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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콜차크 | }}}}}}}}} |
알렉산드르 콜차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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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51ba> 러시아국 초대 최고지도자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 | |||
출생 | 1874년 11월 16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현 상트페테르부르크구 알렉산드롭스코예[1]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연방시) | |||
사망 | 1920년 2월 7일 (향년 45세) | ||
러시아 SR 이르쿠츠크현 이르쿠츠크 (現 러시아 시베리아 연방관구 이르쿠츠크주 이르쿠츠크) | |||
재임기간 | 제39대 흑해함대 사령관 | ||
1916년 6월 28일 ~ 1917년 6월 7일 | |||
초대 러시아국 최고지도자 | |||
1918년 11월 18일 ~ 1920년 2월 7일 | |||
러시아국군 최고사령관 | |||
1918년 11월 18일 ~ 1920년 1월 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colcolor=#0051ba> 부모 | 아버지 바실리 이바노비치 콜차크 어머니 올가 일리치나 콜차크 | |
배우자 | 소피야 표도로브나 콜차크 | ||
자녀 | 아들 로스티슬라프[2] 딸 타티아나,[3] 마르가리타[4] | ||
학력 | 러시아 제국 해군사관생도단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 연구소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복무 | 러시아 제국 해군 | ||
1886년 ~ 1917년 | |||
러시아국군 | |||
1919년 ~ 1920년 | |||
최종 계급 | 중장 (러시아 제국 해군) | ||
주요 참전 |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 ||
주요 서훈 | 성 게오르기 훈장 (2회) 성 안나 훈장 (3회) 성 블라디미르 훈장 (2회)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2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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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2. 생애
1894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러시아 해군 장교가 되었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전쟁중 소장으로 진급해 제독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흑해 함대 사령관이었으며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중장이었다.1917년 2월 혁명 이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신 정부에 계급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편입, 정권의 견제 차원에서 새롭게 협상국으로 참여한 미국으로 파견되었지만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을 통해 시베리아에 도착했다. 이후 백군에 합류하여 군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방면의 임시정부는 곧 영국이 후원하는 쿠데타로 뒤집어졌고 콜차크 자신이 옴스크의 러시아국의 수반이 되었다.
콜차크는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자마자 사회혁명당을 탄압했고 거주민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해서 잦은 징발이나 거주지 소개가 이루어졌는데 당연히도 하나같이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없는 정책이었다.
이것 때문에 백군 지지측에서 콜차크는 영 계륵 같은 존재였다. 영국에서도 군수상 윈스턴 처칠만 콜차크를 열심히 지지했을 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는 영 뜨뜻미지근했고, 무엇보다 이상주의자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그를 매우 싫어했다. 미 육군을 파병해 군사 행동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콜차크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무슨 정책이든 별 신경 안 썼지만 극동에서 한인들 때려잡기와 자기네들 이익 챙겨먹기에 바빴고[5] 그나마도 콜차크가 일본을 경계했기에 제대로 지원을 해줄수도 없었다.
또 이러한 정책으로 내부에서도 반발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시베리아 백군 전부가 러시아 제국군 출신이 아니었던 탓이 큰데 시베리아 백군은 러시아 제국군 출신을 중심으로 현지 주민과 카자크들이 일부 합류했으며 거기에 볼셰비키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때문에 갈등이 생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합류한 형태였다. 체코 군단은 백군의 강력한 전력이었으나 콜차크의 정책은 그들에게서도 환심을 사는데 실패했고 백군의 다른 일파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발트 방면의 백군인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핀란드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과 연계해보려고 했지만 명목상의 상관인 콜차크가 이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며 실패했다.
특히 안 그래도 보급이 힘든 시베리아 지역인데 시베리아 백군이 전진할수록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보급 상황은 극악으로 치달았다. 이를 타개하고자 안톤 데니킨, 표트르 브란겔 장군이 속한 남부 백군과 연계하기 위해 남러시아 측은 차리친[6]을, 러시아국 측은 사마라와 사라토프를 열심히 두들겨 보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과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의기투합해 그 두 지역을 끝끝내 지켜낸 덕에 두 세력은 러시아 내전 동안 계속해서 분리되어 있게 되었다.
초반의 패배 이후 레프 트로츠키의 개혁으로 정신을 차린 적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새로이 징집된 장병들이 미하일 프룬제,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같은 명장들과 함께 시베리아 전선에 배치되었고 백군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콜차크 자신은 적군의 반격으로, 옴스크에 적군이 입성하기 하루 전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체코 군단이 통제하는 구역을 따라 이르쿠츠크로 퇴각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는 이미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넘어가 있었고 체코 군단은 콜차크를 넘겨 주는 대가로 안전을 보장받은 상태였다.[7] 그렇게 잡힌 콜차크는 며칠 동안의 심문 뒤 사형을 선고받고 1920년 2월 7일 총살당했다.
처형 직전을 묘사한 그림.
적군은 처형 전 콜차크의 시신을 수장시킬 곳에 그림에 나온 것처럼 얼음을 깨놓고는 그에게 마지막 기도의 시간을 주었다. 이후 콜차크는 같이 체포된 러시아국 수상 빅토르 페펠랴예프(Viktor Pepelyayev)[8]와 함께 총살당했고 두 사람의 시신은 속옷을 제외한 의복과 소지품을 다 빼앗긴 채 바이칼호에서 흘러나오는 안가라강에 던져져 수장되었다.
3. 기타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는 감독, 프로듀서, 영화비평가, 역사가, 정치가 등 서로 다른 입장의 패널을 만들어 토론을 주최하였다.- 토론참여자
-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Владимир ВольфовичЖириновский) 러시아 민족주의 정치가, 보수적 우익인사. 러시아자유민주당(Либераль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России, ЛДПР) 당수\
- 유리 주코프(Ю, Жуков) 역사가, 러시아 군사연구소 연구원; 데니스 코즐로프(Д, Козлов), 역사가
- 아나톨리 막시모프(А. Максимов), 영화 프로듀서;
- 알렉세이 시포프(А. Шипов) 역사가
- 다닐 돈두레이(Д Дондурей)영화평론가, 유명한 저널 “예술영화” 지의 편집인. 그리고 크라프추크 감독[9]
“주코프: …콜차크는 국가적 반동을 개시했다. 다수인민이 총살형에 처해졌다. 몇 달 후에 지방 주민들이 콜차크의 독재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볼셰비키가 아니다. 처음에 총을 쏘았던 것은 볼셰비키가 아니란 말이다.…당신의 이 영화 때문에, 젊은이들의 머리 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며, 당신은 판타지같은 역사해석으로 그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역사는 정직하다. 적군이 이겼단 말이다. 모든것을 이겼단 말이다….
-주코프: 러시아가 죽어가고 있을 때, 콜차크는 미국으로 도망쳤다.…
-지리놉스키: 그는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 1917년 혁명이 제국을 붕괴시켰고, 아무 것도 없었다. 콜차크 제독은 위대한 사람이다. (도망친) 예를 대라….
-코즐로프: 만일에 우리가 교육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올바르게 교육해야 한다. 콜차크는 우수한 유형의 사람이며, 단지 그의 일생에 대한 올바른 역사는 어떠한 블록버스터보다 재미있을 것이다.(중략)
-시포프: 필름이 성공했으므로, 그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리라…우리에게는 콜차크 개인이 흥미롭다…. 만네르헤임 백작이 콜차크에게 핀란드 독립을 승인하는 척하면서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라고 제안했을 때…제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러시아는 “하나여야 하고 분리되어서는 안된다(Россия должна быть одиной и неделимой)”고 말했다…. 콜차크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구 러시아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러시아를 사랑했지만, 구 러시아가 10월 이후에는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런 집단의 사람이었다. 그들도 이룰 수 없는 어떤 것을 위해 싸웠다! 내전에서, 콜차크는 자신의 조국에 맞서 싸웠는데, 러시아인들 중 대부분이 그 전선 쪽에서 있었기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의 명예와 성실함을 거부할 수는 없다.
-주코프: 거부할 수 있다. 그는 영국 정보기관과 관련되었다. 증거를댈 수 있다….
-지리놉스키: 당신의 스탈린은 훨씬 더 끔찍하다…그 자신이 형사범죄 경력자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를 옹호하고 있다….
-돈두레이: …우리의 영화에서 이루어진 70년 동안의 위조를 하나의 필름으로 한꺼번에 대답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필름은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낸 것 같다. 적군들이 영웅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내전은 매우 복잡한 시대였다.” [10]
공산당 지지측에서는 영화 및 콜차크를 폄하하지만 다른 3명은 중립,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주코프: 러시아가 죽어가고 있을 때, 콜차크는 미국으로 도망쳤다.…
-지리놉스키: 그는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 1917년 혁명이 제국을 붕괴시켰고, 아무 것도 없었다. 콜차크 제독은 위대한 사람이다. (도망친) 예를 대라….
-코즐로프: 만일에 우리가 교육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올바르게 교육해야 한다. 콜차크는 우수한 유형의 사람이며, 단지 그의 일생에 대한 올바른 역사는 어떠한 블록버스터보다 재미있을 것이다.(중략)
-시포프: 필름이 성공했으므로, 그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리라…우리에게는 콜차크 개인이 흥미롭다…. 만네르헤임 백작이 콜차크에게 핀란드 독립을 승인하는 척하면서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라고 제안했을 때…제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러시아는 “하나여야 하고 분리되어서는 안된다(Россия должна быть одиной и неделимой)”고 말했다…. 콜차크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구 러시아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러시아를 사랑했지만, 구 러시아가 10월 이후에는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런 집단의 사람이었다. 그들도 이룰 수 없는 어떤 것을 위해 싸웠다! 내전에서, 콜차크는 자신의 조국에 맞서 싸웠는데, 러시아인들 중 대부분이 그 전선 쪽에서 있었기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의 명예와 성실함을 거부할 수는 없다.
-주코프: 거부할 수 있다. 그는 영국 정보기관과 관련되었다. 증거를댈 수 있다….
-지리놉스키: 당신의 스탈린은 훨씬 더 끔찍하다…그 자신이 형사범죄 경력자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를 옹호하고 있다….
-돈두레이: …우리의 영화에서 이루어진 70년 동안의 위조를 하나의 필름으로 한꺼번에 대답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필름은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낸 것 같다. 적군들이 영웅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내전은 매우 복잡한 시대였다.” [10]
그리고리 세묘노프가 일본군을 끌어들이자 그를 크게 비난했다. 결국 그리고리보다 먼저 죽었지만 세묘노프 역시 만주국이 무너지면서 죽게된다.
1900~1902년 제정 러시아 북극해 탐험단의 일원이었던 콜차크를 기려 콜차크 섬(остров Колчака)이 있다. 소비에트 치하에서는 라스토르구예프 섬(остров Расторгуева)이었다가 2005년에 개칭되었다. 좌익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2002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2004년에는 이르쿠츠크에 콜차크의 동상이 세워졌다.
3.1. 매체에서
2008년 러시아 내전 당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제독의 연인(Admiral, 2008)이 개봉하였다. 콜차크 역은 콘스탄틴 하벤스키가 맡았다.
- 2차세계대전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의 대체역사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 일본이 협상국 자격으로 체코 군단을 끌어들여 만든 연해주의 친일 국가인 트란스아무르의 국가 원수로 있으며 러시아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 중이한다. 모스크바에서의 쿠데타 실패 이후 현실 역사처럼 철도를 타고 극동 지대로 도망왔다는 설정. 가지고 있는 지도자 특성은 안정도 -30%의 효과를 가진 쓰레기 특성 '흔들리는 지도력'과 제독 출신 아니랄까봐 해군 교리 비용에 -10% 할인 보너스를 주는 '독재자 제독'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마저도 러시아계 국가의 전통인 부실한 해군 덕분에 쓸모없는 특성이 되어버렸다. 진행하다보면 반 콜차크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는데 이를 물리치고 계속해서 지도자 자리를 지킬 수도 있지만 성공할 경우 휘하의 장군 세르게이 보이체홉스키가 또다른 군정을 이어가거나 민정으로 전환될 수도 있고[11] 스폰서인 일본이 개입해 시베리아 출병의 지휘관 중 하나였던 오오이 시게모토[12]가 통치할 수도 있다. 2차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승리하면 트란스아무르에 점령지를 넘기는데 이를 통해 일본을 잘 써먹고 독립을 선언해서 엿을 먹일 수도 있다.
4. 둘러보기
[1]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부홉스카야 오보로나 대로변에 위치한 역사지구, 행정구역상으로는 넵스키구와 중앙구에 걸쳐져 있다.[2] 1910.~1965.[3] 1908.~1909.[4] 1912.~1914.[5] 콜차크가 무기를 사기 위해 일본에 금 60톤을 지불했으나 먹튀했다.[6] 이후 스탈린그라드[7] 더군다나, 본래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싶어 했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우익 등 러시아의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쿠데타로 인해 공화국이 콜차크의 독재정이 되어버리자 반감을 품고 있었고, 그렇게 독재정권을 수립해놓고는 적군에 패배해버리자 도리어 볼셰비키에 협조해버렸다.[8] 백군의 장군 중 최후까지 저항을 지속했던 아나톨리 페펠랴예프의 형이며, 러시아국 정부 관료들 중 마지막까지 콜차크를 따랐던 사람이다.[9] 기계형.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영화에 나타난 역사적 재현의 문제들: 영화 “시베리아의 이발사” 와 “제독” 을 중심으로." 역사와경계 71 (2009): 324주석 28[10] 기계형.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영화에 나타난 역사적 재현의 문제들: 영화 “시베리아의 이발사” 와 “제독” 을 중심으로." 역사와경계 71 (2009): 325-326[11] 이 경우 위에서 언급한 빅토르 페펠랴예프가 정부 수반으로 취임한다. 그 외에 보리스 슈먀츠키나 스피리돈 메르쿨로프도 있다.[12] 일본군 12사단 사단장이었다. 원래는 시베리아 출병의 지휘관이었던 유히 미쓰에가 집권했으나 1925년에 죽은 인물을 예토전생 해온 거라 더 오랫동안(1951년 사망) 살아남았던 오오이로 교체되었다.
분류
- 1874년 출생
- 1920년 사망
-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인물
- 러시아 제국의 군인
- 러일전쟁/군인
- 러시아 내전/군인
- 러시아 내전/사망자
- 제1차 세계 대전/군인
- 총기에 죽은 인물
- 유럽의 독재자
- 아시아의 독재자
- 군인 출신 정치인
- 총살형된 인물
-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 수훈자
-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수훈자
- 성 블라디미르 훈장 3등급 수훈자
- 성 블라디미르 훈장 4등급 수훈자
- 성녀 안 훈장 1등급 수훈자
- 성녀 안 훈장 2등급 수훈자
- 성녀 안 훈장 4등급 수훈자
-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1등급 수훈자
-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2등급 수훈자
- 레지옹 도뇌르 훈장/오피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