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29f6d><colcolor=white> 러시아 혁명[1] Русская революция | Russian Revolution | |||
연설하는 블라디미르 레닌 | |||
기간 | 1917년 3월 8일 ~ 11월 8일[2] | ||
장소 | 러시아 제국 페트로그라드 | ||
원인 | <colbgcolor=#c29f6d><colcolor=white> 2월 혁명 | ※ 러시아 제국의 개혁 배제 및 정치적 자유, 사회 운동 탄압 ※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점으로 생겨난 제정의 개혁 의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생활고, 극심한 양극화 | |
10월 혁명 | ※ 볼셰비키의 러시아 공화국 타도 ※ 제1차 세계 대전 지속으로 인한 불만 고조 | ||
교전 세력 | 2월 혁명 | [[틀:깃발| | ]][[틀:깃발| ]][[러시아 제국|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사회주의 시위대 | ]][[틀:깃발| ]][[틀:깃발| ]] 시위대
10월 혁명 | [[틀:깃발| | ]][[틀:깃발| ]][[볼셰비키| ]][[틀:깃발| | ]][[틀:깃발| ]][[러시아 공화국| ]]|
지휘관 | 2월 혁명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세르게이 카발로프 | ]][[틀:깃발| ]][[니콜라이 2세|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
10월 혁명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레프 트로츠키|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파벨 디벤코 | ]][[틀:깃발| ]][[블라디미르 레닌|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표트르 크라스노프| ]] | ]][[틀:깃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피해 | 제국파 사상자 1,500명 이상 | 혁명파 사상자 1,400명 이상 | |
결과 | 2월 혁명 | 러시아 제국 멸망, 러시아 공화국 수립 | |
10월 혁명 | 볼셰비키의 승리, 러시아 공화국 멸망 소비에트 러시아 수립, 러시아 내전 발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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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혁명. 전제군주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했다.2월(3월) 혁명에서 승리한 정당들은 러시아 공화국을 선포하고 연립정부를 구성했지만 볼셰비키가 10월(11월) 혁명을 일으키면서 러시아 공화국마저 무너뜨리고 혁명의 과실을 독점하려고 하자 멘셰비키 등 반대파들이 무력 대항을 시작하면서 러시아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동유럽에 볼셰비키 독재가 퍼졌고 앞서 러시아 제국이 뛰어들었다가 1917년에 이미 패색이 짙었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발을 빼게 되었다.
2. 3월에 일어난 2월 혁명,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
한 사건을 2월/3월 혁명이라고 같이 쓰는 이유는 당시 러시아가 율리우스력을 공식 연호로 사용해서 범세계적으로 쓰이던 그레고리력과 날짜가 달랐기 때문이다.[3] 13일 차이라 10월 혁명은 10월 25일(율리우스력)이지만 동시에 11월 7일(그레고리력)이다. 두 표현 모두 인정된다. 이 문서에선 괄호 날짜가 러시아 달력(구력)이다.[4]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고사의 사회탐구 세계사 시험에서 20번 문제의 주제로 나왔다.[5]3. 과정
3.1. 혁명 이전(1870 ~ 1900)
19세기 중엽 이후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1860년대부터 1900년까지 공업 생산량은 7배 이상 증가했는데 특히 대규모 공장제 공업과 중공업 분야에서 꽤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광물 채굴, 철강 생산, 운송, 제조 등의 면에서 결코 서유럽에 뒤지지 않는 수준까지 도달하는 데 기어이 성공했다.1870년대 후반 오데사와 키예프의 남부동맹,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북부동맹 등의 정치조직이 연달아 탄생하였다. 이에 발맞추어 1870년대부터 파업이 시작되어 곧 번졌으며 이는 더욱 과격해져 마침내 1885년 주에보에서 섬유노동자의 주도하에 1만 명 이상이 참여한 파업 사태가 터졌다. 이는 당시까지 일어난 파업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 처음에 정부는 이러한 노동운동 자체를 무시했으나 결국 이에 굴복해 노동자 보호법이 마련되었고, 여자와 미성년자의 노동이 보호되고 노동시간도 다소 줄어드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여전히 편법을 저지르고 있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작업과 임금 상황도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당연히 러시아 노동자들의 불만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러시아를 통치하던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불신도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이러한 가혹한 노동환경은 훗날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러시아가 공산화되는 가장 근본적인 밑바탕으로 작용하게 된다.
1840년대 러시아에 들어온 공산주의는 당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 지식인에게 많은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1869년 미하일 바쿠닌이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고 자본주의를 분석한 유용한 경제이론으로 공산주의가 소개되면서 이와 같은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또한 러시아가 산업화되면서 농촌에서의 혁명을 주창한 인민주의[6]에서 도시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공산주의가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같은 관심을 반영하듯 1883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1856 ~ 1918)의 주도하에 제네바에서 러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 조직 '노동자 해방단'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이른바 '2단계 혁명론'을 주창하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책을 러시아어로 번역, 보급하였다.
노동자 해방단의 결성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
러시아 국내에서는 1883년 '블라고예프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1885년 노동자들의 주도로 '토치키스 그룹', 1889년에는 '브루스네프단'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계몽을 돕는 한편 공산주의를 선전했다. 위와 같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조직과 활동은 해외의 노동자 해방단과는 별개로 진행되었으나, 노동자 해방단이 번역한 공산주의 서적들과 출판물들이 러시아에 유입되면서 간접적인 유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서적의 유입은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을 더욱 활성화시켜 1890년대에 이르면 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소규모 조직이 폭넓게 확산되면서 분열되었던 인민주의는 몰락하고 공산주의가 혁명의 이념으로 완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은 1895년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고 이에 대항하는 제스쳐를 적극적으로 취했는데 이 조직에는 블라디미르 레닌, 율리 마르토프(1873 ~ 1923)[7], 크룹스카야(레닌의 부인), 라첸코, 포트레소프 등 훗날 혁명을 이끌 지도자들이 핵심 멤버로 참가했다. 그러나 투쟁 동맹은 그해 12월 당국에 의해 해산되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된 후 1900년까지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1898년 3월,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는데 이들은 유형 중이던 레닌을 팜플렛 편집자로, 제네바의 플레하노프를 해외 대표로 임명하였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제1차 창당대회 직후 당국에 의해 해산되면서 사실상 창립선언만 한 채 괴멸되었지만 이 사건은 러시아의 혁명가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한층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선언문 중 한 구절이다.
유럽의 동쪽으로 갈수록 부르주아지는 정치감각이 뒤떨어지고 나약해진다. 그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과되는 문화적, 정치적 임무는 더욱 막중해진다. 러시아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 자유의 획득이라는 임무를 그 굳은 어깨에 짊어지고 수행해야만 하며, 또 수행해낼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고, 그 어디에도 인간에 의한 착취가 남아 있지 않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이며, 그 첫 걸음이다.
3.2. 혁명 이전(1900 ~ 1917)
레닌은 형기가 끝나고 출소하자마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마르토프, 플레하노프와 함께 혁명적 공산주의 신문 <이스크라[8]>를 창간했다. 그러나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당대회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표면적인 원인은 <이스크라>의 편집진을 누구로 구성할 것인가 였지만 실은 혁명노선의 차이로 인한 대립이었다. 레닌은 혁명은 오로지 노동자와 소수의 직업혁명가에 의해서만 추진되어야 하며 무장봉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제정을 타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마르토프는 폭력적인 방법이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서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처럼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소(小)부르주아도 정당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두 사람의 안건은 투표에 부쳐졌고, 결과에 따라 레닌의 파벌은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 마르토프의 파벌은 소수파라는 뜻의 '멘셰비키'로 불리게 되었다.[9] 이 두 파벌은 한동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안에서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되었지만 결국 1912년 프라하 대회에서 레닌은 멘셰비키와 완전히 결별하고 볼셰비키당을 만들었다.멘셰비키의 지도자 '율리 마르토프' |
한편 러시아 국내에서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노동자들의 정치파업과 시위가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1901년 2~3월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하르코프 등지에서 수만의 시위대가 '전제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같은 해 7~8월의 남러시아 노동자 총파업에는 20만의 노동자가 참여해 황제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정부는 탄압을 병행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을 혁명에서 분리하려는 정책을 썼다. 노동자 사이에 간첩을 투입하거나 관제노동조합을 설립하기도 했으며 '오흐라나'라고 불리는 비밀경찰을 운영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탄압이 심해질수록 오히려 불붙을 뿐이었다. 1901년 이러한 투쟁을 바탕으로 러시아에서 '사회혁명당(SR)'이 결성됐다. 사회혁명당은 기관지 <혁명 러시아>를 발간하여 전제정권에 대해 투쟁을 열망하지만 정치적으로 자각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 이들은 테러를 통해 전제정권과 투쟁할 것을 주장하며 당 전투단을 조직했고 반동적인 관료들을 암살하면서 차리즘에 저항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무렵 유럽의 자유주의 흐름은 거세어져서 옆나라 독일 제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마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하고 전제군주의 힘이 강하더라도 외견상 입헌군주제를 유지하였다. 마침 전쟁 때문에 인플레가 일어나고 전쟁을 이유로 수탈이 심해지자 도시의 임금 노동자들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불만을 품은 자유주의자들은 1905년, 전제정을 타파하고 현대적 인권, 노동권, 기본권 등의 개념이 담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고 농민과 노동자들도 열악한 경제 상황을 개선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에 돌아온 것은 황제의 총칼뿐이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수백 년간 러시아 국민들의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었던 황제 숭배 사상이 일시에 무너져내렸다. 이전에는 단순히 차리즘, 즉 전제정에 반하는 것이 투쟁의 목적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혁명은 군주정을 아예 부정하고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름까지 농민들은 전 러시아의 1/5를 장악했고 가을에는 절반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투쟁은 전제정권의 기둥이었던 군대마저 흔들어 놓았다. 러일전쟁의 패전과 혁명 세력의 공작이 군대의 동요를 가속화했다. 결국 6월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 같은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비록 반란은 실패했으나 노동자와 군대의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으며 이는 훗날 2월 혁명이 성공하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더 이상의 혼란을 막고 군주정을 지키기 위해 1905년 10월 선언(Октябрьский манифест)을 발표하였다. 입법권을 가진 두마(국회)[10]의 개설, 헌법 제정, 투표권 확대를 약속하였으며 언론·출판·결사·조합 결성의 자유·인권보장이 발표되었다. 11월에는 두마 선거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공포된 선거법은 많은 국민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여성은 물론 25세 미만, 군인, 학생, 종업원 50인 미만의 소기업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소규모 수공업자, 농업 노동자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선거권이 주어진 사람들도 불평등이 심했다. 국민 전체를 지주, 도시민, 농민, 노동자의 네 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선거인을 선출했는데 선거인 1명을 선출하는 사람 수가 각각 달랐다. 지주의 1표는 도시민의 2표, 농민의 15표, 노동자의 45표에 해당했다.[11] 1906년에는 헌법이 공포되고 전제군주가 두마(하원)와 국가평의회(상원)의 협조를 얻어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제가 선언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여전히 행정과 군사, 외교 등의 실권은 물론 법률 거부권, 비상시 입법권, 두마 해산권까지 장악하고 두마에서 통과된 법안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국가평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사이비 입헌 체제'였다. 무엇보다 니콜라이 2세는 공식적으로 전제군주로서의 직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10월 선언으로 개설된 두마의 모습. 니콜라이 2세의 사진이 눈에 띈다. |
총리를 맡았던 표트르 스톨리핀은 경제운용에 있어서 제법 유능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개혁 아래에서 농업 생산성은 크게 향상되었고 중산층들이 어느 정도 육성되면서 경제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그 블라디미르 레닌이 (스톨리핀의 개혁 때문에) "혁명은 글렀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스톨리핀은 암살당하였고 니콜라이 2세도 긴장감을 풀면서 라스푸틴을 감싸고 돌던 와중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초기 슬라브 민족주의에 고무된 러시아 민중은 황제를 지지하며 독일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예상 외로 강력했으며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12만 5천 명의 러시아 제국군이 전사하면서 패퇴하고 1915년 초여름 러시아령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가 함락되었고 벨로루시와 발트해 연안까지 독일 제국군이 진주하는 등 오히려 러시아가 열세에 놓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모든 물자와 병력을 몰빵하여 준비한 브루실로프 공세까지 영 좋지 않은 결과로 종결되자 러시아에선 차츰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1916년 말까지 러시아는 900만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무려 500만의 병사가 죽거나 부상당했다.
게다가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러시아 정부는 전비의 충당을 위해 막대한 양의 루블을 찍어냈는데 이로 인해 화폐가치가 하락했으며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되었다. 특히 빵을 비롯한 생필품의 물가는 엄청나게 치솟았다. 나중엔 거의 모든 국민이 전쟁을 혐오했고 반전 감정은 차리즘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노동운동도 다시 급격히 고조되어 1916년에 10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고 전쟁터에서도 병사들의 탈영과 프래깅도 빈번해졌다. 1917년 들어서는 파업이 더욱 빈번해져 1월에는 25만, 2월에는 40만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이를 진압해야 할 군대까지 전쟁에 지치면서 진압을 거부하고 파업에 호의적으로 반응하기까지 했다. 1917년 초 페트로그라드는 점점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니콜라이 2세와 정부는 상황을 수습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3.3. 2월 혁명
세계의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레닌 동지[12] |
결국 1917년 3월 8일(율리우스력 2월 23일[13])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비보르크의 방직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푸틸로프 공장[14]의 노동자들이 '전제타도', '빵을 달라', '전쟁 반대'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을 시작했고 10일(25일)에는 페트로그라드 전 도시에서 총파업이 발생해서 군경과 시위대의 충격이 본격화되었다. 12일(27일)과 13일(28일)에는 볼린스키 연대 등 진압을 명령받은 모든 병사들이 혁명 세력 편에 가담하여 러시아 제국은 결국 무너졌다. 한 정부 관리는 보고서를 통해 날짜별로 상황을 보고했다.
3월 8일(2월 23일). 비보로크 지구의 여성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 시위대, 다리 건너 시내 중심부 진입 시도. 다리에서 경찰에 저지됐으나 일부는 얼어붙은 네바강을 건너 시 중심부 진출. 오후 5시, 본대도 다리 돌파하여 넵스키 대로 행진.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도 합류. 슬로건은 주로 '빵을 달라'. 파업 참가자는 약 13만이었다. 3월 9일(2월 24일). 파업이 다른 구역으로 확대. 21만여 명이 파업에 참가하고 학생들도 개별 참가. 카자크[15] 기병이 출동했음에도 넵스키 대로에서 시위 관철이었으며 슬로건은 '빵' 이외에도 '전쟁 반대', '전제 타도'까지 나타났다. 3월 10일(2월 25일). 파업이 전 도시로 확대되어 총파업 시작. 30만여 명이 파업 참가. 신문도 안 나오고 전차도 운휴. 대학과 전문학교가 수업 거부 돌입. 시위대와 군경의 충돌 격화. 노동자들도 무기 사용. 카자크 병사가 시위대와 함께 경찰을 습격해 경찰서장 살해. 군대의 발포로 4명 사망. 슬로건은 '전제 타도'였고 '노동자 소비에트 만세!'도 등장. 비보로크 지구의 전 경찰서가 파괴되고 경찰관 모두 도망. 26일 새벽까지 100여 명 체포되었다. 3월 11일(2월 26일)일요일. 오전은 평온했고 낮부터 시위 재개. 군경이 시위대에 사격해 다수 사상. 파블롭스키 연대 4중대가 시위대 발포 저지 위해 넵스키 대로로 향함. 병영으로 돌아와 반란을 선언했으나 다른 연대 병사들에게 무장해제 당했다. 3월 12일(2월 27일), 볼린스키 연대 교도대, 하사관 지휘하에 출동명령 거부하고 장교 살해 후 반란 선언. 근위보병 2개 연대와 공병 제6예비대대도 반란 가담. 병사들이 감옥과 구치소 해방시키고 정치범 3,358명 석방, 재판소 불타고,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소총 40,000정, 권총 30,000정 탈취. 오후 3시경 비보로크 지구의 모스크바 연대, 저녁 때 장갑차 부대, 밤에 시 남부 3개 연대가 반란 가담. 총 66,700명이 반란 가담. 페트로그라드 군관구사령관 하바로프, 진압부대 편성해 출동했으나 도중 해체. |
대중들의 열망으로 혁명을 완수할 기구가 시급히 조직되었다. 12일(27일) 저녁, 타브리다 궁전에서 공장과 군대에서 선출된 대표가 모여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3월 초, 구성이 완료된 소비에트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병사들 사이에선 사회혁명당이, 노동자들 사이에선 멘셰비키가 주로 선출되었다. 농촌 출신인 병사들은 사회혁명당의 오랜 뿌리와 포괄적인 주장에 친근감을 느꼈고, 노동자들은 볼셰비키의 전투성보다 느슨하고 부담없는 멘셰비키에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3월 혁명의 성공은 러시아 제국 전역으로 퍼져 한 달도 되지 않아 전국의 모든 현과 군에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구성되었다. 공업지역에서 소비에트는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혁명 수호를 위해 적위대를 조직했으며, 제국 정부의 판사는 파면되고 인민판사를 뽑았다.
소비에트와 더불어 자본가와 지주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12일(27일) 밤, 두마는 임시위원회를 선출하고 위원회의 수도의 질서확립을 요청했다. 또한 위원회는 전선에 나가 있던 니콜라이 2세에게 대표단을 파견해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에게 재위를 양위하고 퇴위할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아들의 혈우병을 염려한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3월 2일) 남동생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양위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하일 대공이 사태의 위중함을 파악하고 재위 계승을 거부하면서,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다. 3월 17일(3월 4일)에 공화국이 선포되어, 304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던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두마 임시위원회와 소비에트의 협정하에 구력 3월 2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입헌민주주의자로서 젬스트보[16]의 지도자인 게오르기 리보프가 정부수반이 되었으며 이후 '카데츠'라고 불리는 입헌민주당과 진보당, 10월 17일 연합(소위 10월당)이 임시정부의 세력을 잡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로서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유일하게 개인자격으로 입각했다. 이리하여 신생 러시아 공화국에는 임시정부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의 소위 '이중 권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소비에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멘셰비키들은 '2단계 혁명론'에 따라 부르주아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했고 임시정부도 소비에트의 승인 없이는 중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집행할 수 없었다.
3월 혁명의 성공으로 인한 러시아 민중의 반응은 그야말로 고무적이었다. 300년 동안 민중을 억압했던 차리즘이 불과 2, 3주 사이에 사라졌고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만끽했다.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가르쳤고 학생들이 교수에게 강의를 주문했다. 문화계도 혁명의 영향으로 배우들이 극장을 인수해 대본을 직접 선택하는가 하면 극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동안 차리즘에 억눌린 민중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훗날 케렌스키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2월에서 10월 사이에 혁명은 밀물이 되어 우리는 그것을 중지시킬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
3.4. 2월 혁명 이후
{{{+1 [[러시아 제국|{{{#000000 러시아 제국}}}]]의 주요 정당}}} | ||||
마르크스주의 | 인민주의 | 자유주의 | 자유보수주의 | |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 멘셰비키 (국제파 · 주류) ^ | 사회혁명당 ^좌파 · 우파 ( 트루도비키 · 민중사회주의) ^ | 입헌민주당 | 진보당 | 10월 17일 연합 ^ 좌파 · 우파[1]^ |
[1]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당 좌파가 결성한 진보블록에 참여하지 않고 10월당 우파(right-wing of octobrists)라는 이름의 당파를 결성해 독자적으로 선거에 출마했다. |
- 앞으로 나올 용어 중 타협파, 또는 타협파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케렌스키와 임시정부를 지지한 멘셰비키 우파 및 사회혁명당 좌파를 제외한 나머지 사회혁명당을 이르는 말이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민중들이 보기에 근본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았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굶주림과 기아는 여전했다. 노동자는 여전히 착취당했고 토지는 지주들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소수민족들에 대한 탄압도 여전했다. 이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였지만 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 생각에 계속되는 전쟁은 임시정부의 자본가로서는 오히려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고 군의 위계질서를 확립해 반란을 방지할 수 있었으며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고려해 서유럽과 연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더욱 유리했다. 결국 임시정부는 제국 정부가 협상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인정하고 '최후의 승리까지 전쟁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기까지 이른다.
노동자들은 점차 미온적인 모습을 보이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에서 멀어졌고, 다시 그들만의 군위원회와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농민위원회를 만들었다.
3개의 사회주의 정당 중 가장 소수였던 볼셰비키만이 이러한 도시인들의 불만을 간파했다. 그들은 임시정부와의 협력에 반대하고, 전쟁반대와 평화조약 체결, 공산주의 혁명을 주창했다. 그러던 중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러시아 후방전선의 교란을 목적으로 한 독일의 지원으로 4월 16일(4월 3일) 귀국했다. 레닌의 실질적 의중은 독일의 의도와는 정반대에 있었다. 독일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열차에 탑승한다. 하지만, 독일의 의도는 분명했기에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레닌을 독일의 첩자라며 공격했다.
이 때 독일에서 레닌에게 봉인열차를 타게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일반 전세 열차를 타고 독일에서 스웨덴, 러시아령 핀란드를 거쳐서 평범하게 귀국했다. 독일 측에서는 열차 배차에서 우선권을 주고, 독일 국내에서 감시 인원을 붙이는 정도의 조치만 취했다.
그는 페트로그라드 핀란드 역에서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연설을 했다.
사랑하는 동지, 병사, 노동자 여러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여러분이 무척 기쁩니다. 여러분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입니다. 강도들의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입니다. 머지않아 유럽의 자본주의는 깡그리 무너질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그 시작입니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 만세!
다음 날 블라디미르 레닌은 볼셰비키 집회에서 그 유명한 4월 테제[17]를 발표하였다.
-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고 즉각 평화를 실현한다.
-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넘긴 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이 권력을 장악하는 2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 임시정부를 지지하면 안 된다.
- 소비에트의 권력을 확대해야 한다.
- 의회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국유화 한다.
- 모든 은행은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는 국립은행으로 통합한다.
- 생산과 분배는 소비에트가 통제한다.
- 당 대회를 소집하여 강령을 바꾸고 당명은 공산당으로 바꿔야 한다.
- 새로운 국제혁명조직으로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해야 한다.||
연설하는 레닌 |
4월 테제는 러시아 전역을 뒤집어 놓았다. 부르주아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고 주장했고 멘셰비키는 레닌이 '반동에 봉사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플레하노프는 '대머리가 잠꼬대를 한다'고 비꼬았다. 같은 볼셰비키 내에서도 큰 반향이 일었다. 레프 카메네프 등 당의 많은 지도자들은 러시아가 아직 사회주의의 토대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주장이 임시정부 타도로 해석되어 당국에게 체포되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말빨과 인맥으로 4월 말, 볼셰비키 협의회는 레닌의 4월 테제를 공식입장으로 채택한다.
3.5. 7월 시위
곪을 대로 곪은 임시정부와 볼셰비키 간의 갈등은 전쟁 문제를 계기로 폭발했다. 5월 1일(4월 18일) 노동자들은 즉시 강화의 슬로건을 내걸고 대규모 집회를 벌였고 같은 날 임시정부의 외무장관 파벨 밀류코프는 협상국 측에게 제국 정부가 체결한 조약을 지킬 것이며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을 통보했다. 5월 3일(4월 20일), 볼셰비키 세력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임시정부 타도', '밀류코프 타도'를 외치며 규탄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한 임시정부의 돌파구는 성공가능성이 낮은 하계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협상국의 요청도 있었지만 공세를 성공시킴으로써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이중권력을 소멸시켜 부르주아 권력을 수립한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전 분위기가 매우 심각해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고 7월 1일(6월 18일)이나 돼서야 서남 방면군에서 하계 공세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7월 19일(7월 6일), 독일군의 역공에 4만 명의 사상자만 낸 채 임시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하계공세는 참패로 끝났다. 결국 민심은 더더욱 이반하였고,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발트함대, 리가, 민스크, 톰스크 등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를 따르지 않은 세력들이 점점 늘어났다. 우크라이나 의회인 '라다'와 핀란드의 의회인 '세임'이 자치 움직임을 보이는 등의 민족 문제도 첨예화됐다.
결국 참다 못한 민중들은 7월 16일(7월 3일)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연대의 일부를 전선으로 파견하라는 임시정부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던 페트로그라드 제1기관총 연대의 무장봉기가 그 시작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소비에트 중심의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연대 총회에서는 이를 위해 볼셰비키 당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다른 부대와 공장에 대표를 파견해 함께 행동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많은 부대와 공장이 적극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정작 볼셰비키는 이러한 무장봉기에 회의적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분명히 노동자와 병사들이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할 힘을 갖고 있었으나, 전국의 민중 대다수가 아직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18]를 따르고 있어 권력을 유지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 중앙위는 시위 자제를 결정했으나 민중들은 이미 볼셰비키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16일(3일) 저녁 7시 기관총 연대를 선두로 대규모 무장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도의 각 부대와 노동자도 시위에 가담했다. 시위대가 볼셰비키 본부인 크세신스카야 저택에 도착했고 스베르들로프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자제를 호소했으나 그들에게 돌아온 시위대의 대답은 그야말로 부정적이었다. 시위대의 완강한 입장에 볼셰비키는 굴복하여 부득이 방침을 변경했다. '타브리다 궁까지 행진하여 대표를 통해 우리의 요구를 전달하자'는 볼셰비키의 제안이 시위대에게 전달되었고 시위대는 이에 동의했다. 시위대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밤 10시경 소비에트 본부인 타브리다 궁에 도착했다. 밤 12시경에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집행위와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의 합동회의가 열렸다. 5시간 이상 계속된 회의에서 시위대에 대한 압력행사에 거부의사를 밝히면서 '소비에트 권력 반대' 결의가 채택되었다. 한편, 다른 방에서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 등의 혁명파 합동회의에서는 17일(4일)에 다시 시위를 전개로 결의했다.
7월 17일(7월 4일) 아침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중앙은 무장시위를 금지하라고 경고하며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휘하의 모든 부대에 질서회복에 착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정부를 지지하는 군대는 카자크 병연대와 사관학교 생도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결국 정부는 전선 사령부에 파병을 요청하기까지 이른다. 반면 시위대는 오히려 세력이 크게 늘고 있었다. 크론슈타트에서 1만여 명이 배를 타고 도착하는 등 수도 근교로부터 병사와 노동자가 밀어닥쳐 시위대는 50만을 넘었다. 그러나 더 이상 판이 커지는 것이 두려웠던 볼셰비키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시위대를 설득하는 바람에 7월 시위는 허무하게 종결되었다. 한편, 수도의 시위에 자극받아 지방에서도 봉기가 발생했다. 발트함대, 핀란드, 리가, 이바노보 등지의 많은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를 외쳤고 많은 곳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지방은 아직까지 전체적으로 혁명파보다 타협파가 우세했기 때문에 봉기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힘을 얻은 임시정부와 타협파가 반격을 개시했다.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 주장했고 중립적이었던 이에 동조한 몇몇 부대가 임시정부에 붙었다. 전선에서도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가 도착했다. 7월 시위 이후 볼셰비키에 대한 임시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7월 시위에서 볼셰비키의 세력이 예상보다 강력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본부가 점령되었고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발행이 금지되었다. 시위에 적극 가담한 노동자의 집이 수색당했고, 반란에 가담한 부대가 해체되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도 수배령이 내려져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지하로 피신했고, 레프 카메네프, 레프 트로츠키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볼셰비키의 세력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4월에 8만이었던 당원이 8월엔 24만이 되는 등 탄압과 비례하여 세력이 더욱 늘어났다.
7월 시위와 이후의 탄압은 러시아의 세력관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대부분의 러시아 평민들은 이제 임시정부를 더 이상 믿지 않았고 뒤이은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로 임시정부는 완전히 민심을 잃었다.
3.6. 케렌스키 내각과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라브르 코르닐로프 |
7월 시위 이후 농업문제 등에 관한 노선의 차이로 제1차 연립정부는 붕괴했고 8월 6일(7월 24일) 제2차 연립정부가 설립되었다. 트루도비키(Labour Group)의 당수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새로운 수상이 되었고 사회주의자 7명, 자유주의자 8명이 각료로 취임했다. 신임 수상 케렌스키에게 비상대권이 주어졌고, 입헌민주당의 요청으로 내각은 소비에트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혁명과 완전히 관계를 끊은 케렌스키는 이제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서유럽의 민주정치에 심취한 각료들은 몸짓과 스타일까지 서유럽을 모방했고, 권위에 대한 복종을 내세우며 민중의 혁명적 요구를 묵살했다. 민중의 요구는 제헌의회 구성 뒤로 미루어졌고, 그 구성 시기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했다. 민중들의 마음이 임시정부를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8월 8일(7월 26일)부터 열린 제6차 당대회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철회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소비에트가 우경화된 지금, 오로지 무장봉기만을 통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즉각 행동하지는 말고 민중들이 좀 더 임시정부에게서 멀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혁명파와 부르주아, 타협파 사회주의자들의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크게 부상했다. 그는 7월 31일(7월 18일) 최고사령관에 오른 후 군사독재를 향한 발걸음을 본격화했다. 군사령관과 보수주의자들 대다수가 그를 지지했다. 8월에 들어 코르닐로프는 군사동원을 개시하며 군대의 일부를 수도 주변에 집결시키고 자파에 있던 주력부대를 훈련시켰다. 8월 24일(8월 11일)의 각료회의에서는 '후방에서의 사형 부활', '지휘관 권한 회복', '병사위원회 권한 제한' 등을 포함하는 코르닐로프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 내각을 끌어내리고 과거로 회귀하기 위한 독자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9월 7일(8월 25일) 코르닐로프는 기병 제3군단을 전선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동시켰다. 군단장은 수도와 인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9월 8일(8월 26일),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즉시 자리에서 물러나고 모든 권력을 최고사령관에게 넘기라는 최후통첩을 띄웠다. 이것이 쿠데타임을 직시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즉각 코르닐로프군을 반란군으로 선언하고 소비에트와, 심지어 볼셰비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다. 코르닐로프의 부대는 즉각 수도를 향해 진격했다. 소비에트 지도부와 사회혁명당, 멘셰비키들은 민중들에게 임시정부의 방위를 호소했다. 볼셰비키도 민중들에게 반혁명 분쇄투쟁에 일어서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것이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위한 것도 아님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쨌든 민중들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 결과 코르닐로프가 보낸 전신이 그의 부대에 전달되지도 못했고 반란군이 탄 기차는 철도 노동자들의 방해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민중들에게 간단히 진압되고 말았다. 9월 12일(9월 1일)에는 코르닐로프와 공범들이 체포되면서 반란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코르닐로프의 반란 이후, 민중들은 부르주아와 타협파 사회주의자들의 무능함과 혁명을 타도하려는 세력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정부가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그 결과 민중들 사이에서 전쟁 반대와 혁명적 투쟁을 계속해 온 볼셰비키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민중들은 소비에트의 타협파 대의원들을 소환하고 그 자리를 볼셰비키로 대체했다. 9월 11일(8월 31일), 창설 이래 처음으로 볼셰비키가 다수를 이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즉시 강화, 지주토지의 몰수해, 노동자에 의한 생산통제,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 등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의 결의를 채택했다. 9월 16일(9월 5일)에는 모스크바 소비에트도 같은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 밖의 많은 도시에서 소비에트의 볼셰비키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 무렵 러시아 경제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연료난과 원료부족으로 공장의 가동이 멈추고 식량난도 극심해졌다. 이 모든 것이 부르주아와 지주로 이루어진 임시정부 때문이라고 생각한 노동자들을 공장을 장악하여 직접 관리를 하고 농민들은 전투적으로 변해 지주를 추방하고 스스로 토지를 재분배했다. 유럽 러시아의 절반 이상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군대도 동요해 지휘관을 추방하고 직접 지휘관을 선출했으며, 전쟁을 계속 거부했다. 한편, 민중의 혁명화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분열은 더욱 극심해졌다.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 국제주의자들은 볼셰비키에 점점 가까워졌고, 사회혁명당 좌파세력은 독자행동을 선언하며 기존의 사회혁명당[19]에서 완전독립을 선언했다. 정세는 볼셰비키에게 전적으로 유리해졌다.
이로써 또 한 번의 혁명이 일어날 모든 준비가 끝났다.
3.7. 10월 혁명
적위대의 모습 |
라브르 코르닐로프의 반란 와중 제2차 연립정부는 와해되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9월 14일(9월 1일) 5명의 각료로 총재정부를 구성하였다. 총재정부는 정식으로 러시아 공화국을 선언하고 두마를 공식 해산하는 등 형식적으로 양보를 하는 한편 '반혁명 분쇄 투쟁위원회'의 해산, 군대 내의 정치투쟁 중지 등을 명령하며 고양된 민중운동을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민중들은 통제되지 않았고 민중의 혁명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것을 느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민중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카데츠가 참가하는 새정부에 입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볼셰비키는 두 정당에게 부르주아와의 연대를 끊고 좌파끼리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으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모든 세력의 통일'을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벗어난 소비에트를 공격하고 소비에트를 대신하여 '전 러시아 민주세력 협의회'를 소집했다.
10월 8일(9월 25일)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다시 카데츠와 멘셰비키 우파, 사회혁명당의[20] 지지를 얻어 제3차 연립정부를 수립했다. 정부는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가 대거 참여하는 '공화국 임시의회'를 선출하였다. 당연히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졌고 이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원하고 있었다, 10월 초,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지금이 무장봉기를 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10월 23일(10월 10일)과 10월 29일(10월 16일)에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와 확대중앙위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장봉기를 통한 권력장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재차 확인했다. 레닌이 국외망명을 잠시 갔을 때 볼셰비키를 임시적으로 이끌던 스탈린은 당초 봉기반대파의 입장에 서 있었으나, 레닌의 입장이 신속한 봉기라는 것이 확인되자 입장을 급격하게 바꿔 무장봉기를 지지한다. 레닌은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역사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파를 억눌렀다. 10월 25일(10월 12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레프 트로츠키의 주도 하에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수도와 혁명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서 봉기 지도부인 군사혁명중앙이 구성되어 당 군사조직과 함께 군사혁명위원회와 힘을 합쳤다. 이제 봉기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반혁명파의 거점은 페트로그라드 중심부에 있었다. 임시정부는 겨울궁전에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총사령부와 해군성이 있었다. 혁명파의 사령부는 시의 동쪽 변두리의 귀족 여학교인 '스몰니 학원'이었다. 이곳에는 군사혁명위원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볼셰비키 당중앙이 있었다. 혁명파의 주력부대는 셋이었다. 적위대는 북쪽과 동쪽과 남쪽에서 시의 중심부를 포위했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혁명파 부대는 그 안쪽에서 제2의 반원을 형성했다. 서쪽에서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요청으로 발트해 함대가 네바강 하구를 장악했다. 혁명파의 노동자와 육군과 해군은 합동으로 페트로그라드를 포위해 차단했다가 일시에 공력, 점령할 계획이었다. 트로츠키는 혁명을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 앞에는 진정한 인민의 정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역사가 빗자루로 쓸어내 주기를 바라는 무력하고 가엾은 정부가 있다.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을 조직하여 전국에서 행해진 작업을 마무리 지을 것이다. 만약 정부가 등 뒤에 칼을 꽂으려 한다면, 우리는 반격으로 대응할 것이다. 타격에는 타격으로, 철에는 강철로!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 |
11월 6일(10월 24일) 밤,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시로 즉각 행동이 개시되었다. 중앙전신국, 우체국, 전화국, 주요 역이 혁명군에게 장악되었고 7일(25일) 저녁까지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제외한 반혁명파의 모든 거점이 분쇄되었다. 마침내 8일(26일) 새벽 2시, 겨울궁전이 점령되면서 혁명은 완료되었다. 7일(25일) 밤, 스몰니 학원에서 열린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가 장악했음을 선포했다. 11월 8일(10월 26일)에는 <평화에 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가 발표되어 즉시강화와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약속했다. 대회는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를 새로 선출하고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라 할 수 있는 인민위원회를 창설했다. 레닌이 인민위원장이 되었고 트로츠키는 외무, 스탈린은 민족인민위원직을 맡았다. 중앙 집행위장에는 스베르들로프가 임명되었다.
바야흐로 세계 최초의 공인된 노동자 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레닌은 연설을 통해 혁명의 성공을 기념했다.
소비에트 권력이란 무엇인가? 국민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 새로운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점점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권력의 본질은 부자들과 자본가들이 독점하던 국가 경영이 이제는 처음으로 억압받고 박해당하던 계급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레닌의 정의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레닌의 정의
10월 혁명 자체로 모스크바를 제외하고 혁명은 희생자를 거의 내지 않고 막을 내렸다. 실제로 당시의 페트로그라드는 조용했으며, 겨울 궁전 등의 정부 시설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극소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뿐 혁명 자체는 비교적 평화롭게 끝났다.[21]
3.8. 10월 혁명 이후
혁명은 성공했지만 권력을 막 잡은 소비에트 정부의 기반은 취약했다. 농촌에서는 농민 대다수가 아직도 사회혁명당을 따르고 있었고 도시에서는 적지 않은 민중들이 소비에트가 정부의 역할까지 맡는다는 것에 생소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망친 케렌스키와 타협파 정당들은 즉각 반격을 개시했다. 케렌스키는 반혁명파 카자크 부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격했다.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는 사관생도들을 선동,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혁명의 성공으로 사기가 충만한 볼셰비키에게 이들은 12월 초(11월 말)에 모두 분쇄되었다.노동자와 빈농, 병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의 공산주의적 개조에 착수했다. 공산주의적 생산과 인민경제 관리를 위해 인민위원회 산하에 '최고인민경제회의'가 창설되었고, 지방에서도 각급 국민경제회의가 만들어졌다. 남아있던 봉건제의 유물도 일소되었다. 지주 소유의 토지가 사라졌으며,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러시아 주민이 '인민'이 되었다. 학교는 교회에서, 교회는 국가에서 분리되었다.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다, 11월 15일(11월 2일) 공포된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은 러시아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평등권을 법령으로 확립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인민의 경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도 힘을 쏟았다. 노동자들에게 식량이 우선 공급되었고, 그들은 지하실과 가건물에서 나와 부르주아와 지주 소유였던 좋은 집으로 몇 가족씩 합쳐 이주했다.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고 노동조건도 개선되었으며, 산업재해와 실업에 대한 보험법도 발표되었다. 학교교육과 의료서비스도 모두 무료로 제공되었다. 황제의 궁전과 부호의 대저택은 인민의 집회장, 요양소, 박물관이 되었다.
또한 소비에트 정부는 임시정부가 예전에 약속한 제헌의회 설립을 예정대로 이행하기로 결정했다. 11월 혁명 이후에도 제헌의회 설립은 여전히 민중, 특히 농민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소비에트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해 신생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지지도를 확보려고 노력했다. 민중들에게 의회제도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직접 체험하게 하려는 것도 이들의 의도였다. 11월 25일(11월 12일), 20세 이상 모든 남녀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보통, 평등, 비밀, 직접의 원칙에 따라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했다. 그 결과 사회혁명당이 40% 득표로 제1당, 볼셰비키가 24%로 제2당이 되었고 나머지 표는 기타 정당이 나누어 가졌다. 볼셰비키는 대도시, 공업 중심지, 군주둔지에서 지지를 얻었고 사회혁명당은 농촌지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선거과정에서 큰 논란이 발생하였는데, 정상적으로 의회가 구성되었다면 사회혁명당 좌파와 친볼셰비키 세력이 과반수를 얻을 수 있던 상황에서 반볼셰비키 정당 중 가장 큰 세력이었던 사회혁명당 우파가 좌파에 대한 공천 학살과 사실상의 선거 조작[22]을 행하게 되자 큰 논란이 일어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1917년 러시아 제헌의회 선거 항목을 참고하라.
과정이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반소비에트 세력은 제헌의회를 통해 다시한번 설욕전을 준비하려 하였다. 사회혁명당 우파의 체르노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헌의회 지도자들은 제헌의회를 소비에트 권력과 대치시켜 '모든 권력을 제헌의회로!'라는 슬로건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소비에트는 의원의 소환권을 도입하고, 제헌의회에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제헌의회를 둘러싸고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이견이 표출되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소비에트를 혁명의 기둥으로 삼아 제헌의회를 견인하여 혁명과업을 이루어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소비에트가 제헌의회보다 백배 천배 민주적인 제도'라며 제헌의회가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천명했다.
1918년 1월 17일(1월 4일), 소비에트 중앙집행위는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했다.
1. 러시아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소비에트공화국이다. 2.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유로운 민족의 자유로운 연합의 토대 위에 세워질 것이다. 3. 소비에트 국가의 기본과제는 인간에 의한 착취 폐지와 사회주의 건설이다. 4. 평화와 토지와 민족해방에 관한 대중들의 열망을 즉시 실현할 것이다. |
1월 18일(1월 5일), 제헌의회가 소집되었고 중앙집행위 위원장 스베르들로프가 위의 선언을 인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제헌의회의 다수파인 우익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볼셰비키들의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 제헌의회는 제안을 거부하고 사회혁명당 우파가 마련한 별도 법안의 심의에 들어갔다.[23] 17시간의 토론 후 의회는 휴회했지만 소비에트 중앙집행위가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제헌의회의 해산을 명령함으로서 제헌의회는 단 하루만에 사라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고작 2개월 존재한) 의회해산에 무덤덤하게 반응했지만 의회의 활동을 기대했던 시민과 지식인들은 볼셰비키의 조치에 수긍하지 못했다. 사회혁명당 좌파를 제외한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은 볼셰비키에 등을 돌렸으며 일부는 러시아 내전 때 볼셰비키에게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
제헌의회 해산 직후 열린 제3차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농민 소비에트 통합대회는 제헌의회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승인하여 마침내 볼셰비키가 권력을 확고하게 잡게 되었다.
3.9. 파장의 확산
이후 레닌은 독일에게 유리한 협정을 맺으며 사실상의 항복을 하고 당시 러시아 영토였던 동유럽 지역을 몽땅 내어주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여기엔 핀란드,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의 지역들 또한 모두 포함된 상태였다. 이후 독일 제국은 레닌을 지원하며 노린 것을 이뤘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전세를 호전시키지 못할 정도로 약화된 상태였다. 이미 독일은 전쟁의 장기화로 물자 부족이 심각한 지경이었고, 잠재적국인 미국을 배제하고자 보냈던 치머만 전보가 발각되면서 미국이 참전하는 역효과가 나는 바람에 독일은 더더욱 끝자락으로 밀려났다. 결국 1918년에 독일군의 방어선이 돌파당했고, 이어서 벌어진 킬 군항의 반란과 독일 11월 혁명의 여파로 독일은 항복했다.또한 1차 세계 대전 뒤 러시아 내부에서 반볼셰비키 세력이 다시 규합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고 연합군도 반 볼셰비키 세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승리하여 소련을 건국한다. 여기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수민족들도 일제히 봉기하였고 그 결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가 독립했다. 한편 볼셰비키는 내전기 중 백군의 구출 계획을 듣자 퇴위 뒤에도 살아남았던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을 총살시켰다.
볼셰비키와 협력하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좌파)은 상반된 결말을 맞았다. 멘셰비키는 볼셰비키를 부정하였으나 백군은 더 싫어하였고 러시아 소비에트에 협력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5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1918년 7월 17일(7월 4일)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좌파)을 모두 소비에트에서 축출했고, 이에 반발해 사회혁명당(좌파) 측에서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다. 흔히 이 봉기를 제3혁명이라고도 부르고, 파니 카플란이 레닌을 암살하려 시도한 것도 이 시점이다.
흥미롭게도 사회혁명당(좌파)의 봉기가 실패하는 동안 멘셰비키는 오히려 볼셰비키와 협조했고, 1918년 11월 6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멘셰비키측은 전부 복권되었다. 심지어 사회혁명당(좌파)마저도 1919년 1월 봉기의 실패 이후 1919년 2월에는 복권되었다. 이후 사회혁명당(좌파)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볼셰비키를 적극 지원했으나, 볼셰비키는 이들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고 결국 1921년에 다시 해산되었다. 레닌은 사회혁명당 수뇌부의 사형 집행을 촉구하였으나, 흥미롭게도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사형 판결을 받은 12명의 사형집행을 정지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스탈린에 의해 전부 처형된다.
최후까지 볼셰비키의 애증의 상대였던 멘셰비키는 직접적으로 금지조치를 당하지는 않았으나 1919년부터 암묵적으로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1919년 멘셰비키가 건국했던 조지아 민주공화국을 소비에트 러시아가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비공식적인 탄압이 지속되었고, 1921년의 크론슈타트 선원 반란 사건 이후 멘셰비키도 완전히 와해되고 수장인 줄리어스 마르토프마저 독일로 망명한다. 이후 각 정당과 정치단체의 탈당멤버들을 받아들여 세를 불린 볼셰비키, 후 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은 전위당에서 관료조직으로 변신하여 제동 없이 폭주하게 되었으며, 훗날 집권한 스탈린은 그러한 탈당멤버들을 전부 숙청함으로써 소련에서의 정치적 다원주의는 고르바초프 집권기가 될때까지 소멸한 상태로 머물고 만다.
이렇게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멸망하였다.
공산당의 확산. |
러시아의 공산혁명은 반자본·반제국을 외쳤고 지배세력을 타도했다는 이미지 때문에 서유럽 내 사회주의 세력들에게는 물론 당시 열강의 침략에 신음하던 나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소련도 제국주의 침략에 신음하는 국가들이 공산주의가 퍼지기 좋은 환경임을 알았다. 따라서 이들 국가에 반제국주의·반침략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명목으로 공산주의를 알려, 전 세계에 공산주의가 퍼져나갔다. 실제 여러 방법으로 지원했는데 민족주의 운동에도 상당한 지원을 뒷받침했다. 한반도에서도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실체가 3.1 운동의 실패로 명백히 드러난 뒤라 열강에게 실망감이 늘었는데 소련이 직접적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을 지지할 뿐더러 직접 지원까지 하니, 당연히 지지하는 사람이 나온다.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 때는 조선인 대표들이 참가하여 당시 사진을 보면 태극기가 떡하니 등장한다. 링크 당장 쑨원만 해도 국공합작을 지지했으니 이런 분위기는 해방 직후까지 이어진다.
한편 다른 정치 사안들에 비하면 약간 사소한 부분이지만, 이 러시아 혁명은 세계 포도주 시장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본래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귀족 사회는 중요한 포도주 수요처였는데, 혁명으로 인해 왕실 및 귀족 사회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포도주 수요가 급감하게 된 것. 게다가 혁명이 일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에서 금주법을 시행하고, 여기에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포도주 업계는 오랫동안 침체에 빠진다.
4. 어록
우리는 비애에 젖은 부르주아 놈들 모두에게
전 세계적인 큰 불을 지를 것이다.
피에 젖은 전 세계적인 큰 불을
(...)
눈은 쓰라리고
휘날리는 붉은 기
(...)
자- 오라
이를 악문 원수...
눈보라로 눈을 뜰 수 없어도
낮에도 밤에도
전진 또 전진....
나아가자, 전진이다!
노동자 인민이여, 전진이다!
걸음도 당당하게 전진한다
누군가, 아직 거기 있는 자? 나오라!
힘겹다 - 앞에는 바람이 불고
붉은 기는 펄럭이고 있을 뿐....
알렉산드르 블로크, 「십이(十二)」 中
전 세계적인 큰 불을 지를 것이다.
피에 젖은 전 세계적인 큰 불을
(...)
눈은 쓰라리고
휘날리는 붉은 기
(...)
자- 오라
이를 악문 원수...
눈보라로 눈을 뜰 수 없어도
낮에도 밤에도
전진 또 전진....
나아가자, 전진이다!
노동자 인민이여, 전진이다!
걸음도 당당하게 전진한다
누군가, 아직 거기 있는 자? 나오라!
힘겹다 - 앞에는 바람이 불고
붉은 기는 펄럭이고 있을 뿐....
알렉산드르 블로크, 「십이(十二)」 中
"나는 여러분이야말로 러시아 혁명의 승리자이며,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루어 낸 러시아 혁명은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
레닌이 민중 앞에서 혁명의 승리를 선언하면서 한 말
레닌이 민중 앞에서 혁명의 승리를 선언하면서 한 말
나는 (...) 한 노동자가 모는 화물차의 앞자리에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갔다. (...) 지평선에 걸쳐서 낮보다는 밤에 훨씬 더 멋진 수도의 번쩍이는 불빛이 메마른 벌판의 보석의 담장처럼 펼쳐져 있었다. (...) 차를 모는 늙은 노동자는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환희에 찬 몸짓으로 저 멀리서 빛나는 수도를 가리켰다. "내 것이야!" 그는 환한 얼굴로 외쳤다. "이제는 모두 내 것이야! 나의 페트로그라드야!"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25]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25]
볼셰비키가 그 필요성에 대해서 항상 얘기해왔던 노동자 농민의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10월 24일, 25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노동운동은 평화와 사회주의의 이름아래 승리할 것이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MBC, 러시아 혁명 1부, 2006
MBC, 러시아 혁명 1부, 2006
세인트 시프리언스를 떠나기 1년 전쯤에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크고 금발이며 나보다 한 살 많았던 러시아 아이 하나가 내게 물었다. "너네 아버지 일 년에 얼마나 버시냐?" 더 낫게 느껴지라고 내가 짐작한 액수에 몇백 파운드를 더해서 말했다. 단정한 걸 좋아하던 러시아 소년은 연필과 수첩을 꺼내더니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진 너네 아버지보다 200배 이상을 버는구나." 그는 제법 깔보듯 흐뭇해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게 1915년의 일이었다. 몇 해 뒤에 그 돈이 다 어떻게 됐을지 자못 궁금하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p.429
"우리 아버진 너네 아버지보다 200배 이상을 버는구나." 그는 제법 깔보듯 흐뭇해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게 1915년의 일이었다. 몇 해 뒤에 그 돈이 다 어떻게 됐을지 자못 궁금하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p.429
5. 현대 러시아에서의 평가
오늘날 러시아 혁명은 현재 러시아 연방 정부 입장에서 점점 더 외면받고 있다. 옐친 시절인 1995년부터 정부 차원의 기념식과 군사 퍼레이드를 재개하였으나 규모는 소련 시절에 비해 축소되었으며, 그나마도 2004년부터는 행사의 성격 자체가 '독소전쟁 당시 모스크바 방어전에 나선 소련군 장병을 격려하고자 스탈린이 혁명기념일에 맞춰 행사를 치른 것'을 기념하는 날로 바뀌었다. 독소전 전승기념일에 러시아 대통령이 기념사를 낭독하는 것과 달리 11월 7일에는 모스크바 시장이 낭독한다. 독소전 전승기념일보다는 한 단계 격이 낮은 행사를 치르는 셈이다. 러시아 정부 자체도 혁명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러시아 혁명 100주년이었던 2017년 러시아 혁명일에는 소규모 군사 퍼레이드와 모스크바 시장이 기념사를 낭독하고 임시정부 인사들이 체포됐던 시각인 오전 2시 10분에 오랫동안 멈춰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방 탁상시계도 2017년 10월 25일을 기해 현재 시각에 맞춰 흐르도록 해놓는 등# 1995년 이래 늘 치르던 소규모 행사만 열렸을 뿐 러시아 연방정부차원에서 특별히 100주년을 기념하는 정부주최 특별 기념식은 일절 없었으며# 대신 야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과 좌파단체들이 거리행진과 기념집회를 열었다.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고 하며, 약 3시간 동안 모스크바 거리를 행진하다가 다함께 인터내셔널가와 소비에트 연방 찬가, 그 외의 소련 군가들을 부르고 해산했다.[26]
러시아의 대표적인 언론사인 러시아 1은 이 날 열린 소규모 퍼레이드에 대해 보도하면서 100년 전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 대해 "우리 나라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대사건" 이라는 중립적인 입장을 내 놓았다.#
현재 러시아 우익들은 볼셰비키와 레닌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본인부터 레닌에 비판적인 인물이다. 2016년에도 이미 대차게 깠던 입장. # 2004년에는 러시아 혁명 기념일(11월 7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해버렸고 러시아 혁명으로 폐지되었던 러시아 제국의 국경일(11월 4일)[27]을 국민화합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국경일로 부활시켰는데 혁명 100주년이라고 특별히 기념해줄 리 만무하다. 러시아 우익들이 레닌과 러시아 혁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레닌이 당시 전쟁 중이던 독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아 러시아 정부를 무너뜨렸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그간 제정 러시아가 팽창하면서 획득한 영토 대부분을 내줬기 때문이다.[28]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가 혁명으로 폐위되어 처형당한 당시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을 1998년에 성인으로 추대한 바 있는데 러시아 정교회의 위상을 국교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있는 푸틴 정권 입장에서는 황제를 처형한 볼셰비키들과 러시아 혁명을 긍정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다.
러시아 국민들은 레닌이 주도한 10월 혁명에 대해서는 긍정적 여론이 부정적 여론을 약간 앞서는 편이다.[29] 러시아에서는 대체로 소련 시절을 나쁘게 보지 않지만, 사회주의 체제를 이념적으로 높이 평가해서라기 보다는 '초강대국'에 대한 향수인 경우가 많다.[30] 같은 이유로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선 긍정적인 평가가 부정적인 평가를 앞서며[31], 2008년에 시행된 "위대한 러시아인" 앙케이트에서 3위에 들었다.
현재도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중국에서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공산주의 관련 유적 여행을 장려하고 있기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이른바 홍색 관광으로 불리고 있다. 다만 울리야놉스크, 레닌 영묘와 같이 소련 시절 공산주의 이념과 관련된 관광지는 소련 붕괴 이후 외면받는 추세이기에 현지인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친러 성향 국가인 벨라루스에서는 소련 붕괴 이후로도 10월 혁명 기념식을 개최했다. 벨라루스 말고 10월 혁명일을 기념일로 하는 나라는 미승인국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있다.
러시아 국립 역사박물관에서 2017년 7월 19일까지 전시한 ‘러시아 대혁명기 아이들의 그림’ 전시회도 볼 만하다. 혁명 당시 학생들이 학교에 오는 길에 거리와 광장에서 본 것을 그려보라는 과제를 받고 그린 것들이다. 당시 아동들의 그림
한편, 10월 혁명이 일어난 날(11월 7일)은 러시아인들이 전승절(5월 9일) 다음으로 많이 알고 있는 역사적인 날이다(두 사건 모두 러시아 역사 교과서에서 가르친다).
6. 관련 서적
- 김학준, 러시아 혁명사
- 스티븐 A. 스미스 , 러시아 혁명 1917년에서 네프까지
-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1917년 러시아 혁명
- 올랜도 파이지스, 혁명의 러시아 1891~1991
- 쉴라 피츠패트릭, 러시아 혁명 1917-1938
- E.H 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
- 로버트 서비스, 레닌
-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 레프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 최일붕,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
- 전함 포템킨
- 존 M 톰슨,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러시아 혁명을 포함한 러시아 근대사와 소련 역사를 통째로 다룬다.
- 박노자, 러시아 혁명사 강의: 비전공자가 쓴 책이라 깊이가 얕다. 다만 혁명 이후의 현실사회주의 국가 소련에 대해 다룬 내용은 저자 본인의 경험이 들어가 읽어볼 만 하다.
-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 2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7. 관련 문서
[1] 두 차례의 혁명을 따로 나누어 2월 혁명, 10월 혁명으로 부르거나 두 사건을 묶어서 볼셰비키 혁명으로도 부른다.[2] 율리우스력 2월 23일 ~ 10월 26일[3] 러시아는 혁명 직후인 1918년에 그레고리력을 채택했고 정교회에서는 종교력으로 율리우스력을 계속 쓴다.[4] 율리우스력은 그레고리력보다 13일 느리다는 점 때문에 율리우스력으로 센 크리스마스는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월 7일이고 율리우스력의 새해는 그레고리력으로 1월 14일이다.[5] 당시 수능특강에서 이를 주로 3월 혁명이란 명칭으로 가르쳤는데 정작 모의고사에 2월 혁명이라고 나와서 한때 말이 많았다.[6] '옵시나'라고 불리던 러시아 고유의 농촌 공동체를 중심으로 농민을 바탕으로 한 혁명을 주장하며 농촌 계몽을 위해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1881년에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을 당한 사건도 이들이 저지른 일이었다.[7] 멘셰비키가 되어 레닌의 볼셰비키와 대립하게 된다.[8] '불꽃'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단어[9] 하지만 다음 대회에서는 다시 뒤집혀 멘셰비키가 다수였고 볼셰비키가 소수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실제 세력에 있어서도 온건 노선을 추종한 멘셰비키가 더 컸다.[10]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알렉산드르 불리긴이 제안하여 '불리긴 두마' 라고 불렸다.[11] 1907년에는 지주의 1표가 대자본가의 4표, 중산층의 65표, 농민의 260표, 노동자의 540표에 해당되도록 변경되어 더욱 더 불평등이 심화되었다.[12] 러시아 혁명을 옹호하는 신문 만평에 적힌 글귀.[13] 당시 러시아는 그레고리력으로 바꾸지 않고 율리우스력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혁명 직후인 1918년에 그레고리력을 도입했는데 공교롭게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모두 율리우스력 기준으로 월말에 벌어진 일이라 그레고리력으로 재환산한 결과 날짜가 모두 다음 달로 넘어갔다.[14] 당시 러시아 최대 금속 공장이었다.[15] 카자크와 카자흐는 다르다. 카자크 참조.[16] 제정 러시아에서 1864년의 개혁으로 설치된 지방 자치 기관. 중앙 정부의 감독 아래 주(州), 군(郡) 단위로 구성되어 토목, 위생, 교육, 경제 등의 문제를 맡아보다가 러시아 혁명 후 없어졌다.[17] 원제는 <당면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임무>[18] 이때 멘셰비키는 율리 마르토프를 위시한 친볼셰비키 당내 좌파가 당권 장악을 시도했으나 임시정부에 친화적인 우파에게 밀려있는 상태였다.[19] 사회혁명당 우파: 트루도비키와 인민사회주의자 등이 있었다.[20] 좌익 사회혁명당을 제외한 사회혁명당 주류 및 민중사회주의 분파[21] 실제 혁명 당시에 죽은 사람보다 당시 상황을 그린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대작영화 10월 촬영 시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말까지 있다.[22] 분당한 사회혁명당 좌파가 볼셰비키와 연정한 상황에서 투표지에는 사회혁명당의 좌파와 우파 구분이 없었다.[23] 이때 제헌의회는 러시아 민주 연방 공화국(Russian Democratic Federative Republic)을 선포했으나 다음날 제헌의회가 해산되면서 곧바로 폐기된다.[24] 소련의 혁명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에서는 문구 아래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이 적혀있다.[25] 미국의 급진적 저널리스트 존 리드(John Reed)가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을 직접 목격하고 취재하여 기록한 르포르타주이다. 훗날 레닌은 이 책이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모든 노동자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26] 일부 민주노총쪽 한국인들도 참가했다. 관련영상을 보면 '단결투쟁'이라는 민주노총에서 투쟁할 때 사용하는 머리띠가 보인다. 영상 9분 15초에 확인 가능하다.[27] 1612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모스크바에서 몰아낸 것을 기념하는 날. 이때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황제로 추대된 사람이 로마노프 왕조의 시조인 미하일 1세였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 국경일로 기념했다.[28] 여기에 일본 제국도 매우 깊숙하게 관여하기까지 했으며, 영토 문제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조금 더 자세한 사항은 밑의 여담 참조. 푸틴은 이 혁명에 대해 비판할 때마다 이 점을 항상 들먹인다.[29] https://www.levada.ru/en/2017/04/21/the-october-revolution/[30] 소련 붕괴에 대해서는 2015년 기준 17%만이 긍정적으로 본 반면에 63%가 부정적으로 바라봤는데 그 이유로는 통합경제시스템 붕괴(53%), 강대국에 소속됐다는 느낌 상실(43%), 상호 불신 증가(31%), 친척·친구 관계 단절(28%), 자유로운 여행 불가(15%) (복수응답)등을 들었다.[31] https://www.levada.ru/en/2016/06/10/stalin-2/, https://www.levada.ru/en/2017/09/26/great-terr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