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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 |||
출생 | 1845년 3월 10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 |||
사망 | 1894년 11월 1일 (향년 49세) | ||
러시아 제국 타브리다현 얄타구 리바디야 궁전 (現 러시아 남부 연방관구 크림 공화국 얄타시 리바디야 궁전) | |||
묘소 |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 ||
재위기간 | 전러시아의 황제[1] | ||
1881년 3월 13일 ~ 1894년 11월 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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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 ||
아버지 | 알렉산드르 2세 | ||
어머니 | 헤센의 마리 공녀 | ||
형제자매 | 알렉산드라, 니콜라이, 블라디미르, 알렉세이, 마리야, 세르게이, 파벨 | ||
배우자 |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1866년 결혼) | ||
자녀 |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르, 게오르기, 크세니야, 미하일, 올가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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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제.자유주의적인 개혁 정책을 펼친 알렉산드르 2세의 차남이자 안타깝게 요절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의 동생이다.
또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4명의 아들들은 모두 장남에게 니콜라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차남에게는 자신의 이름[2]을 붙였는데 이에 따라 알렉산드르 3세는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2. 생애
알렉산드르 2세와 헤센의 마리 공녀의 둘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가 요절하자 그의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었다. 1881년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해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자유주의에 대한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프랑스 공화국 대통령 사디 카르노와 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드르 3세와 빌헬름 2세. 서로 육촌이다.
독일 제국과는 사이가 나빠 프랑스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고[3] 프랑스 자본을 끌어들여 시베리아 철도를 놓게 되었다.
황후인 마리아 표도로브나[4]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차녀로 본래 그의 형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니콜리아 황태자가 죽은 이후 그녀가 지속적으로 러시아 황실과 친하게 지냈고, 그녀와 결혼하라는 형의 유언을 의식한 알렉산드르 대공이 호감을 갖게 되어서 1866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본인은 원래 황제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주변 사람들도 "그는 황제가 될 위인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5] 주변 사람들이나 아버지가 생각한 인물은 맏형 니콜라이[6]였으며 알렉산드르 자신도 똑똑한 형 덕에 자기가 정치를 하지 않고 좋아하는 군대에만 집중해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3세는 장신이 유독 많기로 유명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황제들 중에서 표트르 1세 다음가는 거구로 키가 190cm에 달했다.[7] 표트르의 키뿐만 아니라 표트르의 힘도 물려받았는지 유년기부터 그는 남다른 힘을 자랑했는데, 손가락으로 동전을 구부릴 정도였다. 운동도 잘했고, 사격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솔로비요프는 그런 그를 로마노프 가문의 헤라클레스라고 부르며 놀라워했다. 키와 덩치가 얼마나 큰 지 육촌인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와 같이 있는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빌헬름 2세가 매우 작아 보인다. 빌헬름 2세의 키는 174cm로 당대 독일인 남성의 평균 키(170cm)보다는 컸는데 190cm의 장신에 큰 덩치를 자랑하는 알렉산드르 3세 옆에 있으니 작아 보일수 밖에.
그의 완력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888년에 알렉산드르 3세는 가족과 함께 크림 반도를 방문했다가 기차를 타고 다시 수도로 가는 중이었는데, 과속으로 인해 기차가 전복되어 황제가 탄 객차가 완전히 부서졌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알렉산드르 3세는 무너진 기차의 지붕을 들어올리는 괴력을 발휘해서 가족들을 탈출시켰다. 황실 일가는 황제의 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로 인해 알렉산드르 3세는 허리를 다치게 되었고 급성 신장염에도 걸리게 되면서 건강이 갈수록 악화된다. 그래서 그를 검진한 독일인 의사 에른스트 라이덴의 조언에 따라 1894년 크림 반도의 리바디야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요양 생활 한 달 만에 사망했다.
2.1. 개인사
젊은 시절 초상화 |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 어머니 헤센의 마리 공녀와 함께 찍은 사진.
그의 부모는 장남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만 편애했다. 물론 니콜라이가 장남이자 황태자고 지적이고 영특했기 때문에 니콜라이에게 더 신경 써주고 예뻐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원래 군인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으나, 형 니콜라이가 결핵으로 죽자 졸지에 후계자가 되어 나중에 황제로 즉위한다. 사실 황족들이 반대했고, 자기도 그다지 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가 강행하여 그대로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실 아내인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8]와의 결혼도 처음에는 원하지 않았는데, 왜냐면 그 때 그는 어머니의 시녀 중 한 사람인 마리아 엘리모브나 메셰르스카야 공작 영애[9]와 연인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황제 자리 따위 버릴 수 있다."고 했다가 대노한 아버지에 의해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10] 그래도 정략결혼이었던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와의 결혼생활도 행복한 편이었고, 서로 외도 없이 많은 자식을 낳아 끈끈한 금슬을 보여주었다. 이에는 숱하게 바람을 피운 데다가, 모후가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정부와 재혼했던 부황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고 한다.
강제로 결별당한 메셰르스카야 공작 영애, 애칭 두셴카(Dusenka)는 러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일기에 "안녕, 나의 두셴카"라는 말을 써서 슬픔을 삭혔다고 한다. 이후 두셴카는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2대 산 도나토 공작 파블 파블로비치 데미도프[11]와 1867년에 결혼하여 1868년에 아들이자 3대 산 도나토 공작 엘림을 낳고 나서 난산의 후유증으로 이틀 후에 죽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1871년에 재혼하여 이사하기 전까지 그녀의 옷들을 그대로 둔 방에서 오랫동안 지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3세는 자녀들에게 다정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녀들에게 체벌을 가하거나 가정폭력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친근하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몰래 뒤에서 아이를 잡아올린 다음에 물에 담가버리는 장난을 쳤다가 나중에 물 양동이를 뒤집어 쓰는 보복을 당하기도 했고,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알렉산드르 3세는 개인적으로 매우 솔직하고 가식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대단히 검소했다. 즉위하면서 자신에게 할당된 식비와 의복에 드는 비용을 줄였고, 무도회를 주최하는 횟수도 줄였다. 그러나 사냥에 대한 예산은 줄이지 못했다. 부황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자신도 사냥을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낚시도 좋아했고 좋은 음식과 시가, 커피도 좋아했다.[12]
2.2. 재위 기간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에게 잔혹하게 폭탄으로 암살당하자, 그는 테러 주동자들과 관련자들을 모아 목을 매달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그리스도 부활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급진파에게서 잃고 나서 안 그래도 싫어하던 급진파를 증오까지 하게 되어 여러 급진파들을 잡아 대대적으로 주요 지도자들의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그런데 알렉산드르에 의해 목이 달아난 사람들 중 하나가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라는 사람이었고, 그에게는 블라디미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이 동생이 바로 훗날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다.자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상당히 전제주의적인 정치를 펼쳐 더욱 강한 차르를 만들었기에 과거에는 그가 아버지의 개혁들을 농노 해방령을 제외하고 모두 철회했다고 보았지만 연구가 많이 진척된 현 시점에서는 그가 선대의 기조를 몇 가지는 철회하되 어느 정도 유지했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상 명재상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세르게이 비테가 러시아의 공업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한 때가 알렉산드르 3세의 치세다. 알렉산드르 3세는 비테를 매우 신임하였고 비테 또한 알렉산드르 3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참고로 비테가 알렉산드르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상술한 기차 탈선 사고. 황제에게 분명히 기차에 문제가 생길 테니 점검을 해야 한다고 직언했으나 그걸 무시했다가 결국 기차가 탈선하고 말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황제는 비테의 능력을 신임하게 되었다.
비테를 비롯해 니콜라이 분게 등 유능한 경제관료들이 활약하며 아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공업화를 이룬 이 시기[13],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경험이 있던 알렉산드르 3세는 이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러시아 육, 해군의 전력증강에 나섰다. 알렉산드르 3세 치하에 러시아 육군은 양적으로 예비군 동원 체제를 정비하여 30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규모에 이르렀고 질적으로도 소화기 면에선 그 유명한 모신나강이 예비 여단까지 보급되고 야포 국산화에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해군 또한 대규모 건함 계획이 실시되어 규모 면에서 세계 1위의 육군과 세계 3위의 해군을 보유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영토가 워낙 넓다 보니 이러한 군사력이 단번에 투사되기는 어려웠다.
대규모의 군비증강과 전제주의적인 국내정치와는 반대로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철저한 평화주의 정책을 고수했으며, 독일 제국의 비스마르크를 개인적으로는 매우 싫어하면서도 삼제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나중에 독일에서 군국주의자인 빌헬름 2세가 집권한 이후에는 독일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데, 이 동맹은 삼국 협상의 밑바탕이 된다. 그의 재위 중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명이 '피스메이커(миротво́рец / mirotvórets, peacemaker)'였다.
반면 알렉산드르 3세 사후에 즉위한 장남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의 전제주의는 그대로 답습했지만 평화에 대한 헌신은 등한시하여, 재위 중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제위와 목숨까지 잃게 된다.
여담으로 알렉산드르 3세는 방계 황족들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황제의 적자 후손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던 대공위[14]를 황제의 친손주까지로 제한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이 역시 위의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제주의적 통치의 일환이었다.
3. 가족관계
아내 다우마 황후와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15] |
- 할아버지 - 니콜라이 1세(1796년 7월 6일 ~ 1855년 3월 2일)
- 할머니 -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1798년 7월 13일 ~ 1860년 11월 1일)
- 아버지 - 알렉산드르 2세(1818년 4월 29일 ~ 1881년 3월 13일)
- 어머니 -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1823년 ~ 1880년 6월 6일)
- 누나 -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1842년 8월 30일 ~ 1849년 7월 10일)
- 형 -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1843년 9월 20일 ~ 1865년 4월 24일)
- 알렉산드르 3세(1845년 3월 10일 ~ 1894년 11월 1일)
- 아내 -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1847년 11월 26일 ~ 1928년 10월 13일)
- 남동생 -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1847년 4월 22일 ~ 1909년 2월 17일)
- 남동생 -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1850년 1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
- 여동생 -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1853년 10월 17일 ~ 1920년 10월 20일)
- 남동생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1857년 5월 11일 ~ 1905년 2월 17일)[18]
- 남동생 - 파벨 알렉산드로비치(1860년 10월 3일 ~ 1919년 1월 24일)[19]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알렉산드르 3세 (Alexander III) | <colbgcolor=#fff3e4,#331c00>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 <colbgcolor=#ffffe4,#323300>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 |
파벨 1세 (Paul I) |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여공작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urg) |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여공작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 |||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 |||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1세 (Louis 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
헤센다름슈타트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Darmstadt) | |||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 |||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Charles Louis, Hereditary Prince of Baden) | |||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공녀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니콜라이 2세 (Nicholas II) | 1868년 5월 18일 | 1918년 7월 17일 | 헤센의 알릭스 공녀[20] 슬하 1남 4녀[21] |
2남 |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Alexander Alexandrovich) | 1869년 6월 7일 | 1870년 5월 2일 | |
3남 |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George Alexandrovich) | 1871년 5월 9일 | 1899년 7월 10일 | |
1녀 |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Xenia Alexandrovna) | 1875년 4월 6일 | 1960년 4월 20일 |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슬하 6남 1녀[22] |
4남 |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Alexandrovich)[23] | 1878년 12월 4일 | 1918년 6월 13일 | 나탈리야 브라소바 슬하 1남 |
2녀 |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Alexandrovna) | 1882년 6월 13일 | 1960년 11월 24일 | |
니콜라이 쿨리콥스키 슬하 2남 |
4. 여담
- 부활절을 맞아 황후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에게 선물하기 위해 파베르제의 달걀을 주문해 제조했다고 한다.
- 청나라 말기 야쿱 벡의 난 시기를 틈타 러시아 제국이 신장 지역을 차지하려고 했던 때의 황제가 알렉산드르 3세였다.
- 러시아의 21세기 군가 <육군과 해군(Армия и Флот)>이 알렉산드르 3세의 발언을 모티브로 창작된 곡이다.
- 프랑스 파리에는 알렉산드르 3세 다리가 있는데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을 기념해서 알렉산드르 3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4.1. 조지 5세와의 공통점
알렉산드르 3세의 장남인 니콜라이 2세가 영국의 조지 5세와 도플갱어처럼 외모가 닮아서 자주 비교되고는 하지만 그것만 빼면 조지 5세는 오히려 이모부인 알렉산드르 3세와의 공통점이 더 많다.- 둘 다 차남으로 태어나서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 둘 다 태자인 형[27]과 우애가 매우 좋았다.
- 둘 다 형이 키가 더 컸다.[28]
- 둘 다 군인이었다가 형이 젊은 나이에 급사하면서 황태자가 되었다.
- 둘 다 원래 사귀는 여자가 있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형의 약혼자[29]를 형사취수해서 결혼했다.
- 둘 다 아버지가 여러 정부를 둔 바람둥이다.
- 둘 다 형의 약혼자와 정략결혼을 했지만 부부 간에 금슬은 좋았다.
- 둘 다 낳은 자녀 수가 6명이고, 그 중 1명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 둘 다 아들 부자다.
- 둘 다 다음 군주는 딸만 있거나, 딸이 아들보다 더 많다.
- 둘 다 몇몇 취미 생활을 제외하면 검소하게 살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지 5세의 윈저 왕조는 지금도 영국의 군주지만, 알렉산드르 3세의 로마노프 왕조는 알렉산드르 3세 사후 다음 군주인 니콜라이 2세 때 러시아 혁명으로 멸망했다.
5. 평가
세르게이 비테 등을 포함한 유능한 관료들을 등용하고, 그들을 신임하여 러시아 제국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려 했으며 국제적으로는 철저한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는 점이 부각되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다만 니콜라이 2세 항목을 알듯이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대표적으로 자신이 건강하다는 이유로 황태자가 성년이 되었는데도 후계자로서의 기초교육을 시키지 않은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통 자식이 다음 왕위 계승자일 때 몇 번 국정업무를 맡게 하거나 군주로서의 책임감과 임무를 수행[30]시키는 등 군주가 되기 위한 훈련을 고3 뺨치게 훈련받는데 알렉산드르 3세는 그런 훈련과 업무를 한 번도 니콜라이 황태자한테 부과하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가져오는데,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자마자 관료들한테 한 말이 “나는 러시아 황제가 되기를 절대 원하지 않는다. 나는 통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심지어 각료에게 말 거는 방법조차 모른다“고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후계자 교육이 엉망이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당연히 교육을 시키긴 했지만 오히려 알렉산드르 3세의 교육이 니콜라이 2세의 미래는 물론 러시아 제국의 멸망의 엄청난 기폭제를 가져다졌다.[31]
알렉산드르 3세 특정상 자유주의 개혁과 정치에 엄청 부정적이며 당연히 입헌군주제는 신에 반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생각은 자식 교육에 엄청 영향을 미치는데, 니콜라이 2세가 갓난아기 때부터 귀가 터질 정도로 "자유주의는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며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는 이 나라에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황태자의 교육자와 가정교사를 임명할 때도 철저히 반동주의 극우 성향의 인물을 임명했다. 알렉산드르 3세가 니콜라이 2세의 교육을 위해 임명한 사람은 당대에도 극우 반동주의자로 유명한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이다.
강하고 권위넘치고 어릴 때부터 반동주의 성격과 성향으로 태어난 알렉산드르 3세와 다르게 니콜라이 2세는 다정하고 서민스러우며 권위 넘치고 무서운 사람은 커녕 어린이처럼 순수하며 황제가 된 후에도 신하와, 심지어는 하인들과도 다정하게 얘기하고 같이 장난도 치고 사진도 많이 찍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가정교사로부터 20년 넘게 교육을 받다보니 니콜라이 2세도 자연스럽게 알렉산드르 3세 못지않은 보수적이며 반동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피의 일요일 사건과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의 황폐화되는 등 러시아 제국이 망하는 지름길이 되었으며 결국 러시아 혁명과 황제 일가족 집단 처형 등 러시아 제국은 물론 니콜라이 2세조자 망하는 원인이 됐다.
즉 알렉산드르 3세는 재위기간에 국내외 정책과 나라 발전에 엄청 기여했고 민생도 많이 살폈으며 그의 재위기간에 러시아는 산업화와 군사력 증강이 엄청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반동주의 성향 및 후계자 교육의 부재 및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가 등극하면서 러시아는 추락하기 시작했으며 후계자 교육 부재로 인해 황제 일가가 라스푸틴 같은 요승에게 휘둘리다가 결국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면서 그의 사상 및 잘못된 교육이 나비효과로 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셈이 되었다.
6. 대중매체에서
- 프랑스-러시아 합작 영화인《시베리아의 이발사(The Barber Of Siberia / Сибирский цирюльник)[32]에서 러시아 육군사관학교의 임관식 때 아들 미샤와 함께 말을 타고 참석한다. 이 때 알렉산드르가 먼저 "반갑다 제군!"라고 인사를 하고 생도들이 "황제 폐하의 건강을 축원합니다!"라고 화답한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갑자기 미샤가 아버지를 따라 "반갑다 제군!"이라고 말하고, 생도들은 다시 "황자 전하의 건강을 축원합니다!"라고 화답한다. 미샤가 한번 더 하려고 하자 아버지 알렉산드르가 황급히 입을 막아버리고, 이를 본 생도들도 웃음을 간신히 참는게 포인트.# 미샤라는 애칭을 볼 때 알렉산드르가 데리고 온 황자는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어 자막 중 일부에서는 이 때 미샤를 지칭할 때 황태자로 번역해서 알렉산드르 3세의 장남이자 후대 계승자인 니콜라이 2세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러시아어인 해당 대사는 분명히 '황자 전하'라고 나와 있다. 영화에서 해당 장면은 1885년이고, 당시 황태자인 니콜라이 2세는 1868년생이므로 이 때는 이미 10대 후반이며 어린 소년이 아니다. 반면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는 1878년생이므로, 영화 속 모습과 나이가 얼추 맞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알렉산드르 3세 역은 감독 니키타 미할코프[33]가 직접 했다.
- 《셜록 홈즈 시리즈》의 단편작 중 하나인 <두 번째 얼룩>에, "해외의 어느 왕이 영국의 최근 정책에 불만을 품고 사적으로 부적절한 서신을 보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 작중에서 명시하지는 않으나 시대 배경 등을 근거로 추론하면 '알렉산드르 3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독일의 빌헬름 2세도 후보에 올라 있긴 하나, 여러 가지 정황상 알렉산드르 3세 쪽이 가능성이 좀 더 높다고.
- 《어쌔신 크리드: 더 폴》에서 등장한다. 보르키 열차 사고가 암살단의 암살 시도 와중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되며 사고 자체는 진짜 사고로 나온다. 193cm에 달하는 키에 운동광, 군인 출신이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훈련된 암살자인 니콜라이 오렐로프를 말 그대로 두들겨 패며 탈선 사고 직후에도 역시나 체격의 우위를 바탕으로 니콜라이를 시종일관 압도한다. 그러나 가족들의 구조 요청을 듣고 그를 살려둔 채 가족을 구하러 떠난다. 이 때 어깨로 무너진 열차 천장을 받치는 그의 괴력 역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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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란드 차르, 핀란드 대공 겸임.[2] 삼남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제외.[3] 독일 측도 알렉산드르 3세의 혐독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1887년엔 알렉산드르 3세가 독일을 치기 위하여 비밀리에 250만에 달하는 병력에 동원령을 내렸다는 헛소문이 돌아 몰트케가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러시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적도 있다.[4] 영어식인 다그마르로도 알려져 있다.[5] 그러나 세르게이 비테의 의견에 따르면 그는 제왕의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실 일개 철도 공무원이었던 그의 직언을 듣고 그를 중용한 인물이 알렉산드르 3세이기도 하다.[6] 말 그대로 완벽한 군주감이었다. 연약했지만 배포가 크고, 자유주의적이었으며, 똑똑했다. 이 무렵 유럽 왕실들 사이에서 문제가 된 여자 문제도 부모가 정해준 약혼녀에게만 충실했기 때문에 깨끗했다.[7] 그의 할아버지 니콜라이 1세(189cm) 와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186cm), 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193cm)도 장신이었다. 정작 장남인 니콜라이 2세는 키가 170cm으로 증조부, 조부, 부친, 숙부에 비해서 키가 작다.[8] 형 니콜라이의 약혼녀.[9] Princess, 러시아에서는 공작인 Kniaz가 영어로 Prince로 번역된다. 이상하게도 황족들은 Velikiy Kniaz지만 Grand Duke로 번역된다.[10] 왕가 간의 혼인은 외교의 성격을 띄는데다, 황태자가 귀천상혼을 하는 것을 용납할 리는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11] 회사 운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도박과 여색, 사치로 상당히 화려하게 살았지만, 결혼한 이후 매우 성실한 사람으로 바뀌어 아내만을 아끼고 사랑했다. 이런 남편에게 마리아는 죽기 전에 작별과 동시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12] 묘하게도 그의 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는 담배는 입에도 안 대고 간편식을 선호했다.[13] 러시아의 인구가 많아 1인당 산업화지수는 여전히 유럽에서 바닥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이때 러시아는 이미 철강 생산량을 포함하여 세계 4~5위를 넘나드는 산업규모를 보유하고 있었다.[14] 일괄적으로 Grand Duke of Russia로 번역되곤 하지만 러시아어로 공작을 의미하는 크냐지가 영어로 Prince로 번역되는 것을 감안하면 Grand Prince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이는 그들도 인지하고 있으나 이미 18세기, 19세기부터 Grand Duke라고 표기해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Grand Duke로 표기하고 있다.[15] 왼쪽에 있는 남자아이는 사남 미하일 대공이고, 미하일 대공 옆에 있는 인물은 아내 다우마 황후이다. 다우마 황후 옆에 있는 인물은 장남 니콜라이 2세이고, 니콜라이 2세 앞에 앉아 있는 인물은 알렉산드르 3세 본인이다. 알렉산드르 3세 안긴 여자아이는 막내딸 올가 여대공이고, 알렉산드르 3세 부녀 뒤에 있는 인물은 장녀 크세니야 여대공이다. 크세니야 여대공 옆에 앉아있는 인물은 삼남 게오르기 대공이다.[16] 알렉산드르 3세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17] 러시아 혁명 중 피살됨.[18]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 공녀와 결혼했다. 이 결혼식에 엘리자베트의 여동생 알릭스가 참석했다가 니콜라이 황태자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연애 끝에 결혼했다. 세르게이가 러일전쟁 중 혁명세력에게 피살된 후 아내 엘리자베트는 수녀가 되어 자선과 봉사로 살았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듬해인 1918년 살해당했다.[19] 러시아 혁명 당시 망명을 시도하다 피살당했다.[20]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다.[21]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22] 펠릭스 유스포프 공비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등.[23] 니콜라이 2세가 황위를 넘기려 했던 남동생이다. 하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을 버티지 못하고 계승을 거부하며 제정 폐지를 수락했고, 이후 비서와 함께 혁명군에 처형되었다.[24]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정치를 폈으며 경제 안정화에 힘썼다는 점이다. 그러나 2022년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행하면서 평화주의를 지향했던 자신의 롤모델과 정반대의 길을 갔다.[25] 막내숙부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아내.[26] 체칠리에는 어머니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가 하버라는 이름의 유대인 은행가에게서 낳은 사생아라는 소문이 평생 따라다녔다.[27]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영국의 앨버트 빅터 왕태손[28] 알렉산드르 3세의 형 니콜라이 황태자의 키는 193cm, 조지 5세의 형 앨버트 빅터 왕태손의 키는 188cm로 190cm의 알렉산드르 3세, 168cm의 조지 5세보다 키가 크다.[29] 러시아 제국의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영국의 테크의 메리[30] 참고로 조선은 한술 더 떠서 원자 혹은 세자로 책봉되는 순간 세자위종사란 기관을 설치해 각 대신들이 직접 나서서 세자를 교육하는 등 국가 차원의 중대사로서 세자 교육을 철저히 했다. 실제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과 숙종은 어릴때부터 익혀온 왕세자 교육 덕에 섭정 하나 없이 국정을 할 수 있었다.[31] 전제정이야, 당시 러시아 자유주의는 귀족과두제 성향도 있어서 애매한 감도 없진 않지만 이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정치기술은 전혀 못 가르쳤다. 한마디로 꼭 가르쳐야 할 부분들은 다 빼먹는 바람에 최악의 시너지를 냈다는 뜻.[32] 한국에서는《러브 오브 시베리아》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33] 소련 국가와 러시아 국가를 작사한 세르게이 미할코프의 아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