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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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문서는 소련의 교육에 대해 다루는 문서다.1987년 디즈니에서 제작한 소련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소련 교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련 공산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03년 미래에 자신들이 세울 나라에서 시행할 교육 원칙을 입안했는데 그 핵심적인 내용은 16세 이하 아동을 위한 무상 보편 교육, 교육의 세속화, 러시아어 교육, 평등 교육이었다.
소련 교육학의 핵심은 마르크스주의 교육학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교육과 노동을 결합해 교육이 노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학설을 제시했다. 마르크스주의 교육학의 핵심적인 내용은 실습과 이론 교육을 병행하고 생산 기술의 기초를 종합적으로 익히게 하면 이론과 실제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인간이 전면적인 발달을 이뤄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뒤를 이은 공산주의자들은 기존의 교육 제도와 교육학이 학생들을 체제에 순응하게 하고 사회적 특권과 계급의 세습을 저지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학생들의 능력 향상과 인성 함양과는 무관한 형태로 학생들을 교육 · 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상부 구조에 해당하는 교육은 아무리 자율성을 보장받더라도 하부 구조에 해당하는 경제에 좌우되기 때문에 경제 체제가 허용하는 한계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10월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이상, 기존의 교육 방식과 차르 정부가 장려하던 종교 학교를 유지하는 것은 소련 수뇌부들 입장에서는 언어 도단이었다.
그래서 소련은 마르크스주의 교육학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제시한 ‘종합 기술 교육론’을 채택함과 동시에 러시아 제국의 ‘계급적이고 불평등하며 종교적인 교육 제도’를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세속화된 교육 제도’로 변화시키고 사회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새로운 인간을 육성하려고 했다.
이 종합 기술 교육론은 연방이 해체되는 그날까지 유지되었고 소련 교육학의 핵심 이론으로 기능했지만 소련 후기에는 인문계 선호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종합 기술 교육론의 한계점이 나타나고 서방 교육학계에서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상황에서도 소련은 이를 포기할 수가 없었는데 국부라고 할 수 있는 레닌이 종합 기술 교육론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교육 과정 개편은 최고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이뤄지는 경향이 강했으며 가장 긴 집권 기간을 자랑하는 스탈린 시대에 가장 많은 변화가 이뤄졌다. 연방 공화국은 교육에 대한 재량권을 부여받아서 공화국 내부의 교육 과정을 관리 · 감독할 수 있었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 국가들도 자체적인 교육 과정을 입안하고 지속적으로 개편을 진행했기 때문에 같은 공산권 국가라고 해도 교육 제도는 상이한 점이 많았다.
연방 정부는 토착화 정책[1]을 실시해 소수 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고 자치권을 부여했다. 교육 분야에서의 토착화 정책은 문맹 퇴치와 민족 언어와 문화, 역사 교육으로 이어졌다. 소련의 토착화 정책은 스탈린 시기에는 그 의미가 대단히 희석되지만 스탈린 사후에 다시 강화되어 소수민족에 대한 혜택 부여, 민족 언어와 문화, 역사 교육의 재개와 개선이 이뤄졌다.
2. 학제와 특성
소련의 학제는 초등 · 중등 · 고등 교육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무 교육 과정은 스탈린 정권 시기에 7년으로 시작해서 브레즈네프 시기에 10년으로 늘어나고 마지막으로 체르넨코 시기에 총 11년으로, 초 · 중등 교육 학제는 스탈린 정권 초기까지 초등(4년) - 기초 중등(3년) - 상급 중등 및 직업 · 기술 교육(2년.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체르넨코 시기에 최종적으로 초등(4년) - 중등(5년) 상급 중등 및 직업 · 기술 교육(2 ~ 3년)으로 변화했다.소련의 교육 과정은 수학과 과학의 비중과 중요성이 높았다. 이는 마르크스 이래로 공산주의자들이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연방 정부의 수뇌부들이 산업화가 국가의 생존에 직결된다고 생각해서 수학과 과학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체 교과에서 수학과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35%를 넘을 정도였다. 이밖에 체육과 직업 교육이 약 20%, 언어와 역사, 미술, 음악, 윤리 등을 비롯한 나머지 교과들이 약 40%의 비중을 점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고학년들에 한정해서 선택 과목을 이수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하기 시작했다.
영유아의 보육과 교육은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이뤄지며 탁아소는 생후 2개월인 신생아부터 3세 영아까지 보육을 맡아 주었다. 탁아소의 ‘학제’는 3개로 2개월 ~ 1세, 1 ~ 2세, 2 ~ 3세로 분류했다. 유치원에서는 하급반(3 ~ 4세), 중급반(5 ~ 6세), 상급반(6 ~ 7세)으로 나뉘었으며 아예 보육과 교육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탁아 유치원도 있었다.
소련의 영유아 교육은 체육 · 지식 · 도덕 · 위생 · 생활 · 노동 교육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노동 교육이 의아할 수 있으나 소련의 노동 교육은 걷지도 못하는 영유아들을 노동 현장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개념 인식 · 각종 직업 소개 · 노동자들에 대한 존경심 배양 · 레닌의 업적에 대한 것들이었다.
초등학교는 원래 8세부터 입학했으나 체르넨코 시기에 7세로 연령이 낮아졌으며 학제는 4년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기초 중등 학교에 입학해 총 5년 동안 교육받았으며 이후 성적과 학생 희망에 따라 상급 학교로 진학하거나 취직했다.
기초 중등 학교의 상위 교육 기관으로는 한국의 일반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상급 중등 학교(상급 쉬콜라. средняя школа)와 전문 기술 학교(우칠리셰)[2], 전문 기술 학교보다 더욱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종합 기술 학교(테흐니쿰)[3]로 나뉜다.
우칠리셰는 러시아 제국 시기에 존재하던 다양한 직업 학교들의 후신으로서 흐루쇼프 정권과 체르넨코 정권 시기에 개혁을 이루기 전까지는 다양한 종류의 기술 학교 · 직업 학교 · 공장 부설 학교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직업 학교에서는 건설 · 기계 · 전기 · 비서 · 요리 · 예술 · 미용 · 운전 · 간호 · 웨이터 · 배관공 등의 다양한 직업 교육 과정을 제공했다. 테흐니쿰은 공학 및 기술 교육 과정을 제공했으며 우칠리셰의 교육 과정보다 더욱 전문적이었다.
고등 교육은 단과 대학 · 일반 대학 · 아카데미야 · 산업 아카데미 · 사관학교 등을 일컬으며 이러한 기관을 고등 교육 기관(VUZ)[4]으로 불렀다. 대학교는 기본적으로 5년제였으나 분야에 따라 4년이나 6년인 경우도 있다. 소련 붕괴 후에는 CIS에 소속된 다수의 국가들이 4년제로 개정했다.
레닌 시기에는 학교 자치제를 시행하여 교사와 학생 모두가 참여하는 학교 협의회와 교직원 회의, 학생 회의 등을 운영했으나, 스탈린 정권부터 교사와 고나리자들의 권한과 권위가 확대되고 교육부의 통제가 강화되어 학교의 자치권은 크게 축소되었고 교장이 학교 운영 전반을 책임졌다. 그래서 일부 학교의 교장들은 꽤나 제왕적이었다.
소련은 종합 기술 교육론으로 대표되는 전인 교육 못지 않게 재능이 있는 수재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특수 교육에도 크게 투자했다. 게다가 스포츠를 통한 국위 선양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 흐루쇼프 정권부터 스포츠 재능이 특출난 학생들을 어린 나이부터 전문 선수로 양성했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이공계에선 교사가 평가해 소질이 있다고 판단되면 소련 학술원(Академия Наук СССР)으로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받기도 했다. 소련군도 재능이 확인된 사병들을 수보로프 학교(육군)와 나히모프 학교(해군) 같은 유년 군사 학교에 추천 입학시켜 장교로 양성했다.
학술 연구가 목적이라면 법적으로 광범위한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허용되었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는 상당한 제한이 작용했다. 그래서 소련 학생들은 정부의 간섭과 탄압을 받을 수 있는 인문학계보다는 간섭이 비교적 적고 국가적으로 지원을 많이 해주는 이공계 분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5] 허나, 전반적으로 학문에 대한 간섭이 심한 편이었다. 정치과학은 "부르주아 유사 과학"으로 간주하여 금지했으며 트로핌 리센코의 사례와 같이 이념적으로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관련 학계에 큰 피해를 입혔던 경우도 있었다. 현대사의 경우에는 당국에 불편한 서술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예: 탈스탈린화 이후 스탈린 시대에 대한 서술)
소련 초기에는 인구는 많은데, 학교 수가 부족해 학급 과밀 문제가 심각했으며 연방 정부의 투자로 인프라 개선이 이뤄진 뒤에도 인구 증가율이 높은 중앙아시아권과 캅카스, 몰도바 일대, 일부 대도시와 위성 도시 학교들에서는 학급 과밀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해당 지역에서는 초등학교를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분리해서 운영했고, 심하면 저녁반까지 운영했다. 다만, 학급 과밀이 심각한 학교에서도 학급당 학생수는 40명대 였기 때문에 한반에서 50명 넘게 수업 받은 것은 기본이고, 오전반/오후반 수업까지 따로 편성하면 한반에 최대 120명까지 편성했던 당대의 한국보다는 쾌적한 편(?)으로, 2000년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수업은 통상 9시부터 시작해 45분 수업 - 5 ~ 15분 휴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초등학교는 1일 4교시, 중등 교육 기관은 5 ~ 6교시로 운영했다. 그래서 초등학생들은 1시, 중학생들은 2 ~ 3시에 하교했다. 동 시대에 주 6일제 수업은 기본이고, 심심하면 야간자율학습으로 밤 늦게까지 교육을 받았던 한국의 학생들보다는 훨씬 널널하게 교육받았던 셈이었다.
1960년대에 주 5일제를 시행하지만, 지역과 학교의 재량에 따라 운영 여부를 맡겼기 때문에 일부 학교는 주 5일제를, 일부는 주 6일제를 운영했다. 1988년부터 모스크바를 위시한 여러 지역에서 주 5일제를 전면 도입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주 6일제를 유지했다. 이러한 기조는 연방 해체 이후에도 이어져서 CIS 국가들의 주 5일제 전면 도입 시기는 서로 차이가 있다. 주 6일제를 시행한 학교의 경우, 과밀 학급 문제를 겪는 학교들이 많았는데, 주 5일제를 채택해 하루 수업 시간을 길게 잡으면 수업 시수 분배와 학급 조정이 어려워 주 6일제를 시행한 것이었다. 주 6일제 학교에서는 주 5일제 학교보다 일일 수업 시수를 적게 편성해 학생들의 불만과 박탈감을 완화했다. [6]
여름 방학 때는 주로 피오네르에서 운영하는 여름 캠프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으며, 이는 서양권 어린이들이 여름 방학철에 스카우트에서 운영하는 여름 캠프에 가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물론 피오네르 캠프에 참여하는 일은 의무가 아니어서 가족들과 함께 다차에서 휴가를 보내느 학생들도 많았다.
학교 급식은 러시아 제국 시대에도 있었지만 일률적이지 않았고 귀족학교가 아닌 농민이나 소시민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에서는 죽이나 스튜 같은 간단한 식사들 위주로 제공하는 등 질이 천차만별이었으며 급식이 제공되지 않은 경우도 다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영양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급식제도를 소련 전 지역으로 확대하였고 표준화를 단행하였다. 다만 당시의 급식은 제국 시절에 비해서 괜찮아졌다고는 해도 당대 상황에 맞게 까샤, 수프, 보르시 같은 일상식이나 단순한 음식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급식의 영양뿐만 아니라 질에도 신경쓰기 시작함에 따라 신선한 채소 메뉴들이 대거 도입되는 변화가 일었다. 다만 급식 메뉴가 다양화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맛보다는 영양섭취에 맞춘 경우가 흔하기는 했고 학생들이 생선 요리는 비리다면서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경제 문제로 인해 급식 시스템을 외부입찰에 맡기거나 돈 없는 학생들이 급식을 제때 먹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는 등 엉망이 되었고 아이들이 급식보다 간식을 선호해서 비만율이 높아지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3. 교복
교복은 차르 시대의 유물로 간주되어 10월 혁명 이후에 철폐했다. 혁명기에는 교복을 압제의 상징으로 여겼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러운 재화였기 때문에 사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더 경제적이고 편리했다. 그래서 초창기의 소련에서 학생들이 입는 교복이라 할만한 것은 피오네르 제복 뿐이었다. 그러다 스탈린 정권 중반기 이후부터 교복 재도입을 논의해 1935년에 교복 제도의 부활을 선언했지만, 실질적으로는 1940년에 공장 부설 학교와 직업 학교에 교복을 재도입한 게 시작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직후에도 교복은 직업 학교나 기술 학교에서만 착용하는 것이었고, 일반계 학교에서는 교복을 착용하지 않았다.1947년, 연방 정부는 교복을 전면 도입했다. 남학생 교복은 군복과 유사하고, 여학생 교복은 제정 시기의 여학생 교복을 모방한 형태였다. 서방 세계에서는 소련의 여학생 교복이 서방의 하녀복과 유사한 형태여서 매우 기이하게 생각했지만, 소련에서는 전혀 하녀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련의 여학생 교복은 귀족 여성들의 일상복과 간호사들의 복장을 혼합한 러시아 제국의 여학생 교복을 계승한 것이었다. 교복 재도입 당시에는 아직 소련 일반인들의 경제력이 충분히 올라오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한 동안 학생들은 교복을 멋진 옷으로 취급했다.
1962년, 사회적 통제 완화와 교육 개혁의 일환으로서 남학생 교복을 군복에서 정장의 형태로 교체하고 두발 규정도 완화했다. 여학생 교복은 큰 변화가 없었으나, 62년의 조치 이후에 여학생 교복에도 정장 형식의 교복을 추가하고 고등학생들을 위한 전용 교복도 별도로 제작했다. 연방 공화국 교육부들은 교복 디자인을 정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어서 소련은 지역 별로 교복 다자인이 조금씩 달랐다. 사복 착용은 금지했지만, 여타 연방 공화국의 교복을 공수해서 입는 것은 허용되어 있어서 당대 소련의 청소년들은 타 지역의 교복을 공수해서 개성을 뽐내었으며 동구권 국가들의 교복도 세련된 것으로 취급받았다. 또한 교복을 조금씩 개조하기도 했다.
다만, 교복의 실용성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말이 많았다. 무상 교육 제도를 운영했지만, 학용품과 가방, 교복은 각 가정에서 구매해야 하는데다 교복의 가격은 80년대 기준으로 1벌에 평균 20 루블 내외로 당대 직장인 월급의 10 ~ 15% 정도였다. 일반적인 가정은 보조금을 제공받았기에 교복을 구매하는 게 아주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가볍게 여길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여학생 교복은 모직물로 만들어진 데다 치마를 짧게 디자인해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지경이었다. 그래서 여학생들이 교복에 대해 많은 불만을 제기했고 교복의 디자인에 대한 불만도 상당해서 교복 디자인의 변경이 이뤄지지 않는 곳에서는 학생들이 교복을 죄수복이나 작업복으로 부르면서 자조하기도 했다. 특히나 1962년형 교복의 디자인은 그리 평가가 좋지 못해서 문제를 인식한 연방 정부에서 73년, 80년대 후반에 차례차례 디자인 개편을 시행했다.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한 소련답게 나라가 너무 커서 교복 보급은 단번에 이뤄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자 공급이 느린 내륙과 오지, 농촌 지역에서는 한동안 교복 착용이 선택 사항이었고 전국적으로 동일한 교복을 입게 된 것은 1954년의 일이었다. 소련 말기에는 중학교 교복과 고등학교 교복의 스타일을 달리하는 방식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1991년 9월자로 모스크바나 발트 3국 등 상당수 지역의 학교에서 교복 의무 착용 규정이 없어지고 사복 착용이 허용되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에서는 교육 예산이 부족한 데다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교복 업체들이 파산하는 일이 터졌고 이 때문에 교복 자체가 희소품이 되었다. 대다수 가정의 경제 상황이 교복값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기 때문에[7] 1992년 9월 신학기부터는 교복착용이 의무화된 지역의 학교에서도 사복 착용을 허용하였다. 사복 착용이 대세가 되자, 1994년부터 교복 착용 여부는 학교장의 재량을 따르도록 명문화하고 공립학교의 교복 의무 착용 규정은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했다.
2000년대부터 사립 학교를 중심으로 교복의 재도입이 이뤄지기 시작하다가 2014년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교복 제도의 부활을 지시함에 따라 2015년부터 상당수의 공립 학교에서 교복을 재도입했다. 다만, 교복 도입은 의무가 아니라서 소위 '교복 학교'와 '사복 학교'가 공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사복을 입고 중 ·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는 반면, 러시아는 정반대로 초등학생들이 교보을 입고 중 · 고등학생들이 사복을 입는 경우가 많다.
CIS 소속 국가들은 제각기 사정이 달라서 투르크메니스탄 · 카자흐스탄 · 아제르바이잔처럼 교복 제도를 시행하기도 하고, 발트 3국과 아르메니아, 조지아처럼 사복을 허용한 국가들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붕괴 후에 사복을 허용하다 96년에 교복을 부활시켰는데, 2019년에 다시 교복 의무화 제도를 폐지했다. 우즈베키스탄은 사복을 허용했다 2017년에 교복을 제도입했으며 벨라루스도 1992년에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복을 폐지했다가 2023년을 기점으로 교복을 재도입했다.
4. 학생 생활 규정
혁명기에는 교칙과 징계 규정을 대대적으로 개정해 징계의 강도가 대단히 낮았지만, 스탈린 정권이 재차 규정을 개정해 처벌의 수위를 높이고 교칙도 아주 엄격해졌으며 교권 침해는 강력하게 처벌했다. 이후, 해빙기부터 소련의 교칙과 징계 규정은 점차 완화되어 가지만, 미국과 서유럽의 선진국에 비하면 교칙이 상대적으로 염격한 편이었다. 소지품 검사를 시행해 사치품이나 서유럽제 재화 같은 금지 품목을 압수한다거나 화장과 매니큐어 사용을 금지했다. 1970년대 이전까지 몇몇 학교에서 볼펜을 쓰는 것이 글씨를 올바르게 쓰는 데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볼펜을 금지하고 만년필을 쓰는 것을 강요한다거나, 교칙의 제정과 운용이 학교의 재량에 있다는 점을 악용한 몇몇 학교에서 외투를 입는 것까지 금지시키는 일도 있었다.스탈린 정권 시기에는 학생들의 두발을 엄격히 단속하여 남학생들은 군인처럼 머리를 투블럭 수준으로 짧게 잘라야 했고 여학생들도 머리 모양을 제한받았다. 그래도 스탈린 사후에는 통제가 완화되어서 남학생은 옷깃 위까지 머리카락을 기를 수 있게 하고 여학생들도 좀 더 다채롭게 스타일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개별 학교의 두발 규정은 학교장의 재량이었기 때문에 각 학교와 학년별로 규정이 상이한 편이었고, 두발 규정은 고르바초프 정권 초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다만, 일선 학교에서는 서방의 문화를 모방하거나 사치스러운 물품을 학교에 반입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어서 한국처럼 두발 단속에 열을 올리지는 않았다.
앞머리 염색과 레게 머리 같은 독특한 스타일은 금지했으며 남학생이 옷길 아래로 내려오는 장발이나 여학생이 긴 생머리를 끝까지 고수하면 교칙 위반으로 징계를 먹거나 퇴학당할 수도 있었다. 소련의 여학생들 중에서 긴 머리를 유지하고 싶은 학생들은 반드시 머리를 묶어야 했다. 고등학생은 성인의 머리 모양을 모방해도 묵인해주기도 했지만, 이 또한 개별 학교별로 사정이 달랐다. [8]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구권에서 유행한 록 음악과 히피 문화가 소련으로도 전파되어 남자가 장발을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정부 당국은 초기부터 단속에 나섰지만, 남성이 길게 머리를 기르는 문화는 계속 확산되었다. 더욱이, 소련의 언더 그라운드 가수들이 서방의 유명 가수들을 모방해 장발을 기르고 다닌 것은 장발 문화의 확산에 기름을 부어 청소년과 청년층 남성들 사이에서 장발을 더욱 크게 유행하게 만들었다.
공식적으로 활동하던 소련의 주류 남성 가수들은 옷깃 위까지만 머리를 기를 수 있었다. 이는 라디오 - 텔레비전 위원회 의장으로 재직하던 세르게이 라핀이 국영 방송사 사장의 직권을 남용하여 자신의 보수 · 반동적인 취향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규정 이상으로 머리를 기른 남성 가수들은 방송에 나올 수가 없었다.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은 남성 가수들은 반드시 규정에 맞춰서 머리를 잘라야 했다.
소련의 청소년들은 3달 간의 기나긴 여름방학 기간 동안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다니다가 개학식 전날에 자르거나 개학 이후에도 장발을 안 자르겠다고 버티다가 교사에게 징계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규정은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폐지되었고, 러시아 · 발트3국 · 우크라이나 · 몰도바 · 벨라루스 · 조지아 · 아르메니아 등에서 두발 규정은 과거의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국가별로 사정이 달라서 규제가 있는 나라들도 존재한다.
체벌은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러시아 제국의 교육자들은 학생들이 가정에서 어떤 일을 겪는지를 잘 알고 있어서 체벌을 극도로 비판했고 젬스트보 초등학교에서는 체벌 금지가 아예 권고 사항이었다. 그래서 젬스트보 학교의 교사가 학생을 처벌하는 것은 신문에 실릴 정도의 사건이었다. 이런 선구자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소련의 교육학자들과 전문가들은 체벌을 원천 금지했다.
스탈린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1930년대부터 소련에서는 뒤틀린 교수법이 확산되고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이식되었다. 게다가 조국 전쟁 중에 일부 남학교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자, 정부에서 체벌을 검토하는 일도 있었다. 체벌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체벌을 한 교사들을 징계하긴 했지만, 몇몇 교사들이 학생들을 폭행하는 사건들이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까지 꾸준히 발생했다.
신체를 꼬집거나 문구류를 집어 던진다거나, 뒤통수를 때리는 등의 폭행이 간간히 발생했기 때문에 연방 정부에서는 계속해서 체벌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연방 정부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아동 학대나 가정 폭력이 근절되지 않아서 일부 교사들이 이를 악용하는 일도 있었다. 학생 통제를 위해 교사가 학부모에게 자녀의 비행을 알리면, 학부모가 자녀를 벌주는 일종의 대리 체벌 관행이 오랜 기간 동안 성행한 것. [9]
간혹, 소련은 교칙이 강력하고 체벌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학교에 질서가 잡혀 있고 학생들이 규율을 잘 따랐다고 말하는 무지몽매한 작자들도 있지만, 수업 분리 · 교내 봉사 · 상담 등의 방식으로 학생을 선도하는 일이 일반적이었고, 체벌은 원천 금지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소련에도 문제 학생들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이 작자들의 반응은 과거의 향수 때문이라고도 볼 수가 없다. 연방 해체 이후에도 벨라루스와 몇몇 미승인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CIS 소속 국가들은 체벌을 금지하고 있다.
5. 흐루쇼프에서 체르넨코까지
1956년 흐루쇼프 정권은 여전히 상급 중등 학교 학생들에게 부과하던 수업료를 폐지하여 초, 중등 교육 과정에서의 완전한 무상 교육을 실현하고 1958년에 7세부터 시작하는 7년 의무 교육 과정을 8년으로 상향했다. 상급 중등 학교에서 교육받는 학생들의 노동 교육 시간을 확장하고 여러 종류로 나뉘어 있던 직업 학교와 기술 학교들도 통폐합했다.흐루쇼프 정권 시기에는 노동 교육이 강화되고 노동자들을 위한 혜택과 교육 과정이 확대되었다. 흐루쇼프는 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들이 교육을 통한 신분 이동이나 승진을 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1955년에 고등 교육 기관의 입학 규정을 현장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변경하고 2년 이상 생산직에 근무한 노동자들을 위한 별도의 입학 정원을 배당했으며 청년 학교를 증설해 노동자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확대하고 야간, 통신 교육 과정도 확대했다.
고등 교육 기관으로 진학하려는 이들에게 최소 2년 간 생산직에 종사해야 하는 의무를 도입했다. 그 덕분에 노동력 부족 문제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었지만 이는 간부의 숫자 증가와 젊은 노동자들의 낮은 기술력, 경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야기했다. 흐루쇼프가 강조한 노동과 학업의 결합은 일반 학생은 물론이거니와 학부모들과 노멘클라투라의 격렬한 불만을 사서, 흐루쇼프의 노동 교육 강화는 그가 실각한 뒤에 곧바로 수정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소련에서는 연간 8 ~ 10%의 초등학생들이 유급하는 일이 벌어져 큰 문제가 되다. 초기에는 교사의 교수법과 수업 방식을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핵심적인 원인은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과 학습 부진을 겪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제대로 선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 교육부는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를 증설하여 장애 학생들을 수용하는 한편 학생이 유급하면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제도를 실시했다. 이러한 조치로 학생들이 유급하는 일은 급감하여 60년대 중반이 되면 초등학교에서의 유급은 전체 학생 수의 2% 이하로, 70년대 후반에는 1% 미만으로 감소했다.
다른 의미로의 특수 교육도 확대되었다. 음악과 예술, 체육 분야에서의 전문가 양성 과정과 영재 교육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유아기부터 수학과 과학, 음악과 미술 교과에 대한 재능을 드러낸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도 설립했다. 특히 과학 분야 영재로 선정된 학생들은 8년 의무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에 특별 시험에 응시해 특수 교육 기관에 입학할 기회를 받았다. 이러한 조치들은 소련의 학문 수준을 향상시키고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데 일조했으나 국가의 근본인 평등 교육 사상에 위배된다는 반대 여론도 상당했다.
1964년에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불만을 산 흐루쇼프의 노동 교육 강화 조치를 조정하고 의무 교육 과정을 10년으로 상향했다. 중등 교육 과정에서 노동 시간과 실습 시간을 단축하고 흐루쇼프 시기에 노동자들이 누렸던 혜택들도 축소시켰다. 예를 들어, 공장 경영진들의 직원 추천 입학 제도를 제한했다.
고등 교육 과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입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대학 신입생 전용 예비 교육 과정(8 ~ 10개월)을 시행했다. 1970년을 기준으로 하면 8년제 학교를 마친 학생의 80%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7백만 명의 전문가 양성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다. 센서스에 따르면 도시 노동자의 75%, 농촌의 50%가 중등 교육 과정 이상을 이수했으며 1970년 ~ 1985년까지 중등 교육 이수자의 숫자는 3배로 증가했다. 80년대 초까지 고등 교육 기관에서는 매년 100만 이상의 전문가들을 배출했고 교육 기관의 숫자도 계속 증가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부터 소련의 교육은 점점 문제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상급 학교나 고등 교육 기관으로 진학할 때 화이트 칼라와 지식인, 중산층 출신 자녀들이 생산직 노동자, 농민 가정의 자녀들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당대 소련을 지배하던 이들은 농민, 노동자 출신으로 크렘린에 입성한 입지전적인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의 통치를 받던 농민, 노동자들의 신분 이동과 사회적 지위 향상은 점점 어려워져 갔으며 계층 구조가 경직되어 갔고 관료주의 같은 병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10]
세계 최대의 영토와 2억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대국인 만큼 소련은 교육의 '질' 보다는 '양'에 신경 쓰는 게 타당했지만 경쟁자인 미국이 질적인 면에도 관심을 기울일 때 소련은 계속 양에만 집착해 질적인 개선이 잘 이뤄지지 않아 교육의 질적 수준이 지속적으로 떨어졌고 교육 과정과 교수법의 개선도 지지부진했다. 학업 성적 불량으로 인한 퇴학 조치도 중단되었다.
1984년에 집권한 체르넨코는 소련 교육의 현대화를 도모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명목상의 개혁 목적은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학교를 창조하고 발달한 사회주의 사회를 계획적이고 전면적으로 완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체르넨코 정권은 여러 종류의 직업 기술 학교를 전문 기술 학교로 단일화하고 노동 교육을 강화하여 상급 중등 학교의 모든 학생들에게 직업 교육을 실시했다. 기존의 직업 교육이 진로 · 진학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 학생들의 의욕이 낮았기에 자격증 취득을 보장하여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높이려고 했다.
의무 교육을 10년에서 11년으로 연장하고 취학 연령도 7세로 낮추었다. 이 시기부터 소련의 학생들은 초등 교육 4년, 기초 중등 교육 5년, 상급 중등 교육을 2 ~ 3년받고 18 ~ 19세부터 대학 교육을 받게 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학급 당 학생 수도 조정했다. 1 ~ 9학년은 40명에서 30명 이하, 10 ~ 11학년은 35명에서 25명 이하로 조정하고 언어 교육은 20 ~ 25명을 초과하면 분반했다. 주당 수업 시수도 학생들의 연령에 맞게 재조정하고 교과 과정도 개정하여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현대화를 꾀했다. 상급 중등 학교에 컴퓨터 교육이나 분야별 전문 과정을 개설했으며 초등 교육 과정에서는 체육, 음악, 미술, 환경 수업의 시수를 늘렸다.
이러한 조치는 인민의 교육 수준 격차를 줄이고 교육의 질적 개선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재원이 부족했고 종합 기술 교육에 계속 집착하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체르넨코가 급사한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능력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제도적 평등에 집중했기 때문에 정부 조치와 현실과의 괴리가 더 커졌다는 비판도 나왔다. 소련은 이미 고도로 경제와 산업이 발전한 국가가 되었지만 다수의 교사들은 여전히 산업화 시기에나 쓰던 교수법으로 현재가 아닌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6. 페레스트로이카
체르넨코 개혁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연방 교육의 문제는 계속 심화되어 갔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의 전체 예산에서 교육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7%였다.[11] 신경제정책 시기와 스탈린 정권 시기에 연간 10% 이상의 예산을 교육에 투자하던 연방의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연방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미국보다 12배, 영국보다 8배 적었으며 학교 시설의 노후화도 심각했다.학생의 개성과 진로, 학생과 교사들의 창의성은 계속 무시받았다. 교육 현장에서 크렘린으로 보낸 보고서들은 당대 소련의 교육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었다. 학교 재정은 부족했고 교원과 학교에 지급하는 지원은 열악했으며 교사에게 주는 임금도 낮았다. 학생들의 지적 수준도 문제가 심각했으며 결석률도 아주 높았다.
그래서 소련 정부에서는 1984년의 개혁을 이어가면서 새로운 형태의 개혁을 준비했다. 1986년 28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고등 교육 과정에 대한 재편성을 결의하고 개혁안을 수립했는데 교육 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담은 이 개혁안은 국민적 토의를 거친 뒤 1987년 3월에 공포되었다.
위에서의 개혁이 이뤄지자 아래에서의 개혁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사와 교육 전문가, 교직원들 사이에서 교육의 민주화와 교육 수준의 향상, 학교 자치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게다가 글라스노스트가 촉발시킨 언론과 대중매체의 활성화와 교육 제도 개선에 대한 여론의 형성은 이들의 활동을 크게 고양했다. 1986년 10월 진보적인 교사들이 단체를 설립하여 교사의 창조적 교육 활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교사의 교육 역량 증대를 위해 교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86년 12월, 소련 정부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스크바에서 연방 교직원 대회를 개최했다. 각 연방 내 공화국의 대표들이 자신이 소속된 공화국의 개혁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1988년, 교육의 다양화와 질적 향상을 목표로 하는 리가초프 보고서가 크렘린에 제출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교육계에서 논의된 주요 쟁점은 학교 수업의 인센티브 문제, 교육 과정의 조정, 관료주의와 교조주의, 설비 노후화, 교육의 질적 수준 하락, 학교 민주화와 자치제, 부족한 예산 문제 등이었으며 체르넨코 개혁에서 개선되지 못한 교과 과정, 구시대적인 수업 방식과 교수법, 강의식 교육에 대한 비판도 이뤄졌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직업 교육이나 기술 교육에 대한 인식이 계속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이나 학부모나 직업 학교와 기술 학교를 기피했고 직업 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이 박탈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일이 많았다. 직업 학교의 학생들이 일반계 학교 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습 의욕이 낮은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래서 상급 중등 학교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 과정들을 개설해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교육 기관이 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다. 직업 교육이나 고등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교육 과정을 신설해 학생들이 진로 적성에 맞는 학교에서 효과적인 학습을 하자는 것이었다.
개인의 희망에 비해 평가 결과가 못 미치는 경우에도 고등 교육 기관으로의 진학을 원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을 설득할 수 있을만한 동기를 부여할 필요도 있었다. 직업 학교의 학생들에게 일반계 학교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장학금과 지원을 해 준다거나 일반계 학생들보다 더 쉽게,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할 수 있다는 보장을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소련 정부는 교육 현장과 학생, 학부모, 여론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교육 행정의 개선을 추진하고 시설 노후화와 예산 문제, 학교 자치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교육 기관의 부분적인 독립 채산제도 도입하려고 했다. 독립 채산제가 도입되면 각 학교는 교부된 예산을 자주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학교 회의의 재량에 따라 독자적으로 학교 기금을 조성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될 것이었다. 학교 기금은 관련 부처의 지원, 학부모나 시민의 기부, 학교에서 독자적으로 추진한 경제 활동으로 확보한 재정 등을 수입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연방 정부 차원에서는 교육 예산의 증대와 지방 소비에트의 재정권 확대, 기업으로부터의 교육 예산 지원 등의 방안을 구상했다.
교육 행정 조직의 관료주의, 교조주의, 비효율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간 여러 개로 나뉘어 있던 교육 부처들을 통폐합하고 주, 시 단위로 교육 행정 기관에 속하는 인민 교육 회의를 설치했다. 인민 교육 회의는 교직원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 대표나 사회 단체 대표가 학교 관리와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학교 민주화를 위해서 학교 운영의 책임 주체를 교장에서 교사, 관리자, 학생, 학부모 대표로 이뤄진 학교 회의로 전환하고 대학의 자치권도 확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조치들 중에서 일부는 구상만 되었고, 일부는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일부는 시행되기 전에 소련이 해체되고 말았다. 소련 붕괴의 충격 속에서 발트 3국을 제외한 연방 구성 국가들의 교육 환경은 지옥 밑바닥에 쳐박혀 버렸고 러시아를 비롯한 다수 국가들의 교육은 오랜 시간 동안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1] коренизация, 코레니자치야[2] ПТУ, Профессионально-Техническое Училище. 영문: PTU. 통칭: Училище)[3] техникум[4] ВУЗ, Высшее учебное заведение[5] 출처: 러시아의 역사 4판(1977) / 니콜라스 랴자노프스키 저[6] 이 당시까지는 선진국이라 해도 주 6일제 수업을 받는 나라들이 아직까지는 꽤 있던 시대였다. 일본과 스위스도 주 6일제를 시행하던 대표적인 나라였다.[7]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 물가 폭등으로 교복과 문방구 가격이 같이 폭등하는데 예금이 죄다 휴지 조각이 되고 국가 경제도 나빠지니 교복을 구매하지 못하는 가정이 급속히 늘어난 것.[8] 소련에서 염색약은 시중에서 판매되지 않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염색을 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지만, 염색을 했다가 발각당하면 가차없이 미용실로 보내졌다.[9] 그래도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교칙이 상당히 유화적인 편이었다. 소련의 주변국들의 경우, 세계 대전과 국공 내전이 끝난 뒤부터 일본(1947년) · 북한(1948년) · 중국(1949년)은 체벌을 철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체벌이 성행했다. 중국의 경우에는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체벌이 감소하기는 하지만, 홍위병들이 위세를 이용해 학교를 압박해서였지, 교육 관념이 변해서는 아니었기 때문에 홍위병이 하방되자마자 원상태로 돌아갔다.[10]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셀레스트, 체르넨코, 그로미코, 수슬로프, 그레치코, 로마노프는 농민. 우스티노프, 코시긴, 안드로포프, 그리신, 키릴렌코, 셰바르드나제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대 크렘린의 최고위급 정치인들 대다수가 농민, 노동자 출신이었다.[11] 동 시기 국가와의 비교: 프랑스 7.1%, 일본 6.3%, 미국 6.1%, 서독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