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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지휘자)

정명훈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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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금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1995년
이름 정명훈
분야 음악
금관문화훈장(1등급)
파일:문화은관.jpg
연도 1974년
이름 정명훈
은관문화훈장(2등급)

파일:시사저널 화이트 로고.svg
2010년대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 문화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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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의 각 해마다 시사저널이 각 분야의 전문가 1000명에 칸타퍼블릭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했으며, 최대 3명까지 중복응답이 가능하였다. 해당 틀에는 1위만 기재함.
<rowcolor=white> 2010 2011 2012 2013 2014
유인촌
정명훈
정명훈 이외수 봉준호 정명훈
<rowcolor=white> 2015 2016 2017 2018 2019
정명훈 조수미 유시민 봉준호
같이 보기: 한국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종합) / 여권 정치인 / 야권 정치인 / 법조인 / 경제인 / 언론인 / 문화예술인 / 연예인 / 스포츠 스타 / 종교인 / 국제 인물 / NGO 지도자 / 잠재력 있는 정치인 / 대통령에 영향력 있는 인물 / 언론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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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143a><colcolor=#fff> 정명훈
鄭明勳 | Myung-whun Chung
파일:정명훈 지휘자.jpg
출생 1953년 1월 22일 ([age(1953-01-22)]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지휘자, 피아니스트
소속 무소속
학력 뉴욕 매네스 음악대학 (졸업)
줄리아드 스쿨 음악원
가족 아버지 정준채
어머니 이원숙
누나 정경화
누나 정명화[1][2]
배우자 구순열
슬하 3남[3]
장인어른 구흥남
병역 예술체육요원
종교 개신교[4]
주요경력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1984~1990)
파리 국립오페라단 음악감독(1989~1994)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 음악감독(1997~2005)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음악감독(2000~2015)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2005~2015)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수석객원지휘자(2012~현재)[5]

1. 개요2. 생애
2.1. 지휘자 경력
3. 역임 직책4. 상훈5. 기타
5.1. 오페라 레퍼토리5.2. 해외 오케스트라와의 내한 기록5.3. 디스코그래피
6. 그 외7. 논란
7.1. 국립 오페라합창단 사건7.2. 고액연봉과 항공권 등 논란7.3. MOM을 통한 갑질7.4. 부인의 서울시향 단장 성추행 무고교사7.5. 부인의 조사 불응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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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지휘자피아니스트.

서울덕수초등학교 재학 중 피아노 공부를 위하여 누나들(정경화, 정명화)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이후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부문 2위로 입상하며 국내에서 화려하게 주목을 받았고 이후 지휘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정명훈은 동양인으로서 36세의 나이에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현 파리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에 취임할 정도로 일찍이 음악적 역량을 인정받은 지휘자이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첼리스트 정명화의 남동생이기도 하며, 셋이서 피아노 3중주단인 '정 트리오' 를 구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2. 생애

한국 전쟁 후반 서울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일곱 살에 서울시립교향악단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 제11번을 협연하면서 신동으로 주목 받았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부산 피난 때 피아노를 트럭으로 실어 갈 만큼 헌신적이었다. 어머니가 명동에서 냉면 가게를 하여 크게 성공했는데 자녀들의 음악 교육을 위해 가게를 팔고 미국 이민을 결정했다. 정명훈은 미국에서 계속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웠고 1967년 시애틀에서 독주회를 개최했다. 1971년 뉴욕매네스 음대에 입학했다. 나디아 라이젠버그에게 피아노를, 칼 밤베르거에게 지휘를 배웠고, 누나 정명화가 스위스의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의 첼로 부문에 참가했을 때 피아노 반주자로 무대에 섰다.

1973년 서독 뮌헨ARD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로 입상했다.

1974년 소련의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스타니슬라프 이고린스키와 공동 2위로 입상했다[6]. 한국인이 큰 콩쿠르에서 2위를 한 것은 처음이라 경사로 여겨졌고 콩쿠르 직후 귀국해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특별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였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직접 훈장을 주었다. 1973년 예술체육요원 제도가 시행된 후 예술계와 체육계를 통틀어 처음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이다.[7]
<colbgcolor=#315288> 대한뉴스에 방영된 귀국 및 연주회 모습
차이콥스키 콩쿠르 결선 연주 中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제1악장 카덴차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후 본격적인 피아니스트 연주 활동을 벌이면서 같은 해 10월 카네기 홀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1975년 영국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했지만 마이클 휴스턴과 공동 5위를 하는 데 그쳤다. 이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일본 순회 공연에 협연자로 동행했고, 장 마르티농[8]과 스타니수아프 스크로바체프스키 등의 지휘자들과도 미국과 일본에서 협연했다.

1975년에 매네스 음악원을 졸업한 직후 전액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뉴욕 줄리아드 스쿨에 입학해 본격적인 지휘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음악원 관현악단과 뉴욕 청소년 관현악단 등을 지휘해 무대 경험도 쌓기 시작했다.

2.1. 지휘자 경력

1978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이끌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어 지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79년 샤를 뒤투아가 지휘한 같은 악단과 함께 차이콥스키 콩쿠르 결선 무대에서 연주했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영국 음반사 데카에 취입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뉴욕 필하모닉,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피츠버그 교향악단,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오케스트라 등을 객원 지휘하며 지휘자로서의 활약을 넓혀나갔다. 1984년 서독으로 거점을 옮겨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스웨덴의 비스(BIS)와 영국의 ASV, 서독의 코흐(Koch) 등에서 예테보리 교향악단과 잉글랜드 노던 신포니아, 자르브뤼켄 방송향 등을 지휘해 닐센모차르트, 쇼스타코비치교향곡, 드보르자크의 현악/관악 세레나데 등의 녹음을 취입하면서 지휘자로서 음반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자르브뤼켄 재임기에는 전임자 한스 첸더의 노선을 따라 기존 레퍼토리 외에 현대음악 작품의 공연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해 헬무트 라헨만의 '먼지(Staub)', 윤이상의 교향곡 3번의 세계 초연을 지휘하기도 했다.

오페라 지휘도 이 시기를 전후해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986년에 파리에서 프로코피예프의 불의 천사로 메이저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고 같은 해에 베르디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뷰했다. 첫 오페라 지휘는 줄리아드 스쿨 재학 시절에 공연한 푸치니나비부인이었고, 그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재단의 도움을 받아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을 지휘하기도 했다.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피렌체 시립 극장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이탈리아 오페라를 자주 공연하기도 했다.

정명훈의 지휘자 경력이 크게 도약한 것은 1989년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9](현 파리 국립오페라) 초대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가 공식 취임도 전에 해임되었고, 정명훈이 차기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클래식 음악 매니아들은 정명훈과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이 얼마나 뛰어난 연주를 하고 있는지 알았지만 대다수 파리 관객은 정명훈이 누군지 몰랐다. 거장 바렌보임[10]의 후임으로 무명의 36세 동양인 지휘자가 임명된 것에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윗선에서 다루기 어려운 바렌보임을 자르고 말 잘 듣는 정명훈을 음악 감독으로 앉혔다고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정명훈은 이전에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을 맡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리허설 시간 배분에 실패하는 등 시행착오를 겪었고 연습 시간에 민감한 단원들이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도이체 그라모폰(이하 DG)과 계약을 맺게 되면서 초기에 좋지 않았던 분위기는 많이 개선되었다. 도이체 그라모폰은 원래 독일계 지휘자 일색의 레이블이었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 정책을 펼치면서 유럽과 함께 3대 음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과 동아시아[11]를 겨냥하여 미국인 레너드 번스타인과 일본인 오자와 세이지를 영입하여 재미를 봤다. 오자와가 필립스로 이적한 후 오자와를 대신할 동양인 지휘자를 물색하던 DG는 바스티유 오페라의 신임 음악감독인 정명훈을 영입하여 아시아 시장과 프랑스 시장을 동시에 겨냥했다. 데뷰 앨범으로 바스티유 오페라 관현악단과 녹음한 비제의 관현악 모음곡이 출반되었다.

1990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후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 지휘자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던 로린 마젤클라우디오 아바도에게 밀려 낙선되자 예정된 스케줄을 모두 취소했다. 이에 정명훈이 로린 마젤의 대역으로 베를린 필에 데뷰하였다.

바스티유 오페라 재임기 오페라 공연을 주로 하며 프랑스 현대음악의 거장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의 작품 연주에도 힘썼다. 이 시기 DG에서 출반된 앨범도 대다수가 메시앙의 관현악 작품을 담고 있다. 메시앙은 생전 정명훈의 지휘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투랑갈릴라 교향곡 같은 경우에는 직접 음반 해설을 집필하기도 했고 말년에 작곡한 '4인을 위한 협주곡' 을 정명훈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바스티유에 있는 동안 플라시도 도밍고를 타이틀 롤로 기용하여 베르디의 오텔로 명반을 남겼다. 90년대 당시 오페라 녹음 관행에 따라 정명훈은 성악진 없이 오케스트라만 지휘하여 녹음했고, 도밍고 등의 성악가들은 별도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여 음반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 감독직을 사임하였다. 음악적인 이유보다는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이유라고 알려져 있다.

몇 년 간 일정한 포스트 없이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1996년 로린 마젤이 취소한 연주회 대타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에 데뷔했다.

1997년 이탈리아 로마의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다. 같은 시기에 아시아 지역 악단 단원들을 비시즌기에 모아 조직하는 페스티벌 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다. 산타체칠리아 외에도 뉴욕 필하모닉,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의 공연에서 객원 지휘자로 무대에 올랐다.

1998년 한국 KBS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에 취임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단원과 경연진 양쪽으로 심각한 불화가 발생하여 취임 한지 불과 두 달 여 만에 사임하였다.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퍼져 있는데, 우선 악단의 기량과 오디션 문제가 주 이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부지휘자 선임 건 또한 주요한 이유라고 한다. 정명훈의 한국 체류 기간 이외에는 악단을 트레이닝할 인물이 없다보니 그 대안으로 정명훈은 한 외국인 지휘자를 부지휘자로 추천했지만 당시 IMF의 여파가 컸던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으로서는 외국인 부지휘자 선임은 비용면에서 큰 무리가 따랐다. 경영진과의 불화 뿐만 아니라 단원들과 의사소통 방식의 문제까지 겹쳤다. 리허설 도중 단원들과 고성과 반말이 오갔다는 소문이 당시에 퍼지기도 했다.

2000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일설에 의하면 2001년 임기를 마치는 샤를 뒤투아의 후임으로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음악 감독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단원 일부가 정명훈의 연습 스타일을 반대했고,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정명훈을 적극적으로 원했기 때문에 후자를 선택했다. 바스티유 시절처럼 메시앙의 관현악 작품 음반을 계속 출시했다. 스트라빈스키라벨, 베토벤, 드보르자크, 무소륵스키 등의 작품도 음반으로 취입했다. 2001년에는 소니CEO이자 신성 일본 교향악단을 흡수해 대규모 악단이 된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단 이사장이었던 오가 노리오의 부탁을 받고 특별 예술 고문에 부임했다.

2005년 한국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 감독 겸 상임 지휘자에 부임하여 2015년까지 재임했다. 한국 관객들은 환호했지만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정명훈 개인의 경력으로는 기세가 살짝 꺾이는 계기가 되었다. 부임 직후 대대적인 오디션을 진행해 전체 단원의 1/3 가량을 교체하면서 타성에 젖어 있었다고 비판받고 있었던 악단의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단원들과의 갈등도 심했지만, 오디션 후 젊고 역량있는 신진 연주자들과 관악 파트의 적극적인 외국인 단원 영입으로 확연히 향상된 연주력을 보여주면서 논란을 잠재웠다. 그리고 2009년에는 DG와 5년에 걸쳐 매년 두 장씩의 앨범을 발매하는 계약을 맺었다.

서울시향 부임 이후 활동 중심이 한국으로 많이 쏠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해외 악단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 것은 아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관현악단인 라 스칼라 필하모닉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정기적으로 지휘했다.[12] 2010년에 도쿄 필에서 퇴임한 뒤 계관 명예 지휘자로 계속 악단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1년에는 빈 국립 가극장(빈 슈타츠오퍼)에 데뷔하여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했다. 2012년부터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가 새로 신설한 수석 객원 지휘자가 되었으며, 서울시향에서 했던 것처럼 해당 악단과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진행하였다.

2010년대 북한과 음악 교류 사업도 추진했다. 추석 연휴 중이던 2011년 9월 12일에 서울시향 행정 직원 두 사람을 대동하고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방북 계획은 이전에도 있었는데, 1990년 여름에 공연 제의를 받았지만 한국 정부의 방북 허가가 나지 않아 무산되었다. 2006년 10월에도 윤이상관현악단을 지휘하러 갈 예정이었지만, 때마침 북한에서 지하 핵실험을 강행하는 바람에 역시 취소되었다. 주로 어린이 음악 교육과 남북 관현악단 교환 공연 등 행정 사안을 논의하기 위한 방문이었고, 일정 중 조선국립교향악단은하수관현악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허설 참관 중에 잠깐 지휘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방북 성과는 이듬해인 2012년에 은하수관현악단의 창단 이래 첫 해외 공연으로 나타났다. 3월 14일에 파리의 살르 플레옐에서 진행된 공연의 2부 순서에서 라디오 프랑스 필과 합동으로 연주한 브람스교향곡 1번과 앙코르 두 곡을 지휘했다.

12년만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다시 초청되어 2013년 10월 18~20일 메시앙의 네 개의 교향 명상 '승천' 과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을 공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무산되었다.[13][14][15] 이후 2014년 5월 8~10일 베를린 필 무대에 13년 만에 다시 출연해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과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지휘했다.

2013년 1월 25일 서울시향과 바그너 음악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공연을 약 세 시간 앞두고 급성 요통이 발병해 급작스럽게 취소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회복한 뒤로는 예정된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7월에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자식들과 손녀를 위해 직접 선곡한 첫 피아노 독주곡집 녹음을 ECM 스탭들과 제작했고, 해당 녹음은 12월 말에 출반되었다. 같은 달 라 페니체 극장으로부터 평생음악상을 수상했다.
2014년 프란츠 벨저-뫼스트(Franz Welser-Möst)가 빈 국립 가극장(Wiener Staatsoper) 음악 감독직에서 중도 사임하면서 34개 공연이 취소되었고, 그 중 12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리골레토(뉴 프로덕션)를 정명훈이 대신 맡게 되면서 지난 2011년 데뷔 공연 이후 처음으로 빈 국립 가극장 무대에 다시 서게 되었다.

2015년 5월 서울시향과 바그너의 '발퀴레'를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연주할 예정이었으나, 공연 한 주 전에 정명훈이 목 디스크 통증을 이유로 연주를 고사하고 대신 지휘자 콘스탄틴 트링크스가 투입되어 연주를 마쳤다. 다행하게도 트링크스가 지휘한 이 날 연주는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 호평이 지배적이었다. 더불어 무대에 긴 시간동안 있어야 하는 오페라 지휘는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서울시향뿐만 아니라 라 스칼라 극장 등에서의 오페라 연주 일정도 취소하였다.

2015년 6월 라디오 프랑스 필에서 상임지휘자로서 마지막 공연을 지휘했다. 연주 이후 정명훈은 악단 최초의 명예 음악감독(Directeur Musical Honore)으로 추대됐다.[16]

2015년 8월 아래에 서술된 일련의 사태로 인해 서울시향 예술감독직을 사임하고, 남은 계약기간 동안은 무보수로 활동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2015년 12월 29일, 결국 서울시향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2016년 이후 스케쥴을 모두 취소하였다.

2016/2017시즌 시작과 함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음악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정명훈의 삼남 정민이 이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선임되었다.

2016년 11월 빈 필의 서울 공연을 지휘했다. 정명훈이 빈 필의 2016 아시아 투어를 이끌었다고 기재되었으나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정명훈은 11월 1일, 2일 양일간 열린 서울 공연 2회만 지휘했으며, 이에 앞서 10월 일본 5개 도시에서 열린 8차례의 빈 필 공연은 모두 주빈 메타가 지휘했다.

서울시향에서 사임한 후 한국에서의 활동이 크게 줄었으나, 2017년 8월 롯데 콘서트홀 개관 1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아시아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는다는 뉴스가 나왔다. 롯데 콘서트홀 측이 아시아 필과 함께 정명훈의 출연을 요청했으나, 정명훈은 아시아 필 대신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를 창단해서 창단 공연을 가졌다.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는 남북한의 연주자들의 합동 공연을 위해 창단했다고 밝혔다. 또한 같은 목적으로 롯데문화재단과 원코리아 유스 오케스트라 창단에 합의했다. 원래 롯데문화재단은 롯데콘서트홀을 개관할 때 사회공헌 및 국내 영재음악인 육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유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겠다고 했었는데, 정명훈을 영입하면서 남북 화합을 기원하는 원 코리아 유스 오케스트라로 목적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1월 1일 라 페니체 극장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기사

2018년 1월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원 코리아 유스 오케스트라 창단공연을 지휘했다. 창단연주회에 앞선 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북한의 불쌍한 사람들과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는데 정치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북한 음악가들과 함께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한광규 롯데문화재단 대표는 일단 상설 오케스트라로 창단된 것은 아니며 "일단 처음 시도되는 것이라 언제까지 하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2018년 3월 8일 이탈리아에서 벤츠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트럭과 부딪히는 교통사고가 나 3월 16일부터 25일까지 라 페니체 극장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던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지휘가 취소되었다. 큰 사고는 아니며, 이미 퇴원했고 2주 정도의 요양 후 복귀가 가능한 상태라고 보도되었다.

2018년 3월 대한민국 정부가 정명훈에게 4월 북한에서 지휘가 가능한지 문의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정부의 이같은 문의에 대해 정명훈은 남북의 화합을 위한 일에 함께 하겠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2018년 4월 27일 예정된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지휘를 건강상의 이유로 취소되었다. 이보르 볼튼(Ivor Bolton)이 정명훈을 대신해 공연을 지휘했다.

2018년 9월 2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남북화합을 위한 평화콘서트를 지휘했다. 남북 평화 기원하는 의미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을 선곡했다고 밝혔다.북한 성악가가 협연할 예정이라고 보도되었으나, 결국 불발되었다.

2018∼2019시즌 라 페니체 극장의 개막작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를 지휘했다.

2018년 12월 6~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도이치 그라모폰(DG) 120주년 기념 갈라 콘서트'를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5일전인 1일 이를 취소하였다. 비행기 탑승을 비롯해 일체의 여행을 삼가라는 주치의의 권고를 듣고 현재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정명훈을 대신해 리오넬 브랑기에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

2019년 1월 1일 라 페니체 극장의 신년음악회를 2년 연속 지휘했다.

2019년 8월 18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의 세번째 공연을 지휘할 예정이다. 1부인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의 협연자가 공연 17일 전까지도 공지되지 않아 본인이 직접 연주한다, 김선욱이 오는게 아니냐, 새로 발굴한 피아니스트다 말이 많았지만 공연장에서 정명훈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북한에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있어서 협연자로 섭외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소속사 권유로 정명훈 본인이 직접 피아노 협연자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2019년 8월 21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교보 노블리에 콘서트’에서 19년만에 부산시향을 지휘했다.

2019년 9월 19일 전남 순천에서 열린 제4회 순천만국제교향악축제에서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2019년 9월 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한국-싱가포르 투어를 지휘했다.[17]

2019년 10월 16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교보 노블리에 콘서트'에서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2019년 12월 14일 포항 효자아트홀에서 포스코의 송년음악회인 ‘기업시민 POSCO 문화콘서트’에서 연주했다.

2020년 라 페니체 극장의 신년음악회 지휘를 3연 연속 맡게 되었다.

2020년 1월 4일, 5일 이틀간 대원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신년음악회에서 서울시향 지휘를 맡는다. 협연자는 클라라 주미 강

2020년 3월 7일 예정된 이탈리아 피렌체의 마지오 뮤지칼레 피오렌티노 오케스트라 공연을 취소했다. 정명훈은 2월 19~23일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오페라 ‘카르멘’을 지휘하고 이탈리아로 귀국한 후 코로나19 우려로 증상은 없지만 2주간 자가격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5일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협연자로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롯데문화재단 주최로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하며, 베토벤 교향곡 5번과 함께 임윤찬 피아니스트와의 협연곡으로 피아노 협주곡 5번을 연주할 예정이다.

2023년 11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을 이끌고 임윤찬, 클라라 주미 강과 협연해 7회에 걸쳐 내한공연을 지휘했다. 이런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정명훈 지휘로 7회나 연주하는 것도 놀랍지만 더 대단한것은 뮌헨필이 월드투어가 아닌 오직 한국만을 위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악단의 정명훈에 대한 존경심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악단이 한국 시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024년 7월에 피에타리 잉키넨에 이어 차기 KBS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에 내정되어 2025년 부터 지휘봉을 잡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무려 27년만에 KBS 교향악단으로의 복귀이다. # 그러나 2024년 12월 5일 발표된 KBS 교향악단의 2025년 공연 프로그램에 의하면 음악감독 선임은 무산되었고 대신 계관지휘자 자격으로 4회의 정기연주회와 3회의 기획연주회를 지휘하기로 했다. 자세한 이유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건강상의 사유 혹은 일정문제로 추정된다.

3. 역임 직책

4. 상훈

5. 기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는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비관적이고 까탈스러운 성격이었다. 물론 차이콥스키 콩쿠르 같은 경우 자신도 인상적인 경험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지만, 5위 입상에 그친 리즈 콩쿠르 같은 경우에는 '연습이 부족했다' 면서 자신의 경력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논조의 인터뷰도 한 바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또 결혼한 뒤로 인자하고 여유로운 성품으로 바뀌었다고 술회했다. 환골탈태한 성품 덕분인지 자선음악회를 자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유니세프의 국제 대사로 마약퇴치와 청소년 구호 및 교육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2008년에는 태안 반도 기름유출사고의 구호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관련기사 서울시향의 희망드림 콘서트

지휘 활동에 매진하게 된 이후로는 피아니스트 활동이 매우 뜸해졌다. 그나마도 1979년에 녹음한 데카 음반차이코프스키 피협 1번과 1990년대 중반에 정트리오 멤버로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겸해 DG에 녹음한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 같은 협주곡들, 정트리오 멤버로 데카와 EMI에 취입한 베토벤과 멘델스존, 브람스,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3중주곡들 같은 실내악들, 누나 정명화와 녹음한 첼로 소품집, 이탈리아의 메조 소프라노 가수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독창곡집인 '사랑의 노래' (데카)나 한국 베이스 가수 연광철슈베르트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공연 실황 앨범(소니 뮤직 코리아) 같은 가곡 반주 음반들 정도가 정명훈이 피아니스트로 남긴 몇 안되는 기록물이었다.

하지만 만 60세를 맞이한 2013년에 상술한 대로 ECM에 첫 독주곡집을 취입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 첫 단독 앨범을 내놓았다. 2014년 6월 일본에서 첫 독주곡집 쇼케이스를 가졌고, 대전, 대구, 창원, 고양, 서울 에서는 30여 년 만의 단독 리사이틀 일정이 잡혀 있기도 하다. 일본 쇼케이스에서의 인터뷰에 따르면, ECM에서 두 번째 독주곡집 녹음을 제의받은 상태라고 한다. 결국 2014년 11월 첫 독주곡집 녹음을 했던 이탈리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두번째 독주곡집 녹음을 하기로 확정되었다. 레이블은 역시 ECM...이었으나 목 디스크 악화로 무기한 연기 되었다. 물론 수준급 피아니스트로 여전히 그의 연주력이 상당히 훌륭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지만 독주자로서의 활동기간이 매우 짧았고 거의 오랫동안 지휘에 전념하였던 터라 연주의 완성도에 회의를 갖는 이들도 적지 않다. ECM 레이블과의 솔로 녹음은 중단되었지만 최근 고양 아람누리에서 서울시향과 브람스 교향곡 4번, 브람스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소품을 녹음 하였다.

2015년을 전후로 잠깐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했을 때 연주를 보면 쇼팽 등에서 클라이맥스에서 연주와 무관하게 왼발로 크게 바닥을 차며 효과음을 넣는 경우가 있다. 80~90년대에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명성을 날렸던 스타니슬라프 부닌 등이 이런 방법을 임팩트있게 사용한 바 있다.

자신은 세간의 비평에 별로 신경쓰지 않으며 자신의 연주에 대한 평론 기사조차도 잘 읽어보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자기가 지휘한 음반도 잘 안 듣는다고 한다. 자신이 연주한 실황 음원이나 음반을 들으면 몸이 아플 정도라고.

음악적으로는 악보에 충실하며 열정적인 박력과 섬세한 서정미를 잘 살린다는 평이다. 지긋한 연배와 경력에도 불구하고 10~20대의 젊은 연주자들과 협연하기를 즐기며 악단 단원 선발 오디션에서도 젊은 연주자들을 선호하는 경향이다. 리허설은 기대 수준도 높고 연습 강도도 몹시 강해서 단원들이 인간적으로는 존경하지만 리허설 때는 매우 힘들어한다는 말도 있다. 일본의 음악 잡지 '음악의 벗' 에서는 사이먼 래틀, 발레리 게르기에프와 함께 앞으로를 이끌어나갈 3대 지휘자로 뽑히기도 하였다.

일본 비평계에서도 호의적인 평을 많이 받는 보기 드문 한국 음악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라 스칼라 필하모닉,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같은 세계 각지의 관현악단들과 일본 순회 공연을 하며 일본에 주기적으로 얼굴을 비췄다. 또 일종의 명예직이기는 했지만 통합으로 진통을 겪고 있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특별 예술고문을 맡아 주기적으로 지휘하기도 했다. 베를린 필 악장인 카시모토 다이신과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 최연소 1위 입상자로 유명한 쇼지 사야카 등의 일본 연주자들과도 자주 협연하거나 녹음을 하는 등의 협업이 많은 점도 이러한 평가에 일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나루히토 천황과도 기회가 될 때 실내악 협연을 하는 등 이벤트 공연을 진행한 것도 일본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DG와는 서울시향의 음반을 계속 출반하고 있고 일본 음반사들과도 음반 제작을 하고 있다. 킹레코드에서는 NHK 교향악단 실황 시리즈 중 베르디의 레퀴엠이 포함되었고 엑스톤에서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취입한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발매했다. 도쿄 필 특별 예술 고문 취임 후 2002~2004년 동안 진행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 실황도 녹음되어 IMX 클래식스라는 음반사에서 여섯 장의 CD 세트로 발매되었는데, 이게 현재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정명훈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기도 하다.

2015년 10월 도쿄 산토리홀이 주최하는 "스페셜 스테이지 2015"의 아티스트로 선정 되어 서울시향과 도쿄 필하모닉을 번갈아 지휘했고 피아노 솔로, 실내악, 지휘 마스터클래스를 완수하였다.

2017년 5월 라스칼라필 연주로 이탈리아에서 열린 G7 정상회담 개막 축하공연을 지휘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 지휘자들을 제치고 지휘를 맡은 점, 공연 직전 내정돼있던 것으로 알려졌던 지휘자를 대체해 지휘한 점 등으로 미뤄 정치적 역학관계가 영향을 끼쳤다는 추측이 있다. 연주는 대체로 무난했다는 평.

2020년 1월 서울 시향에서 명예감독 추대론이 나왔지만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 무고사건으로 인해 과거와 달리 이미지에 크게 치명타를 입은데다 정명훈 본인의 부인인 구순열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구순열이 경찰조사는 물론 검찰조사에도 불응하면서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명예감독 추대는 흐지부지 된다. 대신 이 논란에 알지도 못하고 관심 자체가 없는 해외에서는 여전히 잘나간다. 결국 도쿄 필하모닉에서 명예감독으로 추대된다.

5.1. 오페라 레퍼토리

5.2. 해외 오케스트라와의 내한 기록

5.3. 디스코그래피


6. 그 외

7. 논란

7.1. 국립 오페라합창단 사건

국립 오페라 합창단 집단 해고와 관련해 해고 철회 운동에 지지를 호소하러 온 사람들의 청을 거절한데다가 직접 관련도 없는 2008년 촛불집회 관련 발언으로, "그러니까, 당신들이 그 100만 명이나 촛불 들고 거리에서 서서 미국 쇠고기 안 먹는다고 시위하는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죠?"까지 했다고 한다. 작가 목수정이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했다.

당시 국립 오페라 합창단은 신임 유인촌 문화부 장관 취임 이후 예산 절감을 이유로 해체가 결정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산 절감을 이유로 국립 오페라 합창단을 해체했지만 정작 오페라단 전체 예산은 더 늘었다. 물론 오페라단 예산이 늘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합창단 운영을 유지해야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합창단 운영에 우선하는 분야가 있을 수도 있다.

해체로 인해 졸지에 실업자가 된 오페라 합창단 단원들은 각계에 해체 반대 지지서명을 받는 중이었다. 이들은 정명훈이 2003년 자신들과 함께 까르멘 공연을 하고나서 프랑스에도 없는 최고의 합창단이라며 극찬으로 립서비스를 했었다는 이유로 명망있던 정명훈에게 꼭 지지서명을 받길 원했고 정명훈의 형을 통해 지지서명을 요청했다. 당시 이들을 돕던 진보신당에선 파리지부 당원인 목수정 등을 보내 정명훈에게 서명을 직접 요청한 것이다.

과거 정명훈은 사회당 정권이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에 임명되어 좌파로 분류되기도 했었고 1994년 보수당이 집권하며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자 소송을 걸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해고 취소 판결을 받아냈었다. 이 때,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노조는 정명훈을 위해 부당해고 반대서명을 해준 적도 있었고 이는 재판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때문에 목수정 일행은 정명훈이 지지서명 정도는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참고로, 정명훈이 처음 노조에게 요청한 건 파업이었는데 노조는 평상시 그와 사이가 나빴던 탓에 큰 표차로 파업을 부결했다.관련기사.

하지만, 지휘자의 활동은 대체로 연주자의 노조 활동과 부딪히기 마련이고 특히 노조의 활동이 가장 잘 보장된 프랑스에서 숱한 파업을 겪은 정명훈은 노조에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단원들에게는 "당신들 지금처럼 파업하면 한국에선 감옥에 간다."라고 했다. 이 때도 서울시향 개편 문제로 노조와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서울시향에 그를 임명한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등 대체로 친정부적인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지지서명을 거부하고 서명을 요청하던 목수정 일행과 언쟁을 벌였다.

이에 대해, 여론은 '목수정이 새벽 1시에 일면식도 없던 정명훈을 사전 약속도 없이 찾아가서는 경호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말싸움까지 벌이고는 오히려 정명훈의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여론몰이를 한다'는 식으로 강하게 비난하는 글이 많았다. 같은 진보계로 분류되던 진중권까지 목수정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목수정에게도 많은 비난이 가해졌으며, 심지어 진보계의 전여옥으로 불리기도 했다. 기사를 내보낸 신문사인 레디앙 측은 목수정이 상처를 입었다며 덧글란을 폐쇄하였다.[28]

참세상에 올라온 목수정의 반론에 의하면 그들은 정명훈의 비서와 사전약속을 해서 낮에 찾아갔고 비서를 통해 불어로 된 서명운동 용지를 전해주고 아침에 받아가기로 한 뒤, 한글로 된 문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다시 인쇄한 용지를 들고 호텔로 찾아갔는데 마침 호텔로비에 손님과 함께 있던 정명훈과 우연히 마주친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정명훈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던 것이고 한참동안 언성을 높인 것은 정명훈 혼자였고 자신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대꾸한 것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정명훈 측의 반론이나 해명은 딱히 없었다.

실제로, 정명훈과 목수정의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은 쇠고기 문제나 아프리카 사람을 돕느니 하는 것이 아니다.

정명훈은 서명 거부 때, "그 사람들이 서명을 해서 구제해줘야 할만큼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이냐?"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클래식 음악하면 막연하게 대우받고 귀족적일거라 생각하지만 2001년 기준으로 국내 최고대우를 받고 있던 KBS 교향악단 단원 평균 연봉이 2500만원 선이었고 2005년 서울시향 수석연주자 연봉이 3500만원 선이었다. 그에 반해 기본적으로 악기를 연주해야 하는 특성상 배우는 과정에서 비용이 굉장히 크게 들어가는, 시쳇말로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분야의 대표격이다. 학교 진로상담에서도 예체능은 부모의 재정능력까지 고려하여 권유하는 경우가 절대다수. 따라서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대다수 순수음악 전공자들은 집안에 어느 정도 재력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조차도 악단이나 오페라 단원들이 고용조건 등으로 인해 파업을 하거나 노조를 조직해 협상을 벌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드라마 작가들도 노조를 구성하고 있어 이들이 파업할 경우는 아예 드라마 자체가 못 나오는 경우도 많다. 목수정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 역시 생계를 가진 생활인이고,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연대를 해야 하고, 사회적 약자인 개개인들은 때로는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이들을 지지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입장이다.

반면, 한국의 공립 관현악단들에 입단하는 것은 고시 소리를 들을 만큼 어렵지만 그 뒤에는 철밥통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발전을 게을리 하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 정명훈이 KBS 교향악단을 4달 만에 사퇴의 형식으로 해임된 것은 오디션을 둘러싼 단원과 불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KBS 교향악단은 드미트리 키타옌코 퇴임 이후 끊임없이 악단 운영과 관련된 잡음이 터져나왔고, 키타옌코의 후임으로 부임한 함신익도 창단 이래 최악의 내분 상황에서 불명예 퇴진하고 악단도 KBS와 계속된 불화 끝에 재단법인체로 독립해 재출발할 때까지 수많은 공연 취소와 그로 인한 비판 여론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결과, 한때는 독보적인 국내 원톱이던 위상은 크게 떨어져서 서울시향에 완전히 역전당한 상태다.

서울시향의 경우에도 취임 후에 철저한 경쟁체제로 밀어붙였고, 결과적으로 전반적인 수준이 향상됐다는 평가를 듣는다. 정명훈이 경쟁과 실력을 강조하는 것은 상임지휘자로서 당연한 업무집행인 것이다. 그러나, 고시 소리 들을 정도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서 들어온 인재들이 자기 개발을 소홀히 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적절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사용자에게 책임을 물을 일이다.

위에서 문제가 된 사안은 그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평가 제도 등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생긴 갈등도 아니고, 그야말로 합창단을 해체하여 근로자 전원을 해고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갈등 상황이다. 이를 그저 "실력이 부족하면 해고에 대한 반론권도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회사 실적이 안나온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리해고가 가능하다고 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명훈이 책임자도 아니고, 실력이 있음에도 해고된 거냐는 뉘앙스로 되물은 정명훈이 정리해고를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실, 이 문제에서 정명훈은 외부자라 개입할 근거가 없는 상황이었다.

7.2. 고액연봉과 항공권 등 논란

많은 언론에서 고액연봉(10년동안 14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과 이런저런 가십거리기사들이 많이 나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를 옹호하는 이들은 정명훈급 정도의 커리어와 실력을 가진 지휘자는 세계에 20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며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이 아닌 변방 중의 변방인 아시아권에서 활동하려면 그정도 금액으로는 택도 없다고 주장한다. 더하여 그들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통역이라든지, 사소한 협조인원들까지 필요하긴 하다. 금액으로 표현하면 최소 2배이상의 금액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있다. 그들은 연주자들과의 연봉 차이 역시 연주자들의 연봉이 적은 것이 문제이지, 정명훈의 연봉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연봉을 적게 받는다고 주장한다. 실력있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베를린필 등등)의 단원들의 경우 보통 연봉이 1억 정도 된다고 하니.

# JTBC 뉴스룸의 팩트체크 코너에서 정명훈의 고액 연봉 논란에 대해 정리하였다.

또한 그를 옹호하는 이들은 조수미와 차범근과 같이 실력으로서 외국에서 인정받지만 국내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서울시향이 정명훈이 지휘를 한 후로 실력이 향상되었으며, 아직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되기에는 먼 길인데 이제 와서 정명훈을 해고한다면 이제까지의 투자를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라 주장한다.

정명훈만한 커리어를 가진 지휘자를 여럿 골라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맞는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일단 정명훈을 포기한다면 동급 지휘자라 해도 실질적으로 비용을 더 많이 들여야 데려올 수 있다고도 말한다. 물론 특정 지휘자(비록 음악감독(또는 예술감독)일지라도)에게만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오케스트라의 음악성이나 다양성 면에서 부정적인 면도 있다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전 세계 어느 악단에서도 이런 점을 지적하는 예는 없고, 오히려 실력있는 지휘자의 부임과 그의 주도적인 역할이 악단을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는다. 더구나 오케스트라 연주에 필요한 것은 다양성이 아니라 뛰어난 연주 실력이며, 오히려 세계적인 수준의 여러 악단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소리와 특성을 높게 평가받는다.

또한, 정명훈 관련해서는 서울시향에 관련한 문제 즉 서울시향의 실력문제가 아닌 정명훈의 행동에 대한 서울시향 내의 각종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다, 서울시 감사결과 정명훈에게 제기 되었던 각종 의혹들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한다.기사 PD수첩 2015년 2월 10일 방송분. 하지만 그 '의혹 사실'건에 대해서는 무리한 의혹 제기라는 반론이 있었고, 해외에도 이 사실이 소개되었다. 반론글 해외에 소개된 글의 번역본. 게다가 정명훈이 사용한 항공권을 모두 감사한 결과, 지휘자가 정확한 행정절차를 잘 모른 탓에, 거꾸로 그에게 미지급된 항공권 금액이 엄청났다고 한다(...) #

그러나, 그것은 매니저에게 지급될 항공권이어서 그랬던 것인데, 가족을 매니저로 하는 꼼수를 썼으니, 가족이 그 고액 항공권의 혜택을 받을 수밖에. 과연 그의 가족이 고액 항공권을 지급받을 정도의 전문 매니저였는가 하는 문제는 생각해봐야 한다.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기보다, 도덕과 양심, 공과 사의 구별에 관한 이슈라 할 수 있다.

게다가 2014년 사건의 경우, 그 발단은 어디까지나 단장의 인격모독적 행위였는데, 정작 정명훈 논란으로 또다시 비화되면서 단장의 문제는 슬쩍 묻혀버린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시사인의 고재열 기자는 2014년 당시 정명훈 사태를 분석하면서 박현정 단장과 정명훈의 문제는 서울시향의 시스템에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시향의 권한과 책임이 일치가 되지 않은 문제가 박현정과 정명훈의 갈등을 빚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명훈과의 재계약 문제는 그의 '인간성' '정치성향' 보다 음악가로서의 성과로 평가해야함을 주장한다. 정명훈 취임 후 유료티켓이 38.9%에서 92.8%로 증가한 것, BBC Proms에 서울시향이 진출한 것,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플래티넘 2장과 골드 1장의 음반을 출시한 것[29] 또한 그가 부지휘자로 발탁한 성시연이 경기필하모닉 예술단장 겸 상임지휘자로 발탁된 것 등을 들었다.

7.3. MOM을 통한 갑질

정명훈은 2009년 MOM(미라클오브뮤직)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한다. 무료 공연 등을 통해 기금을 마련해 청소년 음악 교육 및 환경 보존 활동을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MOM 재능 기부자 가운데는 서울시향 단원이 상당수 포함돼 있고, 수익금이 전해진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는 정 감독의 아들이 지휘자로 있는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서울시 감사관은 ‘미러클 오브 뮤직’에서 주최하는 ‘아시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APO) 공연에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시향단원들이 3년간 총 66명이 출연했다고 밝혔다. 당시 출연료를 기부하는 ‘재능기부’ 참여는 강제성은 없었지만, 정 감독이 서울시향 단원들에게 갖는 절대적인 인사 권한을 고려할 때 진정한 자발적 참여였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게다가 출연료를 MOM에 기부해 "사업자경비"로 공제받는 수법으로 4년간 5억원을 절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법적으로 위법한 탈세는 아니지만, 사회공헌을 표방한 MOM을 이런 식으로 활용한 점이 음악인으로서, 내지는 세금을 받는 서울시향 지휘자로서 도의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7.4. 부인의 서울시향 단장 성추행 무고교사

해당 언론 기사

2016년 3월 2일, 성추행 파문의 경찰 수사결과가 발표되어, 박현정 단장이 직원들을 성추행했다는 직원들의 주장은 허위로 밝혀졌다. 이러한 허위 사실 유포에 가담한 직원 10명은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사건의 핵심은 구순열(정명훈 부인)의 지시로 이 조작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인데, 해외로 도망쳤기 때문에 기소중지로 경찰수사는 마무리 되었다.

정명훈은 2015년 12월 재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전격으로 사임한다. 사임까지 가게 된 발단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2014년 서울시향 박현정 대표의 성추행 파문을 직원들이 고발
2. 2015년 박현정 대표의 성추행 조사가 무혐의로 판결됨
3. 박현정 대표는 무혐의 판결 이후 성추행 고발 배후에는 정명훈과 정명훈의 아내가 있었다고 주장
4. 2015년 12월 재계약을 앞뒀기에 다시 정명훈의 특혜 관련 이슈들이 불거지며 진흙탕 싸움이 됨
5. 실제로 정명훈의 아내가 서울시향 직원들에게 위증교사 및 증거인멸을 지시한 증거가 발각되며 입건됨#
6. 위증교사에 대한 법적 책임이 불거지자 정명훈이 사퇴
7. 박현정, 정명훈 부부 명예훼손으로 고소. 정명훈도 명예훼손으로 맞고소

정명훈에 대해 계속 우호적인 평론을 써왔던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2015년 12월 정명훈이 사임과 관련하여서도 계속된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레브레히트는 정명훈의 사임이 정명훈과 박현정 서울시향 단장 간의 파워게임에서 빚어진 정치적 문제라고 분석하였다. 기사 그리고 Death of Seoul이라는 표현을 쓰면서기사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계약을 상실할 것이고[30], 정명훈의 사임이 특별히 정치적 싸움으로 이뤄진 사임이기에 앞으로 저명한 지휘자와 계약하기 힘들 것이며, 외국인 단원의 탈퇴와 더불어 전체적인 오케스트라의 퀄리티가 하락할 것을 우려하였다. 레브레히트는 음악 평론가로서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이룬 성과가 순식간에 잊혀지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명훈 퇴임 후 꽤 시간이 지난 현재 서울시향의 실력은 실제로 상당히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월간 객석의 류태형 전 편집장은 해외에서는 정명훈의 사임이 정치적 파워 게임이라고 보고 있다는 인터뷰를 했는데 이는 레브레히트의 기사를 레퍼런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정명훈의 사임이 음악적 성과와 이슈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시향 행정직원들의 인권문제로 시작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결국 사퇴로 이어지게 된 결과에 관해서는 정명훈 측에서도 논란들이 불거질 때마다 보다 대중들과 소통을 하고 해명을 했으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지적하며 정명훈 측의 미흡한 대응에도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사임의 직접적인 원인은 특혜나 음악성이나 정치적 분란 때문이 아니라 아내의 위증교사 때문이다. 정명훈의 아내 구순열(미국 국적)은 현재 위증교사 혐의로 입건된 상태이며, 1년간 귀국하지 않고 프랑스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에 조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보도가 처음 나왔을 2015년만 해도 서울시향은 정명훈과 재계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조사 결과가 모두 나오기 전에 서둘러 사퇴하고 출국하는 모습은 정명훈의 꼬리 자르기, 법적 책임 회피라는 비판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박현정(54)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와 서울시향 단원들 간 폭언ㆍ성추행 공방에서 경찰이 박 전 대표 손을 들어줬다. 경찰은 특히 정명훈 전 서울시향 예술감독 부인 구모씨가 직원들과 박 전 대표 퇴진 문제를 논의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안전과는 박 전 대표와 관련된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로 서울시향 직원 곽모(40)씨 등 10명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3일 밝혔다. 검찰이 확보한 시향 단톡에는 시향 직원들이 고소 모의부터 진행과 실행까지 의 대화 내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

또한 박현정은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허위사실 및 이 사태를 정명훈의 입장에서 최초 보도한 중앙일보 김 모 기자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상황이다.

그 후 정명훈과 박현정 모두 검찰 조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

관련기사
"다음에 숨통 끊어야" 서울시향 직원들의 추악한 거짓말

한국일보가 입수한 서울시향직원들의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 대화 내용을 보면, 정명훈과 그 부인 구씨가 박현정 대표에 대한 마녀사냥 지시를 한 정황이 드러난다. "서울시향 직원들 치밀했던 마녀사냥 “박현정 이길 아이템은 성희롱”

7.5. 부인의 조사 불응

정명훈 부인 구순열이 박현정 서울 시향 대표에 대해 서울 시향 직원들과 공모해 무고했다는 증거들이 드러나자 검찰측에서 정명훈 부인 구순열에 대해 조사를 요청한다.

그러자 정명훈 부인인 구순열은 경찰 조사에 응하지 않는다.

조사가 불가능하자 경찰은 해외에 체류 중인 구씨를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후 검찰조사에서 정명훈 혼자만 들어와서 조사를 받고, 당사자인 정명훈 부인인 구순열은 검찰조사에도 불응한다.

8. 관련 문서


[1] 정트리오로 인해 3남매로 아는 사람도 많은데 7남매 중 3명만 음악인으로 명성을 얻었다.[2] 큰형 정명근은 음악매니지먼트 CMI 사장을 역임하는 등 예술계에서 활동하였는데, 2015년 10월에는 수십억원의 국가보조금을 횡령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39억 배상판결을 받은 바 있다. 관련 기사 작은형 정명철은 교통사고로 요절했고, 남동생 정명규는 의사이다. 정명근의 누나이자 정명훈의 큰누나 정명소는 2007년에 암으로 사망했다.[3] 둘째아들 정선은 재즈 기타리스트로, 가수 신예원과 결혼하였다. 막내 정민은 대를 이어 지휘자의 길을 걷고있다. 현재 강릉시향 상임지휘자.[4] 김무정, "[미션에서 만난 사람]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정명훈 집사", 「국민일보」, 2006.3.13. KBS교향악단과의 베르디 레퀴엠의 연주가 끝나고 약 26초동안 지휘봉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5] 1548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창단 이후 역사상 첫 수석객원지휘자이다.[6] 우승은 러시아의 안드레이 가브릴로프[7] 참고로 스포츠계에서 처음으로 예술체육요원 자격을 쟁취한 사람은 정명훈이 1974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하고 2년 후에 열린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 레슬링 자유형 62kg에서 1위를 차지한 양정모 선수였다.[8] 1975년 10월 23일 카네기 홀에서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이 해적반으로 나왔다.#Myung-When[9]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으로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터에 새로 지어졌다.[10] 바렌보임은 당시 미국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평가되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내정된 상태였고,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 지휘자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다.[11] 당시 음반 시장에서 일본은 세계 2위, 한국은 세계 7위였다.[12] 해당 오페라극장 음악 감독이었던 리카르도 무티, 스승이기도 했던 줄리니에 이어 이 악단과 세 번째로 자주 공연한 기록을 갖고 있다.[13] 하와이의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바닷물 속에 있던 바위를 보지 못하고 다이빙을 했다가 중상을 입었다.[14] 정명훈 자신이 피아니스트로서 베를린필 악장 다이신 카시모토와 함께 연주할 계획이었던 듀오 연주까지도 동시에 취소되었다.[15] 정명훈이 취소한 베를린 필 공연은 크리스티안 예르비가 대신 지휘했다.[16] 정명훈 이후 라디오 프랑스 필은 핀란드 출신의 미코 프랑크가 예술감독직을 맡는다.[17] 9월 27일 세종문화회관, 29일 예술의 전당, 26일 공연은 취소됨. 10월 2일 싱가포르 공연[18] 계관지휘자 (2022. 1~)[19] 명예 음악감독 (2015. 6~)[20] 명예 음악감독 (2016. 9~)[21] 1548년 창단 이후 첫 수석객원지휘자이다.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수석지휘자로 부임하면서 그와 동시에 악단 역사상 첫 수석객원지휘자로 정명훈을 선임한다. 틸레만의 협소한 레퍼토리에 따른 보완책으로 보는 시각이 다수인데, 실제로 이 악단은 틸레만이 잘 하지 않는 여러 레퍼토리(프랑스와 러시아 계열 작곡가, 말러 등)나 아시아 투어를 주로 정명훈과 함께 소화한다.[22] 1778년 창단 이후 첫 명예음악감독이다. 라 스칼라 필하모닉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자존심으로도 꼽혀 그간 음악감독이 거의 대부분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로 채워졌던 것을 감안하면, 명예직이기는 하나 1명에게만 부여할 수 있는 자리를 정명훈으로 선임한 것은 그가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해 갖고 있는 위상을 실감하게 한다. 위촉 당시 음악감독은 리카르도 샤이이다.[23] 당시 1위는 소련 국적의 안드레이 가브릴로프이다.[24] 수훈 당시 만 42세로, 2024년 현재까지도 이 최연소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2022년까지는 역대 수훈자중 나이로도 최연소였으나 2022년 72년생 이정재와 71년생 황동혁 의 수훈으로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25] 롯데콘서트홀 개관공연.[26] 대한민국 로컬반[27]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라이벌이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강마에가 라이벌 의식은 가지지만 정명환의 천재적 재능이 강마에보다 넘사벽으로 뛰어나서 밀렸다는 설정이다. 강마에 자신도 그보다 재능이 안된다는 걸 느껴서 열등감에 폭발했던 회상장면이 있다. 물론 극중 회상에서 딱 1번의 콩쿠르는 밀리던 강마에가 살짝 역전한 듯한 연주를 보였었는데, 심사진이 그전까지 넘사벽을 보여준 엘리트인 정명환에게 1등을 줘서 강마에가 분노에 절망하는 장면이 있긴 하다. 아무튼 설정상 재능이 부족한 강마에가 노력을 더 많이 한 설정이다.[28] 그리고 훗날... 목수정은 QAnon 이론을 수용한것으로 보인다.[29] 물론 서울시 자체에서 구입한 것이 많기에 세계적인 레이블에서 내놓은 자체를 업적으로 평가하자고 말한다.[30] 2016년 예정된 말러 교향곡 6번 연주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앨범으로 출시할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