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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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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2대 해군장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Кузнецо́в | Nikolay Kuznetsov | |||
본명 |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Гера́симович Кузнецо́в Nikolay Gerasimovich Kuznetsov | ||
출생 | 1904년 7월 24일 | ||
러시아 제국 볼로그다현 벨리코우스튜그구 메드비드키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아르한겔스크주 코틀라스군 메드베드키) | |||
사망 | 1974년 12월 6일 (향년 70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제3대 태평양함대 사령관 | ||
1938년 1월 ~ 1939년 3월 | |||
제4대 해군인민위원 | |||
1939년 4월 28일 ~ 1946년 2월 25일 | |||
제10대 해군 총사령관 | |||
1939년 7월 24일 ~ 1947년 1월 17일 | |||
제2대 제5함대 사령관 | |||
1950년 2월 ~ 1951년 7월 | |||
제12대 해군 총사령관 | |||
1951년 1월 20일 ~ 1956년 1월 5일 | |||
제2대 해군장관 | |||
1951년 7월 20일 ~ 1953년 3월 1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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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1] (1935년 이혼) 베라 니콜라예브나 쿠즈네초바 (재혼) | ||
자녀 | 아들 빅토르,[2] 니콜라이, 블라디미르 | ||
학력 | 쿠즈네초프 해군대학교 (졸업) | ||
복무 | 소비에트 해군 | ||
1919년 ~ 1956년 | |||
최종 계급 | 원수[3] (소비에트 해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스페인 내전 독소전쟁 소련-일본 전쟁 | ||
주요 서훈 | 소비에트 연방 영웅 레닌훈장 (4회) 우샤코프 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3회) 적성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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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군 군관 예복을 입은 초상화 |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메드베드키 마을에 있는 쿠즈네초프 일가의 집. 현재는 쿠즈네초프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제 교구 학교에서 공부했다. 1915년 7월, 아버지 게라심 쿠즈네초프가 사망했다. 오랫동안 병을 앓았기 때문에 쿠즈네초프의 기억 속 아버지는 항상 아픈 모습이었다고 한다.
1916년 12세에 코틀라스의 한 식당에서 구박을 받으며 일하다 삼촌 파벨 쿠즈네초프가 아르한겔스크로 데려갔다. 쿠즈네초프는 아르한겔스크에서 삼촌의 아들과 함께 1년 더 공부했다.
1917년 아르한겔스크 항구에서 배달부로 취직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아르한겔스크의 상황이 복잡해져 오래 일하지 못했다. 1918년엔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 방앗간에서 일했다.
1919년 외삼촌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약속해 기다리고 있을 때 부두에서 우연히 만난 해병에게 해군에 입대할 것을 권유 받았고, 입대하려면 최소 17세가 돼야 했기 때문에 15세였던 쿠즈네초프는 나이를 2년 속이고 해군에 입대했다. 나이에 비해 키가 컸기 때문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이후로 공식 서류상 쿠즈네초프는 항상 1902년생으로 표기됐다. 북드비나 소함대에 배치된 쿠즈네초프는 다른 여타 젊은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것을 기대했으나 쿠즈네초프의 똘똘함을 알아본 상관은 그를 타자기 앞에 앉히고 서류작업만 시켜댔다. 연말에 쿠즈네초프는 제발 자신을 배에 태워달라고 간청했다.
1920년 2월 21일 아르한겔스크가 적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북드비나 소함대도 해체되었지만 쿠즈네초프는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에서 훈련을 받으며 계속 복무했다. 가을에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해군 사령부로 전출되었다. 1921년 콤소몰에 가입했다.
쿠즈네초프와 해군사관학교 동기들. 맨 앞줄 누워있는 4명 중 제일 오른쪽이 쿠즈네초프다. |
1924년 페트로그라드 대표단의 일원으로 해군사관생도들도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쿠즈네초프는 이때 사상적으로 깊은 감명을 받아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공산당에 가입 신청서를 냈다. 생도로서 그 유명한 순양함 아브로라를 타고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방문했고 방학땐 집에 돌아가지 않고 페트로그라드에 남아 친구들과 강에서 배를 타고 놀았다.
1925년 공산당 가입이 승인됐다. 실습 훈련과 항해등을 거치며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0월 31일 레닌그라드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하일 프룬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1926년 10월 졸업 성적순위 10위권에 들어 복무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실습 때 쿠즈네초프를 눈여겨 본 발트함대 총참모장 레프 갈레르가 발트함대 사령부로 오라고 제안했지만 쿠즈네초프는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취역준비중이던 흑해함대의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를 선택했다. 원래는 절친이었던 동기 블라디미르 트리부츠[6]와 함께 강구트급 전함 '파리즈스카야 콤무나'에서 복무하기로 했지만 새로운 순양함을 타고 떠나는 항해에 매료되어 마지막에 마음을 바꿨다.
1929년 가을 오데사 인근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함대 훈련에 참석한 보로실로프가 훈련 때 쿠즈네초프의 행동을 높이 평가했다. 보로실로프는 쿠즈네초프를 따로 불러내 모두의 앞에서 악수를 하며 칭찬을 했고 쿠즈네초프의 해군대학 입학 허가 명령을 내렸다. 해군대학에서 쿠즈네초프는 알라푸조프와 친하게 지내며 함께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크라스니 캅카스의 부함장 쿠즈네초프. 1932년. |
체르보나 우크라이나 함장 쿠즈네초프와 포수들 |
1935년 '체르보나 우크라이나'가 붉은 함대 전체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 공로로 쿠즈네초프는 존경징표훈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9월 세르고 오르조니키제가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에 탑승해 항해했다. 함선과 승조원들의 상태에 만족한 오르조니키제는 쿠즈네초프에게 시계와 GAZ-A 승용차를 수여했다.
스페인내전에 파견된 소련측 군사 고문단과 쿠즈네초프. 오른쪽은 그레고리 슈테른이다. |
1937년 8월 귀국해 태평양함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극동으로 이동했다. 임명되고 얼마 안 가 자신의 상관인 태평양함대 사령관 키레예프가 체포되어 1938년에 새로운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모스크바로 소환 명령을 받고 떠나는 키레예프를 쿠즈네초프가 직접 배웅해줬는데, 슬픈 표정의 키레예프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것 같았다고 한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된 쿠즈네초프는 함대사령관으로서 해군에서 장교들이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너무나 쉽게 체포되는 과정을 목도했고, 조국을 배신할 리 없는 가까운 지인과 친구들까지 체포되기 시작하자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쿠즈네초프는 해군에서 일어난 체포들의 세부사항을 조사했고 체포된 장교들의 무고함과 결백함을 확인한 쿠즈네초프는 자신 또한 반동으로 몰려 숙청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를 감수하고 용감하게 항의하고, 장교들의 신원보증을 서 석방시켰다.[7]
태평양함대 사령관 쿠즈네초프와 극동군 사령관 슈테른. 1938년. |
2.2. 최연소 인민위원
해군 군관 예복을 입은 쿠즈네초프 해군 인민위원 |
1939년 4월 28일 34세의 나이에 해군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소련의 최연소 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임 인민위원들은 해군에 대해 잘 모르는 육군 출신에 해군에서의 숙청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에 쿠즈네초프가 임명되자 소련 해군은 "드디어 해군 출신이 우리 수장이 됐다!"라며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혁명과 내전, 대숙청을 지나고 남은 해군 지휘관들은 대부분 젊고 경험이 부족했다. 소련 해군 전체를 통틀어 제1차 세계 대전 지휘 경험이 있는 장교는 단 4명에 불과했고 지휘관 결원률은 30%에 달했으며 함대 본부 결원 비율은 22.4%였다. 365명의 참모 장교 중 해군사관학교 수준의 해군 교육을 받은 사람은 40%뿐이었고 해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8.4%였다. 또한 이들 중 절반이 참모 경력이 채 2년을 넘지 못했다. 때문에 쿠즈네초프가 해군 인민위원으로 임명되고 제일 처음한 것은 해군 학교 증설과 장교 양성이었다.
1939년 5월 1일 노동절 때 쿠즈네초프는 스탈린과 함께 레닌묘 단상에 올라 퍼레이드를 지켜보면서 해군의 날을 창설하자는 제안을 하게 된다. 스탈린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6월 22일 해군의 날을 매년 7월 24일로 제정한다는 결의안이 발표된다.[10] 7월 24일은 다름아닌 쿠즈네초프의 생일로, 역사가들은 새로 부임한 인민위원을 위한 스탈린의 이례적인 선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해군의 날은 쿠즈네초프가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이 됐고 항상 자신의 생일 축하보다 해군의 날 축하를 우선시했다고 한다. 한편 당시 쓰여진 회고록이나 기록을 보면 그때도 해군의 날은 지금과 같이 7월 마지막 일요일에 기념된 것으로 보인다.
쿠즈네초프는 복잡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기습에 대한 대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금방 찍어낼 수 없는 함선의 특성 상 개전 초 함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 전시 중에 복구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쿠즈네초프는 1939년 6월 23일 3단계로 나뉘는 전투 준비 태세를 만들었다.[11] 쉽게 말하면 데프콘과 비슷한 시스템으로 3번은 평시, 2번은 완전 무장 상태로 경계 강화, 1번은 공격을 격퇴하는 무기 사용이 허가된다.
쿠즈네초프에겐 함선 건조 계획과 관련된 막중함 책임도 부여되었다. 1939년 8월 6일 쿠즈네초프는 스탈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에게 1940-1947년 동안 진행될 건조 계획의 수정안을 제출했다. 쿠즈네초프는 항모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기존 건조 계획에 2척의 항모를 포함시켰었지만, 전쟁 위협이 다가오자 항모를 제외하고 경함선 건조를 가속화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쿠즈네초프가 부임한 1939년 초부터 1941년까지 소련 해군 함선의 총 톤수는 약 16만 톤 증가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소련 해군은 전함 3척, 순양함 7척, 구축함 59척, 잠수함 218척, 어뢰정 269척, 경비함 22척, 소해함 88척, 구잠함 77척 및 기타 보조 선박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전함 3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7척, 구축함 45척, 잠수함 91척을 포함하여 총 219척의 함선이 건조되고 있었다.
"포병은 현대전의 신이다."라는 스탈린의 말처럼 쿠즈네초프도 포병 화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해안포대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소련 해안선에 새로운 해군기지와 1,224문의 포를 가진 332개의 해안포대가 설치되었다. 전쟁 동안 소련 해군기지는 모두 해상이 아닌 육지로부터 점령되었다.
1941년 초가 되자 독일 정찰기들이 소련 국경을 침범하고 해군 기지들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쿠즈네초프는 독일 정찰기들을 격추시키라고 명령했고 3월 북방함대에서 독일 정찰기가 소련 해군의 공격을 받는다. 이 사건으로 스탈린은 쿠즈네초프를 불러 엄중하게 질책하고 "발포하지 말고 아군 비행기를 출격시켜 가까운 비행장에 착륙을 유도하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동시에 독일 선박들이 소련 항구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쿠즈네초프는 이에 대해 여러번 크렘린에 보고했다. 스탈린의 비서였던 포스크레비셰프의 기록에 따르면 1941년 6월 14일 쿠즈네초프가 스탈린에게 소련 선박들도 독일 항구에서 철수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쿠즈네초프를 쫓아내버리고 말했다. "제독이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거라는 헛소문을 반박하는 오늘자 타스 통신을 읽지도 않은 건가? 도발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어..." 스탈린의 반대로 소련 상선들은 제때 독일에서 철수하지 못했고 40척의 선박이 나포되고 약 900명의 소련 선원들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독일의 움직임이 심상치않자 1941년 6월 16일 쿠즈네초프는 독자적으로 흑해함대, 발트함대, 북방함대에 전투 준비 태세 2번 전환 명령을 내렸다.
1941년 6월 21일 오후 11시 쿠즈네초프는 국방장관 티모셴코로부터 중요한 정보가 있으니 급히 오라는 전화를 받는다.
티모셴코 원수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육군 대장 주코프가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원수가 우리를 보고 독일이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간결하게 말했다. 주코프가 일어나 국경 지역에 보낼 전보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3장으로 꽤 길었고 공격당할 경우 군대가 취해야 할 조치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지만 해군과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나는 전보를 빠르게 훑어본 후 물었다.
"공격 받을 경우 무기 사용이 허용 됩니까?"
"허용되네."
나는 내 옆에 있던 알라푸조프 제독에게 말했다.
"본부로 달려가서 즉시 함대에 전투 준비 태세 1번을 명령하게, 뛰어!"
회고록 «Накануне» 中
"공격 받을 경우 무기 사용이 허용 됩니까?"
"허용되네."
나는 내 옆에 있던 알라푸조프 제독에게 말했다.
"본부로 달려가서 즉시 함대에 전투 준비 태세 1번을 명령하게, 뛰어!"
회고록 «Накануне» 中
"흑해함대, 발트함대, 북방함대, 핀스크 소함대, 다뉴브 소함대는 즉시 전투 준비 태세 1번으로 전환하라." 1941년 6월 21일 23시 50분. 쿠즈네초프 상장. |
2.3. 독소전쟁
1942년 8월 쿠즈네초프 해군 인민위원 |
쿠즈네초프는 22일 오전 3시에 공습 보고를 듣자마자 애타게 스탈린을 찾았으나 스탈린을 만날 수 있었던 건 23일 늦은 저녁에서였다. 스탈린은 해군에서의 피해는 전무하다는 쿠즈네초프의 보고를 듣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라고 답했다.
1941년 6월 23일, 소련의 군사 작전을 전략적으로 지휘하는 최고 기관인 최고사령부 스타프카가 설립되었다. 해군 인민위원인 쿠즈네초프도 스타프카 구성원에 포함되었다.
1941년 8월에 이루어진 발트함대 항공대의 베를린 폭격 계획에 참여했다. 쿠즈네초프는 이 작전을 전적으로 책임졌다.
전쟁 동안 쿠즈네초프는 해군 총사령관으로서 함대와 소함대의 전투 작전을 지휘했으며, 함대와 육군간의 협력활동을 능숙하게 연계하여 소련군의 해안 측면을 보호했고, 적의 해상 통신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동맹국 해군과 협력하여 외부 및 내부 통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련군이 수행한 9개의 주요 공세 작전 중 6개의 작전에 소련 해군의 함대와 소함대가 참여했다. 쿠즈네초프의 지휘 아래 전쟁 기간 동안 소련 함대는 1,200척 이상의 함선과 선박을 격침시켰고, 300만 톤 이상의 수송선 4,300척을 침몰시켰다. 또한 110회 이상의 상륙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 작전들에는 25만 명 이상의 병력과 2,000척에 달하는 함선과 보트가 동원됐다. 반면 독일군은 전쟁 내내 소련군의 해안에 단 한차례도 상륙하지 못했다. 소련 해군은 바다와 강을 통해 1억 1700만 톤 이상의 화물을 운송했고 1,200만 명의 사람을 수송했다. 북방함대는 영미해군과 함께 1,464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77개의 연합군 수송대를 보호했다.
독일 해군, 크릭스마리네는 지중해에서 강력한 영국 해군에 가로막혀 흑해까지 일부 U보트와 소해정, 슈넬보트 정도밖에 진출하지 못했고, 쿠즈네초프는 이런 제해권을 이용하여 상륙전 교리를 개발하고 직접 실행시키기도 했다.
얄타회담에서 군사회의중인 쿠즈네초프(왼쪽 2번째)와 안토노프(가운데) |
1945년 5월 25일 대장 계급이었던 Адмирал флота가 소비에트 연방 원수와 동급으로 승급되면서 이사코프 제독과 함께 소련 해군 원수가 되었다. 얄타 회담에서는 별 4개 계급장을 하고 있었지만 이후 포츠담 회담에서의 계급장을 보면 원수와 비슷하게 큰 별 하나만 있다.
포츠담 회담에서 주코프와 쿠즈네초프 |
2.4. 소련-일본 전쟁
1945년의 쿠즈네초프 |
쿠즈네초프는 훗날 회고록에 이때 스탈린과 나눈 대화를 남겼는데 해당 기록을 보면 스탈린은 막바지에 탐내던 홋카이도를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해상 상황에 대해 보고했을 때 스탈린이 농담조로 물었다.
"아직도 싸우고 있나?"
그때 우리는 쿠릴 열도의 마지막 섬인 쿠나시르섬에 상륙 중이었다. 스탈린이 농담처럼 경고했다.
"홋카이도에는 상륙하지 말게."
"명령 없이는 하지 않겠습니다."
며칠 후 스탈린이 내게 전화해 언제쯤 모스크바로 돌아올 것인지 물었다.
"새로운 건조 계획을 채택해야 하니 지체하지 말게."
정부는 이미 해군의 미래를 구상 중이었다.
전쟁 회고록 «Курсом к победе» 中
"아직도 싸우고 있나?"
그때 우리는 쿠릴 열도의 마지막 섬인 쿠나시르섬에 상륙 중이었다. 스탈린이 농담처럼 경고했다.
"홋카이도에는 상륙하지 말게."
"명령 없이는 하지 않겠습니다."
며칠 후 스탈린이 내게 전화해 언제쯤 모스크바로 돌아올 것인지 물었다.
"새로운 건조 계획을 채택해야 하니 지체하지 말게."
정부는 이미 해군의 미래를 구상 중이었다.
전쟁 회고록 «Курсом к победе» 中
8월 중순 바실렙스키와 사이좋게 죽을 뻔한 사건도 있었다. 치타에서 프리모리예 지방으로 가기 위해 함께 비행기를 탔는데, 하바롭스크 중간쯤 왔을때 강한 뇌우를 만나 버려진 비행장에 겨우 불시착했다고 한다. 본부와 모스크바에 연락하기 위해 바실렙스키가 직접 가까운 기차역까지 걸어 갔다고...
1945년 9월 14일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해군을 지휘하고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모범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2.5. 전후
2.5.1. 첫 번째 탄압
쿠즈네초프 해군장관 |
1946년 2월 25일, 소련 해군 인민위원회가 폐지되어 소련 국군 인민위원회로 통합되었고 쿠즈네초프는 소련 해군 총사령관이자 소련 국군 인민위원회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쿠즈네초프는 통합된 소련 국군 인민위원회는 다분히 육군 편향적이고 해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해군 부서와 해군 총사령관의 지위를 전쟁 때처럼 보장해 줄 것을 주장했다가 해군의 특별한 독립을 주장한다며 군에서 전방위 폭격을 맞았다.
결국 쿠즈네초프는 1947년 1월 직위에서 해임되고 2월에 레닌그라드의 해군 사관학교 학과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자신을 불순물 취급하고 해군 예산만 삭감하던 국군 인민위원회에서 빠져나왔다며 기껍게 받아들였다.
한편 당시 군에서 부는 정치적 숙청을 감지한 해군 기뢰 연구부 장교 알페로프 대령은 불가닌에게 쿠즈네초프, 갈레르, 알라푸조프, 스테파노프 제독이 소련 정부의 허가 없이 낙하산 어뢰 설계도, 함포 시스템, 수많은 기밀 도면과 해도 등을 영미 연합군에게 넘겼다고 고발하는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받은 불가닌은 눈엣가시였던 쿠즈네초프를 묻어버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스탈린에게 보고서를 올렸고 스탈린은 즉시 조사 명령을 내렸다.
첫 조사는 해군 내에서 해군들이 하도록 지시됐고 조사관으로 판텔레예프 제독과 라푸쉬킨 제독이 임명되었다. 두 제독은 소련 해군이 연합군에게 어뢰도와 지도를 넘겨준 것은 사실이나, 기밀정보가 아니었다는 보고서를 쓰며 제독들의 혐의를 부정했다. 해당 보고서는 전쟁 기간 북방함대 사령관으로 활약하고 해군 참모장으로 임명된 아르세니 골로프코 제독이 크렘린으로 가져갔으나, 골로프코 제독은 가져갔던 보고서를 그대로 들고 돌아와 판텔레예프와 라푸쉬킨에게 돌려주며 "내가 이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건네면서 당신들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을 행운으로 아시오. 그랬다면 당신들도 해군에서 제명됐을 거요."라고 말하며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음을 밝혔다. 스탈린은 골로프코 제독에게 "너희 해군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라며 제독들을 명예법원에 회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1947년 11월 8일, 레닌그라드에 있던 쿠즈네초프와 레프 갈레르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둘은 기차를 타고 가며 왜 소환 명령이 왔는지 추측할 정도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4명의 제독들은 체포되었고 그들은 결백하고 혐의가 없었기 때문에 지지부진한 조사 과정이 이어졌다.
12월 12일, 소련 각료 회의가 해군 제독들을 명예법원에서 재판하기로 결정했다. 고보로프 원수가 재판장을 맡았고 법관 구성은 불가닌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1948년 1월 12일~15일 명예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법정엔 피고인들을 엄하게 처벌해달라는 날선 비난이 쏟아져 내렸다. 제독들을 옹호한 라푸쉬킨 제독과 시바예프 제독은 해임되었다. 쿠즈네초프는 회고록에서 "나는 평생 부하들을 지키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무고한 처벌 위협을 받던 결백한 부하들을 그렇게나 구해주었는데, 이제 나는 내 부하들이 우리에게 쏟아내는 거짓 비난을 듣고 있었다."라며 당시 씁쓸했던 감정을 내비쳤다. 법원의 판결은 스탈린이 불가닌에게 내렸고, 판사들은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불가닌의 명령에만 따랐다. 재판의 결과는 이 사건을 대법원 군사 재판소에 회부하는 것이었다.
1월 16일부터 2월까지 군 검찰청이 제독들을 심문하고 조사했다.[14] 이 길고 불안정한 시간 동안 쿠즈네초프는 많은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계와 심장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1948년 2월 3일 대법원 군사 재판소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장은 울리히였는데, 쿠즈네초프는 울리히가 그 해 벌어진 모든 정치 재판들을 담당했고 모든 판결이 가혹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를 예상하며 긴장했다. 먼저 알라푸조프, 스테파노프의 10년형이 선고됐고 쿠즈네초프는 시작이 10년형인 걸 보고 뒤로 갈수록 형이 높아져 자신은 사형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갈레르가 4년형을 받자 자신도 4년일 거라고 생각해 안심했다. 결과적으로 쿠즈네초프는 전쟁 중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 강등 조치로만 끝났다. 이 결과도 스탈린이 결정한 것으로, 스탈린은 처음 체포 명령을 내릴 때 쿠즈네초프를 인민의 적으로서 체포하자는 국가안보부 장관 빅토르 아바쿠모프의 제안에 "쿠즈네초프는 인민의 적이 아니다."라고 거절하며 쿠즈네초프를 정도 이상으로 벌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했다.[15]
강등당한 쿠즈네초프는 1948년 6월 극동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돼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고 1950년엔 제5함대[16] 사령관이 됐다.
2.5.2. 두 번째 탄압
주코프와 쿠즈네초프 |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쿠즈네초프는 곧장 알라푸조프와 스테파노프를 석방해 복권시켰고[18], 비슷한 시기에 억울하게 체포된 해군 장교들과 자신을 옹호하다 해임당한 제독들도 복권시켰다.[19]
1955년 크렘린 원수 별 수여식[20] (뒷줄) 루덴코, 카자코프, 수데츠, 바렌초프, 모스칼렌코, 이사코프 (앞줄) 바그라먄, 쿠즈네초프, 페고프, 보로실로프, 추이코프, 예료멘코 |
1955년 초 쿠즈네초프는 심근경색을 겪고 5월 국방장관 주코프에게 건강상의 이유로 자신의 보직을 변경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쿠즈네초프는 병가를 냈고 6월 해군장관의 업무가 쿠즈네초프의 추천으로 당시 흑해함대 사령관이던 고르시코프에게 임시로 맡겨졌다. 병가를 낸 쿠즈네초프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크림반도의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이 병가 기간인 10월 29일, 흑해함대에서 전함 노보로시스크[21]가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1955년 12월 국방장관 주코프가 노보로시스크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쿠즈네초프를 해군 장관직에서 해임시켰다. 쿠즈네초프는 사건 조사단에 자신을 포함시켜주고, 조사 결과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6년 2월 17일 쿠즈네초프는 중장으로 강등되고 강제 예편 당해 해군에서 은퇴당하고 만다.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에서 퇴출되었다.
2.5.3. 은퇴 후
말년의 쿠즈네초프 중장 |
쿠즈네초프는 강제 예편된 후 "나를 해군에서 쫓아냈어도 나와 해군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며 해군에 관한 저술에 힘쓰고 전쟁 당시 회고록을 집필했다. 직장을 잃은 쿠즈네초프는 처음에 금전 문제에 시달렸고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회고록을 출판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회고록은 나밖에 쓸 수 없는 내용을 제대로 쓰고 싶다"며 집필에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전쟁 회고록을 이미 완성했음에도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고 있어 적당한 때를 기다렸고, 흐루쇼프 실각 후 1966년에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 대전 때의 회고록을 출판했다.[23]
스탈린 독재와 자신에게 일어난 탄압, 흐루쇼프, 소련 정치에 대해 쓴 전후 회고록은 "이건 내 사후에나 나올 수 있을 것."이라며 원고를 보관해뒀고 그의 말대로 1995년에서야 전후 회고록이 출판될 수 있었다. 쿠즈네초프는 전후 회고록에서 스탈린과 흐루쇼프의 독재를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그들을 따르던 정치위원들과 정치적으로 행동하던 해군 동지들[24]을 아첨꾼이라며 비판했다.
어느 남미 국가의 독재자가 하룻밤 사이에 다른 독재자로 교체된다면, 그건 그곳을 지배하는 것이 국민이 아니라 파벌일 뿐임을 의미하며 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전후 회고록 «Крутые повороты» 中
쿠즈네초프는 공산당이 모든 국가기관을 대체해 당에 의해 국가권력이 힘을 잃었다고 공산당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 사람이 막강한 권력을 누려 쉽게 독재자가 될 수 있는 현 소련 체제 자체를 뜯어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쿠즈네초프는 강력한 법률과 헌법을 제정하고 감독기관을 설치해 독재를 하지 못하도록 막고 가능한 많은 개인과 기관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서술하며 흐루쇼프 이후엔 국민을 위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집권하기를 소원했다.[25]전후 회고록 «Крутые повороты» 中
1957년 쿠즈네초프를 해임했던 주코프도 니키타 흐루쇼프의 미움을 사서 해임되었다.[26] 흐루쇼프가 실각하자 바실렙스키[27]를 포함한 많은 제독들이 쿠즈네초프를 복귀시켜달라고 청원을 냈고, 명예직이었던 국방부 감독관에 임명되었다.
부당하게 박탈된 쿠즈네초프 동지의 계급을 복권하고 그를 국방부 감독관에 포함시키는 것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그를 잘 알고 있는 모든 군대 구성원들, 특히 그가 지금까지도 큰 권위를 누리고 있는 해군에서 큰 기쁨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966년 4월 9일 바실렙스키가 소련 중앙위원회 서기국에 보낸 복권 청원서 中
그러나 쿠즈네초프가 직접 후임으로 골랐었던 소련 해군의 어머니로 평가받는 고르시코프 제독의 반대로 인해 생전에 원수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고르시코프는 '복권의 비효율성에 대해서'라는 문서까지 준비했다고 한다.1966년 4월 9일 바실렙스키가 소련 중앙위원회 서기국에 보낸 복권 청원서 中
노보데비치 묘지에 있는 쿠즈네초프 가족묘 |
사후 복권을 막던 고르시코프가 사망한 1988년, 새로운 해군 총사령관 블라디미르 체르나빈의 주도로 쿠즈네초프의 복권 청원서가 제출됐고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총참모장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의 적극적인 지지로 마침내 1988년 7월 26일에서야 소련 해군 원수로 사후 복권되었다.[28]
3. 평가
고향인 아르한겔스크에 세워진 쿠즈네초프의 동상. |
탁월한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능숙한 행정가로서 쿠즈네초프가 소련-러시아 해군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 해군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핵잠수함과 미사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이것은 흐루쇼프의 대표적 왜곡 주장으로 전혀 사실이 아니다. 쿠즈네초프는 이미 1946년 스탈린에게 원자력 추진 함선 설계 필요성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다. 핵잠수함 건조는 쿠즈네초프의 재임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1954년 쿠즈네초프와 말리셰프, 자베냐긴이 함께 첫 핵잠수함의 설계를 검토했었다. 쿠즈네초프의 전후 건조 계획에서도 실제 취역한 핵잠수함보다 더 많은 양의 핵잠수함이 제시되고 있었다.
소련 해군의 미사일 무기는 1951년에 쿠즈네초프가 최초로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쿠즈네초프가 해군장관으로 지내던 1954~1955년에 순양함 '아드미랄 나히모프'와 해안부대에 새로운 미사일 무기 시제품들이 설치됐고 해안용 '스트렐라'는 테스트 발사까지 완료됐었다. 쿠즈네초프는 1955년에 크림반도에서 흐루쇼프에게 직접 미사일 발사를 보여주었고 해군 미사일에 관한 모든 초안 방향을 결정했다. 흐루쇼프의 주장과는 정 반대로 소련 해군의 핵잠과 미사일 전력의 토대는 쿠즈네초프가 세운 것이다. 이 사실들은 쿠즈네초프 본인이 해당 주장은 '주코프와 흐루쇼프의 모함'이라고 분통을 터트리며 회고록에 직접 반박한 내용들이다.[29] 쿠즈네초프는 분노를 넘어 흐루쇼프의 거짓 주장을 해군 동지들까지 받아들인다며 이러다 사후에 복권되는 대신 전쟁 기간 동안 세운 전공들까지 왜곡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가장 슬픈 건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가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고 후대에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이제 결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카사토노프 제독, 쿠즈네초프 사후 복권 후 기고문 中
카사토노프 제독, 쿠즈네초프 사후 복권 후 기고문 中
쿠즈네초프는 뿐만 아니라 해군에서의 원자력 기술, 컴퓨터공학, 전자공학 및 자동화의 상용 가능성을 이해하고 높이 평가한 혁신가였다. 쿠즈네초프는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작전할 수 있는 잠수함, 해군 항공기의 현대화, 정밀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미사일 무기 개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미사일이 있으니 함선, 특히 돈이 많이 드는 대형 함종은 하등 쓸모가 없다며 여러 함종으로 어우러진 균형 잡힌 함대를 추구하던 쿠즈네초프를 구세대적이라고 모함하고 1959년 거의 완성이 다 되어가던 순양함 7척을 폐기시켰다. 또한 흐루쇼프는 독소전쟁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해병대를 폐지[30]시키고 스탈린그라드급 순양전함 3척도 취소시키며 본격적인 해군 축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러한 해군 축소는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 해군에 해상 전력이 속절없이 밀리면서 한계가 드러나고 말았다.[31] 흐루쇼프는 이후 현재 소련 해군은 미 해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카신급 구축함 프로젝트를 급히 진행시키고 해병대를 부활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흐루쇼프를 실각시킨 1964년 10월 총회의 이후 열린 군사회의에서 이반 코네프 원수는 흐루쇼프 시대의 군대 발전에 대해 혹평하며 해군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순양함 해체, 빈약한 수상 함대, 대잠전에서 잠수함을 지원할 항공기 부족 문제는 즉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두루 갖춘 강력한 해군 함대가 필요합니다." 코네프는 이어서 흐루쇼프가 능력이 아닌 인맥에 따라 인선을 배치했다며 쿠즈네초프의 몰락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누군가는 질병을 이유로, 누군가는 나이를 이유로, 누군가는 해군 건설과 같은 견해가 흐루쇼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32] 해고되었습니다."
해군 총사령관이던 고르시코프도 흐루쇼프의 해군 축소가 강제적이었으며 자신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으나, 쿠즈네초프는 흐루쇼프가 실각하자마자 태세전환을 시전한 고르시코프를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고르시코프는 가슴을 치며 자신은 해군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흐루쇼프가 순양함을 없애버렸다고 주장했다. 결국 고르시코프가 그 모든 걸 묵인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흐루쇼프에게 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문서나 요청서는 대체 어디 있나?
전후 회고록 «Крутые повороты» 中
전후 회고록 «Крутые повороты» 中
그의 이름을 붙인 항공순양함 함급인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 중항공순양함이 2척 건조되었다. 1번함인 어드미럴 쿠즈네초프함은 아직도 러시아 해군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고, 제2번함인 바랴그함은 미완성 상태로 준공비용도 없고 완공하더라도 운용비가 나올 구멍이 없어서 우크라이나에서 방치되었다가 중국에서 해상 카지노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팔려갔다가 중국 해군이 개조하여 랴오닝함이라는 함명으로 취역시켰다.
비슷한 사례로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인 손원일 제독이 있다.
해군의 아버지답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해군대학교에 쿠즈네초프의 이름이 붙어있다. 쿠즈네초프 해군대학은 이미 임관한 해군 장교들이 고급 지휘관 교육을 수료하러 가는 곳으로, 장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와는 다르며 해군 사관학교엔 쿠즈네초프의 이름이 붙지않았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을 여러번 지낸 만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태평양함대 본부 옆에 쿠즈네초프의 흉상이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태평양함대 역사 박물관[33]에도 쿠즈네초프의 명패와 동상이 있다.
4. 여담
- 1912년 8살 때 학교에서 배운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보로디노'라는 시에 깊은 감명을 받고 모두의 앞에서 낭송하고 싶어 아버지를 설득해 집 안의 벽을 허물고 극장같이 만든 뒤 낭송회를 열었다. 방문한 마을 주민들이 러일전쟁 경험담과 러시아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일종의 역사 행사가 됐고, 덕분에 쿠즈네초프는 소원대로 집밖까지 인파가 모인 가운데 성공적으로 시를 낭송할 수 있었다. 추진력과 행동력도 그렇고, 스탈린이 쿠즈네초프를 마음에 들어하게 된 계기도 연설 때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웅변이 뛰어났던 걸로 보인다.
- 육군 장군 주코프와 함께 스탈린에게 할 말은 다 하던 완고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전후 스탈린과 해군 재편으로 언쟁을 하면서 "저한테 불만 있으시면 저를 해임 시키십시오."라고 했을 정도...[34] 스탈린에게 "자네는 왜 항상 나와 논쟁하려고 하는가? 사실 오래전부터 정보기관들이 자네를 처리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내게 요청해왔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런 성격 탓에 불가닌, 흐루쇼프를 비롯한 주요 정치부들과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35] 일화로 1951년 해군장관으로 재임했을 때 스탈린에게 보고를 하러 가니 말렌코프가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리지 말라."라며 좋은 말만 할 것을 제안 했지만, 아첨하느라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여긴 쿠즈네초프는 곧이곧대로 해군 조선 문제에 관해 부정적인 보고를 올리고 스탈린의 기분을 망쳐 그날 회의를 갑분싸로 만들어 버렸다. 소련 정치부가 쿠즈네초프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잘 알 수 있는 일례. 본인도 회고록에서 이 점을 지적하며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발언할 때 좀 더 부드럽게 말할 것이라고 후회를 보였다.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 그러나 이력을 보면 스탈린이 쿠즈네초프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쿠즈네초프는 대숙청과 전쟁 기간동안 감옥에 갈뻔한 동지들을 수차례 구해줬는데,[36] 이는 쿠즈네초프의 용기도 있었지만 스탈린의 지지와 허락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첫 번째 탄압 때도 스탈린의 입김으로 강등에서 그쳤으며 다시 해군장관으로 재임명된 것을 보면 스탈린은 쿠즈네초프를 해군 수장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7] 쿠즈네초프도 "전쟁동안 한번도 크게 질책받은 적 없었다."라고 했으며 애초에 스탈린 본인이 "정보기관들이 자네를 체포하려는 걸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 육군과 마냥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샤포시니코프, 부됸니는 어린나이에 인민위원이 되어 20살 이상 차이나는 쿠즈네초프를 귀여워하며 호의적으로 대했고[38] 총참모장을 지내 여러 방면으로 협업해야 했던 바실렙스키와 안토노프와도 우호적인 사이였다. 그외 육군 장성들과도 만나면 적당히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별 문제없는 비즈니스적인 사이였다. 그 주코프도 전후에 열린 한 회의에서 주코프가 실수한 일에 대해 모두가 비판할 때 쿠즈네초프만 유일하게 침묵해서[39] 쿠즈네초프에게 따로 감사인사를 표한 적도 있었다.[40]
-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41]
- 자신의 첫 복무지이자 함장을 지냈던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1970년, 전쟁 중 운 적이 있냐는 부됸니 원수의 물음에 '체르보나 우크라이나'가 침몰했을 때 미안함과 슬픔에 눈물을 흘렸었다고 고백했다.
- 고려인 강제이주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극동에 주둔해 있었다. 전후 한 크렘린 회의에서 극동 배급문제에 대해 얘기하며 "옛날 극동에 중국인들이 있을 때는 시장에 다양한 야채들이 있었다."라고 발언했다. 스탈린은 "중국인들이 어디 갔길래?"라고 반문했고 쿠즈네초프는 당시 자신이 보았던대로 "(강제이주때) 고려인들과 쫓겨났다."고 답했다. 대답을 들은 스탈린은 그때 중국인들이 아닌 고려인들만 이주했다, 그것도 모르냐며 쿠즈네초프에게 길길이 화를 냈고 굳이 스탈린과 싸울 필요성이 있을만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쿠즈네초프는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쿠즈네초프는 이 일화를 '스탈린의 말이라면 거짓도 진실이 되던 시절'이라고 회고록에 풀며 강제이주 당시 고려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쫓겨났다는 것을 증언했다.
- 평생 마음 속에 품고다닌 좌우명은 "노동자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리라!"였다고 한다. 공산주의 사상을 모범적으로 따른 쿠즈네초프는 사람간의 계급이 없다고 믿었고 덕분에 스탈린을 비롯한 정치부 위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모두에게나 평등하고 권위적이지 않아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하가 격식없고 무례하게 굴면 화를 내긴 했는데,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어서가 아니라 군의 질서와 사회규범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노했다. 쿠즈네초프는 이에 대해 여러번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하기도 했다. "장교, 병사 등 위치는 다를지 몰라도 우리는 모두 같은 소비에트의 인민이며 이러한 의식이 모든 장교의 행동, 생각에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장교란 때로 냉철하고 고압적으로 굴어야 하지만 말과 행동에 오만함과 무시가 깔려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지휘관은 조국을 대신하여 단호하게 명령을 내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모든 부하들에게 항상 진실되어야 한다."
- 늘 침착함을 유지하고 단 한번도 언성을 높인적 없으며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한 교양인이었다. 쿠즈네초프는 전시에 실책을 저지른 장교들도 기껏해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킬 뿐 크게 벌하지 않았으며 NKVD가 해군 장교를 벌하려 하면 늘 최선을 다해 막으려 애썼다. 이러한 성정은 갈레르와 알라푸조프를 위시한 해군 참모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쿠즈네초프 치하 소련 해군 지도부는 매우 자비로운 편이었다. 병사나 하급 장교가 쿠즈네초프를 접견하러 왔을 때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 측근 참모가 "쿠즈네초프는 친절한 사람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안심시켜줄 정도였다.
- 위와 같은 이유로 잘못을 저지른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쿠즈네초프가 입버릇처럼 달고다니던 말은 "해군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제게 책임이 있습니다."였다. 1946년 어느날 해군에서 실책이 벌어져 국방 인민위원 불가닌이 쿠즈네초프를 질책하고 쿠즈네초프는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고있을 때 해군 정치부장 이반 로고프가 "쿠즈네초프가 사전에 방지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라며 쿠즈네초프의 잘못이 맞다고 증언했다. 그 말을 들은 즈다노프는 오히려 로고프에게 "그럼 자네의 책임은? 자네는 왜 그 자리에 있는 건가?"라며 화를 냈고 일주일 후 로고프는 발트해로 전출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 회고록에서 항모전단과 대규모 건조 계획을 추진한 이유로 '미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었음을 밝히고 있다. 쿠즈네초프는 비핵화를 믿지 않으며 물론 안그랬으면 좋겠지만 언제든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예편당한 후 금전적인 문제에 시달렸다. 저축한 돈이 없었고 연금[42]이 나왔지만 4인 가족[43]이 먹고살기엔 충분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위 시선 때문에 육체노동도 못해 1년 동안 영어를 배운 뒤[44] 장당 60루블의 영문 군사 기사 번역 일을 했다. 다행히 말년엔 금전적으로 안정되었다고 언급한다.
- 금전 문제로 집도 더 작은 곳으로 이사해야 해서 마침 폴란드에서 돌아와 더 큰 집을 찾고 있던 로코솝스키 원수와 집을 교환했다. 그렇게 교환한 집은 트베르스카야 거리 9번의 아파트로, 건물 입구 외벽에 이곳에 살았던 유명인들의 명패가 걸려있는데 그중 쿠즈네초프의 명패도 있다.[45] 지나갈 일이 있으면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 그러나 쿠즈네초프는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로 집보다 모스크바 외곽 라즈도리 마을에 있는 다차에서 여생을 보냈다.[46]
- 생전 출판한 회고록들이 큰 성공을 거두며 소련 작가 협회에서 입회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며 웃으며 거절했다.
5. 진급 이력
- 1935년 11월: 중령
- 1937년 8월 15일: 대령
- 1938년 2월 2일: 소장
- 1939년 4월 3일: 상장 (флагман флота 2-го ранга)
- 1940년 6월 4일: 상장 (адмирал)[47]
- 1944년 5월 31일: 대장 (Адмирал флота)
- 1945년 5월 25일: 원수 (Адмирал флота)[48]
- 1948년 2월 10일: 소장 (강등)
- 1951년 1월 27일: 중장
- 1953년 5월 13일: 원수 (Адмирал флота)
- 1955년 3월 3일: 원수 (Адмирал Флота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49]
- 1956년 2월 17일: 중장 (강등)
- 1988년 7월 26일: 원수 (사후 복권)
6. 대중매체
- 2024년에 8부작 전기 드라마 <쿠즈네초프 제독>이 제작되어 로시야 1에서 방영되었다.한글자막 제작사는 러시아 대표 영화 스튜디오 모스필름으로, 쿠즈네초프 역은 이고르 페트렌코가 맡았다. 드라마에서는 전처가 장남 빅토르를 키우며 쿠즈네초프와 만나고 현 아내와 미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쿠즈네초프가 빅토르의 양육권을 가져가 키웠으며 이혼한 전처와는 다시는 보지 않았고 재혼한 아내 베라와 가정에 충실했다.
7. 관련 문서
[1] 누군지 알려진 바 없음.[2] 전처 소생.[3] 1956년 중장으로 3계급 강등당하고 강제로 예편당했으나 사후 14년 만인 1988년에 다시 원수 계급으로 복권되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4] 위로 1901년생 형 사바티가 있다. 원래 1900년에 태어난 첫째 니콜라이가 있었지만 1년을 채 가지 못하고 죽었고 니콜라이라는 이름은 막내 쿠즈네초프가 이어받게 된다.[5] 생도 수도 별로 없어 식사시간에 식당에 가면 식당의 절반만 찼다고 한다.[6] 2차 세계대전 때 발트함대 사령관.[7] 1940년 5월 쿠즈네초프의 도움으로 석방됐다는 해군사관학교 동기의 기록을 보면 태평양함대 사령관 이후 해군 인민위원이 됐을 때도 동지들을 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8]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까지 남기고 갔다.[9] 청혼을 받은 베라는 화를 내며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당신에게 이미 아들이 있다는 걸 압니다!"라고 거절했다. 당황한 쿠즈네초프는 "나는 내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테지만 아들이 우리 사이에 문제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베라의 손에 1935년 여름에 작성된 이혼 증명서를 쥐여줬다.[10] ПОСТАНОВЛЕНИЕ от 22 июня 1939 г. № 924.[11] директивой НК ВМФ № 9760 от 23 июня 1939 г.[12] 소해함이나 호위함, 상륙정 등 상륙 작전에 필요한 함선 위주였다.[13] 회의가 끝날 기미가 안보이자 미국 킹 제독은 뭐든 좋으니 빨리 하고 빨리 끝내자고 피로를 호소했다.[14] 지루한 과정의 연속이었을 뿐 신체적 위해는 없었다.[15] 아바쿠모프에게 체포당한 해군 장교 중 한 명은 조사 과정에서 구타로 인해 사망하기도 했다. 만약 스탈린이 선을 긋지 않았다면 쿠즈네초프도 가혹한 최후를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쿠즈네초프는 아바쿠모프의 이야기를 뒤늦게 듣고 '내가 그렇게 위험한 상황인지 몰랐다.'라고 회고했다.[16] 1947년 태평양함대가 제5함대와 제7함대로 나뉘어졌다가 1953년에 다시 태평양함대로 통합되었다.[17] 이러한 쿠즈네초프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처신을 못했냐며 탄식하자 쿠즈네초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잘못된 견해를 지지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못 박았다.[18] 4년형을 받은 갈레르는 1950년에 옥중사망했다.[19] 전후 해군만 아니라 소련군 전체에서 체포와 숙청이 진행되었다. 유명한 문학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도 전후 체포되어 수감된 해군 장교가 나온다.[20] 육군 장군들은 3월 11일에 원수 및 병과원수로 대규모 진급했다.[21] 원래는 2차 대전 종전후 3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로부터 전쟁배상조로 받아낸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이었다. 당시 소련은 신형이었던 비토리오 베네토급을 원했지만 당연히 영/미의 반대로 구형전함(1차대전형 전함으로 1930년대말 이탈리아가 대대적으로 마개조했다. 당시 마개조한 이유도 프랑스 해군이 독일의 장갑함(그라프 쉬페급)건조에 대응해 됭케르크급을 건조하자 이탈리아 해군도 됭케르크급에 대항할 신형함이 급히 필요한데 신형함 건조에는 시간이 모자라다고 판단, 기존의 구형전함들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것이었다.)을 받았는데 항구에 정박중 불가사의한 이유로 폭발, 함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는데 전복위험이 없다고 본 함장 때문에 승조원들의 대피가 없었고 이 때문에 함이 갑자기 전복되는 바람에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고 한다.[22] 두 번째 탄압의 모든 과정은 쿠즈네초프를 배제한 채 이루어졌으며 중장 강등과 예편이 결정된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쿠즈네초프는 첫 번째 탄압 땐 명분이라도 있었다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23] 부됸니 원수는 "다들 스탈린을 터무니없이 모욕적으로 묘사해놨는데 이 회고록의 스탈린은 매우 사실적이다."라며 쿠즈네초프의 회고록이 객관적이라고 칭찬했다.[24] 직접적으로 이름이 거론되며 까인 건 이사코프와 고르시코프. 동기출신 절친 트리부츠도 쿠즈네초프 비판에 목소리를 보태며 배신했으나, 쿠즈네초프는 오히려 "트리부츠도 힘든 상황이다."라며 친구를 두둔했다. 실제로 쿠즈네초프 손절이 종용되는 분위기였고 의리를 지킨 제독들은 각종 불이익을 당했다.[25] 오해하면 안될 것은 쿠즈네초프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으며 자신이 말한 개선점들이 실현되는 것이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발언들을 했다는 점이다. 너무 모범적인 공산주의자였다보니 만민평등에 의거해 스탈린을 '지도자'로 표현하는 것도 싫어했다.[26] 1970년에 쿠즈네초프를 만난 부됸니 원수가 전해주기를, 쿠즈네초프의 일에 대해 책망하니 "저도 흐루쇼프에게 당했습니다!"라며 성을 냈다고 한다.[27] 은퇴 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오래도록 우정을 이어나갔고 바실렙스키는 쿠즈네초프 사후에도 그의 복권 요청 청원서를 썼다. 쿠즈네초프는 "주코프는 뛰어난 야전 사령관이었지만 참모는 영 아니었다. 반면 바실렙스키는 타고난 참모장이었다."라고 평가했다.[28] 당시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도 쿠즈네초프의 복권에 대해 심드렁한 반응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지가 아니었다면 사후 복권도 힘들었을 것이다.[29] 러시아어로 관련 내용들을 검색하면 모두 사실임을 알 수 있다.[30] 소련 해군 소속 해병대들은 꾸준히 주요 육지 전투에 참전하며 육군을 도왔고, 심지어 베를린 전투에도 참여해 대체 어디서 왔냐며 육군들을 놀라게 했다. 대조국전쟁을 묘사한 그림에서 해군 보병들은 빠지지않으며 소련 해병대의 위상은 해군복이었던 텔냐시카가 러시아군을 상징하는 옷으로 자리매김한 것만 봐도 알수있다.[31] 물론 해상 전력이 밀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커티스 르메이 대장에 의해 핵전쟁이 벌어졌을지도 몰랐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32] 쿠즈네초프가 예편당한 비공식적인 이유였다. 당연히 법적으로는 이런 이유로 제독을 쫓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쿠즈네초프는 '정말 이 이유가 다라면 내 강등과 예편은 불법',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없애버리다니, 흐루쇼프 본인이 그렇게 비판하던 스탈린 독재 시절이랑 뭐가 다른가?'라고 호소했다.[33] 한국 구글맵에는 육군역사박물관이라고 표기돼있다.[34] 이 발언을 한 1년 뒤 1947년에 진짜 해임된다.[35] 쿠즈네초프는 회고록에서 첫 번째 탄압은 불가닌이 주도했고, 두 번째 탄압은 주코프와 흐루쇼프가 중심이었다고 서술했다.[36] 대표적으로 고르시코프와 레브첸코[37] 갈레르와 이사코프같은 고참들을 제치고 34살에 불과했던 쿠즈네초프를 해군 인민위원에 앉힌 것도 스탈린이었다. 그러나 쿠즈네초프는 회고록에서 "나는 한번도 높은 자리를 원한적 없었으며 그저 함선의 함장이면 충분했다."라며 갑작스러운 출세가 반갑지 않았음을 고백했다.[38] 부됸니와 쿠즈네초프가 사망한 이후에도 유족들끼리 계속 교류를 이어나가며 친하게 지냈다.[39] 주코프가 비판받게 된 일의 내막도 잘 모르고 다른사람의 말만 듣고 비판할 수는 없어 침묵했다고 한다.[40] 쿠즈네초프는 그때 내 객관적인 행동에 감사했으면서 주코프 본인은 흐루쇼프와 친분을 다지기 위해 자신과 정 반대로 행동했다며 전후 회고록에서 날카롭게 비판했다.[41] 독일어는 원서를 읽는 정도의 수준이었다.[42] 군인 연금도 아닌 개인연금이었다.[43] 장남 빅토르는 장성했으나 차남과 삼남은 10대 학생이었다.[44] 이미 알고 있던 프랑스어, 독일어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45] [46] 쿠즈네초프 말년 영상에서 나오는 2층짜리 목조주택이 이 다차다.[47] 1940년 5월에 계급명이 개칭됨[48] 1945년 5월 25일 Адмирал флота가 소비에트 연방 원수와 동급으로 승급됨.[49] Адмирал флота가 개칭됨. Адмирал флота는 사라졌다가 1962년 대장 계급으로 부활함.[50] 배우 이고르 페트렌코는 국내에서 영화 즈베즈다(2002)의 주인공으로 유명한데, 우연히도 베르비츠키 역시 영화 즈베즈다(1949)에서 주인공을 맡았었다.[소련] 전설함장으로 쿠즈네초프를 구매할 수 있다. 함장 스킬 중 '승리의 의지'가 있는데 불타는 전함도 살리는 기적을 행하기 때문에 쿠즈네초프의 '소뽕의 의지'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