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18:12:53

멘셰비키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
,
,
,
,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1 [[러시아 제국|{{{#000000 러시아 제국}}}]]의 주요 정당}}}
마르크스주의 인민주의 자유주의 자유보수주의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 멘셰비키 (국제파 · 주류) ^
사회혁명당
^좌파 · 우파 ( 트루도비키 · 민중사회주의) ^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 17일 연합
^ 좌파 · 우파[1]^

[1]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당 좌파가 결성한 진보블록에 참여하지 않고 10월당 우파(right-wing of octobrists)라는 이름의 당파를 결성해 독자적으로 선거에 출마했다.


Меньшевики

1. 개요2. 이념3. 역사
3.1. 10월 혁명러시아 내전3.2. 불법화와 그 이후

1. 개요

러시아어로 소수파(少數派)라는 뜻이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조직론을 둘러싸고 당이 양분되었을 때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다수파)와 대립하던 소수파를 말한다. 지도자는 율리 마르토프이다.
파일:external/www.library.yale.edu/mart.gif
율리 오시포비치 마르토프[1]
(Юлий Осипович Мартов, 1873년 11월 24일 ~ 1923년 4월 4일)

2. 이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러시아가 후진국이며 전제적인 차르 정권을 무너뜨리고 최종적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했다. 그래서 멘셰비키들은 귀족과 차르가 지배하는 전제정을 무너뜨리는 부르주아 혁명을 성공시켜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기 위해 부르주아 정당과 협력하는 방안을 채택하고 노동 운동과 의정 활동, 혁명 운동을 병행했으며 독일 사회 민주 노동당을 모방해 당을 대중 정당으로 운영하기를 원했다.

반대로 볼셰비키는 2단계 혁명론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과 합법적 투쟁 노선은 혁명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둘의 노선은 평행선을 그리게 되었다.

멘셰비키는 노동자들의 무장 투쟁만 반대했을 뿐,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 굴복하고 의회주의에 천착하는 유약한 지식인 정당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혁명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고, 수틀리면 언제든 파업과 시위, 사보타주, 집회, 차르 정부가 불법으로 규정한 활동들을 전개할 준비와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다. 멘셰비키는 2월 혁명까지 지속적으로 합법 운동 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지하 투쟁 활동도 계속 추진한 혁명가들이었다.

흔히 이들이 볼셰비키와 대비되어 합법 노선만 추구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당내 우파들이 합법 노선으로 완전히 전환하자는 '청산주의'를 주장한 일 때문으로 추측된다. 지하 투쟁의 어려움과 블릐긴 두마의 성립으로 의정 활동과 노동 운동을 통해서도 충분히 투쟁이 가능하다는 '청산주의' 노선이 제창되자, 당내 좌파들이 반발하여 병행 노선을 유지하려 했다. 그래서 청산주의 계파들이 합법적인 의정 활동과 노동 운동에 주력할 때에 병행주의자들은 지하 투쟁에도 힘썼다.

3. 역사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가 실제로는 절대적으로 숫자가 적었고 '소수파'라는 뜻의 맨셰비키가 훨씬 숫자가 많았다."거나 "둘의 이름은 결국 스스로의 세력을 과장하고자 했던 레닌의 프로파간다로 붙었을 뿐이다."라는 주장도 있지만, 양대 세력의 역사는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대립은 불가역적이지 않은데다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 내에는 양대 세력에 속하지 않는 소수 계파와 개인 활동가들도 존재했고, 그래서 소속 변경도 곧잘 이루어졌다. [2] 당의 노선과 당 기관지의 편집인 선정 문제로 당이 처음으로 분열한 1903년 2차 당 대회에서도 처음에는 멘셰비키가 다수였으나, 표결이 반복되면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었다. 결과가 뒤바뀐 것에 불만을 품은 율리 마르토프가 "이는 다수파의 횡포다!"라고 외치며 회의장에서 나가면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이후, 4차 당대회에서는 멘셰비키가 다수파를 유지했다. 멘셰비키/볼셰비키 양파(兩派)가 정식으로 인연을 끊은 것은 1912년 볼셰비키의 프라하 총회부터였다.

멘셰비키는 세계 대전을 왕과 귀족들의 전쟁으로 여겨 전쟁에 반대했지만, 당내 우파들은 러시아가 타국을 침공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동맹국에 패배해서도 안된다는 방어주의를 주장했고 반대로 망명을 떠나 있던 국제주의자들과 국내의 좌파들은 우파들의 방어주의를 비판했다. 1917년 3월 혁명(구력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멘셰비키는 이를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하여 당원들의 임시 정부 입각을 금지하고 임시 정부 - 소비에트 이중 권력 체제에서 소비에트를 통해 임시 정부가 노동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해 임시 정부를 자신들의 의중대로 움직이려 했다.

이러한 노선에 대해 충분히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음에도 부르주아들에게 권력을 내주었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고, 실제로 한 멘셰비키 중진이 어떤 노동자에게 "등신아! 권력이 눈 앞에 왔는데 그걸 왜 안 잡냐?!"는 폭언을 들은 적도 있지만,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소비에트라는 대안적 민주주의 기관을 손에 쥔 멘셰비키들에게 마르크스의 2단계 혁명론은 반드시 따라야 할 신조였고 대다수의 인민들이 새로운 정부의 출범에 기대를 가지고 있는데다 노동자들도 임시 정부를 인정하는 분위기였기에 마냥 멘셰비키를 비난할 수는 없다.

단과 츠헤이드제, 체레텔리 같은 우파들은 부르주아들과 협력해 무배상 - 무병합 원칙에 따른 종전을 추진하려 했으나, 연합국과의 관계와 그들로 받은 막대한 지원 문제, 군부의 동향 등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부르주아 정당들은 멘셰비키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멘셰비키 우파들은 지속적으로 입헌 민주당, 케렌스키 등과 교섭하고, 심지어는 그들보다 더욱 좌경화된 정당인 급진 민주당의 네크라소프와도 접촉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상황이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게 맞지만, 멘셰비키 우파들은 부르주아 정당들과 협력을 시도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당내 좌 · 우파 간의 갈등이 극심했으며 17년 하절기부터 당내 우파의 핵심 인사들이 임시 정부에 입각하면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대부분 상실해 버렸다. 원래, 2월 혁명 직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멘셰비키, 농민들은 사회혁명당을 지지했고 누군가 볼셰비키의 상징을 옷에 부착하고 거리를 지나다니면 린치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멘셰비키는 소비에트와 노동 조합에 대한 장악력과 노동자들의 거대한 지지를 갖고 있었음에도 노동자들의 여망을 들어준다거나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거나 하는 등의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미 레닌이 귀국한 4월에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의 지지세가 멘셰비키를 따라잡으려 하는 상황이었고 멘셰비키의 내부 분열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멘셰비키 우파들이 주도권을 잡으려면, 전세가 우세해지거나 수도와 핵심 지역의 물자난이 개선되어야 했지만, 케렌스키 공세는 실패했고 물자난은 나날이 심화되었다. 노동자들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식량난도 해결 못하는 멘셰비키가 아닌 볼셰비키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멘셰비키의 물자 공급 정책 및 곡물 강제 수매 정책에 반발했다.

여기서 상황을 바꿀 방안을 쥐고 있던 마르토프의 귀국은 레닌보다 늦었고 볼셰비키가 레닌을 중심으로 단결한데 반해 당내 분열이 극심해 마르토프가 통제력을 쥐지도 못했다. 이것이 멘셰비키의 패착 중 하나였다. 국제주의 파벌의 수장인 마르토프는 동질적 민주주의 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부르주아들이 반동 세력에 적대하는 게 아니라 반동들과 손을 잡고 혁명을 파괴시킬 수 있으므로 부르주아 정당들을 배제하고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이 연합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우자는 이론이었다. 이는 레닌의 무장 혁명론과는 또 다른 혁명론이었으며 멘셰비키가 노동자들의 여망을 들어주고 권력을 차지할 수도 있는 희망이었으나, 마르토프가 당을 장악한 것은 10월 혁명 직후가 되어서였다.

이 시기의 멘셰비키가 겪은 내부 분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마르토프는 단과 체레텔리 같은 우파를 설득하지 못했고, 자신이 이끄는 국제주의자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라린을 위시한 국제주의 강경파들은 마르토프에게 탈당해서 새로운 당을 세우자는 제안을 했지만, 당의 완전한 분열을 반대한 마르토프가 제안을 반대하자 이들은 멘셰비키 세력을 떠나 볼셰비키에 합류해 버렸다.

3.1. 10월 혁명러시아 내전

볼셰비키와는 대립되는 포지션에 있었지만 의외로 적백내전에서도 선뜻 백군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당내 우파 중 일부는 백군에 가담했고[3] 캅카스의 멘셰비키들은 독자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하려 시도했지만[4] 당 대표 율리 마르토프 등 국제주의 파벌은 상당수가 적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 볼셰비키는 내전 과정에서 승리를 위해 농촌에서 물자를 강제 징발하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하자, 멘셰비키는 이를 비판하며 다시 둘 사이의 균열이 시작되었다.

1918년 러시아의 영토 상당부분을 포기하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맺어지자 사회혁명당의 파니 카플란은 레닌을 암살하려 시도하나 미수에 그치고 만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의 국가수반이었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개입으로 레닌이 주장한 사회혁명당 지도부의 사형과 야당에 대한 전면탄압이 중단되고, 볼셰비키에 협력했던 멘셰비키는 1919년까지는 어떻게든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스베르들로프가 사망하면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병 치료를 이유로 독일로 출국하는 마르토프 등을 포함해 대부분의 주요 인사는 이때 망명했는데 공산당 측에서는 가볍게 출국을 허용했다. 멘셰비키 조직 자체가 거의 무너지기도 했고 멘셰비키와 공산당의 골이 아직은 그렇게 깊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3.2. 불법화와 그 이후

내전의 최후 시점에 아나키스트 등을 주축으로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이 일어나자 결국 멘셰비키 역시 불법화되었다. 이 불법화의 과정은 볼셰비키의 허찌르기에 가까웠는데,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멘셰비키 당적[5]을 유지한 채 중앙정계에서 민주적으로[6] 당선되어 활동하던 '표도르 단'을 체포해 감옥에 넣어버린 것이다. 1921년 시점에서 볼셰비키 당원이 아니고 무소속도 아니면서 중앙 정치인으로 활동한건 단이 유일했고, 이는 많은 볼셰비키들이 '아직은' 자신들과 화합하려 하였던 멘셰비키, 그 중에서도 국제파를 한때의 동지로 대우하였고, 대중의 지지도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앙정계에서 단을 옹호할 인사는 없었다.[7]

내전 이후 멘셰비키의 일원들은 볼셰비키로 전향하거나 정치를 포기하고 소련에 정착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그러나 1931년 '멘셰비키 재판'[8] 부터 시작해 1930년대 불어닥친 대숙청의 광풍으로 소련에 남았던 옛 멘셰비키 가담자들은 대규모로 숙청되었다. 그나마 해외 망명자들이 재건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베를린, 파리, 뉴욕으로 중앙당사를 옮겨가며 1965년까지 외국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제2인터내셔널 계열 정당들이 1921년 재건한 비엔나 인터내셔널(2와 2분의 1 인터내셔널)에 이어 현재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전신인 노동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소련 말기 재창당된 러시아 사회민주당 창당대회에, 그 때까지 살아남았던 멘셰비키 조직원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1] 본래 성씨는 '체데르바움(Цедербаум)'이다.[2] 레프 트로츠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3] 콜차크의 쿠데타로 무너지기 전[4] 바로 조지아 민주공화국이다. 볼셰비키 정권과는 다르게 사회혁명당과 다른 좌파정당으로 구성된 다당제 민주공화국이었다.[5] 멘셰비키 국제파가 옛 이름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으로 재결성한 당이었다.[6] 지역 소비에트에서 정말로 당선되었다.[7] 10월 혁명을 반대했다가 레닌의 눈 밖에 난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사회주의 야당에 우호적이었으나 이 시기에는 이미 힘을 잃었으며, 한때 아나키스트, 다른 좌파 등과의 협력을 추진한 트로츠키는 이 시점에서 군사독재자로 변신해 크론시타트 반란을 직접 진압한다. 그리고 트로츠키'보다도 더' 사회주의 야당에 억압적이었던 것은 레닌 본인이었다. 부하린이나 부하린과 손잡고 중도파 행세하던 스탈린은 일당제를 긍정하는 인사들이었다.[8] 1931년 3월 소련 재계에서 활동하던 전직 멘셰비키 경제학자들이 망명자들의 지원을 받아 지하 당조직을 재건하고자 하였다며 7명이 10년에 이르는 징역을 선고받는 등 숙청당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