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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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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발사3. 행적4. 후폭풍5. 여담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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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Спутник
Sputnik

1957년 10월 4일 소련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스푸트니크 1호는 러시아 우주계획의 선구자인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의 탄생 100주년과 국제 지구 관측년(1957년 7월 1일∼1958년 12월 31일까지의 18개월간의 기간)의 기간에 맞추어 발사되었다.

스푸트니크는 러시아어"위성"을 뜻하며 '동행자', '동반자' 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

금속구 모양의 본체에 4개의 안테나가 달려있어 '"삐...삐...삐...삐..."' 라는 소리를 전 세계로 송신했고 이 신호를 시작으로 냉전의 무대는 이제 지구를 넘어 우주로 확장되었으며 엄청난 기술 발전을 이룩하게 만들 우주 경쟁이 시작되었다.

2. 개발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독일V2 로켓을 기초로 해 ICBM 개발 경쟁을 시작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 사회에 먹일 '한 방'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것을 찾던 상황이었다.

1947년 10월에 첫 번째 소련제 V-2 로켓의 시험발사가 성공했지만 이미 미국은 V-2를 수백 발 가진 상황이었다. 북유럽에서는 소련에서 날아와 자국 영공을 가로지르는 소련 로켓들 때문에 유령 로켓 소동까지 벌어졌지만 소련은 더 엄청난 것이 필요했다.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이오시프 스탈린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V-2 로켓의 설계를 그대로 카피해 사정거리가 278km인 R1 로켓과 사정거리가 600km 이상인 R2 로켓을 개발했는데 R2 로켓은 V2와 R1로켓을 크기만 키운 로켓이 아니라 코롤료프만의 기술력을 담았는데 우주개발과 ICBM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인 단분리를 최초로 만들고 실전배치한 로켓이다. R2는 현대의 탄도 미사일처럼 대기권에 다다르기 전에 탄두를 분리해 사정거리 및 명중률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사실, 코롤료프는 전쟁 무기 개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로켓과 우주가 좋아서 연구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공위성을 우주에 올린다면 그만큼 그의 조국에 애국하는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를 위해서는 데이터 수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의 연구팀은 곧 동물을 이용한 고고도 비행 실험을 시작했다. 탑재물은 러시아인들이 친근하게 생각하는 가 주로 이용됐다. 이러한 고고도 실험들은 우주비행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몇 분 동안의 실험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일부 과학자들은 지구 궤도를 끊임없이 돌 수 있는 인공위성을 발사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스탈린의 아들인 바실리 스탈린 소련 과학 아카데미 소장의 화를 돋우었다. 바실리는 인공위성 제안서를 제출한 과학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추상적인 계획을 세워 시간을 낭비할지라도 동무는 공공요원이기 때문에 국가방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트전투기지 어리석은 스푸트니크(동반자)가 아니란 말이오." 그렇게 인공위성 발사계획은 잠시 잊히는 듯 했으나 몇 년 뒤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한편 V-2 로켓 기술의 습득을 완료한 소련의 다음 목표는 서유럽까지 핵탄두를 나를 수 있는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서방에서 'SS-3 샤이스터'(사기꾼이란 뜻)라고 부른 이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정거리는 1,204km로 1955년 실전에 배치됐다. 1957년 6월에는 1Mt의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사정거리 1,800km의 SS-4 샌들 중거리 탄도미사일이 완성됐다.

이로서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했던 서유럽[1], 서아시아[2] 동아시아[3]는 모두 소련의 미사일 사정거리 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소련이 인공위성 개발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탄도미사일 개발에 한참 자신감이 붙던 1955년이었다. 그 해 1월 소련은 중앙아시아 지역(현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퇴레탐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 시험장을 건설하고 마침내 1957년 8월 3메가톤의 수소폭탄을 7,000km 떨어진 곳까지 나를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R-7을 시험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9월 두 번째 시험발사는 당 제1서기였던 니키타 흐루쇼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졌다. 평소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싶어했던 코롤료프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소련이 한창 발사체 개발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을 즈음 미국은 공군에서 개발하고 있던 아틀라스 시험에 계속 실패해 개발 일정은 하염없이 지체되어 있었다. 이를 안 코롤료프는 흐루쇼프에게 미국을 엿먹이기 위해 R-7[4]을 이용해 인공위성을 발사하자고 설득했다. 게다가 미국이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준비하고 있던 뱅가드 위성을 쏘아올리기로 약속한 날이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흐루쇼프는 인공위성 발사계획을 승인했지만 이번에는 코롤료프의 기술자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이 임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롤료프는 결국 팀 멤버들을 하나하나 설득시켰다. 당시 코롤료프가 그의 팀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유리 실라예프(Ю́рий Сила́ев)에게 스푸트니크는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말한 것 중 명언이 하나 있다.
코롤료프: 달을 보곤 하는가?
실라예프: 예, 봅니다.
코롤료프: 스푸트니크가 그것처럼 보일 거야, 조금 작은 별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BBC 다큐 'The Planets' 中
파일:external/www.nasa.gov/190844main_GPN-2002-000166_full.jpg
발사전 정비 중인 스푸트니크 1호
팀을 수습한 후 그는 바로 인공위성 제작에 착수했다. 이전에도 비밀리에 제작하던 모델이 있었지만 복잡한 과학탐사를 위해 설계된 그 모델을 테스트하여 쏘아보내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더 큰 문제는 해당 모델을 납품하던 제작사들이 규정 설계를 단 한 곳도 안 지켜서 모듈이 서로 안 맞고 중량은 초과되는 등 이걸 전부 수정하고 테스트하여 제 기간에 쏘아올리는 게 불가능했다.

이에 열받아도 단단히 열받은 코룔료프는 방향을 선회해 송신기와 간단한 측정기만 장착하는 것으로 결정했고[5] 모양은 천체 모양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코롤료프는 또한 인공위성이 지상에서 육안으로 보일 수 있기를 바랐다.

인공위성은 몇 달도 안 되어 준비되었고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스푸트니크 1호는 라디오 송신장치를 단 지름이 58cm인 공 모양의 인공위성이었다. 무게는 83.6kg. 그리고 코롤료프는 그의 아들 같은 첫 인공위성에 '동반자'라는 뜻의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인공위성의 발사 준비는 몇 주 내로 완료되었고 흐루쇼프는 발사 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1957년 모스크바 시간으로 10월 4일 오후 10시 28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A로켓 엔진이 불을 내뿜으면서 스푸트니크를 우주로 올려보내기 시작했고 5분 후 인간이 만든 최초의 은 궤도에 자리를 잡고 최초의 메시지를 지구로 보내 왔다.

흐루쇼프는 프로파간다의 목적으로 위성이 발신하는 신호는 암호화하지 말라고 연구팀에 명령했고 전세계의 사람들은 우주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삐...삐...삐..." 소리의 첫 신호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때 단단히 엿을 먹은 미국에서는 이런 농담이 돌았다. "스푸트니크는 하루에 두 번 신호를 바꾼다. 워싱턴 위를 지나갈 때 푸하하하하(xaxaxaxa)로".

그 시각 워싱턴 D.C.의 소련 대사관에서는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국제지구관측해'(IGY)를 기념한 '로켓과 인공위성'이라는 학술세미나였는데 당시 양국의 과학자들이 만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세미나 후에도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자신들의 우주계획을 1급 비밀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에 서방 과학자들은 저마다 소련 과학자들 옆에 붙어 진척 상황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술에 취한 듯한 한 러시아 과학자가 "우리는 조만간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조만간이 대체 얼마냐?"고 미국 과학자가 묻자 그는 "1주일 아니면 한 달."[6]이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장내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1주일이라고?" 미국 과학자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작 농업국가밖에 안 되는 소련 따위가[7] 어떻게 우리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발사하겠어?"라고 생각했다. 농담을 섞어 소련 측의 감상을 한 마디로 줄이면 우주에 인민의 감자를 쏘아올려 농업국가의 저력을 보여준 것이 된다.[8]

한편 연회를 즐기고 있던 과학자들의 틈바구니에는 뉴욕 타임스기자인 월터 설리번도 끼어 있었는데 파티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그는 신문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오늘 발사했다는 뉴스가 타스통신(소련의 국영언론)으로부터 들어왔으니 확인해 보라는 것이었다. 설리번은 파티장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게 정말로 올라갔어!"

소련이 미국의 뱅가드 로켓 계획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자신들의 R-7 미사일을 개조한 A로켓을 이용해 미국을 엿먹였는데 그때 누군가가 옥상으로 올라가 인공위성을 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대사관 지붕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인공위성인데도 불구하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푸트니크 1호는 그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는 동안 그들의 머리 위를 2번이나 지났다.
파일:external/static01.nyt.com/1004_big.gif
소비에트, 인공위성을 우주로 발사
지구를 시속 18,000마일[9]로 공전중
미국 상공을 4회 가로지른 것이 포착됨

- 뉴욕 타임스, 1957년 10월 5일 헤드라인
그리고 그날 세계는 완전히 변했으며 우주 탐사의 시대가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3. 행적

스푸트니크 1호~3호는 공식 명칭. 스푸트니크 4호~25호는 소련에서 사용한 공식 명칭이 아닌 서방에서 붙인 이름이다.이후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을 실현해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지구 궤도에 오름으로서 미국을 다시 한 번 엿먹였으며 한동안 우주 경쟁에서 독주하면서 미국을 계속 엿먹였다.

스푸트니크 11호~18호는 소련 당국에 의해 그 존재가 은폐되었으며 서방의 관측자들에 의해서 순서대로 이름이 붙었다. 18호 이후 스푸트니크는 25호까지 발사되었으나, '마스 1호'로 명명된 23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기권 밖으로 떠나지조차 못했다. 그 마스 1호조차 화성에 접근하기 전에 파괴되었다.

11호부터 소련 당국은 위성에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더 이상 붙이지 않았고 대신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우주시대의 지평선을 연 소련이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공중분해된 뒤였는데 1997년 10월 5일 바이코누르에서 다른 몇 개의 위성과 함께 소유즈 로켓에 실려 발사된 스푸트니크 40호는 11월 3일 미르 우주정거장에서 조립되어 궤도에 안착하였다. 스푸트니크 40호는 PS-2, Radio Sputnik 17(RS-17)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위성은 사실 스푸트니크 1호 발사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와 프랑스 학생들이 만든 스푸트니크 1호의 1/3 사이즈 축소 위성이었다. 스푸트니크 40호는 1997년 12월 29일 연락이 두절되었고 1998년 5월 21일 대기권에 진입하여 소멸하였다.

발사까지 우여곡절이 있었고 당시 최첨단 기술이 총동원되었을 스푸트니크 1호를 비록 축소형이지만 40년이 지난 후 학생들이 뚝딱뚝딱 만들어내 기념으로 우주에 올리는 모습이 참으로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4. 후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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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somehow, in some way, the sky seemed almost alien.
지금, 왠지, 어떤 면에서인지, 하늘이 아주 낯설어 보였다.
린든 B. 존슨 당시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스푸트니크 발사 소식을 듣고 난 직후. 출처
이 위성이 발사되었던 당시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고 불리던 준 전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은 스푸트니크 발사 후 패닉에 빠졌다. 조국인 미국이 세계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국력 자체는 소련은 미국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여기서 미국 국민들이 느꼈다는 국력은 단순히 대공황 당시처럼 자국 내의 정치/경제적인 불만족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뒤바꿀 계획을 경쟁국이 더 빨리 성공시켰다는 것에서 기술력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차이가 국가 비전의 차이로까지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거기에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는데 "소련이 우주에 인공위성을 올릴 수 있다면 거기서 핵무기를 우리 머리 위에 떨어트릴 수도 있지 않은가?"가 그 이유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꼼짝도 못 하고 소련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병기로서의 의도만 지우고 과학이니 우주니 거창한 이유를 들어 개발한 이유도 사실상 그것이었고, 이를 결국 차후에 실현시킨 병기가 바로 ICBM.[12]

스푸트니크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충격을 받고 2개의 국가 기구를 신설하라고 지시했는데 이 기관들이 그 유명한 DARPA[13]NASA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3일 미국은 다시 한 번 패닉에 빠졌는데 소련이 세계 최초로 우주로 생명체를 보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게 사람이 아니고 개(라이카)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소련과 미국의 기술력 차이를 세계 만방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군은 더이상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밀릴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대대적으로 로켓 개발 사업을 재추진했다. 그 결과 미 해군은 뱅가드 로켓 계획을 급속히 진행시켜 그해 12월 6일에 뱅가드 TV3을 발사했지만 로켓은 1m도 못 올라가고 발사대에서 폭발했다. 원인은 추진 체계였는데 탱크 및 인젝터의 낮은 압력 때문에 연소실의 고온 가스가 인젝터를 통해 연료 시스템으로 새어들어간 것이었다.

이 장면은 TV로 생중계되었고 4초만에 로켓이 폭발하는 걸 전 세계에 자랑하고 만 미국은 대굴욕을 맛보았다. 뱅가드 인공위성은 회수되었지만 재사용은 불가능했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하필 사고에 휘말렸던 뱅가드 TV3가 스푸트니크와 모양이 거의 비슷해서 뱅가드의 실패를 두고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끝장난 니크(Failnik)!"라고 미국을 깠다. 미국 언론도 고장난[14] 스푸트니크라는 뜻의 카푸트니크(Kaputnik)[15], 자빠진 스푸트니크라는 뜻의 플롭니크(Flopnik), 영어로 "앗, 이런"을 뜻하는 "Oops"가 들어간 웁스니크(Oopsnik), 땅에 주저앉은 스푸트니크라는 뜻의 스테이푸트니크(Stayputnik)[16] 등의 별명을 붙이면서 엄청나게 조롱했고 전 세계가 미국을 비웃었다.

뱅가드가 폭발하고 며칠이 지난 후 소련은 공식적으로 '조문'을 보냈다. 무인 로켓이라 죽은 사람도 없으니 당연히 놀리려고 보낸 조문이었고 실제 조문에는 흐루쇼프가 쓴 "뱅가드(전위부대)라고 부르지 말고 리어가드(후방부대)로 부르는게 좋겠다"는 통렬한 조롱까지 실려 있었다.

미국은 귀를 틀어막고 뱅가드 TV3 BU(Backup)의 발사를 준비했지만 설상가상으로 다음 해 2월 5일 두 번째의 뱅가드 로켓도 점화한지 57초만에 폭발했다. 다행히 무인 인공위성 로켓이라 사상자는 없었고 3월 17일 3번째 발사는 성공했지만, 미국의 자존심은 이미 박살나 버렸다. 이후에도 해군의 뱅가드 로켓은 11번의 발사 시도 가운데 8번이 실패하면서 미국의 자존심을 벅벅 긁어 놓았다.

결국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 등 나치 독일에서 회유한 전범 과학자들에게까지 로켓 개발을 맡길 수밖에 없었고 뱅가드가 터지는 사이 브라운 박사와 미 육군은 주피터C 로켓을 개발해 1958년 1월 31일 제트 추진 연구소(JPL)가 만든 익스플로러 1호 위성을 쏘아올려 지구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하고 익스플로러 1호가 지구 밖에 있는 방사선 띠인 밴 앨런대를 발견하는 등의 학문적인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미 뱅가드 로켓의 실패로 미국의 자존심은 아주 처참하게 무너진 상태였고 로켓 기술의 격차 역시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더불어 쏘아올린 인공위성의 무게도 문제였는데 소련은 최초로 발사한 스푸트니크 1호조차도 80kg은 넘었고 1958년 5월 15일에 발사된 스푸트니크 3호가 1,327kg인 데 반해 미국이 같은 해 7월 26일에 쏘아올린 익스플로러 4호는 25.50kg, 뱅가드는 겨우 2kg에 불과했다. 흐루쇼프가 익스플로러 1호의 발사 소식을 듣고 스푸트니크와 비교하면서 "작은 오렌지만하군" 하며 비웃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 게다가 이 무게 차이는 단순 자존심 문제를 넘어 미국이 환장할 수 밖에 없는 문제도 있었는데 핵무기에 사용되는 방사능 물질은 어느정도 이상의 질량을 넘겨야 터지기 때문에 핵탄두는 무게가 나갈 수 밖에 없다.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만들어진 핵무기들조차도 기본적으로 톤 단위는 나갈 정도. 그런데 소련은 1톤이 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고 미국은 못했다는것은 소련이 일방적으로 미국에 핵폭탄을 떨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 미국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스푸트니크에 이어서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보스토크 계획을 추진해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고 귀환까지 성공하여 미국을 더더욱 엿먹였다. 이후 미국은 국가적 수치를 씻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추진했고 이 계획이 성공해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할 때까지 '스푸트니크 쇼크'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으며 미소 간의 우주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최초의 달 탐사용 무인 로버(월면차) 루노호트(1호(루나-17), 2호(루나-21))를 두 대나 성공시켜 또 엿을 먹였지만 이번에는 미국이 이미 먼저 유인 달 착륙을 성공시킨 후라 타격은 그리 크지 못했다. 오히려 이때는 소련이 역관광을 당하고 난 뒤라 소련 측이 애가 탔을 듯.

그리고 이후 약 50년간 인류는 전례없던 발전속도에 도달한다. 지구에서 우주까지 정보를 보내고, 미지의 상황을 예측하여 모든 상황에 대비한 새로운 물질이나 규격을 만들고 그것을 계산하는 장치를 만드는 등, 그리고 그 기술들이 우주 하나에만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것을 알고 민간과 지구로 기술의 활용처를 찾기 시작하면서 지구에 생명이 탄생한 이래 가장 빠르고 무지막지한 기술의 혁신 시대를 맞이했다.

또 이 스푸트니크 쇼크는 미국 교육에 대한 비난 및 자성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동안 환영받던 진보주의자들 대신 본질주의 학파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자성 수준이 아니라 그간의 패러다임이 싹 물갈이당했다. 이 과정에서 랠프 타일러를 비롯해 존 듀이조차 신뢰받지 못하는 지경이었으니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이런 경향에 조셉 슈왑은 "교육과정학 분야는 죽어가고 있다."라며 흥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학문중심 교육과정. 1959년 9월 미국에서 우즈홀 회의(Woods Hole Conference)가 열리면서 기존 교육계에 대한 반성 및 대안을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기존의 교육학자(교사 + 진보주의 교육학자)들은 찍소리도 못하거나 아예 초청받지도 못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우즈홀 회의에는 총 34명의 학자들이 모였는데 그 34명 중 교육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교육학자들이 만든 교육 때문인데 어디서 교육학자가 끼냐는 것이 당시의 논리였다.

교육학자들은 나름대로 항변해 봤지만 여론은 냉담하기 그지없었고 몇몇 이들은 아예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만큼 미국 교육계에 준 쇼크가 대단했다. 미국 교과서진화론이 다시 등장했고 1967년에는 테네시 의회까지 반진화론 법을 폐기했다. 이를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한다.

또 스푸트니크 쇼크를 받은 미국 DARPA에서 인터넷의 전신인 알파넷을 개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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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매된 기념우표. 같은 공산권 국가인 베트남쿠바[17]에서도 비슷한 우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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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아일보에서도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를 보도했으며 인공위성을 '우주에 보내는 과학사절'이라고 표현했다.

독일이 통일된 후동독 국영방송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중부독일방송이 인수한 청소년 대상 채널에 스푸트니크 계획에서 이름을 따 와 MDR 스푸트니크(MDR Sputnik)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시트콤 '프렌즈(Friends)'에서는 괴짜 과학자인 로스 겔러가 할로윈 파티에서 코스프레하기도 했다. 사실은 감자 모양 코스튬에 안테나를 꽂은 것뿐이었지만. Spud에 감자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용한 말장난. 모두 코스튬으로 오인했지만 당시 로스의 애인이었던 모나는 한 눈에 스푸트니크라고 알아보는 신기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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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공식 로고에 있는 푸른 원 3개는 스푸트니크를 상징한다.

GPS가 발명된 계기이기도 하다. 미국의 존스홉킨스 대학의 응용 물리학 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이 신호를 이용해서 위성의 위치를 추적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연구했고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서로 작성했다.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측정하면 위성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활용하여 여러 위성으로부터 신호를 받아 현재 위치를 특정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것이 GPS 기술의 핵심이다.

영국 왕실천문관이자 저명한 천문학자인 리처드 울리는 로켓추진 우주선에 회의적이었고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우주로 발사하면 일회성 쇼는 되겠지만 과학적으로 가치는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스푸트니크가 발사되기 1년 전인 1956년에는 영국 왕실 천문관에 임명되어 타임지와 인터뷰했는데 그 인터뷰에서도 로켓추진 우주선은 완전히 허튼소리고 차라리 그 돈으로 더 좋은 천문관측 망원경을 구비하는 게 우주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인터뷰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고 리처드 울리는 1986년까지 살아 인류가 달에 착륙하고 금성, 화성, 목성, 토성까지 우주선을 보내면서 우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을 보다가 죽었다.

워너브라더스의 1999년 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의 첫 장면에서도 특유의 신호음을 내며 등장한다. 또 작품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인 미국의 한 시골 동네 록웰의 식당에서 딘 맥코핀이 보던 신문기사에도 스푸트니크 관련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1면을 장식하고 있다. 본 작품은 냉전 시대인 1957년의 미국 사회상을 잘 담아낸 작품인 만큼 스푸트니크가 출연한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도 스푸트니크가 끼친 영향력을 체감할수 있는데 문명 시리즈에선 기술을 개발할 경우 해당 기술과 연관된 어록이나 글이 명대사로 인용되는데 문명 4에선 인공위성 기술을 개발할 경우 스푸트니크의 송신음이던 "삑...삑...삑...삑..."이 인용된다. 유머스럽지만 동시에 스푸트니크를 시작으로 우주 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암시하는 문구인 셈.

NBA 역대 최단신 덩크왕인 스퍼드 웹의 별명 '스퍼드'의 기원이 된 위성이다. 스퍼드가 태어날 당시 스퍼드의 머리 모양이 스푸트니크의 머리 모양과 닮았다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6. 같이보기



[1] 독일. 다량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 핵이 배치된 미군 기지들은 1960~70년대 내내 반전반핵운동의 표적이 되었다. 압도적인 물량의 소련군이 서유럽을 침공하면 소형 전술핵으로 저지하고 그 사이에 미 본토에서 증원군을 실어온다는게 냉전기 미군의 전략이었다.[2] 튀르키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에 있던 소련 핵무기와 맞교환 조건으로 철수했다.[3] 바로 대한민국. 오산과 군산의 미군 기지에 다량의 전술핵이 비축되어 있었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함께 모두 철수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에 한반도에 다시는 전술핵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물밑 약속을 했다고 한다.[4] 위성을 쏠 때는 A로켓이라고 불렀다.[5] 이 간략화 이전의 모델은 후일 스푸트니크 3호가 된다.[6] 그러나 사실은 그것보다도 훨씬 빨리, 바로 그 당일에 올라갔다.[7] 당시 미국은 인구의 4~5%만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소련은 인구의 20% 이상이 농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8] 스푸트니크의 스푸트(Spud)는 감자의 영어 사투리 중 하나다.[9] 약 시속 29,000km, 약 초속 8km[10]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라이카는 애초에 재돌입보다 훨씬 앞 단계인 상승 과정에서부터 극심한 고통과 스트레스로 인한 죽음을 맞았다. 문서 참조.[11] 그 해 7월 26일에나 쏘아올린 익스플로러 4호가 25.50kg였으며 이전의 미국 위성들은 이것보다도 가벼웠다.[12]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린 A로켓의 원형인 R-7 또한 원래 ICBM 용도로 제작된 발사체였다.[13] 인터넷의 전신인 알파넷을 만든 곳이다.[14] Kaput는 Kaputt라는 독일어 단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고장났다는 뜻이다.[15] 영어 위키백과에서 Kaputnik라고 검색하면 뱅가드 TV3으로 곧바로 리다이렉트된다.[16] 이것은 훗날 2015년 KSP 게임의 무인 조종 모듈로 등장했다.[17] 이건 좀 나중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