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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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문서는 소련의 교육에 대해 다루는 문서다.1987년 디즈니에서 제작한 소련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소련 교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련 공산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03년 미래에 자신들이 세울 나라에서 시행할 교육 원칙을 입안했는데 그 핵심적인 내용은 16세 이하 아동을 위한 무상 보편 교육, 교육의 세속화, 러시아어 교육, 평등 교육이었다.
소련 교육학의 핵심은 마르크스주의 교육학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이 교육의 일부여야 하며 교육과 노동을 결합해야 한다는 학설을 제시했다. 이 학설은 실습과 이론 교육을 병행해서 가르침과 동시에 생산 기술의 기초를 종합적으로 익히게 하면 이론과 실제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인간이 전면적인 발달을 이뤄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마르크스의 뒤를 이은 공산주의자들은 기존의 교육 제도와 교육학이 학생들을 체제에 순응하게 하고 사회적 특권과 계급의 세습을 저지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고 학생들의 능력 향상과 인성 함양과는 무관한 형태로 학생들을 교육, 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상부 구조에 해당하는 교육은 아무리 자율성을 보장받더라도 하부 구조에 해당하는 경제에 좌우되기 때문에 경제 체제가 허용하는 한계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10월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이상 기존의 교육 방식과 차르 정부가 장려하던 종교 학교를 유지하는 것은 소련 수뇌부들 입장에서는 언어 도단이었다.
그래서 소련은 마르크스주의 교육학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제시한 ‘종합 기술 교육론’을 채택함과 동시에 러시아 제국의 ‘계급적이고 불평등하며 종교적인 교육 제도’를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세속화된 교육 제도’로 변화시키고 사회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새로운 인간을 육성하려고 했다.
이 종합 기술 교육론은 연방이 해체되는 그날까지 유지되었고 소련 교육학의 핵심 이론으로 기능했지만 소련 후기에는 인문계 선호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종합 기술 교육론의 한계점이 나타나고 서방 교육학계에서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상황에서도 소련은 이를 포기할 수가 없었는데 국부라고 할 수 있는 레닌이 종합 기술 교육론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교육 과정 개편은 최고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이뤄지는 경향이 강했으며 가장 긴 집권 기간을 자랑하는 스탈린 시대에 가장 많은 변화가 이뤄졌다. 연방 공화국은 교육에 대한 재량권을 부여받아서 공화국 내부의 교육 과정에 변화를 줄 수 있었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 국가들도 자체적인 교육 과정을 입안하고 지속적으로 개편을 진행했기 때문에 같은 공산권 국가라고 해도 교육 제도는 상이한 점이 많았다.
연방 정부는 토착화 정책[1]을 실시해 소수 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고 자치권을 부여했다. 교육 분야에서의 토착화 정책은 문맹 퇴치와 민족 언어와 문화, 역사 교육으로 이어졌다. 소련의 토착화 정책은 스탈린 시기에는 그 의미가 대단히 희석되지만 스탈린 사후에 다시 강화되어 소수민족에 대한 혜택 부여, 민족 언어와 문화, 역사 교육의 재개와 개선이 이뤄졌다.
2. 학제와 특성
소련의 학제는 초등, 중등, 고등 교육 과정으로 이어진다. 의무 교육 과정은 스탈린 정권 시기에 7년으로 시작해서 브레즈네프 시기에 10년으로 늘어나고 마지막으로 체르넨코 시기에 총 11년으로, 초, 중등 교육 학제는 스탈린 정권 초기까지 초등(4년) - 기초 중등(3년) - 상급 중등 및 직업, 기술 교육(2년.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체르넨코 시기에 최종적으로 초등(4년) - 중등(5년) 상급 중등 및 직업, 기술 교육(2 ~ 3년)으로 변화했다.교과를 보면 수학과 과학의 비중과 중요성이 높았는데 이는 마르크스 이래로 공산주의자들이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연방 정부의 수뇌부들이 산업화가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다고 생각해 수학과 과학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 전체 교과에서 수학과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35%를 넘을 정도였다. 그 외에는 체육과 직업 교육이 약 20%, 언어와 역사, 미술, 음악, 윤리 등을 비롯한 나머지 교과들이 약 40%의 비중을 점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고학년들에 한정해서 선택 과목을 이수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하기 시작했다.
영유아의 보육과 교육은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이뤄지며 탁아소는 생후 2개월인 신생아부터 3세 영아까지 보육을 맡아 주었다. 탁아소의 ‘학제’는 3개로 2개월 ~ 1세, 1 ~ 2세, 2 ~ 3세로 분류했다. 유치원에서는 하급반(3 ~ 4세), 중급반(5 ~ 6세), 상급반(6 ~ 7세)으로 나뉘었으며 아예 보육과 교육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탁아 유치원도 있었다.
소련의 영유아 교육은 체육, 지식, 도덕, 위생, 생활, 노동 교육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노동 교육이 의아할 수 있으나 소련의 노동 교육은 걷지도 못하는 영유아들을 노동 현장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개념 인식, 각종 직업 소개, 노동자들에 대한 존경심 배양, 레닌의 업적에 대한 것들이었다.
초등학교는 원래 8세부터 입학했으나 체르넨코 시기에 7세로 연령이 낮아졌으며 학제는 4년이었다. 중등 교육 과정을 보면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기초 중등 학교에 입학해 총 5년 동안 교육받았으며 이후 성적과 학생 희망에 따라 상급 학교로 진학하거나 취직했다.
기초 중등 학교의 상위 교육 기관으로는 한국의 일반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상급 쉬콜라(средняя школа)와 전문 기술 학교(우칠리셰)[2], 전문 기술 학교보다 더욱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종합 기술 학교(테흐니쿰)[3]로 나뉜다.
우칠리셰는 러시아 제국 시기에 존재하던 다양한 직업 학교들의 후신으로서 흐루쇼프 정권과 체르넨코 정권 시기에 개혁을 이루기 전까지는 다양한 종류의 기술 학교, 직업 학교, 공장 부설 학교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직업 학교에서는 건설, 기계, 전기, 비서, 요리사, 웨이터, 예술가, 미용사, 운전사, 간호사, 배관공 등의 다양한 직업 교육 과정을 제공했다. 테흐니쿰은 공학 및 기술 교육 과정을 제공했으며 우칠리셰의 교육 과정보다 더욱 전문적이었다.
고등 교육은 단과 대학, 일반 대학, 아카데미야, 산업 아카데미, 사관학교 등을 일컬으며 이러한 기관을 고등 교육 기관(VUZ)[4]으로 불렀다. 대학교는 기본적으로 5년제였으나 분야에 따라 4년이나 6년인 경우도 있다. 소련 붕괴 후에는 공산권에 속한 여러 나라들에서 4년으로 개편하기도 했다.
레닌 시기에는 학교 자치제를 시행하여 교사와 학생 모두가 참여하는 학교 협의회와 교직원 회의, 학생 회의 등이 운영되었으나 스탈린 시기부터 교사와 관리자들의 권한과 권위가 확대되고 교육부의 통제가 강화되어 학교의 자치권은 크게 축소되었고 교장이 학교 운영 전반을 책임졌다. 그래서 일부 학교의 교장들은 꽤나 제왕적이었다.
소련은 종합 기술 교육론으로 대표되는 전인 교육 못지 않게 재능이 있는 수재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영재 교육에도 크게 투자했다. 게다가 스포츠를 통한 국위 선양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 흐루쇼프 정권부터 스포츠 재능이 특출난 학생들을 어린 나이부터 전문 선수로 양성했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이공계에선 교사가 평가해 소질이 있다고 판단되면 어린 나이부터 집중적인 교육을 받아 소련 학술원(Академия Наук СССР)으로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받기도 했다. 소련군도 재능이 확인된 사병들을 수보로프 학교(육군) 및 나히모프 학교(해군) 등 유년 군사 학교에 추천 입학시켜 장교로 양성했다.
학술 연구가 목적이라면 법적으로 광범위한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허용되었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는 상당한 제한이 작용했다. 그래서 소련 학생들은 정부의 간섭과 탄압을 받을 수 있는 인문학계보다는 간섭이 비교적 적고 국가적으로 지원해주는 이공계 분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5] 그럼에도 전반적인 학문에 걸쳐 이념적인 간섭이 심한 편이었다. 예를 들어 현대사는 당국에 불편한 서술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예: 탈스탈린화 이후 스탈린 시대에 대한 서술) 학문에도 이념적으로 개입했는데 정치과학은 "부르주아 유사 과학"으로 간주하여 금지했으며 트로핌 리센코의 사례와 같이 이념적으로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관련 학계에 큰 피해를 입혔던 경우도 있었다.
학급과밀 문제의 경우에는 인구증가율이 높은 중앙아시아권과 캅카스, 몰도바 일대, 혹은 대도시와 위성도시 학교들이 주로 겪었으며, 이런 지역의 경우에는 초등학교는 오전반, 오후반, 심하면 저녁반 수업까지 있었다. 다만 학급과밀이 심각한 학교에서도 학급당 학생수는 40명대 수준이었기 때문에 한반에서 50명 넘게 수업받은것은 기본이고, 오전반/오후반 수업까지 따로 편성하면 한반에 최대 120명까지 편성했던 당대의 한국보다는 쾌적한 편(?)으로, 2000년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소련의 학교는 1980년대 말 교육개혁 이전에는 보통은 토요일에도 수업을 진행하는 주6일제로 수업을 진행하였으며,[6] 1988년을 기점으로 모스크바를 비롯한 일부지역에서 토요휴업제가 도입되기 시작했으나 지역재량에 따라 토요휴업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소련 해체 직전에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포스트 소비에트 시기와서는 주 5일 수업이 일반화되었으나, 마찬가지로 국가와 지역별로 시행시기에 차이가 있었다. 다만 토요일까지 수업받는 반대급부로 (물론 학급과밀 문제를 해소하고, 학급과밀 지역과 타 지역간의 불평등이 발생할 여지를 차단할 의도도 있었다.) 하루 수업시간은 비교적 짦게 편성되었다. 초등학교는 1일 4교시, 중고등학교는 5~6교시 내외로 수업받았으니, 동시대에 주6일제 수업은 기본이고, 심심하면 야간자율학습으로 밤 늦게까지 교육을 받았던 한국, 중국, 대만 학생들보다는 훨씬 널널하게 교육받았던 셈이었다. 소련에서 1960년대에 주5일제가 정착된 이후로도 주6일 수업이 오랜기간 지속되었던것은 과밀학급 문제가 크게 작용하였는데, 하루 수업시간을 길게 잡으면 학급 분산이 쉽지 않아 주6일 수업이 늦게 도입된것이었다.
여름방학철에는 주로 피오네르에서 운영하는 여름캠프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서양권 어린이들이 여름방학철에 보이스카우트에서 운영하는 여름캠프에서 보내는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물론 피오네르 캠프가 의무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차에서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3. 교복과 생활 규정
교복은 차르 시대의 유물로 간주되어 10월 혁명 이후에 철폐되었다. 이 당시에는 교복이 압제의 상징으로 여겨졌었기도 했던데다가 경제적으로도 교복이 사치스러운 옷이었기 때문에 사복을 입고다니는것이 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초찰기의 소련에서 학생들이 입는 교복이라 할만한 것은 피오네르 제복뿐이었으며 당연히 이 시기에는 사복차림으로 등교를 하는것이 일반적이었다. 저학년생들은 부모가 입히는 대로 다녔고 고학년생들은 유행에 맞추어서 입고 다녔던 편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정권 중반기 이후에는 교복이 재도입되기 시작했다. 1935년에 소련 정부에서 교복 제도의 부활을 선언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행되지 않았고 1940년에 공장 부설 학교와 직업 학교를 시작으로 교복이 학교 현장에 다시 나타났다. 다만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직후까지도 교복은 일반계 학교가 아닌 직업 학교나 기술 학교에서만 착용하는 것이었다.1947년부터 교복이 전면 도입되었는데 남학생 교복은 군복과 유사한 형태였고 여학생 교복은 제정 시기의 여학생 교복을 모방한 형태였다. 서방 세계에서는 소련의 여학생 교복이 서방의 하녀복과 유사한 형태여서 매우 기이하게 생각했지만 소련에서는 하녀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련의 여학생 교복은 귀족 여성들의 일상복과 간호사들의 복장을 혼합한 러시아 제국의 여학생 교복을 계승한 것이었다. 교복 재도입 당시에는 아직 소련 일반인들의 경제력이 충분히 올라오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교복 자체는 한 동안 학생들에게 멋진 옷으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남학생 교복은 1962년부터 군복 대신 정장을 기초로 한 디자인으로 교체했다. 흐루쇼프 해빙기를 맞이하면서 학생들의 두발규정을 완화하는 김에 교복도 군복 스타일에서 민간인들이 입던 제복에 맞추어서 개정한 것이다. 여학생 교복은 당장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서 이러한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서 여학생 교복도 정장 차림 교복이 추가되었고, 고학년생 전용 교복이 따로 제조되어 착용하였는데, 이에 따라 고학년생들은 정장 차림 교복을 입었다. 소련 내 공화국 교육부들은 교복 디자인을 정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어서 소련은 지역별로 교복의 다자인이 조금씩 달랐다. 사복 착용은 금지되어도 다른 소련 내 공화국의 교복을 공수해서 입는 것은 허용되어 있어서 당대 소련의 청소년들은 타 지역 교복을 공수해서 개성을 뽐내었으며 동구권 국가들의 교복도 세련된 것으로 취급받았다. 또한 교복을 조금씩 개조해입기도 했다.
다만 교복의 실용성에 대해서는 소련 당대에도 말이 많았다. 소련에서 교육은 무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수업료가 무상이었다는 얘기지, 학용품과 가방, 교복까지 무상으로 제공을 해주는 형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각 가정에서 알아서 구입해 입어야했다. 물론 일반적인 가정이었다면 보조금이 있었기 때문에 못낼일은 없었기는 했지만, 그렘에도 1980년대 기준으로 교복값은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1세트에 평균적으로 약 20루블 내외로. 소련 당대 직장인 월급의 10%~15% 가량에 해당되는 수준으로 당시 소득기준으로 하면 상당히 부담되는 비용이었다. 물론 소련이 의류비는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비쌌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부담없이 입고 다닐수있지는 않았다는 얘기였다. 여기에 더해서 여학생 교복은 모직물로 만들어진 데다 치마가 짧게 다자인되어 있어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문제가 심해 여학생들이 불만을 많이 제기했고 교복의 디자인도 학생들이 불만을 품는 경우가 상당수라서 유행에 뒤따라가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학생들이 교복을 죄수복이나 작업복이라면서 자조하기도 했다. 1962년형 교복도 디자인은 그리 좋은 평을 얻지 못해서 1973년, 1980년대 후반에 차례차례 개편을 거쳤었다.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한 소련답게 나라가 너무 커서 교복 보급은 단번에 이뤄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자 공급이 느린 내륙과 오지, 농촌 지역에서는 교복 착용이 한동안 선택 사항이었고 전국적으로 동일한 교복을 입게 된 것은 1954년의 일이었다. 소련 말기에는 중학교 교복과 고등학교 교복의 스타일을 달리하는 방식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 후반 들어서는 사복착용의 1991년 9월자로 모스크바나 발트 3국 등 상당수 지역의 학교에서 교복 의무 착용 규정이 없어지고 사복 착용이 허용되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에서는 교육 예산이 부족한 데다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교복 업체들이 파산하는 일이 터졌고 이 때문에 교복 자체가 희소품이 되었다. 대다수 가정에서는 교복값을 댈 수 없을 정도로 경제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에[7] 1992년 9월 신학기부터는 교복착용이 의무화된 지역의 학교에서도 사복 착용을 허용하였다. 이렇게 사복 착용이 대세가 되자 1994년부터 교복 착용 여부는 학교장의 재량에 따르도록 명문화되었고 공립학교의 교복 의무 착용 규정은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2000년대부터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교복을 재도입하기 시작하다가 2014년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교복 제도의 부활을 지시함에 따라 2015년부터는 상당수의 공립 학교에서 교복이 재도입되었다. 다만 교복 제도의 도입이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교복을 도입한 학교와 사복을 입는 학교가 공존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저학년생들이 사복을 입고 고학년생들이 교복을 입는 경우가 대다수인 반면 러시아는 저학년생들이 교복을 입고 고학년생들이 사복을 입는 경우가 많다. 옛 연방 구성국들은 제각기 사정이 다른데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교복을 입는 것이 일반적인 나라들도 있으며 발트 3국과 아르메니아, 조지아처럼 사복 차림이 일반적인 나라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붕괴 후에 잠깐 사복 차림으로 다녔다가 1996년에 교복을 제정했다가 교복 의무화가 2019년에 폐지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사복 차림이 일반적이었다가 2017년에 부활하였으며 벨라루스도 1992년에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복이 폐지되었지만 2023년을 기점으로 교복이 부활했다.
스탈린 정권 시기에는 학생들의 두발을 엄격히 단속하여 남학생들은 군인처럼 머리를 투블럭 수준으로 짧게 잘라야 했고 여학생들도 머리 모양을 통제받았다. 그래도 스탈린 사후에는 통제가 완화되어서 남학생은 옷깃 위까지 머리카락을 기를 수 있게 하고 여학생들도 보다 다채로운 머리 모양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학교장 재량에 따라서 두발규정을 정할수있었기 때문에, 규제 정도는 학교와 학년에 따라 차이가 있엇고, 고르바초프 초기 시절까지 두발 단속이 없어지지는 않았으며, 보통 한국의 평균적인 1980년대 내지 2000년대 수준의 두발규정을 지켜야했다.[8] 보통은 앞머리 염색과[9] 남학생의 장발, 여학생의 긴 생머리는 계속 금지했고 레게 머리 같은 특이한 머리모양도 당연히 금지되었으며 특히 장발을 끝까지 고수하면 퇴학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학생들은 초등학생이 생머리를 하면 벌점을 먹였고, 고등학생 정도면 성인과 비슷한 머리모양을 해도 봐주기는 했지만, 이 역시도 학교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구권에서 유행한 록 음악과 히피 문화가 소련으로도 전파되어 남자도 장발을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는데 유행 초기에 소련 당국에서 남성의 장발을 단속했음에도 남성의 장발은 계속 확산되었다. 소련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서방 세계 가수들의 장발을 따라한 것은 이런 풍조에 기름을 부어 청년과 청소년 사이에서 장발을 더 크게 유행하게 만들었다.[10]
당시 소련의 청소년들은 3달 간의 기나긴 여름방학 기간 동안 머리카락을 옷깃 아래까지 길게 기르고 다니다가 개학식 전날에 자르거나 개학 이후에도 장발을 안 자르겠다고 버티다가 교사에게 징계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규정은 소련 말기에 폐지되었고 러시아와 발트3국, 우크라이나, 몰도바, 벨라루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에서 두발 규정은 과거의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국가별로 사정이 달라서 규제가 있는 나라들도 존재한다.
체벌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교육자들은 학생들이 가정에서 어떤 일을 겪는지를 잘 알고 있어서 체벌을 극도로 비판했고 젬스트보 초등학교에서는 체벌 금지가 아예 권고 사항이었다. 그래서 젬스트보 학교의 교사가 학생을 처벌하는 것은 신문에 실릴 정도의 사건이었다. 이런 선구자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소련의 교육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체벌을 원천 금지했다. 1930년대에는 소련에서는 권위주의적인 교수법이 대세가 되었고, 또한 독소전쟁 와중에 남학교의 규율문제가 사회문제화되자, 체벌 재도입이 검토되었지만, 검토만 한채로 재도입되지는 않았다. 다만 체벌이 법적으로 금지된데다가 체벌을 행한 교사들이 징계를 받는다 하더라도, 몇몇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하거나 폭행하는 사건이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까지 꾸준히 발생하였고, 교사들이 학생들을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학부모들에게 애기를 한 다음에 체벌시키는 대리체벌 관행도 오랜기간 동안 꾸준히 성행했으며,[11] 꼬집기나 자 던지기, 뒤통수때리기 같은 방식으로 간접체벌을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게 발생했기 때문에 연방 정부에서는 계속해서 체벌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물론 이 당시 한국, 북한, 중국, 몽골, 일본, 대만 등을 비롯한 동북아권에 비하면야 매우 널널하기는 했다.[12] 체벌 금지는 소련 해체 이후에도 벨라루스와 몇몇 미승인국가를 제외하면 법제화되어 있다. 간혹가다가 소련에서 학교 체벌이 일상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소련 시절 학생들이 질서가 있었다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 당시에도 교사가 직접적으로 체벌하기보다는 자아비판과 구류 및 분리수업이 훨씬 흔한일이었다. 물론 소련시대에도 나댈 학생들은 열심히 나대거나 반항할 학생들은 열심히 반항했다는 점에 있어서 추억보정이 단단히 들어간 반응인것은 덤이다.
교칙과 징계 규정은 혁명 이후에 대대적으로 개정하여 학생에 대한 징계 수준은 대단히 낮았지만 그러다가 스탈린 정권 시기가 되면 교칙과 징계 규정이 대단히 엄격해지고 교권 침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처벌했다. 해빙기에는 교칙과 징계 규정도 점차 완화된다. 다만 그럼에도 당시 미국과 서유럽의 공립학교에 비하면 대체로 엄격했던 수준으로 평가되는데 체벌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고는 해도 매니큐어와 화장을 금지하는것을 규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꾸미는 데 제한이 있었고 소지품 검사도 수시로 진행해서 손목시계와 운동화 같이 비싸거나 청바지같이 서구풍인 물건이 있으면 압수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규정이 달랐던 것은 매한가지라서 일부 학교에는 외투까지 금지하는 등의 부조리가 있기도 했고 1970년대 이전까지 일부 학교에서는 볼펜을 쓰는 것이 글씨를 올바르게 쓰는 데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볼펜을 금지하고 만년필을 쓰는 것을 강요한다는 등 특이한 규정도 있기도 했다.
학교 급식은 러시아 제국 시대에도 있었지만 일률적이지 않았고 귀족학교가 아닌 농민이나 소시민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에서는 죽이나 스튜 같은 간단한 식사들 위주로 제공하는 등 질이 천차만별이었으며 급식이 제공되지 않은 경우도 다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영양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급식제도를 소련 전 지역으로 확대하였고 표준화를 단행하였다. 다만 당시의 급식은 제국 시절에 비해서 괜찮아졌다고는 해도 당대 상황에 맞게 까샤, 수프, 보르시 같은 일상식이나 단순한 음식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급식의 영양뿐만 아니라 질에도 신경쓰기 시작함에 따라 신선한 채소 메뉴들이 대거 도입되는 변화가 일었다. 다만 급식 메뉴가 다양화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맛보다는 영양섭취에 맞춘 경우가 흔하기는 했고 학생들이 생선 요리는 비리다면서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경제 문제로 인해 급식 시스템을 외부입찰에 맡기거나 돈 없는 학생들이 급식을 제때 먹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는 등 엉망이 되었고 아이들이 급식보다 간식을 선호해서 비만율이 높아지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4. 흐루쇼프에서 체르넨코까지
1956년 흐루쇼프 정권은 여전히 상급 중등 학교 학생들에게 부과하던 수업료를 폐지하여 초, 중등 교육 과정에서의 완전한 무상 교육을 실현하고 1958년에 7세부터 시작하는 7년 의무 교육 과정을 8년으로 상향했다. 상급 중등 학교에서 교육받는 학생들의 노동 교육 시간을 확장하고 여러 종류로 나뉘어 있던 직업 학교와 기술 학교들도 통폐합했다.흐루쇼프 정권 시기에는 노동 교육이 강화되고 노동자들을 위한 혜택과 교육 과정이 확대되었다. 흐루쇼프는 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들이 교육을 통한 신분 이동이나 승진을 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1955년에 고등 교육 기관의 입학 규정을 현장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변경하고 2년 이상 생산직에 근무한 노동자들을 위한 별도의 입학 정원을 배당했으며 청년 학교를 증설해 노동자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확대하고 야간, 통신 교육 과정도 확대했다.
고등 교육 기관으로 진학하려는 이들에게 최소 2년 간 생산직에 종사해야 하는 의무를 도입했다. 그 덕분에 노동력 부족 문제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었지만 이는 간부의 숫자 증가와 젊은 노동자들의 낮은 기술력, 경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야기했다. 흐루쇼프가 강조한 노동과 학업의 결합은 일반 학생은 물론이거니와 학부모들의 격렬한 불만을 샀는데 특히 노멘클라투라의 불만이 극심했고 흐루쇼프의 노동 교육 강화는 그가 물러난 뒤에 곧바로 수정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소련에서는 연간 8 ~ 10%의 초등학생들이 유급하는 일이 벌어져 큰 문제가 되었는데 교사의 교수법과 수업 방식이 원인으로 지목되었지만 핵심적인 원인은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과 학습 부진을 겪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제대로 선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 교육부는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를 증설하여 장애 학생들을 수용하는 한편 학생이 유급하면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제도를 실시했다. 이러한 조치로 학생들이 유급하는 일은 급감하여 60년대 중반이 되면 초등학교에서의 유급은 전체 학생 수의 2% 이하로, 70년대 후반에는 1% 미만으로 감소했다.
다른 의미로의 특수 교육도 확대되었다. 음악과 예술, 체육 분야에서의 전문가 양성 과정과 영재 교육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유아기부터 수학과 과학, 음악과 미술 교과에 대한 재능을 드러낸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도 설립했다. 특히 과학 분야 영재로 선정된 학생들은 8년 의무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에 특별 시험에 응시해 특수 교육 기관에 입학할 기회를 받았다. 이러한 조치들은 소련의 학문 수준을 향상시키고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데 일조했으나 국가의 근본인 평등 교육 사상에 위배된다는 반대 여론도 상당했다.
1964년에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불만을 산 흐루쇼프의 노동 교육 강화 조치를 조정하고 의무 교육 과정을 10년으로 상향했다. 중등 교육 과정에서 노동 시간과 실습 시간이 단축되고 흐루쇼프 시기에 노동자들이 누렸던 혜택들도 축소되었다. 예컨대 공장 경영진들의 직원 추천 입학 제도가 제한되었다.
고등 교육 과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입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신입생 전용 예비 교육 과정(8 ~ 10개월)를 시행했다. 1970년을 기준으로 하면 8년제 학교를 마친 학생의 80%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7백만 명의 전문가 양성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다. 센서스에 따르면 도시 노동자의 75%, 농촌의 50%가 중등 교육 과정 이상을 이수했으며 1970년 ~ 1985년까지 중등 교육 이수자의 숫자는 3배로 증가했다. 80년대 초까지 고등 교육 기관에서는 매년 100만 이상의 전문가들을 배출했고 교육 기관의 숫자도 계속 증가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부터 소련의 교육은 점점 문제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상급 학교나 고등 교육 기관으로 진학할 때 화이트 칼라와 지식인, 중산층 출신 자녀들이 생산직 노동자, 농민 가정의 자녀들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당대 소련을 지배하던 이들은 농민, 노동자 출신으로 크렘린에 입성한 입지전적인 인물들이었지만[13] 그들의 통치를 받던 농민, 노동자들의 신분 이동과 사회적 지위 향상은 점점 어려워져 갔으며 계층 구조가 경직되어 갔고 관료주의 같은 병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의 영토와 2억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대국인 만큼 소련은 교육의 '질' 보다는 '양'에 신경 쓰는 게 타당했지만 경쟁자인 미국이 질적인 면에도 관심을 기울일 때 소련은 계속 양에만 집착해 질적인 개선이 잘 이뤄지지 않아 교육의 질적 수준이 지속적으로 떨어졌고 교육 과정과 교수법의 개선도 지지부진했다. 학업 성적 불량으로 인한 퇴학 조치도 중단되었다.
1984년에 집권한 체르넨코는 소련 교육의 현대화를 도모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명목상의 개혁 목적은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학교를 창조하고 발달한 사회주의 사회를 계획적이고 전면적으로 완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체르넨코 정권은 여러 종류의 직업 기술 학교를 전문 기술 학교로 단일화하고 노동 교육을 강화하여 상급 중등 학교의 모든 학생들에게 직업 교육을 실시했다. 기존의 직업 교육이 진로 · 진학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 학생들의 의욕이 낮았기에 자격증 취득을 보장하여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높이려고 했다.
의무 교육을 10년에서 11년으로 연장하고 취학 연령도 7세로 낮추었다. 이 시기부터 소련의 학생들은 초등 교육 4년, 기초 중등 교육 5년, 상급 중등 교육을 2 ~ 3년받고 18 ~ 19세부터 대학 교육을 받게 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학급 당 학생 수도 조정했다. 1 ~ 9학년은 40명에서 30명 이하, 10 ~ 11학년은 35명에서 25명 이하로 조정하고 언어 교육은 20 ~ 25명을 초과하면 분반했다. 주당 수업 시수도 학생들의 연령에 맞게 재조정하고 교과 과정도 개정하여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현대화를 꾀했다. 상급 중등 학교에 컴퓨터 교육이나 분야별 전문 과정을 개설했으며 초등 교육 과정에서는 체육, 음악, 미술, 환경 수업의 시수를 늘렸다.
이러한 조치는 인민의 교육 수준 격차를 줄이고 교육의 질적 개선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재원이 부족했고 종합 기술 교육에 계속 집착하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체르넨코가 급사한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능력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제도적 평등에 집중했기 때문에 정부 조치와 현실과의 괴리가 더 커졌다는 비판도 나왔다. 소련은 이미 고도로 경제와 산업이 발전한 국가가 되었지만 다수의 교사들은 여전히 산업화 시기에나 쓰던 교수법으로 현재가 아닌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5. 페레스트로이카
체르넨코 개혁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연방 교육의 문제는 계속 심화되어 갔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의 전체 예산에서 교육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7%였다.[14] 신경제정책 시기와 스탈린 정권 시기에 연간 10% 이상의 예산을 교육에 투자하던 연방의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연방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미국보다 12배, 영국보다 8배 적었으며 학교 시설의 노후화도 심각했다.학생의 개성과 진로, 학생과 교사들의 창의성은 계속 무시받았다. 교육 현장에서 크렘린으로 보낸 보고서들은 당대 소련의 교육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었다. 학교 재정은 부족했고 교원과 학교에 지급하는 지원은 열악했으며 교사에게 주는 임금도 낮았다. 학생들의 지적 수준도 문제가 심각했으며 결석률도 아주 높았다.
그래서 소련 정부에서는 1984년의 개혁을 이어가면서 새로운 형태의 개혁을 준비했다. 1986년 28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고등 교육 과정에 대한 재편성을 결의하고 개혁안을 수립했는데 교육 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담은 이 개혁안은 국민적 토의를 거친 뒤 1987년 3월에 공포되었다.
위에서의 개혁이 이뤄지자 아래에서의 개혁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사와 교육 전문가, 교직원들 사이에서 교육의 민주화와 교육 수준의 향상, 학교 자치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게다가 글라스노스트가 촉발시킨 언론과 대중매체의 활성화와 교육 제도 개선에 대한 여론의 형성은 이들의 활동을 크게 고양했다. 1986년 10월 진보적인 교사들이 단체를 설립하여 교사의 창조적 교육 활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교사의 교육 역량 증대를 위해 교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86년 12월, 소련 정부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스크바에서 연방 교직원 대회를 개최했다. 각 연방 내 공화국의 대표들이 자신이 소속된 공화국의 개혁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1988년, 교육의 다양화와 질적 향상을 목표로 하는 리가초프 보고서가 크렘린에 제출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교육계에서 논의된 주요 쟁점은 학교 수업의 인센티브 문제, 교육 과정의 조정, 관료주의와 교조주의, 설비 노후화, 교육의 질적 수준 하락, 학교 민주화와 자치제, 부족한 예산 문제 등이었으며 체르넨코 개혁에서 개선되지 못한 교과 과정, 구시대적인 수업 방식과 교수법, 강의식 교육에 대한 비판도 이뤄졌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직업 교육이나 기술 교육에 대한 인식이 계속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이나 학부모나 직업 학교와 기술 학교를 기피했고 직업 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이 박탈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일이 많았다. 직업 학교의 학생들이 일반계 학교 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습 의욕이 낮은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래서 상급 중등 학교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 과정들을 개설해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교육 기관이 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다. 직업 교육이나 고등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교육 과정을 신설해 학생들이 진로 적성에 맞는 학교에서 효과적인 학습을 하자는 것이었다.
개인의 희망에 비해 평가 결과가 못 미치는 경우에도 고등 교육 기관으로의 진학을 원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을 설득할 수 있을만한 동기를 부여할 필요도 있었다. 직업 학교의 학생들에게 일반계 학교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장학금과 지원을 해 준다거나 일반계 학생들보다 더 쉽게,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할 수 있다는 보장을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소련 정부는 교육 현장과 학생, 학부모, 여론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교육 행정의 개선을 추진하고 시설 노후화와 예산 문제, 학교 자치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교육 기관의 부분적인 독립 채산제도 도입하려고 했다. 독립 채산제가 도입되면 각 학교는 교부된 예산을 자주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학교 회의의 재량에 따라 독자적으로 학교 기금을 조성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될 것이었다. 학교 기금은 관련 부처의 지원, 학부모나 시민의 기부, 학교에서 독자적으로 추진한 경제 활동으로 확보한 재정 등을 수입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연방 정부 차원에서는 교육 예산의 증대와 지방 소비에트의 재정권 확대, 기업으로부터의 교육 예산 지원 등의 방안을 구상했다.
교육 행정 조직의 관료주의, 교조주의, 비효율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간 여러 개로 나뉘어 있던 교육 부처들을 통폐합하고 주, 시 단위로 교육 행정 기관에 속하는 인민 교육 회의를 설치했다. 인민 교육 회의는 교직원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 대표나 사회 단체 대표가 학교 관리와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학교 민주화를 위해서 학교 운영의 책임 주체를 교장에서 교사, 관리자, 학생, 학부모 대표로 이뤄진 학교 회의로 전환하고 대학의 자치권도 확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조치들 중에서 일부는 구상만 되었고, 일부는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일부는 시행되기 전에 소련이 해체되고 말았다. 소련 붕괴의 충격 속에서 발트 3국을 제외한 연방 구성 국가들의 교육 환경은 지옥 밑바닥에 쳐박혀 버렸고 러시아를 비롯한 다수 국가들의 교육은 오랜 시간 동안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1] коренизация, 코레니자치야[2] ПТУ, Профессионально-Техническое Училище. 영문: PTU. 통칭: Училище)[3] техникум[4] ВУЗ, Высшее учебное заведение[5] 출처: 러시아의 역사 4판(1977) / 니콜라스 랴자노프스키 저[6] 이 당시까지는 선진국이라 해도 주6일제 수업을 받는 나라들이 아직까지는 꽤 있던 시대였다. 일본과 스위스도 주6일제 수업을 진행하던 대표적인 나라였다.[7] 사실 소련 시대에도 교복이나 학용품은 학교에서 무상으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따로 알아서 의류점, 문방구 가게에서 돈 들여 사야 하는 것이기는 했다. 다만 소련의 저축액이 막대했다 보니 부모가 막장이 아니라면 다들 잘만 냈는데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 물가폭등으로 교복과 문방구 가격도 같이 폭등하는데 예금이 죄다 휴지조각이 되니 낼 수 없는 가정이 급속히 늘어난 것이다.[8] 보통은 두발 단속보다는 서방의 문화를 모방하거나 사치스러운 물품을 학교에 반입하는 것을 주요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9] 소련에서 염색약은 시중에서 판매되지 않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염색하는것 자체는 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염색을 했다가 발각되면 가차없이 미용실과 이발소로 보내졌다.[10] 물론 소련의 주류 가수들은 여전히 머리카락을 옷깃 위로만 기르는 머리 모양을 해야 했는데 당시 소련 라디오 텔레비전 위원회 의장(한국식으로 번역하면 국영 방송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세르게이 라핀이 자신의 보수적인 성향을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노골적으로 반영하여 장발 스타일의 남자 가수들이 방송에 나올 수 없도록 규제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자 가수들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머리카락 길이를 규정에 맞춰야 했다.[11] 소련 학교에서 체벌이 진작에 금지된것과 달리 가정에서는 여전히 체벌이 흔하게 사용되어왔으며, 알코울 문제와 결합해서 가장이 술에 취한채로 아동학대를 하는 경우도 빈번해서 사회문제였다.[12] 북한과 중국, 일본의 경우에는 체벌 금지는 2차 세계대전 종전, 국공내전 종전 직후 법적으로는 다들 도입되었지만[15], 이는 형식적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소련이 존재했을 당시에는 셋다 체벌이 성행하였다. 중국의 경우에는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체벌이 줄기는 했지만, 이는 홍위병들이 기세등등해서 학교를 상대로 갑질하는것이 성행해서였지, 교육관념이 변해서는 아니었기 때문에 홍위병이 하방되자마자 원상태로 돌아갔다.[13]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셀레스트, 체르넨코, 그로미코, 수슬로프, 그레치코, 로마노프는 농민. 우스티노프, 코시긴, 안드로포프, 그리신, 키릴렌코, 셰바르드나제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대 크렘린의 최고위급 정치인들 대다수가 농민, 노동자 출신이었다.[14] 동 시기 국가와의 비교: 프랑스 7.1%, 일본 6.3%, 미국 6.1%, 서독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