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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11:43:38

바실리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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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0000><colcolor=gold>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사령관
바실리 이오시포비치 스탈린
Василий Ио́сифович Сталин
파일:Vasily_Stalin.jpg
본명 바실리 이오세비스 제 주가슈빌리
ვასილი იოსების ძე სტალინი(조지아어)
출생 1921년 3월 21일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모스크바 연방시)
사망 1962년 3월 19일 (향년 40세)
소련 러시아 SFSR 타타르 ASSR 카잔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타타르스탄 공화국 카잔)
국적
[[소련|]][[틀:국기|]][[틀:국기|]]
학력 제2특별학교(1937~1938)
카친 고등군사항공학교(1938~1940)
직업 군인
최종 계급 항공중장
경력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
1948년 ~ 1952년
서훈 내역 적기훈장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초고속 승진과 패악질2.3. 스탈린 사망 후 투옥2.4. 죽음
3. 매체에서4.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바실리 이오세비스 제 주가슈빌리다. 아버지의 위세를 이용해 온갖 패악질을 부리면서도 공군장군이 되는 등 출세를 거듭했으나, 스탈린 사후 몰락하고 동네 양아치로 살다가 1962년 40세의 이른 나이에 알코올 중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21년, 스탈린과 스탈린의 둘째 아내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복형 야코프 주가시빌리와 달리 바실리 스탈린은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생각했다.

스탈린은 아들 바실리를 상당히 아꼈는데 라리사 바실리에바의《크레믈린 여인들》에 따르면 부하린이 어느 때 스탈린을 만나러 갔을 때 스탈린은 갓난아기였던 바실리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기가 콜록거리며 우는 걸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아, 괜찮아. 애한테 좋은 일이라구. 연기를 뿜어주면 이 놈이 강해진단 말이오!"라고 했다.[1][2] 나데즈다가 쓴 편지에서도 이것이 사실로 확인되는데 나데즈다는 1922년, 시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어머니께 키스를 보냅니다. 소소도 안부를 전합니다. 그이는 아주 건강하고 기분도 좋아요. 일도 열심히 하고, 어머니 생각도 한답니다. 야샤는 공부하고, 뛰놀고, 담배를 피우고,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바센카 역시 뛰놀고, 엄마에게 함부로 하고,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요. 그래도 아직 담배는 안 피우는데, 머지 않아 이오시프에게 배워 담배도 피울 거예요. 이오시프가 파피로스카 담배[3] 를 피울 때마다 늘 아이에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니까요.

바실리 스탈린은 말을 듣지 않고 함부로 굴어 나데즈다를 힘들게 했고 공부 대신에 축구하기를 즐겼다.

1935년 4월 22일, 아버지 스탈린, 여동생 스베틀라나와 함께 모스크바 지하철 개통을 기념하여 모스크바 지하철에 탑승했는데 엄청난 숫자의 군중이 몰려와 환호하는 대소동이 벌어졌고 바실리는 매우 겁을 먹었다고 한다. 지하철 시승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온 바실리는 침대 위에서 발작하듯이 울부짖었다는데 아버지의 엄청난 위상을 몸으로 겪은 탓일까, 그냥 놀기 좋아하고 공부를 싫어하는 말썽꾸러기 정도였던 바실리는 이후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차차 안하무인으로 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바실리 주가슈빌리라는 기존 이름에서 아버지인 스탈린의 성을 따서 바실리 스탈린이라 칭했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바실리를 불러서 "넌 스탈린이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니야. 스탈린은 소련의 권력이야!"라고 질책했지만 바실리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4]
파일:스탈린일가.jpg
1930년대 스탈린 일가의 모임, 왼쪽부터 바실리 스탈린, 안드레이 즈다노프,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이오시프 스탈린, 그리고 야코프 주가슈빌리.

어머니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가 자살한 후 스탈린 일가는 크렘린의 새 관저로 이사했다. 스탈린은 아내의 죽음 이후 충격을 받아 가족들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였는데 바실리는 아버지를 믿고 날뛰기 시작했다. 1935년, 다차(별장) 관리인 주발로프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바실리는 스스로를 어른으로 여기며 바라는 것을 갖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가끔 어리석은 것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자들 앞에서 마구 음담패설을 늘어놓다가 듣다 못한 이복형 야코프 주가슈빌리에게 두들겨맞기도 했고[5] 학교에서도 함부로 행동하면서 선생들까지 업신여겼다.

대숙청이 한장이던 1937년 제2특별 학교에 입학했다. 스탈린은 학교 측에 스탈린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아들에게 어떠한 특별 대우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무소불위의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한 바실리를 학교 측에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 1938년 참다못한 학교 측은 바실리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고 있으며 자살위협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고 용감하게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스탈린은 학교 측에 솔직하게 보고해서 고맙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실리는 범용하고 버릇없는 젊은이입니다. 항상 정직하지 못하고, 권위가 약한 선생을 위협하길 좋아하고, 툭하면 무례하고, 심지가 약한-아니 흐트러진- 작은 스키타이인입니다. '영감과 여편네들'이 '스탈린의 아들'이라고 시종 떠받들어서 그 녀석을 망쳐 놓았습니다."

스탈린은 학교 측에 아들을 더 엄히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아들의 멱살을 잡아 버릇을 고쳐 놓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말로만 그러했지 스탈린은 방종한 아들을 제어하지 않았고 오히려 학교에서 바실리를 혼낸 선생들을 숙청하는 걸로 대신했다.[6]

이렇게 처리했으니 바실리가 더 망가지는 것은 당연했고 바실리가 커갈수록 스탈린은 더욱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소련 제2 특별 학교에서 한 바탕 소통을 치른 직후인, 1938년 그의 나이 17살 때 크림 반도 세바스토폴에 있는 카친스키 항공군사학교에 입교했다. 그의 이복형 야코프도 다녔던 학교였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스탈린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아들을 특별 대우하지 말라고 엄히 지시했다. 하지만 숙청을 두려워한 교관들은 바실리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바실리는 교관들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으며 으스댔다. 일개 생도에 불과한 바실리는 이동하면서 언제나 학교 관리자들의 화려한 영접식을 받았고 숙소가 아니라 호텔에서 머물렀으며 장교 식당에서 특식을 먹곤 했다. 바실리는 몹시 으스대며 장교 식당에서 할 수 없는 특별 음식을 주문했고, 이에 요리사들은 바실리를 위해 시내로 나가 요리를 공수해야 할 정도였다. 생도 신분인 바실리는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타고 크림 반도를 자기 정원처럼 마구 누비면서 폭주족 놀이까지 했다.

이딴 짓이나 하고 있으니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도 없었고 평균적인 기간에 비해 굉장히 늦게 졸업했다. 스탈린이 바실리를 불러서 야단치기도 했지만 바실리는 그러는 아버지는 사관학교 졸업장이 있냐고 빈정대는 등 오로지 스탈린의 아들이라서 가능한 망나니짓만 골라서 했다.

2.2. 초고속 승진과 패악질

1940년 뒤늦게 카친 고등군사항공학교를 졸업하여 공군 중위로 임관[7]했고, 이후 최고지도자의 아들로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41년 대위로 진급하였다. 그해 7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포병으로 최전선에 투입된 반면 바실리는 모스크바에 주둔하며 스탈린의 다차에서 흥청망청 파티를 벌이며 소일을 보냈다. 그럼에도 스탈린의 아들이란 이유로 승진을 거듭했고 지상공격기 Il-2를 타고 26번 출격한 공로[8]로 1943년 공군 대령으로 승진하여 비행 연대장을 맡았다.

1941년 7월 야코프 주가슈빌리는 최전선에서 중위로 싸우다 나치 독일에 붙잡혔고[9] 스탈린은 전시수상으로서 '내 모든 아들들이 그곳에 있다' 라고 말하며 아들의 구조를 포기했다. 야코프 주가슈빌리는 1943년 결국 수용소에서 사망한다. 의젓했던 아들의 죽음에 스탈린은 상당히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스탈린의 양자 아르툠도 독일군의 포로로 잡히자[10] 스탈린은 바실리를 더 이상 출격시키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독일놈들이 내 아들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씹어뱉었다.

1943년 4월, 부하들과 낚시를 나가서 폭탄을 이용해서 낚시를 하려다가[11] 실수로 장교 한 사람이 사망하고 바실리 자신도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스탈린은 노발대발했고 크렘린 병원에서 치료받던 바실리에게 국방 인민위원 명의로 징계를 내렸다.
1. V. I. 스탈린을 비행연대 지휘관직에서 즉시 해임하고, 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일체의 지휘관직을 맡기지 않는다.
2. 해당 연대와 이 연대의 전 지휘관 스탈린 대령에게, 그가 폭음과 방탕, 그리고 연대를 타락시키고 문란케 한 행위로 인해 직위에서 해임되었음을 통보한다.
1943년 5월 26일, 국방 인민위원 I. V. 스탈린.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정말로 혼내진 않을 것이라 믿던 바실리의 방종한 행동은 끝을 몰랐다.[12] 바실리는 계속 승진을 거듭했고 1945년 즈음에는 24세의 나이로 공군 중장까지 승진했다. 바실리는 거듭된 방탕한 파티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으며 알코올 중독으로 얻은 만성질환으로 인하여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계속 골골댔고 스탈린은 그런 아들의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공군 내부에서도 바실리의 추태에 분노를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소련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던 동독에 파견되었다.

1946년 항공소장으로 진급했다.

1948년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9년 항공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자신에게 아첨하는 패거리들을 몰고 다니면서 온갖 사치를 부렸다. 그가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겐 얼마든지 금일봉을 내리거나 감옥에 보낼 수 있었으므로 스탈린의 경호실장 니콜라이 블라시크마저도 바실리에게 아첨하였다.

그러나 바실리는 끝을 몰랐다. 1952년 5월 1일, 바실리는 나쁜 기상 상태 때문에 비행을 금한다는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위험천만한 에어쇼를 지시했다. 전투기 몇 대가 역사박물관 첨탐 사이를 통과하여 붉은 광장 위를 날아다녔는데 이는 스탈린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스탈린도 더는 참지 못하고 그제야 바실리를 해임시켰다.

그럼에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술과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들을 보다못한 스탈린은 바실리를 불러 자신은 7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공부하고 있다면서 그를 참모본부 부속대학 청강생으로 집어넣어 공부를 시켰지만 바실리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전히 폭음과 난봉꾼 짓에 정신이 없었다. 이 시점에서 바실리는 지나친 폭음으로 건강까지 나빠져 생명이 위태로운 수준이었다.

2.3. 스탈린 사망 후 투옥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였고,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던 바실리의 삶도 바뀌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술 취한 바실리는 공포에 질려서 의사들과 정치국원들이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미친 듯이 비난을 퍼부으며 날뛰었다.

얼마 후 국방장관 니콜라이 불가닌이 바실리를 호출하여 지방 군관구 공군사령관직을 제안하자 바실리는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자리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에 분노한 불가닌이 "군대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가?"라고 질책하자 바실리는 인정하지 못한다고 소리를 질렀고 불가닌도 더는 참을 수 없어 그 자리에서 바실리의 계급장을 떼버렸다.

그렇게 31세의 나이로 퇴역 장군이 된 바실리는 별장에 틀어박혀 술독에 빠져 살았고 아내를 계속 갈아치웠다. 바실리는 인사불성이 되어 길거리에서 아무나하고 술을 마시고 그걸 기억 못하는 폐인의 삶을 살았고 결국 어느 외국인과 술을 마셨다가 부하들의 고발로 1953년 4월 28일 체포되었다.

군사법원은 투기, 공금유용, 직권남용, 부하에 대한 폭력행위, 군 내부의 음모 혐의로 바실리를 기소했다. 법정은 노비코프 장군 등을 음해하여 투옥시킨 혐의 등을 인정하여 바실리에게 8년형을 선고했다.

투옥 중에도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인정하지 못한 바실리는 정부에 협박 편지를 보내며 날뛰었다.

스탈린 사후 권력 암투에서 최종 승자가 된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바실리를 1954년에 그를 병원에 보내 추후에 석방시키려 했으나, 바실리는 오히려 병원에서도 패거리를 몰고 다니면서 갖은 행패를 부렸다. 결국 흐루쇼프는 1955년 즈음에 바실리를 석방한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그를 그대로 교도소에 넣었다. 바실리는 스탈린의 측근들에게 편지를 쓰며 석방을 탄원했고 마오쩌둥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1960년 1월, 흐루쇼프는 바실리를 불러서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석방하여 프룬제 강변 거리의 아파트와 주코프카의 별장 및 장군 연금, 자동차, 당원증, 무공 훈장등을 모두 돌려주었다. 하지만 바실리는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다시 패거리들을 모아 설쳐댔고 바실리의 자녀들도 보다못해서 아버지에게 정신 차리라고 설득했지만 바실리는 어린 것들이 주제넘게 나선다고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4월에 바실리는 키스로보츠크에 강제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다가 그대로 레폴타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2.4. 죽음

파일:stalin2.jpg

군사법원은 바실리에게 8년의 형기를 도로 채울 것을 선고했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바실리의 몸이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1961년 봄, 바실리는 간장병, 위장병, 영양실조 등 각종 만성질환으로 인하여 가석방되었다. 그는 이미 빵 대신에 보드카로 연명할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었다. 모스크바와 조지아에서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석방된 바실리는 마샤라는 간호사와 함께 카잔으로 이주해서,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거주했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술에 찌들어 살았다. 잦은 음주로 인해 말년에 찍은 바실리의 사진을 보면 풍성했던 아버지, 이복형과 달리 머리가 벗겨지고 주름이 깊게 생기는 등 급격하게 노화가 와서 마흔 살에 죽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망가졌다.

1962년 3월, 어느 조지아인과 밤새도록 술을 마셔댄 바실리는 의식불명이 되어 일주일 동안 쓰러져 있다가 3월 19일 사망했다. 부검 결과 그의 내장은 알코올 중독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의 자식들과 세 번째 아내 카피토리나, 네 번째 아내 마샤가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바실리는 카잔에 매장되었다.

바실리 스탈린의 아들인 알렉산드르는, 고모가 그랬듯 스탈린 성씨를 버리고 어머니의 성씨인 부르돈스카야(Burdonskaya)[13]를 따라 알렉산드르 부르돈스키로 개명하여 연극 감독으로 살았다. 고모처럼 할아버지가 독재자라는 인식은 제대로 박혀서 그런지 할아버지 관련 연극을 만들면서 집권기간의 오점을 비판하는 내용을 넣었다. 반대로 알렉산드르의 큰아버지 야코프 주가시빌리의 아들인 사촌형 예브게니 주가시빌리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자신의 친할아버지 스탈린의 평이 나쁘자 할아버지가 너희들 잘먹고 잘살게 해줬으면 찬양을 해야지 까면 되느냐는 망언으로 유명했다. 한 세대 지나면서 개념이 반대로 유전 알렉산드르는 2017년에 죽었다.

3. 매체에서

파일:스탈린의죽음바실리.jpg

스탈린의 죽음을 다룬 블랙코미디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에서는 루퍼트 프렌드가 분했다. 자신의 실수로 소련의 하키 국가대표팀을 몰살시키고 그 스트레스를 함량미달의 새로운 국가대표팀을 마구 갈구며 푸는 막장 모습으로 등장한다. 스탈린이 죽은 후에야 별장에 도착하지만 스탈린의 부검 현장과 곁에 있던 미국제 호흡장치를 보고는 정치국원들이 스탈린의 뇌를 적출해서 미국에 팔아넘기려고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권총을 난사하며 마구 난동을 부린다. 결국 권총을 압수당하지만 옆에 있던 NKVD 장교의 권총을 빼앗아 다시 난동을 부리려 하는데 그때까지도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잠시 정치국원들과 다른 장교들이 어쩔 줄 모르고 쳐다보기만 하는 장면이 백미. 결국 장교들이 달려들어 끌어낸다.

이후 저우언라이에게 자신의 음모론을 떠들면서 마구 날뛰다가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망나니라고 두들겨맞는다. 스베틀라나가 달려와 이런 게 바로 우리 가족에 대한 위협이라고 따지자, 내가 때렸고, 아주 즐겁게 패줬다고 의기양양해하며 스베틀라나를 무시하고 연회장으로 가버린다. 이제 더이상 빽봐줄 아버지도 없다는 걸 안 스베틀라나가 어떻게든 이 맛간 오빠를 인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성과는 없었고,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연설을 하게 해달라고 졸라서 새끼곰 운운하는 조잡한 연설을 하려 하지만 정치국원들이 바실리의 연설 순간에 에어쇼를 벌여서 바실리의 연설을 묻어버리고 바실리의 연설을 중단시켜버린다. 이후 베리야가 처형된 후 스베틀라나는 유학 명목으로 빈으로 보내지고 바실리는 소련에 억류된다. 원래 역사대로 감옥에 끌려갔을 듯하다.

러시아에서 만든 드라마 <바실리 스탈린>이 있다.

4. 참고문헌



[1] 2000년대 이후로는 인간쓰레기나 할 막장짓이지만 7, 80년대 유럽은 물론이고 사실 한국도 90년대까진 이랬다. 그 땐 아파트 베란다에 아빠가 아이 데리고 가서 세워놓고 옆에서 담배 피고, 극장에서 영화보며 담배 피고, 택시기사가 손님 태우고 운전하며 담배 피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승객들이 담배 피고, 강의실에서 교수가 강의하며 담배 피던 시절이라... 무엇보다 당시에는 담배가 그렇게까지 몸에 좋지 않기는커녕 도움이 된다는 인식도 있었다. 폐 속 독소를 없애준다나 뭐래나... 독소가 죽긴 커녕 폐포가 먼저 죽을 것이다. 별개로 당시에 흡연에 부정적이었던 소수의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돌프 히틀러.[2] 대항해시대 때는 담배 연기가 오히려 몸에 좋으며 병을 치료한다며 약용으로도 쓰였다. 소독용으로 스탈린처럼 담배 연기를 뿜어주는 게 흔했다.[3] 해당 번역본의 출처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папироска(파피로스카)는 (필터 유무와 상관없이) 물부리 달린 궐련을 의미하는 папироса(파피로사)에 지소사가 붙은 형태다. 즉 브랜드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일반명사다.[4] 애당초 스탈린은 지하혁명활동 시절 러시아 제국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가명에 불과한데, 이걸 자기 성씨라고 따라하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당연히 피꺼솟.[5] 야코프 주가슈빌리는 바실리와 나이가 14세나 차이가 나고 바실리의 어머니도 야코프보다 고작 6살 많기 때문에 형이라기보다는 삼촌뻘이다. 야코프 주가슈빌리는 오랫동안 아버지와 사이가 서먹했고 성격도 솔직담백했지만, 그 덕분에 군인이 된 이후 독소전쟁 직전 시점부터는 아버지와 화해해서 잘 지냈다.[6] 스탈린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상대가 자신의 진짜 마음을 알아채고 알아서 처신하기를 바라는 성향이었다.[7] 소련군은 군종별로 사관학교가 1개씩 있는 서방과 달리, 특기별로 나뉜 사관학교가 여럿 존재한다. 교육기간도 상이해서 2~4년제가 혼재하며, 4년제는 중위, 그 이하는 소위 계급으로 임관하는 차이를 둔다.[8] 망나니짓을 해서 임관이 굉장히 늦긴 했지만 어쨌든 조종 훈련을 받아 전투기를 몰 줄은 알았다. 보통의 인민 같다면 이런 방탕한 짓을 할 때 바로 굴라그행인 것을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하지 않은 것은 특혜라 할 수 있지만, 어쨌건 전공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나름 독일군 전투기 격추도 세 번이나 했다.[9] 독소전쟁 발발이 1941년 6월이기 때문에 개전 한 달만에 붙잡힌 셈이다.[10] 죽은 야코프와 달리 아르툠은 탈출하는데 성공한다.[11] 미친 짓 같아 보이지만 한국에서도 군이나 건설현장 등 폭약을 다루는 곳이라면 과거에는 심심찮게 해오던 짓이다. 충격파로 기절한 물고기들이 수 백 마리씩 수면으로 둥둥 떠다닌다. 유해어법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오래된 방법이다.[12] 그리고 그 믿음은 사실이 되었다. 스탈린은 바실리를 불러 주의를 주거나 다소 나무라는 일은 있었어도 바실리의 직위를 해제하거나 강등시키는 일은 없었다.[13] 알렉산드르의 어머니는 바실리의 전 부인이었던 갈리나 부르돈스카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