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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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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막심 고리키
Макси́м Го́рький | Maxim Gorky
파일:Maxim_Gorky_1926.jpg
본명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Пешков
Aleksey Maksimovich Peshkov
출생 1868년 3월 28일
러시아 제국 니즈니노브고로드
사망 1936년 6월 18일 (향년 68세)
소련 RSFSR 모스크바주 고르키-10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
[[소련|]][[틀:국기|]][[틀:국기|]]
직업 작가, 미학자
활동 1892년 ~ 1936년
신장 193cm
장르 소설, 산문, 희곡,
사조 사회주의 리얼리즘
서명 파일:Maxim_Gorky_signature_(after_1917).svg

1. 개요2. 생애3. 주요 작품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제국-소련의 대문호이자 혁명가이다. '막심 고리키'는 필명이며,[1]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Пешков)이다. 사회주의의 미학 이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조로 꼽히며 톨스토이-체호프 등이 활약했던 러시아 제국의 문학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장악한 소련 문학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가난하고 불우했던 개인 사정으로 정규 교육을 제대로 수료할 수가 없었으나, 학구열과 열정으로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한 소설가이다. 이 때문에 상류층 아니면 중산층 가정에서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교양 교육을 받아온 선배 러시아 소설가들과 다르게 구성과 문체가 투박하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반소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고리키의 글이 역겨운 쓰레기라며 대놓고 비난했고, 솔제니친 못지 않게 반소련 감정이 강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소설가로서의 역량은 훌륭하지만 기초교양이 부족한 이유로 표현력이나 글 구성력이 많이 제한을 받는다고도 평가했다.

한국에서는 빨갱이 작가로 낙인찍혔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6월 항쟁까지 고리키의 서적은 금서였다. 특히 혁명운동을 묘사한 몇몇 작품들이 문제였는데, 정치에 아무것도 모르던 홀어머니가 혁명운동에 뛰어든 아들을 보고 혁명성을 각성한다는 내용의 '어머니'는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다고 한다. 다만 검열의 눈을 어떻게 피했는지는 몰라도 일본어판을 중역한 듯 한 '유년시대'는 청소년 문고에 가끔 끼워지기도 했다. 해금 이후 많은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2] 90년대까진 운동권 출신들의 호응 아래 활발하게 번역되었으나 운동권이 쇠퇴한 2000년 이후로는 잊혀지기 시작해 2020년대에는 대표작 어머니 정도나 기억되고 다른 장편들은 절판되어 재간이 되지 않고 있다.

2. 생애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고 4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11세에 고아가 되었다. 술에 취한 외조부가 상습적으로 모친과 자신을 폭행했던 것 때문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었으며 경제적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하여 12세에 카잔으로 가출하면서 5년간 떠돌이로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19살이던 1887년 12월에는 자살 시도도 벌였다. 이때의 경험은 자서전인 '유년시대'와 '세상속으로'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고리키는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책이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으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좋은 책과 나쁜 책을 확실히 구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여행으로 얻은 견문과 습작을 통해 필력을 얻은 고리키는 성인이 되자 신문 기자로 일하게 되었다. 신문 기자로서 그는 러시아 제국의 모순과 하류계급의 참혹한 생활상을 세세하게 폭로하고, 틈틈히 소설도 쓰면서 명성을 얻어갔다. 초창기의 그는 정제되지 않은 글쓰기로 혹평을 얻었으나 그의 순수한 태도에 감격을 받은 평론가들의 지도로 글쓰기를 다시 배울 수 있었다 한다.

당시 생존해 있던 대문호 안톤 체호프레프 톨스토이의 부인과도 안면을 트고, 혁명세력과 어울리게 되었고 특히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와도 밀접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그의 희곡 “밑바닥에서” [3]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영되면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자선 사업을 벌이며 가난한 어린이들과 실업자들을 위한 도서관을 지었다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00_yasnaya_polyana-gorky_and_tolstoy.jpg
1900년, 막심 고리키와 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도 181cm의 거구였는데[4] 고리키는 그를 훨씬 능가하고 있으니 얼마나 거구였는지를 알 수 있다. 고리키의 키는 193cm.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이지만 반체제 활동으로 인하여 영구제명당하기도 했다. 그에 대하여 동조하던 선배작가 안톤 체호프는 제명을 반대하다가 그렇다면 나도 나간다며 스스로 아카데미를 탈퇴했다.

이런 가운데, 고리키는 반체제-운동권작가로 찍혀 결국 여러번 체포되었고, 결국 이탈리아 왕국으로 자의반 타의반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망명지에서도 그는 계속 혁명 운동을 지원하였다. 1913년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으로 사면령을 받자 러시아에 돌아왔다. 1917년 10월 혁명이 발생해 그의 동지들이 정권을 잡았으나, 곧 볼셰비키 정권의 언론탄압과 폭력성에 염증을 느끼고, 이들을 비판하는 논설을 썼다.[5] 1921년 자신의 친구인 시인 구밀료프가 체카(KGB, NKVD의 전신)에 반혁명죄로 처형당하자, 고리키는 이해 다시 폐결핵을 핑계로 다시 이탈리아로 망명을 떠났다.

이렇게 10여년간 이탈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파시스트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자 이탈리아에 있는 것도 안전을 담보하기 힘들어졌다. 이때 이오시프 스탈린은 고리키에게 귀국해 줄 것을 요청했고, 생활의 어려움에 지친 고리키는 이를 수락하여 1931년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다시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파일:ANT-20.jpg
막심 고리키의 이름을 붙인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기 ANT-20.
소련에 귀국한 그는 스탈린 체제의 정당성으로 활용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특히 고리키가 태어난 니즈니노브고로드도 고리키시로 개명되면서 소련시대 내내 고리키 시로 불려졌다. 어렸을 적 외조부와 외삼촌들에게 학대당했던 상처가 강했던 고리키는 스탈린의 농업집단화 당시 농촌의 어린 소년들이 학교에서 세뇌받은 대로 자신들의 집단농장을 반대하던 자신들의 아버지들을 반동분자라고 신고해서 숙청당하게 하는 일을 영웅적인 일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농업집단화(콜호스) 계획이 시작된 후 몇년 후 1934년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으로 대숙청이 시작되면서 소련 사회에 암운이 드리우자, 고리키는 사실상의 가택연금상태에 접어들었다. 1936년 고리키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관은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운구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Joseph_Stalin_and_Maxim_Gorky%2C_1931.jpg
1931년, 스탈린과 고리키.
1938년 NKVD 전 부장인 겐리흐 야고다의 숙청 당시 죄목 중 하나가 고리키의 독살이었는데, 이것이 만들어진 죄목인지, 혹은 스탈린의 암살음모를 실행한 야고다가 죄를 뒤집어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굴라크를 찬양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사실 처음에는 소련 정부에서 일부러 고리키에게 백해 운하를 파는 굴라크 노동자들이 좋은 옷을 입고 책을 읽으며 정신을 연마하는 곳 쯤으로 보이게 꾸며서 보여준 덕택에 고리키는 당시에는 굴라크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고리키가 굴라크를 찬양하는 글도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 과정에서 징발된 굴라크 죄수들 절반 가까이가 픽픽 죽어나가니 그에게도 실상이 계속 감추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고리키는 자신이 굴라크를 찬양했던 글을 쓴 걸 후회하면서 스탈린에게도 비판적인 말을 했으나, 소비에트 체제 정당성의 상징으로 내세워져 자기 이름이 도시에 붙을 정도였던 고리키는 스탈린이 숙청한 보리스 필냐크, 다닐 하름스, 이삭 바벨 등처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연금에 머물렀고 고리키 본인은 스탈린에게 쓴소리를 하고도 비교적 편안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6]

고리키가 수용소의 진실을 알려준 소년 수감자들을 배신하고, 그 소년 수감자들은 처형되었다는 루머가 있다. 압제에 대한 저항을 외쳤던 고리키의 이 "배신" 은 굴라크 수감자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고리키가 북해 인근의 솔로프키 수용소를 순시할 때, 용감한 소년 수감자들이 그에게 뛰쳐나와 "진실"을 이야기했고, 고리키는 눈물을 뚝뚝 훌리며 돌아갔지만 그 소년들은 끝내 바로 다음날 처형되었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여러 굴라크에서 수십 년간 떠돌았다고 한다.[출처][8] 물론 루머일 뿐이다.

혁명운동을 지원하고 볼셰비키와도 밀접하게 교류하던 고리키가 1931년에야 소련에 귀국하고 그 체제에 실망했던 이유는 고리키는 1909년 일찍이 레닌과 결별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소련 공산당의 전신)은 급진주의 좌파,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트로츠키의 무당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고리키는 레닌의 한때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9]가 이끄는 급진주의 파벌에 속해 있었고, 이들은 1905년 혁명 이후 사회민주노동당이 두마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반대해 의원을 전부 출당하든지 두마 출석을 거부시키든지 최후통첩을 하라는 요구를 하다가 레닌에게 출당당한다. 급진주의 분파는 레닌과 너무 일찍이 결별한 데다가 트로츠키, 부하린 등 이후의 볼셰비키보다 몇 년은 앞서 혁명활동을 한 대선배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스탈린의 대숙청 이전에 자연사하거나 병사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대숙청은 피해 간 경우가 많다.

레닌이 고리키의 미학을 비판한 바가 있다.

3. 주요 작품



[1] "몹시 비참하다.(Максимально горький)"라는 뜻을 지닌다.[2] 당시 이름 표기는 막심 고리끼.[3] 일리야 벨랴코프는 이것이 한국의 대학로에서 상연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유명한 작품은 아니라고 한다.[4] 당시 동유럽인 남자 평균 키가 160cm 중후반이었다.[5] 이 논설은 소련이 망할 때까지 러시아에선 묻히게 된다.[6] 참고자료 및 출처 : 속삭이는 사회 / 올랜드 파이지스 저[출처] : 수용소 군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8] 진실이라면 고리키가 고발했다기보단 소년들의 윗선이 처리한걸지도 모른다.[9] 고리키와 마찬가지로 작가였다.[10] 1991년 열린책들에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