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C0000><colcolor=gold> 세르게이 코롤료프 Сергей Королёв | Sergei Korolev[1] | |||
본명 |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러시아어)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Sergei Pavlovich Korolev | ||
세르히 파울로비치 코롤료우 (우크라이나어) Сергі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ьов Serhii Pavlovych Koroliov | |||
출생 | 1907년 1월 12일 | ||
러시아 제국 볼린현 지토미르 (現 우크라이나 지토미르주 지토미르) | |||
사망 | 1966년 1월 14일 (향년 59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시)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재임기간 | 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의 설계 및 개발 책임자 | ||
1931년 9월 15일 ~ 1933년 10월 16일 | |||
OKB-1 초대 설계국장 | |||
1956년 8월 13일 ~ 1966년 1월 14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c0000><colcolor=gold> 부모 | 아버지 파벨 야코블레비치 코롤료프 어머니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모스칼렌코 | |
배우자 | 크세니야 빈센티니 (첫 번째 부인) 니나 이바노브나 코텐코바 (두 번째 부인) | ||
자녀 | 딸 나탈리아 | ||
학력 | 키예프 공과대학교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2] | ||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 ||
주요 서훈 | 레닌훈장 (3회) 사회주의노력영웅 (2회) 영예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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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로켓 공학자.R-7 로켓과 N1 로켓의 개발 총책임자였으며, 소련의 우주 개발 계획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다.
2. 생애
관련 참고 글2.1. 초기이력
(대학생 시절. 중년에는 몸이 불지만, 젊을 때는 아주 미남이었으며 여자관계도 꽤 복잡했다.)
제정 러시아 시절인 1906년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도시인 지토미르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는 러시아인으로 러시아어 및 문학교사였다. 가족이 키예프로 이사하여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잦은 불화로 부모는 어릴 때 이혼하고, 어머니가 재혼하여 계부 아래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수학에 재능이 있었으며, 오데사 건설-무역 학교에서 공부했다.
10대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비행이었다. 항공에 관련된 학문을 독학하면서 글라이더 서클에 가입해서 직접 글라이더 시제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 취미는 1924년 키예프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항공공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그의 직업이 되었다. 이후 2학년을 마치고 모스크바에 있는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로 전학하여 1929년 항공기 설계공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의 지도교수는 유명한 항공기 설계자 안드레이 투폴레프[4]였다.
2.2. 연구 경력 초기
졸업 후 항공기 설계국에서 일하면서 틈틈히 취미로 로켓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파일럿 자격증까지 땄으며, 1년 후인 1931년에는 프리드리히 찬데르, 미하일 티혼라보프와 함께 당시 소련에서 로켓 연구에 관심이 많던 항공우주공학 관련 기관의 과학자, 기술자, 실무자들을 자원모집하여 '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5]을 공동으로 설립하였다. 이 연구 그룹은 당시 시대에 비해 매우 앞서서 로켓 무기와 글라이더 유도폭탄 등등의 공상적 영역의 과학을 이론과 실험, 설계 등등 전방위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이 기관은 2년 후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국방과학위원회의 자금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소련군 소속 휘하의 연구 기관으로 전환되었고, 연구원들의 신분 또한 민간 연구진에서 소련군의 기술장교 신분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코롤료프는 자연스럽게 공군 소위 직위와 계급을 임관받았다.코롤료프는 빈센티니 막시밀리아노바라는 의대생과 연애를 했고 1931년 결혼을 했다. 1935년 빈센티니는 딸 나탈리아를 출산하여 아버지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연합해 소련에 쳐들어올 것이라는 편집증적인 의식도 있었기 때문에, 여러 실험적인 군사 개념들이 공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연구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방에서는 단지 SF 양판소물에서나 나오던 항공우주공학 분야에서는 이 당시 소련이 매우 선도적인 국가였었다. 소련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국가적으로 항공우주공학 관련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였고, 여러 면에서 기술적으로 앞서 있었다. 예를 들어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로켓의 선구자인 독일의 헤르만 오베르트나 미국의 로버트 고다드는 전혀 자국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개인적 연구에 머물렀기 때문에 연구에 큰 진척이 없었다.
BBC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6]에 소개된 그의 과거는 순수하게 로켓을 좋아하는 덕국 청년 베르너 폰 브라운과 그 본질이 다르지 않다.
이 연구소는 1932년 소련 최초의 액체연료 탄도로켓인 GIRD-9, GIRD-10을 개발했지만, 실전으로 쓰기에는 모자랐고, 이를 실전 무기로 양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소련보다 2-3년 후에 연구를 시작한 독일의 폰 브라운은 비슷하게 여러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의 지원을 계속 받아서 결국 V2를 완성해 냈지만, 그것도 독일의 패색이 짙을 때인 1944년에야 실전배치를 할 수 있었다.
2.3. 대숙청과 독소전쟁
1930년대 후반부터 소련에는 대숙청의 어둠이 드리우게 되었다. 이 대숙청의 발단은 공산당의 규율을 바로잡고 위험분자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NKVD가 폭주하다보니 실적을 위해 "반동이 없으면 반동을 만드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소련 공군에도 대숙청의 올가미가 걸렸는데, 항공기 개발 초기에는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많은 사고가 나기 마련이지만, 항공업계를 잘 모르는 NKVD는 이것이 태업의 결과라고 결론내리고 많은 공군 관계자들을 잡아 가두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실험을 하면서 실패를 하고 있던 공군 연구소들도 의심을 받게 되었다.결국 코롤료프의 상관이었던 이반 클레이묘노프는 카츄샤라는 혁신적인 로켓무기를 개발하고서도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다. 훗날 클레이묘노프는 소련 붕괴 직전인 1991년 고르바초프시기에야 복권되어 소련 노동영웅 칭호를 받게 된다.
코롤료프가 개발하고 있던 로켓무기에는 수많은 실패가 뒤따랐고, 더욱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야 쓸만한 무기가 나오기 마련이지만, 이는 NKVD가 "이새퀴들 결과는 못 내면서 몇년간 국고를 엉터리 실험으로 탕진하고 있네. 반동 아냐?"고 이들을 의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소련의 천재 로켓 엔지니어 발렌틴 글루시코(1908~1989). 코롤료프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인이고, 한때는 코롤료프의 절친이었으나 대숙청 기간중 코롤료프의 이름을 불어 사이가 나빠졌다. 흔히 코롤료프와 대립하는 악역으로 묘사되지만[7], 실제로 코롤료프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소련 우주개발에 기여했다.
코롤료프의 실험을 회의적으로 보았던 동료 발렌틴 글루시코는 그를 국고낭비 혐의로 고발했고[8], 1938년 한창 서슬퍼렀던 대숙청 기간 중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처음에는 악명높은 굴라그 탄광에 끌려가서 괴혈병에 걸려 모든 치아를 잃는 등의 고생을 하고 여러 지병을 얻게 된다. 막장에 갇혀 죽을 뻔 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코롤료프의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구명 노력을 했고, 1년후인 1939년에는 다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이 때 감형되어 기술자나 과학자만 모아놓는 특별 수용소에서 복무기간을 채우게 되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 따르면 체력이 약해서 여자들이 목욕하는 동안 속옷을 지키는(!) 일도 했다고 한다.
굴라그 죄수시절
이런 특별 수용소는 굴라그에 비하면 대우는 한결 좋았고, 반동으로 찍힌 기술자는 그곳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공식적인 사면은 없었지만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다시 카잔에 위치한 군연구소로 돌아가서 각종 군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예를 들어, 폭격기에서 로켓을 발사하는 방안, 그리고 로켓 추진으로 항공기의 이륙거리를 단축시키는 방안등을 연구하다가 종전을 맞게 된다. 1944년에는 전쟁 동안의 연구 공로가 인정되어 전과기록이 삭제되었다.
2.4. 독일 개발진과 협업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독일은 탄도미사일 V2를 개발했다. 1944년에야 등장했지만, 연합군은 제공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그 속도 때문에 전혀 막을 수 없었다. 이 로켓의 중요성을 알게 된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이의 획득을 추진하게 된다.이에 반해 소련이 가지고 있던 로켓은 그저 유도장치도 없는 단거리 로켓 카츄샤가 전부였다. 카츄샤 로켓은 독소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기술적으로 보면 조선시대의 신기전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9]
소련군은 독일의 V2 생산 공장들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 중요성을 파악한 소련군 수뇌부는 소속 과학자들로 하여금 V2를 평가하게 했고, 발렌틴 글루시코는 독일로 파견되어 V2 로켓을 보았는데, 이것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코롤료프 뿐이라고 상부에 보고하여 코롤료프도 V2의 기술 습득을 위해 독일로 파견되었다. 당시 모든 군소속 과학자들은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공군 대령으로 복직하여 독일의 여러 곳에서 관련 정보를 수집하였다.
소련은 생산공장을 접수할 수 있었지만, 로켓 개발진이 숙청되었기 때문에 단시일안에 이를 제대로 역설계하여 재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이 기술을 흡수하려면 독일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소련 당국은 V2를 개발한 독일 기술자들을 고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소련은 배급 확대와 많은 연봉 등 특전을 내걸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개발자급 인재들은 대부분 미국에 투항했다. 하지만 폰 브라운과 사이가 무척 나빴던 헬무트 그뢰트룹(Helmut Gröttrup) 등 일부 과학자들은 자발적으로 소련으로 투항했다. 그뢰트룹은 원래 미군점령지에 있었으나 좋은 조건을 들고 온 소련 공작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발적으로 소련 점령 지역으로 와서 소련과 계약했다.
소련은 이들의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서 자신의 독일 점령지에 노르트하우젠(Nordhausen)이라는 위장회사를 세우고, 독일 과학자들을 고용했고, 여기서 독소 연구진이 협업하게 했다. 이 회사의 수석 설계자가가 코롤료프였고, 차석 설계자가 글루쉬코였다. 소련은 전쟁 직후에 나라가 말이 아닌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레벨의 소련과학자의 몇 배의 연봉을 주는 등의 소련 기준에서는 특전을 베풀었다. 이것이 미국으로 간 독일과학자들이 받은 연봉에는 미치지 못해서 그들이 소련에서 수용소에서 박봉을 받으며 갈려나갔다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 전쟁으로 서부가 완전히 잿더미가 된 소련과 전쟁으로 피해가 거의 전무했던 미국의 경제 형편을 비교한다면 딱히 소련이 이들을 푸대접한 것은 아니다.[10]
하지만 이런 기관이 동독에 있는것도 비밀유지가 어렵게 되자 1946년 아예 이들을 모조리 소련영토로 강제로 이주시켜 연구에 종사시켰다. 비단 로켓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여러 인재들을 강제 이주시켜서 소련 내에서 기술이전에 종사시켰다.[11] 소련은 자유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항시 감시를 받았으며, 외부와의 연락도 극히 차단되는 등, 거의 외국에서 감금상태나 다름 없었지만, 사실 소련인들 대부분도 비슷한 감시하에 살던데다가, 이들의 조국이었던 나치독일 하에서도 이들 과학자들이 게슈타포의 감시나 사찰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12] 게다가 미국으로 간 독일과학자들조차도 다른 의미에서 푸대접을 받았다. 미국의 반독일 정서 때문에 폰 브라운등은 처음에 공항에서 스위스인으로 행세해야 했고, 나치독일이나 소련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겠지만, 군기지 같은 곳에 사실상 연금되었으며,[13] 여기서 풀려나서도 상당기간 동안 미국 공안기관의 감시를 받았다.[14] 게다가 미국 과학자들의 텃세 때문에 미국행 독일 과학자들은 다른 연구에서는 배제되고, 10년간 고액연봉을 받으며 V2 복제 같은 하찮은 일에만 종사했다.미국이 이들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게 된 계기는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였다.
소련은 약 5,000명이나 되는 독일의 로켓 관련 인물들을 확보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페네뮌데 로켓 센터에서 일하던 제조 노동자들이었고, 개발자급 과학자는 약 170명 정도 모을 수 있다. 이 중 가장 핵심 인물은 헬무트 그뢰트룹(Helmut Gröttrup)이었다. 소련은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등의 여러 선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로켓의 구조면에 대해서는 상당한 노하우를 갖추고 있었으나, 두뇌에 해당하는 유도 장치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 없었는데, 그뢰트룹은 유도 장치 분야에서 당시 세계 최고의 전문가였으므로, 소련으로서는 가장 필요한 인재를 확보한 셈이었다.[15][16][17] 소련도 처음에 그뢰트룹 등 핵심과학자들에게 높은 연봉을 주겠다고 꾀었던 만큼 이들에게는 사전에 약속한 대로 당시 소련 과학자들보다 높은 연봉을 주는 등 약속했던 대로 대우해 주었지만 그 밖에는 소련의 감시 속에 사실상 감금당해 생활해야 했고, 이를 항의하자 돌아오는 답변은 지금 이 상태가 싫다면 우랄 산맥으로 보내주겠다는 답변 뿐이었다.
코롤료프 등 소련 과학자들이 이끄는 연구팀들은 독일 과학자들에게 독일의 앞선 기술을 전수받고, 독일 로켓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을 시켜 1947년 V2를 복제하여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코롤료프는 독일인들이 가진 관련 지식을 제대로 흡수해 소화해 냈는데, 이는 당연히 코롤료프가 이미 전쟁 전부터 관련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로켓에 관한 이해도가 풍부했기 때문이었다.[18] 이것이 소련 최초의 단거리 액체 연료 로켓 겸 미사일인 R1 로켓이었다. 이후 V2를 개량하여 R2를 개발하는데 R2는 V2의 두배의 사정거리를 보였다.
이후 독일 과학자들과 기술자들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은 소련은 자체역량이 성숙되자 1952년부터 독일인들을 배제하고 소련인들로만 구성된 연구소에서 개발을 진행했다. 냉전시절에는 독일인들이 계속 억류되어 있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1950년부터 계약기간이 끝난 사람들은 순차적으로 동독지역으로 보내주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귀국한 사람들이 그뢰트룹 등 핵심 개발진이었는데, 이들의 계약은 1953년까지였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계약기간을 채우고 자국으로 돌아갔다. 사실 이들 대부분은 현지에서 고용된 단순 직공이었고, 페네뮌데는 동독의 영역이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이들의 의사를 반하고 고향이 아닌 곳에 보낸 것도 아니다.[19] 이들 중 일부는 공산정권이 싫거나 혹은 미국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다시 이주했다. 소련 제어 시스템의 개발에 결정적 도움을 준 헬무트 그뢰트룹이 대표적인 경우로, 이 사람은 동독으로 귀국했으나, 동독에서 서독으로 망명하고 기업가로 활동하면서 재벌이 되었다.[20]
다만 러시아는 자국 우주프로그램에서 이런 독일 과학자들의 기여나 도움은 언급하기 꺼린다. 이는 독소전쟁의 앙금 때문에 국민정서상 어쩔 수 없었다. 이는 사실 미국도 마찬가지인데, 브라운만 그나마 알려져 있을 뿐, 브라운을 따라온 30여명의 핵심 개발진의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이들은 달탐사가 끝난 1970년대까지 미국의 우주개발의 핵심 인력으로 일했지만, 이들의 업적도 대중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5.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
소련 연구진은 독일인들이 가졌던 기술을 대체로 소화하자 이들을 배제하고 독자 개발을 계속하였다. 1954년에 나온 R5는 사정거리가 1,200km나 되었으며 처음으로 실전배치된 중거리 미사일이 되었다.이런 무기의 개발중에 잦은 실패를 했었기 때문에, 코롤료프는 항상 이번이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경고와 상부로부터 받는 압력에 시달리며 개발했다.[21]
R2의 성공 이후 KGB는 코룔로프와 핵심연구팀들이 미국의 첩보원들로 부터 암살을 당할까 우려해 코롤료프의 모든 신상정보를 최고급 기밀 처리 및 삭제처리를 해서 살아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관리를 했다. 때문에 베르너 폰 브라운도 그가 사망 이후 국장으로 치르어지는 장례식을 신문으로 접했을때야 그의 이름과 업적을 알 수 있었다.
R-7 개발의 성공이 확실해 보이던 1957년 4월에는 1938년의 혐의가 부당하다는 재심을 받아 완전 복권되고, 소련은 이 로켓 천재를 팍팍 밀어주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R-7로 1957년 8월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이 로켓은 수천킬로를 날라가 캄차카 반도에 있던 표적을 정확히 맞추었다. 이것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더 이상 실패를 걱정하지 않는 위상이 되었다. 코롤료프는 R-7 로켓으로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여 우주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자, 세계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궤도에 올린 발사체인 R-7에 사용된 엔진인 RD-107 엔진은 코롤료프의 라이벌로 유명한 발렌틴 글루시코와 그의 OKB-456 설계국이 제작했는데, RD-107 엔진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 개의 엔진에 4개의 연소실과 2개/4개의 자세제어용 노즐이 붙어있는 구조였다.[22] R-7 로켓은 이렇게 만든 엔진 1개를 5개로 묶어서 사용했는데,[23] 이렇게 한 이유는 당시 소련이 대추력 엔진을 개발할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설계 자체가 우수한 건 말할 나위 없어서, 몇 가지 개량을 거쳐 2010년대인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고 요즘 들어서 4다발로 묶은 주 엔진을 더 강한 대추력 엔진 1개로 만든 개량형이 나오고 있다.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 역시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이렇게 많은 주엔진을 조율하여 안정적인 발사체로 만들어 낸 적이 없는걸 보면 그의 천재성이 독보이는 독창적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거기다 R-7은 그 이후 산화제와 연료, 엔진을 끊임없이 개량하여 여전히 소유즈의 1단 로켓으로 쓰인다.
2.6. 최초의 유인우주선 발사 성공
코롤료프는 다음 프로젝트로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우주선 개발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만들어 진 것이 1957년에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이고, 여기에 실린 개가 바로 그 유명한 라이카이다. 그러나 라이카는 발사한 지 얼마 안 돼 죽고 말았다.이후 코라블-스푸트니크 계획을 마련하여 5번의 발사를 했고, 계속 생물체를 태워 보내는 실험을 하여 데이터를 모아 우주에서 생물의 생존 가능성을 탐구했다. 개를 이용한 생존실험이 성공하자 우주에서 생물이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 소련 우주 당국은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을 계획했다. 젊은 위관급 공군 조종사들을 대상으로 신체조건과 조종능력이 뛰어난 최초의 우주인 후보생 20명을 선발해서 우주선 탑승에 필요한 훈련을 했다. 결국 유리 가가린과 게르만 티토프가 최종 2인으로 선발되었다.
보스토크에 탑승한 유리 가가린과 교신하는 코롤료프
사실 보스토크 위성과 R-7은 아직 신뢰도를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스토크 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도박적인 것이었다. 인간을 태우기 앞서 모형과 개를 태운 7번의 발사를 했으나, 이중 4번이 실패했을 정도로 위험했다. 다만, 제6차, 7차 실험인 1961년 3월 9일과 25일 발사한 마지막 두 번은 성공했고, 이 때문에 2주후에 보스토크 계획은 강행된다.[24][25]
1961년 4월 12일에는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하여 마침내 역사 상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냈다.
유리 가가린을 태운 우주선을 발사하는 기록영화를 보면 기밀 유지를 위해서인지,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등장하지만 모습을 거의 비추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검은 중절모에 검은 양복을 입고 빨간 끈을 소매에 매고 가가린을 배웅하는 사람이 바로 코롤료프인데, 얼굴이 나오는 장면은 전혀 없다. 이 역시 KGB가 코룔로프의 신상보호를 위해 철저히 기밀처리를 해서 그렇다. KGB의 과잉보호 때문에 이 대행사에 얼굴도 못 비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8월 6일 티토프를 태운 보스토크 2호는 25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돌아왔고, 티토프는 우주에서 잠을 잔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2.7. 행성탐사 및 우주정거장 프로젝트
코롤료프 설계국은 금성, 화성 탐사도 담당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제작한 베네라 시리즈와 마스 시리즈는 NASA의 매리너 시리즈와 경쟁했다. 미국의 매리너 4호가 1965년 최초로 화성접근에 성공하였고, 소련의 베네라 7은 최초로 금성에 연착륙하는 기록을 세웠다. 다만 코롤료프 설계국의 상급기관인 전략로켓군은 이런 비군사적 미션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1970년대 이후로 소련의 행성탐사는 더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반면 NASA는 이어 파이어니어 계획과 보이저 계획을 계속 마련하여 이후에도 계속 목성, 토성 및 외행성들을 탐험한다.이어 우주정거장 개발에 대한 프로젝트도 착수했는데, 우주인이 지구궤도에 장기 거주하면서 과학연구를 할 수 있는 우주정거장에 대한 기본 개념도 만들었다. 한번에 큰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것은 어려우니까 여러번 소형 모듈을 발사하여 이를 도킹으로 연결, 몸집을 키우는 방법도 고안했다. 이런 구상은 그의 생전에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 시작된 살류트 계획, 1980년대 미르 계획, 그리고 ISS로 실현된다.
2.8. 달탐사 프로젝트 내부 경쟁
코롤료프의 성과는 소련의 위신을 엄청나게 세워주었지만, 소련 정치가들은 대체로 미국과는 달리 우주개발에 무관심했다. 사실 스페이스 레이스는 소련 정치권이 주도적으로 참가한 것은 아니고 흐루쇼프가 부족한 공군력을 탄도탄으로 대체하기 위해 밀어준 것이었으며, 소련의 스페이스 레이스는 ICBM이 완성되었을 때 이미 더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에 소련 지도부는 미국과는 달리 달정복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소련에서는 이는 오직 코롤료프 및 몇몇 우주개발자들의 관심이었다. 개발의 돈줄을 쥔 소련군은 로켓에만 관심이 있었고, 달탐사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이 때문에 무기보다는 우주개발에 관심이 있던 코롤료프는 항상 자금난에 시달렸다.소련은 로켓 기술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자 1959년 육군 포병과 공군에 소속된 로켓-미사일 관련 부대를 통합 독립시켜 전략로켓군으로 개편했다. 전략로켓군은 중거리 탄도탄 이상의 모든 로켓을 관장했으며, 코롤료프 설계국도 전략로켓군으로부터 예산을 따내야했다.[26] 군이 예산으로 우주개발을 책임진 것이다. 소련은 붕괴할 때까지도 군이 모든 우주프로그램을 감독했다. 소련이 망하고 나서야 1992년 로스코스모스라는 NASA에 해당하는 기관이 러시아에 생긴다. 소련보다 우주개발 방면에서 훨씬 뒤졌던 중국 조차도 1980년대 미국 NASA를 모방해 CNSA를 설립한 것을 보면, 소련/러시아는 우주정책 면에서는 경쟁국보다 뒤떨어졌다.
코롤료프는 1950년대 초반에는 IRBM과 ICBM을 연구하다가 이후 스푸트니크 이후에는 거의 우주개발에만 신경썼는데, 다른 설계국들이 군의 요구사항에 맞춘 여러 무기용 로켓들을 개발하면서 전략로켓군은 이들을 더 주목하기 시작했다. 코롤료프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ICBM개발자인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OKB-52), 미하일 얀겔 (OKB-586) 이 있다.
코롤료프의 후배, 부하였다가 라이벌이 된 천재 공학자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1914~1984)
즉, 1950년대 후반부터 코롤료프가 우주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다른 설계국들은 미국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여러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했고, 이렇게 되자 군은 예산을 다른 설계국에 더 배정했다. 얀겔은 본인이 개발한 로켓이 네델린 참사(Nedelin catastrophe)를 일으켜 전략로켓군 사령관 미트로판 네델린 원수 및 수십명의 인력이 사망한 흑역사가 있어서 유인우주선 계획에서 배제되었다.[27]하지만 첼로메이는 코롤료프와 마찬가지로 우주개발에 관심이 있었으며, 첼로메이 설계국은 달탐사 프로젝트를 따내려고 코롤료프 설계국과 경쟁했다. 첼로메이는 대업적을 남긴 코롤료프보다는 인지도가 뒤쳐졌지만 정치적 감각이 있는지 당시 최고지도자인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까지 개발자로 고용해서 달탐사 경쟁에서 한발 앞서가려고 했다.
결국 어느 한 쪽도 손을 들어줄 수 없던 소련 정부는 어정쩡하게 달 탐사 프로젝트를 두 설계국에 갈라주었다. 흐루쇼프가 실각 직전(10월) 인 1964년 8월 소련 장관회의는 달탐사에 대한 교통정리를 했는데, 코롤료프는 유인 달착륙 프로젝트를 (N-1 및 소유즈) , 첼로메이는 유인 달 일주 비행 프로젝트를 각각 담당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이 때 첼로메이 설계국이 만든 달 일주용 로켓 UR-500이 바로 프로톤 로켓으로 원래는 유인 달 일주 비행용이었다. 달 일주비행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걸작이어서, 2020년대까지 계속 위성발사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프로젝트가 어정쩡하게 두 개로 나뉜 것은 자금과 기술이 부족한 소련 입장에서는 중복투자임에는 틀림 없었고, 미국과의 경쟁에서 불리한 처지가 되고 만다.
이런 치열한 내부 경쟁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외부 경쟁도 치열했다. 소련은 컴퓨터, 전자공학, 재료공학, 엔진기술 등 전반적으로 소련의 과학기술이 미국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미국보다 훨씬 많았고, 이는 코롤료프의 업무를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이미 굴라그 석방 이후부터 몸이 안좋았음에도 휴식을 취할 겨를 없이 과로에 시달렸다.
이렇게 소련은 여러 개발팀을 조율할 수 있는 NASA같은 기구 없이 전략로켓군이 산하 설계국들을 경쟁시키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군의 필요를 중심으로 우주 개발 연구가 돌아갔다. 비슷하게 미국은 우주경쟁 초반에 수십개 연구소와 기업이 무분별하게 로켓을 개발하다가 스푸트니크와 보스토크로 두드려 맞아 망신을 당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우주개발 기관을 정비했다. 이에 케네디가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 유명한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연설을 한 이후 사실상 무제한의 연구지원을 했고, 미국은 NASA를 설립하여 이런 지원을 감독하게 했다. 이어 제임스 에드윈 웹 같이 고위직(장관급)을 역임한 행정가를 NASA 수장으로 앉혀 우직하게 달탐사 프로젝트를 맡겼고, 제임스 웹은 엔지니어는 아니었지만 달탐사의 정치적 의미도 알고 있었고, 정부기관의 생리에 밝고, 정치력과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NASA 산하와 밖의 여러 연구팀들을 잘 조율하고 의회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끌어와서 인간의 달착륙이라는 목표를 이뤄냈다.[28]
코롤료프은 달 탐사 프로그램에 착수하였고, 달 탐사선을 제작했다. 그것이 바로 소유즈 우주선이다. 현재는 달 탐사선이 아니라 궤도 우주선으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 원형의 머리 부분은 지구 귀환용 캡슐이 아니라 달 착륙선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우주왕복선을 개발하고 퇴역시키는 동안 우직하게 50여 년 동안 계속 개량되어 사용되고 있는
하지만 달까지 보낼 로켓 개발은 순조롭지 못했는데, 그 원인은 소련의 자금과 기술부족에 각 설계국들의 연구를 통합시키지 못하고 서로 경쟁하도록 방임한 소련 우주당국의 비효율성도 있었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아들이자 첼로메이 설계국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던 세르게이 흐루쇼프는 훗날 인터뷰에서 "코롤료프와 첼로메이는 상대방이 달에 먼저 가느니 차라리 미국이 먼저 가기를 원했을 것이다"라며 두 설계국의 낭비적 경쟁을 꼬집었다.
코롤료프는 스푸트니크와 보스토크로 소련의 우주개발계에서 신화적 존재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비 부족에 계속 허덕였으며, 이 때문에 돈지랄을 시전하는 미국의 NASA나 JPL과 경쟁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로켓 개발의 돈줄을 쥐고 있던 소련군 수뇌부 (특히 전략로켓군)는 달탐사 같은 것에 돈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코롤료프의 달탐사용 로켓 개발에 극히 미온적이었다. 코롤료프는 궁여지책으로 결국 "N-1은 탄두 17개를 장착할 수 있는 ICBM으로 전용이 가능하다"는 설명을 덧붙이자 겨우 전략로켓군으로부터 달탐사용 로켓을 개발하기 위한 소량의 자금을 얻어낼 수 있었다.
달 탐험에 필요한 로켓은 출력이 R-7보다 훨씬 커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대형 로켓 엔진의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미국은 폰 브라운이 새턴 V 로켓이 개발하면서 이를 달성한 반면에 소련은 계속 삽질을 하고 있었는데,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단 발사체 설계자 코롤료프와 로켓 엔진 최고 권위자인 글루시코의 사이가 나빠서 좀처럼 엔진의 연료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코롤료프는 다른 엔진 설계자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30]와 함께 N-1 로켓을 설계하게 되었다. 쿠즈네초프도 대단한 설계자이기는 하지만, 글루시코보다는 감각이 떨어졌고, 결과적으로 N-1 로켓은 코롤료프 사후인 1969년 완성되어 4차례의 실험을 했으나, 최종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소련의 우주 개발은 철저히 군 중심으로 돌아갔고, 군이 예산을 통제했기 때문에 미국에 핵폭탄을 배달하는 핵미사일에나 관심이 있었지, 달 탐사같은 것에는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우주 경쟁 초반부에 여러 최초의 업적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밖 천체에 대한 탐사, 특히 달의 유인 탐사에서는 미국에게 최초의 업적을 넘겨줌으로서 체면을 제대로 구기게 된 소련은 우주개발 정책을 우주정거장 건설 및 운용과 우주 유인 비행 프로그램 위주로 바꾸어 집중하게 되었다.
2.9. 사망
코롤료프는 이미 굴라크 생활을 하면서 신장이 나빠져 신부전을 갖게 되었고, 이때 턱을 다쳐 이빨을 다 잃고 제대로 씹을 수도 없었다. 여기에 과로에 시달리면서 온몸이 종합병동이라서 심장병으로 이미 몇번 쓰러진적이 있고, 신부전, 직장암[31]에 시달리고 있었다.코롤료프가 계획한 달탐사 프로젝트는 위에서 설명했던 자금과 기술 때문에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유인 탐사를 위한 정보 수집용의 루나 탐사선도 여러번 실패해서 코롤료프 생전에는 별 성과는 없었고, 코롤료프는 이에 대해 매우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었다.
1965년 12월에 달탐사선 루나8 발사 때문에 많은 과로를 했는데[32] 1966년 1월 4일까지 연구실에 출근했지만, 1월 5일 병세가 심각해져 응급실에 실려갔다. 의료진은 수술을 결정했지만, 마취를 하려다 보니 산소호흡을 위해 삽관을 하려 했지만, 턱관절이 안좋아서 불가능했고, 기관절제술를 행해야 했다. 하지만, 마취중에 심장이 문제를 일으켜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존재는 평생 비밀이었으나 그가 죽고 난 이후인 1966년 프라우다 1월 16일자에 대문짝만하게 그의 부고기사가 실림으로써 소련인들은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2.10. 이후
그의 사망 이후 코롤료프 설계국은 그의 부하였던 바실리 미신이 이끌어 코롤료프가 달성하려던 달탐사 계획을 계속 이어갔다.코롤료프의 후임으로 OKБ-1 (Опытное конструкторское бюро-1. 제1 설계국, 또는 코롤료프 설계국 ) 의 국장을 맡은 바실리 미신. 코롤료프 밑에서 부국장을 하다가 코롤료프 사후 승진했다.[33]
소련에게는 불행하게도, 코롤료프와 달리 바실리 미신은 개인 연구자로서는 탁월했지만, 프로젝트 관리자로서는 능력이 부족했다. 나름 열심히 일했고, 그가 N-1 프로젝트 때 남긴 연구일지는 "미신 다이어리"라고 해서 현재 웹으로 공개되어 있으며. 링크 이것은 A-4용지로 총 천페이지 가까이 되는 방대한 것으로서, 그가 N-1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짜내 노력했는지는 이 노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특히 코롤료프와 같은 관리능력은 갖지 못했으며, 성격도 개차반이었는지 유리 가가린이나 알렉세이 레오노프와 같은 우주비행사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대기권 돌입시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코마로프가 희생된 소유즈 1호와 우주복 대신 체육복 차림으로 내려오다가 세명의 우주비행사가 순직한 11호 참사 때 조사보고서에서 그의 실책이 공식적으로 나열되었을 정도로 종합적인 관리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술을 너무 좋아하는게 탈이어서 니키타 흐루쇼프조차도 야인시절 펴낸 회고록에서 그를 깠을 정도. 결국 4번의 실패 외에도 술 때문에 거의 폐인이 된 상태에서 병원신세를 지다가 잘렸다. 그럼에도 꽤 장수해서 소련이 망한 지 10년후인 2001년 사망. 거대 프로젝트 과학에서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여준 사례가 된 셈.
코롤료프가 개발하려 했던 N-1로켓은 설계상 새턴5보다 출력이 세긴 했지만, 1단이 무려 30개가 넘는 엔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기술로 이를 조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계속 폭발사고를 일으켜 4번의 실패를 했다.[34]
이렇게 소련이 삽질을 하는 동안 1969년 새턴5 로켓을 이용한 미국의 아폴로 11호는 달 착륙에 성공했다. 소련도 어떻게든 달에 가보려고 했고, 1972년 N-1의 제4차 발사에서 실패한 후에도 N-1은 계속 개발되었으나, 1974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미국도 1972년 발사된 아폴로 17호를 끝으로 달탐사에 관심이 시들어진 것을 보고 소련의 달탐사는 별로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여 아예 소련의 달 유인탐사 계획을 취소했다. 그리고 여러번 실패한 미신은 소련 우주개발 책임자에서 잘리고, 코롤료프 설계국의 국장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코롤료프와 원수였던 글루시코가 부임한다.
한편, 우주선의 엔진을 전담하던 글루시코 설계국(이후 에르고마쉬로 이름을 바꿈)은 글루시코가 코롤료프 설계국을 맡고 있던 1980년대가 되어서야 라도프스키 (Radovsky) 국장 휘하에서, 새턴 V의 F1엔진과 동등 내지 우월하고 달탐험에 필요한 출력을 얻는 RD-170 엔진을 개발하게 된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N1의 출력을 넘는 에네르기아 로켓을 개발하여 우주전투위성 폴류스와 비운의 우주왕복선 부란을 각각 한번 쏘아 올린다. 일부 밀덕들이 현재 막장상태인 러시아의 상황만 보고, 당시의 우주기술을 포함한 소련의 기술력이 별볼일 없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1980년대 시점에서는 적어도 3위 그룹 (유럽, 일본, 중국)[35]과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는 세계 2위는 되었고, 미국에 비해 앞선 것도 상당히 많았다. 부란의 경우는 당시 미국도 리스크가 커서 못하던 무인우주비행을 실시했고, 우주정거장 살류트와 미르 운용 같은 일도 미국이 못하던 일이었는데[36] 소련은 미국의 몇분의 일 비용으로 이를 이루어냈는데, 이 또한 당시 소련의 앞선 기술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커다란 단일체의 스카이랩과 비교하여 미르라는 혁신적인 모듈형 우주정거장은 미국에 비해 부족한 소련의 예산과 기술력으로도 중요한 성과를 내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현재도 소련시절 개발된 러시아제 RD-180엔진(위에서 언급한 RD-170의 연소실을 2개로 줄인 모델) 을 군용으로[37] 계속 수입하고 있다. 기사 여러 성과와 소련 붕괴 이후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의 현황에서 볼 수 있듯이 소련의 항공우주기술 만큼은 적어도 붕괴 시점까지 미국과 선두를 다투었다 할 수 있다.
글루시코는 비록 코롤료프와 사이는 매우 나빴지만, 그의 우주정거장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지도 아래서 코롤료프 설계국은 살류트와 미르를 제작하여 소련은 우주정거정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이른다. ISS의 여러 운영 노하우도 이런 소련의 우주정거장 노하우를 상당히 이어받은 것이다.
3. 소련 우주개발에 대한 기여
베르너 폰 브라운과는 두고두고 비교 대상이 되는 관계다. 폰 브라운은 이미 생전에도 그 존재가 잘 알려졌던 유명인사지만, 코롤료프는 죽어서야 비로소 존재와 이름이 공개되었다는 점에서도 둘은 매우 대조적이다.세르게이 코롤료프가 개발한 소련의 기술이 나치 독일의 기술을 그대로 복제했을 뿐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지적한 바대로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개발자급 대부분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에 투항하여 헬무트 그뢰트룹을 빼면 V2 주요 개발진은 거의 영입을 못했고 베르너 폰 브라운도 소련 투항자들이 별 볼 일 없는 단순 제조직공들이었다는 사실을 듣고 소련이 우주개발에서 진전을 보이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코롤료프를 비롯한 소련의 로켓기술자들이 로켓기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었다면, 이런 시제품을 가지고도 단순카피에 그쳤을 것인데, 코롤료프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몇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V-2의 복제형인 R-1, R-2 같은 경우는 엔진 하나만 쓰였는데, 소련의 고유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R-7은 여러 엔진을 묶는 클러스터링 기술이 쓰였고 이는 코롤료프가 전쟁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R-7이 궤도에 올린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가 83kg인데 반해서, 폰 브라운이 개발한 레드스톤으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익스플로러는 겨우 14kg이었다.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 한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로켓 설계를 해 나간데 반해 소련에는 코롤료프,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발렌틴 글루시코, 미하일 얀겔 등의 걸출한 로켓 개발자가 넷이나 되었고 소련 당국이 이들의 교통정리를 못한 것이 달 탐사 경쟁에서 소련이 미국에 밀린 이유 중 하나였을 정도다. 코롤료프 사후에도 첼로메이와 얀겔은 서로 자신이 개발한 로켓을 ICBM으로 제식 채용해 달라고 싸웠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아래에 나온 므스티슬라프 켈디시가 나섰으나 두 사람이 만든 로켓이 모두 고성능인지라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모두 제식 채용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중복 투자는 소련 국방예산에 큰 부담을 지워주는 결과가 되었다.
처음에는 미국도 이렇게 여러군데서 로켓개발을 하다가 실패를 거듭했던 바 있다. 특히 미공군 등에서 폰 브라운의 나치 전력을 문제 삼아 견제를 일삼았다. 하지만 이후 소련이 스푸트니크 등의 성과를 연달아 올리는 것에 충격을 받은 아이젠하워가 우주 개발 역량, 인력을 새로 출범한 NASA에 집중시켰고, 이후에는 소련을 역전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은 소련보다 돈도 많은 데다가 세계 각지에서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고, 재료공학[38] 이나 전자공학[39] 같은 관련 기술이 소련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이렇게 소련이 갖지 못한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개발 경쟁은 태생적으로 미국이 유리했다. 오히려 소련은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인구의 1/10이 학살된 처참한 처지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된 1950년대 (2차대전 당시 거의 피해가 없던) 미국을 앞서 나갔고, 여러가지 관련 기술이 뒤떨어졌음에도 이러한 점들을 코롤료프 등 소수 개발자들의 역량으로 우주기술에서 미국과 선두다툼을 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불리함을 오직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극복한 이가 바로 코롤료프이기 때문에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아도 모자람이 없다.
소련 과학계의 삼거두. 왼쪽부터 코롤료프, 가운데는 소련의 핵개발을 주도한 이고르 쿠르차토프, 맨 오른쪽은 로켓과 핵무기의 물리-수학적 이론적 계산을 도맡았던 므스티슬라프 켈디시.[40]
소련 우주개발 계획에서의 중요성과 미국이 보내는 암살자 위협으로부터의 과잉보호 때문에 모든 신상정보와 역할은 극비기밀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수석 설계자'(Chief Designer)로만 간간히 언급되었고, 사후에야 존재가 공개되었다. 성대한 장례식 후에 소련의 국가영웅들만 모셔지는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다. 당시 서방에는 그의 존재가 거의 안 알려져 있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남다른 과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여러 과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성공적으로 조율하는 리더십, 그리고 우주개발에 회의적인 정치가들을 설득하여 거액의 국고를 끌어 올 수 있는 특별한 정치력까지 갖추어 소련의 우주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이 세가지 능력 중 하나만 없었어도 소련의 우주개발 능력을 극적으로 끌어올리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소련 과학기술사에서 이론물리학의 레프 란다우, 수학의 안드레이 콜모고로프, 므스티슬라프 켈디쉬, 핵물리학의 이고르 쿠르차토프[41] 등 역사를 풍미한 인물들이 적지 않지만 소련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드높인 공로로 치면 이 사람 앞에서는 모두 한 수 접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 전성기 때도 미국의 70% 밖에 안되는 국력을 가졌던 소련이 미국의 라이벌이라고 인식된 것은 군사적인 면도 있겠지만 바로 우주경쟁의 초반기에 소련이 미국을 한 발자국씩 앞섰기 때문이고, 그것을 이끈 사람이 바로 코롤료프이다.
비록 달착륙 경쟁에서는 그의 사후 N1 로켓의 거듭된 실패로 미국의 아폴로 11호에게 밀렸지만,[42] 그의 이름과 그가 만든 작품들은 인류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새겼으며[43] 그의 위대한 걸작 R-7 로켓은 21세기에도 수많은 개량형이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러시아의 우주 과학을 견인하는 주력 우주 발사체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44]
소련의 로켓 개발사 자체가 극비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코롤료프와 소련의 우주 개발사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일급 기밀로 다뤄지다가 계획이 끝나면 모든 자료와 시설이 폐기되는 과정을 거쳤다. 때문에 코롤료프의 업적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한동안 서방에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서 간과해서 안될 점은 소련의 로켓 개발은 코롤료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발렌틴 글루시코,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미하일 얀겔, 바실리 미신 등 코롤료프 이외에도 여러 뛰어난 로켓 과학자들이 있었다. 특히 글루시코, 첼로메이, 얀겔의 역량은 코롤료프보다 떨어지지 않았지만, 코롤료프가 이들 중 가장 연배가 높았기 때문에 이들보다 먼저 높은 자리에 올랐고, 책임자가 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들이 서로 협력과 경쟁을 반복하며 소련의 로켓 개발을 이루어 온 것인데, 누가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하고 책임을 졌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보니, 그간 서방에서는 모든 로켓 개발을 마치 코롤료프 혼자서 책임지고 해낸 것으로 묘사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첼로메이, 글루시코, 얀겔 등은 주로 군사용 미사일 개발을 맡았기 때문에 주로 우주 개발용 로켓을 만들던 코롤료프가 자연스럽게 소련 우주 개발의 대표격으로 대접받게 된 것.
하지만 로켓과 미사일은 서로 비슷한 구조여서 소련의 로켓 개발은 코롤료프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라 이들 여러 과학자들의 협력과 경쟁으로 이루어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심지어 군사적 목적이 고려되지 않은 순수 달착륙 로켓인 N1 로켓 개발 과정에도 초반에 첼로메이와 글루시코가 많이 관여했다. 하지만 이들이 하도 티격태격하자 새로 권력을 잡은 브레즈네프는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된다면서 1965년경에 교통정리를 해서 코롤료프는 우주 궤도 로켓, 첼로메이와 글루시코는 군용 미사일로 명확하게 선을 긋고 서로 간섭하지 않도록 했고 이후로 N1 로켓 개발에서 글루시코와 첼로메이는 배제되었고 코롤료프 혼자서 책임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로 글루시코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N1 로켓 개발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후 코롤료프가 다른 과학자들의 도움없이 독자 개발한 로켓인 N1 로켓은 결국 실패한 반면 얀겔, 첼로메이가 독자적으로 만든 로켓들은 대부분 성공했다. 이들 로켓의 성공에는 글루시코가 개발한 로켓 엔진이 바탕이 되었다. 물론 N1 로켓이 난이도가 높은 로켓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완벽하게 실패했고, 반면 첼로메이와 얀겔은 R-7보다 훨씬 뛰어난 로켓들을 개발했다. R-7은 실전용 ICBM으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실제로 소련이 실전배치한 ICBM은 얀겔, 첼로메이, 글루시코가 개발한 것들이었다. 사실 R-7 역시 코롤료프가 총책임자였지만 글루시코 등 다른 과학자들의 도움이 지대했다.
우주 개발을 다루는 서적이나 다큐멘터리에서는 워낙 소련 내부의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측면 외에도 지루한 로켓 개발 이야기를 독자와 시청자들이 보게 만들기 위해서는 극적인 드라마가 필요했고, 이에 미국과 소련의 로켓 개발을 폰 브라운과 코롤료프의 개인적 경쟁으로 단순화하였다. 미국의 경우에는 자세한 자료도 있고 관련자들이 멀쩡히 다 살아있어 사실과 차이를 두기 어렵지만 관련 자료가 별로 없는 소련의 경우, 어지간한 건 코롤료프가 다 한 것으로 처리하고, 첼로메이나 글루시코 등 다른 과학자들의 존재는 축소되거나, 심지어 주인공인 코롤료프와 대립하고 그를 방해하는 악역화되었다.
이를 통해 대중들에게 소련의 로켓 개발은 코롤료프가 다 했다는 인식이 고착화되게 되었다. 그렇게 코롤료프가 신격화되면서 아래에 나오는 것과 같이 폰 브라운을 능가하냐 아니냐와 같은 소모적인 논란이 우주 덕후들 사이에 지속되기도 하기도 했지만 소련 로켓 개발사를 제대로 연구한 사람들은 오히려 글루시코가 코롤료프보다 뛰어난 천재였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고, 차라리 글루시코가 주도했다면 소련도 달착륙 로켓 개발을 성공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코롤료프보다 먼저 안정성 있는 대형 로켓을 개발한 첼로메이, 얀겔도 만만치 않은 과학자였지만 그들이 개발한 로켓이 군사용이었기 때문에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의견도 있는 등 소련의 로켓 개발 업적이 모두 코롤료프 덕분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시정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사정이 있으니, 코롤료프이외의 소련의 우주개발에 공헌한 여러 뛰어난 공학자들이 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코롤료프가 대표적으로 기념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우주개발에서도 폰 브라운만 남고 나머지 인사들은 거의 묻힌 것과 마찬가지다.[45]
때문에 소련의 미사일/로켓 개발사를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코롤료프가 오히려 얀겔, 첼로메이, 글루시코보다 역량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오는 것. 이런 평가는 사실 러시아에도 있으며, 코롤료프 설계국의 경쟁사인 첼로메이 설계국 중역 출신이며, 그 자신이 로켓 개발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 흐루쇼프도 "코롤료프는 개발자라기보다는 관리자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개발자 출신이던 세르게이 흐루쇼프는 코롤료프의 기술적 역량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술에는 젬병인 행정관료 출신이지만, NASA국장을 맡아 달착륙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제임스 에드윈 웹에서 보듯이 기술팀을 조율하고 예산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거대 프로젝트 전체를 감독하는 프로젝트 관리자의 역량은 개발자만큼이나 중요하고 설령 코롤료프의 개발자로서의 역량이 알져진 것만큼 특출하지 않다고 해도 이것이 프로젝트 관리자를 맡아 세계 최초를 여러번 달성한 코롤료프의 대업적을 퇴색시킬 수는 없다.[46] 소련의 후계국인 러시아와 코롤료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는 그를 냉전기 우주경쟁에 참가했던 소련의 대표주자로 기념하고 있다.
4. 대중문화
미국 영화 필사의 도전에서는 소련 로켓이 미국을 앞설 때마다 껄껄껄 웃는 모습으로 잠깐씩 비춘다.대체역사 드라마 포 올 맨카인드에서는 코롤료프가 암으로 일찍 죽지 않고, 치료가 잘 이루어져 보다 오랫동안 활약한 덕분에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달 착륙을 성공시킨다는 설정 아래 진행된다.
러시아 영화 <가가린:최초의 우주인> (Gagarin: First in Space, 2013)에서는 러시아 중견 배우 미하일 필리포프가 맡았다.
EBS에서 방영한 영국 BBC 다큐멘터리 영화 스페이스 레이스에서는 스티브 니콜슨이 맡았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는 약간의 영화적 과장이 들어가 있다.
안녕, 라이카 - 최초의 우주개 이야기에서는 굴라그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고학자로 나온다.
걸어다니는 인간 쓰레기의 외전에서도 등장, 첫장부터 엄격하고 학계최고를 달리는 냉엄한 천재로 묘사된다. 라이카를 기르다가 정이들어버린 주인공 여성 연구원이 우주개 귀환을 준비하는 프로젝트안을 거부하는 냉혈한 상사로 묘사 되지만 사실 본인처럼 당에 찍혀서 숙청 당하길 원하지 않는[47] 인간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주인공의 옛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았기에 그녀를 일부러 갈구면서 굴라그로 끌려가게 하지 않으려는 위악자의 모습을 보이고 또한 후반부에 나오는 세상에서 코롤료프가 없었다면 우주경쟁은 시작되지 않았고 세계는 핵전쟁으로 끝났다고 한다.
5. 가족
코롤료프의 가계는 러시아 출신으로 러시아인이자 문학 교사였던 파벨 코롤료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여 계부 아래서 자랐다. 생부와는 이후 거의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벨라루스인이었다고 하며, 계부가 공학 교사 출신이었고, 코롤료프는 계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본인은 우크라이나에서 자랐다. 그리하여 러시아, 우크라이나 모두 세르게이 코롤료프를 자국 위인으로 간주한다.대학시절 동급생이었던 빈센티니 막시밀나노브나와 결혼했고, 빈센티니는 이후 의사가 되었으나 1949년 이혼했다. 이 둘은 1935년 딸 하나를 낳았다. 딸의 이름은 나탈리아 코롤료바(Наталия Королёва, 1935~)[48]이고 어머니를 본받아 의사가 되었고, 모스크바 의대의 교수생활을 했다.
아버지가 받은 훈장을 가득 담은 진열장 앞에 자랑스럽게 선 코롤료프의 유일한 혈육, 나탈리아 코롤료바 박사.
코롤료프는 조강지처와 굴라그에 수감되었을 당시 10여년간 별거하다가 이혼했고, 복권된 이후 재혼하였으나 소생은 없다.
딸인 나탈리아 코롤료바는 소유즈의 발사 때면 으레 스타 시티나 바이코누르를 찾아 승무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2023년 8월 12일 89세의 나이로 별세했으며, 사후 모스크바의 아르메니안 묘지에 안장되었다.
6. 코롤료프 시
1996년 공적을 기려 모스크바 주의 칼리닌그라드[49]가 코롤료프 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여기에는 로켓 및 우주선 생산업체인 세르게이 코롤료프 로켓 및 우주 주식회사 《에네르기아》 본사 및 러시아 연방 우주국의 관제센터가 위치하고 있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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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영어로는 이름을 Korolyov가 아닌 Korolev로 표기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ё를 위의 부호가 빠진 채로 읽은 것인데 ё가 들어가는 러시아 인명을 표기할 때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2] #[3] 후일담에 의하면 코롤료프는 처음엔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먹어서는 그런 거에 관심없이 그냥 러시아인이라 자각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의 영향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독립국 우크라이나가 없던 시대를 살아간 우크라이나인들에겐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 부분이다.[4] 나중에 폭격기나 수송기만을 전문적으로 설계하는 투폴레프 설계국의 설립자가 된 그 사람이다.[5] 로켓의 운동은 아이작 뉴턴이 발견한 작용-반작용의 과정이자 결과인데, 이 때문에 로켓공학의 선구자였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1903년에 '반작용 추진 장치를 이용한 우주 탐사 연구'라는 논문을 기고한 바 있으며, 반작용 추진 연구 그룹의 이름도 이렇게 명명된 것이다.[6] 2008년 1월 EBS에서 '우주 전쟁(Space Race)'라는 제목으로 더빙판을 방영하였다. 미소 양국의 로켓개발을 주도하는 폰 브라운과 코롤료프의 이야기를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각각 폰 브라운은 오인성, 코롤료프는 이정구. 여담으로 오인성 성우와 이정구 성우는 2021년 대원방송의 꼭두각시 서커스 더빙판에서 사이가 사다요시와 사이가 쇼지를 각각 맡아 왠지 모르게 대립관계가 재현되었다.[7] EBS에서 방영한 스페이스 레이스 및 기타 서방자료에서는 마치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리처럼 묘사된다.[8] 대숙청 기간의 특징으로 반동용의자가 잡혀오면 고문을 해서 다른 공범을 대라고 했다. 고문 뿐만 감형으로 회유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공범을 불기를 거부하던 사람도 한계에 이르면 아무나 불게된다. 글루시코도 혹독한 고문 끝에 본인이 보기에 코롤료프의 실험이 좀 바보같다고 진술했는데, 이것은 NKVD에 의해 "반동적인 국고낭비" 혐의가 되어버렸다. 이 때부터 코롤료프는 글루시코를 안좋게 생각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스푸트니크, 보스토크에서 협력해서 대업적을 남긴다. 대숙청보다는 기술적 견해 차이가 사이를 나쁘게 하는데 기여했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달탐사가 실패한다. 소련 국방장관을 지낸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원수의 회고록에서도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 나빠서 화해시킬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9] 이 작품은 대숙청 이전에 코롤료프가 일하던 로켓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으로, 그리고리 쿨리크 때문에 사장될 뻔 했지만, 독소전쟁에서 대활약을 한다.[10] 그뢰트룹만 하더라도 소련에서 방 6개 공간의 집에 운전사 딸린 자동차를 배정받고, 월급으로 4,500루블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소련 노동자의 평균 월급이 700루블이었다.[11] 이 강제이주를 오소아비아힘(Osoaviakhim) 작전이라고 한다. 독일의 기술 수준이 소련보다 훨씬 앞서 있던 기계, 항공, 광학 관련 기술자들이 거의 납치되어 소련으로 강제이주해 관련 기관에서 종사했다. 다만 이들은 대부분 1953년까지는 모두 동독 혹은 서독으로 돌아왔으며, 강제 이주당했지만 신분은 전쟁 포로가 아니라 영입 기술자였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의 몇배 월급을 주는 등, 좋은 대접을 했다.[12] 나치에 굉장히 협조적이었던 베르너 폰 브라운조차도 나치독일 시절 한 파티에서 "로켓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주개발이다"라고 말했다가 사포타주 혐의로 게슈타포에 체포된 바 있다.[13] 이들이 처음 일하게 되었던 사막 한가운데 있는 텍사스 엘패소에 있는 군부대인 포트 블리스였는데 사실상 감금상태나 다름 없었다.[14] 폰 브라운조차도 계속 FBI의 감시를 받고 있었고, FBI에서는 정기적으로 그에 대한 사찰보고서가 작성되었다.[15] Space Race 다큐에서 영입하는 장면이 묘사 되는데. 연회를 열어 보드카를 잔뜩 먹여서 만취상태로 만들고 집으로 보내서 재웠다가 새벽에 강제로 소련으로 끌고 갔다.[16] 그뢰트룹은 이후 미국의 공작으로 동독으로부터 1953년 서독으로 갔다.[17] 사족으로 시열대상 독소전쟁이 없어 코롤료프가 숙청당한 대체역사 RTS 게임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 등장하는 소련의 V2 로켓은 이로 인해 그뢰트룹을 납치하지 못했는지 그냥 좀 멀리 발사되고 커다란 카츄샤일 뿐이다. 반면 서방세계는 자유진영 연합국의 일원인 독일이 미국으로 안간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진두지휘하에 세계 최초의 첩보위성을 쏘아올리며 우주시대를 소련보다 훨씬 앞서서 열었다.[18]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시어도어 폰 카르만, 프랭크 멜리너 등의 JPL인재들이 전쟁 이전부터 로켓을 연구해왔고, 이들이 고유하게 연구하던 것들은 폰 브라운이 미국에 영입되면서 거의 엎어지고, 브라운이 연구 방향을 이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JPL은 이전에 연구해 놓은 지식이나 인프라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 NASA의 우주선 개발의 주축 개발기관이 된다.[19] 다만 이들 중에 폴란드에 합병된 동프로이센 출신이 있었고, 동프로이센 출신은 서독에서 오히려 이들을 실향민으로 우대해주었기 때문에 이곳 출신은 서독 이주를 희망했다. 1950년대 서독에서는 동프로이센 등 실향민들이 만든 정당이 연방 의회에서 수십석을 차지할 정도로 서독에서 실향민들은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이들은 철저한 반공성향으로 기민당의 지지기반이었다.[20] 미국은 그뢰트룹을 미국으로 데려오려고 했으나 그뢰트룹은 미국에 가기를 거부해 실패했다.[21] BBC의 4부작 우주경쟁 관련 다큐에서 이걸 묘사했다.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연구하는 폰 브라운과 달리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춥기까지 한 가건물에서 역설계하는 소련 연구팀과 매번 공중폭발 하는 로켓을 보며 부들부들 거리는 KGB 요원이 코롤료프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22] 1개의 터보펌프에 4개의 연소실이 장착되어 있고, 자세제어용 노즐이 부스터에는 2개/메인 로켓에는 4개씩 붙어있는 구조이다.[23] 엔진을 클러스터링 한다고 한다.[24] 이런 실패 때문에 유리 가가린에 앞서 발사된 소련 우주인이 궤도상에서 순직했다는 음모론이 현재까지도 돌고 있다.[25] 미국의 유인발사가 임박했다는 정보 때문에 보스토크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발사를 앞당겼다는 음모론도 있다. 3주후인 5월 5일 미국의 앨런 셰퍼드가 머큐리로 가가린에 이어 세계 2번째로 우주비행을 한다. 다만 보스토크는 15분에 불과한 머큐리(프리덤7)보다 훨씬 우주에 더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1시간 48분), 이런 음모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26] 모든 설계국의 소속은 국방부가 아니라 기계공작부였지만, 서방의 군수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고객은 군이었기 때문에 돈은 군으로부터 나왔다.[27] 걸작 ICBM인 SS-18 사탄의 개발자이다. 그리고 제니트 로켓도 얀겔의 작품이다. 얀겔은 코롤로프의 부하로 일한 적이 있고 함께 R-5, R-7, R-11을 개발하여 개인적으로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28] 정확히는 그는 민주당원이었기 때문에,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1969년 1월 집권하기 직전인 1968년 말 NASA를 떠났다. 그가 떠난 이후인 1969년 7월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지만, 그가 이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2022년 발사된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은 이런 이유로 그의 이름이 붙었다.[29] 다만 코롤료프 사망 후인 1967년 11월에야 초도비행을 할 수 있었다.[30] 흔한 성이라서 소련 해군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인물이다.[31] 오래 앉아 있는 연구자들이 자주 걸리는 질병이다.[32] 루나8은 발 사후 문제를 일으켜서 예정된 착륙지점을 벗어나 착륙을 했고, 이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다. 코롤료프 죽음 직후에 발사된 1966년 2월 루나9가 최초로 달에 연착륙한 우주선이라는 기록을 세운다.[33] OKБ는 숫자대신 초대 원장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OKБ-45가 유명한 수호이 설계국, OKB-155가 미그(미코얀-구레비치) 설계국이다.[34] 반면에 미국의 새턴-5는 강력한 F1엔진 5개로 모든 추진력을 감당했다. 이는 미국의 재료과학 기술이 소련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35] 중국이 우주개발에 대한 투자를 의욕적으로 늘리고는 있지만, 여러가지 운영 상황은 아직까지는 소련의 1980년대 수준보다도 낮으며, 소련이 붕괴한 후 20년이 훨씬 넘는데도 우주기술 3위의 중국이 20-30년전의 소련 레벨이하라는 것은 소련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우주개발도 경제력이니만큼 현재의 상태가 20-30년간 계속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러시아를 앞설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당시 미소는 국가 자존심을 건 우주 경쟁 때문에 경제를 생각하지 않고 과도하게 우주기술 개발에 매달린 탓에 비정상적으로 기술 개발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보면 자기 경제력에 맞게 수십년에 걸친 장기 계획을 세워 우주개발을 하는 중국이 정상적이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돈을 퍼붓던 냉전 이후 미소 모두 예산 삭감크리를 맞아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라인업을 업그레이드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미국도 우주왕복선 퇴출 및 차세대 발사체 개발이 계속 연기-변경되는 처지이다.[36] 기술적으로는 가능했겠지만 챌린저 참사로 예산이 싹싹 썰려나간데다 SDI도 망해서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가 없었다.[37] 정확히는 ULA의 아틀라스 V 메인 엔진인데, 아틀라스의 주요 업무가 군사위성이나 가끔 NASA, NOAA 탐사선 쏘는 거다.[38] 재료공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미국에서 탄생했다.[39] 특히 1950년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사의 잭 킬비가 발명한 반도체는 미국의 우주개발 및 ICBM의 발달에 획기적 기여를 했고, 이 때문에 미국의 우주선이나 로켓들은 소련보다 훨씬 더 정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도체도 처음에는 매우 고가였지만, 미국은 로켓, 미사일, 무기용 반도체를 값싸게 공급받기 위해 1960-70년대 인텔이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 엄청난 보조금을 주었고, 이들은 보조금을 받으며 기술개발에 매진해 반도체 가격은 엄청나게 떨어졌다. 그 부산물로 1970년대 말부터 개인용 컴퓨터 산업이 발달하게 되어 현재의 정보화 시대가 도래했다. 현재의 인터넷 시대도 냉전 및 우주경쟁의 또다른 부산물이라고 할수 있다.[40] 응용수학자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주로 우주개발에 관련된 문제를 연구했기 때문에 수학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하여 소련의 대표적 수학자로는 이분보다는 위에서 언급된 콜모고로프가 꼽힌다.[41] 소련 핵물리학의 레전드로는 체렌코프 현상을 규명하고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파벨 A. 체렌코프, 일리야 프랑크, 이고르 예브게니예비치 탐이나 원폭의 아버지 이고르 쿠르차토프, 차르 봄바의 아버지 율리 하리톤,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을 들 수 있다. 사하로프의 경우 차르 봄바 이후 핵무기 개발 회의를 느끼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장하고 소련 반체제 운동에 투신하였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노벨평화상을 받는 등 인권운동가로도 높이 평가받는다.[42] N1은 그의 죽음 이후 후계자이자 보좌관이였던 바실리 미신과 쿠즈네초프가 개발하였다.[43] 후술하겠지만 R-7 로켓의 개발, 그리고 이 로켓으로 해낸 모든 일이 세계 최초다![44] 여기에 전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로켓의 타이틀도 함께 달고 있다. 로켓 공중폭발 시 승무원 모듈 비상사출장치 등에 개량을 거치면서 더더욱 신뢰성과 안전성이 강해졌다.[45] 미국 로켓의 아버지인 로버트 고다드 JPL의 설립자인 시어도어 폰 카르만도 폰 브라운에 묻혀버렸다.[46] 그리고 기업가이고 개발자나 전공자 출신은 아니었지만 기술적 트렌드를 이해하고 이를 혁신으로 진화시킨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도 마찬가지 역량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애플이나 테슬라에서 이 둘의 리더십이나 관리 역량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바로 마찬가지의 이유이다.[47] 코롤료프는 돈낭비를 했다고 굴라그로 끌려간 사람이고 우주개 생환 프로젝트가 잘못될 경우 여성 연구원은 무조건 숙청이기에 배려했다.[48] 참고로 영어나 러시아어로 검색하면 같이 나오는 유명 러시아 여가수 나타샤 코롤료바(Наташа Королёва, 1973~)가 있는데, 코롤료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며, 이분의 본명은 나타샤 블라디미로브나 포리바이(Ната́лия Влади́мировна Порыва́й) 이다.[49] 쾨니히스베르크였던 칼리닌그라드와는 다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