 받은 김영환 대령은 F-51D 전투기를 몰고 편대원들과 출격, 미군기가 떨어뜨린 연막탄을 보고 폭격을 개시하려 했다. 그런데 그곳이 바로 해인사였기에 전시상황에서의 명령불복종에 따른 즉결처분을 각오하면서 항명해 편대원들에게 폭격을 불허하고, 기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쫓아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덕분에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이 각각 세계기록유산 및 세계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해인사에는 700년을 내려온 우리 민족정신이 어린 문화재가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프랑스가 파리를 살리기 위해[3] 프랑스 전체를 나치에 넘겼고[4], 미국이 문화재를 살리려고 교토를 폭파하지 않은 이유를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5]'교토에 핵을 떨어뜨리면 유일한 일본 본토 교양인들이 없어져 폭격의 의미를 아무도 이해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교토 폭격만큼은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초강수를 두었다. 물론 스팀슨의 고집 이외에도 언젠간 천황이 다시 돌아올 곳'''이라는 정신적 의미가 큰 교토를 쑥밭으로 만들면 안그래도 일억 총특공을 운운하는 일본인들이 눈이 뒤집어져서 덤빌 가능성도 반영이 되었다.]
명령불복종에 대한 문책 당시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말
명령불복종에 대한 문책 당시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말
김영환의 명령불복종에 대노한 이승만은 김영환에게 항의를 하였고 즉결처분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배석하고 있던 공군참모총장 김정렬(김영환의 형)이 팔만대장경의 중요성과 그간의 공적을 역설하여 즉결처분은 모면했다. 2010년에야 문화유산을 지켜낸 공로가 인정되어 고인에게 무공훈장이 아닌 문화훈장 중 최고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후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54년 3월 5일에 행사 참석차 강릉[6]으로 비행기를 몰고 가던 중 악천후로 동해시 인근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순직하였다. 정확히는 실종되었으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순직처리한 것이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에 가묘가 조성되어있다.
3. 기타
- 순직 후 전공을 빼앗길 뻔 했다.# 동료 조종사였던 장지량이 해인사 공습당시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공로는 자신에게 있다고 문화재청 관계자에게 주장한 것이다. 이 방법이 먹혀서 합천군에는 김영환 대신 장지량의 공로로 해인사 장경판전을 지켜냈다는 안내문까지 세워졌으나 김영환의 유족들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적 공방전 끝에 김영환의 공로로 수정되었다.
- 위 문제가 커지자 공군은 2009년 역사자료발굴위원회(위원장 :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를 개최하여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과 문화재청이 발간한 책에 게재된 내용은 오기' 임을 적시하였다.[7] 이외에도 여러 6.25전쟁 참전 조종사들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윤응렬 장군이 장지량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
- 군사영어학교 재학 당시 일본군 출신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그들과 어울려다니며 군맥을 형성했는데, 그중에서도 김영환이 제일 입이 험하고 매우 거칠었다고 한다. 당시 생도 중에는 훗날 중앙정보부장과 대통령비서실장이 되는 김계원도 있었는데 괜히 시비 붙었다 한대 맞을까봐 제대로 대꾸도 못했다고. 김영환과 김계원 둘다 일본군 소위로 종전을 맞았지만 김영환은 일본육군예비사관학교 출신이고, 김계원은 학병으로 징집된 견습사관 출신이다. 정확히는 김영환도 학병으로 징집되어 비행학교로 편입되었다. 그러니 서로 어울리기 힘들었던 것.
- 무모한 면도 있었다. 건국기가 도입되었을 때(L-5 센티넬 정찰기였다는 설도 있다) 김신, 장성환과 더불어 한강다리 밑을 지나는 기행을 선보였다. 또 이화여대를 지날 때마다 저공비행을 하며 여학생들을 놀래켜 민원이 자주 들어오기도 했다. 이게 세간에서도 꽤나 유명 했는 지 공범(...)인 김신의 경우 전후 꼬마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정말로 비행기를 타고 한강다리 밑을 통과했다는 게 사실이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때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자 김영환의 형인 김정렬은 자꾸 그러면 영창 보낸다며 으르렁거렸으며 실제로도 몇번 보내버렸다고도 전해진다. 이는 김정렬의 부인 이희재 여사(1920~2012)의 증언. 참고로 이희재 여사는 김영환과는 사실상 동갑이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잔당 토벌을 위해 공습 임무를 수행하던 중 대공사격에 피격되어 섬진강 강변에 불시착하게 되자, 강으로 뛰어들어 수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8]
- 대한민국 공군 파일럿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와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김영환이 형수를 만나러 왔다가 형수의 붉은 색 치마를 보고 “그 치마 천 남았으면 나 마후라 하나 만들어 줘요! 조종복에 잘 어울리겠는걸!” 하며 잘라갔다는 설도 있고, 비행 중 전투나 불의의 사고로 착륙하게 되면 가장 눈에 잘 띄는 색깔이라고 판단하고 시장에서 빨간 인조견을 구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으로 김영환 본인이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에 열광했기 때문에 빨간 마후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영환은 리히트호펜이 쓰던 것과 비슷한 빨간 모자와 부츠를 신고 다녀 '멋쟁이 바론'이라고 불렸다.
4. 매체에서의 김영환
서프라이즈 2013년 9월 29일 방송분에서 해인사와 장경판전 관련 내용을 다루었다.5. 관련 문서
[1] 상촌공파 20세손 '렬(烈)'자 항렬을 써서 원래 이름이 김영렬(金英烈)이나 나중에 김영환(金英煥)으로 개명했다.[2] 일본군 육군으로 징집되면서 중퇴[3] 이미 앞서 나치 독일은 항복을 거부한 바르샤바에 무차별 폭격을 날렸다. 20세기 바르샤바는 동유럽의 파리라고 불리었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1939년 바르샤바 폭격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이를 본 프랑스는 파리가 전상으로 파괴 될것을 우려하여 비무장도시로 선언하고 독일에게 순순히 넘겨주었다. 훗날 연합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히틀러는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디트리히 폰 콜티츠 군정장관이 인류의 죄인이 될 수 없다며 거부하고 파리를 온전히 연합군에게 넘겨주었다.[4] 약간 사실과 다른 부분으로 파리 비무장 도시 선언은 6월 10일이었고 파리 함락은 6월 14일, 패탱의 항복 선언은 6월 17일이었다.[5] 다른 지역도 문화재가 많은데 다른 곳은 쑥대밭이 되었고 교토는 문화재 보호라는 이유로 폭격을 못하게 된건 미 육군부 장관 핸리 스팀슨의 교토 사랑에서 나왔다. 핸리 스팀슨은 미국 요직자 중 드물게 일본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때 교토의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신혼 여행도 교토로 다녀 왔을 정도로 교토를 좋아했고 자신의 신혼여행지가 사라지는게 싫어서 일본 본토폭격 동안 커티스 르메이와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그로브스 장군은 주야장 교토를 폭격하게 해달라고 징징거렸지만 스팀슨은[6] 당시 제10전투비행단의 기지가 있었다.[7] 김덕수. 항공징비록. 21세기 북스. 2017. pp. 254-261[8] 당시 함께 출격했던 조종사인 김두만 공군참모총장이 불시착한 그를 엄호하기 위해 공중에서 분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