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데이 레브첸코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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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20대 발트함대 사령관 고르데이 레브첸코 Горде́й Ле́вченко | Gordey Levchenko | |||
본명 | 고르데이 이바노비치 레브첸코 Горде́й Ива́нович Ле́вченко Gordey Ivanovich Levchenko | ||
출생 | 1897년 1월 20일 | ||
러시아 제국 볼린현 두브롭카 (現 우크라이나 지토미르주 즈뱌겔군 두브롭카) | |||
사망 | 1981년 5월 26일 (향년 84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제20대 발트함대 사령관 | ||
1938년 1월 ~ 1939년 4월 | |||
초대 제4함대 사령관 | |||
1946년 2월 ~ 1947년 3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학력 | 쿠즈네초프 해군대학교 (졸업) | |
복무 | 러시아 제국 해군 | ||
1913년 ~ 1917년 | |||
소비에트 해군 | |||
1917년 ~ 1960년 | |||
최종 계급 | 상장 (소비에트 해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 | ||
주요 서훈 | 레닌훈장 (4회) 우샤코프 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2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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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해군의 제독.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897년 평범한 농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 마을의 교구 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부터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1914년 크론슈타트의 해군 소년 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9월부터 1915년 1월까지 순양함 '그로모보이'에서 수병으로 복무했다.1916년 크론슈타트에서 포병 부사관 과정을 이수하고 순양함 '아드미랄 마카로프'에서 수병으로, 훈련함 표트르 벨리키에서 포수로, 구축함 '자비야카'에서 포병 부사관으로 복무하며 1차세계대전에도 참전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함선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하고, 10월 혁명엔 구축함 자비야카의 수병 30여명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해 겨울 궁전 습격과 전신국 점거에 기여했다.
2.2. 러시아 내전과 전간기
1918년 해군 지휘관 양성 과정 수료를 시작했다.1919년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는 생도 연합 부대의 일원으로 니콜라이 유데니치 장군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에도 참여했다. 1919년 6월 30일에 해군 지휘관 양성 과정이 정식 학교로 재구성되었고, 레브첸코는 1922년 이 학교의 첫 졸업생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발트함대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구축함 '카피탄 이질메티예프', 구축함 '브사드닉', 포함 '크라스노예 즈나먀'를 거치고 1923년부터 1925년까지 해군 고급 지휘관 특별 과정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받은 뒤 1925년부터 전함 '파리즈스카야 콤무나'에서 수석 포병으로 복무하고 1928년에 구축함 '아르툠'의 함장으로 임명된다. 1929년에 구축함 '보이코프'의 함장을 지낸 뒤 해군대학의 고급 지휘관 과정을 수료했다.
1930년 순양함 '아브로라'의 함장으로 임명되었고, 1932년 1월부터 1933년 1월까지 카스피해 전단 사령관을 지냈다.
1933년 1월부터 발트함대 전함 여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1935년 8월 훈련 중 바르스급 잠수함 'B-3'가 침몰해 강등당했다.[1]
사건이 일어난 1935년 8월 이후 전출당해 흑해함대의 구축함 사단장과 여단장을 역임하고 1937년 다시 발트함대로 돌아와 총참모장을 지낸뒤 1938년 1월부터 1939년 4월까지 발트함대 사령관을 지냈다.
1939년 4월부터는 소련 해군 인민위원부의 공학 및 건설 부서를 관리했다.
2.3. 독소전쟁
전쟁이 터지자 레브첸코는 해군 대표로 흑해 전선에 파견되어 1941년 여름과 가을 내내 흑해에 머물며 오데사, 니콜라예프, 세바스토폴 방어에 참여했다.1941년 10월 22일, 스타프카의 명령으로 크림반도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부사령관은 파벨 바토프) 제51군, 해안군(Приморская армия), 흑해함대를 지휘하게 됐다. 당시 독일의 11군이 이미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크림반도로 침투한 상태였으며 방어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아있었다. 10월 23일 레브첸코는 보론초프카에서 반격을 지시했지만 독일군의 진격을 단 이틀만 지연시킨 게 고작이였다. 10월 26일 독일군은 공격을 제개했고 28일 방어선을 뚫고 소련군의 작전 지역까지 들어왔다. 해안군은 세바스토폴로 후퇴하고 제51군은 케르치로 철수했다. 11월 4일 레브첸코는 케르치 방어 지역을 구성하나 독일군을 저지하거나 케르치 방어를 조직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케르치는 큰 피해를 입었고 11월 6일 소련군의 마지막 부대가 타만 반도로 철수, 11월 16일 케르치는 독일에게 함락당한다.
1941년 12월 1일 레브첸코는 케르치를 함락시킨 혐의로 체포되었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51군을 지원하러 왔었던 그리고리 쿨리크의 실패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12월 18일 NKVD의 회의 결과 레브첸코에게 강제 수용소 10년형과 5년간의 계급 및 훈장 박탈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소련 해군 인민위원 니콜라이 쿠즈네초프는 이 선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레브첸코를 변호했고, 스탈린에게 레브첸코의 구제를 개인적으로 부탁까지 한다. 이에 내무부 인민위원 라브렌티 베리야는 레브첸코가 이미 자신의 죄를 전부 인정했다고 반박했다. 결국 레브첸코는 재판에 회부되기로 결정된다.
1942년 1월 25일,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소 재판 결과 레브첸코에게 변함없이 징역 10년형이 선고된다. 쿠즈네초프는 다시 한번 레브첸코를 자신의 보증 하에 석방시켜 잘못을 갚을 기회를 제공해줄 것을 청원했다. 이러한 쿠즈네초프의 노력으로 1월 31일, 소련 최고회의 법령에 따라 레브첸코는 사면되었고 대령으로 강등당했다.
1942년 3월부터 레닌그라드 해군 기지를 지휘하고 6월부터 크론슈타트 해군 기지를 맡으며 봉쇄를 뚫고 레닌그라드에 수송과 보급을 지원했다.
1942년 7월 8일 핀란드 만의 솜메르스 섬을 점령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지휘했으나 상륙부대의 전멸과 8척의 보트 침몰로 끝이 났다. 쿠즈네초프는 이 작전에 대해 '준비가 불만족스럽다'라고 평가했고, 지휘관에 대해 '결단력이 부족하다'라고 언급했다.
1944년 4월 소련 해군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시기 레브첸코는 영국에서 소련으로 인도될 함선들을 이끌고 오라는 명령을 받아 4월에 영국으로 가 소련 승조원들의 신장비 훈련과 호송을 이끌었다. 이렇게 해서 소련으로 온것이 리벤지급 전함 아르한겔스크와 오마하급 경순양함 무르만스크 등등이다.
1945년 쿠즈네초프와 함께 포츠담 회담에 참가했다. 독일 함선 분배 문제를 논하는 해군 회의 결과, 독일 함선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3개의 그룹으로 나눈 다음 랜덤으로 뽑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함선 분배 위원회가 설립되고 레브첸코는 소련 대표로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독일 함선을 세 그룹으로 나누는 것도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우리는 삼국 공동 위원회를 설립해야 했고, 소련에서는 레브첸코 제독, 미국에서는 페리 제독, 영국에서는 마일스 제독이 참여했다. 위원회는 함선의 구성을 명확히 하고, 어떤 배들이 정상적인 상태이며 어떤 배들이 수리가 필요한지를 파악한 다음 배들을 균등하게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 후 제비뽑기가 시작됐고 아무도 불만이 없었다. 모두가 각자 뽑은 것을 그대로 가지게 됐다.
레브첸코가 모스크바에 보고하러 도착했을 때, 나는 오랜 지인인 영국 제독 마일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물었다.
"그는 정상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그가 먼저 자신의 모자를 내밀었고, 우리는 그 모자에 종이를 넣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의 회고록 «Курсом к победе» 中
레브첸코가 모스크바에 보고하러 도착했을 때, 나는 오랜 지인인 영국 제독 마일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물었다.
"그는 정상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그가 먼저 자신의 모자를 내밀었고, 우리는 그 모자에 종이를 넣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의 회고록 «Курсом к победе» 中
2.3.1. 전후
1946년 2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제4함대 사령관을 지냈다.그리고 1947년 12월, 니콜라이 쿠즈네초프가 간첩 혐의로 체포당해 재판을 받게 되는데 레브첸코는 이 재판에서 재판 위원으로 참여한다. 참고로 재판 위원들은 쿠즈네초프의 유죄를 지지하는 측이었다. 레브첸코는 그것도 모자라 쿠즈네초프가 포츠담 회담 때 지내던 숙소의 모든 가구들을 가져갔다는 허위 진술까지 하면서 쿠즈네초프의 유죄에 힘을 실었다. 1942년에 쿠즈네초프가 레브첸코를 징역 10년형에서 구해준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일이다.
이후 레브첸코는 해군 수석 감찰관으로 지내면서 1951년 스탈린에게 해군장관 유마셰프 제독과 해군차관 골로프코 제독을 비판하는 문서를 보낸다. 유마셰프를 탐탁치 않아했던 스탈린은 유마셰프를 즉시 해임시키고, 쿠즈네초프를 해군 장관으로 재임명했다. 돌아온 쿠즈네초프 제독은 레브첸코를 비롯해 자신을 배신한 제독들에게 따로 보복을 가하지는 않았다.
1958년 소련 국방부 감찰관 겸 고문으로 지내다 1960년 9월 건강 문제로 은퇴한다. 1981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사망 후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3. 여담
- 그를 기리기 위해 우달로이급 구축함 6번함이 아드미랄 레브첸코(Адмирал Левченко)로 명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