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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3대 내무인민위원 라브렌티 베리야 Лавре́нтий Бе́рия | Lavrentiy Beria | |||
이름 |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 Лавре́нтий Па́влович Бе́рия Lavrentiy Pavlovich Beria | ||
출생 | 1899년 3월 29일 | ||
러시아 제국 캅카스 총독부 쿠타이스현 수훔구 메르헤울 (現 압하지야 굴리프시군 메르헤울리) | |||
사망 | 1953년 12월 23일 (향년 54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모스크바 연방시) | |||
묘소 | 모스크바 남부 행정구 돈스코예 묘지 | ||
재임기간 | 제3대 내무인민위원 | ||
1938년 12월 ~ 1945년 12월 | |||
서명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Lavrentiy_Beria_Signature.svg | width=15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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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파벨 후하예비치 베리야 어머니 마르타 비사리오노브나 자켈리 | ||
배우자 | 니나 게게치코리 (1906년 ~ 1991년) | ||
자녀 | 세르고 베리야 | ||
학력 | 바쿠 폴리텍대학[1] (졸업) | ||
신장 | 172cm | ||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 ||
복무 | 내무인민위원부 | ||
1938년 ~ 1953년 | |||
최종 계급[박탈] | 원수 (내무인민위원부) | ||
주요 서훈[박탈] | 사회주의노력영웅 레닌훈장 (5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적기훈장 (5회) 노력적기훈장 (3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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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 소련의 관료.대숙청 시기 비밀경찰 NKVD의 총수로서 니콜라이 예조프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자 카틴 학살을 계획한 책임자로 히틀러에게 하인리히 힘러가 있었다면 스탈린에게는 베리야가 있었다.
2. 생애
2.1. 초기
러시아 제국 수훔구의 메르헤울(Мерхеул, 현 메르헤울리·მერხეული)에서 조지아계 소수민족인 메그렐인 출신이었던 마르타 자켈리와 파블레 베리아(파벨 베리야)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훔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3월에 볼셰비키에 합류한 베리야는 1919년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보안대에서 일했다.어렸을 때는 일부러 친구의 물건을 훔친 뒤 친구들이 곤란해 할때 자기가 물건을 찾아주면서 명탐정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이때부터 악마 기질이 다분했다.
학교 졸업 이후 1920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창설한 비밀경찰 체카에 가입한 베리야는 조지아의 멘셰비키를 제거하는 작업에 깊숙히 관여했는데 베리야의 임무는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 반동분자의 말살과 제거였다.[4] 그러다가 1922년에 체카의 후신인 GPU 조지아 지부장 대리가 된 베리야는 1926년에 정식으로 지부장이 된 후 처음으로 이오시프 스탈린과 만났다.
스탈린의 다차 방문 당시 그의 딸 스베틀라나를 무릎에 앉힌 베리야[5] |
"난 스탈린 동지께서 싫어하신다면 이 동네의 모든 나무를 다 파내버릴 테다!"[6]
라고 외쳐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재밌게 본 스탈린은 베리야가 귀여웠는지 나중에 모스크바로 불러들인다. 또 스탈린의 눈에 잘 보인 덕분인지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는다.이후 베리야는 스탈린과 동맹을 결성한 후 정권의 실세가 되었다. 1924년 8월 조지아에서 민족주의자들이 공산당에 반대해 폭동을 일으키자 베리야는 1만 명 이상을 처형해 반란을 잠재웠다.[7] 베리야는 이 일로 적기훈장을 수여받고 비밀경찰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베리야는 조지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고 조지아 공산당에서의 지배권을 장악한 뒤 1934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취임하여 중앙정치계에 발을 내디뎠다. 재밌는 것은 베리야는 조지아에서 자신의 독립왕국을 경영하는 것을 꽤 즐겼기 때문에 스탈린이 그를 NKVD 제1부의장에 임명해서 모스크바로 불렀을 때 불평했다고 한다. 흐루쇼프가 모스크바로 영전하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묻자 그에게 과거 스탈린이 흐루쇼프를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하자 우크라이나 당서기로 있던 흐루쇼프가 계속 우크라이나에 남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던 사례를 거론하면서 계구우후라고 대답했다고. 1935년 베리야는 스탈린이 신임하는 측근이 되어 스탈린을 가까이서 보좌하였다.
2.2. 대숙청과 제2차 세계 대전
NKVD 군관 예복을 입은 베리야 |
그가 NKVD에서 이룬 업적(?)은 대단했다, 그는 일련의 생산라인처럼 피의자를 잡아들이면 24시간 고문하고 구타하거나 코렁탕을 이용해서 어떤 말이든지 만들어 냈다. 심지어 피해자가 평생 한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술술 불게 만들었다. 사디스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베리야는 이런 고문 과정에 자주 참석하여 직접 구타와 가학행위를 즐겼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측근들에게 동참할 것을 강요했고 그들의 치부를 공유하여 절대로 자신을 배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필요가 있는 인물들에게는 일명 '죽음의 집'이라 불리는 곳으로 초대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우연히' 치명적인 독극물이 묻어 있는 지팡이에 긁혀 죽어야 했다.
그러던 중 1934년에 당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에게 암살당하고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해 대숙청을 시작하자 베리야는 이것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기회로 삼았다. 1937년 6월 베리야는 연설에서 "인민의 의지, 레닌과 스탈린의 당의 의지에 반역하는 자들은 용서없이 분쇄할 것이며 우리들은 이를 적에게 알릴 수 밖에 없다"라고 발언했다.
다만 대숙청은 알려진 바와는 달리 베리야보다는 전임자 니콜라이 예조프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숙청 작업이 어느 정도 완료된 후 스탈린이 그 숙청 책임자 예조프를 숙청할 때 앞장서서 예조프의 자리를 꿰찬 것도 베리야였다. 웃기는 건 예조프도 전임자 겐리흐 야고다를 숙청하고 그 자리를 꿰찼다는 것.
하지만 대숙청을 주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면피를 받을 수 없는 것이 베리야는 예조프를 규탄하면서 공안기관의 가혹행위를 시인했지만, 베리야 휘하에서도 체포와 처형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폴란드와 발트 3국에서 벌어진 현지 엘리트 및 민족주의자의 처형과 암살은 모두 그가 주도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예조프처럼 무식하게 눈에 확 보이도록 엄청나게 죽인 것이 아닐 뿐, 베리야가 죽인 사람 역시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라브렌티 베리야의 화려한 업적 중에는 유대인 학살도 들어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스탈린 역시 반유대주의자였고 베리야는 그를 대신해서 소련 관료 중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숙청했다. 또한 스탈린과 자신에게 반대하는 인물을 가려내기 위해 소련 내의 모든 우편물을 감시하였다고 하며,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반체제인사들을 모조리 강제수용소로 집어넣어 몇 년동안 강제노역을 시켰는데, 그렇게 강제로 수용된 사람이 무려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8]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 원수 계급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가 경찰 조직이 군에 흡수되면서 경찰 총수였던 베리야 역시 군 원수로 추대된 이후로 소련 경찰, NKVD나 KGB 인물들은 모두 군 계급과 동일한 계급을 받는다. 베리야는 수용소 죄수를 노동한 노예노동과 전세계에 퍼져있는 스파이망을 동원한 정보수집으로 나름대로 독소전쟁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이나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날짜를 빼돌렸을뿐만 아니라[9] 나치 독일에서 소련을 위한 스파이망인 레드 오케스트라를 구축했고, 연합국에 대한 첩보활동도 개시하여 처칠, 루즈벨트 외에는 연합군 최고레벨도 그 존재를 잘 모르던 맨해튼 계획까지 그 전모를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극비였던 원자폭탄의 초기 청사진도 빼올 수 있었다.[10]
2.3. 냉전과 스탈린의 죽음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스탈린이 (전쟁 지휘를 위해 임시로 합의했던) 집단지도체제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되자 베리야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스탈린이 자신의 최고 측근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선 2인자인 몰로토프가 스탈린에게 서방 유화론자, 서방에 아부해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음모가라고 융단폭격을 당했고, 말렌코프도 항공산업을 잘못 이끌었다고 잘렸으며, 주코프도 좌천당하는 와중에 베리야 역시 스탈린에게 두들겨 맞았다.특히 베리야의 심복인 국가보안부 장관 메르쿨로프가 숙청당한 것이 결정타로 과거 야고다와 예조프가 숙청당할 때의 전례가 답습되는 듯 했다. 베리야는 메르쿨로프 때문에 자신이 스탈린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고 벌벌 떨었지만 스탈린이 당시에 미워해서 없애려던 사람들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아나스타스 미코얀 쪽이라서 베리야는 한동안 무사할 수 있었고 결국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하면서 베리야는 몰로토프, 말렌코프, 흐루쇼프, 불가닌 등과 함께 정권 분할에 끼어들게 되었다.
스탈린이 사망할 때, 베리야는 처음에 스탈린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마구 퍼부으면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의식을 되찾고 뭔가 의사를 표명하려 하자 하얗게 질린 베리야는 스탈린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갖은 아부를 하였으나[11] 스탈린이 다시 의식을 잃자 바닥에 침을 뱉으면서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스탈린의 임종이 다가오자 베리야는 죽어가는 스탈린 옆에서 제발 말 좀 해달라고 울부짖었고 스탈린에게 거듭 입을 맞추면서 충성심을 과시했지만 정작 스탈린이 죽자마자 흐루쇼프, 말렌코프, 미코얀 등 다른 정치국 위원들이 울고 있는 동안 싸늘한 태도로 스탈린의 경호대장 흐루스탈료프에게 자동차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여 몰래 스탈린의 별장을 빠져나가 크렘린으로 가버렸다. 이후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정부 최고인 수상, 니키타 흐루쇼프가 당의 최고인 당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맡고 새로운 과두정 체제가 들어서자, 베리야는 제1부수상이 되는 한편 기존의 국가보안성을 내무성에 통합해서 자기가 내무상을 겸함으로 소련의 정보-사회안전기관을 모두 장악하게 된다.
스탈린이 죽을 때 보인 행보와 태세 전환 때문에 베리야가 스탈린을 죽인 장본인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한때 강하게 돈 적이 있었다. 예컨대, 스탈린이 쓰러졌을 때 제일 먼저 스탈린을 살펴본 것은 말렌코프와 베리야였는데 스탈린을 살펴본 베리야는 스탈린이 코를 고는 것을 보고[12] 스탈린이 자는 줄 착각하여 스탈린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는 경호원들에게 "스탈린 동지는 그저 자고 있을 뿐인데 왜 호들갑을 떠느냐? 헛짓을 했으니 각오를 해두어라!"라고 협박을 하는 등 스탈린이 적시에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한 책임이 있긴 하다.
이것이 베리야가 스탈린을 일부러 죽게 내버려둔 것이라는 것이 음모론의 골자인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는 베리야가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다차를 싹 청소해버린 것을 두고 그가 자신의 독살의 증거를 은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몰로토프는 자신을 인터뷰한 펠릭스 추예프가 스베틀라나의 의견을 전달하면서 베리야가 독살한 것이 맞냐고 묻자,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스스로도 굉장히 의심스럽다고 하였고 "내가 동무들을 구했소."라는 식으로 자신이 스탈린을 죽였음을 암시했다고 인정했다.
심지어 니키타 흐루쇼프마저 회고록에 스탈린 사후 베리야가 "내가 그를 죽였다. 내가 그를 죽여 모두를 이롭게 했다."라고 떠벌이고 다녔다고 적어놨다고 한다. 하지만 스탈린 연구의 권위자 올레크 흘레브뉴크는 이러한 추측에 대해 낭설이라고 부정하는데, 스탈린의 죽음은 워낙 명백한 원인과 뚜렷한 사인이 있었으며 베리야의 행동 역시 측근들을 쥐 잡듯이 잡던 스탈린의 평소 행동에 비추어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후 베리야를 사형시킬 때도 기소 내용에도 스탈린에 대한 암살죄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만약 추호라도 증거가 있다면 베리야의 목을 딸 때 이만큼 좋은 핑계도 없으니 베리야 독살설이 허구라는 한 가지 정황증거가 된다. 그리고 베리야의 스탈린 독살설은 정적인 베리야를 인간쓰레기로 격하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음을 감안해야 하는데 당장 몰로토프는 흐루쇼프도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각설하고 베리야는 의외로 스탈린식 폭정을 완화하고 고문 방지법 서명, 굴라크 수용자 석방에 심지어 외국과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베리야는 심지어 동독을 해체하고 평화적이라는 보장만 있다면 독일을 통일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으며 발트 3국에 대해서 동유럽 위성국 수준의 자치를 부여하자는 말도 했다!
사실 당시 스탈린 체제의 뒤를 이을 스탈린의 심복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이런 내용들이 공감대를 이루었다. 천시받던 경공업과 농업을 부활시키고, 서방에 대한 유화책으로 전후 복구도 빨리빨리 하며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도 완화시켜서 소련도 이제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으면서도 어깨도 피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은 베리야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말렌코프도 비슷한 정책을 펼치려 했다가 실각당했고 흐루쇼프도 그걸 모토에 걸고 정국을 운영했다. 그리고 베리야가 비무장 통일 독일을 만들자고 주장한 것은 당시 과두정 체제 내부에서도 충격받을 정도로 막 나간 주장이 아니라 스탈린도 주장한 바 있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스탈린이 죽자마자 크렘린의 외교 기조가 유화적으로 변화하고 서방 세계에 화해와 협력 의사를 보냈다고는 해도 이미 냉전이 시작되고, 미 · 소 간의 긴장도가 높은 상황에서 소련 안보의 핵심인 독일을 그렇게 처리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방안이었다. 그래서 몰로토프는 대놓고 "그건 1800만 독일인을 미국 관리 하에 넘긴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독일에게 평화란 없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런 소리는 못한다."고 단언하면서 베리야를 공격했다.
아무래도 다른 경쟁자들은 이제까지 그가 스탈린 옆에서 한 짓도 있고 해서 베리야를 불편하게 여겼는데 베리야가 갑자기 평화주의자 행세를 하고 나서자 스탈린의 과오를 자기들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수령이 되려는 수작이라고 여겼다. 결국 경쟁자들은 합심해서 베리야를 실각시키고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2.4. 몰락과 최후
말년의 모습[13] |
베리야의 실책은 정보기관을 이용해 유력 지휘관을 사찰하고, 스탈린에게 고자질하는 등의 짓거리를 하여 군부의 전반적인 원한을 샀다는 점이다. 사실상 2차대전 이후 많은 소련 유력지휘관의 좌천이나 체포에는 그가 맡고 있던 정보기관이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주코프의 "비리" 혐의라는 것도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일러바친 것이라고. 주코프가 직접 나서서 그를 체포한 것이나, 주코프와는 매우 사이가 안 좋았던 코네프조차 이 점에서는 한뜻으로 군사재판에서 베리야에게 사형을 언도했을 정도면 그가 얼마나 군부 인사들에게 원한을 깊이 샀는지 짐작 가능하다. 흐루쇼프는 주코프에게 베리야 체포 임무를 맡기면서 "베리야가 귀관에게 한 짓을 생각해본다면 귀관을 믿을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 특별히 덧붙일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결국 1953년 6월 26일 각료회의 확대회의로 위장한 정치국 회의에서 흐루쇼프가 갑자기 베리야가 제국주의의 요원이며 전직 영국 간첩이라고 고발하기 시작했다. 경악한 베리야는 흐루쇼프의 손을 붙들고 "니키타, 이게 무슨 짓이오?"라고 울부짖기 시작했지만 말렌코프가 숨어있던 게오르기 주코프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키릴 모스칼렌코를 호출하였고, 두 장군이 직접 베리야를 체포했다. 덩치 큰 베리야는 힘이 셌고 무장을 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코프는 신속하게 베리야의 가방을 빼앗아 테이블 위로 던진 다음에 그의 양손을 붙잡고 "베리야, 너는 체포됐다."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베리야는 무장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너무 충격을 받아 하얗게 질려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다가 무력하게 끌려나갔다.#
베리야는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고, 테러 활동을 통하여 미제와 서방에 협력하였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14] 감방에 들어간 베리야는 자신을 몇년만 살려둔다면 큰 쓸모가 있을 것이라면서 정치국원들에게 아부하는 편지를 썼지만 흐루쇼프는 베리야의 종이와 연필을 압수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유죄가 확정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매국 행위와 서방 스파이 혐의는 날조된 것이었고 대서방 유화책에 대한 지도부의 반발이 반영된 혐의일 것이다.
사형이 선고되자 베리야는 재판장 코네프에게 무릎으로 기면서 제발 살려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고 사형장에 끌려갈 때도 이성을 잃고 통곡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죽을 때는 하도 살려달라고 울부짖어서 재갈을 물리고 총살형으로 집행했다고 한다. 결국 처형장까지 가지도 못하고 지하 처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서 뒤통수를 쏴 죽였다. 물론 이 자가 그동안 죽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할 말 없는 죽음이다.[15] 주코프는 회고록에서 죽을 때도 최악의 겁쟁이처럼 더럽게 죽었다고 베리야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3. 여담
- 생전 성추문이 상당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NKVD에 끌려간 형제를 살려 달라는 여자를 협박해서 전용 기차 안에서 강간하고 강제로 결혼했다거나[16], 소아성애 성향을 보여 NKVD 요원들을 사적으로 동원해 일반인 소녀들을 마취시켜 납치한 후 강간했다는 썰도 있다. 물론 베리야의 유족은 비열한 흐루쇼프의 술책이라며 그를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 강철권력>에서 보면 스탈린이 자신의 딸 스베틀라나와 베리야가 같이 있는 것이나 어울리는 것에 대해서 엄청 신경썼다는 내용을 보면 100%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다.
- 젊은 시절에 축구선수였는데, 실력은 영 별로였는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창립자인 니콜라이 스타로스틴에게 탈탈 털렸다. 그리고 이를 잊지 않고 복수하는데... 자세한 것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문서 참조.
- <스탈린: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에 의하면 소련 과학자 쿠르차토프와 그의 팀이 원자로 가동에 성공했을 때 너무 흥분해서 연쇄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원자로로 뛰어들어가려고 했고 카자흐스탄의 세미팔라틴스크 외곽에 있는 사막에서 마침내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을 때는 버섯구름이 피어오르자마자 4년 동안 윽박지르기만 하던 쿠르차토프를 끌어안았다고 한다. 실험중 폭발로 부상자와 사망자가 널부러져 있는 연구소 현장에서 "이 쓰레기들을 빨리 치우고 연구를 계속해라!"라고 다그쳤다던 이 악랄한 인간도 결국 스탈린의 그늘 아래 있었던 것.
- 이 자 덕에 소련은 세계 최초로 "전자장치[17] 없는 도청기"를 제조, 보유하게 되었다. 2차대전이 종결되고 냉전이 막 시작되었던 1945년, 베리야는 소련의 보이스카우트를 통해 미국의 국장[18]이 새겨진 원형 목판 벽장식을 선물하고 이 선물은 주 소련 미국 대사의 사무실 벽에 걸린다.[19] 그리고 그 안에는 러시아의 음향물리학자이자 첼리스트인 레온 테레민(Léon Theremin)[20]이 베리야의 의뢰[21]를 통해 설계한 "세계 최초의 전자장치 없는 도청기"가 안에 심어져 있었다. 이 도청기의 원리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안에 있는 도청기 내의 얇은 판이 청진기 역할을 해 대사 사무실 내의 목소리를 진동시킨다. 그 진동을 건물 밖에 주차된 비밀 밴 안에 설치된 마이크로파 발전기로 그 도청기에 일정한 마이크로파를 쏴주어 그 진동에 대한 반사파를 유발시키고, 그렇게 만들어진 반사파를 잡았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 반사파를 통해 전달된 소리를 전자적으로 변환시켜 듣는 것뿐이고, 만약 마이크로파 조사를 멈추면 장치가 비활성화되어 잡을 수 없게 된다. 이 도청기는 7년 동안 다섯 주소 미국 대사의 어깨 너머를 거쳐갔고 1952년에 결국 발각, 미국 첩보기관 휘하 연구소에서 철저히 연구/분석되어 첩보기술에서의 연구비 경쟁을 유발하였다. # 해당 도청기와 그 도청기가 숨겨진 미국 국장 벽장식은 현재 NSA 암호학 박물관에 소재되어 있다.[22]
-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의 회고에 따르면 비흡연자에 식성도 특이해서 스탈린의 파티에 가서도 음식이 너무 기름지다고 거부하고 조지아식 야채 요리를 직접 싸와서 먹었다고 한다. 술도 와인을 조금 곁들이는 정도였는데, 샐러드랑 같이 먹기 좋은 신 와인이라서 한번은 흐루쇼프가 뺏어먹더니 와인인지 식초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흐루쇼프도 회고록에서 베리야만이 스탈린의 파티장에서 절대로 스탈린의 음식을 먹지 않고 전용 음식을 먹었다고 회고했다.
- 아직 NKVD가 아닌 자캅카스에서 일하던 1930년대 압하스인 정치인인 네스토르 라코바(압하스 ASSR 중앙집행위원장)와 아르메니아인 정치인인 아가시 한잔(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해당 의혹들은 반쯤 음모론 수준이지만 각 정치인이 속한 민족 내에서는 거의 확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1. 베리야의 가족들
라브렌티 베리야의 '아내 강간설'에 대하여 니나 게게치코리[23]는 1990년에 신문기자를 초청해 직접 반박했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 집과 감옥을 오가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한 그녀의 외삼촌이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고위급 관직으로 승진하여 전근했는데, 석유공단과 체카에서 동시에 근무하던 라브렌티가 왕년의 동지였던 그녀의 외삼촌을 자주 방문하면서 니나와 자연스럽게 눈이 맞았으며, 어느 날에 데이트를 요청해서 공원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로운 정부가 석유공단의 노동자들을 외국으로 파견하여 석유를 채굴하는 기술을 배워 귀국해야 하는데, 기혼자여야 가능하므로 그녀에게 진심으로 청혼한 것이다. 때마침 니나는 외삼촌의 집에서 궁상맞게 얹혀사는 처지라 곰곰이 생각한 끝에 라브렌티의 청혼을 수락했고,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하게 혼인했다는 것이다.베리야가 내무인민위원회를 다스린 시기에 니나는 소련 농학원의 과학자로서 20년간 평범하게(?) 근무했다. 최고위급 관료의 부인으로서 국내외의 온천에서 휴가를 보낸 것은 덤이다. 또한 1990년대까지도 스탈린과 베리야의 다양한 업적을 열렬하게 옹호했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가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에게 관심이 생겨서 베리야의 집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하자 스탈린은 이를 굉장히 불편히 여겨 베리야를 쌍심지를 돋우고 노려보게 되었다. 스탈린이 열받았다는 것을 직감한 니나는 즉각 스베틀라나를 찾아가 세르고는 너를 여동생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스베틀라나가 더 이상 집으로 찾아오지 못하게 했다. 세르고 베리야는 라브렌티가 사망한 후 어머니 니나와 함께 스베르들롭스크로 추방당했다. 이후 1964년에 석방되었다. 세르고는 어머니와 함께 베리야를 일관되게 옹호했다. 베리야의 성추문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베리야의 각종 성추문은 문서로 입증이 됐기 때문에 이는 가족들의 눈먼 옹호에 불과하다. 베리야 체포 직후 베리야의 경호원 사리시코프는 베리야가 체포 시점에서 데리고 있던 애인이 39명이나 된다고 자백했으며, 1955년 재판에서 베리야의 경호원들이었던 나다리야와 사리시코프는 길거리에서 젊은 여자들을 마구 잡아와 베리야가 강간할 수 있도록 공급했다고 증언했다. 유부녀들을 강간하기 위해서 무고한 남편들을 체포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거듭된 강간과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서 이미 40년대엔 매독에 걸려서 1943년부터 비밀리에 매독 치료도 받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스탈린 시대 대숙청 때는 가족들까지 모조리 씨를 말리는 일이 많았지만 흐루쇼프는 베리야를 처형한 후 세르고 베리야와 니나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그들이 지방에서 공장 노동자로 살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다. 세르고 베리야는 나중에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남겼다.
4. 등장 매체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평행세계의 경우 조지아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충견 1로 나오는 경우가 잦다.- 007 리빙 데이라이트에서는 제임스 본드가 Mi-6 요원 두 명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KGB 국장을 기습하여 이를 추궁하자 KGB 국장이 이렇게 대답한다. "베리야의 시절에나 그랬었지, 20년 전에 그만뒀어."
- 게임 <Hearts of Iron> 시리즈
- 4편에서 소련 장관진의 한명으로 등장한다. 대숙청 국가중점에서 예조프 숙청을 선택하면 기용할 수 있다. 또한 부하린 루트로 갈시에 스탈린을 암살할 수 있는데, 스탈린이 암살을 당하면 베리야가 임시로 소련의 지도자로 등극한다.
- 2편의 대체역사 모드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반대로 스탈린을 부하로 두고 있다. 4편 카이저라이히에선 미등장.
- 4편의 대체역사 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나치 독일이 점령한 카우카지엔에서 국가판무관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의 폭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당한 3인방 중 하나로 나온다. 이로 인해 대의의 순국자로 현지인들에게 인식되면서 죽어서도 나치의 통치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 4편의 대체역사 모드 Thousand-Week Reich에서는 A-A선을 빼앗긴 소련의 잔당중 가장 큰 세력인 페름 소비에트 정부를 이끌고 있다. 본래 페름 소비에트의 서기장은 미하일 칼리닌이었고 베리야는 여전히 NKVD 수장이었으나 46년에 칼라닌이 자연사하고 그 권력공백을 통해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정부 관료들과 많은 인민들이 베리야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분기에 따라서는 베리야가 죽고 다른 사람이 서기장 자리에 오른다.
-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도 등장. 첫 등장은 소련의 핵무기 개발기간 성공을 위하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납치를 부하들에게 지시하나, 부하들이 잡아온 건 엉뚱하게도 진짜 아인슈타인과 똑 닮은 숨겨진 이복 남동생 헤르베르트 아인슈타인. 처음엔 직접 죽이려고 하였으나 헤르베르트의 인생사 회고를 듣고 감동아닌 감동을 하여 결국 재판을 통한 사형을 지시(…). 이후 소련 물리학자 유리 포포프비치를 통해 주인공 알란 칼손을 데려오라고 지시하고 스탈린과의 만찬에서 알란이 친 사고 때문에 알란을 헤르베르트와 함께 사이좋게 블라디보스톡의 굴라크로 보내버린다.[24] 이후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CIA의 스파이로 영입된 알란이 유리를 포섭하러 샤로프 지방에 와 있을때 푸시킨 레스토랑에서 유리 부부와 식사 도중 유리의 아내 라리사가 현 정권을 욕하며 흐루쇼프를 말하던 중 "잘한 것이라곤 베리야를 제거한 것 밖에 없는 흐루쇼프"라고 깐다. 그런데 그때는 브레즈네프 집권기로 러시아 모스크바 한가운데에 있는 식당에서 KGB와 GRU의 정보원까지 근처에서 듣고 있었는데 한 말이다.
- 소설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6.25 전쟁 시점에서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일본에 비밀리에 방문해 더글러스 맥아더와 비밀 회담을 가져 동북아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되고 북한과 중국을 패배시키는데 일조한다. 그 뒤 스탈린이 뇌일혈로 쓰러지자 의식을 잃은 스탈린에게 치료할 지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묻고 당연히 대답이 없었으니 치료를 거부했다고 내버려두고 이후 스탈린의 사망을 축하하며 파티를 벌이는데, 알고 보니 스탈린이 의사와 미리 짜고 죽은 척 연극한 것이었다. 이후 당연히 숙청.
- 소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소련을 방문한 히틀러와 독일 사절단을 감청하여 스파이로 판정된 사람들을 체포하고 스탈린에게 보고하지만 애당초 이것은 도청을 예상한 독일 측에서 퍼트린 역정보였던데다 밝혀진 게 이 정도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한 스탈린에게 무능하다는 낙인이 씌여졌고 질책받게 된다. 종국에는 자신이 지금까지 숙청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에게 내쳐지면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 라이트 노벨 <유녀전기>에선 베리야에 해당되는 인물인 로리야라는 인물이 나온다. 굉장히 유능하게 나오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원판처럼 페도필리아인데다 주인공 타냐의 스토커이기까지 한, 역시나 매우 글러먹은 인간이다.
- 영화 이너써클에서는 흐루쇼프 역으로 유명한 밥 호스킨스가 분했다.
-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는 베리야의 숙청과 몰락을 다루고 있다. 정확하게는 스탈린 사후 권력을 얻기 위한 베리야의 술책과, 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흐루쇼프의 대결 구도로 흘러간다. 실제 역사대로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에 소녀들을 밝히는 호색한 모습을 보이다가, 동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한 흐루쇼프의 기습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25] 이후 살려달라 울부짖으며 추태를 부리다가 총맞고 시체마저 깔끔하게 불타 사라진다.[26] 배우는 사이먼 러셀 빌.
- 알렉세이 게르만의 영화 <흐루스탈료프, 내 차!>는 스탈린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데, 제목은 베리야가 스탈린의 죽음을 확인하고 기고만장해져서 부하였던 보안장교 흐루스탈료프에게 차 대기 시키라는 명령에서 따왔다. 영화에서 비중은 크게 없다. '의사들의 음모'라는 유대인 의사들의 암살 시도 누명 때문에 끌려가다가 임종 직전 스탈린에게 끌려온 유대인 의사가 주인공이라서 그렇다.
[1] 지금의 아제르바이잔 주립석유산업 대학교.[박탈] 1953년 12월 31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의해 박탈[박탈] [4] 조지아는 본래 멘셰비키가 집권한 독립국이었으나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으로 소련에 점령되었다. 그래서 지하에는 멘셰비키의 조직력과 지지 세력이 상당했다.[5] 뒤쪽의 왼쪽이 스탈린, 오른쪽은 압하스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지도자 네스토르 라코바.[6] 비슷한 이야기로 헤르만 괴링은 "퓌러께서 2+2=5이라고 하신다면, 그것이 정답이다."라는 병맛을 시전하였다. 그리고 조지 오웰은 이를 1984에서 써먹는다.[7] 이때 반란을 일으킨 조지아 민족주의자들은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으로 멸망한 조지아 민주공화국의 멘셰비키의 잔여세력이었다.[8] 그런데 전후에는 베리야가 소련 내 유대인 커뮤니티와 이스라엘의 적극적 후원자가 된다. '의사들의 음모' 사건이나, 체코슬로바키아가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했다가 주요 지도자들이 실각한 일 모두 베리야의 힘을 빼기 위해 진행된 것이다.[9] 물론 이는 일본에 있던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의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허나 어쨌든 베리야의 감독 하에 있던 인물이라...[10] 독일의 방첩대들이 병맛이긴 했지만, 독일 정보기관과 비슷한 짓을 하고 있던 베리야의 정보전 능력을 보면 아주 무능한 인물은 아니다. 물론 이 자에게 무고하게 숙청된 소련 군인들을 보면 정보전에서 세운 공로도 많이 사그라든다. 할힌골 전투 직전에는 게오르기 주코프도 숙청하려 했다가 주코프가 대승을 거두자 슬그머니 제외하기도 했다.[11] 이는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에서 묘사된다.[12] 실제로는 정말로 코를 골았다기보다는 의학적 지식이 없던 베리야가 체인-스톡스 호흡을 코 고는 소리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13] 흰 옷을 입은 인물은 게오르기 말렌코프[14] 여기에 또 재밌는 일화가 있다. 재판을 진행할 때 증인으로 참석한 사람은 베리야에 의하여 굴라크로 끌려간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사람이 증인으로 나와서 베리야의 악행을 술술 불자 재판장에서 베리야가 깜짝 놀라서 "당신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지?!"라고 외치자 그 증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네 기관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지."[15] 베리야의 전임자 예조프도 베리야 못지않게 추하게 죽었다. 물론 이쪽도 인과응보.[16] 이건 진실이 아니다. 당사자가 상세하게 반박했기 때문이다. 바로 아래에 있는 '베리야의 아내' 소문단을 참고.[17] 배터리나 전선 같은 것들[18] 그 흰머리수리 모양이 맞다.[19] 선물한 명목은 '2차대전 동맹국에 대한 우호의 제스처'라나...[20] 세계 최초의 신디사이저인 테레민의 발명가이자 그 이름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21] 애초에 레온 테레민은 당시 KGB의 비밀 연구소에서 강제 연구에 동원되고 있었다. 말로만 의뢰였던 거지 실제로는 강제 연구 과제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그것도 굉장히 난이도 높은 것으로.[22] 이런 보안 문제 때문에 1985년에 모스크바에 짓던 미국 대사관은 온갖 도청장치가 쏟아져 나와 공사를 중단했고, 후에 러시아와 관계가 나아지자 짓던 건물을 허물고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이때 건설자재는 물 빼고 모래와 자갈까지 전부 미국에서 공수했으며 건설인부도 전부 미국사람만 써서 완공하는데 15년이나 걸렸다.[23] 베리야의 아내[24] 어처구니없게도 헤르베르트가 사형이 아닌 굴라크로 보내진 이유는 다름아닌 행정오류(…).[25] 베리야는 그때까지 자기가 저지른 숙청 짓거리와 스탈린 사후 권력을 얻기 위한 여러 부적절한 행동 때문에 소련 수뇌부 인사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고 있었다. 이중 백미는 소련 수뇌들이 스탈린의 장례식을 민중이 못보게 막은 책임을 베리야에게 물으려하자 베리야가 '난 너희들이 한 짓을 전부 알고 있다.'라며 욕을 퍼부은 일. 특히 게오르기 주코프는 소련군보다 NKVD의 세력을 늘리려는 베리야를 아주 못마땅하게 봐서 흐루쇼프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한다.[26] 베리야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설들을 다 써먹었다. '회의에서' '주코프'가 '때려 패버리고' 창고에서 약식으로 '재판'을 진행한 다음에 쏴 죽였다. 시체는 석유를 붓고, 담뱃불로 태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