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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제5대 회장 조선일보 제11대 사장 방우영 方又榮 | Bang Woo-young | |
<colbgcolor=#ed333b> 출생 | 1928년 1월 22일[1] |
평안북도 정주군 | |
사망 | 2016년 5월 8일 (향년 88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 |
장지 |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선영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호 | 일민(逸民)[2] |
본관 | 온양 방씨[3] |
가족 | 친조부 방응곤, 양조부 방응모 |
아버지 방재윤, 형 방일영 | |
배우자 이선영(1937년생) | |
장녀 방혜성(1960년생) 차녀 방윤미(1961년생) 삼녀 방혜신(1965년생) 장남 방성훈(1973년생)[4] | |
학력 | 정주 조일심상고등소학교 (졸업) 경신고등학교 (졸업 / 41회) 연희대학교 상과대학 (상학 / 학사) |
종교 | 개신교(장로회)[5]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 기업가.2. 평가
방응모[6]의 손자로, 1964년부터 1993년까지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방우영은 박정희 독재권력에 저항하던 젊은 기자들이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때 이들을 파면한 장본인이다. 유신독재가 끝나는 순간까지 박정희를 미화하고 찬양했다.12.12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결성한 입법기구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의원으로 참여 했다. 전국지 규모의 언론사 사주로선 유일했다.[7]
5.18 민주화운동 당시 보도를 통해 광주시민들을 난동자, 불순분자, 극렬분자, 폭도, 빨갱이로 매도 했다.
이후 전두환 찬양과 유착으로 조선일보를 고속성장시키고 대한민국 정·관·언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맏형의 별명인 '밤의 대통령'을 물려 받았는데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음란하다고 비웃는 거다.[8]
3. 일생
일제강점기인 1928년 1월 22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아버지 방재윤(方在胤, 1901. 2. 13 ~ 1940. 4. 30)과 어머니 수안 이씨(遂安 李氏) 이성춘(李成春, 1906. 5. 13 ~ 1973. 12. 8)[9] 사이의 3남 2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아버지 방재윤은 본래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方應坤, 1880. 11. 25 ~ 1942. 11. 2)의 차남인데, 당시 아들이 없던 방응모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방우영은 형 방일영과 함께 방응모의 양손자가 됐다. 방응모는 금광사업으로 떼돈을 번 뒤 1932년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된다. 그가 5살이 되던 해였다.
1940년 조일심상고등소학교, 1946년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대학교 상과대학에 들어가 한국 전쟁 직전인 1950년 졸업했다. 이어 1952년 조선일보 공무국 견습생으로 들어가 8년간 사회부, 경제부 기자로 일한 뒤 1960년 조선일보 계열사인 아카데미극장[10][11]#[12]# 대표를 맡았다. 이후 조선일보 상무로 복귀해 발행인, 전무, 대표이사,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1976년부터 14년간 한국언론연구원 비상근 이사장도 겸임했다.
1993년 형 방일영의 장남이자 조카인 방상훈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조선일보 회장이 되었고, 2003년에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2008년 그의 55년 언론계 생활을 정리한 팔순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펴냈다. 83세 되던 2010년에는 조선일보 상임고문으로 추대됐다. 2세 경영이 안착하면서 방우영 일가는 스포츠조선을 받아 분가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1977~1980년까지 학교법인 중앙대학교 이사장, 1980~1981년까지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1981~1997년까지 연세대학교 총동문회장, 1997~2013년까지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장, 2015년부터 동 재단 명예이사장을 각각 지냈다.
2016년 5월 8일 오전 11시 7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4.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조선일보/오너 일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저서
- <조선일보와 45년: 권력과 언론 사이에서> (1999)
-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2008)
6. 수상경력
-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1974)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2)
- 금관문화훈장 (1998)
- 독일 연방정부 1등 십자공로훈장 (2001)
- 조선일보 60년 근속상 (2013)
7. 둘러보기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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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고유섭 미술사학자 | 1980 전봉초 음악가 | 1981 김소월 시인 | 1982 이효석 소설가 | 1982 조지훈 시인 | |
1983 홍승연 언론인 | 1983 천관우 언론인 | 1983 이육사 독립운동가, 시인 | 1984 이원수 아동문학가 | 1984 장발 미술가 | |
1985 강소천 아동문학가 | 1986 홍진기 언론인 | 1987 김남중 언론인 | 1990 모윤숙 시인 | 1990 주시경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 |
1994 김상만 언론인 | 1994 나운영 음악가 | 1994 이숭녕 국어학자 | 1995 공병우 한글연구가 | 1995 김소희 국악인 | |
1995 문신 미술가 | 1995 정명훈 음악가 | 1995 이대원 미술가 | 1995 류경채 미술가 | 1996 송석하 민속학자 | |
1996 신용호 기업인 | 1996 조병화 시인 | 1997 신순남 미술가 | 1997 홍두표 언론인 | 1997 최창봉 언론인 | |
1997 정진숙 출판인 | 1997 고병익 역사학자 | 1998 방우영 언론인 | 1998 김연준 작곡가 | 1999 방일영 언론인 | |
1999 방종현 국어학자 | 1999 김세형 음악가 | 1999 이유태 미술가 | 1999 김흥수 미술가 | 1999 장준하 독립운동가, 언론인 | |
1999 송건호 언론인 | 2000 황순원 소설가 | 2000 백남준 미술가 | 2000 서정주 시인 | 2001 김기창 미술가 | |
2001 김천흥 국악인 | 2001 장우성 미술가 | 2001 김수영 시인 | 2001 최영희 역사학자 | 2002 임권택 영화감독 | |
2002 오지호 미술가 | 2003 박동진 국악인 | 2003 윤석중 아동문학가 | 2004 구상 시인 | 2004 이혜구 음악사학자 | |
2005 박성용 기업인 | 2005 정세영 기업인 | 2006 신상옥 영화감독 | 2006 김동원 연극인 | 2006 차범석 극작가 | |
2006 조남철 바둑기사 | 2007 송도균 언론인 | 2007 노성대 언론인 | 2007 송범 무용가 | 2008 박경리 소설가 | |
2008 이청준 소설가 | 2008 김영랑 시인 | 2009 유현목 영화감독 | 2010 전숙희 수필가 | 2010 앙드레 김 패션 디자이너 | |
2010 김영환 군인, 6.25전쟁기 해인사 폭격명령 거부 | 2011 박완서 소설가 | 2012 지관 해인사 주지 | 2012 이건희 기업인 | 2012 허동수 기업인 | |
2012 김형규 국어학자 | 2013 이우환 미술가 | 2014 호머 헐버트 선교사, 한글 체계화 공헌 및 한글 보급·한글 홍보 공로 | 2014 전형필 문화재수집가 | 2014 이은관 국악인 | |
2016 백성희 연극인 | 2016 임영웅 연극인 | 2017 박맹호 출판인 | 2018 최인훈 소설가 | 2018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 |
2018 정지용 시인 | 2018 황병기 국악인 | 2020 서세옥 미술가 | 2019 김성환 시사만화가, 대표작《고바우 영감》 | 2020 손창근 미술품소장가 | |
2021 윤여정 영화배우 | 2021 이어령 문화부장관, 작가, 정치인 겸 문학평론가 | 2021 박서보 화가 | 2022 송기숙 작가 | 2022 송해 희극인 | |
2022 김우창 문학평론가 | 2022 김지하 시인 | 2022 이정재 배우 | 2022 황동혁 감독 | 2023 이미자 대중음악인 | |
2023 조수미 성악가 | 2023 이미경 기업인 | 2024 이문열 소설가 |
[1] 음력 1927년 12월 30일.[2] 여담으로 조선일보의 평생 경쟁자인 동아일보의 회장이었던 김상만 회장도 호가 일민(一民)이었지만 한자만 달랐다.[3] 판서공파(判書公派) 38세 ○영(榮) 항렬.[4] 스포츠조선 대표이사 부사장[5] https://news.sbs.co.kr/amp/news.amp?news_id=N1003569606&cmd=amp[6] 일제강점기 금광으로 돈을 벌어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해 오늘의 조선일보가 있게 한 인물. 여러 친일 경력을 인정받아 2009년 정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됐다.[7] 방우영이 정상적인 언론사 사주였다면 비판적 보도를 했어야 했다. 오히려 전두환이 대장으로 전역하고 대통령 자리를 꿰찰 무렵, 조선일보는 "人間 全斗煥" 이란 기사를 통해 찬양한다. "... 그가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는 사화정화, 정치풍토의 개선도 그의 구국적 도덕관에서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8] 차라리 맏형은 조봉암부터 박정희까지 좌우를 가리지 않고 품이 넓은 호방함과 대범함이 있는 인물이었는 걸 고려하면 형만한 아우 없다 하겠다.[9] 이은엽(李殷葉)의 딸이다.[10] 1968년까지 조선일보에서 자사 사옥부지에서 운영하던 극장. 60년대 인근의 국제극장, 충무로의 명보극장, 을지로의 국도극장 등과 방화(한국영화)전용관으로 유명했다.[11] 60년대 국내 영화업계는 10대 개봉관 극장-전속 영화사-전속 감독/작가-전속 배우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국제극장-동아흥행-홍성기 감독-김지미, 명보극장-신필름-신상옥 감독-신영균 등의 형태였다. 아카데미극장은 원래 외화상영관이었으나 방화전성시대가 도래하자 1962년 학교법인 한양학원에서 설립한 한양영화공사와 전속을 맺고 방화(한국영화)전용관으로 변모한다. 이후 극동흥업까지 추가되어 주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청춘영화를 개봉했는데, 63년~68년 사이 아카데미 극장의 한국영화 개봉작 125편 중 70%에 달하는 88편의 작품이 신성일 주연작이라 일명 신성일 극장으로 불렸는데, 그 대다수가 한양영화사 또는 극동흥업의 김기덕 감독 작품이다.[12] 신성일의 자서전 내용에 의하면 아예 한양대의 연영과 설립과 영화사 설립이 당시 아카데미 극장의 사장이던 방우영 사장이 한양대 김연준 총장에게 요청해서 이루어졌다고 나온다. 나이차가 있기는 하지만, 김연준과 방우영은 같은 연희전문 선후배 출신이고, 같은 이북 출신이므로 친분이 두터웠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