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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25201A><colcolor=#B9A087>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Моде́ст Му́соргский | Modest Mussorgsky | |
| | |
| 본명 | 모데스트 페트로비치 무소륵스키 Моде́ст Петро́вич Му́соргский Modest Petrovich Mussorgsky |
| 출생 | 1839년 3월 21일 |
| 러시아 제국 프스코프현 토로페츠 군 카레보마을 | |
| 사망 | 1881년 3월 28일 (향년 42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 국적 | |
| 직업 | 작곡가 |
| 장르 | 오페라, 피아노 음악 |
| 사조 | 낭만주의 |
| 서명 | |
1. 개요
|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
"무소륵스키는 흉내낼 수 없다. 모든 음악 국가들 중 가장 특징 없는 국가인 독일에서조차도 그의 방식으로 작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음악학자[1]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음악학자[1]
무소륵스키는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로 흔히 러시아 5인조라 불리는 러시아의 민족주의 작곡가 중 한명이며 이 5인조 뿐만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작곡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후반부터 비롯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음악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작곡가로, 러시아 음악의 고유한 색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의 영향력은 러시아를 벗어나 각국의 민족주의 음악과 프랑스의 인상주의에도 미쳤다. 그의 많은 작품이 러시아 역사와 민담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러시아 민요나 토속음악을 주요한 소재로 사용하였는데, 그의 대표작인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그러한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2. 이름
실제 발음은 IPA 기준 [mɐˈdɛst pʲɪˈtrovʲɪtɕ ˈmusərkskʲɪj]로, 굳이 한국어로 강세 등을 반영해 전사하면 "마데스뜨 피뜨로비치 무사르크(륵)스끼이" 정도가 된다.2005년에 외래어 표기법에 러시아어 한글 표기법이 추가되기 전까지는 글자 그대로 음차한 '무소르그스키'라고 표기했다.[2] 그러다 보니 지금도 검색 등에서는 이쪽으로 검색해야 결과가 더 많이 뜬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차이코프스키)와 마찬가지 맥락.
"무소륵스키"라는 성씨의 유래는 9세기 노브고로트의 류리크 대공의 먼 후손이자 15세기 혹은 16세기의 보야르였던 로만 바실리예비치 모나스티료프(Роман Васильевич Монастырёв)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별명은 그리스어 무수르고스(μουσουργός, 음악을 만드는 이)에서 유래한 무소르가(Мусорга)였는데, 그가 1대 무소륵스키가 되며 무소륵스키라는 성씨가 탄생했다. 무소륵스키 가문의 족보를 보면 초창기에는 "무사르스키", "무세르스키", "무세르스코이", "무시르스코이", "무소르스키", "무수르스키" 등 표기법이 중구난방이었다.
이러한 혼동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가 살던 시절까지도 이어졌다. 모데스트가 세례 받은 기록을 보면 성씨가 "무세르스키"(Мусерскій)로 나와 있고[3], 모데스트 본인은 최소한 1850년대 말까지 본인 성씨를 "무소르스키"(Мусoрскій)라고 표기했다.[4] 1863년 발라키레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데스트는 처음으로 "무소륵스키"(Мусoргскій)라는 성씨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후부터는 줄곧 무소륵스키라는 성씨를 사용했으나 이후에도 종종 편지에 서명을 할 때 무소르스키로 서명한 적이 있다.
이름에 г가 붙은 이유는 모데스트의 형이었던 필라레트(Филарет)의 요청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필라레트는 이름의 어감 문제 때문에[5] 어원을 확실히 하고자 г를 집어넣자고 주장했다. 다만 모데스트 본인은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 그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가지고 장난치기도 했다.[6]
한편 이를 가지고 강세를 어디에 두냐는 문제가 제기된 적 있는데[7] 무소륵스키의 고향 지역을 포함한 현대 러시아에서는 "МУ-сарг-ский"로 읽는 것이 정석이다. 특히 러시아어의 강세 규칙을 고려했을 때 앞에서 둘째 음절의 모음 표기가 제각각인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8] 그러나 20세기 필라레트의 후손들이 (폴란드식으로)[9] "му-Сорг-ский"로 읽는 게 맞다고 주장했고[10], 이에 따라 여러 러시아의 유명인들도 둘째 음절에 강세를 넣어 발음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무소륵시키의 이름을 읽을 때 둘째 음절에 강세를 넣어 [mʊˈsɔːrɡski]로 읽는 것은 이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편 이름 모데스트는 "절제된, 진중한"을 의미하는 라틴어 모데스투스(Modestus)에서 유래했다.[11]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 사이에서는 여기서 유래한 별명 모딘카(Модинька)라고 불렸다.[12]
3. 생애
무소륵스키는 대대로 부유했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6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배운지 3년만에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해 리스트의 소품을 연주할 수 있었다. 가문의 전통인 군 복무를 위해서, 그는 13세 때 근위 사관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를 평생 괴롭혔던 알코올 중독 증세는 이곳 생활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관학교 졸업 후 그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수비대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한다. 그의 군 생활은 음악적으로는 여러 유력 음악가를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군 복무 중,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군 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알렉산드르 보로딘을 알게 되었고 이내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미하일 글린카 이후의 가장 유력한 작곡가인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시스키와 친분을 쌓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
| 1881년 죽기 얼마 전의 무소륵스키[13] |
이러한 교우관계는 음악적으로 매우 중요한 계기로서, 그의 진짜 음악 인생은 이 시기로부터 시작된다는 견해도 있다. 무소륵스키는 세자르 큐이, 밀리 발라키레프 등과도 교우관계를 맺었는데, 후에 발라키레프로부터 작곡을 배운다. 그는 1858년 군을 떠나 음악에 전념하고, 초기에 발라키레프에게 음악을 배운 이후로는 그는 독습하다시피 하여 실력을 쌓는다. 이 후,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으로 음악인으로서의 기초를 완전히 닦았고, 1863년 5인의 동지들과 공동 생활을 하는 등, 전성기를 맞는다. 이 무렵부터는 더 이상 발라키레프의 인정을 받으려 애쓰지 않고, 예전의 다르고미시스키와 더 가깝게 지낸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1861년 농노 해방으로 인해 토지의 반 이상을 잃게 되어 점차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1865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아 알코올 의존증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전성기는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르게는 "보리스 고두노프"가 작곡된 1868년부터 1873년, 늦게는 전람회의 그림이 작곡된 1874년 이후로 인생의 쇠퇴기가 시작된다. 그의 알코올 중독은 점점 심해져갔고, 친한 친구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인해 정서적으로도 큰 슬픔에 빠지게 된다. 날로 심해지는 알코올 중독 때문에, 생계를 위해 택했던 공무원 생활도 위태위태하다가, 결국 1880년에 해고되어 생계수단이 끊긴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881년에는 구걸 밖에 할 것이 없다고 친구에게 말할 지경으로 궁핍해진다. 이 무렵 건강도 심각하게 나빠져서, 4번의 연속된 발작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입원을 한다. 입원 중에도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 1881년, 그는 42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로 사망한다. 42번째 생일 일주일 후였다.
4. 음악 성향
무소륵스키는 러시아 5인조 뿐만 아니라 러시아 음악사상 가장 독창성이 뛰어난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괜히 전문가들이 무소륵스키를 흉내낼 수 없는 작곡가라고 평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독창적인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그가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지만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작곡도 처음에는 거의 취미 수준으로 했고 그나마 음악 교육은 성인이 된 후 발라키레프에게 잠시 받은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 초보 음악전공자들도 다 익히는 기초적인 문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아마추어가 만든 조잡한 곡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문제점들이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의 가치를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본적으로 무소륵스키의 음악은 그와 같은 시기 같은 나라에서 활동한 작곡가였던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완전히 반대의 위치에 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우아하고 세련된 서구식 작법에 러시아적 감성을 도입하여 귀족과 상류층의 정서에 호응하고 있다면 무소륵스키의 음악은 다듬어지지 않고 질박한 날것의 감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서민과 민중의 삶과 정서에 좀더 주목하고 있다.
무소륵스키는 전술한 이유 때문에 주제의 전개나 변화, 성부간의 어울림과 같은 구조적인 양식미를 추구하기 보다는 특정한 상황이나 느낌, 인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데 탁월했는데,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덕분에 이런 감성을 특정한 양식이나 유형에 맞추어 변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의 개성이 넘치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또한 특유의 투박하고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음향은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나타나는 묘사적/풍자적인 분위기와 딱 맞아 떨어진다.
이처럼 구조보다 인상을 중요시하는 경향은 후대의 반낭만주의 경향, 특히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에 제대로 영향을 주었다. 또한 무소륵스키는 20세기 이후 러시아(소련) 작곡가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작곡가이기도 한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람 하차투리안 등을 비롯한 많은 후배 러시아 작곡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생애 항목에 있듯이 무소륵스키는 일생 내내 인생사가 순탄치 않았던 데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 완성한 작품이 그리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거나 스케치 상태에서 중단되었다. 현재 연주되는 그의 작품 상당수는 그의 재능을 아꼈던 동료 작곡가나 후배 작곡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특히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작품을 연주회로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동안 무소륵스키가 음악의 기초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가 남긴 원전을 좀더 세련되게 고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가 대표적인 예인데,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쇼스타코비치 등의 작곡가들은 이 작품의 오케스트레이션 전반에 걸쳐 화성과 선율 처리 등의 문제점을 대폭 수정 보완한 수정판을 내놓았으며 한동안은 이 수정판만 연주되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통상적인 어법에서 많이 벗어난 무소륵스키의 화성과 관현악법 등을 굳이 결함으로 볼 것이 아니라 무소륵스키만의 독창적인 음악언어로 인정해야 된다는 분위기가 우세해졌으며, 현재는 최소한의 수정만을 가한 작곡자의 원전판을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5. 주요 작품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은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와 전람회의 그림이다. 이 보리스 고두노프는 역대 러시아(구 소련 포함) 오페라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러시아어로 된 오페라 가운데 가장 자주 연주된다. 한편 그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하르트만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쓴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 역시 굉장히 독특하고 인상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나중에 모리스 라벨에 의해 관현악으로 편곡되었는데, 현재는 편곡된 관현악 버전이 더 자주 연주된다. 그런데 항목에도 있지만 이 작품은 관현악 뿐만 아니라 온갖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은 1867년 작곡된 관현악곡으로 러시아에서 1년 주기로 열리는 성 요한제의 전설에 영감을 얻어 작곡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곡가 생전에는 출판되거나 연주된 적이 없으며, 현재 연주되는 교향시 버전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그의 악보를 바탕으로 재편집한 것이다.[14] 한편 이 곡은 그의 미완성 오페라 '소로친치 시장' 3막의 간주곡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외에 그의 가곡들도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인데, 음악적인 가치도 훌륭하지만 당시의 부조리한 시대상을 비판하고 풍자하거나 민중의 고달픈 삶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서정에 치중하는 독일 및 서유럽의 가곡과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같은 괴테의 시를 바탕으로 한 무소륵스키의 '벼룩의 노래'와 베토벤의 '벼룩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 차이를 바로 알 수 있는데, 전자가 당시 러시아 관료들의 부패와 위선을 제대로 풍자하고 있다면 후자는 단지 유머러스한 시의 내용에 충실하게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로 일관하고 있다.[15][16]그가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좀 의외인 대목.
-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 최초의 1869년 판본과 러시아 황실극장 위원회의 금지처분을 피하기 위해 만든 1872년 판본이 있다. 무소륵스키 사후 주로 1872년 판본이 연주되었고 종종 두 판본을 절충한 연주가 행해졌는데, 현재는 두 판본을 독자적인 작품으로 보고 따로 연주하는 것이 대세이다.[17] 한편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쇼스타코비치 등이 작품을 대폭 개정한 수정판을 내놓기도 했는데, 전술한 것처럼 원전 판본을 연주하는 것이 대세가 되면서 최근에는 수정판의 연주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 오페라 호반시나[18] - 이반 호반스키의 봉기를 다룬 작품으로, 제목 역시 호반스키의 무리라는 뜻이다. 이 오페라는 무소륵스키가 피아노 스케치만 남겨놓고 사망했는데 작곡자 사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해서 1886년에 최초로 공연했다. 하지만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원전 악보에서 상당 부분을 삭제하거나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개작했기 때문에 원작에 충실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으며 공연 자체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한동안 잊혀졌다. 이후 쇼스타코비치가 좀더 원전에 충실하게 편곡해서 1959년에 새롭게 초연하였으며 현재는 이 쇼스타코비치 버전이 자주 연주된다.[19] 이 호반시나는 작곡가가 최종 완성한 작품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지만 작품성 자체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능가하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21세기 이후 점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 오페라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가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데, 무소륵스키가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일찍 사망한 것이 정말 아쉬울 따름.
- 오페라 소로친치 시장 -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무소르그스키가 직접 대본을 작성한 후 작곡에 착수했는데 작곡자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나마 호반시나는 피아노 스케치라도 온전하게 남아 있는 반면, 이 작품은 전체 대본의 상당 부분이 아예 손도 대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후 세자르 큐이를 비롯, 니콜라이 골로바노프(Nikolai Golovanov) 등 몇몇 작곡가들이 미완성 부분을 독자적으로 작곡해서 완성한 버전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들의 작곡 실력이 무소륵스키의 독창성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이 오페라 완성본들은 평작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로친치 시장은 위의 두 오페라만큼 자주 공연되지는 않는다.
- 피아노/관현악곡 전람회의 그림 - 항목 참조
-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 가곡집 죽음의 노래와 춤
- 가곡집 아이들의 방
▲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中 "마녀 바바야가의 오두막 & 키예프의 대문"(Great Gate of Kiev). 모리스 라벨의 관현악 편곡 버전이며, 연주는 정명훈/프랑스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1] 1880~1952.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그 천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6촌지간이다. 그도 독일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미국으로 귀화했다.[2] 아예 2005년판 외래어 표기법에서 글자 г의 전사 예시를 설명하며 무소륵스키의 예를 들고 있다.[3] 1918년 표기법 개혁 이전까지 러시아어 어미 -ский는 -скій로 적었다.[4] 1858년경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밀리 발라키레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무소르스키"라고 서명하고 있다.[5] 러시아어로 "무소르"(мусoр)는 "쓰레기"를 의미한다(...)[6] 편지에 자기 이름을 "무소랴닌"(Мусорянин)으로 서명했는데, 이는 "드보랴닌"(дворянин; 귀족, 양반)과 운율을 맞춘 말장난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천민(賤民)과 양반(兩班)을 합친 "천반"(賤班)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듯하다.[7] 모음의 강세는 러시아어 등 슬라브어파 언어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러시아어는 강세 여부에 따라 모음의 발음이 달라지기도 한다.[8] 러시아어 음운론에서 강세가 없는 'о'는 [ə\]나 [ɐ\]처럼 약화(reduction)되어 발음이 불분명해진다. 즉 앞에서 첫 번째 음절에 강세가 나와 앞에서 두 번째 음절은 강세가 약화되고 그에 따라 표기가 중구난방이 되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설명이다.[9] 강세 규칙이 완전히 제멋대로인 러시아어와 달리 폴란드어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뒤에서 두 번째 음절에 항상 강세가 온다. 그리고 무소륵스키 가문은 러시아 가문이나,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ский는 러시아인보다는 폴란드인 인명에서 많이 나타나는 어미이다.[10] г가 들어가며 강세가 달라져버렸다는 주장도 있고, 혹은 상술한 바와 같이 мусoр와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로 추정된다. мусoр의 강세는 앞에서 첫 음절에 오기에 일부러 강세가 들어가는 음절을 다르게 한 것.[11] 외래어에서 유래했기에 е를 '예'가 아닌 '에'로 발음한다.[12] 이름 '모데스트'는 뒤에서 첫 번째 음절에 강세가 들어가는데, 러시아어에서는 애칭을 만들 때 강세가 원래 이름의 위치와 상관없이 앞에서부터 첫 음절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 여기서도 첫 음절에 강세가 들어간다.[13] 무소륵스키가 죽기 직전 일리야 레핀이 그린 초상화. 알코올 의존증의 영향으로 코가 빨갛다. 모친의 죽음으로 시작된 그의 술버릇은 친구의 죽음으로 절정에 달했고 결국에는 빈털털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그림에서 입고 있는 잠옷 역시 가난뱅이로 전락한 그의 신세를 딱히 여긴 그의 친구 한 명이 보내 준 것이다.[14] 무소륵스키의 원본은 1920년대 말에야 발굴되어 연주될 수 있었지만, 출판은 이보다도 한참이나 늦어 무려 1967년에야 출판되었고, 처음으로 음반으로 출시된 것도 1971년이었다. 원본(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들어보면 알겠지만 초반 3분 가량도 차이가 상당한데, 나머지 부분은 아예 완전히 새로 쓴 수준이다.(과장 안 보태고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4번 초고와 개정고 간 차이 수준이라 할 수 있을 정도) 전반적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 편곡반이 더 색채적이고 세련된 관현악법과 군더더기 없이 응축된 전개를 보여주는 반면 무소르그스키 원본은 무채색에 투박한 관현악법과 영감 과다에 가까운 즉흥적인 전개, 모자이크 같은 구조, 장식을 거부한 날것 그대로의 분위기가 특색이다.[15] 그래서인지 이 '벼룩의 노래'는 천하의 베토벤의 작품이 무소륵스키의 작품에 묻혀 버렸다. 다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16] 가사는 이렇다 "옛날에 한 임금님이 벼룩을 가져다 길리면서 귀여워 했다네, 벼룩, 하하하하, 벼룩, 임금님이 제단사를 불러 명하시길 벼룩에게 입힐 외투를 지어 바쳐라, 벼룩에 외투, 하하하하, 외투를 입히고 훈장까지 달아주니 어깨가 으쓱, 벼룩에 훈장, 하하하하, 귀족 부인, 고관대작 아무에게나 달려 물어 뜯어도 임금님이 귀여워 하시니 어쩌지 못하지만 우리들이야 단번에 찍눌러버리지."[17] 그래서 이 오페라를 감상할 때에는 어떤 판본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18] 흔히 제목을 '호반시치나'로 표기하고는 하는데, щ는 '시'로 표기하는 것이 옳고, 실제로도 '시' 발음이다. 자세한 사항은 Щ 항목 참조.[19] 현재 이 오페라를 공연할 때는 쇼스타코비치 판본을 바탕으로 지휘자들이 이런저런 개정을 가한 판본을 사용한다. 따라서 공연마다 곡과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