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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 발라키레프 (Милий Алексеевич Бала́кирев) |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Никола́й Андре́евич Ри́мский-Ко́рсаков) |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Моде́ст Петро́вич Му́соргский) | 알렉산드르 보로딘 (Алекса́ндр Порфи́рьевич Бороди́н) | 세자르 큐이 (Це́зарь Анто́нович Кюи́) | }}}}}}}}} |
1. 개요
1856~1870년에 활약한 러시아의 클래식 작곡가 그룹. '러시아의 위대한 천재 작곡가 5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단연 돋보였던 3명과 나머지 2명으로 구성된 그룹이었다.러시아 색채의 음악을 작곡하는 데 전념했으며, 클래식 음악사에서 국민주의 악파의 선구자격 인물들로 평가받는다.
2. 명칭의 유래
영어로는 The Five, The Mighty Handful, The Mighty Coterie, 러시아어로는 Могучая кучка이다. Могучая кучка는 '강력한 일당', '강력한 한 줌'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 кучка라는 단어는 куча(무더기, 덩어리, 더미)의 지소형, 즉 작고 귀여운 느낌을 주는 형태이다. 원래는 서유럽식 음악을 하던 기존의 음악계가 조롱하는 의미에서 '한 줌밖에 안 되는 다섯 명이서 어디 잘 해보렴'하는 식으로 붙인 것.그러나 5인조는 오히려 그 명칭을 자신들을 일컫는 명칭으로 받아들이는 대범함을 보였고, 결국 이 이름은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운동 중 하나인 국민악파의 키워드가 된다. 모네의 '해돋이 인상'을 보고 기존 미술계가 붙인 인상파라는 멸칭이, 결국 미술사에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조가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3. 구성원들
밀리 발라키레프,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세자르 큐이, 알렉산드르 보로딘, 그리고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로 구성되었다. 이 중 밀리 발라키레프가 리더를 자처하며 모임을 주도했다.특이하게도 이들은 차이콥스키와 마찬가지로 모두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다. 최소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발라키레프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보로딘은 화학을 전공했고 화학자로도 활약했다. 큐이는 육군 장교로 축성법을 가르쳤었고, 무소륵스키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해군 장교였다. 이처럼 그들의 본 직업은 음악과 관련이 없는 것이었고, 발라키레프를 제외하면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적도 없으며[1][2] 외국에 나가 음악을 배운 경험들은 더더욱 없다. 서유럽식 음악에 대해 교육을 받지 못한 것과 해외 경험이 없는 것이 오히려 러시아의 민족적 색채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재미있게도 이런 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들 5명은 나이나 성장 과정, 직업에 공통점이 없다.
모임은 1856년 발라키레프와 큐이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듬해에 무소륵스키가 참여하고, 1861년에 림스키코르사코프, 1862년에 보로딘이 마지막으로 참가한다. 5명이 모두 모인 1862년 기준으로 모두들 젊은 작곡가였는데, 제일 어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세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20대였다. 젊다는 것 외에도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다는 점과 음악이 직업이 아니었다는 점이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4. 음악사에서의 중요성
이들 이전에 활동한 미하일 글린카가 러시아 민족주의 성향을 시작한 것이라면, 러시아 5인조는 러시아의 민족적 색채가 세계적인 입지를 확보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같은 후대 러시아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워낙 러시아 색채를 강조하다 보니, 표트르 차이콥스키와는 노선이 정반대인지라 보이지 않는 미묘한 대립각이 있었다. 표트르 차이콥스키를 만난 적이 있는 밀리 발라키레프가 차이콥스키를 이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차이콥스키가 고사했다.[3]
다만 이들 중 큐이는 러시아 혈통이 아닌 프랑스인으로 다른 네 사람들과는 꽤 노선이 달랐다. 함께 묶이긴 했지만 러시아식 전통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서유럽식 전통을 러시아 음악과 접목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위의 5명 중 유일하게 러시아 혁명을 경험하고 죽은 사람이기도 하다.
[1] 그래서 초기에는 발라키레프가 나머지 네 명에게 작곡법 등을 지도했다고 한다.[2] 이들이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것은, 정확히 말하면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귀족들은 예체능과 관련된 분야를 전부 '취미'로 간주했으며 모든 귀족은 직업적으로 군인이 아니면 공무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작곡가 같은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러시아 5인조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원치 않는 직업을 선택해야 했고 가족의 간섭에서 벗어나면서 자연히 어릴 적 꿈을 이루려 했던 것이다. 출처 : 나타샤 댄스[3] 학교 음악 과목의 시험에 "다음 중 러시아 5인조가 아닌 작곡가는?"이라는 지문을 내면, 십중팔구 차이콥스키가 정답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