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4E6E7><colcolor=#000000>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Великий князь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России | ||||
이름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Романов) | |||
출생 | 1866년 4월 13일 | |||
러시아 제국 캅카스 부왕령 티플리스 | ||||
사망 | 1933년 2월 26일 (향년 66세) | |||
프랑스 로크브륀카프마르탱 생 테레즈 빌라 | ||||
배우자 | 러시아의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1894년 결혼) | |||
자녀 | 이리나[1], 안드레이, 표도르, 니키타, 드미트리, 로스티슬라프, 바실리 | |||
아버지 | 러시아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 |||
어머니 | 바덴의 체칠리에 공녀 | |||
형제 | 니콜라이, 아나스타샤, 미하일, 게오르기, 세르게이, 알렉세이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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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대공. 러시아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바덴의 체칠리에의 6남 1녀 중 4남이다. 애칭은 산드로.덴마크의 알렉산드리네 왕비, 독일 제국의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외삼촌이며, 프레데리크 9세와 루이스 페르디난트의 외외종조할아버지(외할머니 아나스타샤의 남동생)다.
외가쪽으로는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고종사촌이자 외외당숙이다.[2]
처남이자 당조카인 니콜라이 2세와 매우 가까워 니콜라이 2세의 조언자 역할도 했다.[3]
2. 생애
2.1. 어린시절
아버지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캅카스 총독을 하고 있을 당시, 지금의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미하일 대공과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4]의 4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3명의 형들인 니콜라이, 미하일, 게오르기와 유일한 누나 아나스타샤가 있었고 아래로 두명의 남동생들인 세르게이와 알렉세이가 있었다.아버지 미하일 대공은 니콜라예비치 세대(니콜라이 1세의 아들들)에서는 유일하게 아내와 금슬이 끝까지 좋았던 대공이었으며, 자녀들에게도 다정다감했지만 어머니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는 매우 엄격해서 자녀들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유일한 누나인 아나스타샤는 외모는 올가 표도로브나와 똑같이 생겼다시피 어머니를 쏙 닮았지만, 성격은 반대로 낙천적이고 다정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르를 비롯한 형제들과 친하게 지냈다.
2.2. 해군 생활
성인이 된 이후 해군으로 진로를 정했고, 1885년 해군사관학교 사관후보생 과정을 졸업했다. 일본 제국, 브라질 제국을 친선 방문하기도 했다. 1896년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채용된 이후에는 전술 이론을 담당했다.1901년부터 1902년까지 러시아 제국 흑해함대의 전함 로스티슬라브의 함장을 맡았고, 1903년에는 흑해함대 하급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일어난 러일전쟁 동안에는 무장 상선 선단의 지휘관을 맡았다. 전쟁 이후 해군참모본부 창설에 주력하는 한편 해군 함대의 재편성, 신형 전함 건조를 주장했다. 1909년에는 해군 중장 계급을 받았다. 1910년에는 세바스토폴 교외에 항공 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러시아 제국 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16년 12월에는 러시아 제국 공군 감사관으로 임명되었다.
2.3. 결혼 생활
1894년에 친사촌인 알렉산드르 3세의 장녀이자 본인에게는 5촌조카(당조카)인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와 결혼했다. 신혼여행 중에 친사촌형이자 장인인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했다.
부모와 똑같이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같은 세대의 황족들 중에서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과 함께 유일하게 아들을 6명 이상 두었다.
그러나 행복했던 결혼 생활도 1907년에 파탄났다. 이미 부부는 권태기가 왔고, 알렉산드르 대공은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정부들을 두었다. 이에 크세니야 역시 크게 반발하여 똑같이 정부들을 두었다. 보통의 다른 대공비라면 참고 살았지만 크세니야는 본인도 황제의 딸이자 전 황녀이며 직계 여대공이기에 참고 살지 않았다.
2.4. 말년과 사망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5] 파리에 거주하면서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태자이자 섭정이었던 하일레 셀라시에와도 교류했다.
고고학에 흥미를 가졌기에 각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1933년 향년 66세의 나이로 프랑스 로크브륀카프마르탱 생 테레즈 빌라에서 사망했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알렉산드르 대공의 자녀들은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의 자녀들과는 달리 모두 무사히 망명했으며 다들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으면서 현재까지 자손이 이어져오고 있다. 또한 알렉산드르와 크세니야의 자녀들은 친가와 외가 모두 로마노프 왕조인 동시에 직계인 알렉산드르 3세의 외손주들이기도 했기에, 현재 로마노프 가문의 당주 자리를 놓고 알렉산드르 2세의 직계 자손들과 경쟁(?)하고 있다.[6]장신의 미인들이 많은 걸로 유명한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답게 알렉산드르의 자녀들도 미남미녀였다. 일단 고명딸 이리나는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상당한 미녀였고 6명의 아들들 중에서는 5남인 로스티슬라프가 미남이었다고.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공녀 (Princess Irina Alexandrovna) | 1895년 7월 15일 | 1970년 2월 26일 | 펠릭스 유수포프 슬하 1녀 |
1남 |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Andrei Alexandrovich) | 1897년 1월 24일 | 1981년 5월 8일 | 엘리사베타 디 사소 루포 슬하 2남 1녀 |
나딘 맥두걸 슬하 1녀 | ||||
2남 | 표도르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Feodor Alexandrovich) | 1898년 12월 23일 | 1968년 11월 30일 | 슬하 1남 1녀 |
3남 | 니키타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Nikita Alexandrovich) | 1900년 1월 17일 | 1974년 9월 12일 | 마리아 보론초바다시코바 여백작 슬하 2남 |
4남 |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Dmitri Alexandrovich) | 1901년 8월 15일 | 1980년 7월 7일 | 슬하 1녀 |
셰일라 맥켈라 치좀 | ||||
5남 | 로스티슬라프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Rostislav Alexandrovich) | 1902년 11월 24일 | 1978년 7월 31일 | 슬하 1남 |
슬하 1남 | ||||
헤트비히 마리아 게르트루트 에바 폰 차푸이스 | ||||
6남 |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공자 (Prince Vasili Alexandrovich) | 1907년 7월 7일 | 1989년 6월 24일 | 나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골리치나 슬하 1녀 |
[1] 펠릭스 유수포프의 아내다.[2] 막시밀리안의 어머니이자 알렉산드르의 외숙모 마리야 막시밀리아노브나는 다름아닌 아버지 미하일 대공의 외조카로 알렉산드르의 고종사촌 누나이기도 하다.[3] 호딘카의 비극 사건 당시 프랑스 대사관 무도회에 참석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4] 바덴의 체칠리에의 러시아식 이름.[5] 반면 아내인 크세니야는 영국으로 망명했다.[6] 알렉산드르의 3남 니키타 알렉산드로비치는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알렉산드르 2세의 손자)의 외아들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의 황제 주장에 반대하기도 했다.[7] 알렉산드르 2세의 손녀(막내아들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귀천상혼으로 낳은 1남 2녀 중 장녀). 표도르에겐 부계로는 육촌이고 모계로는 오촌이다.